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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던 독일인들이 연말만 되면 돌변... 악귀 쫓는 의식이라고?



[고정희의 오마이 베를린] 새해 전야에 터지는 3천 억 원의 폭죽, 북유럽의 겨울을 이기기 위한 몸부림

민족·국제 고정희(yohannah)

25.12.25 11:22최종 업데이트 25.12.25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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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성탄절 조명베를린 도심 포츠다머플라츠의 가로수가 푸른 빛 성탄 조명을 받고 있다.고정희

 

독일 속담에 이르기를 소비하기 전에 1센트짜리라도 한 번 더 뒤집어 보라고 한다. 필요한 소비인가 재삼 따져 보라는 뜻이다. 이렇듯 절약이 몸에 밴 구두쇠들이 성탄절이 지나고 연말이 다가오면 딴사람이 된다. 성탄절 선물은 미리 주문을 받고 영수증까지 첨부하여 예쁘게 포장해서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놓아둔다. 맘에 들지 않으면 반품하라는 뜻이다. 실제로 성탄절 연휴 다음날이면 백화점에 반품된 선물들이 산처럼 쌓인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이 새해 전야가 되면 1억 유로가 넘는 분량의 폭죽을 하릴없이 하늘로 쏘아 올린다. 자정이 되는 순간 포화를 방불케 하는 굉음이 전국의 공기를 찢는다.

 

처음에 이 조용한 사람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광인으로 변해서 폭죽을 쏘아 올리는 것을 보고 매우 의아했다. 한해를 돌아보며 차분하게 새해를 맞이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아이들만의 놀이가 아니다. 수년 전엔 소문을 듣고 올림픽 경기장에 구경을 간 적이 있다. 경기장 앞의 넓은 광장을 그득 채운 사람들. 아버지와 아들이 팀이 되어서 미니 로켓 발사대를 설치해 놓고 폭죽을 연달아 날리는 모습이 사뭇 진지했다. 그렇게 폭죽을 쏘고 나서는 밤새 춤을 춘다. 클럽이나 파티장에 가서 추기도 하지만 대개는 친구들끼리 집에 모여서 춤을 춘다. 그날 밤은 어차피 잠은 포기해야 한다. 전 도시가 밤새 쿵쾅거리기 때문이다. 그날은 푸틴이 폭탄을 던져도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된다.

 

친구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연말연시를 왜 그리 시끄럽게 보내느냐고. 대답이 의외였다. "악귀를 쫓기 위해서"란다. 별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혹은 재미로 한다는 대답도 있었다.

 

악귀 쫓는 의식은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게르만족, 켈트족의 자연 신앙에서 유래한다. 통계를 보니 2024년에서 2025년으로 넘어가는 그 한 밤에 독일 전체에서 쏘아 올린 폭죽값이 약 1억 9700만 유로, 당시의 환율로 환산해서 3200억 원이 넘는다. 일 년 내내 그렇게 아끼고 절약하는 사람들이 한 해 마지막 밤, 단 몇 시간 만에 문자 그대로 다 날려버린다. 대체 왜?

 

성탄절?

 

이 글이 발표되는 날은 공교롭게도 성탄절이다. 그런데 독일의 성탄절은 하루의 축제가 아니다. 11월 말부터 시작되어 12월 26일까지 이어진다. 문자 그대로 성탄 '절기'인 셈이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되기 4주 전 일요일부터 성탄 절기가 시작된다. 거리에 일제히 성탄절 조명이 켜지고 수십 곳에 성탄절 장이 선다. 성탄절 장은 중세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마치 동화 속 난쟁이 집같이 통나무로 예쁘게 만든 작은 상점이 길 양쪽으로 늘어서고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과 장식품을 판다. 늘 그렇고 그렇다고 투덜대면서도 한 번쯤은 가보게 된다. 가서 글뤼바인이라고 하는 뜨겁고 달고 향기로운 포도주를 마신다.

 

각 가정에서도 전나무, 구상나무 등 상록수 가지로 집안을 장식한다. 나뭇가지를 여기저기 걸어놓기도 하지만 대개는 둥글게 화환처럼 엮은 뒤 커다란 붉은 초 네 개를 꽂아 둔다. 그리고 4주 전 일요일에 첫 번째 촛불을 밝힌다. 그다음 주 일요일에 두 번째 촛불을 함께 밝히고 4주째 일요일이면 촛불 네 개를 모두 켠다. 그럼 곧 성탄절이 된다는 뜻이다. 올해의 경우 성탄절이 목요일이기 때문에 마지막 촛불을 밝히고도 4일을 기다려야 했다.

 

이들이 신앙심이 깊어서 아기 예수 탄생을 4주 전부터 기다리는 것은 물론 아니다. 교회가 텅 빈 요즈음, 성탄절과 아기 예수 탄생을 실제로 연결하여 기억하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다. 이들에겐 그저 명절이다. 아이들은 신나지만, 어른들은 성탄절 스트레스도 적지 않다. 그날은 우리의 설날처럼 가족들끼리 보내는 것이 전통이다. 오랜만에 부모님을 찾고 형제자매를 만나게 되어 즐겁고 반갑기도 하겠지만 가족 간에 다투는 날이기도 하다. 쌓인 불만이 터져 나오고 스트레스가 폭발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못하고 꼬박꼬박 의식을 치르는 것을 보면 습관이나 전통이 무섭긴 하다.

 

크리스마스는 원래 게르만족의 동지 축제였다. 가장 긴 밤이 지나고, 해가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하는 시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북유럽 사람들은 이날을 중대한 전환점으로 여겼다. 율(Yule)이라는 게르만족의 동지 축제가 나중에 기독교의 성탄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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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장중세부터 이어져 오는 전통. 11월 말에 시작해서 1월 6일에 끝난다. 겨울철 누구나 한 번 쯤은 방문해서 달고 뜨거운 와인을 마시는 곳고정희

 

성탄절 이후의 열두 밤

 

성탄절이 지나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열두 밤"이라는 것이 시작된다. 이 역시 자연 신앙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 시기를 그들은 '시간이 멈추는 때'로 여겼다. 저승과 이승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죽은 자들의 영혼이 떠돌고, 악령들이 활개 치는 위험한 시간대다. 옛날엔 외출을 금하고 집에서 향을 태우고, 종을 울리고, 북을 두드려 악령을 쫓았다고 한다. 지금은 12월 31일 하루에 폭죽과 굉음으로 대신한다. 그 빛과 소리에 놀란 악령들이 혼비백산해서 도망간다는 것이다.

 

1월 6일이 되어야 열두 밤이 끝난다. 그와 동시에 긴 성탄 절기가 막을 내린다. 이날 저녁 거리의 조명은 꺼지고 사람들은 크리스마스트리를 일제히 거리에 내어놓는다. 그러면 시 청소과에서 수거해서 바이오연료를 만든다. 광란의 긴 겨울 축제 기간이 끝났으니 이제는 새해와 마주해야 한다.

 

베를린의 12월은 아침 여덟 시가 넘어서야 밝아오고 오후 네 시가 되면 다시 캄캄하다. 하루에 겨우 여섯 시간 해를 보는 셈이다. 그것도 희미하고 낮게 걸린, 힘없는 겨울 해다. 이 어둠이 11월 말부터 시작해서 1월 말까지 석 달을 이어진다. 햇빛 부족으로 인한 계절성 우울증은 독일에서도 심각한 문제다. 비타민 D 결핍, 세로토닌 감소, 생체리듬 교란. '겨울 시련'은 의학적으로도 설명된다.

 

그러므로 한 달이 넘는 축제는 결국 어두운 겨울을 무사히 보내기 위한 몸부림이다.

 

동화와 마법을 낳는 겨울

 

이걸 뒤집으면 다른 면도 보인다. 겨우내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덮였던 시절이 있었다. 눈 쌓인 풍경에 고즈넉이 내려앉은 어둠은 외투처럼 포근하고 아늑하다. 아이들에겐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듣는 절기이기도 하다. 북유럽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화가 가장 많이 나온 것이 과연 우연일까? 벽난로 앞에 앉아 동화를 쓰고 있는 안데르센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창밖으로는 눈 쌓인 풍경이 펼쳐졌을 것이다. 안데르센은 바로 이 북유럽의 긴 겨울밤이 만들어 낸 인물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등 전 인류를 매혹하는 마법 이야기 역시 북유럽 문화의 산물이다.

 

신데렐라, 백설 공주, 눈의 여왕, 성냥팔이 소녀. 이 모든 동화의 공통점은 어둠/추위/죽음에서 빛/따뜻함/생명으로의 이동이다. 이것은 북유럽 사람들이 매년 겨울마다 간절히 바라는 것, 그들이 매년 통과해야 하는 시련의 서사다.

 

독일에서 화약을 이용한 폭죽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7~18세기부터였다. 처음에는 귀족들 전용이었지만 19세기 후반 산업화로 저렴한 폭죽이 대중화되었다. 요즘은 슈퍼에서 12월 29일부터 폭죽을 판매한다. 환경단체들이 아무리 미세먼지를 이야기해도, 동물보호단체들이 겁에 질린 애완동물들을 이야기해도, 소방서가 화재 위험을 경고해도, 여전히 폭죽은 터진다.

 

크리스마스 시장의 수천 개 전구, 집집마다 걸린 조명, 교회의 크리스마스 미사와 콘서트, 가족 모임, 선물 교환. 그리고 열두 밤의 향 연기. 그리고 마침내 새해 전야의 폭죽. 이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북유럽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발전시켜 온 겨울 생존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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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소니센터의 화려한 성탄절 조명화려하지 않은 베를린 사람들이 성탄절 조명만큼은 마음껏 화려하게 장식한다. 일년 내낸 아끼다가 겨울에 다 쓰는 사람들고정희

 

이 겨울의 염원

 

우리는 여전히 어둠과 추위를 두려워한다. 여전히 겨울이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는 소음에 매우 민감한 편이라 폭죽은 터트리지 않는다. 그 대신 촛불을 남들보다 많이 밝힌다. 일주일에 하나가 아니라 매일 하나씩 보태고 있다. 1월 6일까지 계속할 예정이다. 이제 촛불을 켤 때마다 염원해야 할 것이 생겼다. 그리고 연말 자정의 종소리에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원할 것이다.

 

오마이뉴스에서 며칠 전 10만인 클럽 안내 메일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하다 죽지 않는 나라'를 위해 기록합니다'라는 구절이 가슴을 후볐다. 10만인 클럽이 100만인 1000만인 클럽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며 가입했다.

 

돈보다 생명이 귀한 세상이 부디 되돌아오게 하소서.

#베를린 #성탄절 #새해전야 #폭죽 #동화와마법의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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