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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우상호가 전하는 ‘대통령 탄핵’의 기억, 그리고 지금의 윤석열

16일 오후 서울 광화문 북측광장 앞에서 '김건희 특검 수용, 국정농단 규명! 윤석열을 거부한다 시민행진'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제공 :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 탄핵 물결이 일고 있다. 국민들에겐 몇 해 전 박근혜 탄핵의 기억이 있다. 당시 최순실이라는 비선 실세의 국정개입, 대통령의 무능은 대중들의 분노를 촉발한 근원이었고,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문제들이 누적되는 과정을 거쳐 거대한 탄핵 물결이 만들어졌다. 지금 윤석열 대통령 탄핵 여론이 형성된 구조적 배경은 8년 전과 유사하다.
2016년 20대 국회에서 야당 원내대표를 지내면서 대통령 탄핵을 이끌었던 우상호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만나 그때의 경험을 들었다. 그리고 ‘윤석열 탄핵’의 조건들을 가늠해봤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유를 조각하고 여당 의원들을 설득하는 등 설계부터 실무까지 국회 내에서 벌어진 전과정이 그의 손을 거쳐서 이뤄졌다.

다음은 우 의원과의 질의응답 전문이다.

- 그때 박근혜 탄핵을 추진하게 된 과정을 복기해본다면?
= 시작 국면에서는 각각 떠도는 소문들이 들어오니까 그 소문들에 대한 팩트 확인을 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청와대 출신 조응천 의원이 그때 문제가 됐던 최순실 남편 정윤회 문건 관련된 내용들을 많이 알고 있었고, 손혜원 의원이 문화 쪽, 광고 쪽 얘기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차은택 감독 관련해서도 최순실 이름이 나오고, 조응천한테서도 최순실 이름이 나오길래 ‘뭔가 좀 파봐야겠다’ 싶어서 TF를 만들었다. 별도로 안민석 의원은 계속 정유라 추적을 해왔었고. 조응천, 손혜원 포함해서 5~6명으로 꾸려진 TF팀에서 정보를 집대성해서 그림을 딱 그려보니깐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더라.

- 이후 상황은 어떻게 전개됐나?
= 국정감사를 앞두고 터뜨리자는 쪽으로 논의가 됐다. 그 전에 김재수 농림부 장관 인사청문회가 있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니깐 이 사람이 미르재단 관련 사업 등 최순실 동선과 겹치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권력의 향배를 잘 알고 거기에 줄을 서서 장관이 됐나 보다’라는 합리적 의심을 하고 파봤다. 본인은 부인했는데 내가 볼 때 농림부에 기라성같은 후배들이 있는데 이 사람이 차관을 마치고 aT(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사장으로 가서 은퇴 수순인데 다시 장관으로 쓴다는 게 이상했다. 그래서 이 사람 해임건의안 문제를 두드려본 거다. 이 문제를 국면 고조 전 단계로 잡아놨던 거고, 국감 시작 전 우리 정보를 토대로 한겨레, 경향 등에서 1면에 나기 시작하면서 언론들이 주목하기 시작한 거다.

 

 

 

우상호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뉴시스
- 국감 분위기가 상당히 고조됐겠다.
= 대통령은 김재수 해임건의안 거부하고, 여당(새누리당)은 최순실 건 확산되는 거 두려워서 국감을 거부했다. 새누리당이 김재수 해임건의안 빌미로 국감을 거부할 때 그 문제가 한 1주일 동안 언론에 도배됐다. 국감이 시작되면서 언론들이 전부 최순실 건에 달라붙었다.

- 태블릿PC가 결정적인 트리거가 됐었다.
= 국감을 거치면서 단계를 밟다가 태블릿PC가 딱 발견됐다. 설마 설마 하던 게 150개가 넘는 증거물로 나와버린 거다. 국무회의에 올라가야만 볼 수 있는 1급 비밀 보고자료를 정호성이 최순실에게 가져가서 보고하고, 그 지침을 받아서 온 증거들이 다 있었다. 국정농단의 핵심 자료였던 거다. 국감 일주일 전부터 하나씩 터뜨리기 시작했고, 국감에서 정점을 찍으면서 전체 윤곽들이 드러나는 시점에 증거가 나오니깐 더 폭발했다. 거기다가 또 하나 국민 감정을 건드린 게 정유라의 이화여대 입시 비리였다. 그때 정진석 원내대표(당시 새누리당 대표)도 철렁했고, 다른 새누리당 의원들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 탄핵소추안 처리 시기를 놓고 여러 주장들이 있었던 것 같다. 시기를 고르는 과정에서 어떤 판단이 작용했나?
= 세 가지다. 하나는 새누리당 의원 찬성표를 몇 표를 조직했느냐다. 광장에서는 계속 탄핵을 당기라고 하는데 아무리 계산해봐도 200표가 안 나오는데, 그 숫자를 만들어야 할 것 아닌가. 200표를 여유 있게 넘겼다고 판단되는 시점부터 탄핵 당론화를 했다. 두 번째는 의사일정이었다. 탄핵은 본회의가 이틀 연속 잡혔을 때가 아니면 못한다. 이미 정진석 원내대표와 9월 임시국회를 시작할 때 잡아놓은 본회의 일정이 있었다. 본회의가 이틀 연속 잡혀있던 게 12월 1~2일, 9~10일 두 개였다. 그 중간에 내가 잡자고 하면 당연히 안 잡아준다. 동의해주면 자기가 탄핵을 용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당내 지도부에서 일부 탄핵 반대론이 있었다. 헌재에서 기각되면 역풍 맞을 수도 있으니 탄핵보다는 하야 쪽으로 가자는 의견이었고, 그걸 설득해가는 과정이 있었다. 그 세 가지 요소 때문에 탄핵소추안을 처리하는 일정은 12월달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여당 의원들을 일일이 만나면서 설득했었나?
= 한 명 한 명 다 만나고 다녔다. 처음에 여당 의원들은 10월 말 국정감사가 끝나고 나서도 ‘진실이 도대체 뭐지’ 하면서 불안해하면서도, ‘설마 아니겠지’ 이런 정도였다. 내가 설명한 논리는 ‘지금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것 이상의 내용들이 더 있다. 최순실이 정호성을 시켜서 비서실장이나 수석들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그 사람들이 실제로 박근혜한테 확인도 안 하고 최순실이 시키는 대로 했다. 자연스럽게 국정 운영을 최순실이 한 꼴이 됐다’는 설명을 쭉 했다. 어떤 사람은 1년 넘게 담배 끊었는데 하나 달라고 하면서 괴로워하기도 했다. 내가 그랬다. ‘지금 이 촛불정국에서 탄핵이 안 이뤄지면 민중들이 청와대 밀고 들어간다. 그럼 총을 쏘게 된다. 분신하는 사람도 나올 거다. 제2의 광주 사태가 서울에서 벌어지면 어쩔 거냐? 대한민국 혼란이 장기화될 거다. 우리가 그래도 헌법기관인데, 나라를 생각해야 할 것 아니냐’, 이렇게 끊임없이 설득했고, 새누리당 의원들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거다.

- 여당표 계산하고 취합하는 작업의 난이도가 상당했을 것 같다.
= 탄핵 문제로 집권당 의원들을 설득하는 일이 정말 쉬운 게 아니다. 일단 나는 명단 관리를 철저하게 했다. 취합 과정에서 새누리당 의원들한테는 명단을 무덤까지 가져가겠으니 걱정하지 말고 협조해달라고 했다. 그 사람들은 자기 이름이 드러나면 압박이 들어올 거고, 그렇게 되면 자기는 탄핵을 반대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나는 추미애 대표를 포함해 당 지도부는 물론이고, 친한 의원들한테도 명단을 보여주지 않았다. 명단 안 보여준다고 삐지고 그랬다. 자꾸 찾아와서 명단 보여달라는 중진 의원들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보여드릴 순 없고 의원님하고 지역구 가까운 분은 아직 마음을 안 정했으니 그분에게 전화 좀 해 주십시오’ 이랬다. 근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전화를 안 했더라.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유승민이나 정병국처럼 그때 공개적으로 탄핵 찬성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그것 때문에 정치생명에 영향을 받았다. 그렇게 본다면, 본인들이 나서서 찬성하는 사람들이 아닌 한 내가 명단을 까발리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나는 그런 신의를 지켰다.

- 여당 내부 대세의 변화가 감지된 건 언제부터였나?
= 11월 하순. 25일 지나면서부터 대세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11월 중순까지는 탄핵이 가능한 숫자가 안 나왔다. 그때 김무성, 유승민 두 분을 중심으로 25명 정도의 의원 모임이 만들어졌다. 그게 탄핵 찬성파 모임이었다. 그 사람들 100%가 찬성표 찍는다 하더라도 201~202표였는데, 그중에서도 5~6명이 매일 입장이 왔다 갔다 했다.

 

 

 

2016년 당시 우상호 민주당 원내대표와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 ⓒ정의철 기자
- 그 사람들 입장에선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다.
= 자기 정치생명을 거는 일이니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다. 나는 나중에 234표까지 계산이 되는 순간까지도 마음을 졸였다. 하루에도 10표 넘게 왔다 갔다 하니깐. 그렇다고 내가 매일 확인 전화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기록을 자꾸 남기면 안 되니깐. 그래서 그때 심적으로 좀 힘들었다.

- ‘탄핵이 가능하겠다’고 확신이 든 순간은 언제쯤이었나?
= 새누리당이 12월 초에 의원총회서 ‘4월 퇴진, 6월 대선’을 당론으로 정하는 순간 ‘아, 이건 확실하다’ 생각이 들었다. ‘더이상 이런 상황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정상적으로 국정 운영을 할 수 없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대선을 빨리 치르는 게 낫다’는 판단을 새누리당 고문단부터 전체 구성원들이 다 했던 거다.

- 그 당시 청와대서도 탄핵 반대표 작업을 엄청나게 하지 않았겠나?
= 박근혜 쪽에서 의원들한테 전화해서 엄청나게 겁박을 했다고 하더라. 그때까지는 검찰도 수사를 미적거리고 있었고. 나한테 탄핵 찬성한다고 했던 의원들도 청와대서 전화 오면 거기다 대고 ‘난 찬성이다’ 이렇게 말 못 하는 거다. 12월 초에 새누리당이 당론을 정하고 나서 박 대통령을 면담했는데, 그때 ‘4월 퇴진, 6월 대선’을 거부했다. 나중에 왜 그렇게 된 거냐 물어봤더니, 국정원 등 여러 정보기관과 정무수석실에서 당시 새누리당 의원들과 전화통화를 1대 1로 다 해봤더니 탄핵 찬성파가 현저하게 적어서 부결될 거라고 상황 판단을 잘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 박근혜 탄핵은 숙명이었을까?
= 고비가 여러 번 있었다. 처음 태블릿PC가 터졌을 때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을 와서 개헌을 주장했다. 이슈를 전환하려고 반대하던 사람이 개헌을 꺼냈던 거다. 근데 개헌이 태블릿PC를 못 이기더라. 두 번째가 국회 추천 총리 이슈였다. 내가 정진석 원내대표한테 대통령이 사퇴하지 않겠다면 최소한 국정 운영에서는 반드시 손을 떼야 된다고 하면서, 외교·안보·국방을 제외한 내정을 총리한테 맡기고 총리를 대통령이 지명하지 않는 방식으로 합의해 오면 의총에 붙이겠다고 했다. ‘내정에서 손을 떼겠다’는 표현이 반드시 들어가야 된다고 했다. 근데 대통령이 뭐라고 발표했냐면, ‘국정 운영의 상당 부분을 총리에게 위임할 것이고, 그 총리를 국회에서 추천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손을 뗀다’는 명시적인 선언을 해줘야 된다고 하니 그쪽에선 죽어도 안 된다고 하더라. 그다음에 갑자기 김병준을 일방적으로 지명해버렸다.

- 박근혜가 그걸 받았으면 탄핵을 안 당할 수 있었나?
= 그게 탄핵당하지 않을 수 있는 모멘텀이었다. 새누리당은 ‘저 선에서 끝내자’ 이렇게 됐을 거고, 우리 의총에서 자중지란이 있었을 거다.

- 박근혜 탄핵 정국 때와 비교해보면, 지금 광장에 나오는 사람들의 규모나 분위기가 사뭇 다른 느낌이다. 사안의 엄중함은 그때와 지금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시나?
= 정권에 대한 국민들 마음이 떠나갈 정도로 국정 운영을 잘 못하고 있다는 건 그때와 같다. 다만 그때는 탄핵의 근거로 삼았던 국정농단, 부정부패 비리에 관한 15~20개 정도의 결정적인 증거들이 있었다. 반면에 지금은 증거로 확인되는 것들이 아직 없다. 채상병 사망 사고 수사외압 의혹같은 경우도 ‘전화해서 격노했다고 들었다’ 전언이지 직접 그 얘기를 들은 사람이 증언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대중들도 유보적인 것이다. 지금까지 국민들이 지지를 철회할 수밖에 없게 만든 잘못된 국정운영, 무능은 많이 있는데, 법률 위반이 없다. 형사재판에서 유죄를 받을 수밖에 없는 불법 사례들이 위헌 요소가 되는 거다. 나쁜 놈이란 건 다 안다. 그런데 인용될 증거나 법리 구성이 약하다.

- 증거가 더 나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을까?
= 물론이다. 이준석 대표가 던진 말은 증거가 된다. 집권당 대표로 있을 때 대통령과 직접 통화를 할 때 받은 부탁이 있고, 그 증거가 자기 핸드폰에 있다는 식으로 증언을 하지 않았나. 그건 박근혜 대통령이 공천개입으로 징역 2년 선고받은 것과 똑같은 범죄다. 지금까지 나온 것 중에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판단된다.

- 과거의 경험을 들어보면, 증거가 나온다 하더라도 여당이 동참하냐는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인 거 같다.
= 지금은 국회 문턱을 넘기기가 어렵다. 8명 이상의 국민의힘 의원을 설득해올 수 있는 사람이 지금 지도부에 있는가 봤는데, 그쪽 의원들이 만나줄 사람이 한 명도 없다. 21대 국회 마지막 1년 동안도 여야 대화가 쉽지 않았고, 윤석열 대통령 이후에는 확실히 대화가 끊긴 거 같다. 국민의힘 입장에서는 특정 정당의 일방적인 법안 통과가 반복되면서 만나기도 싫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 같고, 민주당 쪽에서는 상대당 의원 만나는 데 대한 강경한 당원들 눈치를 보는 문화까지 겹쳐졌다. 국민의힘도 비슷한 맥락에서 야당 만나는 걸 조심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상황에서는 국민의힘 의원들의 변심 가능성이 낮다. 김건희 특검조차 통과가 안 되지 않나.

- 민주당이 탄핵을 당론화하지 않는 것도 그런 현실적 문제 때문이라고 보면 되나?
= 국민의힘 의원들을 10명 이상 설득해오지도 못했고, 또 아직 그런 가능성도 약하다. 그리고 설사 국회 문턱을 통과한다 하더라도 현재의 증거 상태로는 헌법재판소에 가면 기각될 가능성이 있는데 기각되면 역풍이 부는 거다. 그러면 이재명 대표의 대권 가도에도 상당히 영향을 미친다. 검사나 판사 탄핵은 실패해도 큰 문제가 없는데, 대통령 탄핵은 다르다. 이게 기각되거나 부결되면 그 책임을 지금 지도부가 다 져야 한다.

- 민주당 쪽에서 조언을 구해오기도 하나?
= 전략기획위원장 하는 천준호 의원한테 전화가 와서 박근혜 탄핵 당시 상황을 체크하는 차원에서 물어봐서 내가 자세하게 설명을 해줬다.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가 7일(현지시각) 필리핀 말라카냥 궁에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과 루이즈 아라네타 마르코스 여사와 기념촬영을 마친 뒤 이동하고 있다. 2024.10.07. ⓒ뉴시스
- 조국혁신당이나 진보당 등 다른 야당들은 민주당에 탄핵 대열에 합류하라고 한다.
= 그분들은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 책임을 안 져도 되니깐. 근데 우리 민주당은 제1당으로서 책임성이 있다. 그래서 지금 단계에선 쉽지 않은 면이 있다.

- 김건희 특검이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 김건희 특검을 통해서 증거가 확보되고, 그와 관련된 사람들이 기소돼서 유죄 판결이 나오고 하면 분위기가 좀 바뀌긴 할 거다. 대통령과 관련된 특검이어야 하는데 그건 현 단계에서는 구성하기가 쉽지 않다. 추측만으로 특검법을 내기가 어렵지 않겠나. ‘박근혜·최순실 특검’은 박근혜를 겨냥한 특검이었다. 이름도 그렇게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거론되는 특검은 대통령을 겨냥한 특검이 아니다. 채상병 특검도 임성근 선에서 끊어질 가능성이 크고, 김건희 주가조작 관련 특검이 된다 하더라도 그건 부인 문제지, 대통령이 관여된 게 아니다. 특검 대상자의 유죄가 입증된다 하더라도 그걸 대통령 잘못으로 연결하기에는 법률적으로 무리가 있다. 다만 김건희의 경우는 지금 검찰이 조사를 안 해서 그렇지, 주가조작 관련된 부분이 재판에서 인용된 것만으로도 대통령 임기 끝나면 바로 감옥 갈 수 있다.

- 향후 뇌관이 될 수 있을 만한 건 무엇일까?
= 윤 대통령 문제 관련한 부분들은 이 사람들이 법률가기 때문에 법률적 문제가 될 만한 것들부터 딱딱 증거인멸을 다 했을 거다. 근데 문제는 이준석이나 명태균처럼 상대방이 갖고 있는 건 쥐약인 거다. 결국 내부 고발이 더 나와야 된다. 우리는 그때 조응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자극적인 뉴스는 차은택, 정유라 통해서 많이 나왔지만, 실제 탄핵이 가능했던 사유들 대부분은 조응천이 조각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특검에서 법리를 구성하고, 수사 과정에서 확보된 수많은 증거물들이 헌재에 같이 제출되면서 탄핵이 된 거다. 그런 아귀가 잘 맞았다. 지금은 이준석이 어느 정도 증거를 제출할지는 모르겠으나, 검찰에 제출하면 소용없다.

- 현 정권의 위기는 계속 이어질까?
= 국민 감정이 악화된 매개가 김건희다. 대통령에 대한 원망도 있지만, 적어도 여당 지지층까지 흔들리게 하는 건 김건희다. 대통령은 김건희 문제를 끊어야 된다. 대통령이 내부의 다른 견해와 비판적 조언에 대해 자꾸 격노하지 않나. 스스로 고립됐다. 끊어내야 할 걸 끊어내지 못한다면 결국 거대한 민심의 파고를 넘기 어려울 거다.
 

“ 강경훈 기자 ” 응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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