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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꿰매는 일" 그의 바늘이 스친 곳에 남은 작품, 그리고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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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자수의 한 땀, 한 땀에는 여인들의 마음이 담겨 있어요. 그것은 바느질이 아니라, 시간을 꿰매는 일이지요."

그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다가오는 인기척에도 바람처럼 가볍고 깊은 인사만을 건넬 뿐이다. 창으로 스며든 봄빛이 천 위에 내려앉고 그 빛을 따라 바늘이 느리지만 흔들림 없이 오간다. 오랜 세월 몸에 밴 손놀림이다.

곱게 차려입은 한복에는 지나온 세월과 삶의 깊이가 고스란히 담겨 있고, 그 시간의 결이 여사의 얼굴에 잔잔히 스며 있다.

그의 손끝에서 이어지는 것은 단순한 문양이 아니다. 이름 없이 이어져 온 여인들의 삶과 사라질지 모를 생활문화의 기억이다. 작업실을 채운 자수 작품들은 공예품을 넘어 하나의 기록처럼 다가온다. 한 땀씩 쌓아 올린 시간 위로 강릉 여인들의 삶과 전통이 오롯이 이어진다. 봄이 짙어지는 어느 날, 강릉의 한 작업실 겸 전시실에서 자수장 김순덕(80)여사를 만났다.

작업실에서 바느질에 몰두한 김순덕 여사, 한 땀씩 쌓인 자수 작품들에 강릉 여인들의 삶과 전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진재중

오죽헌에 스며든 또 하나의 예술

강릉 오죽헌은 오랜 세월을 품은 유적지로, 신사임당과 이이의 정신이 깃든 공간이다. 이제 이곳은 단순한 유적을 넘어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 한켠에 강릉자수 무형유산 김순덕 여사가 작업실과 전시실을 마련했다. 그의 자수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규방에서 이어져 온 삶의 기록이자 시간의 언어다. 그의 바느질은 오죽헌이 간직한 시간 위에 또 다른 시간을 덧입히며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고 있다.

작업실에는 화려함 대신 깊이가 있다. 비단 위에 수놓인 꽃과 새, 자연의 형상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기억의 흔적처럼 다가온다. 관람객들은 그 앞에서 발걸음을 늦춘다. 소리 없는 이야기들이 실의 결을 따라 흐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과거는 박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 속에서 다시 숨 쉬며 이어진다. 오죽헌이 품어온 정신과 김순덕 여사의 자수가 만나는 순간, 공간은 하나의 살아 있는 서사가 된다. 바늘 끝에서 이어지는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을 품은 공간. 오죽헌은 지금도 새로운 이야기를 짓고 있다.

▲오죽헌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죽헌동에 있는 조선중기의 목조 건물로,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혼이서려있다. ⓒ 진재중

"양말 꿰매던 손으로 평생을..."

그의 시작은 거창하지 않았다.

"가족들 양말을 꿰매던 게 시작이었죠."

7남매의 맏딸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집안일의 중심에 서 있었다. 중학생이 되던 무렵에는 어머니 곁에서 바느질을 배우기 시작했다. 특별한 배움이라기보다는 생활의 일부에 가까웠다. 이불을 만들고 해진 옷을 기워 입히는 일은 늘 반복됐고 바느질은 기술이라기보다 가족을 위한 책임이었다.

"어머니가 하시는 걸 보면서 따라 했어요. 그땐 그냥 해야 하는 일이었죠."

그에게 바느질은 선택이 아닌 일상이었다. 집안을 꾸리고 가족을 돌보기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 속에서 익숙해진 손놀림이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가사 시간에 처음으로 자수를 접하게 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이미 바느질에 익숙했던 그는 자수 작업도 금세 손에 익혔고 결과물 역시 또래들보다 뛰어났다. 이를 본 선생님의 칭찬은 그에게 작은 전환점이 되었다.

"바느질이 익숙해서인지 자수가 손에 잘 맞았어요. 선생님께 칭찬도 많이 받았고요."

그 칭찬은 단순한 격려를 넘어, 바느질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바꾸어 놓았다. 가족을 위해 해야만 했던 바느질이 점차 '잘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스스로 선택해 해보고 싶은 일로 의미가 확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익숙했던 일상 속 기술이 개인의 재능과 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곱게 차려입은 한복 속에 깃든 김순덕 여사의 자수 인생, 강릉자수의 깊이를 고스란히 전한다. ⓒ 진재중

스승을 만나 전통이 되다

1975년, 김순덕 여사의 삶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강릉 지역 여성 모임인 예림회에 참여하면서부터다. 그곳에서 만난 성기희 교수(전 가톨릭관동대 가정학과)는 그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예절도 가르쳐주시고, 전통음식이랑 자수까지 하나하나 직접 보여주셨어요."

그가 배운 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었다. 전통을 대하는 자세와 삶의 방식이었다. 예림회에서 전통자수 분과 위원장을 맡은 그는 성 교수 곁에서 보조 역할을 하며 배움을 쌓았고, 이후에는 직접 강단에 서며 전통을 전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가르치다 보니까, 우리 규방 문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더 깊이 알게 됐어요."

배움은 자연스럽게 나눔으로 이어졌고, 그 나눔은 전통을 이어가는 힘이 됐다. 한 사람의 손에서 시작된 바늘질은 이제 더 많은 이들의 손으로 전해지며 사라질 뻔한 규방의 기억을 다시 삶 속으로 불러내고 있다.

사라질 뻔한 규방의 기억을 자수로 되살려, 다시 삶 속으로 이어가고 있는 김순덕 여사 ⓒ 강릉자수보존회

강릉수보, 지역의 정체성을 품다

"강릉수보에는 혼이 서려 있어요."

그는 강릉의 수보를 조심스럽게 펼쳐 보이며 이를 단순한 공예품이 아닌 스승 성기희 교수와의 인연이자 이어가야 할 유지로 여긴다. 강릉수보자기는 혼례용 보에서부터 떡 목판을 덮는 목판보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가 다양하다. 무엇보다도 독특한 색채와 문양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나무와 꽃, 새와 풀, 그리고 작은 벌레들까지, 이러한 소재들은 강릉의 여류 화가이자 문인인 신사임당의 '초충도'와도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한 땀 한 땀에 마음이 담겨 있지요."

그는 수보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느낀 감정을 이렇게 전한다. 자연을 사랑하던 소박한 마음,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던 간절한 바람이 바늘 끝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작업을 할 때마다 옛 강릉 여인들의 정성과 삶의 무게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고 말한다. 강릉수보는 단순한 공예를 넘어, 마음을 전하는 하나의 문화적 언어다. 그것은 지역의 정체성을 품고, 강릉 자수가 지닌 깊이를 오늘에 이어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김순덕 여사는 혼례용 보부터 떡 목판을 덮는 목판보까지, 다양한 형태로 이어져 온 강릉수보자기의 쓰임과 아름다움을 담았다. ⓒ 강릉자수보존회

반세기 장인의 길, 강릉 자수의 맥을 잇다

2003년 전국 공예 대전에서 '다기와 자수 찻상'으로 주목을 받은 데 이어, 2009년 강원 공예 대전에서 '자수 이야기'로 수상한 김순덕 자수장은 이후 꾸준한 작품 활동과 전승 노력을 인정받아 2017년 강원특별자치도 무형유산 '강릉전통자수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반세기 넘게 강릉 전통 자수의 맥을 이어온 그는 지역 자수 문화의 정체성을 지켜온 대표적인 장인이다.

2025년 전승발표회에서는 그간 축적해온 기예와 미감을 한자리에서 선보였다. 전시에는 강릉 자수의 특징을 집약한 작품들이 중심을 이루었으며, 강릉수보와 조각보, 여의주보 등 전통 문양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작업들이 공간을 채웠다. 작품들은 지역 고유의 색채와 조형미를 뚜렷하게 드러냈고, 정교한 침선과 풍부한 색감은 각각의 작품에 깊이를 더하며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특히 초충도를 자수로 재해석한 작품은 전통 회화를 섬세한 바느질로 풀어낸 사례로 주목받으며 큰 관심을 끌었다.

김순덕 자수장에 복원된 방사문 혼례용 강릉자수 보자기(강릉수보) ⓒ 강릉자수보존회

속도보다 깊이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에게도 작업을 잠시 멈춰야 했던 시간이 있었다. 눈을 실명하거나 안구가 위축될 수 있는 망막박리라는 예상치 못한 질환이 찾아온 것이다. 수를 놓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여러 차례의 수술과 회복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한동안 바늘을 잡을 수 없었다. 익숙하게 이어오던 작업이 멈추자 일상도 함께 느려졌다.

"빠른 것보다 한 땀, 한 땀이 더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수를 놓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지요. 바느질이 제 건강을 회복시켜주었습니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자수의 의미와 가치를 설명했다. 다시 작업을 시작했을 때는 예전과 같은 감각이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바늘을 잡는 것부터 서툴게 느껴졌고 손의 움직임도 뜻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작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천천히 다시 손을 움직였고 익숙함을 되찾기 위한 과정을 이어갔다. 그 시간 속에서 그는 작업을 대하는 마음에도 변화가 생겼다고 말한다. 예전처럼 빠르게 완성하는 것보다, 한 땀 한 땀에 집중하는 과정 자체가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자수를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감각과 집중, 그리고 마음이 함께 쌓여 완성되는 작업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김순덕 여사의 한 땀의 바느질은 기술을 넘어 삶의 시간이 된다. ⓒ 진재중

이건 복원이 아니라, 시간을 겹쳐놓는 작업입니다

그는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자수로 재해석하며, 이를 단순한 모사가 아닌 자신의 시간을 덧입혀 새롭게 쌓아가는 작업으로 여긴다. 자연을 관찰하고 그 모습을 한 땀 한 땀 옮기는 반복 속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다시 마주한다. 초충도에 담긴 자연의 질서와 생명의 섬세함이 자신이 지나온 시간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저에게 자수는 옛것을 그대로 되살리는 재현이 아니라, 지금의 감각으로 풀어내는 해석입니다. 전통의 이미지 위에 오늘의 숨결을 더해 새롭게 이어가는 일이죠.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작업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자수는 재현이 아니라 해석이다. 과거의 이미지 위에 현재의 감각을 더하며 전통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는다.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도 사라지지 않게 이어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초충도를 자수로 재해석한 작품은 그의 작업 세계를 잘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오랜 시간 쌓아온 감각과 삶이 더해진 또 하나의 창작이다. 화면 위에는 자연의 섬세함과 함께 장인의 내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초충도, 김순덕 자수장에 재해석된 자수 초충도 8폭 병풍 ⓒ 강릉자수보존회

그가 가장 크게 고민하는 것은 '지속'이다

그는 전통자수의 기법을 익히는 데서 나아가 그것을 계속 살아 있게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 생각은 자수를 일상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시도로 이어졌다. 목걸이와 브로치 같은 장신구부터 보석함, 찻상, 윷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활 소품에 자수를 적용하며 전통을 자연스럽게 현재의 삶 속으로 스며들게 했다. 이러한 작업은 전통을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쓰임을 통해 다시 호흡하게 만든다.

"예쁘지 않아요." 작품을 바라보며 말을 이은 뒤, 팔순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수줍은 미소를 보인다. 그의 작품들은 전통 문양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더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높은 이유는 전통이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문화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전통이 실제로 쓰일 때 비로소 생명력을 가진다고 말한다.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외국인들에게 호응을 얻은 눈꽃무늬 자수 목걸이 역시, 그러한 생각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동계올림픽 눈꽃무늬 자수 ⓒ 강릉자수보존회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자수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는 전통 공예가 새롭게 주목받는 흐름 속에서도 기대와 함께 경계의 시선을 놓지 않는다.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겉모습만 차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현실을 우려하며, 무엇보다 '진정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강조한다. 오랜 시간 축적된 기법과 지역 고유의 정서가 함께 담겨야 비로소 전통이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이 빠진 작업은 단순한 모방에 그친다는 생각이다. 전통은 상품이 아니라 이야기와 시간이 켜켜이 쌓인 문화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에게 자수는 기술을 넘어 삶 자체다. 특별한 극복의 서사로 설명하기보다 그저 자신의 시간을 이어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힘든 시기를 지나 다시 바늘을 든 지금도 그는 같은 자리에서 같은 리듬으로 작업을 이어간다. 오랜 세월 함께해 온 일이기에, 끝까지 의미 있고 아름답게 완성하고 싶다는 바람을 품고 있다.

한편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또 다른 핵심어는 '규방 문화'다. 과거 여성들의 생활공간이었던 규방은 단순한 일상의 장소를 넘어, 감정과 바람을 표현하던 창작의 공간이었다. 그 안에서 탄생한 자수와 보자기는 삶과 예술이 맞닿아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결과물이다.

김순덕 여사의 전통자수는 목걸이와 브로치 같은 장신구를 비롯해 보석함, 찻상, 윷판 등 다양한 생활 소품에 자수를 입혀, 전통 문양이 일상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모습을 보여준다. ⓒ 강릉자수보존회

장신구부터 생활 소품까지 자수를 더해, 전통을 오늘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이어가고 있다. ⓒ 강릉자수보존회

한 땀, 그 느린 기록

천 위를 오가는 바늘질은 더디지만 끊어지지 않는다. 그 흐름 위에는 이름 없이 이어져 온 여성들의 삶과 강릉이라는 지역의 시간이 함께 포개져 있다. 그는 전통이란 먼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라 말한다. 오늘도 그의 바늘은 묵묵히 천 위를 지나며, 사라질지도 모를 이야기들을 조용히 이어간다.

인터뷰 막바지, 그는 바느질에 눈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말한다.

"강릉자수에는 여인들의 마음이 담겨 있어요. 단순한 바느질이 아니라, 삶의 희로애락을 한 땀 한 땀에 담아내는 작업입니다."

김순덕 자수장에게 자수는 생업을 넘어 삶의 방식이다. 시간과 시련 속에서도 손에서 바늘을 놓지 않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이다. 그의 꾸준한 손길은 거창한 사명이라기보다, 자신의 삶을 성실히 이어가는 태도에 가깝다. 그리고 그 과정이 누군가에게 작은 울림으로 닿기를 바란다.

강릉자수는 그렇게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르는 이 조용한 계승은 전통이란 오래된 유산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숨 쉬는 시간임을 다시금 일깨운다.

여든이 넘은 손길로 자수를 이어가는 그의 모습에서, 삶을 묵묵히 이어가는 태도와 잔잔한 울림이 전해진다. ⓒ 진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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