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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점남여사 자주민보장 결정

 
 
통일할머니 끝내 통일 못보고 선종
 
자주민보 
기사입력: 2014/01/25 [03:47]  최종편집: ⓒ 자주민보
 
 
 


지난 24일 9시 40분 101세의 나이로 그렇게 바라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애석하게도 노환으로 유명을 달리한 자주민보 이정섭 대표 어머니 고 정점남 여사의 장례식을 자주민보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 이정섭 대표의 어머니 고 정점남 여사     © 자주민보


고 정점남 여사는 일제식민지 치하 1914년 진안군 성수면에서 태어나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13살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 남편은 일본 징용으로 끌려간 상황에서 간난 아기를 등에 업고 보따리장사를 해가며 13남매를 낳아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자로 키운 강인한 어머니였다.
지금도 다섯째 아들 이윤섭 씨(필명 평천하)는 통일운동을 열열히 전개하다가 보안법에 의해 옥중고초를 겪고 있으며 다른 아들들 모두 민족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딸 이정순 씨도 전국주거권실현을 위한 전국연합 소속 범박동 세입자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용역깡패와 부당한 공권력에 맞서 싸워 서민들의 권리를 지켜내는 등 민중운동에 투신하기도하였다.


일제 때 징용에 끌려가 탄광에서 혹사 당하는 과정에 얻은 지병으로 남편을 일찍 여윈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평생 악독한 일제에 대해 똑똑히 알려주었으며 일제를 대신하여 이땅을 차지하고 나라를 분단시킨 미국의 문제점도 잘 깨우쳐 주면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면 비참한 운명에 빠지게 된다며 어서 통일을 이루어 강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꼭 건설해야 한다고 교양했기에 자녀들이 다들 애국자로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     © 자주민보


통일할머니로 불리기도 했던 고 정점남 여사는 100순을 맞이했던 지난해 임진각에서 개최된 통일행사에 단일기를 들고 참석하여 열열한 통일염원을 표현하는 사진이 연합뉴스 등에 널리 보도 되는 등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었다. 얼마나 통일이 간절히 그리웠으면 그랬겠는가. 아마 통일운동사에 최고령 통일행사 참가자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난 7월에는 백세잔치를 장기수 선생들과 민족 민주운동단체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루기도 했다.

이런 어머니의 삶을 추모하고 민족사랑의 마음을 따라배우기 위해 자주민보장으로 치르기로 한 것이다.

구체적인 장례식에 대한 내용은 낡이 밝으면 민족 민주운동 진영의 원로들과 상의하여 종합보도를 통해 공지할 계획이다. 


다음은 정점남 여사의 삶에 대한 몇가지 영상이다. 
어머니의 삶은 곧 우리 민족 역사이기에 어머니의 삶을 통해 자주민보 독자들과 민족의 소중함을 되새겨보고자 여기 소개한다.


 
▲ 고 정점남 여사 생전 모습     ©자주민보



[장시]
아! 어머니
                                           아들 이정섭

어머니
1914년 6월 1일
당신은,
강도 일제가
금수강산을 빼앗아
제것으로 만들어 버린
가슴아픈 시기에 태어나
아직도 분단으로 잘려진 땅
미국의 식민지 남한 조국에 질기게도
살아 계십니다. 
 
어머니가 생생하게 들려주시는 
짧은 증언들은 어느 역사서 보다 생생하고
그 무게를 더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너희 외할아버지가 내가 터를 잘 팔았다(어머니 다음이 외삼촌)고
가슴을 열어 늘 나를 품어 잠을 재웠지, 그러면 너희 작은 이모가 질투를 하며
할아버지가 없는 곳에서 '저년이 무슨 쥐꼬랑지 대감이나 되는지 아버지는 저년만 이뻐해'
하면서 투정을 부리곤 했지" 하시며 어린 시절 추억을 말씀 하십니다.
 
가끔은 "내가 13살에 니 아버지 한테 시집을 갔는디 그것은 일본 놈들이 
잡아간게(위안부로 끌고 간다는 말씀) 일찍 니 외할아버지가
나를 시집 보낸 거시여" 일본놈 들의 만행에 우리들의 어머니는, 할머니는
결혼 연령도 바꾸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일정 때 생각하먼 지긋지긋 허다, 니아버지 징용으로 끌려가고 내가
장사를 해야 니 큰형, 작은형, 그밑이 또 니 아버지 끌려 갈 때 임신한 애가 있었는디
그 젖먹이 허고 살 수 있었는디 갓난쟁이를 업고 장사를 댕깄어
집에서(전북 완주) 한산(충남)이 어딘디 거그 까지 걸어서 장사를 댕깄지
낮에는 장사해서 쌀을 바꾸어 왔는디 쌀을 순사놈들이 다빼아승께 
저녁으로 길도 아닌 논둑을 타고 집으로 와야 힜당게.
근디 하루 저녁은 밀대(요즘으로 말하면 민간경찰즉 방범 협의회)들헌티 잡히갔고
쌀을 뺏는 것은 목숨을 뺏는 것이라며 쌀자루를 밀고 당기는 가운데 터져 다 쏘다져
버맀당게. 휴우~ 정말 지긋지긋 허당게.
 
그리고 하루는 순사들 한티 잡히 갔고 주재소로 갔지, 그놈들이
오깜상 왜 쌀을 가지고 다니느냐? 그리서 "니놈들이 우리 애기 아버지
일본으로 끌고 갔응게 먹을 것은 없고 자식들 허고 먹고 살랑게 장사히서
가지고 오는 쌀이다. 
 
그렁게 그놈이 허는 말이 쬐꼬만 놈의 기집이 말이많다고 지랄히여. 
그리서 아따 이놈아 니가 내 남편이냐 무어냐 왜 남의 부인을 보고 기지배라고
그러냐 헝게 주재소 소장인지 허는 놈이 그러지 말라고 밑엔 놈을 혼내드만
그리먼서 쌀자루는 놓고 가야 헌다는 것이여 
 
그리서 내가 조타 그렇지 않아도 살기 심들어 죽것는디 쌀자루 노코 갈팅게
우리자식 먹여 살리라. 그리먼서 업고 있던 갓난쟁이를 주재소에 내려 놈서 
집에 있는 자식들도 대리고 올팅게 감옥이 됬든 어디든 먹여살리라 그리고 주재소문을 나와 버맀어
 
긍게 애기가 얼마냐 울것냐 막 울어댕게 내 뛰꼭지에다 대고 불러 어이~ 어이~
애기대리고 쌀자루 가지고 가라. 그리서 싫다. 먹여 살리라
그맀더니 한놈은 쌀자루 들고, 한놈은 갓난쟁이 안고 뛰어 와서
애기를 업히 주는 거시여.
그런 시대를 살았다."
 
이 말씀에는 나라 잃은 우리민중들이 일본놈들에 의해
강제 징용, 군 위안부 동원, 밀대(친일파들의 행적), 주재소 놈들의 수탈,
공출, 등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어머님 말씀입니다.
"근디 니그 아버지도 고지식히가꼬 징용을 간 것이여
사실은 그 전날 면장이 그냥 빼줄 수 없는 없응게 
학교에 모이라고 히서 모이면 내가 신호를
줄팅게 그 때 빠져 나가라고 힜는디 그말을 못알아 듣고
 
그리서 핵교에 모있는디 쭉 점검을 허다 니네 아버지헌티 면장이
아니 이판봉씨는 보아허니 아무것도 준비를 안한 것 같은디 수건이랑 비누랑 칫솔이랑 
집에 가서 가져오시오. 그게 신혼디 니네 아버지 그말을 못알아 듣고
아니요 나는 그런것 필요 없어요. 그리가꼬 징용을 간 것이여.
 
그리서 북해도(훗가이도오)탄광가서 해소병(진폐증)을 얻으서 그 병을 죽었잔이요.
불쌍한 영감팅이.
 
그리고 해방 되었는디 니그 아버지만 안오는 것이여 다 죽었다고 힜지.
그런디 늦가을 인가 누가 와서 그런 것이 정지에서 밥을 허고 있는디
이세원 전주에서 봤다고 오늘 왔는가 보다고.
그리서 내가 아니 지금까지 안 온 양반이 인제 어디서 오냐고 히롱허지 말라고
그렁게 아니라고 정말이라고 전주 남문으로 외삼촌 나오라고 힜다고.
그리서 니네 외삼촌헌티가서 갔다 와보라고 그맀서.
그맀더니 정말 온 거시여.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헝게 돌아올 여비도 주지 않아서 올 수 없었는디 
사과 과수원이 있는디 거그서 사과 이스락을 줍고 고구마 이스락을 주워서 여비를 마련해서 왔다고 그러더라고 글씨.
 
전주에 너그 외삼촌이 도착히서 만났는디 제일 먼저 애기 옷집으로 들어 갈라고 허드리야.
(임신한 상태의 아내를 두고 북해도로 끌려갔으니 얼마나 가족이 걱정되고 태어난 아이가 보고 싶었겠는가!)
그리서  니 외삼촌이 헐 수 없이 말을 힜디냐 죽었다고...
가 갓난쟁이 업고 댕김서 장사를 힜는디 겨울에 폐렴을 알았던가비여
어찌나 기침을 콜록거리고 우는지 나는 밀대허고  순사들헌티 안잡힐라고 그러는디
그리서 그럴라면 차라리 죽어버리라고 팔꿈치로 쿡쿡 쳤는디 그 날밤 죽어버맀어.
휴우~ (한숨을 쉬시며 어머님의 눈에는 이슬이 맺힙니다).
또하나 그 우에 가시네는 보아 줄사람이 없응게 끈으로 묶어 놓고 일을 갔는디
그 줄에 목이 감겨 죽은 거시여. 내가 아들딸 열셋을 나서 여섯을 먼저 보냈는디... 늘 가슴에 걸린다"
 
아버지는 노동 착취를 당했고 광산 노동으로 해소병을 얻어 돌아가셨으나
그 배상은 이루어 지지 않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권에서 강제징용실태 조사를 했지만 그 이후 아무런 대책도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에게도 99앤을 배상금으로 줄까요?
 
일제에 의해 우리 누님은 어머님들은 그렇게 불쌍하게 생명을 빼앗겨야 했습니다.
비단 일제는 총칼로만 죽인 것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어린아들, 딸마저 죽음에 이르게 한것이지요.
이 철천지 원수놈들의 행위를 축복의 역사라 떠드는 뉴라이트 민족 반역자들을 그냥 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어머님은 그렇게 현대사의 질곡 속 아픔을 안고 민중으로 살아 오신 것입니다.
[2010년 3월 3월]

 
▲ 효성깊은 자녀들과 행복했던 순간들     © 자주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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