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추석 명절 연휴인 지난 9월 15일 서울 강서소방서를 찾아 근무중인 소방대원들을 격려하며 발언하고 있다. 2024.09.15. ⓒ대통령실 제공
정부가 지방자치단체에 소방안전교부세를 내려보내면서 부여하는 ‘소방 분야 의무 투자’ 조항을 폐지할 계획이다. 해당 조항을 폐지하면 지자체는 소방 분야 지원을 줄이고, 폭넓게 규정된 안전 분야에 더 많은 소방안전교부세를 쓸 수 있다. 지역별로 국가의 소방 서비스가 불균형해 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가 지자체에 교부하는 보통교부세를 삭감하면서, 그 대안으로 지자체가 소방 예산을 끌어다 쓰도록 길을 터주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된다. 18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내년도 예산안에 반영된 소방안전교부세는 9,856억원이다. 소방공무원 인건비를 제외한 소방·안전시설 사업비는 4,376억원이다. 현행 법령에 따라 소방·안전시설 사업비 중 소방 분야에 투자하도록 의무가 부여된 금액은 3,282억원이다. 정부가 소방 분야 의무 투자 조항을 폐지하면, 해당 금액은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소방안전교부세는 행안부가 17개 광역 시도에 내리는 지방교부세의 일종이다. 소방과 안전 분야에만 쓸 수 있도록 꼬리표가 붙은 돈이다. 열악한 소방 현장의 업무 환경을 개선한다는 취지다.
소방안전교부세는 지난 2015년 담뱃값을 2,500원에서 4,500원으로 인상하면서 도입됐다. 담배 개별소비세 총액의 45%를 재원으로 하는데, 25%는 소방공무원 인건비, 20%는 소방·안전시설 사업비로 쓴다. 소방·안전시설 사업비의 75% 이상은 반드시 소방 분야에 써야 한다. 나머지 25% 이하는 안전 분야에 쓸 수 있다.
소방 분야 투자비는 화재 진압·구조·기동·정보통신 장비를 교체·보강하거나, 재난 대응 역량 강화 훈련을 진행하는 등의 사업에 쓴다. 안전 분야는 상대적으로 범위가 넓다. 교통안전과 도로 정비, 하천 유지 관리, 산불 예방·대응, 어린이놀이시설 교체 복구, 주민 대피시설 구축 등 사업을 포괄한다.
정부가 소방 분야 의무 투자 조건을 허물겠다고 하면서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소방 분야 의무 투자 비율 75%는 지방교부세법 특례(시행령 부칙)로 규정돼 있다. 해당 특례는 올해 말 일몰을 앞두고 있다. 행안부는 특례를 2015년부터 3년마다 연장해 오다가, 2023년에는 1년만 연장했다. 올해는 연장하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특례가 폐지되면, 각 광역 시도는 소방·안전시설 사업비를 소방 분야에 쓰지 않아도 된다. 지자체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라는 게 행안부 입장이다. 지역별로 소방 시설 여건이 다르니, 시도지사가 상황에 맞게 투자 분야와 비중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특례를 폐지해도 소방 시설이 열악한 지자체는 여전히 기존 의무 투자 비율인 75% 이상을 소방 분야에 쓸 수 있다는 설명이 따른다. 지난 10여 년간 소방 분야에 지속적인 투자가 이뤄져, 시설이나 장비의 노후·부족 문제가 대부분 해소됐다고도 주장한다.
특례 폐지 시, 지역 간 소방 시설 여건의 불균형이 심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균등한 소방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소방안전교부세 취지가 훼손된다는 지적이다.
전국공무원노조 소방본부 김동욱 사무처장은 “재정 자립도가 낮아 투자 여력이 없는 지자체는 소방 서비스가 취약해졌던 과거로 후퇴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공무원노조 소방본부 김종구 교육부장은 “안전 분야에는 펜스 설치나 체험관 설립 등 지자체장 성과로 내세우기 좋은 사업들이 포함돼 있다”며 “특례를 폐지하면 소방 분야 투자를 줄이고 안전 분야 투자로 대체할 심산이 크다”고 말했다.
소방 시설 여건이 상당 부분 개선돼, 특례를 유지할 필요성이 낮아졌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도 제기된다. 시설이나 장비를 주기적으로 교체해야 해, 지속적으로 투자 소요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가령 개인 보호 장비는 3년마다, 소방차는 10년마다 교체 주기가 돌아온다. 소방 인력 증가에 따른 투자 소요도 늘었다. 정부는 2017년부터 2022년까지 5년간 현장 소방 인력을 2만명 충원했다. 전기차 화재와 같은 신종 재난도 추가적인 투자 소요 요인으로 작용한다.
김 사무처장은 “소방 분야 투자 재원을 갑자기 줄이면 내용연수가 10년인 소방차를 13년, 15년 써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나마 소방에서 자율적으로 쓸 수 있는 게 소방·안전시설 사업비였는데, 이것마저 없애버리면 매번 지자체에 매달려서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공무원노조 소방본부는 지난 13일 전국 동시다발 기자회견을 열고 소방안전교부세의 소방 분야 의무 투자 법제화를 촉구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소방의 날(11월 9일) 기념식에서 “소방 조직이 세계 최고의 재난 대응 시스템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으나, 내년도 예산안은 이와 역행하는 모양새다. 윤 대통령은 올해 기념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특례 폐지 배경으로 “세수 부족 때문” 지적
행안부는 특례 폐지 결정에 앞서 지난 9일 전국 광역 시도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17개 모든 시도가 특례 폐지 의견을 냈다. 지난해 설문조사에선 10개 시도가 특례 폐지에 찬성했다. 지자체들이 효율적인 재정 운용에 무게를 둔 결과라는 게 행안부 해석이다.
정부가 세수 감소 대응책으로 특례 폐지를 추진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 많다. 정부는 지난해 59조원의 세수 결손이 발생하자 보통교부세를 7조원 이상 삭감했다. 올해도 29조 6천억원의 세수 결손을 충당하기 위해 교부세를 2조 2천억원을 불용 처리할 방침이다. 보통교부세는 정부가 용처를 정해주지 않아 지자체가 자체 사업에 사용할 수 있다.
특례를 폐지하면, 지자체는 안전 분야에 쓰던 보통교부세를 소방 분야 투자비로 충당하고, 보통교부세는 다른 자체 사업에 쓸 여지가 생긴다. 가령 올해 한 지자체가 소방·안전시설 사업비 300억원을 받아 소방 분야에 225억원(75%)을 쓰고, 안전 분야에는 75억원(25%)에 보통교부세 25억원 더해 총 100억원을 투자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내년에는 소방 분야에 200억원(66.7%)만 투자하고 안전 분야에 100억원(33.3%)을 쓰면, 보통교부세를 끌어다 쓰지 않고도 안전 분야 투자비를 유지할 수 있다. 소방 분야 투자비를 줄여 보통교부세를 추가 확보하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
김동욱 사무처장은 정부의 특례 폐지 방침 배경에 대해 “세수 부족 때문이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그는 “보통교부세는 정부 세수와 연동되지만, 소방안전교부세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일정하다 보니 안정적으로 세금이 걷힌다”며 “보통교부세가 줄어들자, 특례를 폐지해 지자체가 소방 분야 투자비를 다른 쪽으로 돌려쓸 수 있게 해주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실 관계자도 특례 폐지 추진 배경을 두고 “전반적으로 세수 부족 상황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밝혔다. 그는 “현재 지방 재정이 굉장히 타이트하다”며 “지자체로서는 소방 분야 투자 예산이 경직돼 있으니 특례 제한을 풀어달라고 요청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자체 재정이 악화된 상황에서 정부가 특례를 폐지하면 소방 재정 감소를 야기할 우려가 있고, 이는 곧 국민 생명과 안전에 직결된다”라고 강조했다.
용 의원은 현행 소방안전교부세를 소방교부세로 변경하고, 전액을 소방 분야에 사용하도록 하는 지방교부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더불어민주당 양부남 의원안은 소방안전교부세의 소방·안전시설 사업비 중 75% 이상을 소방 분야 사용하도록 한 특례 조항을 법률에 규정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같은 당 윤건영 의원안은 소방안전교부세로 교부하는 담배 개별소비세 총액의 45% 가운데, 40%를 소방 분야에 쓰도록 명시했다. 김상욱 국민의힘 의원안은 담배 개별소비세의 42%를 소방에 쓰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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