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 유슬기 <그 집의 언어>
김도희 기자 | 기사입력 2026.05.02. 21:35:58
지난 4월 20일 장애인의 날, 여러 명의 정치인이 카메라 앞에서 수어를 선보였다. 청인의 음성 소개에 맞춰 몇 초간 어설프게 손을 움직이고 사진을 남겼다. 장애인의 날을 기념하는 짧은 이벤트, 수어의 쓰임을 자신들의 '이미지 관리'에 가두는 불편한 연출이었다.
미디어에서 농인은 대게 결핍의 대상으로 묘사된다. 농인이 사용하는 수어를 독립적인 문법 체계를 가진 완전한 언어로 이해하지 않고, 농인이 공유하는 농문화와 농정체성을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으로 구분하는 청인 중심의 시선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1년에 딱 하루, 수어를 이미지 연출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정치인의 모습 역시 농인을 시혜의 대상으로 대하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책 <그 집의 언어>는 "필요에 따라 이리저리 변형되는", "미디어가 원하는" 방식으로 농인을 소개하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주체성이 강조된다. 책 속에서 수어는 작가의 모어이자, 농인인 그 부모님의 언어다.
이 책을 쓴 유슬기 작가는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청인 자녀 '코다'(Children of Deaf Adult)다. 겉보기엔 고요하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뜨겁고 시끌벅적한 농인의 세계와 청인의 세계를 수없이 잇고, 이해하고, 통역해 왔다. 몇 차례의 탈피를 거쳐 코다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된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농인의 세계에서는 청인으로, 청인의 세계에서는 농인의 딸로 살며 겪은 기록이 <그 집의 언어>에 담겨있다.
많은 이가 헷갈리지만, 수어는 한국어와 다르다. 수어는 문법부터 손, 표정 등 움직임을 활용해 한국어와는 표현 체계가 다른 독립된 언어다. 한국어는 "맑은 하늘"이라고 말하지만, 수어는 "하늘, 맑다"라고 표현한다. '하늘'이라는 대상을 먼저 제시하고, 수식어는 뒤에 온다. 또한 수어는 한국어와 달리 조사가 없다.
"얼굴 표정과 몸짓이 문법이 된다. 눈썹을 올리면 질문이 되고, 고개를 끄덕이면 긍정을 뜻하게 되며, 입 모양과 표정의 미세한 변화로 감정의 결이 달라진다. 한국어에서 문장에 담긴 뉘앙스나 어조가 하는 일을 수어에서는 온몸이 한다."
수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기도 한 작가는 사람들에게 '왜 수어를 배우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대부분이 "수어를 배워서 봉사하고 싶다"고 답한다. 사람들에게 왜 영어를 배우냐고 물으면 "영어를 배워서 미국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요"라고 말하지 않는데, 유독 수어는 선행과 봉사로 인식됐다. 시혜적 시선을 깨는 과정은 중요했다.
작가는 유튜브 채널 <유손생>을 운영한다. '수어로 자기소개하기', '농인을 만났을 때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수어' 등 수어를 쉽게 배울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와 함께 코다의 일상이 담긴 브이로그를 올린다.
미디어는 농인을 "불편함을 참고 사는 착한 사람"으로만 그리기에, "우리의 삶"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 직접 나선 것이다. "수어는 어떤 언어인지, 코다가 무엇인지, 그래서 우리 삶이 정말 불쌍한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작가는 말했다. 미디어가 전통적으로 재현해 온 농인과 코다에 대한 고정관념을 직접 깼다.
농인과 수어를 향한 일상 속 '차별의 언어', 혐오 표현에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작가의 모어이자 부모님의 언어를 구경거리로 삼는 것, 희화화하는 것 역시 그를 아프게 한다. "차별적인 언어를 고친다는 건 단지 단어 하나를 바꾸는 게 아니다. 그 단어로 상처받았던 누군가의 존재를 존중하는 일이다. 나에게는 내 부모를 지키고 그들의 언어를, 나아가 그들의 존재를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 밖에도 '듣는 사람' 중심의 사회, 목소리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시스템 안에서 농인이 겪는 차별적 요소를 드러낸다. TV 뉴스의 긴급 자막, 은행 문자, 정부 안내문, 공익 광고, 범죄 예방 안내 등 생활에 필요한 중요한 정보들이 농인에게 얼마나 불친절하게 전달되고 있는지 짚는다.
TV 화면 오른쪽 하단으로 밀려난 수어 통역의 배치에 대해서도 꼬집었다. 수어 통역은 미디어 안에서 여전히 부가적인 정보, '의무 이행' 정도로만 여겨지기에 그 작은 화면은 도통 커질 기미가 없다. 작가는 오른쪽 구석으로 밀려난 수어 해설 화면에 대해 이렇게 지적한다.
"그 작은 창을 따라잡으려면 온 신경을 한곳에 모아야 한다. 청인에게 볼륨을 최저로 낮춘 TV를 보게 하는 일과 같다. 청인들은 말이 잘 안 들리면 리모컨으로 소리를 키운다. 작은 칸에 갇힌 수어 통역사도 리모컨으로 키우거나 줄일 수 있으면 좋겠다."
작가는 스스로 "농수저"를 들었다고 표현한다. "쉽게 말로 꺼낼 수 없는 경험들과 농인 부모님의 억울한 삶의 증인이 되어 살아야 했던 시간에도 여전히, 기꺼이 코다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매년 4월 마지막 일요일은 '엄마 아빠 농인의 날'이다. 동시에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전 세계 코다들이 서로의 존재를 기억하고 축하하는 코다의 날이기도 하다. 소리가 아닌 몸, 감각으로 전달된 사랑은 작가를 더 단단하게 했다. "코다로 사는 건 힘들었지만 그 경험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 그는 "엄마 아빠처럼 다정해지고 싶다"고 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손끝으로 느낀 다정함을, 작가의 언어로 이미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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