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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물질 참사 막으려면, 틀린 경보가 묵살보다 낫다

 
조홍섭 2016. 06. 03
조회수 1440 추천수 0
 
`가정 독물'인 살생물질 관리에 특별한 대책 필요…디디티 교훈 잊지 말아야
과학적 불확실성 있어도 돌이킬 수 없는 피해 예상되면 조기경보 들어야 
 
1.jpg»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5월31일 오전 서울 여의도 옥시레킷벤키저 본사 앞에서 불매운동으로 수거한 옥시레킷벤키(옥시) 제품을 모아놓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생물을 죽이는 독성물질이 가정에서 점점 많이 쓰이지만 그 안에 어떤 성분이 들어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아침에 쓴 샴프나 손에 든 휴대전화, 금세 썩지 않는 나무의자에는 모두 화학물질이 들어있다. 사실, 화학물질 없는 현대문명은 생각하기 힘들다. 문제는 그 가운데는 생물을 죽이는 성분이 들어있고 날로 쓰임새를 넓혀가고 있다는 점이다. 모기약을 뿌리고 곰팡이를 없애며 손을 소독하는 데 쓰는 화학물질이 그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죽이는 이런 물질을 ‘살생물질’(바이오사이드)이라고 한다. 가습기 살균제는 살생물질이 사람까지 죽일 수 있음을 비극적으로 보여줬다. 같은 뿌리에서 진화한 생명체의 작동 원리는 기본적으로 비슷하기 마련이다. 어떤 생물을 죽이는 물질은 다른 생물에도 해를 끼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살생물질’이란 어려운 표현보다는 ‘가정 독물’이 더 적합한 표현 같아 보인다. 실제로, 덴마크 환경부는 살생물질이 사람과 환경에 끼치는 영향을 알고 조심스럽게 쓰자는 “독이 든 일상용품을 쓰기 전에 생각해 봅시다!”란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Poison_miljø_03 (2).jpg» 덴마크 환경부가 벌이는 살생물제 신중하게 쓰기 캠페인 포스터. "독물이 들어가는 생활용품을 쓰기 전에 생각해 보자"라고 적혀 있다. 사진=덴마크 환경부
 
살생물질 가운데 가장 심각한 피해를 일으킨 물질을 꼽는다면 디디티이다. 석면, 프레온, 휘발유 납 첨가제 등 세계적 참사를 부른 다른 화학물질처럼 디디티도 세상을 구할 물질처럼 보였다. 값이 싸고 살충효과가 뛰어난데다 사람과 포유류에는 독성이 없어 보였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이가 옮기는 발진티푸스를 막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끈 숨은 공신이었고, 이후 말라리아와 뎅기열 퇴치의 주역으로 수천만명의 목숨을 구했다.
 
CDC_DDT_WWII_soldier.jpg» 옷 속에 디디티 분말을 살포하는 모습. 이차대전 때 발진티푸스를 옮기는 이를 퇴치하기 위해 많은 양의 디디티를 뿌렸다. 사진=미국 CDC
 
그러나 쉽게 분해되지 않고 끈질기게 살충효과를 유지하는 디디티의 장점은 환경속에 잔류해 생물농축을 일으키는 치명적 약점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1962년 <침묵의 봄>을 쓴 레이철 카슨이 이 위험을 대중에게 처음 경고했지만 부작용은 훨씬 전부터 알려졌다. 디디티를 살충제로 개발한 공로로 194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폴 뮐러조차 수상 연설에서 디디티가 파리에 발달장애를 일으키는 문제를 언급했을 정도다. 
 
cdc_1280px-DDTDichlordiphényltrichloréthane7.JPG» 미국에서 시판되던 디디티 분말 제품. 10% 디디티를 함유한 프랑스 시바 가이기 제품인 50그램 용량의 이 제품에는 다음과 같은 광고 문구가 적혀 있다. "벼룩, 이, 개미, 빈대, 바퀴, 파리 등 기생충을 파괴합니다." "가루를 가능하면 오래 뿌려 두십시오" "해충이 바로 죽지는 않지만 결국 죽습니다." "사람과 온혈동물에는 해가 없습니다." "틀림 없고 지속적인 효과에 냄새가 없습니다."
 
디디티 사례는 새로운 살생물질이 뛰어난 효과를 자랑하며 등장할 때 알려지지 않은 부작용도 면밀히 검토해야 하며, 남들보다 앞서 문제를 경고하는 목소리를 묵살해선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겼다.  우리나라는 1961년 디디티 사용을 금지했지만 토양과 먹이사슬을 통한 오염 때문에 아직도 미량이지만 상수원수와 생선, 모유 등에서 검출되고 있다.
 
eea.jpg» 유럽환경기구(EEA)가 2001년에 이어 2013년 내놓은 ‘조기 경보와 뒤늦은 교훈’이란 보고서.
 
 
유럽환경기구(EEA)는 2001년에 이어 2013년 ‘조기 경보와 뒤늦은 교훈’이란 보고서를 내어, 주요한 화학물질로 인한 피해와 환경문제가 일찍부터 나온 경고를 어떻게 무시했는지 사례를 들어 분석했다. 놀랍게도 주요한 환경사고는 피해가 발생하기 수십년에서 100년 전에 조기 경보가 울렸다. 그런데도 이런 문제제기로부터 애써 눈을 돌려 결국 대규모 인명이나 재산 피해를 불렀다. 보고서의 결론은 ‘사전예방 원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학적 불확실성이 있더라도 결정을 미루지 말라는 것이 핵심이다.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예상될 때는 틀린 경보가 묵살보다 낫다.
 
05583508_R_0.jpg» 5월23일 서울 새문안로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 열린 애경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박나연양의 기족회견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가습기 살균제 사고 때에도 수많은 경보가 울렸지만 정부와 기업, 전문가, 언론인 할 것 없이 무책임하게, 또는 소극적으로 이를 묵살했다. 구멍이 숭숭 뚫린 것으로 드러난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법을 제정할 때도 정부와 기업은 화학산업이 다 망한다고 아우성쳤고 박근혜 대통령은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며 규제완화를 촉구했다. 
 
이제 살생물질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가정 독물로서 제대로 관리해야 한다. 어떤 회사가 제품을 만들었는지, 어떤 유해성이 있는 물질이 들어있는지가 투명하게 공개돼야 한다. 사업장 화학물질과 달리 살생물제는 소비자가 소량으로 늘 노출되는 물질이다. 대량으로 사용하는 업체만 관리대상으로 삼아서는 곤란하다. 여러 살생물질에 복합적으로 노출되는 누적효과도 고려해야 한다. 이미 유럽에서 시행되는 제도이니 기업 경쟁력이 떨어질 우려도 없다. 뼈아픈 교훈을 얻고도 고치지 못한다면 희망은 없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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