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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호의 우리말 바로 알기] 부드럽게 표현하기(완곡어법)

 

 

우리말은 참으로 존대어가 잘 발달해 있다. 그러다 보니 반말하는 것을 가지고 다투게 된다. 노인이라고 해서 젊은이들한테 함부로 반말을 할 수도 없다. “나이가 깡패”라는 말이 있다. 60 고개를 넘으면서 젊은이들에게는 친근감의 표시로 반말을 섞기도 하는데, 이런 표현을 하면 아내는 바로 지시사항(?)을 내린다. 아무리 젊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반말하면 싫어하니 무조건 존대어를 쓰라는 것이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하는 훈아 형님의 하소연이 바로 오늘의 우리를 대변해 주는 것 같다. 오랜 세월 교단에 있다 보니 모두가 제자 같고, 자식 같다. 그러니 친한 척하고 반말 좀 하면 어떨까 하지만 듣는 사람들은 그것이 아닌가 보다. 요즘은 카페를 가더라고 경어를 쓴다. 그러니 다툴 일은 적어지는 것 같다. 사실 필자는 이런 말로 인한 다툼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주변에서 다툼이 일어날까 봐 미리 약(?)을 치는 것이다.

 

화용론이라는 말이 있다. 화용론(話用論,Pragmatics 또는 어용론)은 의사 소통시의 발화에 대한 언어론이다. 화자와 청자의 관계에 따라 언어 사용이 어떻게 바뀌는지, 화자의 의도와 발화의 의미는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연구도 다룬다.(위키백과 재인용) 우리말에서는 화용론이 참 중요하다. 왜냐하면 어법에 어긋나는 표현이 많기 때문이다. “문 닫고 들어와.”, “꼼짝말고 손 들어.”, “물은 셀프입니다.” 등이 사실상 어법을 따지면 바른 표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다 알아듣는다. 다만 이제 막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은 “꼼짝 않고 어떻게 손을 들어요?” 하고 반문한다. 사실 꼼짝 안 하고 손을 들 수는 없지만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모두 “손 들고 꼼짝 마!”로 인식하다.

 

그런가 하면 부드럽게 표현하려고 어휘를 가려서 쓰기도 하고, 표현을 달리 하기도 한다. 그런 것을 우리는 완곡어법(Euphemism)이라고 한다. 같은 말인데도 듣기가 거북스러운 말이 있는가 하면 듣기 좋은 말이 있다. 듣는 사람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말을 쓰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김종선, <울산여성신문> 재인용) 흔히 변소를 일컬어 ‘화장실’이라고 하든지, ‘해우소’라고 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러한 완곡어법이 가장 잘 발달한 나라가 우리나라가 아닌가 한다. 해고라는 표현 대신 ‘구조조정’이라고 한다. 필자도 2005년 학교의 구조조정으로 애를 먹은 적이 있다. 물론 해고되지는 않았지만 많은 학과를 통폐합하면서 힘든 과정을 겪기도 했다.

 

우리는 상점에 갔을 때 이런 완곡어법을 잘 구사한다. “맘에 드는 물건이 없어요.”라고 하면 점원이 상처를 받을까 봐 “한 번 둘러보고 올게요.”라고 하며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이것이 바로 완곡어법의 대표적인 경우다. 이렇게 완곡어법을 씀으로 해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하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완곡어법보다는 직설적인 표현이 많아지는 것 같아서 불편하다. 특히 정치의 계절이 다가와서 그런지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없고, 무조건 상처를 줘서 흔들어 떨어뜨리고자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완곡어법은 고사하고 은어나 비속어 등이 난무하는 것을 볼 때 한국어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가슴이 아프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 나그네에 대한 친절, 약한 사람에 대한 보살핌 등이 우리 민족의 좋은 점인데, 정치판에서 2등은 없다는 말이 있다 보니 무조건 1등 하려고 상대방을 비방하고 ‘아니면 말고 식의 폭로전’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설득시키든지 아니면 감성적으로 다가가든지 하면 좋을 것을 굳이 얼굴 붉히는 상황까지 연출하는 것을 보면 필자가 우리말 공부를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 비방과 음해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사실만 보도해야 한다. 요즘 유튜브를 보면 “큰일 났다. 00은 이제 끝났다.” 등의 표현으로 낚시질(?)을 하는 것을 많이 본다.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보게 되지만 날이 갈수록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더 이상 보지 않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화용론은 의미론의 한 분야이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언제든지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가능하면 상대방을 배려하는 표현을 쓰는 습관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필자는 늘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이고! 옷이 작아졌네.” 사실은 옷이 작아진 것이 아니라 아내가 살이 찐 것인데……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102908274536893#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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