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가 인류에게 던진 가장 강렬한 메시지는 단연 ‘자유’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따르는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는 존재라는 선언이다.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끝까지 밀어붙인 테마다. 인간에게 자유란 하늘이 내린 축복이 아니라 피할 길 없이 떠안아야만 하는 형벌에 가깝다. 그래서 자유는 삶을 치장하는 장식품이 아니라 존재의 뼈대다. “자유는 곧 책임”이다. 자기 삶의 이유를 끝내 남에게 미룰 수 없다는 처절한 자각이다.

하지만 구조주의의 파고가 덮치면서 이 자유의 빛은 바래기 시작했다. 인간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언어라는 감옥 안에서 생각하고 사회의 보이지 않는 규칙 안에서 움직이며 제도가 그어놓은 선 안에서만 판단할 뿐이라는 분석이다. 주체는 무대 뒤로 밀려났고 그 빈자리를 거대한 ‘구조’가 꿰찼다. 자유로운 인간의 형상은 희미해졌고, 언어와 사회가 배정한 좌표를 따라 그럭저럭 살아가는 수동적 인간이 그 자리에 섰다. 자유는 순수한 결단이 아니라 늘 특정한 틀 안에서만 허용되는 ‘한도’가 되어버렸다.

지금 한국의 현실도 이 철학적 구도와 궤를 같이한다. 공식문서 어디에도 ‘식민지’라는 글자가 박혀 있지는 않지만 주권국가의 자유가 온전히 제 발로 서 있는 모습은 아니다. 실존주의적 자유가 구조주의의 틀에 갇혔듯, 한국의 자주는 ‘한미동맹’이라는 일방적 구조 속에 편입되어 있다. 형식적으로는 독립국이지만 안보의 핵심 판단과 외교적 감각은 언제나 동맹의 문법을 먼저 살핀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가보다 동맹의 구조가 어디까지 허용하는가를 먼저 셈한다. 그 지점에서 자주는 더 이상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허가된 ‘재량권’에 불과하다.

이러한 현실은 구체적인 제도와 관행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2006년 ‘전략적 유연성’ 합의 당시 한국은 미국의 세계 군사전략 변화와 주한미군의 유연성을 존중하기로 했다.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지역 분쟁에 휘말리지 않는다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문구는 우리가 휘말릴 수 있음을 자인한 것이기도 하다. 또 SOFA(주한미군지위협정)에 따르면 미군은 한국인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우월적인 상전이다. 한국은 미국의 ‘항공모함’일 뿐이다.

독립국이 군사 작전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도 기괴한 현실이다. 노무현 정부가 2012년까지 전작권을 회수하기로 합의한 것을 그 후 우파 정권들이 합의를 파기하고 다시 돌려준 결과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미연합 군사훈련 또한 단순 방어를 넘어 전 영역, 범정부, 유엔사 참여, 인도·태평양 안보까지 포괄하는 거대 구조로 확장됐다. 협력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지만 이는 한국의 전략적 판단 공간을 동맹이라는 구조 안에 단단히 묶어두는 장치다.

오늘날 한국이 직면한 문제는 자주가 구조 속에 박제되어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정치경제적으로 누구 못지않은 선진국이다. 하지만 국가의 명운이 걸린 결정적 판단 앞에 서면 공기는 달라진다. 미국을 설득하기보다 미국의 속내를 먼저 살피는 데 익숙하고, 한국의 안보를 우리만의 언어로 설명하기보다 미국의 전략 언어를 번역해서 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스스로 길을 내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깔린 레일 위에서 겨우 움직이는 나라다. 실존주의의 자유가 구조주의 아래에서 왜소해졌듯 한국의 주권도 한미동맹 하에 ‘망가진 주권’으로 전락했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그 기저에 개인적 자존과 국가적 자주라는 근원적인 갈망이 흐르고 있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 권력의지)가 자기 삶을 스스로 고양하려는 동력이었다면, 주체사상은 이를 집단과 국가의 차원으로 확장한 형태다. 사르트르가 인간은 선택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역설했다면, 주체사상은 국가 역시 제 앞가림을 스스로 결정하고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자유가 존재의 근거이듯 국가의 자주는 국가 존재의 당위다.

 

그렇기에 한국의 모순은 더욱 선명해진다. 자유를 외치면서 자주는 비워두는 모순,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정작 국가적 판단은 외부의 승인을 기다리는 굴종, 그것이 바로 ‘숭미주의’의 실체다. 미국과 손을 잡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을 주인으로 모시고, 미국의 생각을 앞질러 대필하며, 미국이 짠 질서 밖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태도는 명백한 문제다. 친미와 숭미는 엄연히 다르다. 친미가 국익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면 숭미는 정신적 예속에 불과하다. 동맹은 수단이 아니라 운명이 되고, 그 운명 앞에서 주권은 박제로 남는다.

물론 그 견고한 구조를 단칼에 베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후기구조주의와 해체주의가 우리에게 준 가르침은 희망적이다. 구조는 무너뜨릴 수 없는 절벽이 아니며, 제도와 언어의 체계는 결코 완벽하게 닫혀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틈이 있고 균열이 있기에 그 사이로 새로운 길을 낼 수 있다. 후기구조주의는 구조를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구조의 안쪽에서부터 균열을 내고 그 속에서 다른 의미와 선택의 경로를 찾아냈다. 한국에 절실한 태도가 그것이다.

한미동맹을 당장 파기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동맹은 어디까지나 국가 이익을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주객이 전도되어 수단이 정신의 주인이 된 비정상을 바로잡아야 한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반미라는 감정이 아니라 ‘자주’라는 이성이다. 한국의 이익을 한국의 문장으로 서술하고, 한국의 위협을 한국의 잣대로 판단하며, 한국의 선택에 따른 책임을 오롯이 우리가 지는 일이다. 동맹은 그 토대 위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동맹의 이름으로 자주의 권리를 미뤄두는 관성부터 끊어내야 한다.

실존주의가 말한 자유는 결국 인간이 제 삶의 주인으로 우뚝 서는 일이었다. 구조주의는 그 주인이 사실은 구조의 포로임을 폭로했지만 후기구조주의는 다시 그 구조의 틈새를 열어젖혔다. 이 철학적 여정은 오늘날 한국이 걸어가야 할 길과 정확히 겹친다. 한미동맹이라는 구조 안에서 한국의 자유는 수축했다. 할 일은 명확하다. 구조를 현실로 인정하되 그것을 거역할 수 없는 천명으로 떠받들지 않는 것이다. 구조의 틈을 벌려 주권과 주체성을 다시 숨 쉬게 해야 한다. ‘자유로울 자유’는 개인에게만 허락된 사치가 아니라 나라가 지켜내야 할 존엄이다.

대한민국이 진정한 자주독립국으로 거듭나려면 마음속에 깊게 뿌리박힌 숭미주의의 그늘부터 걷어내야 한다. 미국과 협력하되 미국의 그림자로 살지는 말아야 한다. 함께 가되 기대지 말고, 공조하되 예속되지 않으며, 동맹하되 우리 머리로 판단해야 한다. 실존주의적 자유가 한 개인을 세우듯 자주는 한 국가를 세운다. 구조에 억눌린 자유를 일깨우고 동맹의 틀에 갇힌 주권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 그것이 지금 우리 정치가 마주한 지상 과제다. 자주독립국 대한민국은 박물관의 구호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여기서 회복해야 할 실존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