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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없이 국가수용시설에 다섯 번 끌려간 참혹한 인생



이득신 작가

dsshine23@naver.com

제 27회 전태일 문학상 수상(르포분야)

 

서울의소리 기자 (프리랜서)

 

장준하기념사업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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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들레 들판

  • 입력 2025.12.20 20:00

  • 수정 2025.12.20 22:19

  • 댓글 0

[고아시설 피해자들]다중폭력 피해자 한일영씨

 

이유없이 시립아동일시보호소 끌려가

 

집으로 보낸다며 선감학원 감금생활

 

다시 삼청교육대행, 탈출하다 감옥살이

 

두 차례 시립갱생원, 사과없는 서울시

 

비극 되풀이 않기 위해 인권운동가로 변신

‘국가는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한일영 씨의 인생이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그의 삶은 개인이 국가에게 당할 수 있는 처절함을 모두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는 독재정권이 행했던 모든 불법을 고스란히 떠안고 눈물겨운 1970 ~ 80년대를 건너왔다. 나이 70을 목전에 두고 있는 그가 피를 토하며 증언한 국가폭력은 상상력의 범주 밖이라 할 만큼 잔인하고 참혹했다.

 

이북에서 월남한 조부와 부친 형제들은 건축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는 월남한 친척 사촌들 중에서 유일한 아들이었다. 당시 피아노 과외를 받을 정도로 유복했다. 용돈을 두둑하게 받을 수 있기에 주말이나 방학 때면 할아버지 댁으로 놀러가는 게 즐거움 중 하나였다. 1971년, 6학년이니 당연히 홀로 다니는 날도 많았다. 그날도 자택인 가평에서 열차를 타고 청량리역을 거쳐 성북구 삼선동의 조부 댁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경찰이 다가와 정강이를 걷어차며 영문도 모른 채 끌고 간곳이 파출소였다. 그곳에서 그는 부랑아 취급을 받으며 서울시립아동일시보호소로 넘겨진다. 군사정권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사회정화나 도시 미화 등을 이유로 부랑인과 부랑아를 단속하여 민간 시설에 강제 수용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무고한 시민이나 아동들이 강제 노역, 폭행, 성폭력, 사망에 이르는 등 심각한 인권 유린을 당했다. 경찰은 길거리에서 집을 잃은 아이나 행색이 초라해 보이는 아이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다 고아수용시설로 보내버린다. 한 씨도 역시 부랑아 취급을 받으며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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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영 씨가 다니던 가평국민학교 생활기록부. 6학년 칸에 장기결석으로 처리되어 있다.

“집이 경기도 가평이라고 말했는데, 저를 종로3가 구두닦이 부랑아로 인적 사항을 조작했습니다. 경찰이 단 한 번이라도 학교로 확인전화를 했다면 금방 신원이 밝혀질 것 아닙니까? 경찰이나 시설은 실적에 급급한 나머지 단 한 번도 저를 부모에게 돌려줄 줄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시립아동일시보호소에서도 집으로 보내달라고 하면 주먹과 몽둥이가 먼저 날아왔습니다. 그곳에서 온갖 폭력을 당하며 2년을 감금당하며 살았어요. 탈출을 시도하다 걸려 맞아 죽는 아이들도 많았기 때문에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했어요. 시립아동일시보호소 부지 한쪽에는 작은 창고가 있었는데, 시신으로 보이는 아동의 발이 덮개에서 밖으로 널브러져 있는 것을 목격한 적도 있습니다. 시신창고가 그늘진 구석에 있어서인지 늘 음습한 기운 때문에 다들 얼씬도 하지 않으려 했어요. 그 시신들은 며칠마다 한 번씩 어디론가 실려 갔습니다.”

 

어느 날 집이 경기도인 사람은 집으로 보내준다고 하는 말에 속아 다시 끌려간 곳이 경기도에서 운영하는 선감학원(당시 안산 선감도 소재)이었다. 선감학원은 1941년 일제에 의해 ‘부랑아 수용시설’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주된 수용자들은 항일 독립운동 행위자나 사회주의자 등이었으며 이유 없이 잡혀온 이들도 많았다. 사실은, 태평양 전쟁에 필요한 노역자와 전사로 동원할 인적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 아동들을 사회와 격리하고 탈출을 어렵게 만들었다. 해방 이후 관리권이 경기도로 이관되고 선감학원으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여전히 ‘부랑아 수용시설’로 활용됐다. 당시 정권은 경찰력을 동원해 부랑아, 고아, 거지를 잡아들였지만, 실상은 부모가 있는 가정의 아이들을 납치하다시피 끌고 가 수용했다. 결국 각종 인권유린과 횡령 사건 등의 비리문제가 커지면서 선감학원은 1982년에 문을 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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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입소 당시 한일영 씨의 수용자 카드. 가정불화, 구두닦이로 그의 입소 경위와 신분을 조작했다.

“선감학원에 끌려온 아이들은 ‘학원’이라는 이름과 달리 ‘교육’을 받기는커녕 섬의 개간, 농사일 등 강제 노역에 시달렸습니다. 제가 있을 당시 약 200명 정도의 원생이 머물렀는데, 매일 얻어맞고 기합 받는 게 일상이었죠. 야간 점호 시간에는 관리자가 콘크리트 바닥에 곡괭이 자루를 끌고 오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 상황이 너무 공포스러워 오줌을 지리기도 했습니다. 먹는 것 또한 말도 못하게 부실해서 거의 매일 소금국으로 식사해야 했고 심지어 구더기가 기어 다니는 음식을 먹은 날도 많았습니다. 혹한에서 일하다 동상에 걸려 왼쪽 3개의 발가락 일부를 잘라내기도 했어요.”

 

선감학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고아수용시설은 원생들 간의 폭력으로 인한 피해도 상당히 많았다. 원생들을 대상으로 한 중간 관리자 선임 및 군대식 조직 편제와 같은 폭력적이고 기형적인 구조가 시설 내부에서 작동함으로써 원생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방식을 추구하면서 함께 생활 하는 동료 원생들을 폭행하고 이 과정에서 약자는 더욱 큰 인권침해와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생활이 너무 힘들어 대부분의 원생들은 늘 그곳을 탈출하려고 했습니다. 가까운 대부도는 탈출이 조금 수월해도 금방 주민들에게 잡혀 다시 끌려오는 게 반복되었습니다. 탈출한 원생을 데려오면 주민들에게 일종의 수당 같은 것을 지급했습니다. 맞아 죽고, 굶어 죽고, 바다에 빠져 죽고, 탈출하다 죽은 원생들이 수백 명입니다. 저는 썰물 때를 골라 인근 섬으로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지요.”

 

그가 탈출한 ‘어섬’은 선감도에서 거리가 멀어 쉽게 탈출을 시도하지 못하는 곳이었지만 죽음을 각오했고, 위험하지만 잡힐 가능성이 적은 곳으로 결국 탈출한 것이다. 그러나 양식어업을 하는 어민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곳에서 나랑 같이 일할래, 아니면 선감학원으로 데려다 줄까?”라는 어민의 말에 선감학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1년여 동안 또 다시 지옥 같은 노예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기회를 틈타 재탈출에 이르게 된다. 이후 어렵게 가평의 본가를 찾아갔지만 집 주인은 바뀌어 있었고 가정은 풍비박산 난 상태였다. 실종된 한씨를 찾아 헤매면서 불화가 생긴 부모님은 이미 이혼한 뒤였다.

 

국가는 그에게 지독할 만큼 잔인했다. 개인이 국가를 처벌할 수만 있다면 그는 ‘국가를 2중 3중으로 처벌하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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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피해자들이 사망자명단 공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사진 왼쪽이 한일영 씨)

“막막한 마음에 기술이라도 배워야겠다 싶어 프레스 공장에 취직해 새 삶을 준비하던 중이었습니다. 1980년 8월 여름휴가를 받아 삼선동의 동네 아이들과 함께 뚝섬유원지 수영장으로 야유회를 갔습니다. 그곳에서 경찰이 저를 불렀습니다. 다시 영문도 모른 채 성동경찰서로 끌려간 겁니다. 죄를 지은 게 없으니 곧 풀려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저를 삼청교육대로 보냈습니다. 왼쪽 손목에 새긴 ‘삶’이라는 작은 문신을 이유로 끌려간 겁니다. 전과자도 아니고 깡패도 아닌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삼청교육대에 들어온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는 경기도 연천에 위치한 5사단에서 4주 훈련을 받았다. 곧 풀려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근로봉사대로 차출되었다. 그곳에서도 각종 훈련과 노역에 시달리다 탈출을 감행하게 된다. 가까운 신탄리역으로 도망쳐 기차를 탔지만 다음 역인 대광역에서 헌병에 붙들려 잡혀오고 말았다. 이후 그는 계엄법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재판은 졸속이었다. 변호인의 조력 따위는 꿈도 꾸지 못했다. 오전에 징역 2년이 구형되었고, 당일 오후에 징역 1년이 선고되었으며 항소는 기각되었다.

 

그리고 공주교도소에서 꼬박 1년을 살고 만기출소하게 된다. 하지만 삼청교육대 출신은 요시찰 대상자였다. 취업을 하면 경찰이 나타나 ‘삼청교육대 출신이다, 교도소 출신의 전과자다’라는 사실을 사장과 직원들에게 폭로하는 바람에 취업하고 잘리기가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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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삼청교육대로 끌려가기 전의 한일영씨 모습.

“일을 하고 싶었지만 경찰과 기관의 방해로 정상적인 직업을 가질 수가 없었어요. 하는 수 없이 폐지와 철근을 줍는 넝마주의 일을 시작했는데 다시 부랑인 취급을 받으며 시립갱생원으로 넘겨진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조폭 출신들이 반장 역할을 하며 폭력을 일삼았고 낮에는 쇼핑백을 만드는 일을 하고, 공사장 단순 잡역에도 투입됐습니다. 견디다 못해 그곳에서도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국가폭력으로 이렇게 망가진 인생이 또 있겠습니까? 노숙이나 부랑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냥 할당량을 채우려고 끌고 가는 겁니다. 2024년 2월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에게 전화가 왔어요. 저의 시립갱생원 입소 기록이 2개라는 겁니다. 선감학원을 탈출해서 집으로 돌아갔던 1977년에도 입소기록이 있다는 것이었죠. 기억 저편에 있는 악몽이 되살아났습니다. 시립갱생원 생활만 2회에 걸쳐 약 1년 정도였는데, 기록상으로는 2회 4개월만 남아 있는 겁니다. 은폐 목적으로 국가가 고의 삭제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2020년 8월 15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지옥의 선감도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제목으로 선감학원이 방송을 탔다. 경기도에서 운영과 관리를 맡았던 수용시설이기에 당시 원장을 포함한 관리자들 모두 경기도 소속 공무원이었으며, 원장을 역임했던 백근칠은 한국사회봉사회를 만들어 초대회장과 이사장을 지냈고, 서울대에 사회사업학과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그를 우리나라 사회사업학의 대부로 부른다. 잔인하기로 유명한 선감학원 원장을 지낸 이가 자선의 탈을 쓰고 시설수용을 합리화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망가뜨린 장본인이라는 사실에 경악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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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아동인권진실규명추진위원회 개소식에 함께한 피해자와 유족들(사진 중앙의 양복차림의 사람이 한일영 씨다).

한일영 씨는 현재 인권운동가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시립아동일시보호소와 선감학원의 진실규명추진회장을 맡아 인권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삼청교육대 피해자연합 단체에서도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고아수용시설에서 관리자로 몸담았던 이들이 중심으로 만든 내부고발자 단체 ‘아이즈’에서는 이사로 등재되어 그들을 지원하는 일도 하고 있다. 다시는 국가 폭력으로 인해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분노의 간절한 방식이다.

 

그의 계엄법 위반 처벌은 재심을 통해 최종 무죄판결 받았다. 진화위의 사과 권고에 따라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2022년 10월,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공식 사과했다. 선감학원이 폐쇄된 지 40년 만의 일이다. 서울시립아동일시보호소의 인권유린에 대해서 서울시는 담당공무원들이 서면으로 형식적인 사과공문을 지난 9월 보내오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도 시립갱생원의 피해사실에 대해서 서울시는 묵묵부답이다.

 

어떤 형태로든 국가가 앗아간 청춘과 무너진 인생은 돌이킬 수 없다. 아직도 정부는 국가 주도의 고아수용시설 피해자에 대한 그 어떤 공식 사과도 없다. 3기 진화위에서는 반드시 고아수용시설피해자에 대한 전수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며, 한일영 씨는 국가와 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을 때까지 인권운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처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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