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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에 다가서자 촘촘하게 채워진 ‘아파트 병풍’이 나타났다

등록 :2021-11-02 04:59수정 :2021-11-02 09:34

 
원종-인헌왕후 봉분 사이 검단새도시쪽 바라보면 시야 막혀
장릉 관리직원 “계양산 자락 선명했지만 지금은 콘크리트만…”
500m내 아파트 19개동 철거해도 주변 단지 탓 복원 어려워
 
조선 16대 국왕인 인조의 아버지 원종(1580~1619)과 부인 인헌왕후(1578~1626)의 무덤 사이로 ‘왕릉뷰 아파트’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이정하 기자
조선 16대 국왕인 인조의 아버지 원종(1580~1619)과 부인 인헌왕후(1578~1626)의 무덤 사이로 ‘왕릉뷰 아파트’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이정하 기자
 

나지막한 산봉우리 2개 사이로 치솟은 이른바 ‘왕릉뷰 아파트’는 마치 ‘병풍’을 둘러놓은 듯했다. 지난 27일 오후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장릉산 중턱에 자리한 ‘김포 장릉’에 다다르자 아파트 골조와 타워크레인이 눈에 들어왔다. 왕릉뷰 아파트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 중 하나인 ‘김포 장릉’(사적 202호)이 있는 문화재 보존지역에서 문화재청의 심의 없이 건축해 논란인 인천 검단새도시 내 3개 건설사의 아파트 조망을 빗대 부르는 말이다. 장릉은 조선 16대 국왕인 인조의 아버지 원종(1580~1619)과 부인 인헌왕후(1578~1626)의 무덤이다.

 

나무가 우거진 고즈넉한 오솔길을 따라 300여m 걸었다. 곧 도착한 정자각(제사를 지내는 곳) 주변에서 방문객이 모여 웅성웅성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근 김포 한강새도시에서 왔다는 방문객 박아무개(50대)씨는 “요즘 뉴스에서 왕릉뷰 아파트가 문제라고 해서 찾았는데, 여기에선 건물 옥상 조금과 타워크레인이 살짝 보이는 정도”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실 봉분이 있는 왕릉까지는 방문객의 접근이 금지된 ‘금단의 땅’이다. 장릉관리소의 직원의 안내를 받아 정자각보다 높은 곳에 있는 봉분에 가까워지면서 고층 아파트로 빽빽하게 채워진 광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원종과 인헌왕후 봉분 사이에서 검단새도시 쪽을 바라보면 시야를 가로막은 병풍이나 다름없었다. 장릉관리소 직원은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는 계양산 자락이 선명하게 보였다”며 “순식간에 아파트가 올라가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콘크리트만 보인다”고 했다.

 

 ‘왕릉뷰 아파트 논란’ 왜 불거졌나
 

왕릉뷰 아파트 논란은 문화재청이 지난 7월28일 검단새도시에서 아파트를 짓는 대광건영(735가구)과 대방건설(1417가구), 금성백조(1249가구) 등 3개 건설사에 공사 중지 명령을 내리면서 불거졌다. 2017년 개정된 문화재보호법을 따르면 문화재 반경 500m 안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에서 높이 20m(건물 7층가량) 이상의 아파트를 지으려면 개별 사전 심의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들 건설사가 이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장릉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에서 3개 아파트단지까지 저촉되는 최단거리가 213~395m 정도다. 아파트 3개 단지 전체 49개 동(3401가구) 가운데 19개 동(1400여가구)이 문화재보호법 적용을 받는다. 그런데 3개 건설사는 2019년 초 인천 서구청으로부터 주택건설사업계획 승인을 받아 현재 최고층 20~25층 높이의 골조공사를 마친 상태다.

 

앞서 문화재청은 지난 5월 장릉 주변 김포지역의 다른 현장 조사에서 해당 3개 건설사의 아파트 건설을 확인했다. 2년여 동안 몰랐다는 얘기다. 문화재청은 지난 8월, 3개 건설사와 인허가를 내준 인천 서구청을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2009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 40기 중 하나인 김포 장릉. 이정하 기자
2009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 40기 중 하나인 김포 장릉. 이정하 기자
 
 건설사 “현상변경허가 땅 사고, 건축 승인도 받았는데 억울”
 

3개 건설사는 2017년 6월 인천도시공사로부터 택지개발 허가를 받은 땅을 매입했다. 이 땅은 인천도시공사가 2014년 8월 김포시로부터 택지개발 허가를 받은 곳이었다. 인천도시공사는 당시 용적률 180% 이하에 최고 층수 25층 이하로 인가를 받았다. 토지에 대한 허가제한 등을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토지이용계획확인원’에도 검단새도시 쪽은 ‘문화재보존영향 검토대상구역’으로 표시돼 있지 않았다. 관할 인천 서구가 변경된 내용을 반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개 건설사는 이를 근거로 문화재 현상변경 허가를 이미 받았거나 문화재보호법 저촉사항을 몰랐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건설사 중 하나인 금성백조의 한 관계자는 “경기 김포시와 인천 서구가 행정구역 관할이 달라서 생긴 문제일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우리는 강화된 규제를 인지하지 못했고, 적법한 인허가 절차를 거쳐 시공했다”며 “분양을 모두 마친 상태인데 난감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택지개발사업 시행 과정에서 받은 현상변경 허가와 주택사업계획 승인은 별개이며, 2017년 1월 문화재보호법 개정 고시 이후 주택사업계획 승인을 받은 만큼 이 법 적용 대상이라고 설명한다.

 

 500m 내 아파트 철거해도 경관 복원 어려워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 500m 내 문제가 된 아파트 19개 동을 모두 철거한다고 해도 예전 경관을 되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3개 건설사가 철거를 전제로 시뮬레이션한 결과, 500m 내 아파트를 철거해도 해당 아파트 3개 아파트단지는 물론 주변 다른 아파트단지도 여전히 장릉 경관에 노출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이병훈 의원(더불어민주당, 광주 동구남구을)은 국정감사에서 “문화재보호구역 밖의 검단새도시 지역 높이 88m~124m에 이르는 초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서면서 장릉의 경관은 훼손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영국이 런던 세인트폴 성당의 경관을 보호하는 방식처럼 거리와 상관없이 조망점을 설정해 보호전망 구역을 두고 관리하는 방안 도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장릉 앞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에서는 ‘왕릉뷰 아파트’가 보이지 않는다. 울창한 숲이 자취를 감추는 겨울이면 아파트 상층부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장릉관리소 직원은 말했다.
장릉 앞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에서는 ‘왕릉뷰 아파트’가 보이지 않는다. 울창한 숲이 자취를 감추는 겨울이면 아파트 상층부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장릉관리소 직원은 말했다.
 
 “조선왕릉 40기에 미칠 영향 고려해야”…건설사 제안 ‘보류’
 

3개 건설사는 10월 초 건물 높이는 그대로 둔 채 외벽 색상과 마감 재질 변경, 장릉 주변 환경 정비사업 등의 개선안을 문화재청에 제시했다. 하지만 문화재위원회는 10월28일 궁능·세계유산 분과 합동심의 회의를 열어 개선안에 ‘보류’ 결정을 내렸다. 문화재청은 “제안만으로는 역사문화적 가치를 유지하기 어려우므로 추후 소위원회를 따로 꾸려 검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봤다”고 했다. 이어 “소위를 통해 아파트단지별 시뮬레이션 등을 통해 장릉 경관에 미치는 영향 등을 분석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문화재위원회는 김포 장릉을 포함해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는데, 장릉 경관 훼손이 자칫 조선왕릉 세계문화유산 지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왕릉의 경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당시 유교문화에 기반한 풍수의 원칙에 따른 자연경관 보존 등이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았다. 앞서 문화재청은 경찰에 낸 3개 건설사에 대한 고발장에서 “여러 개로 구성된 연속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은 무덤 18곳의 40기 모두 완전성을 갖출 때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라며 “아파트 공사로 조망이 가로막혀 장릉이 가진 세계유산적 가치가 훼손됐다”고 적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실제 지난 7월 마구잡이 개발로 해양경관이 훼손된 ‘영국 리버풀 해양산업도시’를 세계유산 목록에서 삭제하기도 했다. 1978년 세계유산협약 개시 이래 현재까지 등재된 1154건의 세계유산 가운데 리버풀을 포함해 모두 3건이 세계유산 목록에서 삭제됐다.

 

 철거, 존치 어느 쪽이든 거센 후폭풍 불가피
 

문화재위원회의 결론이 어떻게 날지 알 수 없지만, 상당한 후폭풍이 예상된다. 현재 높이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다른 대안이 제시되면 ‘형평성’ 문제가 불거지고, 위반 건축물 철거 명령이 내려지면 입주 예정자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책임 소재를 따지기 위한 각종 소송도 불가피하다.

한편, 문화재청의 고발 사건을 수사 중인 인천서부경찰서는 서구청 등을 압수수색하는 등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인허가권을 가진 서구청과 건설사들이 장릉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을 인지하고 있었는지가 수사의 핵심이다. 문화재청은 택지개발사업 당시 문화재 현상변경 절차를 진행한 사실이 있고 3개 건설 현장 모두 매장문화재 지표조사 대상이어서 주변 문화재 존재 여부를 모를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정인섭 서구 주택팀장은 “‘토지이용계획확인원’은 물론 문화재 관련 부서에서도 문화재 관련 저촉되는 사항이 있는지 파악했는데 없었다”며 “구 차원에서는 인허가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했다.

 

이정하 기자 jungha98@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area/capital/1017560.html?_fr=mt1#csidxaa51c094d56230c963828e4dcc4fe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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