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잇따른 외교 무대서 확인된 미중 반도체 경쟁 ‘최대 변수’ 한국

APEC서 만난 미중 무역장관, 마이크론 제재 두고 설전…중국 “한국과 반도체 협력” 강조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왼쪽)과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장 ⓒ뉴시스
미중 반도체 전쟁이 전개되는 가운데 잇따라 벌어진 국제 외교 무대에서 한국이 주요 변수로 부상했다. 미국과 중국 모두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제조 경쟁력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단적으로 드러났다. 정부는 한국이 반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우위를 지렛대 삼아, 국익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 참여국은 지난 27일(현지시간)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IPEF 장관회의 뒤 공동보도성명을 통해, 공급망 협정 타결을 선언했다고 산업통상자원부와 미국 상무부 등이 밝혔다.

IPEF는 중국 견제를 의도로 미국이 주도해 꾸린 다자협의체다. 중국이 2020년 체결된 세계 최대 자유무역협정(FTA)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추진하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영향력을 키우려 하자, 미국은 지난해 IPEF를 출범시켰다. 한국과 미국을 비롯해, 일본, 호주, 인도 등 14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이번 협정 핵심은 공급망 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 간 공조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IPEF 회원국은 주요 산업 분야에서 공급망 위기가 발생할 때, ‘위기 대응 네트워크’를 가동해 상호 공조를 요청하기로 했다. 대체 공급처 파악, 대체 운송경로 발굴, 신속 통관 등 협력을 강화한다. ‘공급망 위원회’도 창설한다. 각국 이행 상황을 점검하고 추가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창구다. 평시에는 각국 정부가 공급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불필요한 조치를 자제하고, 공급선 다변화를 위해 투자 확대, 물류 개선, 공동 연구개발(R&D) 등을 추진한다.

협정문에 중국을 겨냥한 조치가 명시되지는 않았다. 다만, IPEF 탄생 배경과 최근 공급망을 둘러싼 미중 갈등을 고려할 때, 이번 협정 근저에 중국에 대한 미국의 견제 의도가 깔렸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협정문에는 “시장 원칙을 존중하고 불필요한 제한과 무역 장애를 포함한 시장 왜곡을 최소화한다”는 문구가 담겼다. ‘시장 왜곡’의 주체는 중국으로 읽힌다.

중국은 반발하고 나섰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역 협력의 틀은 그 명목이 무엇이든 차별적이고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개방적이고 포괄적이어야 한다”며 “인위적으로 시장 행위를 방해하고, 정상적인 경제·무역 활동을 정치화하며, 반도체 등 산업 협력에 인위적으로 장벽을 세우는 건 공급망 안정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위험”이라고 했다.

미국과 중국은 반도체 분야에서 상호 제재를 강행하며 날을 세우고 있다. 최근 중국은 미국의 메모리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의 중국 내 판로를 막았다. 중국 당국은 마이크론이 인터넷 안보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고 결론 내리면서, 통신·운송·금융 분야를 포함한 핵심 정보 인프라 기업의 마이크론 제품 구매를 금지했다. 해당 조치는 중국 견제를 공식화한 주요 7개국(G7) 정상의 공동성명이 발표된 직후 나왔다. 공동성명에는 ‘핵심 공급망의 과도한 의존 해소’(디리스킹)와 ‘힘에 의한 현상 변경 반대’, ‘인권 상황에 대한 우려’ 등 중국을 압박하는 내용이 담겼다.

앞서 미국은 지난해 10월 중국 내 반도체 생산 기업에 대한 첨단 장비 판매를 금지했다. 미국 반도체법에서는 보조금 수령 기업의 중국 내 투자를 제한하는 조건이 달렸다.

 

 

 

안덕근(왼쪽 일곱번째)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27일(현지시간)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장관회의에 참석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산업통상자원부 제공) 2023.05.28. ⓒ뉴시스

미중 반도체 경쟁 최대 변수로 떠오른 한국…“레버리지 활용해야”

최근 미국과 중국 간 장관급 회담에서는 서로의 반도체 제재를 두고 설전이 벌어졌다.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장관)은 지난 25~26일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무역장관 회의를 계기로 미국의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과 캐서린 타이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연달아 만났다.

미국 측은 “중국에서 영업 중인 미국 기업을 겨냥해 최근 빈발하고 있는 중국의 조치들에 대해 우려를 제기했다”(상무부), “중국에서 활동하는 미국 기업에 대해 중국이 취한 조치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USTR)고 밝혔다.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를 직격한 것이다.

왕 부장은 미국 측과 회동에서 중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무역 정책과 반도체 정책, 수출 통제 등에 대해 우려를 전했다.

미중 갈등이 심화하는 가운데, 미국은 한국이 대중 제재에 동참할 것을 압박하고 있다. 러몬도 장관은 IPEF 장관급 회의 뒤 기자회견에서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에 대해 “경제적인 강압으로 본다”면서 “이번 도전을 비롯한 중국의 비시장적 관행과 관련된 모든 도전을 해결하기 위해 파트너(국가)들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백악관도 다른 국가들과의 공동 대응을 언급한 바 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G7 정상회의 직후 브리핑에서 “중국 조치로 야기되는 반도체 시장 왜곡에 대처하기 위해 G7 내부의 동맹 및 파트너와 긴밀히 협력을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주요 인사가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와 관련해 언급한 ‘파트너’는 한국으로 특정된다. 중국이 마이크론을 제재할 수 있는 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있어서다. 마이크론 제품 대신 한국 기업 제품을 사면 된다. 중국에도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와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 등 메모리 반도체 기업이 있지만, 미국의 장비 제재 등으로 마이크론 제품을 완전히 대체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 기업이 중국에 반도체를 팔지 않으면, 중국은 마이크론 제재에 따른 자국 산업 피해가 불가피해진다.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 내 부족분을 메우지 않도록 할 것을 요청했다는 보도가 나온 데 이어, 미국 하원의 미중전략경쟁특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마이크 갤러거 의원이 이같은 주장을 공식적으로 제기하기도 했다.

반도체 분야를 둘러싼 미중 갈등 현안에서 한국이 주요 변수로 떠오르는 양상이다. 중국은 한국에 손을 뻗는 제스처를 취했다. APEC 무역장관 회의에서 이뤄진 한중 장관급 회동 이후, 중국 상무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중국은 한국과 양자 무역과 투자 협력을 심화하고, 산업망과 공급망 안정을 수호하며 양자·다자 경제 무역 협력을 새로운 단계로 공동 추진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특히 “양측은 반도체 산업망과 공급망에서 대화와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면서, 반도체를 특정한 대목이 눈에 띈다. 산업부가 “안덕근 통상교섭본부장은 중국 측에 교역 원활화와 핵심 원자재·부품 수급 안정화를 위한 관심과 지원을 요청했다”고 전한 것과 다소 결이 다르다. 산업부는 보도자료에서 반도체를 언급하지 않았다.

중국이 말하는 ‘반도체 협력 강화’는 한국 기업의 메모리 반도체 공급을 요청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과 중국 모두 한국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다. 정부가 전략적인 대응으로 국익을 챙겨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제언한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 제조 경쟁력을 레버리지로 활용할 여지가 커졌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과 중국이 요청 사항을 공식적으로,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가운데 언론 플레이 등을 통해 한국이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면서 “우리가 휩쓸려서 먼저 나설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무조건 한 쪽 말만 듣고 움직이면 우리에게 좋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마이크론 제재에 따른 부족분을 한국 기업이 채우는 문제와 관련해 미국과 중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 명시적으로 요청한 적은 없다는 점을 짚은 것이다. 김 전문연구원은 “정부는 눈치만 보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필요한 걸 얘기하는 입장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부가 미국을 상대로 적극적인 설득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유재희 홍익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는 “중국에 메모리 반도체를 공급하는 게 미국에도 유리하다고 설득해야 한다”며 “미국과 중국의 교차점을 공략해야 한다”고 말했다.
 

“ 조한무 기자 ” 응원하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