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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중 해결 못하면..." 광주항쟁 한 달 전 계엄군이 강원도로 향한 이유

[1980사북, 늦은 메아리] 신군부가 강요한 기억과 싸우는 광부들... 광주 이전에 사북 있었다

26.05.15 06:39최종 업데이트 26.05.15 06:39

특별기획 '1980 사북, 늦은 메아리'는 박봉남 감독의 영화 <1980 사북> 전국 상영을 계기로 공론화한 사북 사건을 단지 과거사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국가의 대응, 공동체와 시민 사회의 변화 과정을 추적 기록해 국가 폭력의 기억과 치유 과정을 시민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기자말]

1980년 12월 20일 <조선일보>에는 송년 특집 데스크 좌담이 실렸다. 이 좌담에는 안병훈 정치부장, 송형목 경제부장, 김대중 사회부장 등이 참여했다. 당시 한 데스크는 전두환의 5.17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정치 안정의 분기점으로 높이 평가하면서, "사북사태"와 "광주사태"를 권력의 공백이 초래한 무질서한 사태의 대표 사례로 언급했다.

권력의 질서가 잡히기 시작한 5.17을 하나의 분기점으로 삼는다면 그 이전까지는 권력의 공백상태가 사북사태, 학생데모, 광주사태 등을 촉발 시켰습니다. 이러한 사태들은 어떻게 보면 모두가 70년대의 유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진통이 아닌가 해요. 이러한 상처를 안은 채 5.17을 기점으로 양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개혁주도세력이 등장해서 정치 안정을 서서히 잡아갔고, 사회정화로 일반의 질서가 꽤 잡혀져가는 현상을 보였어요. (취재 데스크 좌담 "대전환의 진통, 격변 '80'", 1980년 12월 20일 <조선일보> 3면)

나란했던 이름, "사북사태"와 "광주사태"

1980년 12월 23일 <경향신문>은 '국내 10대 뉴스'를 발표했다. "평화적 정권교체… 새 정치 개막"이라는 헤드라인으로 '전두환 대통령 취임'을 10대 뉴스로 언급한 가운데, '광주사태'와 '사북광부소요'도 이름을 올렸다. '과격분자', '무법천지', '약탈', '치안부재', '폭동', '암흑천지', '파괴'… 이 때만 해도 광주와 사북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80년 12월 27일 <동아일보>도 "격변 충격의 '80 본사 선정 10대 뉴스"를 5면에 실었다. "광주사태"와 "사북사태"는 10대 뉴스의 처음과 끝을 장식했다. '유혈사태', '혼란', '행정공백', '무장한 폭도', '치안공백 사태', '유혈 충돌'… 두 사건을 바라보는 당시 언론의 시각은 거의 비슷했다.

1980년의 마지막 사설에서 <조선일보>는 "한 체제가 무너지면 그 체제가 내포했던 여러가지 대소 문제가 일시에 노출되어 혼란과 갈등이 뒤따르게 마련"이라면서 사북에서 광주로 이어지는 흐름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봄이 되면서부터 술렁거리기 시작한 학원가는 족벌체제 반대로부터 어용교수 배척 그리고 집체훈련 거부로 고양되고 교내시위로부터 가두시위로 번져나갔다. (중략) 열기는 횡적으로 노동계에로 비화하여 마침내 그 충격적이던 사북사태를 빚고 말았던 것이다. 이 같은 일련의 불안정 요인의 상승에 물리적 제동이 가해졌고, 그 제동 과정에서 현대사에서 가장 뼈아픈 광주사태라는 상처를 입고 말았던 것이다.("다난의 승화를 기약하며 -1980 경신년을 보내는 사념", 1980년 12월 31일 <조선일보> 사설)

똑같이 나흘 만에 알려진 '사북'과 '광주'

영화 <1980 사북> 스틸컷엣나인필름

1980년 4월 21일 월요일 강원도 사북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노조사무실 앞. 어용노조에 항의하는 광부들을 경찰 당국이 사찰하면서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사찰 행위가 발각된 경찰은 도망치면서 농성 광부들에게 지프차를 돌진시켜 광부 원일오(당시 36세)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그대로 도주했다. 흥분한 광부들이 사북지서를 파괴하고 경찰은 이웃 마을 고한으로 피신했다. 사북 광부들은 그날 저녁부터 사북 전역을 장악하고 광업소 본사와 동원탄좌 객실에 모여 있던 중앙정보부 조정관, 보안대 요원, 경찰간부들을 급습하였다. 이 날은 사북 사건의 성격이 노조 민주화 운동에서 공권력에 대항한 광부와 부녀자들의 항쟁으로 전환된 핵심 분기점이었다.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에 제출된 기무사 자료에 따르면 "1980년 4월 22일 오후 2시 30분 서울 경찰 기동타격대 병력 2개 중대(간부 6명·병사 275명) 현지 급파"라는 기록이 있다. 서울기동타격대 병력이 특별열차 편으로 사북역을 통과하여 고한역에 내리는 것을 목격한 일부 주민들 사이에 공수부대 투입 소문이 났고 광부들은 이에 대비해 화약고와 무기고를 먼저 장악하기 시작했다.

1980년 4월 22일 23시 11특전여단 61대대 지휘관 40명과 병사 249명이 사북사건 진압을 위해 원주 1군사령부로 배속되었다(육군본부, <계엄사>, 1982, 383쪽). 1980년 4월 23일 오후 4시 한계령에서 훈련 중인 11특전여단 62대대 지휘관 40명과 병사 290명이 1군사령부로 추가 배속되고, 같은 날 19시 10분경 육군본부는 11공수여단 62대대에 사태 진압을 위한 부대 이동 지시를 하달 한다. 병력 투입 시점은 4월 25일 BMNT(동틀 무렵)으로 결정되었다(기무사 자료, <동원탄좌 사태 진전상황2>).

그러나 4월 24일 새벽, "오늘 중 해결 안 되면 말 못할 어려움이 온다"고 호소한 김성배 강원도지사의 중재로 협상이 극적 타결됨에 따라 11공수 병력은 실제 사북에 투입되지 않았다. 이날 <경향신문>과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주요 일간지는 사건 발생 나흘만에 처음으로 "사북사태"를 보도했다. 제11공수특전여단 61, 62대대는 4월 29일 20시를 기해 부대 배속이 해제되고 원대 복귀하였다.

한달 뒤인 5월 21일 경향신문 1면에는 "광주 일원 소요"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지난 18일부터 연3일째 전남 광주 일원에서 소요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면서 계엄사령부의 발표를 전하는 형식으로 사건 발생 나흘 만에 "광주사태"를 처음 보도했다. 같은 날 <동아일보>도 꼭 한달 전 '사북'을 보도할 때처럼, '광주' 소식을 나흘 만에 1면 톱 기사로 전했다.

계엄사령부는 지난 18일부터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평온을 회복하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사북에서 경찰의 지프차 돌진 공격으로 대규모 항쟁이 촉발되었던 1980년 4월 21일로부터 정확히 한 달이 지난 5월 21일 수요일. 전라남도 광주시 전남도청 앞과 금남로 일대에서 시민들과 계엄군 사이에 대치 상황이 발생했다. 시민들과 대치하던 계엄군은 전남도청 앞에서 갑자기 집단 발포를 시작했고 당시 중3 학생이던 김완봉(15세)군 등 34명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흥분한 시민들은 총기를 탈취하여 시민군을 조직했고 계엄군은 광주 외곽으로 물러났다. 광주의 치안은 시민군과 수습대책위원회로 넘어갔다. 이 날은 광주 사건의 성격이 민주화 시위에서 계엄군에 대항한 시민 무장항쟁으로 전환된 핵심 분기점이었다.

사북과 광주의 계엄군... 11공수특전여단

5월 21일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시위대를 향해 집단 발포를 한 부대 중 하나는 사북에 투입 예정이었던 11공수특전여단 62대대였다. 이 부대는 3공수, 7공수와 함께 시위대 진압을 맡은 주력 부대였으며, 곤봉과 대검을 사용하여 시민들에게 잔혹한 유혈 진압을 가했다.

군 기록과 계엄군 진술을 종합하면, 11공수여단은 5월 19일 새벽 4시부터 제7공수여단 33, 35대대로부터 광주 작전 거점을 인계 받았다. 이후 오전 10시 30분에 바로 62, 63대대 병력을 광주로 증원했다. 11공수 62대대는 5월 19일 15시경 도청 앞 금남로 남쪽에서, 63대대는 전남여고 맞은편 중앙국교 앞 사거리에서 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들은 '주남마을 민간인 학살'의 장본인이기도 하다. 11공수여단 62대대 부대원들은 5월 22일 새벽 광주에서 화순으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주남마을에 매복해 있다가, 5월 23일 오전 9시 30분쯤 나주 방면으로 향하던 미니 버스 1대에 무차별 사격을 가해 탑승객 18명 중 15명을 사살했다. 생존자 중 중상자인 청년 2명도 11공수여단 본부 작전보좌관의 처리 명령에 따라 인근 야산에서 총살 당했다. 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증언자는 여고생 홍금숙이었다.

다음 날인 5월 24일, 제63대대는 주남마을에서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하던 중 송암동 효천역 부근에서 전투교육사령부대(보병학교 교도대)와 오인 교전을 벌였다. 이 교전으로 대대원 9명이 사망하자, 63대대는 이에 대한 화풀이로 송암동 인근 마을을 수색하며 초등학생 전재수부터 6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불문하고 민간인을 마구 학살했다. 이때 시민군이었던 김종철과 주민 권근립, 김승후, 임병철 등이 사살됐다.

5월 27일 새벽 11공수특전여단은 전남도청으로 진입하여 최후 진압 작전을 벌였다. 도청에 남아 있던 시민군과 학생들이 마지막 항전을 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최종 진압되었다.

사북을 위해 투입 준비를 마쳤던 11공수를 주력부대로 광주민주화운동이 진압된 바로 다음날, 5월 28일 <경향신문>에는 "사북사태 관련 모두 26명 구속"이라는 짤막한 기사가 실려 사북에서 일어난 사태도 일단락이 되었음을 알렸다.

1980년 5월의 마지막 날을 장식한 기사는 '국가보위비상대책원회가 설치되었고, 그 위원장에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가 취임했다는 소식이었다.

항쟁의 봉우리와 사건의 골짜기

선과 악이 뚜렷이 구분되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건에서 선악의 구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때때로 폭력의 가해자가 폭력으로 되갚음 당하기도 하고, 폭력의 피해자가 어느 순간 폭력으로 대항하기도 한다. 가해와 피해가 교차되는 지점이 얼마간 존재하는 것이다.

각자가 어느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는가, 어느 시점에서 사건을 바라보았는가, 그리고 무엇을 주로 보고 들었는가에 따라 사건에 대한 개인의 평가는 종종 일반적인 평가와 궤를 달리한다. 시위 진압 과정에서 숨지거나 크게 다친 당사자와 군경의 가족들에게는 시위 군중에 대한 원망과 반감이 앞설 뿐 '독재타도'니 '민주화'니 하는 대의는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반면, 시위 과정에서 군경의 총칼에 숨지거나 큰 피해를 입은 학생과 시민들에게는 계엄군에 대한 원한과 분노가 치밀어오를 뿐, '질서'니 '법치'니 하는 말들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가 되는 것은 당사자의 기억이 아니라 집단의 기억이다. 사북과 광주는 바로 여기서 극명하게 갈렸다. 사북에 대한 집단의 기억은 심하게 왜곡되었고 광주에 대한 그것은 엄정히 바로잡혔다. 시간이 갈수록 '광주'는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사북'은 더 많은 사람들이 잊었다.

우리는 광주에서 맞부딪힌 두 방향의 폭력 중에서 더 압도적인 계엄군의 폭력을 기억한다. 그것은 '푸른 눈의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카메라에 비친 시민 항쟁의 장면들로서, 절망적으로 고립된 광주 시민을 측은히 바라보는 외부자의 시점이다. 그리하여 광주는 국가 폭력에 처참하게 짓눌린 힘없는 시민들의 고난사이자 영웅적인 저항의 서사로 기억된다.

다큐영화 <5.18 힌츠페터 스토리>의 한 장면(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그러나 우리는 사북에서 맞부딪힌 두 방향의 폭력 중에서 한때 압도적이었던 광부들의 폭력을 기억한다. 그것은 사북 광부들에게 환영받지 못한 <신아일보> 하두만 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된 폭력의 현장으로서, 억울한 희생양으로 붙잡힌 여인에 주목했던 특종 뉴스의 시점이다. 그리하여 사북은 시위 군중에 패퇴한 공권력의 수난사이자 통제력을 잃은 원시적 분노의 서사로 기억된다.

신아일보 하두만 기자가 찍은 사진 중 한 장면을 실루엣으로 재구성한 이미지(제공: 정선지역사회연구소)정선지역사회연구소

그렇게 광주는 민주화의 봉우리가 되었고, 사북은 그늘에 가려진 채 깊고 깊은 사건의 골짜기로 남아 있다.

집단 기억을 가른 두 개의 상징

역사적 기록물은 당대에 있었던 모든 일이 아니라 기록자가 선택한 사건과 인물의 이야기이고 사진과 영상으로 포착된 장면이며 소멸의 위험에서 살아남은 유물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런 기록, 사진, 유물을 통해서만 과거를 재구성할 수 있다. 어떤 장면은 부각되고 어떤 장면은 지워지며, 어떤 사람은 기억되고 어떤 사람은 잊힌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일이 십수 년 동안 '광주사태'로 폄하 되었지만, 1995년 12월 대한민국 국회가 같은 사건을 '5.18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한 것은 집단의 역사적 기억을 형성한 적절한 상징과 그에 맞는 진실의 발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5.18 당시 보안사가 군의 정보 활동을 위해 채증한 사진. 2019년 당시 국회에서 공개된 바 있다.오마이뉴스 자료사진

1980년 4월 사북 광부들의 항쟁을 무법 천지로 비난했던 신군부와 언론은, 한 달 후 계엄군에 맞섰던 광주 시민들의 항쟁을 똑같은 식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그에 반하는 증거를 넘치도록 확보한 2026년의 한국 사회는 광주에 대한 그런 비난에 그다지 현혹되지 않는다.

1980년 4월 21일 경찰의 비인도적인 차량 공격으로 쓰러진 광부들의 처참한 모습은 사북의 상징이 되지 못했다. 항쟁의 도화선이 된 이 결정적 장면은 철저히 은폐 되었다. 신군부는 경찰의 원죄를 가리기 위해 애꿎은 피해 여성의 결박 사진을 사북 사건의 상징으로 내세웠다.

▲사북 광부들의 울분으로 전도된 국가폭력의 이미지사북 광부들의 울분으로 전도된 국가폭력의 이미지(제공: 정선지역사회연구소)정선지역사회연구소

그 후 국가의 압도적인 보복 폭력에 철저히 유린 당한 사북의 이야기는 지난 40년 동안 제대로 포착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북의 진실을 잘 알지 못하는 2026년의 한국 사회는 과거의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80년 4월 사북에서 터진 일이 몇십 년 동안 '사북사태'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2026년 4월 대한민국 국회가 같은 사건에 대해 국가 사과 이행을 결의하고 나서도, 왜곡된 집단 기억을 바로잡을 적절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둘러싸고 심각한 기억 투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사북의 늙은 광부들과 그들의 편에 선 아주 적은 친구들은, 46년이 지난 지금도 신군부가 강요한 기억과 맞서며, 또 한편으로는 자꾸만 딴 곳으로 향하는 당국자들의 발걸음을 돌려 세우며 이중의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사북항쟁 시기 국가폭력에 대한 공식 사과 이행 촉구 사북사건 피해자 및 유가족 기자회견사북항쟁 제46주년을 1주일 앞둔 14일 오전 사북민주항쟁동지회 주최로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에서 '사북항쟁 시기 국가폭력에 대한 공식 사과 이행을 촉구하는 사북사건 피해자 및 유가족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이정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정선지역사회연구소의 1980사북 특별페이지(www.jcrc.kr)에도 실립니다. 저자는 정선지역사회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사북항쟁과 국가폭력>(지식공작소, 2021)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광주민주화운동 #사북사건 #1980사북 #국가폭력 #11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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