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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주기 민주경찰 안병하 치안감 추모식

 
경찰은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눌 수 없다
 
이주연 | 2023-10-02 08:32:1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제35주기 민주경찰 안병하 치안감 추모식

【군번 14562】

1949년 5월, 안병하는 22세 때 육사(8기)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면서 전방에 배치됐다. 육사 8기 중 4개의 특별반이 있었으며, 그들은 광복군과 독립군 출신들이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다. 안병하 중위와 육사8기 동기생들은 소대장, 중대부관, 대대참모 등으로 최전방에서 전투에 참여했다. 육사8기 졸업생 중 3분의 1인 367명이 전사하고, 35명이 실종되었다. 육사8기는 6•25전쟁을 온몸으로 겪었다.

전쟁은 영웅을 탄생시킨다. 23세 청년 안병하는 6사단(청성부대) 7연대 16포병대대 소속이었다. 사단장은 한국전쟁 4대 영웅 중 한 분인 김종오 장군이고, 연대장은 임부택 중령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부터 북한군의 포화가 집중됐다. 6사단 7연대는 춘천에 지휘소를 두고 교전했다. 북한군의 전략은 서부전선을 돌파하는 동시에 춘천과 홍천의 동부전선을 돌파하여 수원 이남으로 진출해서 수도권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서부전선 국군 1사단과 7사단이 무너졌다. 동해안 강릉의 8사단도 대관령으로 밀렸다. 동부전선 춘천과 홍천의 6사단은 사단장 김종오 장군의 뛰어난 지휘로 전투에 대비할 시간이 있었다.

북한군 2군단은 2사단과 7사단 등을 앞세워 2만4천 명이 물밀듯 밀려왔다. 국군 6사단은 열악한 상황에서 치열한 방어전을 펼쳤다. 이 전투에서 안병하 중위가 자청했다. 무전병 한 명만 대동하고 적진에 침투하여 정확한 정보를 탐색했다.

적진 깊숙이 침투한 안병하 중위는 적의 화력과 배치상황을 상세하게 본부에 타전했다. 6사단은 상대적으로 화력이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안 중위가 제공한 정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켰다.

춘천•홍천전투 결과 국군 6사단 사상자는 407명, 북한군 2군단 사상자는 6,900여 명(6사단 집계)이었다. 북한군 2군단장 김광협, 2사단장 이청송, 12사단장 전우가 해임되었다.

1950년 7월 5일, 미군이 투입됐지만 죽미령 전투에서 패배했다. 국군 6사단도 8사단과 더불어 방어선을 구축하며 철수를 거듭했다. 국군과 미군은 낙동강을 방어선으로 지연전을 펼쳤다.

이때 충북 음성 동락리 전투가 벌어졌다. 1950년 7월 7일 북한군 15사단이 장호원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종오 6사단장은 안병하 중위가 소속된 7연대를 장호원에 급파했다. 북한군은 이미 장호원을 지나서 충북 음성 방면으로 남하 중이었다.

국군 6사단 7연대는 음성 북쪽에 매복했다. 그날 오후 5시, 국군 6사단 7연대는 기습 공격을 했다. 방심하던 북한군 15사단 48연대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전투는 다음날 7월 8일 오전 8시까지 15시간이나 지속됐다.

북한군 전사자 1천 명, 포로 97명, 차량 80대, 소총 2,050정, 155mm 박격포 6문 등을 노획했다. 국군 6사단 7연대는 한국전쟁 개전 이래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당시 동락리 전투를 주도했던 국군 6사단 7연대 2대대는 병력 400명, 81mm 박격포 1문, 중기관총 1정뿐이었다. 놀라운 전과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크게 기뻐했다. 1950년 9월 29일, 국군 6사단에 표창장을 수여했다. 7연대 모든 장병들은 1계급 특진했다. 안병하 중위도 대위로 진급했다.

국군 창설 이후 최초로 거둔 가장 큰 규모의 전과였다. 노획한 무기를 유엔으로 보냈다. 소련의 한국전쟁 도발 입증 증거로 제시했다. 이후 국군은 평택, 안성, 충주, 울진을 잇는 저지선을 구축했다. 동부전선은 국군이 서부전선은 유엔군이 담당하는 전선이 재정비되었다.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됐다. 1950년 10월 24일, 국군 8군사령관과 10군단장에게 38선을 넘어서 국경을 향해 진격하라는 수정명령이 하달됐다. 모든 부대들이 일제히 압록강의 국경선을 향해 질주했다.

안병하 대위가 소속된 6사단은 선두에서 평양을 우회하여 평안남도 순천에 가장 먼저 진출했다. 노획한 북한군 차량 150대를 이용하여 북진 속도를 빠르게 했다. 북진 중 추가로 노획한 북한군 차량 300대에 탑승하여 가장 빠르게 압록강에 도착했다.

1950년 10월 26일, 아침 7시에 국군 6사단 7연대는 압록강을 향해 마지막 진격작전을 개시했다. 초산 남쪽 6Km 지점에서 북한군 8사단 패잔병을 제압했다. 안병하 대위의 7연대 1대대(대대장 김용주 중령)는 오후 2시 15분 압록강 남단의 만주 국경선까지 진출했다.

국군 최초로 압록강에 도착한 것이었다. 안병하 대위와 국군 6사단 7연대 1대대 장병들은 강변에 태극기를 꽂고 압록강 물을 수통에 가득 채웠다. 가슴 벅찬 흥분의 순간이었다. 이 부대는 ‘초산부대’로 불리기도 했다.

감격의 순간은 짧았다. 다음날 10월 27일, 7연대장 임부택 대령이 압록강변 초소를 방문했다. 2연대가 중공군의 매복으로 고전 중이라고 했다. 28일, 오후 5시 중공군이 1대대 퇴로를 차단했다.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29일, 7연대는 포위망을 뚫는데 실패했다. 30일, 자정에 중공군 제38군 예하 3개 사단과 제40군 예하 3개 사단이 국군 7연대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공격했다. 7연대 병력 76%가 전사하고 생존자는 대부분 포로가 되었다. 부대 자체가 붕괴되었다.

안병하 대위는 야음을 틈타 깊은 산 속으로 피신했다. 낙엽 속에 몸을 숨긴 채 3일을 버텼다. 9일 후에야 포위망을 뚫고 아군 지역으로 간신히 복귀할 수 있었다.

안병하 대위는 1957년 5월 7일, 보병 6사단 소속으로 무공훈장을 수훈했다.

“멸공전선에서 제반 애로를 극복하고 헌신 분투하여 발군의 무공을 수립하였으므로 그 애국지성과 혁혁한 공적을 가상하여 대통령내훈 제2호에 의거 부여된 국방부장관의 권한에 의하여 이에 무성화랑 무공훈장을 수여”

안병하는 6•25전쟁을 통해 화랑무공훈장 2개, 상이기장, 6•25참전기장 등을 수훈했다. 전쟁영웅이 된 것이다.

잠이 오지 않아 안병하 평전을 펼쳤다. 문득 보고싶은 내용을 찾았다. 스마트폰으로 정리하며 타이핑했다. 어느덧 새벽의 한 가운데에 들어섰다. 추모식 준비를 해야 하는데.

민주경찰 안병하 치안감에 대한 평가는 청렴한 원칙주의자다. 그의 민주, 인권, 위민정신 또한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해야 하는 경찰관으로서의 원칙을 고수한 것이지 않았을까?
헌법 제7조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헌법정신을 실현한 참공직자.

안병하 평전 저자 이재의 박사는 안병하 비망록을 ‘경찰의 5•18 권리장전’이라고 칭한다. 동의한다. 대한민국 경찰이라면 안병하 비망록 원본을 탐독하시기를 권유드린다. 볼 수 없다면 사본이라도 탐독을 권유드린다. 참고로 원본은 광주 금남로 소재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있다.

대한민국 경찰 영웅 1호 안병하 치안감이 생의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전하고 싶은 경찰에 대한 진심이 전해질 듯싶어서다.

♪국립경찰가♪ 마지막 가사 ♥민주경찰♥

그날이 오면 안병하 치안감은 또다시 새롭게 부활하지 않을까?

1980년 5월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전라남도 경찰국 안병하 국장과 혼연일체가 되어 권력의 부당한 명령에 저항했던 2천 명의 참경찰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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