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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와 종편의 '쓰레기장'에서 '광주'를 구하는 법!

[광주, 그 기억의 내전] 김정한의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

천정환 <1960년을 묻다> 공저자·성균관대학교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8-09 오후 6:15:45

 

 

1. 들어가며

2013년은 33년째를 맞는 광주 항쟁사에서 특별한 한 해가 될 만하다. 정권을 연장하여 기고만장해진 기득권 세력과 '일베' 유의 우익에 촉발된 '기억의 내전', 그리고 그 기억 전쟁의 배경이 되는 '비청산'과 '반복의 상태' 덕분이다. 1980년 이래 이렇게 광주의 정신과 인간이 심하게 모독당한 적은 없었다.

얼마 전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일베'의 젊은이들을 '쓰레기'라 불렀다 한다. 한 사회의 시민이 다른 시민(그것도 젊은이들)을 '쓰레기'라 불렀다는 것은 비극이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국정원 사건에서 볼 수 있듯, 이명박 정권 이후 우리 사회의 일각은 분명 심각하게 쓰레기장화 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는 역사의 상처와 기억을 잘못 다루어, 묵은 상처와 문제가 치유되기는커녕 더 크게 덧나고 곪아가는 사정이 한몫하고 있다.

정치학자 김정한 같은 연구자가 하는 학문은 근과거의 기억과 상처와 대결한다. 김정한은 1980년 이래의 민중 저항과 운동사를 연구하며 꾸준하게 성과를 상재해 온 연구자이다.

여러 군데 밑줄을 그으며 김정한의 책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소명출판 펴냄)를 읽었다. 책은 새삼 사회과학의 중요성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런 연구는 근자에 새로운 지향점으로 부각되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융합으로서의 '사회인문학'의 방법이나 문제의식에도 잘 부합하는 듯하다. '현재'와 현실을 상대하는 이런 학문은 공공적이며 실천적이다.

이른바 보수논객이라는 분들과, 권력에 중독되어 여전히 미망에 잠겨있는 일부 경상도 사람들, 그리고 1980년 5월 광주의 무장 항쟁에 대해 의문을 가진 젊은 세대가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를 사서 정독해 보길 진심으로 바란다. 한국어로 된 언어정치의 하수종말처리장 같은 '일간베스트'나 종편 프로그램이 아니라, 바로 이런 책에 1980년 광주의 학문적·객관적 진실이 있다.

2. 5.18 광주의 폭력 문제
 

▲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김정한 지음, 소명출판 펴냄). ⓒ소명출판

말이 나온 김에 먼저 5.18 광주의 폭력에 대한 김정한의 논변부터 듣고 가자. 즉,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전두환의 사병으로 전락한 군이 상상을 초월한 잔인무도한 폭력을 행사하여 시민과 학생들을 살해하고, 이에 대해 시민들이 저항하기 시작하고, 5월 20일 계엄군이 시위 군중들에게 집단발포하자 급기야 시민들이 무기고를 열어 자발적으로 무장하고 시민군으로 조직하여 저항한 사실. 그리고 잠시 물러갔던 계엄군이 5월 27일 다시 전남도청을 폭력으로 장악하러 왔을 때, 끝까지 투항하지 않고 항쟁한 일. 이 과정에서의 폭력과 폭력의 맞부딪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보수 세력과 우파, 그리고 좌파의 일부도 이 맞부딪힘을 대칭적인 폭력의 대결로 머릿속에서 상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전혀 두 힘은 비대칭적이었다. 쉽게 말해 정규군 특수부대인 계엄군의 무력에 시민군의 폭력을 대등한 것으로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다 아는 통계도 거론해야 한다. 공식 집계에 의하면 5.18의 열흘 동안 죽은 광주 시민은 166명이었는데, 군인은 23명 사망했다. 군인 사망자 중에서 광주 시민들의 총격이나 공격 행위로 인한 사망자는 8명이다. 다른 사망자 중 13명은 5월 24일 공수부대와 전교사 병력이 광주시 외곽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오인 교전하여 사망한 희생자들이며, 나머지는 차량이나 오발에 의한 사망자이다. 2007년에 국방부 과거진상규명위원회가 확인한 사실이다.

여러 군데 무기고를 털어 끝까지 저항하고 북한군 특수부대까지 개입했다던 '폭도'들의 실력이나 화력은 '국군'에 비하면 형편없었던 것이다. 시민의 저항권 자체를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우파는 물론, 무장봉기론 등을 통해 이 싸움의 의미를 전유하려 했던 좌파 일부의 논리와 실제의 항쟁은 달랐던 것이다. 한나 아렌트도 이런 점을 지적했다는데 (윤리적으로 정반대이겠지만) 물리적으로는 거의 언제나 민중과 시민의 봉기는 국가권력과 자본이 보유한 폭력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여순이든 4.3이든, 심지어 스페인 내전이든 말이다. 민중과 시민의 힘은 다른 데서 나와서 국가와 자본의 힘을 극복한다.

그리고 김정한의 논의에서 더 결정적으로 중요하고 새로운 것은, 시민군의 무장 저항이야말로 무정부적 폭동이나 대항폭력이 아니라 '반폭력'으로 해석가능하다는 것이다. 광주의 시민군들이 스스로 바랐던 것은, 무장 항쟁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윤리적이고 평화적인 사태 해결이었으며, 결국 폭력을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의 조직과 무장은 역사상 그 어떤 민병대의 수준에도 못 미쳤고, '무장'이라는 말을 쓰기에 미안하게 평화적이었다. 그들은 그런 수준에서 자발적으로 총을 들었고 또 내려놓았던 것이다. 시민군은 1980년 5월 26일 저녁에 도청 안에 남은 어린 학생들을 돌려보냈고, 그들 중 누구든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총을 내려놓고 싸움의 현장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폭도'가 아니었음은 물론 제대로 된 '군'도 아니었다. 그러나 평화적인 해결은커녕 폭력의 종식이 불가능해졌을 때, 그들 시민군이 택한 것은, 굴종이 아니라, 죽음을 통한, 일방적인 숭고한 패배였던 것이다. 패배를 통해 그들은 자신의 숭고한 이념과 평화를 성취했다.

요컨대 전두환 일당의 반란군에 맞서 무장 대결했던, 끝까지 도청에 남아 죽음으로써 자신들의 도덕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고수했던 시민군의 폭력이야말로 '반폭력'이며, 우리가 저항의 폭력 문제를 생각하는 틀이어야 한다는 저자의 논의에 십분 동감한다. 저자는 대항폭력론과 비폭력론의 한계를 동시에 지양하며, 이를 아렌트, 발리바르, 지젝 등의 철학자들의 논의와 광주의 실제 상황에 비추어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고 보인다. 직접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윤상원(시민군 지도자-인용자)이 궁극적으로 원한 것은 피를 흘리지 않는 평화적인 수습과 해결이었다. 최후의 항전은 5·18의 평화적인 해결의 길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일 뿐이었다. 시민군은 계엄군의 잔혹한 폭력에 맞서는 극히 어려운 상황과 국면에서도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반폭력 정치의 계기들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했다."(223쪽)

이어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이며, 우리가 광주를 통해 깊이 새겨야할 논리라고 생각된다.

"5.18 광주 항쟁에서 나타난 시민군의 무장투쟁을 정치 혁명 모델과 결합해 재해석한 1980년대 사회운동은 대항폭력을 과도하게 특권화했으며 이 과정에서 반폭력의 문제 설정은 소실되었다. 오늘날 5.18의 무장투쟁을 재성찰할 때 부각되어야 하는 것은 그 정당성에 대한 반복적인 변호가 아니라, 불가피하게 무장투쟁이 벌어진 상황에서도 항쟁 지도부와 시민군이 필사적으로 견지하려고 했던 반폭력의 정치이다." (224쪽)

대중 봉기에서의 폭력의 변증법은, 비폭력주의나 대항폭력론의 당위적인 문제의식을 넘어서며 동시에 더 나아가야 한다는 데 존재 이유가 있다. 아래로부터의 힘과 윤리로서 역사를 진보하게 하는 대중 봉기의 근원적 원리는, 불가피한 폭력으로써 반폭력/평화를 성취하거나, 비폭력으로 지배의 폭력을 이겨 넘어야 하는 것이다. 양자는 다르고도 같다. 이번 희망버스 문제에서도 그렇지만, 우리는 대개 대중이나 저항자들이 쓰는 폭력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특히 그 윤리성과 근본적인 '반폭력'성을 말이다.

3. 광주 항쟁의 이데올로기 문제
 

▲ <오월의 사회과학>(최정운 지음, 오월의봄 펴냄). ⓒ오월의봄

폭력 문제부터 거론했지만 김정한이 이 책을 통해 성취한 것은 단지 그뿐만이 아니다. 김정한은 광주 항쟁의 이데올로기, 시민군의 주체성 등을 통해 '대중 봉기'라는 개념으로 광주 항쟁을 재정초하고, 최정운의 저 유명한 <오월의 사회과학>(오월의봄 펴냄)이나 조정환의 <공통도시>(갈무리 펴냄) 같은 새로운 광주 항쟁에 대한 해석 담론과 대결한다. 이 논점을 다 다룰 지면의 여유가 없기에, 광주 항쟁의 이데올로기 문제만 논의하여 서평자로서의 임무를 할까 한다.

이미 김정한의 대중 봉기 개념과 폭력 문제에 대한 책의 큰 논지에 동의하며 그의 가르침을 따른다 했지만, 광주 항쟁의 이데올로기에 관련된 세론에 대해서는 의문점을 제기하고 싶다. 물론 이 같은 의문은 광주 항쟁에 관한 해석과 연구가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 것이며, 특히 그 열흘간의 문화정치는 여전히 더 분석되고 해석될 여지를 갖고 있다는 점과 관련된다. 기억은 점점 굳어져가고 또 지워져가고 있지만, 그날의 시민들이 무슨 노래를 부르고, 어떤 시를 쓰고, 무슨 내용이 담긴 삐라를 만들고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한 연구는 더 필요하다. 또 실제로 그런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광주 항쟁의 이데올로기에 관해 저자는 우선, "대중 봉기에서 대중들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투쟁"을 시작하며 "대항 이데올로기는 대중 봉기의 '사후 효과'로서 출현한다는"(76쪽) '연구가설' 하에 광주 시민들이 근거했던 이데올로기가 '자유민주주의'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가설은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증명'된다. 광주 시민들이 봉기의 전 과정에서 철저히 애국가와 태극기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으며, 항쟁의 행동과 과정이 지배 이데올로기(애국주의와 반공주의)를 초과하는 것을 감당하는 데 힘겨워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오히려 계엄군이 태극기를 차량에 달고 다니는 사람을 '빨갱이'로 몰기도 했다. 이 역설적 상황은 진실로 전두환 일당에 의해 동원된 계엄군이야말로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의의 역도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광주 시민들 스스로 빨갱이로 몰리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심지어 '간첩'이 항쟁에 개입·침투할까 서로 의심하며 전남도청에 조사과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래서 광주 항쟁의 이념적 지향은, 대한민국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자유민주주의로부터 출발하여 그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해석된다. 시민들이 봉기 과정에서 추구한 것도 결국은 이상적인 자유민주주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우선 '간첩 침투'를 운운하거나 광주 시민을 '빨갱이'로 매도하고 싶어 하는 극우나 지역 차별주의자들이 새겨봐야 할 항쟁의 진실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이 같은 해석이 좀 과도한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광주 항쟁의 이데올로기를 '자유민주주의'로 귀속시키기 어렵고, 저자의 '자유민주주의'의 개념 적용도 그리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1) 한국에서의 자유민주주의의 기능과 용어법의 역사. 이 글에서 자유민주주의(혹은 자유주의)에 관한 이론이나 논쟁을 거론할 여유도 없고 이를 적절히 다룰 능력도 안 되지만, '자유민주주의'는 한국에서는 대중의 지향이나 저항에 대한 시니피앙이 되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2011년에 뉴라이트 학자들 때문에 벌어진 '자유민주주의 논쟁'에서 보수 진영은 '민주주의' 앞에 굳이 '자유'라는 용어를 붙여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이상록이 적절히 해석했다. 그것은 한국 극우·보수 세력이 한편으로 "냉전 시대에 구축되어온 자유민주주의 개념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탈냉전 시대의 개념으로 업그레이드 시키려는" 의도였다. 대한민국에서 사용돼온 자유민주주의의 "'자유'의 개념 뒤에는", 분명 냉전의 오랜 그림자와 함께 "자본주의에 복무할 주체의 형상이 놓여있는 것이다."(이상록,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그 불편한 동거에 대하여', <내일을 여는 역사> 46호, 2012년 봄) 또한 문지영 등의 정치학자도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저항의 언어이기보다는 지배의 언어로 더 중요한 기능을 해왔고, 무엇보다도 그 자체가 자본주의와 짝을 이루면서 발전해왔다고 논했다.(문지영, <지배와 저항-한국 자유주의의 두 얼굴>(후마니타스 펴냄) 참조)

사실 우리는 광주 항쟁의 이데올로기를 규정할 자료를 충분히 갖고 있지는 않다. 시민군이나 항쟁의 주체가 한국사회의 성격이나 진로에 대해 어떤 상을 말하지 않았거니와 그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은 신군부의 군사 반란과 정권 탈취 기도에 맞서, 민주주의의 회복을 주장하고 싸웠다. 중요한 점은 항쟁의 과정에서 시민과 항쟁 주체의 의식과 행동이 한편 요동하고 성장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의식과 행위의 동학 전체를 냉전과 지배의 언어인 '자유민주주의'로 지칭하거나 귀속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또한 서로를 혹 간첩이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유신 체제의 폭압을 겪은 시민들의 레드콤플렉스 앞에서의 공포와 도피마저 '자유민주주의에의 지향'이라 해석한 것은 아무래도 과도하다.

만약 자유주의와 광주 항쟁의 이념이 통한다면, 그것은 저항적·진보적 자유주의에 더 가까운 것이라 해석해야 할 것 같고,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국사에서 진보적 자유주의가 보여주었던 시민적-정치적 자유에 대한 관심은 서구적·고전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민주적 공화주의적 관점에서만 정당하게 포착할 수 있다고 주장한 관점이지 싶다. (장은주, '한국 진보적 자유주의 전통의 민주적-공화주의적 재구성', 사회와철학연구회, <사회와철학> 23호, 2012년 4월, 이상 자유주의에 대한 논의는 김현주, '1960년대의 '자유'와 민주주의/근대화주의'(AKSE 2013 발표문)에서의 정리에 도움을 받은 것임을 밝혀둔다.)

따라서 굳이 하나의 개념으로 말해야 한다면 (저자가 이미 의식하고 있는 듯하지만) 광주 항쟁의 이념적 지향을 '시민적 공화주의(정근식)'나 '애국적 공화주의(장은주)'라 규정하는 편이 더 적실해 보인다. 5.18뿐 아니라 대중 봉기 또는 전민 항쟁에 나섰던 한국의 대중은 대체로 공화주의라고 불릴만한 정치적 지향에 근거했던 듯하다. 또한 향후에도 대한민국에서 벌어질 대중 봉기는, 애국적 공화주의나 시민적 공화주의에 근거할 가능성이 크다.

(2) 애국가와 태극기라는 봉기에서의 의례·상징의 문제. 저자가 잘 짚은 대로 대중 봉기에서의 의례·상징의 문제(노래와 영웅, 깃발 등으로 표현된다)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언제나 봉기에 나선 대중이 (처음부터) 독자적인 의례와 상징을 가질 수 없으며, 또한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포섭돼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1960년 3.15 의거에서 봉기한 마산·부산의 청년학생들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라는 6.25 때의 군가인 '전우가'를 불렀다. 4.19의 대중 봉기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아, 거리의 군중은 '전우가'와 함께 '해방가', '광복절 노래', 또 '6·25의 노래' 들을 불렀다.(권보드래·천정환, <1960년을 묻다>(천년의상상 펴냄) 참조) 이승만 독재는 '반공'으로 수많은 대중을 학살하고 탄압했는데 왜 '6.25의 노래' 따위를 불렀을까? 그들이 자유민주주의자이거나 반공 전사였기 때문에 이승만 독재와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서 그런 노래를 불렀을까? 아닐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한편 봉기 군중의 문화적 비독립성과 봉기의 '필연적 우연성'을 나타낸다. 아직 그들은 자신들의 노래가 없다! 제대로 된 구호나 깃발도 없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노래들이 봉기의 현장에서 선택되는가? 봉기라는 행위의 성격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대중의 심성을 대변하는 쉽고도 함축적인 노래들이 자생적으로 불릴 것이다. 그런 노래들은 어떤 '터져 나옴'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대중의 정의감과 연대의식을 표현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 노래들은 봉기의 근본적인, 존재론적이며 동시에 정치적인 지향을 보여준다. 이 같은 양가적 상황 안에서 봉기의 정치적·윤리적 지향과 합치하지 않는 노래나 상징이 채택될 수도 있다.

이 문제는 봉기의 문화정치학과 직접 관련되며 앞서 언급한 애국적·시민적 공화주의 문제와도 잘 연관된다. 적어도 '노래'와 관련해서라면 좋은 예가 있다. 2008년에 봉기한 촛불 시민들이 반복해서 불렀던 노래 '헌법 제1조'는 한국의 봉기와 시민적 공화주의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알다시피 그 단순하고 간명한 노랫말은 제목 그대로 '대한민국 헌법 제1조'였다. 그것은 한국 공화주의를 다른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잘 압축 요약해놓은 일종의 절대명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조문 중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부분은 노래에서 생략됨)

이 노래는 2008년의 촛불시위가 이명박 정권 하의 국민-주권의 위기 (또는 주권의식의 위기감)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시위가 얼마나 문화적·정치적으로 세련된 것이며 시위의 주체가 얼마나 명징한 자기의식을 지닌 대중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정상호가 잘 지적하고 있는 대로, "촛불시위에서 공화주의로의 전환점"이나 공화주의적 의식화가 비로소 마련된 것이라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공화 개념의 민주화나 공화국의 전환은 1980년 광주 항쟁과 87년 6월 항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두 사건은 헌법 속에서 잠자고 있던 공화주의를 재현시킨 주체들, 즉 적극적이고 민주적인 공화국의 시민을 창출하였기 때문이다." (정상호, ''민주공화국'을 재생시킨 사회운동과 시민참여 - [특집] 대한민국 정부 수립 65주년, 민주공화국을 다시 생각한다', <내일을 여는 역사> 2013년 여름호(통권 51호), 77쪽)

따라서 광주의 시민들이 부르고 싶었던 가사도, 3.15 마산·부산의 청년 학생들이 외치고 싶은 곡도 바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였을 것이다. 그야말로 아주 오래된, 사민주의적 지향도 꽤 강했다던 대한민국 제헌헌법에서부터 명시되어 있는 그 명제 말이다. 광주에서 불린 애국가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나 2008년의 노래 '헌법 제1조'는 다 비슷하게, 지상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진정한 민중의 공화국을 꿈꾼다. 봉기의 순간들에 군중 스스로에 의해 감득되는 공화국 주권 의지가 그런 노래를 부르게 만들 것이다.

(3) 결론적으로 김정한의 전제를 약간 수정하고 싶다. '대중 봉기는 지배 이데올로기 내부에서 시작된다'보다는, 대중 봉기는 한편 분명 지배이데올로기 안에서, 그러나 처음부터 그것이 균열하는 지점에서 시작하며, 동시에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확산·변형하며 대항 이데올로기를 획득한다고 말해야 할 듯하다. 김정한은 이번 책에서 획득의 사후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사후성보다는 대항 이데올로기 획득의 급진성·압축성·비균질성이 더 중요한 듯하다. 그래야 대중 봉기의 이데올로기가 품는 다가성과 변증법이 더 잘 설명되며, 5.18 항쟁 이전부터 이미 반정부 내지 반체제적 운동을 하고 있던 광주의 노동자와 윤상원 등의 운동은 물론, 그리고 5.18 항쟁의 후과도 더 부드럽게 설명되지 않을까 싶다.

4. 나가며
 

▲ 지난해 개봉해 광주를 둘러싼 '기억 논란'에 불을 지폈던 영화 <26년>의 포스터.

33년이 지난 지금, 광주 항쟁에 대한 기억과 해석은 이제 이전과 다른 세대의 주체와 매체에 의해 다시 상상되고 구성되고 있다. 영화 <26년>의 서사와 일베 소동이 보여주듯, 기억과 해석은 후대로 대물림되며 재구성되고 있다. 그러할 때 어떤 민주주의와 역사를 어떻게 가르치고 말할 것인가, 그 속에 어떻게 광주 항쟁을 기입해 넣을 것인가?

대중문화의 공간에서만 '재해석'이 시도되는 것이 아니라, 근래 광주 항쟁에 관한 학문적 성과도 꽤 여러 편 새로 발표되었다. 여기서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으나 연구자들은 '절대공동체'론 등 기존의 유력한 해석에 도전하면서 광주 항쟁의 배경과 항쟁 전후 문화정치의 변화, 시민군과 시민의 주체성 자체, 항쟁의 감성과 이데올로기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같은 흐름 또한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와 '주체의 위기'를 배경으로 한 것이라 본다. 이명박-박근혜 10년, 신자유주의 16년(1997년 외환 위기 이후만 헤아려도), 민주 정부의 실패 속에서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는 사실상 근저로부터 위협받고 있다. 또한 다시 말해 민주 노조운동과 진보 정치의 위기, 보수 정권 10년에 따른 주체의 해체, 또는 저항과 주체 형성의 불가능성, 법(치)과 제도가 인민주권의 원리를 서서히 압도하는 형국이다.

그래서 폭력적 국가에 대한 민의 전면적·급진적 저항이었던 광주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운동이 불가능해지고 주체가 해체돼가는 상황에서, 광주는 이제는 불가능한 전설이거나, 다시 부활시켜야 할 한국 민주주의의 근원성에 대한 가장 중요한 '자료'인 것이다. 앞으로도 5.18과 광주를 더 공부하자.

 
 
 

 

/천정환 <1960년을 묻다> 공저자·성균관대학교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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