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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주년 즈음에 바라 본, 가톨릭학생운동은?

가톨릭학생운동, "하느님 나라 구현이라는 도전에 
응답하다"
60주년 즈음에 바라 본, 가톨릭학생운동은?
정현진 기자  |  regina@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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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1.14  19: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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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학생운동이 1954년 10월 대한가톨릭학생총연합회 창립으로부터 60주년을 맞았다.

사람의 나이로 치면 육십갑자를 모두 살아 낸 시간, 가톨릭학생운동 역시 한 사람의 인생 못지 않게 탄생과 성장, 그리고 때로는 좌절과 정체의 시간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한국가톨릭학생운동의 조직적 단초는 1945년 10월 서울가톨릭여학생회 결성이다. 그 후 생긴 서울가톨릭학생회, 서울여자가톨릭학생회, 서울대가톨릭연구회가 1949년 ‘서울가톨릭학생회’로 통합됐지만, 이듬해 6.25 전쟁 발발로 활동이 중단됐다. 전후, 부산, 대구, 서울 지역에서 다시 가톨릭학생회가 결성됐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교구 학생회와 함께, 1954년 10월 대한가톨릭학생총연합회가 창립됐다. 

이후 가톨릭학생회 조직은 전국 차원에서 점차 성장하고 또 부침을 겪는다. 지성인 운동으로 출발한 가톨릭학생운동은 1950년대에는 ‘첫 전국 대학생 사도직 운동’으로서 가톨릭 사상을 연구하고 <빡스>지와 같은 출판물을 보급하며 학생 지성인을 위한 신앙활동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 지난 11월 8일 가톨릭학생운동 60주년 기념행사에서 전시된 초창기 역사. ⓒ정현진 기자

1960년대는 5.16군사 정변, 산업화, 교회적으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1970년대 전태일 열사의 분신, 1980년 5.18광주민주화 항쟁, 1987년 6월 항쟁과 통일 운동 등은 회원들이 그리스도의 눈으로 한국 사회를 분석하기 위해 노력하고, 사회참여와 대학 내 가톨릭운동에 관심을 갖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학생운동에서 사회과학, 이론에 대한 요구를 하면서부터 가톨릭학생운동 역시 현실 참여와 순수 신앙 사이에서 갈등과 논쟁을 겪었다. 신앙과 참여, 이 두 간극 사이를 어떻게 포용하느냐는 이후 오랫동안 가톨릭학생운동의 큰 과제로 작용한다.

지난 11월 8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60주년 기념행사에 즈음해, 가톨릭학생운동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가톨릭학생운동이 한국사회안에서 어떻게 존재했는지, 그리고  그 속에 있었던 이들은 오늘, 지난 시간을 어떻게 새기고 있는지 들어 봤다.

좌담회에는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 소속으로 활동했던 홍태희(한양대 78), 황재현(연세대 82), 이창호(성균관대 87), 백승덕(연세대 02) 4명이 참석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부정과 부패가 범람하여.... 우리 가톨릭학생들은 사회의 각 분야에 확고한 투쟁적 이념의 기수로서.... 과거 가톨릭인의 사회 참여란 보잘 것 없을 정도로 소극적이고 미비했으며....  이러한 각오를 거울로 삼아 영원한 질서의 창조자로서 우리의 결의를 다진다.”(1967년 전국대회 결의문 중)

“한국 천주교회는 시대적 징표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창설 200주년을 계기로 한국천주교회는 초대교회 창설자들의 신앙에 대한 열정과 자발성을 본받아야 한다. 주교, 사제, 평신도가 서로 형제적 사랑을 나누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하고 평신도들은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사목활동에 참여하고 주교와 사제는 헌신적으로 도와야 한다. 본당, 액션단체 그리고 200주년 기념사업 및 행사에서 평신도의 적극적 참여와 자발성을 교회는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1984년 가톨릭학생회 전국협의회 성명서 중)

1960년대와 1980년대 한국가톨릭학생운동 조직의 두 목소리다. 이들은 끊임없이 가톨릭교회, 그리고 신앙인이 사회적 문제에 침묵하지 말 것을 요청하고 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또는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주체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있다. 그런 맥락에서 각기 다른 시기와 상황에서 활동한 참가자들 역시, 공통적으로 가톨릭학생회의 정체성에 대해 언급했다. 60년이라는 시간을 관통한 핵심적인 문제인 ‘가톨릭학생회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지금껏 가톨릭학생회의 존재, 그리고 그 활동을 규정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 지난 11월 13일 '가톨릭학생운동 60년을 되짚는 좌담회가 열렸다. ⓒ정현진 기자

가톨릭학생운동은 무엇인가, 신앙인의 역할을 묻는 도전에 응답하는 것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가톨릭학생의 신앙 고백

이들은 가톨릭학생회는 사회, 정치적 문제와 상황, 교회 내적인 문제 그리고 일반 학생운동의 흐름 등 대략 세 가지 조건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아 왔다고 설명하면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정체성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외부적인 상황과 내부 조건에 맞춰 무엇을 할 것인가를 논의하고 정하는 건강한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홍태희 씨는 상황에 따라 해야 할 몫을 찾는 과정은 그 조직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증거일 수 있지만 한계도 있었다면서,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 간의 연결성이 없다는 것. 가톨릭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전통’이 단절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각 시기별 활동이 다르고 의견이 다르다보니, 서로를 부정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면서, “서로가 강조하는 부분에 대해 약한 것을 배우고 채우기보다는 앞선 것을 버리고 가는 경향이 아쉽다”고 털어놨다.

이창호 씨 역시 “우리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서 이 일을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80년대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것은 그 당시 가톨릭학생회 또는 개인으로서 ‘신앙고백’이었다”면서, “각각의 시대에 우리가 공통적으로 해 왔던 것은 사회적 상황에 대해서 교회가 침묵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당시 우리가 직면한 역사적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고민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가톨릭학생운동이 하고자 했던 것은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가장 큰 화두는 어떻게 예수를 닮을 것인가였고, 그것은 일반 학생운동과 다른 우리만의 모습이었다. 예수 안에서, 성경 안에서 길을 찾으려는, 그리고 교회 밖이 아닌 교회 안에서 길을 찾고 노력하려는 모습이었다.”(이창호)

어느 때보다 ‘운동권’ 이미지가 컸던 80년대 후반에 가톨릭학생회 활동을 했던 이창호 씨 역시, 문화와 사회 과학을 공부하면서도 신학과 성서 공부를 놓은 적은 없다면서, “하느님 나라 운동이 무엇인지 정리하기 위한 우리만의 작업이 진행됐고, 가톨릭학생회로서 논리와 실천 방향을 찾는 작업은 끊임없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가톨릭학생회, 세상의 촛불과 같은 존재

황재현 씨는 1980년대 초반 활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광주민주화항쟁의 직격탄을 맞았던 시기, 1970년대와 1980년대 후반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가톨릭학생운동을 경험했다는 황재현 씨는 대학 교정과 도서관에도 경찰이 상주하고, 탱크 사이로 등교해야 했던 시절, 가톨릭학생회는 촛불과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

“1984-85년의 이야기를 해보면, 사회적 의사표현 자체를 거의 못했다. 집회도 학내에서만 겨우 할 수 있을 정도였고, 거리로 나가면 거의 구속되는 상황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때에, 가톨릭학생회는 위험을 무릅쓰고 300여 명이 참여했다. 그만큼 가톨릭학생회는 결속력과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황재현)

황재현 씨가 이야기하는 1982년 전후는 “활동의 다양성을 이야기할 수 없고, 다만 운동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선택지가 있었을 뿐”이라면서, “대학생들의 의사 표시가 거의 불가능했던 시절, 가톨릭학생회는 촛불처럼 암울한 시기를 비췄다. 가톨릭학생회만이 할 수 있는 일, 긍정적 역할이 정말 많았다”고 기억했다.

그는 “동료가 눈앞에서 잡혀가고, 교수가 수업 중에 끌려가는 상황에서 결단을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서, “늘 그렇듯 사회 참여와 신앙, 영성 사이의 고민은 남아 있었지만, 집회에 나오지 않은 이들에게도 부채의식은 있었다. 무언가는 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당시 가졌던 가톨릭학생회의 결속력이 연결되지 못하고 단절됐다는 것이 무척 아쉽다고 말했다.

가톨릭학생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회원들의 자율성

가톨릭학생회는 각 대학별 학생회가 교구별로 연합회를 구성하고 전국조직으로 묶인다. 총연, 전협, 전가대협을 거쳐 현재 한국가톨릭대학생협의회로 활동하고 있지만 이전과 다른 것은 회원들의 자치권이 현저히 약화됐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홍태희 씨는 “물론 자치권이 없어지고, 교구 조직이 된다는 것이 장단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학생회는 평신도 사도직 단체로서 자율적으로 움직여야 하고, 스스로 어떻게 시대적 징표가 될 것인지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창호 씨 역시 최근의 분위기를 언급하면서, “가톨릭학생회만이 가질 수 있는 ‘자기만의 목소리’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면서, “회원들이 현장에 가더라도 진짜 체험을 하면서 현장과 자기 자신이 동시에 바뀌어야 하는데, 그런 체험이 없다면 1회성 경험이 될 뿐”이라고 우려했다.

그렇다면, 선배들이 바라보는 현재의 가톨릭학생회는 어떤 모습일까?

“솔직히 작년에 처음 재학생들을 봤을 때, 이 친구들 뭐 하는건가? 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은근히 하는 활동이 많았다. 아픈 아이들을 위해 모자를 뜨기도 하고, 세월호 미사를 제안했을 때는, 흔쾌히 그들이 할 수 있는 몫을 하겠다고 나섰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찾는 영역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현재 공동체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찾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이창호)

이창호 씨는 “가톨릭학생회는 언제나 그 시대적 현실에서 어떻게 살고, 어떤 실천을 해야 할지 선택해야 하는 도전을 받고 있으며, 그것은 현재 그들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신앙고백”이라면서, “외형적인 부분은 이전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60년 전부터 지금까지 표현 양식이 달라졌을 뿐, 가톨릭학생회가 추구하는 본질은 여전히 같다고 본다. 정형화된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백승덕 씨는 “예전 선배들이 광장에서 세상을 만났다면, 지금은 만나서 광장으로 나가는 것 같다. 그런 만남에서 우선 교회가 형성되고, 함께 사회로 나가는 길이 되는 것이 아닐까”라면서, “과거의 모습에 머무는 것보다, 현재에서 과거 역사를 발견하는 것, 과거와 현재의 체험을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홍태희 씨는 지난 날에도 모든 활동이 조직적이었던 것은 아니며, 개인적이고 산발적으로 이뤄졌던 것들도 많다면서, “그런 다양한 실천과 활동이 쌓여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 2014년 가톨릭학생회 재학생 회원들의 고민은 무엇일까? ⓒ정현진 기자

가톨릭학생회는 학생 시절에 그치는 운동 아니야
여전히 동문들의 삶 속에 있는 가톨릭학생운동의 가치

다시 ‘가톨릭학생운동이란 무엇인가’로 질문이 돌아갔다.

백승덕 씨는 가톨릭학생회가 그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라고 강조했다. 그는 가톨릭학생회 회원들이 1970년에까지 지식인, 80년대는 스스로 민중이 되었다면, 현재는 자기 스스로에게서 가난과 소외를 찾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가난과 소외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야 할지 생각해야 하며, 그 방법은 개인적으로 ‘관찰-판단-실천’이라는 '셀방법론'에서 찾기를 바란다”고 제안했다.

또 홍태희 씨는 60년 간 가톨릭학생운동을 거쳐 간 모든 이가 공통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가톨릭 신앙’뿐이라고 강조하면서, “우리가 공동체에서 체험했던 것, 그 모든 것이 우리 신앙의 증거다. 학생, 사회인, 성직자, 수도자로 어디에서든 그 신앙을 증거하고 있는 이들이 우리를 계속 이어 주고,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라고 말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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