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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전 스님, 신영복 교수 등 올해 만해대상 수상

 
조현 2015. 07. 06
조회수 398 추천수 0
 

 

 

만해대상 신영복 교수, 청전 스님 등 6명 수상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자 승려였던 만해 한용운의 뜻을 기리는 올해 만해 대상에 청전 스님과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등 6명이 올해 수상자로 선정됐다.

 

5일 만해축전추진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5월 일본군 위안부 등에 대한 역사왜곡을 비판하는 역사학자들의 성명 발표를 주도한 알렉시스 더든(46) 미국 코네티컷대 역사학 교수가 평화대상을 수상한다. 일본의 역사지우기를 정면 공격하는 더든 교수의 주도로 세계적 학자들이 동참해 아베 총리의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 직후 발표된 이 성명엔 5월말 현재 참여자가 460명으로 늘어났다.

 

만해대상 실천부문상은 27년간 히말라야 오지 마을에서 빈민구제활동을 해온 청전 스님(62)과 광주에서 발달장애인을 위한 그룹홈 활동을 해온 아일랜드 출신 천노엘 신부(83)가 이끄는 무지개공동회가 공동수상자로 결정됐다.

 

또 문예대상엔 오래 동안 인간과 생명, 평화와 공존의 참 의미를 전달해 온 교육자이자 저술가인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74)와 가야금 명인인 황병기(79) 이화여대 명예교수와 정현종 시인(76)이 공동수상하게 됐다.

 

만해대상은 시상식은 만해축전 기간 중인 12일 오후2시 강원도 인제 하늘내린린센터에서 열린다.

 

지금까지 만해대상은 넬슨만넬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달라이 라마 티베트불교 지도자, 김대중 대통령, 두봉주교, 김성수주교, 함세웅 신부, 법륜 스님, 리영희 선생 등이 수상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cho@hani.co.kr

 

이번 수상자들의 공적 사유는 다음과 같다.

 

 

◇평화부문대상:알렉시스 더든(46세. 미국 코네티컷대 역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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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의 야만적 성착취 시스템 하에서 고통을 겪은 일본군위안부에 대해 일본과 다른 국가의 역사교과서 기술을 억압하려는 기도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2015년 2월 미국 역사학자 19명은 일본 아베 정권의 미국 역사교과서 왜곡시도를 고발하는 집단 성명을 발표했다.

이때만 해도 역사학자들의 움직임은 ‘찻잔 속의 태풍’처럼 여겼다. 특히 일본 정부는 그랬다. 그렇지만 일본의 아베 총리가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인 2015년 5월, 이번에는 187명의 세계적 저명한 역사학자들이 다시 한번 성명을 발표했다. 내용은 역시 종군위안부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 정부를 질타하는 내용이었다.

 

이번에는 세계의 저명 역사학자 187명이 ‘일본 역사학자를 지지하는 공개서한’이란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 참가자들의 면면은 2월 성명과 질과 양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태평양전쟁에 히로히토 일왕이 깊숙이 관여했다는 내용을 다룬 ‘히로히토 평전-근대일본의 형성’으로 퓰리처상(2001년)을 받은 허버트 빅스 빙엄턴대 명예교수, 전후 일본의 변화와 성장을 규명한 ‘패배를 껴안고’로 역시 퓰리처상(2000년)을 받은 존 다우어 MIT명예교수, ‘넘버원일본’이란 저서로 유명한 아시아연구의 대가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 ‘한국전쟁의 기원’의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 등 보수와 진보를 망라한 학자들이 나섰다. 일본계 학자들도 33명이나 참여했다. 미국 외에도 캐나다 영국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호주 싱가포르 등의 역사학자들도 동참했다. 2015년 5월말 현재 460여명으로 참여자가 늘어난 이 성명 역시 주도자는 더든 교수였다.

 

역사학자들의 잇따른 성명을 이끌어낸 주인공은 미국 코네티컷대 알렉시스 더든 교수이다. 미국 컬럼비아대를 졸업하고 시카고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더든 교수는 한국과 일본의 독도, 중국과 일본의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의 쿠릴 열도 분쟁에 얽힌 역사적 실체와 국제조약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일본 릿교대와 게이오대, 한국의 서울대와 연세대에서 공부한 적이 있어 한국과 일본 모두에 대해 정통하다. 그의 연구실에는 독도 사진이 걸려 있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독도를 두 차례 방문하기도 한 그는 독도를 “너무도 아름다운 섬”이라고 말하지만 기본적으로 “한국과 일본 모두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다. 그랬던 더든 교수가 한일간에 첨예하게 인식차이를 보이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놓고 역사학자들의 서명까지 이끌어낸 것은 학자적 양심 때문이다.

 

더든 교수는 역사학자들이 뭉치게 된 이유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이미 논쟁거리가 아니라 전 세계가 인정하는 ‘사실’임에도 일본 정부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를 바꾸거나 역사에서 지우려 한다”며 “특히 일본 정부가 미국 역사교과서에 대해 수정을 요구한다는 것은 학문 자유에 대한 직접적 위협으로 역사학자들이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실천부문대상:청전 스님(62세. 히말라야 빈민구제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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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에서 빈민구제활동을 하는 청전스님은 특이한 이력을 가진 승려다. 1953년 전북 김제시에서 태어난 스님은 처음에는 교사가 되려 교육대학(전주교대)에 다녔다. 그러나 10월유신에 연류돼 12월 자퇴하고 1973년에는 가톨릭 신부가 되려 대건신학대를 다녔다. 가톨릭신부 수업을 받던 중 인생에 대한 의문이 생겨 송광사로 출가 송광사에서 구산 스님에게 1978년 사미계를, 1979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스님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전환이 생긴 것은 1987년 5월엔 동남아시아로 불교 순례길에서였다. 인도에서 가톨릭 테레사 수녀를 만난데 이어 그 해 8월 1일 히말라야 다람살라에서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당시 35살이었던 그는 히말라야 기슭에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달라이 라마의 제자가 되어 인도에 정착한 이후 그곳에서만 27년간 수행해오고 있다.

 

그는 조계종 소속 승려이고, 달라이 라마의 제자로서 티베트불교 수행자이지만, 히말라야 오지인들에겐 ‘산타 멍크’(산타클로스 스님)로 불리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인도에 머물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한 해도 빼지 않고 히말라야 오지들을 다니며 보시행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주로 가는 지역은 인도와 중국(티베트쪽) 접경 지역인 라다크와 잔스카르, 스피티 지역이다. 이 고을들은 각자 예전에 한 왕국이 있었을 만큼 지역적으로 넓다. 그러나 워낙 고지대에 있는 척박한 땅이어서 거주자는 많지 않다. 그 지역 대부분이 해발 3천~5천미터 고지대에 있고 마을이 수킬로씩 떨어져 있어서 병원도 약국도 학교도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아이들은 동자승이 되어 절에 살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

 

그들은 1년 중 절반가량이 눈과 얼음 때문에 고립된 삶을 산다. 날이 풀리는 여름이면 청전 스님은 지프차를 빌려 한 차 가득히 한국에서 보시 받은 영양제인 삐콤과 치료제 등 약품, 돋보기와 시계 등 생활필수품을 싣고 오지로 떠나 한 달 간 보시 순례를 한다. 오지에서 아무런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마을 주민들은 매년 한차례씩 청전 스님이 오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청전 스님은 각 마을에서 스님과 주민들 한 명 한 명의 병명을 듣고 거기에 맞는 약품을 전해준다. 시력이 약한 노인들에겐 돋보기와 시계를 준다. 청전 스님의 그런 보시 여행이 연차를 거듭해가면서 그 지역에선 청전 스님이 약을 주면 모두 낫는다는 믿음까지 생겨서 더욱 더 청전 스님을 손꼽아 기다리게 됐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벌써 20여년이다.

 

오지마을 학교 학생들도 영양 결핍으로 고통 받기는 마찬가지다. 오직 학교에는 보통 10~30명의 학생이 있는데, 한 학교에 젖소 한마리만 있으면 전교생이 그 젖소에서 짠 우유로 영양 문제가 크게 개선된다고 한다. 현지에서 젖소 한 마리는 한국 돈으로 1백만 원 가량이다. 라다크와 잔스카라, 스피티에 동자승 학교가 있는 곳 중에 스님이 젖소를 사주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그의 보시는 다른 자선단체와 달리 정부나 기관의 지원을 받는 법인이나 재단을 설립하지 않고, 개인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는 조직을 만들면 보시도 자칫 사업이 될 수 있다며 조직을 만들지 않고 개인 차원에서 보시행을 이어가고 있다. 청전 스님이 1년에 보시 받거나 인세 수입 등을 모두 합쳐 연간 총 수입은 6천만원가량이다. 다람살라에 달라이 라마의 법문을 들으러 온 이들이 통역을 한 그에게 보답한 것이거나 한국의 도반과 소수의 지인들이 십시일반 보태준 보시금이다. 그의 보시 여행엔 늘 한국에서 간 순례자들이 적게는 2~3명, 많게는 4~5명이 매년 동행해왔는데, 동행자들은 청전 스님이 보시 받은 돈을 대부분을 이웃에게 보시에 사용하는데 놀라곤 한다. 동행자들이 특히 놀라는 것은 한국인 한명의 연봉에 불과한 그 돈으로 우리나라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정도의 크기에 해당하는 방대한 지역 오지인들 대부분에게 직접적인 혜택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동행자들은 청전 스님이 한 수행자의 노력만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는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민초들이 나의 부처’라고 여기면서, “10년 수행하면 20년 봉사할 수 있고, 20년 수행하면 40년 봉사할 수 있다”는 스승 달라이 라마의 말대로 수행과 봉사의 삶이 둘이 아닌 하나로 회통되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실천부문대상:무지개공동회(발달장애인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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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출신 천노엘 신부(83)가 대표인 무지개공동회는 광주광역시를 기반으로 국내에서 최초로 발달장애인을 위한 그룹홈을 시작하면서 발달장애인을 우리 사회 안에서 떳떳한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게 도운 단체이다.

 

무지개공동회 대표인 천 신부는 장애인을 위해 한 일로 상을 받는 것을 극도로 거부한다. 1990년대부터 여러 차례 장애인단체, 인권단체 등에서 상을 수여하려 했으나 “나는 그들과 친구”라며 수상을 거부했다. 2014년 포스코청암상도 그래서 무지개공동회 이름으로 받았다.

 

그러나 무지개공동회의 활동을 천 신부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천노엘 신부는 아일랜드 출신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사제. 1957년 처음 한국에 온 천 신부는 20여년간 광주와 전남지역에서 일반 성당 사목을 했다. 그랬던 그가 당시엔 정신박약자로 불리던 발달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9년 한 무연고 발달장애인 소녀의 죽음이 계기가 됐다. 성당 신자들과 가끔 봉사활동을 가던 광주 무등갱생원에서 만났던 당시 19살짜리 ‘김여아’라는 아이가 갑자기 위독하게 됐다는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가 임종한 것. 그가 손을 잡아주자 김여아는 어눌한 목소리로 “고맙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졌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장례를 잘 치러드릴 테니 시신을 연구용으로 기증해달라”고 했다. 그는 “19년 동안 인간 대접 받지 못하고 살다가 떠난 여아를 그렇게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해 거절하고 광주 양산동 천주교 묘원에 매장했다. 지금도 그가 세운 비문에는 “사회를 용서해주시렵니까”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천 신부는 요즘도 매년 명절 때면 김여아의 묘를 찾아 벌초를 하면서 초심을 되새긴다.

 

천 신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수용시설이나 집안에서만 살아온 발달장애인을 위한 활동을 결심한다. 알코올중독자나 다른 신체 장애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의사표현할 수 있지만 발달장애인은 그마저도 쉽지 않은 현실을 보면서 발달장애인을 위한 헌신을 다짐한 것이다.

 

그는 1981년 유엔이 정한 ‘세계 장애인의 해’에 안식년을 얻어 유럽과 호주, 미국, 캐나다 등을 다니며 발달장애인 돌봄의 현장을 확인했다. 결론은 “장애인도 산 속의 대규모 시설이 아니라 일반인들과 함께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광주대교구에 사제가 부족한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천 신부는 당시 윤공희 대주교의 허락을 받아 특수사목을 시작하게 됐다. 첫 결실은 1981년 광주 시내 주택가를 빌려서 문을 연 그룹홈이었다. 장애인시설에 있던 무연고 여성과 봉사자와 함께 그룹홈을 열자 여기저기서 “미쳤다”고 했다. “장애인은 시설에 있는 게 가장 좋다”고도 했다. 그러나 천 신부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지역사회 안으로 데려와 ‘거주, 여가, 직업’을 함께 하도록 이끌어낸다.

 

현재 무지개공동회는 광주 시내 6곳 아파트에 위치한 그룹홈과 엠마우스복지관, 엠마우스산업, 유치원에까지 이른다.

그렇게 시작한 살림이 하나씩 늘어 현재 그룹홈 6곳에 복지관, 산업체, 유치원에까지 이른다. 특히 1991년 하남산업단지에 입주한 엠마우스산업은 40여명의 발달장애 근로자가 화장지와 양초를 생산하며 자립을 꿈꾸는 사회적 기업이다. 양초는 연간 10만개를 생산해 국내 각 교구의 성당에 전례용으로 공급되며, 화장지는 2년 연속 인천국제공항에 납품하고 있다.

 

만 35년간 그룹홈에서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했고 현재도 20~60대 장애인 4명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천 신부의 꿈은 더 크다. 장애인들이 그룹홈에서도 독립해 직장생활하면서 자립하는 것이다. 발달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어울려 배드민턴, 축구, 볼링동아리에서 활동하는 것, 엠마우스복지관 등 출신 130여명이 하남공단에서 비장애인들과 함께 일반 공장에서 일하는 것 등이 그에겐 자랑거리다.

 

 

◇문예부문대상:황병기(79세. 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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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명인 황병기(79)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중학교 때 처음 접한 가야금을 필생의 업(業)으로 삼아 명인의 경지에 이른 우리 창작음악의 1세대다.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교수로 있다가 2001년 정년퇴임했고,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지냈다.

 

황 명인의 업적은 우선 가야금 연주와 창작 분야에서 빛난다. 스승에게 어깨 너머로 배우는 것으로 알았던 가야금 음악을 익힌 후, ‘숲’ ‘영목’ ‘고향의 달’ ‘미궁’ ‘산운’ ‘하마단’ ‘침향무’ ‘비단길’ 등 수많은 가야금 레퍼터리를 짰다. 1974년 유럽 공연을 앞두고 신라 음악을 되살린 ‘침향무’와 신라 고분에서 발견된 페르시아 유리그릇에서 영감을 얻은 ‘비단길’, 백제가요 ‘정읍사’에서 소재를 딴 2007년 작 ‘달하 노피곰’까지 그의 작품을 들어보면

우리 소리의 유산을 껴안고 있으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갖춘 걸작들이다.

 

작년에도 여섯번째 창작 음반 ‘정남희제(制) 황병기류(流) 가야금 산조’를 낼 만큼, 여전히 현역으로 활약한다. 황 명인의 스승인 김윤덕 선생이 1946년 정남희(1905~ 1984)에게 배운 47분짜리 가야금 산조를 바탕 삼아 황 명인이 다스름,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엇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단모리 등 8부분으로 구성한 곡이다. 보통 가야금 산조의 2배 가까운 70분 분량이다. 여섯 장의 창작 음반을 낸 황 명인은 “내 작품은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자기 복제는 하지 않는다”고 말할 만큼, 엄격하게 자기 관리를 한다.

 

황 명인은 국악계의 간판스타로 국악을 세계에 알리는 데도 앞장서왔다. 1965년 하와이에서 열린 ‘20세기 음악예술제’에서 초청받아 연주했다. 이 때 호놀룰루 심포니와 협연하고 녹음한 음반(LP)에 대해 음악전문지 ‘스테레오 리뷰’는 ‘하이스피드 시대의 현대인에게 정신적 해독제와 같은 음악’이라고 극찬했다. 이를 시작으로 뉴욕 카네기홀을 비롯, 미국, 영국, 네덜란드,핀란드,일본,중국,프랑스,알제리,이탈리아,스위스 등 전 세계 주요 공연장에서 연주활동을 펼쳤다. 1990년엔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 통일 음악회에 남측 대표로 참가했으며, 같은 해 서울에서 열린 ‘송년 통일음악회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문예부문대상:정현종(76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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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종(1939~ ) 시인은,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여 50년 동안 한국 시의 사유와 감각에 신생의 탄력을 부여해온 한국 문단의 대표적 시인이다. 시인은 그 특유의 철학적 사색과 섬세한 감각으로 독자적인 시세계를 형성해왔는데, 그 세계는 육체성에 대한 발견과 생명에 대한 매혹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사유와 감각을 밀도 있게 결속해온 그만의 영역이라 할 것이다.

 

그는 첫 시집 《사물의 꿈》(1972) 이래 《고통의 축제》(1974) 《나는 별아저씨》(1978)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1984)에서 인간적 비극의 결핍 상태 곧 죽음이라든가 실존적 비극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천착을 노래해왔다. 

 

정현종 시인은 ‘꿈’과 ‘사물’이 궁극적으로 하나라는 사실, 시인의 꿈꾸기에 대한 욕망이 그치지 않는 한 사물들은 살아 움직이고 그 꿈이 다하면 사물들도 죽음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다는 믿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생명력에 대한 갈망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섬〉)라는 절창으로 이어진다. 이때 우리는 ‘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명시적으로 따진다는 것이, 마치 만해(萬海)의 ‘님’이 무엇인가를 산문적으로 따지는 것만큼 공허한 일임에 상도한다. 말하자면 그리움의 대상(“섬”)보다는 그리움 자체(“가고 싶다”)가 중요하다는 것,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대상 획득이 아니라 대상을 향한 끊임없는 꿈이라는 것을 시인이 에둘러 강조한 것임을 알게 된다.

 

시인은 삶의 불모성과 비극성을 푸는 방법론으로 ‘육체에 기반을 둔 사랑’ 곧 에로스의 시적 발견에 힘을 쏟았다.

그 후 1990년대 들어서 발표한 시집들에 줄곧 담긴 명징하고도 구체성 있는 생명의 시편들은 그의 시 안에 담겨 있는 철학성의 본질을 새삼 되묻게 만들었고, 그 결과는 한국 시의 자기 전개 과정에서 빚어진 의미 있는 진경이라는 평가를 불러왔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후기 시편들에서 집중적인 생태적 상상력을 낳는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 그의 후기시는, 시적 진리에 이르는 길이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지식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바라보는 데 있다는 것이라는 착상에서 비롯하여, 그것을 두루 실험하고 완성하는 구체적 실감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만큼 그의 시편들은 우리로 하여금 감관(感官)을 자극하게끔 하고 인지적, 정서적 충격과 반응을 풍부하게 가지게끔 하는 ‘언어의 샘’이 되어주었다. 그 점에서 정현종은 우리 문학사에, 생명의 황홀을 노래하는 우주적 상상력의 참모습을 보여준 범례로 길이 남을 것이다.

  

 

◇문예부문대상:신영복(74세. 교육자, 성공회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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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교수는 오래 동안 인간과 생명, 평화와 공존의 참 의미를 전달해 온 교육자이자 저술가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강의를 들으며 삶의 좌표를 가다듬었고 많은 독자들이 그의 책을 읽으며 깊은 성찰의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그는 또한 아름답고 깊은 울림을 가진 글씨와 그림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부박한 일상 속에서 생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반추하는 감동을 느끼게 해 준 서화작가이기도 하다.

 

신영복 교수는 1941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해 1959년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학생서클의 구심점이자 지도자로 활동했던 그는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1968년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고 20년 20일 동안 영어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1988년 가석방된 신영복교수는 주변 친구들의 배려 속에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교수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1998년 사면복권되면서 정식으로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가 되었고 2006년 정년퇴임한 후 현재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글과 강연으로 많은 사람을 각성시키고 감동을 주었다. 감옥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그를 대중적으로 널리 알린 책이다. 그는 감옥에서의 신산한 삶을 오히려 따뜻한 위로와 성찰의 메시지로 담아 가족들에게 전했고 1988년 이 편지글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수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지금도 꾸준히 새로운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이 책은 신영복이 현실과 민중을 만나며 창백한 지식인의 관념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식과 삶을 재구성하며 낮지만 깊은 지혜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신영복 교수는 두 번에 걸쳐 국내와 국외 기행기를 신문에 연재한 바 있는데 그 결과로 나온 책이 국내 여행기인 <나무야 나무야>(1996)와 해외 여행기인 <더불어 숲>(1998)이다. 이 두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깊은 역사의식과 창의적 상상력으로 역사 속의 인물과 장소를 ‘지금 현재’의 역사성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그 의미를 포획하는 놀라운 지적 통찰의 기록이다.

 

신영복 교수가 쓴 또 하나의 명저는 <강의>(2004)다. 나의 고전독법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그가 오래 동안 강의해 온 동양고전들에 대한 그 나름의 해석이 담겨 있다. 경제학을 전공하던 사회과학자가 오랜 수형 생활 속에서 새롭게 동양 고전을 공부하고 사유하며 이루어낸 장강과도 같은 지혜가 이 책 속에 있다. 유려하고 짧은 단문으로 마치 화두를 던지듯 쓰여진 그의 글들은 긴 여운을 남기며 끊임없이 사색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신영복 교수의 지혜와 사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단지 그의 책들을 통해서만이 아니다. 짧지만 놀랍도록 함축적인 지혜가 담긴 그의 글씨와 그림은 그의 사상을 접할 수 있는 또 하나 중요한 매개체다. 신영복 교수는 어릴 적 한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한문과 서예를 배웠다. 물론 그가 좀 더 깊은 공부를 한 건 감옥에서다. 글자 하나하나가 마치 어깨동무를 한 듯 기대고 있는 그의 독특한 글씨는 시민단체들의 현판과 벽을 장식하고 있다. ‘처음처럼’ ‘더불어 숲’ 등 평범하고 단순해 보이는 문장에 특유의 통찰과 지혜를 담아내는 그의 서화작품들은 시민들

에게 평화와 민주, 생명과 공존, 화해와 연민의 메시지를 전하는 잠언들이다. 신영복 교수는 탁월한 강연자이기도 하다.

 

오래 전부터 그는 전국의 수많은 지역과 단체, 학교에서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많은 시민들에게 낮고 고요하지만 치열하고 풍요로운 성찰과 희망의 언어를 전하고 있다. 신영복 교수의 사상은 ‘더불어 숲’이라는 글귀에 상징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힘과 대결, 경쟁과 승리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공존과 평화의 의미를 전하는 그의 언어는 책을 통해, 강연을 통해 이 시대의 등대가 되어주고 있다.

 

신영복 교수는 우리 사회가 급격한 자본주의화로 잃어버린 공동체성을 회복하도록 일깨워주면서, 공동체적 삶을 조용히 실천해왔다. 몇 번의 서화전을 통해 얻은 수익금을 기부하기도 했으며 또 ‘처음처럼’이란 소주 글씨를 써주고 받은 1억원을 대학에 장학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지난 2008년 청명문화재단이 제정한 임창순상을 받았는데 당시 청명문화재단은 선정이유를 “다양한 개인과 계층과 문화가 서로를 살리고 북돋우는 사랑과 화합의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는 신영복의 따뜻한 분노가 우리 사회에서 더욱 큰 울림과 더욱 넓은 어울림으로 번져 가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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