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김정은 영도에 풍작”…윤석열 정부는 왜 노동신문 기사를 공개했을까

노동신문 등 북한 자료 접속 허용 집중분석

보수정권도 통일부 사이트에 수만건 공개

국힘 의원 12명도 접근 확대법안 공동발의

김남일기자

  • 수정 2025-12-26 09:11등록 2025-12-26 08:54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지난 19일 함경남도 신포시에서 지방공업공장 준공식이 진행되었다고 21일 보도했다. 공장구내 둘러보는 북한 주민들. 연합뉴스

□ 올해 농사 풍작 및 김정은 영도 선전(12.3. 노동)

o “올해에 사회주의 전야마다에서 지난해에 이어 또다시 흐뭇한 결실”, “2024년 풍요한 작황은 절세위인의 심혈·노고의 응결체, 전인민적 애국충정의 결실”

o “원수님 덕에 이루어진 풍작”, “총비서 영도의 손길 아래 2024년 풍요한 가을이 시작, 열매를 맺었으며 사회주의의 격동적인 한해가 흘렀음.”

윤석열 전 대통령이 “종북 반국가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겠다며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난해 12월3일. 통일부가 운영하는 북한정보포털(nkinfo.unikorea.go.kr/nkp/trend/list.do) 사이트에는 어김없이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 동정을 알리는 노동신문 기사가 게시됐다. 전문이 아닌 축약한 내용이지만 “원수님 덕에 이루어진 풍작” “총비서 영도” 등 김 총비서를 찬양하는 표현을 가감 없이 노출했다. 정부가 이적표현물이라며 일반 국민의 북한 매체 사이트 접속을 차단하면서도, 북한 실상을 알리기 위해 노동신문 보도 내용을 대신 전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 들어서도 북한정보포털에 공개되는 북한 동향은 윤석열 정부 때와 다르지 않다. 지난 17일에는 노동신문에 실렸던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14주기 추모 사설(“일심단결은 장군님이 물려주신 혁명의 제일재부” 등)을 요약 공개했다.

북한정보포털에는 1991년 1월 이후 북한 동향 자료 4만2317건(25일 기준)이 올라와 있다. 정치·군사·경제·사회·교육·문화 분야를 망라한다. 노태우 정부 때인 1991년 1월에 북한이 중앙방송과 한국민족민주전선방송을 통해 노태우 대통령 신년사를 “군사파쇼 통치위기를 수습하기 위한 극히 파렴치한 것” “외세를 등에 업고 승공 흡수통일의 꿈을 실현해 보려는 망발”이라고 비난했다는 내용, 김일성 주석이 신년사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을 조국통일 방안”으로 거론하고 남한에 “북을 적대시하는 법을 폐지”하라고 촉구했다는 내용 등이 공개돼 있다.

북한 노동신문은 지난해 9월24일 “우리 녀자축구대표팀이 꼴롬비아에서 진행된 국제축구연맹 2024년 20살 미만 여자월드컵경기대회 결승경기에서 일본팀을 타승하고 영예의 우승컵을 들어올렸다”라고 보도했다. 노동신문 1면 갈무리

통일부 사이트엔 조선중앙TV 편성표까지

김정은 총비서 동향은 ‘김정은 위원장 공개활동 동향’이라는 코너를 아예 따로 만들어 하루 단위로 공개한다. 가장 최근 동향으로는 △삼지연 관광지구 호텔들 준공식 참가(23일) △신포시 지방공업공장 준공식 참가(21일) △장연군 지방공업공장 준공식 참가(19일) △김정일 사망 14주기 금수산태양궁전 참배(17일) 등이다. 세부 내용도 빼놓지 않는다. 김정일 사망 14주기 참배와 관련해 “위대한 장군님의 애국업적을 전면적 국가부흥의 장엄한 새 전기로 빛내여”, “김정은 동지의 사상과 영도를 일심충성으로 받들어나갈 굳은 맹세” 등 노동신문 주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조선중앙티브이(TV) 프로그램 편성표는 ‘분 단위’로 공개한다. 북한정보포털에 공개된 12월23일치 편성표는 오전 9시5분 ‘삼지연관광지구에 새로 일떠선 호텔들이 준공’, 오전 10시1분 ‘붉은 당원증’(특집), 오후 2시16분 ‘감기치료에 효과적인 약물사용법’(건강과 생활섭생), 오후 2시20분 ‘사회주의 전면적 발전과 3대 혁명’, 오후 3시37분 ‘이딸리아 1부류 축구련맹전-렛체 : AC밀라노’(록화실황), 밤 9시59분 ‘김정은, 삼지연관광지구 호텔 준공식 참석’ 등 32개 꼭지를 담고 있다. 이런 분 단위 공개 역시 윤석열 정부 때와 동일하다.

체제 경쟁하던 55년 전 지침이 아직도

언론인·연구자는 보도 및 연구 목적으로 열람할 수 있는 노동신문·조선중앙티브이 등을 일반 국민은 볼 수 없다. 노동신문 접속 차단 등의 근거가 되는 국가정보원의 ‘특수자료 취급지침’은 남북한 체제 대결이 한창이던 1970년 2월 제정됐다. 체제 경쟁은 이미 오래전 대한민국의 압승으로 끝났다.

지난 19일 통일부는 이재명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하며 북한 사이트 접속 해제, 노동신문 등 북한 자료 공개 확대를 위한 법적 기반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홍진석 통일부 평화교류실장은 노동신문을 예로 들며 “현행법상 일반 국민은 노동신문에 대한 실시간 접근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오늘 이 순간에도 많은 언론이 노동신문을 인용해 기사를 쓰고, 연구자들은 노동신문을 연구하고 있다”며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북한 노동신문을 못 보게 막는 이유는 국민이 그 선전전에 넘어가서 빨갱이가 될까 봐 그러는 것 아니냐” “국민을 주체적인 존재로 취급하는 게 아니라 선전·선동에 넘어갈 존재로 취급하는 것 아니냐” “오히려 북한의 실상을 정확하게 이해해서 ‘저러면 안 되겠구나’ 생각할 계기가 될 것 같다” “국정원 정도는 이런 걸 봐도 안 넘어가는데 국민은 이런 거 보면 홀딱 넘어가서 종북주의자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냐” 등의 지적을 쏟아냈다.

이 대통령은 노동신문 등에 대한 접근 제한을 풀라고 지시하면서 “북한 자료를 공개하자고 하면, 대한민국을 빨갱이 세상으로 만들자는 것 아니냐는 공격이 있을 거 같다”고 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21일 “이재명 대통령이 북한 노동신문을 놓고는 우리 국민들이 못 보게 막지 말라고 호통쳤다. 헌법을 수호해야 할 대통령이 북한에 백기투항하는 것”이라고 했다. 대북방송 중단·대북전단 금지 조처를 한 이재명 정부가, 반대로 북한의 대남선전 통로는 확대하려 한다는 비판이다. 남북한 체제 경쟁이라는, 진작에 사라진 구시대 프레임을 들고나온 것이다.

북한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지난 21일 황해북도 곡산군 지방공업공장 준공식이 진행됐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2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국힘 의원 12명도 북한 자료 접근 확대법 발의

노동신문 열람 허용 등은 윤석열 정부에서도 추진됐던 사안이다. 당장 당내에서도 이 대통령의 결정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윤석열 정부 때 통일부 장관을 지낸 권영세 국민의힘 의원은 21일 “이재명 대통령의 노동신문 등 북한 자료 개방 주장에 대해 보수층은 대체로 비판적이지만, 우리 국민들을 신뢰하고 북의 자료들에 대해 개방할 때가 됐다”고 했다. “북은 체제에 대해 확신이 없는 사회이지만 우리 사회는 우리 체제에 대해 자신감이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 국민들도 북의 노동신문을 보고 현혹되기보다는 북한 체제가 어떤 언어로 자신을 정당화하려 하는지, 무엇을 숨기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꿰뚫어 볼 수 있을 만큼 성숙하다”는 이유다.

장동혁 대표가 파악을 못한 것 같지만, 지난달 18일 국민의힘 의원 12명(김기웅·김석기·백종헌·김건·이만희·권영세·김형동·임종득·이성권·김재섭·서명옥·박성훈)이 일반 국민의 북한 자료 접근을 확대하는 내용의 ‘북한 자료의 수집·관리 및 이용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공동발의했다. “지금까지 이적표현물 해당 여부에 중점을 두고 국가정보원의 특수자료 취급지침에 따라 폐쇄적으로 관리되어 왔지만, 최근 학술·언론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도 북한에 대한 이해도 제고 목적으로 북한 자료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며 북한 자료 공개 등을 국정원이 아닌 통일부에서 맡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 법안을 대표발의한 김기웅 국민의힘 의원(대구 중구남구)은 박근혜 정부에서 통일부 남북회담본부장·대통령실 통일비서관, 윤석열 정부에서 통일부 차관을 지냈다. 공동발의자인 김건 의원(비례)은 윤석열 정부에서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임종득 의원(경북 영주영양봉화)은 군 출신으로 박근혜 대통령실 국방비서관, 윤석열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2차장을, 권영세 의원(서울 용산)은 윤석열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각각 맡았다. 보수정권에서 남북관계와 군사·안보 정책에 관여했던 주요 인사들이 ‘이제는 노동신문 등에 대한 일반인 접근을 풀어도 문제없다’는 인식을 공유한 셈이다.

여당에서는 이용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서울 양천을)이 21·22대 국회에서 일반 국민의 북한 자료 접근을 확대하는 내용의 법안을 잇달아 발의했다. 지난 7월 대표발의한 ‘북한 자료의 관리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 제정안’에 대한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검토보고서(9월16일 상정)를 보면, 통일부와 국정원은 이재명 정부 들어 이미 관련 협의를 진행해 왔다.

국정원은 노동신문 사이트 등 그동안 차단해 온 60여개 북한 사이트의 접속 허용을 전향적으로 검토해 나가겠다는 입장이다. 윤건영 민주당 의원이 25일 공개한 국정원 서면 답변서를 보면, 국정원은 “과거 남북한 대결 구도에서 북한 자료 취급 인가 제도를 시행해 왔지만, 변화된 시대 상황에서 국민의 알권리 신장을 위해 통일부와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회에서 관련법이 통과되면 북한 자료 관리 주체를 통일부로 일원화하겠다고 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김남일 기자

홍시맛이 났는데 어찌 홍시라고 생각했냐 하시면 그냥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라 말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