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 남겨 놓아야 할 것들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에 새로 등장한 직업 중에 디지털 장의사가 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디지털 장의사는 '디지털 기록을 삭제함으로써 원치 않는 정보로 고통을 받는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직업'으로 정의하고 있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원치 않은 정보로 고통 받는 피해자’가 많아 일정한 비용을 받고 데이터를 삭제해 주는 전문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들을 디지털 장의사라는 용어로 통칭한 것이다. 디지털 장의사는 아직 국가 공인 자격증이 아니다. 한국직업능률개발원, 한국디지털평판관리협회 등에서 발급하는 일종의 민간 자격증이다. 따라서 자격증이 없어도 고객 요청을 받고 특정 데이터를 삭제해 주는 서비스를 할 수 있다.
최근 디지털 장의사가 미디어에서 크게 보도된 적이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사진 몇 장으로 음란 동영상을 만드는 딥페이크(불법 합성물) 기술이 일반화되면서 피해 본 사람들이 디지털 장의사를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누리소통망에 별생각 없이 사진 몇 장을 올렸을 뿐인데 누군가가 그 사진을 이용해 다른 사람이 나온 음란 동영상의 주인공으로 바꿔 유통하다가 경찰에 적발된 사례가 있다. 같은 대학 동문 등 여성들이 올린 사진으로 딥페이크를 만든 다음 텔레그램으로 불법 유포했고, 심지어 피해자들을 협박까지 한 40대 남성이 1심 재판에서 10년 형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피해자들은 계속 어딘가에서 유통되고 있을지 모르는 딥페이크를 지우기 위해 디지털 장의사에게 데이터 삭제를 의뢰하고 있다. 피해자 또는 피해가 예상되는 사람들은 경찰 등 수사기관에 수사를 의뢰하지만, 범죄 사실이 특정되지 않으면 수사기관이 나서기 쉽지 않다. 이런 경우 디지털 장의사는 피해자나 피해가 의심되는 사람들의 의뢰를 받아 적절한 조처를 하게 된다. 일반인들이 쉽게 할 수 없는 영역이라서 전문가들의 기술적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딥페이크로 인한 피해 말고도 디지털 장의사가 필요한 영역이 있다. 딥페이크로 피해 본 경우에는 피해 당사자가 적극적으로 자신과 연관된 불법 콘텐츠 삭제를 요청하기 때문에 비교적 진행 과정이 쉽다. 삭제를 요청한 주체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삭제를 요청한 주체가 없어도 디지털 장의사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사실 디지털 장의사가 한 직업으로 부각된 계기는 고인이 살아 있을 때 남긴 디지털 데이터를 유가족이 삭제하고 싶어 전문가를 찾기 시작한 것에서 출발했다. 기존 장의사가 이승에서 고인의 삶을 잘 정리해서 편안하게 저세상으로 가는 길을 도와주듯, 디지털 장의사 역시 고인의 디지털 유물을 잘 정리하는 일을 전담한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유품 대부분이 소각되거나 가족 등에게 전달되어 일부 사람만 고인의 흔적을 보관하게 되지만, 디지털 유물은 죽음 이후에도 소각되지 못하고 계속 유통되어 고인과 가족 모두 어려움에 빠지게 할 수 있다. 물질적 유품과 달리 디지털 유품은 디지털 코드로 만들어져 정보 네트워크 위에서 유통되면서 특별한 조처가 없는 한 영속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잊고 싶고 지우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사람은 데이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삭제하는 기술과 방법 또한 쉽지가 않다. 디지털 장의사는 고인이 남긴 디지털 유물로 인해 유가족이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도록 도와주는 일을 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그러나 디지털 장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다. 고인의 모든 디지털 유물을 완전히 삭제할 수는 없다. 특정 사이트 서버에 존재하는 기록물은 삭제할 수 있지만, 이미 타인이 공유한 게시물 삭제는 쉽지 않다. 누군가가 고의로 또는 특정 목적으로 게시물 원본을 보관하고 있다가 재활용할 가능성도 있다. 한번 올린 게시물은 사실상 영구 보존될 가능성이 크다. 도서관에 화재가 일어나면 소장하고 있던 모든 기록물이 소각되는 것과 달리 디지털 게시물은 생성과 동시에 글로벌 서버에 분산 저장되어 수시로 노출될 수 있다.
기록을 남기고 싶은 마음과 실제 남기는 일 모두 호모사피엔스의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기록을 통해 문명이 발전했고 삶이 풍요로워졌기 때문에 아날로그 시대의 중요한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했다. 적절하지 못한 기록이라도 적절하게 관리되어 고인의 피해가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디지털 데이터는 본인 단계에서 끝나지 않는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부정적 데이터는 유가족 등 지인의 취업, 사업 거래, 인간관계 등 여러 측면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 인터넷에 퍼진 개인 정보는 사생활 침해, 신분 도용의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잘못된 정보라고 반박할 당사자가 부재한 상태에서 그 피해는 온전히 유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전가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매일매일 수많은 디지털 데이터를 생산하고 있다. 그중 일부는 바로 삭제되기도 하지만 일부는 의지나 의사와 상관없이 어디 서버에 저장되어 있다가 지상을 떠난 뒤에 다시 유통되기도 한다. 다행히 좋은 내용이라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남은 가족들이 피해를 당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디지털 장의사가 적절한 유료 서비스를 제공하겠지만, 온전한 삭제는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디지털 시대에 키보드를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키보드와 함께 아침을 시작하고 키보드와 함께 하루를 마감하는 것이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사람은 죽어도 데이터는 남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시대에 오히려 죽음 이후의 내가 남긴 것들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늘 아름다운 말을 쓰기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남에게 상처 주는 글을 자제해야 한다. 지상에 남겨 놓아야 할 것은 무질서한 낙서가 아니라 따뜻한 메시지다. 죽음 이후에도 데이터가 살아남아 고인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김홍열
연세대 졸업. 사회학 박사. 미래학회 편집위원.
저서 “축제의 사회사”, “디지털 시대의 공간과 권력”
공저 “뉴사피엔스 챗GPT”, “시그널 코리아 2024”
* 이 글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www.catholicnews.co.kr)에도 실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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