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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유의배 신부 인터뷰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4/01/26 10:17
  • 수정일
    2014/01/26 10:1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등록 : 2014.01.24 20:45수정 : 2014.01.25 16:44

 
 

 

[토요판] 커버스토리 / 유의배 신부 인터뷰

지난 13일 제3회 이태석봉사상을 수상한 유의배(68·루이스 마리아 우리베) 성심원 주임신부는 하루에 두세번씩 복지관을 돌며 한센인들과 인사한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을 어루만지고 볼을 비비며 인사한다. 경남 산청의 성심원 복지관 3층에서 올해 아흔살인 정삼례 할머니(오른쪽)가 유 신부를 반갑게 맞고 있다. 산청/인터뷰 윤형중 기자.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 노르웨이의 의학자 한센이 1873년 한센균을 발견하기까지 한센병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치병이었습니다. 하늘의 형벌이라는 의미로 천형이라고 불리기도 했죠. 완치가 가능해진 요즘 한센병은 천형이라기보단 마음의 병입니다. 세상의 편견 때문에 속이 썩어들어가는 병이죠. 경남 산청의 한센인 복지시설 성심원에는 이들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 한 신부님이 있습니다. 스페인 출신 유의배 신부입니다.

 

 

백발의 신부가 뒤에서 할머니를 꼭 껴안고, 눈을 가렸다.

 

“누구게?” “누구긴요. 신부님이지.” “신부님 아닌데, 할머니 아들인데요.” “아이고 참, 우리 신부님.”

 

푸른 눈에 하얀 턱수염이 풍성한 유의배(루이스 마리아 우리베·68) 신부는 검은색 수도복을 입고서 할머니들에게 장난스레 인사를 건넸다. 이일분(85) 할머니는 그런 유 신부를 반갑게 맞았다.

 

“신부님, 축하드립니다.” “축하는요. 부끄럽습니다.” “신부님, 오래 사셔야 합니다. 나 죽을 때까지 죽으면 안 돼요.”

 

“걱정 마이소. 오래 살 겁니다. 백살까지 살 거예요.”

 

대화를 하는 유 신부와 이 할머니 옆에는 올해로 아흔살인 정삼례 할머니가 서 있었다. 두 눈이 어두워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정 할머니는 유 신부의 인기척을 느끼고는 뭉툭한 두 손으로 박수를 쳤다. 유 신부는 정 할머니에게 다가가 두 볼을 어루만지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은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얼굴에 깊은 주름이 꽃처럼 활짝 피었다.

 

지난 14일 오후, 경상남도 산청군에 있는 한센인 복지시설 성심원에선 ‘축하 인사’가 넘쳐났다. 하루 전날인 13일, 유의배 신부가 제3회 이태석봉사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에서 병원과 학교를 세우며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고 이태석 신부를 기리기 위한 이 상은 성심원에서 34년간 지내온 스페인 출신의 유 신부에게 돌아갔다. 이태석기념사업회 쪽은 “오랜 기간 동안 성심원에 머물며 한센인들과 가족처럼 지내온 점을 높게 평가했다”고 수상의 이유를 설명했다.

 

유 신부를 지난 14일 경남 산청의 성심원에서 만났다. 성심원의 주임신부인 유 신부는 1980년부터 한센인과 함께 살고 있다. 한때 한센인이 500명 넘게 살던 이곳에는 현재 평균연령 76살인 한센인 130여명과 지체장애인 10여명이 머물고 있다. 성심원은 전국에 9개인 한센인 민간복지시설 가운데 하나로 천주교 프란치스코회에서 운영하고 있다. 유 신부는 이틀 동안 인터뷰에 응했고, 그가 일을 하거나 돌아다닐 땐 동행하며 취재했다. 자유롭게 한국말을 구사했지만, 말투에 외국인 특유의 억양이 다소 남아 있었다.

 

 

“말이 아닌 삶 자체로 귀감 되는 분” 

 

-제3회 이태석봉사상을 수상했다. 생전에 이태석 신부를 알았나?

 

“이태석 신부님을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천주교 잡지에서 소개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의사로, 사제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참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런 상을 받아서 부끄럽다.”

 

-유 신부도 이국땅에 와서 한센인들과 함께 34년을 함께 지냈고, 특히 아픈 사람들을 정성껏 돌보지 않았나?

 

“나는 이태석 신부처럼 아픈 사람을 치료하거나,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나는 그냥 여기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왔을 뿐이다.”

 

-한센인 어르신들을 만날 때, 얼굴을 어루만지거나 볼에 입을 맞추는 등 남다르게 인사를 한다.

 

“한센인 중엔 앞을 보지 못하거나 귀가 잘 안 들리는 분들이 꽤 있다. 한국식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면 그분들은 못 보고 지나친다. 그래서 스페인에서 하던 대로 안고 볼에 입을 맞추며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국식 인사가 아니라 싫어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어르신들이 좋아했다. 그 이후로 이렇게 스킨십을 하며 인사를 하게 됐다.”

 

유 신부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양해를 얻어 녹음기를 켰다. 어눌한 말투에 불규칙한 억양이 섞여 발언 중 일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유 신부는 달변이 아니었다. 한센인들에게 농담을 건네거나 장난을 칠 정도로 한국어를 구사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조리있게 말하는 데에는 능숙하지 못했다. 엄삼용 성심원 부원장수사는 “사실 유 신부님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미사에서 설교에 해당되는 ‘강론’이다. 회의 때도 말씀이 거의 없다. 하지만 유 신부님은 말이 아닌 삶, 그 자체로서 귀감이 되는 분이다”고 말했다.

 

유 신부의 입을 빌리지 않아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성심원의 직원, 봉사자, 거주하는 한센인들은 그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유 신부가 어떤 사람인지’를 질문하면 쉴 새 없이 증언들이 터져 나왔다. 스물두살에 한센병이 발병한 안병채(82) 할머니는 유 신부와의 첫 만남을 기억했다.

 

“1985년에 성심원에 들어와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그 당시 한센병이 심해져 얼굴이 다 문드러지고 피부가 다 상한 분이 있었는데요. 한센병을 앓았던 제가 봐도 얼굴 형태가 심하게 변형돼 보기가 안 좋았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은 매일 그 사람을 찾아가 무릎 꿇어 앉고서 얼굴을 매만지고, 볼에 입을 맞추더군요. 그걸 보고 ‘우째 저런 사람이 있노’ 하며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돌이켜 보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신부님은 한결같습니다. 지금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픈 사람 집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가죠.”

 

성심원에서 근무하는 사회복지사 곽경희씨는 유 신부를 ‘성심원의 엄마’라고 표현했다.

 

“신부님이 여기 계신 어르신들보다 나이는 젊은 편이지만 엄마 같은 존재예요. 얼마 전에 신부님과 진주에 있는 병원에 다녀온 적이 있어요. 신부님은 예나 지금이나 아픈 분들에게 매일 찾아가요. 요즘은 많이 아프면 진주에 있는 병원에 입원을 하는데요. 입원한 어르신을 위해 신부님이 귤을 사갔어요. 귤을 까서 입에 넣어줬는데, 어르신이 시다고 하니까 그 귤을 다시 꺼내서 본인이 먹더군요. 마치 아이가 입에 넣었던 음식을 엄마가 먹는 것처럼 말이죠. 신부님은 성심원에 있는 어르신들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실질적으로 ‘부모’ 역할을 해왔어요.”

 

 

경남 산청의 성심원에서 34년간 한센인들과 함께 살아온 유의배 성심원 주임신부가 정삼례 할머니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고 있다. 산청/강재훈 선임기자khan@hani.co.kr

 

 

극히 희박하지만, 전염되더라도 운명이라 생각 

 

오랜 기간 편견에 시달리며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해온 한센인들에게 피부를 비비며 다가오는 외국인 신부는 낯선 존재였다. 곽씨는 “편견으로 인해 한센인들과 옷깃만 스쳐도 거부반응을 보이고, 심지어 한동네에 사는 것도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신부님은 이분들을 가족처럼 대한다”고 말했다. ‘성심원에 유 신부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느냐’고 묻자, 안병채 할머니는 “누가 싫어하겠나. 다가와서 맨날 보듬어 안고 그러는데”라고 대답했다.

 

한센병에 대한 편견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그들과 접촉하면 병이 쉽게 전염될 수 있을 거란 우려다. 하지만 한센병은 전염력이 매우 낮은 병에 속한다. 한센병을 옮기는 한센균은 공기 중에서 3초 안에 죽기 때문에 전염되기 어렵고, 체내에 들어가도 대부분의 사람은 면역력이 있어 자연치유된다. 주로 발병하는 곳은 위생환경이 열악하거나 더운 지역이다. 예전엔 주로 나병이라고 불렸고, 가난한 지역에서 주로 걸린다고 해서 ‘가난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최근 신규 발병자가 급격히 줄어 2012년엔 5명에 불과했다. 신규 발병자보다 사망자가 많아 2003년 1만7255명에 이르던 한센인은 2011년 1만3039명으로 감소했다. 한센병은 잠복기가 5~20년으로 길고, 유전되지 않는다. 또한 약물로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센인들은 한센균 검사에서 ‘음성’ 판정을 받은 완치자들이다. 성심원에 있는 한센인들도 모두 ‘음성’ 판정을 받았다. 비록 피부와 눈, 귀 등의 말초신경에 병이 남긴 흔적이 있지만, 몸 안에 한센균은 사라진 상태다. 그럼에도 이들은 사회로 나가 사람들과 섞이기 어렵다. 유 신부에게 스킨십에 대해 더 물었다.

 

-한센인들과 스킨십이 잦은데, 혹시 전염될 수 있단 생각은 하지 않는지?

 

“한센병에 대한 오해가 아직도 많다. 심지어 성심원에 봉사하러 왔던 분 중에서 작별인사를 할 때 나와 악수하는 걸 거절한 분도 있다. 왜 그러냐고 묻자, 그분이 ‘신부님이 아까 그 사람들 만졌잖아요’라고 했다. 이런 편견으로 인해 많은 한센인들이 오히려 먼저 사람들을 피한다. 내가 처음 그들에게 스킨십을 하려고 다가갔을 땐, 먼저 피하고 꺼리기도 했다. 그럴 땐 오히려 더 다가가서 ‘당신이 나에게 아무런 해악을 주지 않는다’고 안심을 시킨다. 물론 극히 희박한 확률로 한센병이 재발하고, 전염될 가능성도 있다. 그것도 운명이라 생각한다. 1981년 스페인 나병연구소에서 간호사 수련을 받을 때, 브라질에서 온 한 신부님이 찾아온 적이 있다. 이분은 겉은 멀쩡했는데 수도복을 걷어 올리니 팔뚝에 한센병의 흔적이 있었다. 그분은 너무나 태연하게 치료를 받고, 다시 브라질의 한센인 마을로 돌아갔다. 그분의 태도에서 느낀 점이 많았고,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단 생각을 했다.”

 

-한센인들을 위해 운전을 배웠다고 들었다.

 

“스페인에서 원래 운전면허가 있었는데, 한국에서 다시 운전을 배웠다. 처음엔 미사를 드리러 경남 진주의 성당을 오가기 위해서 운전을 했다. 하지만 점점 한센인들을 태우고 진주 시내와 인근에 있는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지금은 편견이 많이 사라졌지만, 예전엔 버스 기사들도 한센인을 잘 태우지 않았다. 식당에 가도 ‘당신네들에겐 밥을 팔지 않으니 나가라’는 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태우고 다녔다.”

 

-1997년부터 한센인들이 돌아가시면 손수 염(입관하기 전에 시체를 닦고 수의를 입히는 작업)을 한다고 들었다. 지금까지 총 300명의 염을 하셨다던데, 직접 염을 하는 이유가 있나?

 

“처음엔 할 사람이 없어서 했다. 그 전까지 염을 하던 장의사가 일을 그만뒀고, 한센인이라 누구도 나서서 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줄곧 옆에서 임종을 지켰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함께한다는 마음으로 염을 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지금까지 하고 있다. 염을 하면서 돌아가신 분과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살아 있을 땐 손이나 얼굴 정도 볼 수 있는데, 씻기기 위해 옷을 벗겨보면 여기저기 상처가 있거나 앙상하게 마른 것을 볼 때가 있다. 그러면 ‘그동안 얼마나 아팠을까’ ‘잘 돌봐주지 못해 미안해요’라고 말하며 염을 한다. 아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내려왔을 때의 모습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유 신부는 임종을 앞둔 분들을 특별히 보살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위독한 환자가 생기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가 손을 잡고 위로한다. 유 신부가 34년간 장례미사를 치른 사람은 총 529명, 이를 옆에서 지켜본 한센인들은 신부님이 오래 살기를 바랄 뿐이다. 안병채 할머니도 같은 마음이다.

 

“임종 맞는 분 옆에서 신부님이 하는 것을 보면 부러워요. 신부님이 저렇게 해주면 나도 편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죠. 신부님 때문에 가기 싫어도 천국 가야 해요. 그래서 여기 있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신부님이 먼저 죽으면 안 된다는 마음이에요. 미안하지만 신부님은 꼭 오래 사셔야 합니다.”

 

14일 오후 3시께, 한센인들이 머무는 요양원 2, 3층을 한바퀴 돌면서 유 신부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도 ‘신부님 오래 사셔야 합니다’였다. 한 할머니는 유 신부에게 “나도 안아주소”라고 팔을 벌렸고, 다른 할머니는 보여줄 게 있다며 자기 방으로 유 신부를 이끌었다. 방에 도착하자 이 할머니는 서랍에서 잡지 하나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 잡지엔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의 외국인이 활짝 웃고 있었다. 유 신부는 “아이고 할머니, 이거 나 닮았다고 보관하는 거요? 그러고 보니 좀 닮았네”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잡지를 가리키며 “여기 신부님 있다”는 말을 연신 반복했다. 지체장애인들이 모여 있는 300호로 들어가자, 10대 소녀 세명이 뛰어나왔다. 유 신부가 이들을 반기자, 한 소녀는 덥수룩한 수염을 잡아당겼다. 유 신부는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고 아이의 장난을 미소로 받았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유 신부와 마주 앉았다.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동생들을 돌보다 

 

-독일 나치의 폭격으로 도시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한 스페인 게르니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게르니카의 학살에 대해 들은 적이 있나?

 

“태어나기 9년 전인 1937년에 게르니카 폭격 사건이 발생했다. 독일 나치가 스페인의 파시스트 정권인 프랑코를 지원하기 위해 무차별 폭격을 가한 끔찍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우리 집도 폭격을 맞아 다 부서졌다. 가족들은 지하실에 대피해 겨우 살았지만, 그동안 일궈놓은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어렸을 때 도시 곳곳에는 폭격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한국은 어떻게 알게 됐나?

 

“어릴 때 아버지가 집에서 라디오를 자주 켜놨다. 한창 한국전쟁이 벌어지던 시기였다. 그때 ‘코리아도 게르니카처럼 폭격을 맞고, 우리랑 비슷하게 살고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연스레 관심을 가졌다.”

 

-신부가 되겠단 생각은 언제 했나?

 

“친척 중에 신부가 여럿 있어서 사제가 친숙했고, 그들이 하는 일이 좋아 보였다. 열살 때 바로 소(小)신학교에 입학하려 했으나, 갑자기 아버지가 위독해졌다. 다행히 아버지는 죽을 위기를 넘겼지만, 집안 형편이 더 어려워졌다. 남동생, 여동생이 하나씩 있었는데, 부모가 우리 삼남매를 돌보기 어려웠다. 우린 고아원으로 보내졌고, 나는 신학교 입학을 한해 미루고 고아원에서 동생들을 돌봤다. 고아원 생활은 너무나 힘들었지만, 아버지가 ‘잘 지내냐’고 묻는 편지가 오면 늘 ‘기쁘게 잘 살고 있다’고 답장을 보냈다. 1년 뒤 동생들은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아란차수 신학교에 입학했다. 같이 입학한 동기들은 신학교가 감옥 같다며 투덜댔지만, 나에겐 고아원에 비해 천국 같은 곳이었다.”

 

-한센인에 대해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나?

 

“신학교를 졸업한 1970년 사제 서품을 받고서 3년 뒤에 파라과이에 있는 한센인 마을에 부임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래서 스페인에 있는 한센인 마을에서 봉사를 하며 준비를 했다. 처음 한센인 마을에 갔을 땐, 많이 놀랐다. 한국엔 신경 쪽 환자가 많은 데 비해, 스페인엔 피부 쪽 환자가 많았다. 그분들은 성심원 분들보다 외모가 훨씬 두드러진다. 솔직히 처음 봤을 땐 무섭기도 했다. 그곳에서 수녀님과 신부님이 헌신적으로 한센인들을 돌보는 것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수녀님은 한센인들을 안으며 회개한다고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도 나중에 한센인들과 함께 살고 싶단 생각을 했다.”

 

-첫 해외 부임지가 파라과이가 아닌 볼리비아였다.

 

“예정됐던 파라과이 한센인 마을이 아니라서 실망했다. 볼리비아에선 안데스산맥 해발 4000m 높이에 있는 티티카카 호수 근처에 살았다. 거기서 인디언과 어울리며 살았지만, 늘 한국에 가고 싶단 생각이 있었다. 이후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했더니, 군사정권이 독재를 하고 있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국가이기 때문에 젊은 사제를 보내기는 위험하다며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1975년 아일랜드로 가서 영어를 배웠다. 어차피 한국어를 배우려면 영어를 익혀야 했다. 당시 한국에는 스페인어로 한국말을 가르치는 곳이 없었다. 아일랜드에서 머문 뒤 1976년 서울에 왔다. 정동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있는 한국어학교 명도원에 입학해 2년 과정을 수료했다. 그 이후 경남 진주로 부임했다.”

 

-성심원은 언제 알았나?

 

“서울에서 한국어를 배우면서 종종 대전에 내려가 어린이 보호시설에서 봉사를 했다. 그곳은 당시 미감아(未感兒)로 불리던 한센인 자녀들을 보호하는 시설이었다. 그 아이들이 너무 귀여웠고 예뻤다. 그러던 중 1977년 4월 아는 신부님의 소개로 한달간 성심원에서 머물렀다. 거기서 대전에서 만났던 아이들을 재회했다. 그 아이들의 부모가 성심원에 있는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이후 계속 성심원으로 부임하고 싶었으나, 바로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강원도 주문진성당, 제주도성당을 거쳐 1980년 성심원으로 올 수 있었다.”

 

 

“신부님 없었으면 엇나갔을 거예요” 

 

-1980년대 초기 성심원은 어땠나?

 

“많이 열악했다. 수도자들과 봉사자,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성당과 병원 등 여러 시설을 만들 수 있었지만, 지금과는 차이가 있다. 한센인들은 초가집에 살았다. 사실 성심원은 자리를 잡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1959년 성심원이 처음 세워지던 당시 처음 고려했던 부지는 읍내와 가까웠던 산청의 원지마을이었다. 진주에 있는 스물다섯명의 한센인이 정착촌을 만들려 하자, 마을 주민들이 곡괭이, 삽 등을 들고와 내쫓았다. 결국 이들이 선택한 곳이 지금 성심원이 있는 산청 내리 지역이다. 여기는 앞으로 물살이 센 경호강이 흐르고, 뒤로는 산세가 험한 웅석봉이 있다. 쫓아내려는 주민도 강 건너편에서 위협을 했고, 쉽게 강을 건너지 못했다. 초기 한센인들은 낮에는 주민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산으로 대피했고,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 불을 피우고 밥을 지어 먹었다. 한동안 강을 건너려면 배를 타야 했고, 성심원과 강 건너편을 연결하는 다리가 생긴 시기는 1972년이다.”

 

14일 오후 내내 대화를 하고서 유 신부와 구내식당으로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식당에서 봉사하는 김점악(66)씨는 한센인이었던 남편을 따라 성심원에 들어온 비나자(非癩者·한센인을 배우자로 두고 있는 사람)였다. 김씨는 남편이 사망한 뒤 성심원에 장기봉사자로 남았다. 그런 김씨는 아들 부부의 사정으로 손자 3명을 3년간 성심원에서 키웠다. 김씨는 유 신부 덕분에 아이를 잘 키웠다고 했다.

 

“아이들 앞에선 신부님이 그냥 아이가 돼요. 아이들이 신부님의 볼과 수염을 잡아당기고, 수도복 안에 들어가서 숨바꼭질을 하고 놀아요. 어떤 장난을 쳐도 신부님은 화를 내는 법이 없죠. 학교에서 운동회 등 행사가 있으면 학부모 대신 신부님이 참석해요. 부모보다 더 큰 사랑으로 아이들을 키우는데, 성심원 아이들이 엇나가지 않고 잘 자라는 것엔 신부님 역할이 커요.”

 

성심원에서 태어나 현재 부산에서 살고 있는 손인수(가명·32)씨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부모가 모두 한센인이었어요. 어머니는 한쪽 다리를 잃었고, 아버지는 시력을 잃었죠. 어렸을 때 부모가 같이 놀아주지 못하니까, 늘 신부님과 놀았어요. 학교를 다닐 땐, 아이들에게 정말 놀림을 많이 받았어요. 성심원 출신이라고 따돌림당하고, 친구들이 밥도 같이 먹지 않았죠. 사춘기 때는 평범하게 살 수 없는 내 상황이 억울하고 절망스러웠어요. 그때 신부님이 없었으면 정말 엇나갔을 거예요. 신부님이 많은 말을 하진 않았지만, 늘 옆에 있어주고 관심을 가져주셨죠. 지금은 여자친구에게도 부모님과 신부님을 소개해요. 성심원 출신이라는 것도 숨기지 않고요. 이런 마음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신부님 덕분이에요.”

 

15일 아침 7시, 유 신부는 초록색 제의를 입고서 미사를 집전했다. 성당을 채운 한센인들 중 일부는 문드러진 손을 모으고서 기도했다. 미사를 마치고 유 신부와 아침식사를 하며 인터뷰를 이어갔다.

 

-수도자들은 대개 2, 3년에 한번씩 부임지를 옮기는데, 어떻게 34년간 한곳에 있었나?

 

“여기 계신 분들은 버림받았다는 정서를 많이 가지고 있다. 가족, 형제, 친구, 이웃에게서 버려진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 ‘나는 당신들 버리지 않는다’ ‘여기 있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여기에 있으려고 한다. 교구에서 내게 종종 희망 부임지를 묻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여기 있고 싶다’고 답한다.”

 

-앞으로도 계속 성심원에 있을 건가?

 

“수도자는 교회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수도자가 지켜야 할 3가지 원칙 중의 하나가 순명이다. 내게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면 순종하고 가야 한다. 하지만 내가 먼저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하진 않을 거다.”

 

산청/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토요팟] 윤형중 기자의 유의배 신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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