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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등 육사 입학, 수학 과락할 뻔, 쿠데타 '일등' 전두환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현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저서에 [함석헌 평전], [고문과 학살의 현대사], [해외입양 그 이후],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퀘이커교도. 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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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읽는 『반헌법행위자열전』 1권

12·12 군사반란과 광주학살의 최종책임자

육사생도 지지 시위 이끌어 박정희 눈 들어

특유의 기질로 하나회 조직, 군 내 친위세력

12·12와 5·17로 번번이 법과 제도 짓밟아

삼청교육대와 언론학살, 녹화사업도 책임

빠른 사면이 12·3 내란 불러낸 것은 아닌지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1권을 펼쳤다. 전두환(1931~2021) 항목 첫 줄이 눈을 잡아끈다.

"12·12 군사반란 및 5·17 내란 수괴이자 광주학살 원흉."

수괴(首魁). 우두머리 괴수. 대법원이 1997년 확정한 표현이다.

그런데 이 수괴는 1995년 구속됐다가 1997년 무기징역이 확정됐고, 1997년 12월 사면됐다. 구속에서 사면까지 2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광주에서 쓰러진 사람들이 흙 속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1959년의 전두환(위키피디아)

226등 입학, 수학 과락 면제, 그래도 쿠데타는 일등

전두환은 1931년 1월 18일 경남 합천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본인 순사에게 부상을 입히고 만주로 도주하는 바람에 가족 모두 만주 생활을 하다 1941년 대구로 이주했다. 빈민촌에서 약 배달을 하며 또래보다 늦게 학교를 다녔고, 1952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성적은 228명 중 226등. 스스로도 1차 합격자 발표에 끼지 못하고 "보충생"으로 들어갔다고 밝혔다.

육사 시절 수학 과락을 면하기 위해 동기생에게 개인교습을 받았다. 그 동기생은 "전두환의 끈질긴 요청 때문에 황금 같은 외출시간을 거의 다 빼앗겼다"고 회고했다. 졸업 성적은 156명 중 126등. 성적으로는 도저히 상위권에 들 수 없었던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오직 하나, 기질과 투지였다. 축구부에서 실력이 아닌 기질로 주장이 된 그는 나중에 군대에서도, 정치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정상에 올랐다. 능력이 아니라 기질로. 법이 아니라 투지로.

 

1985년의 전두환(위키피디아)

하나회, 그리고 박정희의 친위대

1961년 5·16 쿠데타 당시 서울대 ROTC 교관이던 전두환은 육사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위를 이끌어냈다. 이것이 박정희(1917~1979)의 눈에 들었다. 박정희의 비호 아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육사 11기들은 비밀 사조직 '하나회'를 만들었다. 군부 내 친위대가 필요했던 독재자와 빠른 출세가 필요했던 야심가의 이해가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하나회 전체가 예편 위기에 몰렸으나 박정희가 수사 확대 중지를 지시해 살아남았다.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피살됐다. 기회가 왔다.

 

1985년의 전두환(위키피디아)

12·12, 5·17, 그리고 광주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을 겸직하며 수사권을 장악했다. 1979년 12월 12일, 그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1929~2002)를 불법으로 연행했다. 12·12 군사반란이다. 계엄사령관의 지휘를 받아야 할 보안사령관이 그 상관을 체포한 것이다. 법은 이미 그날 밤 죽었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은 전국 비상계엄 확대를 강행했다. 5·17 내란이다. 바로 다음날, 광주에서 계엄군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이 시작됐다. 전두환은 강경 진압을 지시했다. 열흘 동안 수천 명의 시민이 살상 당했다. 공수부대 특전사 부대원들이 광주 시내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대검으로 찌르고 곤봉으로 내려쳤다. 계엄군의 총에 쓰러진 사람들 가운데는 학생도, 노인도, 아이를 안은 어머니도 있었다.

 

전두환.(Chun Doo-hwan, South Korea's Most Vilified Ex-Military Dictator, Dies at 90 - The New York Times)

세계사 속의 동류, 제복을 입은 학살자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자연스럽게 역사 속 닮은 인물들이 떠오른다.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비델라(Jorge Rafael Videla, 1925~2013)다. 1976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해 이른바 '더러운 전쟁(1976~1983년)' 동안 3만 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인을 납치·고문·학살했다. 비델라는 2010년 반인도 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2013년 사망했다. 그는 끝내 풀려나지 않았다.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1915~2006)와도 닮아 있다. 1973년 쿠데타로 민주정부를 뒤엎고 권력을 장악해 3000명 이상을 죽이고 수만 명을 고문했다. 피노체트는 1998년 런던에서 체포됐다. 스페인 법원의 국제 체포영장이 집행된 것이다. 영국 법원이 그의 신병 인도를 심리하는 동안 런던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결국 건강을 이유로 칠레로 돌아갔고 2006년 사망할 때까지 최종 처벌은 면했다.

전두환은 1997년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 선고받았고, 같은 해 12월 특별 사면됐다. 추징금은 사망할 때까지 대부분 내지 않았다. 29만 원밖에 없다는 말을 남긴 채.

 

1976년의 호르헤 비델라(위키피디아)

삼청교육대, 언론학살, 녹화사업

광주 학살 이후 전두환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상임위원장으로 실질적 최고권력자에 올랐다. 이 자리에서 그가 한 일들을 보면 혀를 내두르게 된다. '삼청계획'을 승인해 6만 명 이상을 영장도 없이 군부대로 끌고 가 가혹한 훈련과 폭력에 시달리게 했다. 사망자만 수십 명에 이르렀다. 언론인 700여 명을 강제해고하고 언론사를 강제통폐합했다. '녹화사업'으로 군 내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을 사찰하고 프락치로 만들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해 김대중(1924~2009)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5공화국 내내 박종철(1965~1987) 고문치사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이 줄을 이었다. 전두환은 이 모든 것의 최종 책임자였다.

 

1981년의 전두환과 이순자(위키피디아)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아르헨티나는 비델라를 종신형에 처했다. 칠레는 피노체트를 국제체포영장으로 런던에서 붙잡았다. 스페인은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 총통 사후 40년이 지나 그의 유해를 국가묘역에서 파냈다. 이 나라들이 완벽한 정의를 실현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독재자를 2년 만에 사면해 골프장으로 보내지는 않았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 )이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 나는 영국에서 생중계로 지켜 보았다. 계엄군이 국회를 향해 움직이던 그 밤, 나는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떠올렸다. 전두환이 2021년 11월 23일 사망할 때까지 광주 피해자들에게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반복되는 반헌법의 문법과 무관하지 않다.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반드시 다른 옷을 입고 돌아온다.

『반헌법행위자열전』은 전두환을 "12·12 군사반란 및 5·17 내란 수괴이자 광주학살 원흉"으로 기록했다. 대법원이 확정한 표현이다. 그런데 그 수괴는 사면됐고, 추징금을 내지 않았고, 사과하지 않았고, 자연사했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 법정의 방청석에 앉은 우리가 이 기록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유일한 심판이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광주 5·18 국립묘지에 있는 추모관. 이곳은 학살범 전두환이 자행한 광주 학살 희생자들의 유해가 안장된 곳이다.(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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