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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작가의 ‘광주 기록’에 대한 문제제기



소준섭 전 국회도서관 조사관

namoo00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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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들레 들판

  • 입력 2025.12.24 19:00

  • 수정 2025.12.25 08:40

  • 댓글 1

"역사적 사실과 배치되는 사실은 바로잡히길"

최근 시민언론 민들레에 게재된 기사를 읽으며 한동안 잊고 살고자 했던 기억이 다시 선명하게 떠오른다. 바로 황석영 작가에 관한 기사(♬"소설가 황석영"♬…그의 삶을 노래로 부른다)이다. 해당 기사 중 ‘광주’ 관련 부분은 다소 부정확하고 오해가 있다고 판단되어 바로잡고자 한다.

 

해당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천구백팔십년 광주의 피거리를 걸었네” - 1980년 황석영 인생의 결정적 전환점이 됐어요. 그는 5.18 현장을 목격했어요. ‘피거리’, 이 단어의 무게감. 문자 그대로 피로 물든 거리였어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서 / 그 기록으로 인하여 감옥에 갇혔다네” - 1985년 출간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이건 실제 책 제목이자, 광주의 진실을 담은 증언이자, 그 시대의 양심 그 자체였어요. 2만 권이 압수됐지만, 지하에서 입에서 입으로 퍼져서 87년 6월 항쟁의 불씨가 됐어요. 그리고 황석영은 이 기록 때문에 감옥에 갇혔어요."

 

마지막으로, ‘광주가 날 놓아주지 않았고, 그 덕분에 다른 길로 가지 않고 황석영 문학의 특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라는 사실입니다.

 

2011년 신동아의 ‘광주항쟁 기록’ 보도

 

2011년 신동아 1월호는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이하 ‘넘어넘어’)가 필자가 쓴 ‘광주백서’를 윤문하고 가필하고 베꼈다고 보도하였다. 이러한 보도 내용은 물론 ‘넘어넘어’ 측이 인정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신동아 보도는 ‘광주백서’와 ‘넘어넘어’의 문장을 하나하나 정밀하게 비교 분석하면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전반부는 ‘광주백서’에 전적으로 기댔다. 골간은 물론이고, 에피소드 전개 순서, 디테일이 같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엔 ‘광주백서’ 출간 이후 수집한 내용도 섞여 들어가 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후반부에도 ‘광주백서’ 내용이 그대로 담겼으나 전체 내용의 일부일 뿐이다(신동아 2011년 1월호).”라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이러한 신동아의 치밀한 분석 보도는 보수와 진보의 진영 논리를 떠나 ‘넘어넘어’가 ‘광주백서’를 토대로 하여 만들어진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필자가 1981년 초에 쓰고 그 이듬해 전국에 배포했던 ‘광주백서’는 뒷날 1985년 전남대 복적생으로서 광주항쟁 당시 전남도청을 지키다가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었던 이재의 씨가 정상용 전 의원 등 광주 운동권의 요청으로 광주항쟁 기록을 정리할 때 “(‘광주백서’가) 여러 자료 가운데서도 가장 체계적이고 객관적으로 정리된 기록으로서 큰 도움이 되었다(집필을 담당했던 이재의 씨의 증언).” 이재의 씨가 재구성한 그 기록은 광주백서와 글의 전반적인 틀과 구성이 거의 일치하였고, 다만 시민군의 광주시내 장악 이후의 내용이 더욱 충실히 보강되었다. 신동아가 분석한 그대로이다.

 

이렇게 정리된 기록은 이후 풀빛출판사에 넘겨졌고 대중적 명성이나 책의 상업성 등 여러 조건을 고려하여 황석영 작가의 명의를 빌리기로 결정되었다. 내용은 전혀 손대지 않기로 하는 조건이었다. 다만 서문과 광주 문화운동 그룹 활동 관련 내용 등이 보강되어 1985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제목의 책이 제작되었다. 전 전남대 5·18연구소 소장 나간채 교수도 그의 저서 『광주항쟁 부활의 역사 만들기』의 ‘5·18 기록 출판운동’ 부분에서 ‘광주백서’부터 ‘넘어넘어’ 출간까지의 과정을 자세하게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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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계엄군들이 광주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진압하고 있다. 사진=5.18기념재단

‘광주백서’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필자는 1980년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에 의해 서울 학원사태 배후조종자로 전국에 지명 수배되어 1980년 겨울 광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1979년에 필자가 학생 데모 사건으로 성동구치소에서 복역하고 있을 때 알고 지냈던 조봉훈 선배를 만나 같이 살게 되었는데, 당시 그 선배는 광주에서 광주항쟁 기록을 추진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필자가 집필을 담당하게 되어 선배가 수집한 관련 자료들을 정독하고 또 많은 증언을 들었다. 故 신영일, 故 노준현, 김상집, 박몽구, 이현철, 전용호 등 10여 명은 자신이 목격하거나 경험한 사실을 필자에게 증언하였다. 특히 항쟁의 발단이 된 전남대 정문 앞 계엄군과의 충돌은 당시 정문 현장에 있었던 박몽구 씨의 자세한 증언을 청취하였고, 시민들의 무장 및 이후 중요 과정에 대한 집필에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여 증언을 들으려 노력하였다.

 

필자는 수집된 자료와 증언 가운데 너무 과장됐다고 생각되거나 사실성이 결여된 것으로 여겨지는 내용들은 최대한 배제하였다. 최대한 확인된 사실만을 기록한다는 방침이었다. 이를 위하여 당시의 상황을 취재 보도한 동아일보 등 각 신문 기사도 자세히 정독하여 참조하였다. 당시 필자는 잘 먹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장결핵과 복막염을 앓는 등 매우 쇠약한 상태였지만 스스로 막중한 임무를 깨닫고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만 해도 광주 시내 곳곳에서는 아직 하루에도 몇 차례씩 착검한 총을 손에 든 공수부대를 가득 태운 군 차량이 질주하고 있었다. 살벌하였다. 여러 사람의 목숨과 관계된 일이라 모든 일이 비밀스럽게 진행되어야 했다. 필자는 자다가도 꿈에 5월 그 날의 참상이 떠올라 소스라치게 자리에서 일어나곤 하였다. 질병으로 통증이 심한 배를 움켜쥐고 하루에 몇 장씩 조금씩 손으로 써나갔다.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5월에 들어 ‘광주백서’의 집필을 완성하였다.

 

바람 새는 골방에서 숨어 읽었던 ‘광주백서’

 

당시에 아직 ‘광주’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민주주의의 횃불은 반드시 ‘광주’를 그 출발점으로 해야 했다. 따라서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광주백서’를 몸에 지니고 서울로 올라온 필자는 1982년 1월 항쟁기록을 전국에 널리 알리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수기, 手記로 쓴 이 ‘광주백서’의 원본은 유인물로 제작, 배포된 후에도 필자가 지니고 다니다가 수배자의 신분으로서 너무나 위험하여 결국 태워 없애고 말았다). 인천 구월동 아파트단지에서 故 김근태 선배 아파트 옆에 방 한 칸을 얻고 살면서 함께 기거하던 박우섭(전 인천 남구청장), 민종덕(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 故 이범영(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박승옥 등 수배자들과 공동 작업을 통해 ‘광주백서’를 타이핑하였다. 손으로 한 장 한 장 작업하는 등사기는 남대문시장에서 박우섭 선배가 구입하였고, 타자기는 을지로 지하상가에서 필자가 구입하였다. 또 서울 중구에 있는 인쇄골목에 가서 지물포에서 종이를 구입, 재단하고 인천 구월동까지 아픈 몸에도 그 무거운 종이를 지하철을 타고 운반해온 기억이 생생하다. 타자 작업은 민종덕 형이 맡았다. 그리고 추운 겨울 구월동 방에서 재단해온 종이에 등사기로 일일이 한 장씩 42쪽 팸플릿을 약 120부 인쇄했다.

 

이 ‘광주백서’ 팸플릿이 완성된 뒤 필자는 광주에서 제작된 것처럼 꾸미기 위해 일부러 광주로 내려갔다. 광주 현지 우체국에서 원주의 이창복 전 의원 등 20여명 앞으로 익명을 써서 등기로 발송하였다. 뒤이어 기독교인권위원회(NCC) 등 서울의 여러 민주화운동단체, 서울대 인문대 학회실 등 들키지 않으면서도 용이하게 배포될 수 있는 장소에다 3~5부씩 놓아두었다.

 

당시 이 ‘광주백서’ 팸플릿은 배포되자마자 복사본으로 만들어져 바람 새는 골방에서 비밀리에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혔다. ‘광주백서’라는 명칭도 본래 제목도 붙이지 않은 팸플릿이었지만, 사람들에 의하여 ‘광주백서’라고 칭해진 것이다. 광주의 비극과 참상을 생생히 담은 이 ‘광주백서’는 그간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광주의 진실을 복원시켜 1980년대 학생운동 및 민주화운동의 불길을 노도와 같이 타오르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황석영 작가에 대한 해당 기사의 내용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부연하고자 한다. 해당 기사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넘어>로 황석영 작가가 구속되었다고 했는데, 황 작가는 그 출판으로 인해 구속된 적이 없다. 또 황 작가가 광주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필자가 알기로는 황 작가는 80년 당시 다른 도시로 피신한 상태였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과 배치되는 기록들이 이어지고 확산되어선 결코 안 될 일이다. 그러한 것들이 쌓여 결국 사회의 기본과 원칙이 무너지게 된다. 진실은 은폐되고 왜곡될 수 없다고 믿고 있기에 오늘 여기에 분명히 기록해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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