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하차 종료, 그 게 우리가 살 길이다
‘이러다 사람이 일하다 죽기도 한다’는 걸 몸으로 깨닫게 되면서 김태완 동지에게 힘듦을 호소했다.
“처음엔 분류작업(속칭 까대기)이 길어야 한두 시간이었어. 그런데 물량이 늘어나면서 세네 시간은 기본이고 대여섯 시간을 넘기기도 하면서 장시간 노동은 피할 수 없게 됐어. 오전 하차 종료만이 택배노동자의 장시간 노동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야.”
“맞아요 어제도 중계차가 늦게 오면서 4시나 되어서 첫발(첫 배달)을 찍었어요. 한 시간 40개만 배달한다 쳐도 400개를 배달하려면 10시간이 걸리는데 4시라뇨?”
노동조합 건설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면 찍어 누를까봐 형은 되도록 회사 측에 모범 배달기사로 인식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그들의 평가 기준에서 우수 사원으로 뽑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 잘하는 사람으로 인식되면 대리점장들이나 터미널의 분위기를 만드는 기사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단 좋은 인상을 주고 관계를 맺고 ‘오전 하차 종료’에 대한 의사를 묻기도 하면서 형은 본격적으로 노동조합 건설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한 활동시간을 보장해 주기 위해 나같은 동료들은 형의 배송을 일부 대신하기도 하면서.
오전 하차 종료에 대한 터미날 기사들의 반응은 대환영이었다. 일반 기사들 말고도 몇몇 큰 대리점 사장들도 적극 호응하고 나서며 D데이를 정해 진짜 실행에 옮기자는 이야기도 만들어졌다.
‘12시가 되면 하차 중이든 말든 누군가 호루라기를 불고 일제히 물건을 정리해서 배달을 시작하자.’ 그것이 D-데이의 행동 지침이었다. 그런데 D-데이 하루 전 용산지점에서 이러한 논의를 알아채고 협의된 대리점장들을 따로 면담하며 회유했다. 그들 대리점장은 소속 기사들에게 불참할 것을 지시하고 결국 태완이 형과 함께 하기로 한 네 명만이 선택을 해야 했다. 강행할 것인가? 다음으로 미룰 것인가?
어차피 모두 다같이 시작할 수는 없다
“세명만 모이면 어떤 일이든 시작할 수 있고 뜻을 이룰 수 있다.”
태완이형은 전국에서 일하는 택배노동자가 6만이 넘는다면 그 중에서 반드시 우리와 뜻이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직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동지들이 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을 찾는 게 급선무라는 것을 늘 머리맡에 두었던 것이다. 형과 함께 일이 없는 날에는 그렇게 동지들 찾기에 나섰다. 박종태 열사가 죽음으로 지켜낸 광주의 택배노동자들을 만났다. 특고 신분을 이기지 못하고 분노를 삼킨 울산의 택배노동자들을 만났다. 한 사람, 한 사람 찾아내고 그 사람들의 소개로 또 사람들을 만나고 결국 인터넷 상에서 택배노동자들의 권리를 생각하고 논의하는 ‘전국택배노동자권리찾기모임’이라는 밴드를 개설했다.
그런 인터넷상의 공간이 생겼다는 소식이 택배 기사들에게 돌면서 삽시간에 수천명의 가입자가 생겼다. 명실상부한 전국적인 택배노동자들의 소통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소통의 결론은 언제나 택배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창립이었다.
택배노동조합 건설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용산터미널 우리 네 명은 고심을 거듭하다가 결국 형의 이 말에 강행을 결심했다.
“처음부터 조금 더 많은 사람이 함께 시작하면 좋겠지만, 그걸 마냥 기다릴 수도 없다. 지금도 택배 노동자들은 어딘가에서 고통받고 죽어간다. 어차피 모두 다 같이 시작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해내겠다는 결심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
다음날 네 명의 기사들이 자기 차량에 A4 용지에 “오전 하차 종료 약속을 이행하라”라고 써서 붙였다. 코빼기도 안 보이던 지점장과 주재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내려왔다.
“저게 뭡니까? 당장 떼세요.”
“내 차에 나의 요구를 써 붙였는데 뭐가 문제예요? 나는 뗄 생각이 없습니다.”
“이런 식이면 김태완 님과 같이 갈 수 없어요.”
고성이 오가고 죽어라 까대기만 하던 레일이 멈춰지고 기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주춤하며 지점장과 주재원들이 물러가고 “속이 시원하다.”, “잘했다 태완아”
A4용지 한 장이 분위기를 바꾸고 그 후로는 지점장과 면담도 신청하고 오전 하차 종료의 정당성을 계속 알려 나갔다. 그러나 지점의 면담도 거부하는 식으로 대응하자 결국 네 명은 12시가 되자마자 곧바로 출차 하자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면 다른 차들이 가로막아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아예 터미널 내로 진입하지 않는 방식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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