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자본의 이익을 옹호하는 화폐수량설
통화주의는 돈 풀면 물가 오른다는 논리에 바탕을 둔다. 돈 풀면 물가 오른다는 명제를 이론적으로 조금 더 가다듬은 것이 화폐수량설이다. 화폐수량설이란 화폐량과 물가가 깊게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 화폐수량설의 역사는 꽤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기원전 7세기에 쓰인 <관자>에 화폐수량설의 관점이 나타난다. <관자> “국축” 편에서는 화폐량의 증감과 상품 가격의 높낮이를 직접적으로 대응시켜서 설명하는 곳이 나온다.
근대의 화폐수량설은 중금주의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중금주의란 금과 은, 곧 화폐를 유일한 부(富)로 보는 관점을 말한다. 유럽에서 17세기 전반에 나타난 중금주의는 귀금속 화폐를 부로 간주하고 외국무역에 의해 그 부를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중금주의자들은 상품의 단순한 유통 관점에서 "좀도 녹도 슬지 않는 영원한 보화를 형성하는 것을 부르주아 사회의 소명"이라고 올바르게 표명했다. 마르크스는 이들을 근대 세계의 최초의 대변자라고 이름 붙였다. 중금주의자들의 정책은 자본의 초기 축적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화폐수량설은 화폐가 부라는 관점에 대립하면서 발전했다. 존 로크는 17세기에 화폐명목론을 주장했는데, 이는 화폐가 부가 아니라는 것을 표현한다. 화폐명목론의 관점에 선 화폐수량설은 따라서 화폐를 유일한 부로 보는 중금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을 갖는다. 화폐수량설의 함의는 중상주의에 따른 화폐의 국내 유입이 물가 상승으로 귀결될 뿐이라는 점, 따라서 보호무역 정책이나 무역 통제가 무의미 하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중상주의(중금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을 갖는다는 점에서 화폐수량설은 당시로서는 나름대로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화폐를 순전히 환상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화폐가 부의 측면을 가진다는 사실을 무시한 것은 화폐수량설의 약점이었다.
화폐수량설에 따르면 상품 가격은 화폐량에 의해 결정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상품은 가격이 매겨지지 않은 상태로 유통에 들어가고 화폐도 가치를 가지지 않은 채 유통에 들어가서 교환 과정에서 상품량과 화폐량에 비례해서 가격이 결정된다. 화폐는 부가 아니라는 관점에 따라 화폐수량설에서는 화폐가 축장되지 않고 유통에 머물면서 유통수단 기능만을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이론에 따르면 화폐는 원활한 유통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실물 부문의 생산이나 고용, 그리고 소득수준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화폐의 흐름은 가격 형성 기능을 갖지만 경제 활동을 형성하는 기능은 하지 않는다.
20세기에 들어서 어빙 피셔라는 학자는 화폐수량설을 교환방정식이라는 형식으로 명료하게 표현했다. 그는 화폐수량설을 MV=PT라는 간단한 수식으로 설명했는데, 이 수식은 오늘날에도 널리 사용된다. 여기에서 M은 화폐량, V는 화폐 유통속도, P는 평균적인 상품가격 수준, T는 상품 거래량을 나타낸다. 화폐수량설에서는 화폐유통속도와 상품의 거래량이 일정하다고 가정한다. 그러한 조건에서 화폐량 M의 증가는 평균적인 상품가격 수준 P의 상승으로 이어진다.
MV=PT라는 공식에는 많은 논쟁점이 있다. 먼저 화폐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부터 문제이다. 화폐에는 국가지폐와 신용화폐가 있는데 각각은 전혀 다른 질적인 특정을 갖는다. 국가지폐는 국가의 필요에 의해 발행되는 데 비해 신용화폐는 생산자들의 필요에 의해 발행된다. 두 종류의 화폐 유통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화폐를 정의할 때 이 두 종류의 화폐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예금화폐의 경우 만기에 따라 화폐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등등 여러 문제가 생긴다. 화폐의 정의는 너무 다양해서 사실은 화폐수량설의 주장자들마저 엄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을 포기할 정도이다.
화폐의 공급 주체인 중앙은행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도 쟁점이다. 중앙은행을 정부기구로 볼 것인가 아니면 민간기구 성격을 띠는 기구로 볼 것인가? 화폐수량설에서는 화폐공급량이 평균적인 상품 가격 수준을 결정하는 것으로 보는데, 이를 거꾸로 볼 수는 없는가? 곧, 평균적인 상품 가격 수준이 화폐량을 결정하는 것은 아닌가? 상품에 일반 제조상품과 서비스만을 포함시킬 것인가 금융상품, 부동산까지 포함시킬 것인가? 상품의 유통속도는 정말 안정적인가? 등의 논쟁점이 있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은 화폐수량설과는 달리 평균적인 상품 가격 수준이 화폐량을 결정하는 것으로 본다.
이처럼 화폐수량설에는 많은 쟁점들이 내포되어 있는데, 프리드먼은 화폐수량설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화폐량의 변화는 장기적으로는 실질소득에 무시할 정도의 영향밖에 안 준다. 둘째,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든 화폐적 현상이고 그것은 산출량에 대한 화폐량의 상대적인 증가를 동반한다. 셋째, 단기(5~10년)에는 화폐량의 변화가 산출량의 변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넷째, 화폐량의 변화는 명목소득과 실질 활동수준의 단기적인 변화를 설명하는 주요 요인이다. 다섯째, 화폐량의 증가는 단기에는 이자율을 하락시키지만 시간의 경과하면 이자율을 다시 상승시킨다. 따라서 이자율은 금융정책의 지표가 되지 못한다. 여섯째, 중앙은행은 국가 기구로 간주된다. 화폐는 국가기구인 중앙은행이 생산의 필요와 관련 없이 외생적으로 공급한다. 그러므로 중앙은행의 화폐 공급은 규제되어야 한다.
화폐수량설은 추상적으로 설명되고 있지만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 본질은 정부가 돈을 풀어서 어떤 정책을 펴는 것의 무용성을 보이는 데 있다. 그런 면에서 화폐수량설은 정부의 재분배, 고용 확대, 노동자 보호 정책에 적대적이고 구매력 유지, 물가 억제 정책에는 우호적이다. 화폐수량설은 노동자 계급의 이익에는 대립적이지만 금융자본가 계급의 이익에는 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가 돈을 풀면 실제로 물가가 오를까?
상품의 가격이 오르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보자. 먼저 화폐의 가치 하락이 상품 가격의 상승으로 표시될 수 있다. 화폐의 가치가 하락하면 상대적으로 상품의 가격이 상승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음으로 여러 상품들의 생산조건이나 수요 상황의 변화, 그리고 수입 상품의 가격 변화에 따라 상품의 가격 수준이 오를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가격 상승으로 표시되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르다. 자의 눈금이 달라져서 길이가 늘어난 것과 실제로 재려고 하는 대상이 변해서 길이가 늘어난 것은 전혀 다르다. 두 경우 모두 현상적으로는 길이의 증가로 나타나지만 변한 것이 무엇인가는 전혀 다르다. 자의 눈금이 달라진 것을 인플레이션으로, 대상이 달라진 것을 물가상승으로 구분하여 개념 정의하기도 한다.
현실의 물가 상승은 위 두 경우의 조합으로 나타난다. 화폐가치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상품의 공급 조건이 유리하게 변하면 그 상대적인 변화의 정도에 따라 가격이 오를 수도, 내릴 수도, 그리고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화폐가치가 오르는 상황에서 상품의 공급 조건이 불리하게 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곧, 물가의 상승은 화폐량의 변화와 상품의 생산 조건 변화에 근거를 둔 많은 요인들의 결합된 영향을 받는다.
화폐수량설의 관점은 돈을 풀면 곧바로 자의 눈금이 바뀌어 물가가 오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화폐량의 변화가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것이 온전히 가격 변화로 흡수될 때 뿐이다. 만약 화폐량의 증가가 실물부문에 영향을 준다면, 그리하여 고용, 생산, 소득에 영향을 준다면 화폐량의 증가는 물가상승으로 이어지지 않거나 오히려 물가를 떨어트릴 수도 있다. 화폐량의 증가가 소비와 투자를 자극하여 생산이 증가함으로써 시장에 공급하는 상품량이 증가하면 상품 가격이 하락할 수도 있다. 물론 상품거래에 필요한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화폐량의 증가는 화폐가치 하락과 물가의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한 세대 이상 세계적으로 물가가 안정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때의 상품 가격 안정은 중국을 비롯한 신흥 국가들이 세계시장에 상품 공급을 늘린 덕이 컸다. 이 시기의 특징은 화폐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데도 물가는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 후반 일본에서는 화폐수량설로는 설명하기 힘든 이른바 ‘일본 현상’이 나타났다. 1986년에서 90년까지 화폐량은 연평균 10.2%가 증가했다. 그에 비해 같은 기간의 물가상승률은 연평균 1.5%에 지나지 않았다. 최근 2~3년 사이에 나타나고 있는 세계적인 물가 상승은 화폐량이 늘어서라기보다는 미중 갈등이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공급 체인이 부서진 탓이 크다.
정리하면, 정부가 돈을 푼다고 해서 그것이 예외 없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돈을 풀면 물가가 오르는 상황이 예외적이다. 정부가 돈을 풀 때 물가가 오르기 위해서는 그 돈이 금융시장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아야 하고, 곧, 금융자산의 가격과 이자율에 변화를 주지 않아야 하고, 투자나 생산에 영향을 주지 않아야 하며, 무엇보다 저축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한 여러 조건이 들어맞을 때 정부가 돈을 풀면 물가가 오를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여러 조건이 들어맞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면에서 돈 풀면 물가가 오르리라는 생각은 차라리 미신에 가깝다.
<도움받은 자료>
관중(管仲) 지음, 장승구 외 옮김(2015), <관자(管子)>, 소나무.
니컬러스 웝숏 지음, 이가영 옮김(2022), <새뮤얼슨 vs 프리드먼>, 부키.
칼 마르크스, 김호균 옮김(2017),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중원문화.
요한 판 오페르트벨트 지음, 박수철 옮김(2011), <시카고학파>, 에버리치홀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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