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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정부 '희생양 정치', '잼버리 사태 '엔 지방정부다?

[박해성의 여의대교] '대한민국' 자부심 박살낸 잼버리 사태, 문제는

 

 

 

 

"우리는 강팀이다."

 

2002년 6월 14일, 한일월드컵 조별리그 3차전에서 포르투갈을 1대 0으로 꺾은 대한민국의 16강전 진출이 확정되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FIFA 랭킹 40위의 축구 변방국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조의 가장 강력한 상대인 포르투갈과 격돌해 결국 2승1무 조1위로 16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어낸 것입니다. 기적과도 같은 승리에 일부에서는 심판의 편파 판정을 의심한다든지, 포르투갈의 탈락으로 인한 유럽의 관심 저하가 우려된다든지 하는 시큰둥한 반응마저 나왔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포르투갈을 이겨?'라는 의구심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 있었던 거죠.

 

많은 분이 공감하실 것 같은데요, 제 기억 속에 대한민국 국민인 게 자랑스러워 가슴이 뛴 건 2002년 월드컵 때가 처음입니다. 태극전사들의 감동적인 승리와 전 국민의 뜨거운 응원 열기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우리나라는 수천 년의 역사와 고유한 문자를 가진, 많은 위인을 탄생시킨 훌륭한 나라라고 배웠습니다만 교과서를 통해 알게 된 것과 제 삶에서 실제로 느껴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중략)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김구, 백범일지,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편 中 문화강국론) 

 

한류 또는 K-컬쳐. 1990년대 아이돌 그룹과 드라마에서 시작된 한국 문화의 부상은 유튜브, OTT 등의 확산과 더불어 2020년대 들어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방탄소년단, 영화 기생충, 드라마 킹덤, 오징어 게임 등뿐 아니라 최근에는 K-클래식 신드롬까지 일어날 정도입니다. 백범일지가 출판된 게 1947년이라고 하니 불과 75년 정도의 시간 동안 우리가 이룬 문화적 성취가 새삼 놀랍습니다. 

 

문화와 더불어 스포츠나 정치 등 사회 제반 영역에도 한국이 뿜어내는 고유한 에너지에 국제사회가 놀라운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붉은 악마로 상징되는 응원 문화나 미군 여중생 압사 사고(효순이 미선이 사건), 대통령 탄핵 국면의 촛불 집회와 같은 비폭력 시위 문화 등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는 1948년에 설립됐는데요, 사회·인문과학 분야 등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기관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 학교에는 각 나라와 관련된 여러 학과가 있는데 중국학, 프랑스학, 이란학, 이슬람학, 이탈리아학 등의 과목에는 외국인 입학 인원 제한이 없습니다. 경쟁률이 높아 커트라인이 있는 학과는 한국학과 일본학, 두 과목에 불과합니다. 2020/21년 겨울학기 기준 한국학은 1.9, 일본학은 2.4로 한국학의 커트라인이 더 높았습니다. (1.0이 만점이므로, 숫자가 낮을수록 좋은 점수라고 합니다.) 

 

베를린자유대학교에 한국학 과정이 도입된 건 2005년이고, 2008년경까지 25명에 불과했던 한국학과는 2021년 기준 학부생 330~350명, 석사과정 40명, 박사과정 12명 등의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최대 5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입학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한국 대학에서 독문학을 왜 공부하는지 묻지 않듯이 이제 독일에서 한국학은 당연한 선택의 대상 중 하나”라는 이은정 베를린자유대학교 한국학과장의 말은 우리나라가 쌓아 올린 브랜드의 가치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요,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을 만나면 창피하다, 부끄럽다, 나라 망신이다, 이런 말들을 듣게 됩니다. 혐한 제조 축제니, 현실판 오징어 게임이니, 예산 1000억 원을 쏟아부은 최악의 리스크니, 하는 말까지 나옵니다. 며칠 전 막을 내린 2023 새만금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 이야기입니다. 

 

여러 파행을 거쳐 겨우 행사가 마무리되었고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워낙 잘 알려져 있으니 여기에서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우리나라를 방문한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할 정부의 태도만큼은 그냥 넘어가기 어렵습니다. 돌이켜보면 집권 이후 1년 반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이태원, 오송 지하차도, 잼버리 등 굵직한 사고들이 이어졌습니다. 대책 미비와 수습 실패라는 측면에서 보면 모두 인재로 인한 참사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정부·여당의 인식은 전혀 다른 것 같습니다. 이태원 참사에 대해서는 "검수완박 문제가 지금도 드러나지만, 다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을 경찰에 맡겨 수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민주당이 만들었다"(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 2022.11.4., 원내대책회의)라고 했습니다. 

 

오송 지하차도 참사 등 수해 피해에 대해서는 "국토부에서 하던 수자원 관리를 문재인 정부 때 무리하게 환경부에 일원화한 것도 화를 키운 원인"(정진석 국민의힘 의원, 2023.7.17., 충남 지역 수해 현장 방문, 취재진에게)”이라고 했고요.

 

이 외에도 겨울 난방비 폭탄, 전세 사기 범죄 등 부동산 문제, 마약범죄 문제, 북한 미사일 도발, 경제위기, 한국도시주택공사(LH) 발주 아파트의 철근 누락 사태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문재인 정부 정책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전 정부 탓'은 현 정부가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피하고 관리 능력의 부재를 숨기기 위한 만병통치약으로 여기저기 등장합니다. 

 

이런 태도는 이번 잼버리 사태를 두고도 어김없이 반복됐습니다. "준비 기간은 문재인 정부 때였다. 전 정부에서 5년 동안 준비한 것"(대통령실, 2023.8.4., 기자와의 통화), "문재인 정부와 전북도의 외화내빈 식 부실 준비로 위기에 처한 새만금 잼버리, 국민의힘과 윤석열 정부가 바로 잡고 책임을 물을 것"(국민의힘 강민국 수석대변인, 2023.8.5., 논평), "잼버리 유치가 확정된 건 2017년 8월 문재인 정권 시절"(김기현 국민의힘 대표, 2023.8.7., 최고위원회), "잼버리는 전라북도 주관"(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 2023.8.9., 페이스북) 등등입니다. 

 

희생양 만들기, 또는 속죄양 정치라고 부르겠습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이자 철학자인 르네 지라르(René Noël Théophile Girard)는 공동체의 위기가 닥칠 때 어떤 존재를 희생시킴으로써 상황을 극복해 가는 과정을 '희생양 메커니즘'으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하면 정권이 처한 불리한 여론 환경을 타개하려는 수단으로, 막연히 연관이 있다고 여길 수 있을 만한 만만한 상대를 찾아서 응징하고자 합니다. 매번 '전 정부 탓'을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드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잼버리 사태 때는 급기야 '지방정부 탓'까지 등장했네요. 

 

정권이 바뀌어도 국정운영은 지속되어야 하고 집권 세력은 책임정치를 해야 합니다. 윤석열 정부가 지난 정부를 평가하고 잘못됐다고 여기는 정책은 바로잡더라도, 우리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역량을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유능함까지 바라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비겁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계기로든 체감했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부심만은 지켜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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