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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다빈치”라 불리는 ‘괴물 디자이너’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4/01/22 18:56
  • 수정일
    2014/01/22 18:5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등록 : 2014.01.22 15:35수정 : 2014.01.22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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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성 넘어 문화재가 된 유럽의 공공 물건들
반면, 강남대로에 들어선 저 기둥들은 대체…

"그는 우리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다."

 

누가 이런 찬사를 들을까요? 게다가 세계 디자인을 이끌어가는 나라로 손꼽히는 영국 디자인계의 거물인 테렌스 콘란이 이렇게 추켜세울 정도라면 말입니다.

 

 

이렇게 칭찬받는 그 사람이 디자인한 의자입니다. 어째 좀 이상합니다. 의자 맞나? 우주선 의자?

 

이 의자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오히려 더 의문이 생깁니다. 진짜 의자일까 싶어집니다. 그러나 의자 맞습니다. 이름은 `Spun,.

 

이 의자는 의자만 보면 의자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의자라고 하면 어떻게 앉는 것인지, 왜 기울어져 있는지 더 궁금해집니다.

 

 

실은 이 의자에는 `놀이 기능'이 있습니다. 이렇게.

 

 

의자에 앉아서 뱅뱅 돌릴 수 있습니다. 실제 앉으면 처음엔 좀 불안하지만 곧 익숙해집니다.

 

근데 저렇게 돌아가는게 무슨 쓸모가 있냐고요? 재밌잖습니까. 360도 돌아가는 의자, 새로운 의자의 탄생입니다.

 

이건 재밌자고 만든 의자입니다. 그리고 이 의자를 만든 `우리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불리는 디자이너, 영국이 자랑하는 현재 최고 스타 디자이너가 바로 저 의자에 앉아서 즐거워하는 아저씨, 토마스 헤더윅입니다.

 

 

이런 쓸데 없어 보이는 걸 만드는 이가 감히 레오나드로 다 빈치라고? 이런 생각도 드실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온갖 공상만 했지, 실제 그의 아이디어가 물건으로 만들어진 것은 없었죠.

 

 

반면 헤더윅은 공상을 실제로 다 연결시킵니다. 이 사람의 최고 히트작은 이것입니다.팔각형 조형물 같이 생긴 저 구조물은, 바로 `다리'입니다.

 

 

이 다리는 런던 패딩턴에 있습니다. 그런데, 다리는 다리인데, 도대체 어떻게 건너다니는 것일까요?

 

 

 

요상하기 짝이 없는 이 다리는 움직이는 다리, 곧 `도개교'입니다.

 

작은 도개교지만 다리가 들리는 방식은 기존 도개교와 전혀 다릅니다. 다리가 돌돌 말립니다. 그래서 이름도 `롤링 브리지'입니다.

 

 

"모두들 다리가 들리는 걸 좋아합니다. 그러나 기존 방식은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새로운 방식을 추구했습니다. 다리 양쪽 끝이 키스를 하는 방식으로 접히는 다리를 생각했습니다."

 

 

헤더윅은 늘 쓸데없어 보이는, 그러나 재미있고, 그 이전에 발상을 뒤집는 디자인을 선보여 왔습니다. 그가 단숨에 세계 최고 디자인 스타로 떠오른 것은 바로 이런 발상의 전환 덕분이었습니다.

 

 

# 영화 <주라기 공원>이 낳은 새로운 건축, 새로운 디자인 세계를 사로잡다

 

이 헤더윅이 자신의 천재성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 것은 지난 상하이엑스포였습니다.

 

엑스포는 세계 건축 디자인의 올림픽 같은 곳입니다. 각 나라들은 가장 기발하고 새로운 자국 전시관으로 승부합니다.

 

엑스포에 지어지는 국가 전시관은 무려 250개. 평상시 볼 수 없는 특별하고 놀라운 발상이 아니면 눈길조차 끌기 어려운, 그래서 각국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축가나 디자이너들이 자존심을 걸고 경쟁하는 전쟁터입니다.

 

 

상하이 엑스포를 앞두고 영국도 영국관을 가장 돋보이는 전시관으로 선보이기 위해 설계 공모를 합니다. 헤더윅은 여기에서 세계 최강 영국 건축가들을 제치고 1등을 차지합니다. 아이디어의 힘 덕분이었습니다.

 

 

그가 영국관의 주제로 내세운 것은 `식물'이었습니다.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식물을 종합적으로 연구한 나라고, 온실부터 식물원까지 다양한 식물학 공간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나라입니다.

 

"나는 지금껏 세상에서 나무를 싫어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헤더윅은 그래서 식물을 주제로 골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나무의 모태, 곧 `씨앗'이었습니다. 영국이 예상을 깨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식물 종자를 보유한 나라, 그리고 그만큼 식물, 친환경, 유기농, 그린에 강한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는 전시관을 주제로 공모에 나섰고, 이 아이디어로 1등을 따낸 것입니다.

 

 

그러면 씨앗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이게 핵심이죠.

 

헤더윅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영화 <주라기 공원>에서 힌트를 얻습니다.

 

 

<주라기 공원>은 공룡을 복원해내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멸종된 공룡의 유전자를 찾아냈을까요?

 

공룡이 살던 시기의 모기에서 추출합니다. 공룡의 피를 빨아먹은 모기의 내장에 남아있는 공룡 핏속 유전자를 뽑아낸다는 발상입니다. 그 모기가 썩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저렇게 송진에 묻혀 그대로 호박으로 응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디자인 관점에서 볼 때 저 호박 속의 모기는 호박이란 물질 속에 들어있어 특별해보입니다.

 

`바로 이거야'. 헤더윅은 이 모습을 디자인 모티브로 채택합니다. 그 덕분에 그는 1등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헤더윅이 당선되어 지은 상하이 엑스포 영국관은 200여개 전시관 중에서 단연 최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씨앗의 성전'이란 이름의 영국관입니다. 헤더윅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대표작입니다.

 

 

이게 영국관이었습니다. 상하이 엑스포 내내 최고 인기여서 입장하려면 하루 종일 줄을 서야할 정도였습니다.

 

영국관의 인기 비결은 여러가지였습니다. 우선 사진에서 보시듯 다른 국가 전시관과 달리 건물 자체는 작게 짓고, 주변 공간을 텅 비운 공공 공간으로 배치했습니다. 사람들은 영국관 앞의 이 너른 마당에서 푹 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는 역시 저 성게 모양의 묘한 디자인이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이 건물 최고의 매력은 그 내부에 있었습니다.

 

 

투명하게 실처럼 뽑아낸 저 선들은 건물 외부와 내부로 모두 관통합니다.

 

저 선들 때문에 영국관은 성게 또는 밤송이 모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낭창낭창해서, 바람이 불면 바깥의 선들이 촉수나 갈대처럼 흔들거립니다.

 

그리고 이 선들은 그 자체로 외부의 빛을 내부로 끌어들입니다. 그래서 내부에선 조명이 따로 필요 없습니다.

 

바깥 하늘에 구름이라도 흘러가면 그 그림자와 모습이 저 촉수 끝에 비치며 내부의 밝기가 달라집니다.그리고, 밤이 되면 내부에 붉을 밝혀 그 빛이 저 촉수를 타고 바깥으로 빛을 뿜어냅니다.

 

 

이 탁월한 디자인은 건축에 대한 통념을 깨는 것이었습니다. 디자이너였기에 오히려 더 자유로운 발상이 가능했을겁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씨앗의 나라' 영국을 보여주는 주제인거죠.

 

그 주제는 바로 이렇게 표현되었습니다.

 

 

6만개의 플라스틱 촉수 끝에는 하나하나 서로 다른 씨앗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주라기 공원 영화 속 호박에 파묻힌 모기처럼, 그는 씨앗을 플라스틱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빛이 들어와 촉수가 밝게 빛날수록 그 속의 씨앗은 선명해지고, 바람따라 촉수가 움직이면 건물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보이며 스스로 빛을 뿜어냅니다. 이 아이디어에 사람들은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상하이 엑스포를 앞두고 영국관 디자이너로 당선된 헤더윅에게 영국 정부는 `전체 5위 안에 들 것'을 요구조건으로 내걸었고, 헤더윅은 이를 멋지게 수행해냈습니다.

 

 

# `영국의 이미지를 만들어 주세요'

 

헤더윅은 영국 최고의 디자인 학교로 꼽히는 로열 컬리지 오브 아트, 줄여서 RCA로 불리는 이 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자기 사무실을 차립니다. 그의 나이 겨우 24살 때였습니다.

 

그리고 단숨에 영국 최고의 디자이너가 됩니다. 모두 아이디어 덕분입니다. 재료에 대한 끝없는 탐구, 다양한 협업, 탁월한 형태 디자인 감각, 그러면서도 우아한 그의 작품에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최고 스타로 떠오른 그에게 영국은 자국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들을 맡깁니다. 국가대표 디자이너가 된 것입니다.

 

그 작업 중 하나가 바로 이 것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루트마스터'. 런던을 대표하는 명물, 영국 디자인의 아이콘, 영국인이 사랑하는 런던의 친구, 2층 버스입니다.

 

이 버스를 새로운 디자인으로 바꾸는 작업을 젊은 디자이너 헤더윅에게 맡긴 것입니다.

 

 

헤더윅은 이 오래된 명물을 이렇게 바꿨습니다.

 

 

 

왼쪽의 기존 루트마스터와 비슷하면서도 유선형 디자인으로 새로워진 새 루트마스터입니다.

 

이 버스는 앞보다도 뒤쪽이 더 멋있습니다.

 

 

얼핏 보면 기존 디자인을 따르면서 좀 현대풍으로 매만진 정도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새 버스를 디자인하는 것은 온갖 수많은 과제를 해결하면서도 아름답게 모양을 뽑아내야 하는 정말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런던시쪽은 새 버스는 기존 버스보다 에너지를 40% 이상 절감하는 친환경 차로 만들 것 등 많은 조건을 걸었습니다. 헤더윅은 다양한 기술을 엮어 새로운 버스를 탄생시켰습니다. 문의 위치가 편리하게 바뀌는 등 수많은 변화가 숨어있습니다.

 

 

# 저 딱정벌레 같은 물건은 뭐지?

 

2012년 새로 등장한 루트마스터와 함께 런던 거리의 풍경을 바꾸는 헤더윅의 또다른 작품이 있습니다.

 

 

거리의 가판점, 곧 키오스크입니다. 이름은 `페이퍼하우스'.

 

거리에서 키오스크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멋지거나 아름답기는 어렵습니다. 자칫 도시 풍경을 난삽하고 정신없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디자인의 힘이 필요합니다.

 

 

키오스크가 열려 있을 때는 상품들이 진열되어 그럭저럭 볼만하지만, 밤이 되어 키오스크가 닫히면 그 모습이 아름답기는 어렵습니다. 헤더윅은 닫혀 있을 때도 볼만한 키오스크를 디자인했습니다. 이렇게 닫힙니다.

 

 

닫히면 그 자체로 디자인 오브제가 되는 키오스크. 저 형태에 대해선 "곤충같다"는 의견도 있습니다마만, 중요한 것은 이 작업을 헤더윅에게 맡겼다는 것 자체입니다.

 

 

거리에는 수많은 시설들이 있습니다. 집에서 가구처럼 쓰는 용도인 우체통, 가로등, 키오스크 등 다양한 이런 시설들은 우리 모두가 함께 쓰는 가구와도 같다는 점에서 `거리 가구'라고 불립니다.

 

 

거리가구를 비롯한 이런 공공 시설물들은 비싸지 않고 늘 소모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함께 쓰는 `공공'의 것이기에 중요합니다. 이런 것들이 아름답고 기능적일 때 도시는 살만한 곳이 됩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작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거리 가구를 영국은 자국 최고 스타인 헤더윅에게 맡기는 점, 그런 것이 바로 영국 디자인의 힘일 겁니다.

 

 

# 문화재가 된 거리 가구들

 

 

그러나 이처럼 공공 물건을 최고 디자이너에게 맡기는 것은 최근 들어 생겨난 현상이 아닙니다. 영국 등 이른바 선진국들에선 도시 시민들을 위해 디자인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인식해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든 좋은 디자인의 거리 가구들은 자기 나라를 대표하는 이미지이자 문화 아이콘, 그리고 나아가 문화재로 인정받을 정도입니다.

 

 

 

영국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빨간색입니다. 앞서 보셨듯 빨간 이층버스는 그 자체로 명물이죠. 이와 함께 영국인들과 가장 친숙한, 가장 오래된, 가장 사랑받는 거리의 가구로는 우체통이 있습니다.

 

 

영국 우체통은 이 원형 우체통이 디자인 전통입니다. 우체통이 처음 등장한 것은 영국이 아니었지만 영국에서 우체통은 가장 사랑받는 시민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 주역은 앤서니 트롤로프란 사람입니다.

 

 

트롤로프는 프랑스와 벨기에에 갔다가 우체통을 보고 영국에 들여왔습니다. 나라에 우체통을 만들자 제안해 1852년 처음 도입됐고, 이후 원형 우체통 디자인이 완성되어 영국 우체통의 이미지가 갖춰졌습니다. 1874년부터 색깔이 빨간색으로 통일되었고, 영국 거리 곳곳에 설치됩니다.

 

 

이 우체통은 영국을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이자 관광 기념품 모델로도 사랑받습니다.

 

그러나 하도 오래되다보니 디자인을 바꾸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새 우체통에 시큰둥했고, 오래된 이 디자인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이 디자인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현재 영국 정부는 초기 우체통들을 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합니다. 2002년에는 우체통 도입 150주년을 맞아 우체통 보존 관리 운동 캠페인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거리 가구가 문화 유산이 된 사례입니다.

 

영국에서 우체통 못잖게 문화유산으로 사랑받는 거리 가구는 `공중전화 부스'입니다.

 

 

 

이 빨간 공중전화 부스 역시 영국을 대표하는 이미지입니다.

 

영국의 공중전화 부스는 `K~'라는 일련 번호가 붙는 시리즈로 진화해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K2 디자인이 가장 사랑받습니다. 처음으로 빨간색으로 칠한 부스가 바로 K2입니다.

 

 

영국에 처음 선보인 공중전화 부스는 K1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에게 별 사랑을 못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국 정부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 3명에게 새로운 디자인을 제안하게 하고 그 중에서 하나를 뽑았습니다. 그게 저 K2이고, 이 부스를 디자인한 이는 바로 길버트 스콧이었습니다.

 

 

길버트 스콧은 건축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그야말로 20세기 영국 최고의 건축가입니다. 그가 설계한 것 중에는 발전소가 유명한데, 지금 영국의 랜드마크가 된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 바로 그가 설계한 작품입니다. 또다른 발전소인 배터시 발전소는 록그룹 핑크 플로이드의 자켓의 소재로도 유명합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친숙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이 공중전화 부스일겁니다.

 

영화 `해리 포터'에서 공간 이동하는 입구로 출연하기도 했고, 영국을 찾아온 관광객들이 많이 사는 기념품으로 만들어진 스타 디자인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 공중전화 부스 역시 한때 새 디자인으로 교체될 뻔했습니다. 그러나 우체통에서 그랬듯 시민들이 반대했고, 이 공중전화 부스 보존 운동이 시작됍니다. 영국 정부도 공중전화 부스에 광고를 붙이지 못하게 법으로 지정하는 한편 초기 모델들을 문화유산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디자이너가 시민들을 위한 공공 시설물을 디자인하는 것, 그리고 이렇게 잘 만든 일상용품도 문화가 되고 문화재가 되는 것을 보여주는 점에서 이 공중전화 부스는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이런 전통이 지금의 헤더윅에게까지 이어지는 겁니다.

 

 

 

# 프랑스의 풍경 속 빼놓을 수 없는 조연배우

 

 

유럽, 특히 프랑스, 그 중에서도 파리에서 눈에 띄는 물건 중의 하나로는 이걸 빼놓을 수 없습니다.

 

 

고풍스런 도시 파리의 건물들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저 것, 마치 작품처럼 꾸민 광고탑입니다. 비엔나 등 유럽 다른 도시에도 비슷한 모양의 광고탑 또는 광고판이 있지만, 아무래도 프랑스에서 가장 돋보입니다.

 

이 오래된 디자인처럼 프랑스를 잘 상징하고, 또 도시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것이 또 있을까요?

 

 

파리라는 도시는 아주 오래된 역사가 있지만 실제 그 풍경은 19세기, 오스망이란 시장 시절 만들어진 것입니다.

 

무지막지한 도시계획으로 유명한 오스망은 파리의 모습 전체를 뜯어고쳤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파리가 만들어집니다.

 

 

이른바 `근대 도시'로 새롭게 탄생한 파리는 보행자들이 넘쳐나고 거리에 온갖 구경거리가 넘치는 새로운 도시가 되었지만, 그만큼 새로운 문제도 많이 등장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광고 벽보 문제였습니다. 온갖 광고 전단이 이곳저곳 덕지덕지 붙으면서 도시 미관이 심하게 망가지는 것이었습니다. 벽지 위에 또 다른 벽지를 붙이고 또 붙이고...그래서 오히려 광고 내용을 제대로 보기도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참다 못한 파리시는 1863년 광고 벽보 문제를 해결할 아이디어를 공모합니다.

 

일등으로 당선된 아이디어는 가브리엘 모리스란 사람이 낸 것이었습니다.

 

광고 포스터를 만드는 업자였던 모리스는 높이 3미터 짜리 둥근 광고판을 만들고, 여기에 광고를 붙이게 하고, 둥근 기둥은 천천히 돌아가는 새로운 물건을 제안했습니다. 드디어 1868년, `모리스 광고판'이 나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 채택 이후 실제 제품이 선보이기까지 5년이 걸린 점일 겁니다. 그만큼 고민의 시기가 길었고, 덕분에 모리스광고판은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받는 명물이 된 것이겠죠.

 

 

 

등장이후 광고판은 파리를 연상시키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광고판을 보며 새로운 정보를 얻었고, 새로우면서도 전통을 계승한 디자인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런 사진도 있습니다. 사진이 무척 멋지죠? 찍은 사람이 브라사이니까요.

 

헝가리 출신인 브라사이는 프랑스 파리의 밤풍경을 찍은 사진으로 유명한 거장 중의 거장입니다.

 

 

 

 

영국의 공중전화부스나 우체통처럼 프랑스의 모리스 광고판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문화유산급 거리가구 반열에 오릅니다.

 

그 모양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기본 꼴만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시 관광 상품으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모리스 광고판은 어느새 150년 역사가 쌓였습니다. 아직도 파리에는 200여개가 남아있고, 사람들은 19세기 파리 사람들이 그랬듯 이 광고판을 통해 공연 정보 등을 얻습니다.

 

 

이제 광고판들은 전광판 등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서 조금씩 바뀌어 갑니다. 그럼에도 모리스가 제안한 원기둥 형태는 여전히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리스광고판처럼 우아하면서 역사성을 지닌 디자인은 아직도 없습니다.

 

이 광고판이 단순한 광고판이 아니라 디자인사에 남은 거리가구가 된 데에는 이런 오래된 디자인을 사랑하며 보존하는 시민 의식도 한 몫을 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거리 가구 중에서 광고판은 어떠할까요?

 

 

# 저 것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2009년, 서울에서 가장 거대한 상권이자 가장 붐비는 거리인 강남대로에 이런 것이 들어섰습니다.

 

 

 

강남역에서 교보타워 네거리 사이 760미터 구간에 35미터 간격으로 22개가 들어선 이 것,

 

폭이 1미터나 되고 높이는 무려 11미터, 4층 빌딩 높이 수준입니다. 이 거대한 기둥들이 한꺼번에 거리에 세워졌습니다.

 

이 새로운 물건의 이름은 `미디어폴'. 강남대로 등장을 계기로 한국에서 만든 신조어로 알고 있습니다.

 

 

기능은 뭘까요?

 

광고판이자, 미디어아트를 보여주는 전광판이자, 맨꼭대기엔 등이 달린 가로등이자, 대중교통 안내판이자, 폐쇄회로 티비까지 모두 디지털로 합친 새로운 거리 가구입니다.

 

 

말만 들으면 참 좋은 물건 같습니다. 거리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로 묶어, 게다가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디지털 기술로 만든 것이니까요.

 

 

하지만, 거리 가구들은 나름의 필요가 있고, 그 필요에 따라 나뉜 것입니다. 이걸 합쳤다고 하지만 이 미디어폴은 그 기능이 시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 기능이 보행을 불편하게까지 합니다.

 

 

일단 너무 거대합니다. 거리는 비울수록 걷기 편해집니다. 그런데 이 미디어폴은 너무 커서 보행 공간을 잡아먹습니다.

 

게다가 정신없이 간판이 번쩍이는 강남대로에서 이 전광판이 보여주는 정보는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미디어 아트를 틀어준다지만 너무 높아 건너편에서 봐야 보일 정도고, 운전자들의 시선을 빼앗는 부작용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 미디어월은 정신없는 강남대로를 더 정신없게 만들고, 걷기 더 피곤하게 만드는 역기능만 드러납니다.

 

 

이 기둥들을 세우는데 들어간 비용은 무려 80억원. 유지비도 상당합니다. 초기 연간 유지비는 무려 17억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프로젝트를 강남구가 추진한 것은 `디자인 서울 거리 조성'이란 목표 때문이었습니다.

 

 

디자인은 편리하게 해주는 것이 먼저, 그리고 아름다운 것이 다음입니다. 하지만 디자인 서울 사업은 이런 시민 편의나 미감과는 상관없이 `디자인'이란 구호를 전시성으로 앞세우기 일쑤였습니다.

 

 

여기에 이런 시설이 들어서게 된 것은 이걸 설치한 뒤 광고를 틀어주면서 수입을 얻으려는 대기업 광고 회사의 전략이 더 근본적이었습니다. 공공공간에 첨단 IT기술 미디어를 만들겠다니 `디자인 서울'로 포장하기 좋다는 생각에 덥썩 추진한 것입니다. 공공 공간에서 광고를 없애도 부족한데 광고를 더 늘리는 것,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미디어 아트를 틀기에도 저 디스플레이는 쉽지 않습니다. 가늘고 긴 세로 화면에 맞는 영상을 따로 만들어야 하니까요.

 

 

강남구가 미디어폴로 대표되는 이른바 `강남대로 U 스트리트' 조성 사업에 들인 돈은 85억여원이며, 시예산 29억여원이 투입됐습니다. 22개 미디어폴 하나 당 2억원 꼴입니다.

 

 

거리 가구는 제대로 기능을 분석하고, 오래가며 아름답게 거리 풍경을 만들어 줄 수 있도록 최고의 디자이너를 선정해야합니다. 하지만 저 미디어폴이 보여주듯 한국의 거리가구는 유명 디자이너는커녕 누가 디자인했는지도 알 수 없는 업자들 제품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오래된 디자인 아이콘이 된 문화유산급 거리 가구가 없으니 이제부터라도 오래오래 사랑받는 것들을 만들어도 부족합니다. 그런데 저런 불필요하고 세금을 잡아먹는, 게다가 아름답지도 않는 것들이 지자체와 정치인의 욕심 때문에 거리에 들어옵니다.

 

 

이런 전시행정은 이제 좀 그만합니다. 디자인 팔아먹기도 제발 그만합시다.

 

그리고 거리가구를 신경쓰려면 최고의 디자이너나 아니면 뛰어난 젊은 한국 디자이너들에게 기회를 줍시다.

 

그래야 우리나라에도 헤더윅 같은 디자이너가 나올 수 있고, 문화유산이 되는 명물 거리가구가 나오지 않을까요.

 

 

by 구본준 http://blog.hani.co.kr/bon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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