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아빠, 엄마는 쉬고 나만 등교하는 날."
"학교에서 급식 대신 빵과 우유를 먹는 날."
"기본 시급에다 보너스를 얹어 받는 날."
"5월 연휴의 첫날?"
노동절이 무슨 날인지 말해보라고 했더니, 아이들의 입에선 예상치 못한 대답이 무시로 튀어나왔다. 적어도 노동절이 제정된 역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노동의 가치를 인식하고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날 정도의 답변은 나올 줄 알았다. 기대는 이내 실망으로 변했다.
명색이 고등학생인데, 답변은 초등학생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이들 대다수가 노동절의 유래는커녕 그 뜻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직장인들이 1년 중 하루 쉬는 날로만 알고 있을 따름이다. 여전히 아이들에겐 노동자보다 직장인, 회사원, 근로자 등이 익숙한 용어인 듯했다.
부러 중학교 때까지 노동절에 관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있는지도 물었다. 예상대로, 손을 든 아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대개 그때가 중간고사 기간이어서 노동절인지도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당일 쉬는 부모님조차 노동절이 무슨 날인지 일언반구조차 없었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5월 1일 노동절은 꼭 한 달 전인 4월 1일 만우절보다도 못 한 기념일이었다. 만우절 때는 몇몇 말썽꾸러기들이 교사를 속이기 위해 작당하기도 하고, 교사 역시 수업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기 위해 농을 걸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만우절을 모르는 아이는 없을 것이다.
만우절은 알아도 노동절은 잘 모르는 아이들
요즘 아이들이 기억하고 챙기는 기념일은 달력에 적힌 날짜만큼이나 많다. 밸런타인데이부터 화이트데이, 블랙데이, 로즈데이 등 매월 14일은 아예 10대의 '고유 명절'이다. 그런가 하면, 3월 3일 삼겹살데이와 11월 11일 빼빼로데이까지 기념일 챙기기는 또래의 놀이문화가 됐다.
되레 3.1절이나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 등 국경일이 뒤로 밀려난 모양새다. 하물며 공휴일이 아닌 4.3 추념일이나 4.19 혁명과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기념일 등은 그들에게 여느 평일과 다름없는 날이다. 지금껏 노동절도 뜻 모를 숱한 기념일 중의 하나였다.
올해 처음으로 노동절이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만시지탄이지만, 은연중에 금기시되어 온 노동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원년으로 기록될 것이다. 전쟁과 분단의 모순을 온몸으로 경험한 기성세대야 그렇다 쳐도, 철부지 아이들조차 대놓고 말하길 꺼린 게 사실이다.
노동절이 생겨난 계기인 1888년 미국 시카고의 '헤이마켓 사건'을 주제로 수업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산업혁명 이후의 역사는 세계 노동자들의 투쟁사였다는 것 역시 첫 수업 내용으론 어울리지 않았다. 노동이라는 단어에 들씌워진 편견을 씻어내는 게 급선무였다.
노동절의 역사는 노동이라는 단어에 이물감이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발동해 스스로 찾아 공부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가 생겨나고 제국주의로 변모해 가는 과정 역시 뒤따라 깨닫게 될 내용이다. '백지상태'인 아이들에게 노동절의 유래를 추측해 보라고 질문을 던졌다.
공산당이 창립된 날이라거나 러시아 혁명 기념일 아니냐는 답변이 먼저 나왔다. 노동을 공산주의와 결부시켜 이해하는 뿌리 깊은 편견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황당하게도 북한 노동당을 떠올리는 아이도 있었는데, 노동절을 남북 화해 분위기의 정치적 산물인 양 오해했다.
근로기준법이 제정된 날 아니냐는, 나름의 일리 있는 추론도 있었다. 참고로, 근로기준법이 최초 제정된 건 1953년 5월 10일이다. 이후 1997년 3월 13일에 변화한 시대에 맞게 대대적으로 정비했다고 이력이 기록되어 있다. 나 역시 몰랐는데, 아이들 덕분에 알게 된 내용이다.
엉뚱하게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날이라고 답하는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에게 전태일은 노동자라는 보통명사와 동의어처럼 쓰인다.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대견했지만,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시발점으로 여기는 1970년 11월 13일을 모른다는 게 당황스러웠다.
'노동'에서 공산주의 떠올리는 아이들... 왜곡된 교육의 결과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되었지만, 요즘 아이들에게조차 노동운동의 역사는 굳이 알 필요가 없는, 아니 알아서는 안 되는 역사다. 그들조차 노동이라는 단어에서 공산주의와 북한부터 떠올리는 현실은 감추고 왜곡한 교육의 결과다. 노동에 대한 편견은 고래 심줄보다 질기다.
색안경을 끼고 노동을 이해하다 보니, 노동조합은 흔히 반사회적 단체로 인식된다. 나아가 철 지난 색깔론까지 덧씌워져 종북 세력의 온상이자 범죄 집단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믿기 힘들겠지만, 10대 아이들의 노조에 대한 맹목적인 반감은 60대 이상의 어르신들 저리 가라다.
아이들은 "지금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장래에 노동자가 된다"고 스스럼없이 비아냥댄다. 노동자란 이윤을 발생시키는 토지나 공장 등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을 통칭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노동자는 천대받고 가난하고 비루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안다.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는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노동)를 제공하는 사람'이다. 학교에서 배우지도 않았고 어디서 읽어본 적도 없으니, 근로기준법에 나오는 노동자의 정의조차 낯설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몇은 되레 "그럼 월급 주는 사장 말곤 모두 노동자냐"며 따져 물었다.
어이없게도 임금의 많고 적음을 노동자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여기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노동자는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고 여름 땡볕에서 땀 흘려 일하는 사람으로 정형화되어 있는 듯했다. 곧, 사무직 '화이트칼라'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식이다.
"교사인 나도 노동자이며, 너희들 대다수가 장래 노동자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스스로 미래의 자신을 비하해서는 안 될 일이다."
좋은 봄날 선물처럼 얻은 공휴일 노동절을 앞두고, 이렇게 수업을 매조지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맞는 연휴인 만큼 과제도 한 가지 내주었다. 누가 봐도 노동자가 아닌데 노동자로 분류되는 사례와 분명히 노동자인데 노동자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를 조사해 오라는 것!
누구는 당장 AI에 물을 것이고, 다른 누구는 인터넷 블로그를 샅샅이 뒤지게 될 테다. 부모님이나 다른 선생님들을 귀찮게 하며 답을 알아내려는 오지랖 넓은 아이도 있을 것이다. 이든 저든 노동에 대한 아이들의 왜곡된 인식을 바루는 데 큰 도움이 될 게 틀림없다. 아무튼 노동절이 공휴일로 공식 지정됐으니,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
#노동절#노동조합#근로기준법#공산주의#헤이마켓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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