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한 한미관계, 누구나 하는 이야기다. 최소한 87년 6월 항쟁 결과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정치인이라면, 지식인이라면 한미관계의 불평등성을 지적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한국과 미국의 힘이 같지 않은 상황에서 한미 관계의 불평등성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불변의 진리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이 논리를 좇아가면 완전히 평등한 관계는 가능하지 않으니, 불평등성을 최소화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모든 나라의 힘은 균등하지 않다. 강대국도 있고, 약소국도 있고, 중진국이라는 용어도 등장한다. 나라의 힘이 불균등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용어들이다. 한국과 미국의 힘의 격차는 더할 나위 없이 크다. 한국과 미국은 아주 불균등하다.
그러나 불균등과 불평등은 다르다. 한국과 영국, 한국과 중국, 한국과 러시아의 힘의 격차 역시 크다. 한영 관계, 한중 관계, 한러 사이의 힘은 불균등하지만, 그 관계는 평등하다. 불균등함이 불평등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불평등한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불평등하다. 주한미군지위협정(일명 소파협정)도 불평등하다. 그 외 한미 사이의 모든 협정은 불평등한 조항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런 불평등성은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불균등한 힘의 문제가 불평등한 관계를 자동적으로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정치인, 지식인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이 있다. 불평등성만을 강조하면 종속성이 은폐된다. 불평등한 조약과 협정은 주종 관계를 형성한다. 유리한 조약과 협정을 가진 나라는 ‘주’의 위치를 갖고, 불리한 조약과 협정을 가진 나라는 ‘종’의 위치를 갖는다.
불평등 정도에 따라 주종 관계의 강도는 결정된다. 주종 관계의 강도가 세지만 불평등도 심화된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한미 관계는 다른 어떤 나라의 관계보다 불평등 정도가 심하다. 따라서 주종 관계 역시 가장 강력하다.
미국은 결정하고, 우리는 따른다. 아주 부분적으로 그렇지 않은 현상들이 존재하지만 중요한 정책에서 우리는 항상 ‘종’의 위치에 있을 뿐이다. 한국은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미국에 종속되어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은 정치적 주권이 결국 경제적 주권 상실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함께 한미합의의사록이 체결되었다. 한미합의의사록의 6번째 조항은 “(한국의) 경제계획을 유효히 실시함에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라고 적고 있다.
이미 1952년 5월 24일 미국은 “대한민국과 통합군 사령부와의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일명 마이어 협정)을 통해 한국 경제 정책에 깊숙이 개입해 왔다. 따라서 합의의사록의 ‘필요한 조치’는 미국이 한국에 요구하는 조치이다. 한국은 그 요구를 따라야 하는 ‘종’의 위치에 있다. 이 과정을 통해 미국은 한국 경제 정책의 결정권을 행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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