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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 북 노동당 통전부장, 대남비서도 겸직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6/01/21 10:45
  • 수정일
    2016/01/21 10:4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단독> 소식통 "베이징서 북측 인사 '비서'라고 두 차례 호칭"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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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1.20  13: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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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철 인민군 정찰총국장(왼쪽)이 당 통일전선부장 겸 대남비서에 기용된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은 북한이 2014년 10월 김관진 청와대 안보실장에게 3차례 전통문을 보내 긴급단독접촉을 제안하면서 김영철 총국장을 특사로 내세웠지만 결국 유제승 국방부 정책실장과 대면한 모습. [자료사진 - 통일뉴스]

지난 연말 교통사고로 사망한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장 후임에 임명된 것으로 알려진 김영철(70) 인민군 정찰총국장이 김양건이 겸임했던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에도 임명된 것으로 확인됐다.

김영철의 통일전선부장 임명 소식을 전한 정통한 소식통은 19일 “지난주 베이징에 나온 북측 인사가 김영철을 분명하게 ‘비서’라고 두 차례 호칭했다”고 추가로 확인했다. 이 북측 인사는 김영철 총국장의 직위 변동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소식통은 전날 “중국에 나온 북한 고위급 인사로부터 통일전선부장을 김영철 정찰총국장이 맡은 것으로 확인됐다”며 “노동당 비서 겸직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 [관련기사 보기]

김영철 정찰총국장이 김양건 후임으로 대남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을 맡게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대남 총책이 된 것. 노동당 비서는 각 영역을 책임지는 북한 권력의 핵심으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직접 보좌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정창현 국민대 겸임교수는 “2000년대 후반부터 대남분야는 김양건, 김영철 투톱 체제로 운영해왔다”며 “김양건이 사망함으로써 한축이었던 김영철이 대남분야를 총괄토록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1989년부터 남북회담에 참가해 온 김영철은 인민군 대장으로, 2009년 대남 공작을 담당하는 군 정찰총국장에 임명됐고,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도 겸직했다.

특히 2014년 10월 서해교전 사태 당시 북측이 남측에 ‘긴급단독접촉’을 제의하면서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의 파트너로 김영철을 내세운 바 있다.

한 전문가는 전날 사견임을 전제로 “김양건 후임에 김영철을 내세운 것은 군 출신 김관진 청와대 안보실장이 대북 책임자인 남쪽 상황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며 “김영철을 강경파로만 알고 있는데 실상은 다를 수 있다”고 말했다.

협상장에서 김영철을 지켜본 적이 있는 김동엽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미시연구소 연구위원은 “김영철을 단순히 매파로 봐서는 안 된다”며 “순간 순간 재기가 넘치고 오히려 융통성 있는 모습을 봤다”고 평했다.

김동엽 연구위원은 “김영철은 오랫동안 군사, 안보분야와 협상장에서 내공을 닦아온 인물”이라며 “핵을 가진 북한이 남북대화는 물론 평화체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적임자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창현 교수는 “김영철의 등장은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이나 금강산관광 재개도 이야기하겠지만 근본적으로 남북간 군사적 긴장해소 방안에 집중할 것임을 예고한다”며 “조만간 5월 당대회 이전이라도 남북관계를 큰 틀에서 풀자고 제안할 가능성도 있다”고 관측했다.

(수정,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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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김석기가 국회의원 되는 건 막아야지

 

[용산참사 7년] 끝나지 않은 용산, 우리는 여전히 모여서 싸울 수밖에

16.01.20 11:33l최종 업데이트 16.01.20 11:33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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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9년 1월 22일 오전 용산 남일당 진압작전 도중 사망한 고 김남훈 경사 영결식이 열린 서울 송파구 경찰병원 영결식장에서 진압작전을 승인한 김석기 서울지방경찰청장이 떠나는 운구행렬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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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7년 전 오늘 아마도 지금쯤. 서울 용산에서 망루 농성 중이던 철거민들에게 큰 일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물론 조금 더 늦은 시간일 수도 있겠다. 어제처럼 무지하게 추웠던 날이었다. 누가 죽었는지, 몇 명이 죽고 잡혀갔는지도 정확히 모른 채, 정오 무렵 용산에 모여 기자회견을 했고 바로 철도웨딩홀에 모여 긴급 회의를 진행했다. 

엄청나게 많은 단체들과 개인들이 모여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언론도 경찰의 과잉폭력진압이 문제라고 지적했고, 누가 봐도 경찰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금세 정부와 경찰이 수습하기 위해 사과하고 보상하고 책임자 처벌을 할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내로라하는 단체들에서 쟁쟁한 인물들이 다 모였기 때문에 나 정도는 그냥 지켜보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평소 특별히 업무지시 같은 것을 하지 않는 천주교인권위원회 이사장 김형태 변호사가 전화를 해 와서는 용산에 큰일이 났는데 가보았냐고 물었다. 나는 이미 와 있다고 답했고 이사장은 중요한 일이니 잘 도우라고 당부했다. 그때까지도 난 내가 1년이 넘게 희생자들의 시신이 있는 순천향대학병원 장례식장과 용산 남일당 참사현장을 오가며 살게 될 것이라고는 짐작도 못했고, 지금까지도 용산참사로 파생된 수많은 일들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더욱 상상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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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9년 1월 20일 새벽 서울 용산구 신용산역 부근 재개발 지역내 5층 건물 옥상에 설치된 철거민 농성용 가건물을 경찰특공대가 강제진압 하는 과정에서 불길에 휩싸인 가건물이 무너지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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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9년 1월 20일 새벽 서울 용산구 신용산역 부근 재개발 지역내 5층 건물 옥상에서 철거민들이 농성을 벌이는 가운데 경찰특공대가 철거민들을 제압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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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는 많은 분들이 그랬으리라. 그리고 그렇게 많이 모였던 단체들과 사람들이 시신과 유족들을 두고 그리 빨리 떠나 갈지도 몰랐었다. 용산참사 싸움은 정말 많은 분들의 놀라운 연대와 지지로 1년 넘게 현장을 지켰지만 당연히 같이 해줄 줄 알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외면 당했던 싸움이었다. '화염병과 도심 테러리스트'가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나는 왜 그렇게 우리가 외로운 싸움을 해야 했는지, 사실 지금까지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난 유가족 지원을 담당했고 사무를 맡았고 대정부 협상대표를 맡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을 했지만 지금까지도 아직 이행되지 못한 합의사항들 때문에 서울시를 만나고 협의하고 일을 추진하고 있다. 아직도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 유족들과 철거민들을 수시로 만나고 크고작은 민원들을 처리하고 있다.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이원호​ 사무국장이 웬만한 일들은 다 해결하지만, 각을 잡고 호들갑을 떨며 내가 해야만 하는 난감한 일들도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끝나지 않은 용산참사'는 당사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불행하게도 용산참사는 내게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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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9년 1월 20일 새벽 서울 용산구 신용산역 부근 재개발 지역내 5층 건물에서 철거민들이 경찰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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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0일) 저녁 7시 30분 종로 3가 인디스페이스에서 용산참사 다큐 <두개의 문> 특별상영회와 감독과의 대화가 예정되어 있다. 용산참사를 뉴스로만 보고 들었던 분들께 꼭 오늘 오셔서 관람하시길 권한다. VOD로 집에서 보는 것과 극장에서 보는 게 감동과 느낌이 완전히 다른 영화다. 백남기 어르신 큰 따님 백도라지씨도 오셔서 용산참사 유족들과 만나고 식사도 같이 하실 것이다. 영화를 보고 싶으신 분들은 망설이지 마시고 오시면 좋겠다. 

내일(21일)은 밀양할매들의 송전탑 반대 투쟁의 기록 <밀양아리랑>, 모레(22일)에는 세월호 참사 가족들의 싸움을 기록한 영화 <나쁜나라>의 초대 상영회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연다. 이 영화들도 그냥 오셔서 말하고 무료로 보시면 되니까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시라. 

날이 여전히 차갑다. 이제 마석 모란 공원 용산참사 희생자 묘역으로 출발한다. 묘지 앞에서 아직 해야 할 일들이 있음을 말씀 드리고 잘 해결하겠다 다짐하고 와야지. 별 수 있나. 난 또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일들을 하는 수밖에. 용산참사 과잉진압 책임자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이 20대 총선에 경주에서 새누리당 공천을 받아 출마하고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일은 막아내야지. 그거라도 해야 돌아가신 분들께 면목이 서지 않겠는가. 

오는 23일 오후 1시 신용산역 남일당 용산참사 현장에서 열리는 마지막 추모대회에도 많은 분들이 함께 하시면 좋겠다. "여기 사람이 있다",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다"라는 우리의 외침들이 아직도 메아리로 돌아오지 않는 무색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다 믿으며 함께 가야지. 힘 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모여서 함께 싸우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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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참사 7주기 추모대회


[관련기사] 

[큰사진] "'살인진압' 김석기가 갈 곳은 국회 아닌 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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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생태공동체 선애빌 마을

삶도 일도 같이 또 따로, 자연과 더불어 ‘행복한 불편’

김정수 2016. 01. 20
조회수 509 추천수 0
 

보은 생태공동체 선애빌 마을
 

 직업도 종교도 다 다른 22가구 40명
 명상동호회 인연으로 마음 모아
 
 형편대로 수백만원에서 수억원까지 
 돈 내 법인 만들고 땅 2만평 사 
 
 돈 액수 관계없이 동등한 권리
 똑같은 형태·크기로 집 지어 
 
 1인당 월 19만원 내 공동 생활비로
 주식 100%, 부식 30% 이상 자급
 
 재래식 공동변소 쓰고 자연농법
 화석연료 안 쓰고 식사도 공동
 
 울력·마을회의 참여도 느슨한 의무
 애초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바꿔

 

03441.JPG» 충북 보은군 마로면 기대리 생태공동체 선애빌 주민들이 지난 12일 저녁 마을 명상센터에서 이종민 대표 주재로 회의를 열고 마을 일을 의논하고 있다. 바닥에 놓인 노트북 컴퓨터 앞에 앉은 사람이 이 대표다.   

 
변소를 집 안까지 끌어들일 수 있게 한 수세식 변기는 현대 문명을 상징하는 최고 발명품의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환경과 자원순환 관점에서 보면 좋은 발명품은 아니다.

 

한 번 물을 내릴 때마다 소중한 자원인 물을 10리터 안팎이나 소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삭혀서 땅에 뿌리면 먹거리가 돼 돌아올 양분을 하천을 더럽히는 오염물질로 바꿔버린다. 이런 문제점을 잘 아는 사람들도 수세식 변기의 편리함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충북 보은군 마로면 기대리에 있는 생태공동체 선애빌에는 자연을 위해 이런 편리함들을 기꺼이 포기한 사람들이 모여 살아간다. 약사, 은행원, 회사원, 정보기술전문가, 농민, 자영업자, 교사, 환경단체 활동가, 만화가, 목수 등 다채로운 전직에 종교적 배경까지 다양한 22가구 40명이 그들이다.

 

이들이 이용하는 마을 한가운데 공동화장실은 재래식으로 분뇨를 처리하는 생태화장실이다. 모아진 분뇨는 근처 퇴비장에서 왕겨와 화목을 태운 재와 섞여 발효돼 이들의 식탁에 오르는 먹거리를 키운다. 
 
지식과 재능 주변마을 주민과 나눠

 

IMG_0263.JPG» 선애빌 마을 뒤 언덕에서 내려다 본 선애빌의 저녁 모습. 주택들 뒤 화목 보일러실 지붕 위로 솟은 연통에서 난방용 화목을 태우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이들은 수세식 변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 외에도 방 안에서 스위치만 켜면 태울 수 있는 석유나 가스 등 화석연료 대신 버려지는 나무와 같이 재생가능 바이오 에너지를 태우는 화목 보일러로 방을 덥힌다.

 

텔레비전과 전자레인지같이 많은 가정에서 필수품이 된 가전제품을 포기하고, 세탁기는 세 집이 한 대꼴로 공동 사용하는 불편을 감수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전기 없는 날을 마치 축제처럼 즐긴다.

 

공동 식사를 통해 취사용 에너지 소비와 음식물 쓰레기 발생을 줄이고, 지붕에 떨어지는 빗물을 모아 사용하고, 친환경 비누를 만들어 쓰고, 화학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는 자연농법을 시도하는 것도 생태적으로 살아가려는 노력의 일부다.
 

IMG_0183.JPG» 선애빌에 있는 재래식 공동 화장실인 ‘생생화장실’. 선애빌 주민들은 환경을 위해 수세식 화장실 대신 마을에 하나 뿐인 이 재래식 화장실을 함께 쓴다.

 

그렇다고 세상에서 자신들을 고립시키는 것은 아니다. 집집마다 텔레비전은 없어도 컴퓨터는 갖춰 놓고 인터넷을 통해 세상의 흐름을 살피며 소통하고 있다. 외부에서 강사나 문화단체를 초청해 강연회나 문화행사 여는 것을 즐기고, 자신들의 지식과 재능을 주변 마을 주민들과 나누는 일에도 열심이다.
 

금강의 지류인 보청천이 휘어 돌아가는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선애마을이 들어선 것은 2011년이다. ‘선을 사랑한다’는 마을 이름이 말해주듯 수선재라는 명상단체를 통해 인연을 맺은 명상동호회가 기초가 됐다.
 
영암과 고흥에도 동시에 같은 마을


선애마을이 설립될 때까지의 이야기는 몇년 전 <생태공동체 뚝딱 만들기>라는 책에 일부 소개됐다. 하지만 책 제목대로 마을이 ‘뚝딱’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땅을 사고 집을 지어 입주하기까지 1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공동체 설립 제안에서부터 따지면 5년의 짧지 않은 준비가 있었다. 돈을 모으면서 이미 설립된 공동체 마을들을 견학하고, 전문가들을 만나 조언을 들으며 공부한 기간이다.

 

IMG_0245.JPG» 마을 공동식당 '낙생'에서 설겆이를 하고 정리해 둔 각자의 식기 모습.

 

12일 마을을 안내하던 이종민(48) 선애빌 대표는 “책 제목 때문에 공동체운동 어른들께 꾸지람을 많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환경 관련 엔지오에서 주로 활동해온 그는 2006년 생태명상마을 동호회를 창립하고 기대리와 전남 영암과 고흥 등 세곳에서 동시에 진행된 선애빌 설립을 주도했다.
 

기대리 선애빌 사람들은 2010년 각자 적게는 수백만원에서 많게는 수억원씩 낸 돈을 자본금으로 마을 이름을 딴 한 유한회사를 설립하고, 법인 명의로 임야와 농지 등 2만평의 땅을 구입했다.

 

그 땅 한가운데 똑같은 형태의 주택용 건물 15동과 창고, 식당, 명상센터, 대안학교 등의 부대 건물을 지었다. 실평수 18평에 방 4개와 욕실, 주방 겸 거실 등을 갖춘 주택은 가족에게는 독채, 미혼이거나 가족과 떨어져 혼자 온 사람에게는 두 명에 한 채씩 배정됐다. 
 

선애빌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1인당 월 19만원씩의 생활비 납부다. 마을 영농팀이 가끔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짓는 농사로 주식은 100%, 부식은 최소 30% 이상 자급하고 있어 이 돈으로 세끼 식사와 개인 통신료를 제외한 전기요금 등의 공과금까지 모두 해결된다.

 

매주 한 번씩 하는 공동 노동인 ‘울력’과 마을회의 참여, 한 달에 한두 번꼴로 돌아오는 공동식당 도우미 봉사도 의무 사항이다. 하지만 이행하지 않는다고 제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엄격한 규율이나 명문화된 규칙 없어


IMG_0196.JPG» 12일 아침 선애빌 주민 집단노동인 ‘울력’에 참여한 주민들이 마을 앞에 야적된 난방용 화목을 트럭에 실어 주택 보일러실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12일 마을 입구에서 벌어진 난방용 화목 운반 울력에 참여한 주민 성철경(43)씨는 “처음에는 뭐든 함께해야 한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지금은 공동으로 일할 때도 사정이 있으면 안 나오고 나중에 시간이 되면 하는 식으로 한다”며 “키부츠(이스라엘의 공동소유 형태 집단농장) 같았던 공동체가 지금은 개인의 특성을 많이 인정해주는 형태로 진화했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에서 아이티 전문가로 일하다 3년 전 아내와 딸과 함께 기대리 선애빌로 들어와 마을 사회적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생태마을 체험 프로그램 운영, 천연비누 만들기, 야영장 운영, 소프트웨어 개발 등의 사업을 펼치거나 준비 중인 사회적기업 ‘선애마을보은’에는 이 대표를 포함해 이 마을 주민 12명이 평균 120만원의 급여를 받으며 일한다.
 

기대리 선애빌에는 공동체 운영의 필수조건처럼 여겨지는 엄격한 규율이나 명문화된 규칙이 없다. 이 대표는 “계속 이것저것 실험을 해나가는 상황이어서 너무 틀에 박아 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인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이다 보니 가치지향적인 공동체를 떠올리면 으레 상상할 수 있는 비타협적인 완고함도 찾아보기 어렵다.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면서 개인의식을 성장시킨다는 지향점과 마을 설립에 내놓은 돈의 액수와 무관하게 누구나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원칙을 제외하고는 어떤 변화도 논의할 수 있다는 유연한 태도다. 이는 3년 전 마을의 혁명적 변화로 이어졌다.
 
인디언식 원탁회의와 만장일치제 
 

기대리 선애빌은 애초 주민들이 집단농장식으로 농사를 지어 마을 운영비를 충당하고 수익을 나누는 형태로 출발했다. 하지만 2년 만에 주민들이 마을 내외부에서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해 수입을 얻고 그 가운데 일정액을 걷어 운영비로 충당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바뀐 것과 같은 이 체제 전환은 마을의 의사결정 방식인 인디언식 원탁회의와 만장일치로 결론을 내는 화백회의를 거치며 큰 충격 없이 이뤄질 수 있었다. 
 

이 대표는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가치지향적인 사람들이 다양한 갈등을 조율해가며 6년간 공동체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명상을 통해 늘 욕심을 비우고 자신을 내려놓는 연습을 해왔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소문을 듣고 찾아와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본 사람들 가운데 함께하고 싶다는 이들도 제법 있다. 이 대표는 “우리 뜻에 동의하시는 분이면 받아들일 수 있고 2년 전에 그렇게 들어오신 분도 있지만, 지금은 더이상 공간이 없어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날 저녁 마을 공동식당 ‘낙생’에서 만난 주민 정래홍(42)씨도 “사람마다 생각이 달라 맞춰가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서로 조금씩 양보를 해 이제는 어느 정도 합의점을 찾은 상태”라고 말했다.

 

서울 인사동에서 명상센터를 운영하다 2012년 선애빌로 온 그는 “여기서 내가 필요한 돈은 한 달에 50만원 정도여서 가끔 외부 강의로 생활비를 벌고, 나머지 시간에는 내가 하고 싶은 자연농법과 토종종자 보급 활동을 하며 만족스럽게 살고 있다”며 “도시를 벗어나 조금만 욕심을 줄이면 적은 비용으로 높은 삶의 질을 누리며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보은/ 글·사진 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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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민주-천정배 통합, 문제는 당권·공천권

 

[이슈분석] 공개적으로 통합 논의 착수, 최대 변수는 '김종인 선대위'

16.01.19 20:57l최종 업데이트 16.01.19 20:57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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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일 오후, 국민회의 광주광역시당 창당대회가 열리는 김대중컨벤션센터 대강당 입구에서 김영집 광주시당위원장(맨 오른쪽)과 함께 참가자들을 맞이하고 있는 천정배 의원. 그가 야권연대와 통합 국면에서 누구의 손을 잡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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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천정배 국민회의 창당준비위원장 사이의 통합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양측은 그동안 비공식적으로 통합 논의를 진행해 왔지만 문 대표가 19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양측의 통합을 공식 제안하고, 천 위원장 역시 같은날 라디오 인터뷰에서 논의 사실을 인정했다. 반면, 그동안 국민회의와 국민의당의 통합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천 위원장은 이날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문 대표의 통합 공식 제안 등 더민주와 통합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도 국민의당과 관련해 "안철수 의원 쪽이 나에게는 자연스럽다, 그쪽도 고려사항이 있다"라고 말했다. 여전히 국민의당과의 통합 가능성도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그러나 실제 방향은 더민주 쪽으로 기울어졌다는 것이 정치권 전반의 분위기다. (관련기사 : '호남정치 복원' 다들 써먹고, '뉴 DJ'는 안 모이고)

국민회의 측에 따르면, 문 대표의 신년 기자회견 이후 천 위원장은 "더민주가 당의 해체에 준하는 변화로 기득권 해체를 실천하는지 좀 더 지켜보겠다"라며 "우리는 비전과 가치, 반패권, 승리와 희망의 연대라는 3원칙 아래 박근혜정부와 맞서는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드려왔다"라고 말했다. 앞서 그는 CBS 라디오에 출연해 "문 대표의 사퇴만으로 당의 기득권 해체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천 위원장은 더민주와 최종적 통합에 조건으로 내건 것은 '당 해체에 준하는 변화', '기득권 해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보다 정치공학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천 위원장의 요구는 통합 이후의 '당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천 위원장은 이날 인터뷰에서 "강력하게 여러 가지 변화를 도모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시는데, 종합적으로 과연 변화 가능성이 있는가, 기득권 해체의 가능성이 분명한가 좀 더 판단해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결국 천 위원장이 더민주와 통합 이후 어떤 역할을 맡게 되는 지가 관건이다. 탈당 명분이었던 '호남정치 복원', '뉴DJ 발굴' 등을 달성하려면 본인이 직접 선거에 개입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문 대표 등 그가 '기득권'이라고 칭하는 소위 '친노'의 개입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 당 체제를 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역설적으로, 더민주가 그가 말한 것처럼 '해체 수준의 변화'를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당 해체 수준의 변화" 요구의 역설

천 위원장의 통합 조건은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지분'이다. 문 대표도 한 차례 언급한 것처럼 국민회의가 창당준비위 단계까지 나간 상황에서 천 위원장이 더민주로 '복당'하는 형태의 통합은 어렵다. 결국 당 대 당 통합이다. 그러려면 당권과 공천권 등에 일정한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지난 2014년 김한길 전 민주당 대표와 안철수 전 새정치연합 대표의 통합 과정과 같다. 양측은 당시 당 구성과 공천 지분을 5:5로 하는 것에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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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9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신년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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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표가 김종인 선대위원장 추대를 발표하면서 "호남, 광주·전남을 대표하는 공동선대위원장이 필요하다고 본다"라고 언급한 것 역시 당 대 당 통합 이후의 천 위원장의 지위를 고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더민주는 문 대표가 사퇴를 천명한 상황에서 사실상 김종인 선대위 체제로 전환을 앞두고 있다. 게다가 김 위원장은 "단독 선대위원장이라는 조건으로 수락했다"라며 '공동 체제'에 선을 분명히 그었다. 

만약 천 위원장 측에서 선대위원장 내지 그에 준하는 조건으로 공천권을 요구할 경우 김 위원장의 반대로 통합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천 위원장이 이날 라디오 인터뷰에서 김 위원장의 경제민주화 등의 역향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정치제도의 역량 등에 대해서는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 될 것 같다"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천 위원장의 상대는 이제 물러나는 문재인 대표가 아니라 김 위원장인 것이다. 

이런 상황은 문 대표에게도 큰 고민거리다. 그는 곧 사퇴해야 한다. 스스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인재 추가영입과 통합 작업을 마무리하고 물러난다는 구상이다. 그가 "김종인 선대위가 지도부"라고 말한 것은 대표와 최고위원들이 사퇴하면서 당무위를 통해 김 위원장에게 모든 당의 권한을 넘기겠다는 얘기다. 그가 물러나는 것이 통합의 조건이 되지만 반대로 통합의 장애물이 되기도 하는 상황이다.

문 대표에게 최상의 수는 사퇴 전까지 천 위원장과 상징성 있는 통합 선언을 하고 이후 구체적인 통합의 절차는 천 위원장과 김 위원장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는 신년 기자회견에서 "범야권의 통합과 연대로 총선을 치러야 한다는 생각에 김 위원장도 이견이 없다"라고 강조했지만 김 위원장의 온도는 다르다. 그는 일 대 일 구도를 강조하면서도 "나간 사람들과 통합이 쉽게 이뤄질 거라 보지 않는다"라며 통합에는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본래 천 위원장의 선택지는 더민주 또는 국민의당과의 통합 아니면 독자적으로 총선 치르는 것 이상 세 가지였다. 기존 호남 의원들의 입당과 한상진 창당준비위원장의 '이승만 국부 발언'으로 국민의당과는 멀어졌다. 또 스스로 "승자가 1명만이 나오는 소선거구제에서 야권의 힘을 합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독자노선의 비중도 크지 않다. 남은 것은 하나다.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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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둥이’ 전세버스 노조 간부는 왜 분신 사망했을까

 

회사 노조 탄압에 대표이사 면담 후 자결

“이제는 갈 길이 정해진 것 같네요. 제가 노조설립 할 때 목숨 걸고 하겠다고 조합원 여러분께 약속 한 바 있습니다. 이제는 그 약속을 지키려고 합니다”

지난 18일 저녁 전세버스기사 신형식(59)씨가 보낸 문자메시지의 일부다. 신 씨는 전세버스노동조합 지부장이었고 문자는 조합원들에게 전달됐다. 문자를 보낸 후 신 지부장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분신했고 15분 만에 숨을 거뒀다. 회사 대표이사와 면담을 마친지 1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故 신형식 지부장이 지난 18일 조합원들에게 보낸 문자메시지
故 신형식 지부장이 지난 18일 조합원들에게 보낸 문자메시지ⓒ민중의소리

노조관계자에 따르면 신 지부장은 이날 저녁 대표이사와 장시간 면담을 가졌다. 신 지부장은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교섭을 하자고 요구했고 대표이사는 거부했다. 조합원들은 신 지부장을 “평소 온순하고 냉철했던 형님”으로 기억했다. 사리판단이 분명하고 조합원들을 살뜰히 챙기는 신 지부장이 분신이라는 극한의 선택을 하게 된 것은 회사측의 강도 높은 노조 탄압 때문이라고 조합원들은 입을 모았다.

노동조합이 생긴 것은 지난해 2015년 11월이었다. 한때 노조 가입자수는 전체 70여명의 기사들 중 절반을 훌쩍 뛰어넘었지만 회사의 압박이 시작되면서 노조원들이 줄기 시작했다. 회사는 1년에 한 번 계약을 갱신하는 점을 이용해 ‘노조에 가입하면 다음 계약은 없다’는 말로 탈퇴를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조에 가입한 기사들에게 버스를 입고 하고 퇴근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경기도 일산, 마석에 사는 조합원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회사의 방침에 따라 탄천주차장에 차를 두고 집으로 향했다. 사측은 작은 잘못이라도 꼬투리를 잡아 시말서를 요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징계와 해고를 했다는게 조합원들의 증언이다. 특히나 노동조합 간부들이 부당해고의 타겟이 됐다.

신 지부장이 분신을 한 날은 사측은 노조에 대응해 만든 노사협의회 회장 선출을 마무리 했다. ‘담판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한 신 지부장은 대표이사와 면담을 시작했고 이자리에서 대표이사는 ‘앞으로 노조와의 교섭은 없을 것이며 노사협의회와만 대화를 하겠다’는 방침을 전한 것으로 전해졌다. 신 지부장은 면담 직후 분신했다.

조합원들은 신 지부장 분신 다음날인 19일 기자회견을 열고 “책임은 노조 탈퇴 종용, 부당징계, 부당해고를 일삼으며 민주노조를 부정한 대표이사에게 있다”고 비판했다. 지부는 ▲사업주 구속 ▲유족에 대한 사측의 사과 ▲부당징계·부장해고 철회 및 노조 인정 등을 요구했다.

신형식 지부장의 시신은 현재 경찰병원에 안치되어 있으며 노조는 유족들과 함께 장례절차 등을 논의 중이다.

전세버스노동조합이 지난 18일 오후 분신한 모 전세버스 회사 노조 지부장 신모(59)씨의 죽음이 사측의 갑질이 빚어낸 참극이라고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19일 진행했다.
전세버스노동조합이 지난 18일 오후 분신한 모 전세버스 회사 노조 지부장 신모(59)씨의 죽음이 사측의 갑질이 빚어낸 참극이라고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19일 진행했다.ⓒ제공 :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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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을 따라 청년들 앞으로"

[친절한 통일씨]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70년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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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1.19  21: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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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이 강하면 우리 당과 인민군대가 강하고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 청년들을 선군혁명의 척후대, 익측부대로 키우는 자양분은 우리 당의 혁명사상이다. 사회주의 조국의 전도와 관련되는 중대문제인 청년사업에 품을 아끼지 말라."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지난해 5월 열린 제2차 전국청년미풍선구자대회에 보낸 서한 중 일부이다.

김 제1위원장은 청년을 토대로 '청년강국'이라는 구호 아래 당과 국가 강화를 독려하고 있다. 옛 최고지도자인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당과 국가를 건설하고 꾸리는 데 있어 청년을 강조했던 것과 같다.

북한의 대표적인 청년조직인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청년동맹)이 지난 17일 창립 70돌을 맞았다. 북한은 청년동맹 70년의 역사 속에 당과 국가 건설을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청년동맹은 어떠한 길을 걸어왔으며, 김정은 시대 청년동맹은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 1946년 1월 <정로>에 실린 '북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 결성 보도내용과 민청 깃발. [자료출처-내나라]

민청→사로청→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변천사

북한 청년동맹의 출발은 1946년 1월 17일 창립된 북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이다. 물론, 민청의 뿌리는 1926년 김일성 주석이 조직한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 핵심 인물인 차광수, 최창걸, 계영춘, 허률, 한영애 등을 중심으로 1927년 8월 28일 북산공원 약왕묘 지하실에서 결성한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공청)이다. 1991년 제정된 '청년절'이 바로 공청 결성일이다.

해방 후 국가건설에 나선 북한은 항일유격대 집단이 공청을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청년대중조직을 건설하려고 했다. 1945년 10월 6일 공청준비회의, 20일 공청일꾼협의회, 28일~29일 공청열성자대회 등을 잇따라 열며 공청을 조직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당시 첨예했던 이념 충돌이 청년조직 확대에도 영향을 끼쳤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항일유격대 출신들은 소수 공청 소속 청년들로 정권을 창출,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공청을 해소하고 광범위한 청년을 망라해 대중적 유일 청년조직을 만들려고 했다.

이에 반해 국내 공산주의자들은 레닌청년공산주의동맹과 같이 노동계급의 당을 위한 후비대를 만들기를 원했다. 이러한 청년조직 건설을 둘러싼 논쟁은 1946년 1월 초순 민청을 조직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그리고 공장, 기업소, 농촌, 학교에도 조직돼 각계각층의 청년들로 구성했다.

1946년 1월 16~17일 평양에서 북부조선민주주의청년단체대표자회가 열렸고, 여기서 민청이 공식 창설됐다. 1919년 함경남도 출생으로 만주 용정에서 중학교를 나온 김욱진이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창설당시 맹원수는 25만명으로 같은해 5월 80만 명, 9월 130만 명 등으로 늘어났다. 

1964년 270만 명으로 맹원수가 늘어난 민청은 5차 대회를 통해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사로청)'으로 명칭을 바꿨다. 북한 내부를 뒤흔들었던 1956년 8월 발생한 '8월 종파사건'은 민청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종파사건 해소와 함께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단일지도체계와 유일사상이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 1993년 2월 사로청 제8차대회에 참석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자료사진-통일뉴스]

1961년 제4차 당 대회에서 당 규약 개정을 통해 '김일성 단일지도체계'를 확립하기 시작한 북한은 청년들을 통한 김일성 유일사상 강화가 중요한 과제였다. 김정일은 1964년 4월 '현실발전의 요구에 맞게 청년동맹 사업을 개선강화할 데 대하여'라는 담화에서 사로청으로의 명칭 변경 이유를 설명했다.

김정일은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사로청)은 조선노동당의 전투적 후비대이며 우리 당의 영도 밑에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건설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청년들의 대중적 정치조직"이라며 "기본임무는 청년들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으로 튼튼히 무장시키고 당의 노선과 정책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로 적극 조직동원하는데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민청을 사로청으로 고치는 것은 현실발전의 요구이다. 오늘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승리하고 사회주의건설이 힘있게 벌어지고 있으며 청년들의 생활과 풍모에서 커다란 전변이 일어나고 있다"며 변경 이유를 설명했다.

즉, 북한이 당과 국가 건설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민청이 역할을 했다면, 1961년 제4차 당 대회를 계기로, 1964년 5차 민청 대회를 통해 북한 사회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넘어 김일성 유일사상을 강화하기 위한 후비대로 청년조직을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으로 개칭하며 역할 확대.강화를 주문한 것이다.

1980년대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의 후계구도 확립과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은 사로청의 개편에 영향을 줬다. 1996년 1월 16일 사로청 창립 50돌 기념 중앙보고대회에 이어 17일 열린 사로청 대표자회에서 '전체 청년들의 한결같은 염원과 의사'에 따라 조직 명칭을 사로청에서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청년동맹)으로 개칭하는 결정서를 채택했다.

사로청에서 청년동맹으로의 개칭은 구소련 붕괴와 연이는 동구권 해체, 고난의 행군에 접어들던 시기 등 북한 내외부 상황과 맞물려 청년층들을 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강력한 지지세력으로 묶어두기 위한 예방책으로 청년조직의 표상인 김일성의 이름을 부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96년 1월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깃발을 수여하고 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개칭 직후인 1월 20일 청년동맹 일꾼들과 만난 자리에서 "우리의 청년조직을 영원히 수령님(김일성)의 청년조직으로 강화발전시키고 주체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빛나게 계승완성해나가려는 우리 당의 철석같은 의지"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의 고귀한 이름은 수령님의 현명한 영도 밑에 승리의 길을 걸어온 조선청년운동의 자랑찬 노정과 숭고한 사명이 반영되어 있다"면서 "사회주의를 압살하려고 악랄하게 책동하고 있는 제국주의자들과 반동에게는 커다란 타격으로 된다"고 말했다.

현재 청년동맹은 중앙위원회, 도.시.군 청년동맹위원회, 대학, 학교, 공장.농장 초급청년위원회, 초급단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 근로단체부(비서 최룡해)의 지도를 받으며 14세부터 30세까지 청년들로 망라되어 있다.

   
▲청년동맹 휘장[자료사진-통일뉴스]

그러나 당에 입당하거나 여성들이 시집을 가면 청년동맹에서 당, 조선직업총동맹(직맹), 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 등으로 전맹한다. 현재 청년동맹원은 5백만 명이며, 이 밖에도 소년단 3백만 명도 청년동맹의 지도를 받는다. 현재 청년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은 전용남이다.

청년동맹 중앙위원회는 조직부, 선전선동부, 간부부, 사적자료부, 대학생청년부, 학생소년부, 노동청년부, 국제부, 총무부, 재정경리부, 속도전청년돌격대지도국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외화벌이 기관인 은별무역회사, 간부양성소인 금성정치대학 등을 두고 있으며, 금성청년출판사, 청년전위신문사, 청년문화회관, 청년취주악단, 청년기동예술대, 송도원국제야영소, 학생소년궁전, 만경대학생소년궁전 등을 관리하고 있다.

사로청 당시 간부의 호칭이던 위원장, 부위원장은 청년동맹으로 개칭되면서 제1비서와 비서 등으로 변경됐으나 2012년 7월 12일 청년동맹 대표자회의에서 규정을 개정, 위원장, 부위원장 등으로 환원됐다.

역대 청년동맹 위원장은 김욱진 (1946~1948), 현정민(1948), 홍순권(1962~1967), 오기천(1967-1970), 김시학(1970-1972), 리영복(1972-1976), 지재룡(1976-1978), 리영수(1978-1986), 최룡해(1986~1998), 리일환(1998~2001), 김경호(2001~2007), 리용철(2007~2012), 전용남(2012~ 현재) 등이다.

   
▲ 청년동맹 역대 회의 내용. [자료정리-통일뉴스]

청년동맹, 당의 후비대로 사상강화. 경제건설 핵심역할

청년동맹은 1946년 1월 창립 당시, 아니 그보다 앞선 1927년 공청 당시부터 북한의 사상을 사회 전반에 강화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또한 당과 국가 건설의 후비대, 척후대, 익측부대로 활약해왔다.

공청이 조선청년공산주의자들의 선봉대로 각계각층 대중단체들을 조직.지도하는 전위조직의 역할을 하던 것이 해방 후 민청, 사로청, 청년동맹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해방 후 창립된 민청은 김일성의 뜻에 따라 당과 국가건설의 핵심인 전체 주민을 대상으로 한 사상교육을 일임했다. 또한, 당 건설의 근간이 청년이라는 점에 주목한 김일성은 민청을 통한 간부양성에 주력했다.

1946년 4월 민청 1차 확대위원회에서 "청년이 있는 곳에 민청 초급단체가 있고, 매개의 초급단체가 살아서 활동하여야만 민청 전체가 살고 힘있게 투쟁할 수 있는 것"이라는 내용의 결정서가 채택되고, 이어 같은해 11월 당 중앙위 상무위원회 제12차 회의에서 김일성은 민청을 '당의 후비대'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1948년 11월에 열린 민청 3차대회에서 김일성은 '청년들에 대한 사상교양사업은 민청단체들의 기본임무'라는 연설을 통해 당의 사상교양단체로서의 민청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는 1956년 8월 종파사건의 혼란 속에서 민청이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의 분열책동과 죄악을 폭로하고, △인텔리 청년들과의 사업에 깊은 주의를 돌려 당의 방침을 적극 지지하며, △사회주의 건설에 이바지하도록 하는 사상 전위대로의 임무로 이어졌다.

1964년 사로청으로 개칭한 청년조직은 김일성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해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강화, 발전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대표적으로 60년대 청년선봉대운동, 70년대 사상혁명, 기술혁명, 문화혁명을 의미하는 '3대혁명소조운동'에 청년들이 뛰어든다.

   
▲ 허천청년광산을 개발하고 있는 민청원들. [자료사진-통일뉴스]

김일성은 1973년 당 중앙위 비서국 회의에서 "당의 조치에 호응하여 새 것에 민감하고 정열에 불타는 사로청원들을 3대혁명을 수행하는 투쟁에 적극 조직 동원함으로써 청년들이 3대혁명 수행에서 근위대, 선봉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사망 직전 해인 1993년 동구권 해체 등 사회주의권 변화에 청년들이 영향을 받을 것을 우려한 듯, 당과 수령에 대한 충실성과 함께, "청년들의 심장은 언제나 주체사상으로 고동쳐야 하며 청년들의 몸에는 오직 주체사상의 붉은 피만 흘러야 하며, 언제 어디서나 주체사상의 요구대로 사고하고 행동하여야 한다"면서 사상강화를 주문했다.

1996년 청년동맹으로 이름을 바꾼 청년조직은 '김일성'이라는 명칭을 달았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대중조직을 넘어 조직력과 단결력, 투쟁력이 강한 전투조직으로의 역할을 요구받았다. 2002년 열린 청년동맹 대표자회에서 개정된 규약에는 당의 정치적 후비대로 "당의 선군혁명영도를 충성으로 받들고 혁명의 영도자를 앞장에서 결사옹위하는 청년전위조직"으로 명시됐다.

1920년대 공청에서 시작해 해방 후 민청, 사로청을 거친 청년동맹은 70년 역사 동안 당의 후비대, 척후대, 익측부대라는 명칭에 맞게 북한 사상의 선본대로서의 역할은 물론, 경제전선에 뛰어들어 국가건설에도 일임했다.

해방 후 민청원들은 사회개혁에 나서면서 초급단체를 중심으로 '승리의 깃발운동'을 전개해 청년노동자의 경제계확달성 경쟁유도운동을 펼쳤다. 농촌으로 뛰어든 청년들은 토지개혁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청년생산돌격대, 청년건설대 등을 조직한 민청원들은 공장 복구와 생산활동을 전개했으며, 원산기관구 내 민청원들은 철도운수 정상화에 이바지했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민청돌격대운동'으로 민청원들이 탄광, 광산, 건재공업, 임업 등 가장 고되고 힘든 노동현장으로 투입됐다. 민청에서 사로청으로, 그리고 현재의 청년동맹으로 이름을 바꾼 청년동맹은 자신들의 선배들이 국가 건설을 위한 경제전선에 뛰어들었듯이 '속도전청년돌격대'의 이름으로 현장으로 갔다.

대표적인 청년조직의 건설사업은 평양-남포 청년영웅도로, 해주-하성 광궤도철도, 라선청년1.2호 발전소, 백두산영웅청년발전소 등이 있다. 이 중 1998년부터 2000년까지 2년만에 완공된 청년영웅도로는 평양-남포간 46km 왕복 12차선 고속도로로 '강성대국 대통로'라고 불린다.

전후복구시기였던 '해주-하성 광궤도철도' 건설사업은 80km가 넘는 해주-하성 간 광궤도 철도를 놓는 공사로, 88만m³의 흙처리, 5천6백㎡의 옹벽, 38개 다리, 9개 역사, 9개 선로반, 2백 세대 살림집을 민청원들이 75일 만에 끝냈다고 한다.

   
▲ 김정은 시대를 대표하는 청년동맹의 작품인 '백두산영웅청년발전소'. [자료사진-통일뉴스]

김정은 시대의 청년동맹.. "청년중시, 청년강국"

김정일 사후 2012년 북한 최고지도자로 자리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청년의 역할에 주목하며 청년강국을 강조하고 있다.

2014년 9월 열린 제4차 초급일꾼대회에 보낸 서한에서 그는 '청년들은 당의 선군혁명위업에 끝없이 충실한 전위투사가 되자'라는 구호를 제시하며, "청년들은 사회주의강성국가 건설에서 선봉대, 돌격대가 되어야 한다. 사회주의문명국의 전성기를 열어나가는데서 앞장에 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청년들을 선군혁명의 척후대, 익측부대로 키우는 자양분은 우리 당의 혁명사상"(2015년 5월 제2차 전국청년미풍선구자대회), "청년중시는 우리 당과 혁명의 영원한 전략적 노선"(2015년 청년절 축하문), "청년들을 시대의 주인공으로, 총진군대오의 전열에 내세워 강성국가의 문패를 남먼저 달게 하려는 것은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이며 의지"(2015년 10월 백두산영웅청년발전소 준공식 연설) 등으로 청년중시를 설파했다.

이는 당이 청년을 아끼고 있듯이 사회주의 청년강국 건설을 위한 청년의 역할도 요구되고 있다. 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014년 5월 '젊어지는 시대'라는 제목의 정론에서 "말보다 일을 많이 하는 젊음, 해놓은 일과 경험보다 해야 할 일의 계획과 착상을 더 많이 논하는 젊음이 얼마나 좋은가. 전 사회에 혁신과, 창조, 애국으로 젊음이 넘치게 하자"고 촉구했다.

김정은 제1위원장도 올해 신년사에서 "오늘의 총진군에서 청년들의 역할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청년들은 청년강국의 주인으로 내세워준 당의 믿음을 깊이 간직하고 조국을 떠받드는 억센 기둥으로 더욱 튼튼히 준비하며 강성국가 건설의 전투장마다에서 기적의 창조자, 청년영웅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 청년동맹이 지난해 10월 당 창건 70돌 촛불행진을 열었다. '500만'은 청년동맹원 숫자를 의미하며, '당을 따라 앞으로'라는 구호를 형상화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이에 보답하듯 청년동맹은 '김일성.김정일 청년조직', '김정은의 청년부대, 근위부대'로 지난해 당 창건 70돌에 이어 오는 5월 당 7차대회를 향한 애국보답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해 완공된 백두산영웅청년발전소에 이어 백두산영웅청년3호발전소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김정은 시대의 청년동맹은 오는 5월 당 7차대회에 이어 열릴 9차 대회에서 본격적인 '김정은 청년부대'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청년동맹은 '청년전위모범초급단체쟁취운동'을 벌리며 철저한 집행을 강조하고 있다. 

'강성국가'의 문패를 먼저 달게 하겠다는 김 제1위원장의 청년중시 의지는 청년동맹의 역할 강화와 확대를 불러오고 있다. 이는 젊은 지도자의 '젊어지는 시대' 청년강국 건설에서 청년의 힘이 절실하다는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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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수소폭탄과 휴지조각이 된 미국의 핵태세검토서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6/01/20 10:40
  • 수정일
    2016/01/20 10:4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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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설교 화백
기사입력: 2016/01/20 [02:01]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미국 방송과 대단하고 있는 패트릭 뷰개넌 기자     ©자주시보

                               

 

북은 새해벽두에 수소폭탄의 폭음을 울리며 미국을 향하여  북미평화협상을 압박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미국 레이건 정부에서 수석고문을 지낸 뷰케넌 미국의 정통 보수논객이 한미동맹에 의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죽은 정책으로 비유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여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패틀릭 뷰케넌은 미국은 북과 핵전쟁으로부터 발을 빼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 핵강대국들이 핵비확산체제로 세계의 핵물질을 규제하여 통제하고 있다. 여기에 미국은 한 술 더 떠 미국만이 따로 핵태세검토서 발표했다. 해태세검토서란 미국에게 어떠한 위협세력이 등장하더라도 이를 격퇴할 수 있는 전천후 대응능력을 가추고 북과 같은 적대세력이 등장하면 일단 억제를 시도하고 억제가 성공하지 못하면 전쟁으로 패배시켜야한다는 계획서다. 이 계획서에 의하여 리비아와 이라크가 희생당했다.

 

핵태세검토서는 핵무기. 화학무기. 생물학무기.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기를 개발하고 확산시킬 수 있는 나라들을 향후 미국에 대한 위협국으로 설정하였다. 북한은 이 모든 분야에서 미국의 적성국으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의 핵시험 뿐만 아니라 위성발사에서도 제재다운 제재를 할 수 없었고 제재의 효과가 미미한 경제적 제재만 가했을 뿐이며 미국의 제재는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았기에 미국은 중국이 제재에 동참하기를 늘 애원하였다.

 

미국은 파키스탄. 이스라엘의 핵개발 의혹에 대해서 대체로 관대했고 파키스탄과 이스라엘은 미국의 원조를 받아 핵을 개발했다. 1974년 5월18일 인도는 첫 핵시험에 성공하였고 인도의 핵개발에 미국이 제재를 가하려고 했지만 인도는 핵무기개발을 하지 않을 것을 미국에게 약속하며 지내다 1998년 핵시험에 다시 성공하고 핵무기 보유를 선언했다. 이에 미국은 제재를 가하려고 했지만 인도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의 무역거래가 크지 않으며 중거리 미사일에도 성공한 강대국으로 부상하여 미국의 압력이 작용하지 못했고 미국 스스로 꼬리를 내리고 자중하고 만 것이다.

 

수소폭탄과 ICBM. SLBM으로 무장한 북에게 미국은 사실 군사적 제재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대북 경제제재는 종이호랑이의 포효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난을 자국의 군사전문가들에도 듣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에는 수구뿐만 아니라  진보적인 사람들도 북한의 수소폭탄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잠수함미사일 성공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으며 미국이 취하는 핵태세검토서에 의한 북의 제재에 동참하여 국제사회에 강력한 응징이 불가피하다고 하지만 미국과 국제사회와 유엔이 취할 수 있는 조치가 과연 무엇인지 의문이다.

 

1991년부터 시작된 팍스 아메리카가 더 얼마나 지속될지는 미국의 태도에 달려 있다. 17세기 후반 프랑스 패권시대에서 19세기 영국의 팍스 브리타니카 시대도 50년 미만으로 끝난 것은 한나라가 패권국에 오르면 강력한 도전을 받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미국의 어느 정치학자는 팍스 아메리카의 등장은 필연적으로 다른 나라의 도전과 견제를 받는다. 그 강력한 세력이 바로 러시아. 중국. 북한이다. 미국은 지금 북미전쟁이냐 아니면 평화협정이냐 기로에 서있다.

 

미국이 북과 화합적 태도를 취하면서 지구평화에 솔선수범한다면 미국의 팍스 아메리카의 수명은 그만큼 늘어나지만 미국이 오만한 태도로 힘만 앞세우고 일방주의 태도로 나온다면 팍스 아메리카는 단 한순간에 무너지고 미국의 영광은 잿더미에서 찾게 될 것이다.

 

미국은 자국 보수논객으로 닉슨. 포드. 레이건 정부에서 수석고문을 지낸 뷰캐넌의 주장과 미국이 북 EMP탄 단 한 발에  소멸될 수 있다는 2013년 5월 23일자 월스트리트저널의 울시 전 CIA국장의 발언을 헛 튼 소리로 듣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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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 촉구 ‘가두서명’ 나선 박근혜, <조선> 등 보수언론도 질타

 
한겨레 “독재자들의 전형적인 수법”, 경향 “총선 임박 선거중립 위반 소지”
김미란 기자  |  balnews21@gmail.com
 

 

 

   
▲ 박근혜 대통령이 18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판교역 광장에서 열린 민생구하기 입법 촉구 천만 서명운동 행사장을 찾아 서명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행정부 수반인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 관련 입법’ 촉구를 위해 경제단체들이 벌이는 1천만 서명운동에 직접 참여하자, 한겨레와 경향신문 등 진보언론 뿐만 아니라 보수언론들까지 나서 박 대통령의 행보를 비판하고 나섰다.

<조선일보>는 19일자 立法 촉구 서명 운동 위해 길거리로 나간 대통령”이란 제목의 사설에서 “대통령이 마치 입법과 아무 관련이 없는 관전자나 평가만 하는 심판처럼 행동하는 것도 모자라 길거리 서명 운동에 나선 것은 적절한 대응이라고 하기 힘들다”면서 “자칫 대중(大衆)을 선동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사설은 이어 “더구나 지금 입법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도 바로 대통령이 새누리당을 이끌 때 주도적으로 만들었던 ‘국회 선진화법’이 아닌가”라면서 “대통령이 국회를 압박하기 위해 길거리로 나간 것은 다른 민주국가에서도 전례가 드문 일”이라고 꼬집었다.

<동아일보>는 “대통령이 입법 촉구 가두서명에 나선 초유의 사태”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야당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국가원수인 대통령마저 장외(場外)로 나서는 현실은 안타깝고 불편하다”고 지적했다.

<동아>는 “선진화법은 2012년 박 대통령이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있을 때 주도해 통과시킨 법”임을 상기시키면서 “박 대통령은 야당 탓만 하기 전에 ‘원죄’를 인정하고 아프게 반성했는가”라고 질타했다.

   
▲ 박근혜 대통령이 18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판교역 광장에서 열린 민생구하기 입법 촉구 천만 서명운동 행사장을 찾아 서명 후 박용후 성남상공회의소 회장과 대화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한겨레>는 “박 대통령은 서명운동을 벌이기 이전에 과연 얼마나 야당과 대화했는지부터 자성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한겨레>는 “대통령이 ‘입법 서명운동’에 참가하다니”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박 대통령이 야당과 단독으로 만난 건 취임 직후 단 한 차례뿐”이라면서 “여야 지도부를 함께 만난 것도 5차례 정도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사설은 또 “과거에도 대통령과 국회가 갈등을 빚은 적은 있으나, 대통령이 ‘국민 서명운동’에 직접 참여해 이렇게 포퓰리즘식으로 문제를 풀어가려고 한 적은 없었다”면서 “1975년 유신에 대한 야당과 재야의 저항이 거세지자,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투표를 동원해 체제 정당성을 억지 인정받은 장면이 떠오른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지금 박 대통령은 포퓰리즘에 기대 법치와 민주주의를 농락하고 무력화하려 하고 있다”며 “그것은 독재자들이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라고 비난했다.

그런가하면 <경향신문>은 박 대통령의 입법 촉구 서명 참여가 선거 중립 위반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경향>은 “국정 시스템 무시하고 직접 국민 상대하는 박 대통령”이란 사설에서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이 민간이 주도하는 입법 촉구 서명운동에 참여한 것은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면서 “이는 국민의 대의기관이자 입법기관인 국회를 외면한 채 국민을 상대로 직접 정치하겠다는 선언”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경향>은 “헌법과 법률이 규정한 국정 시스템을 부정하는,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거듭 지적하며 “4.13 총선이 임박한 만큼 선거중립 위반 소지도 있다”고 꼬집었다. 

한편, 논란이 일자 청와대는 박 대통령의 가두서명 참여에 대해“국민이 직접 나선 서명운동에 동참해 국민과 같이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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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미국, 캐나다 동포들의 세월호를 잊지않기 위한 노력

영국, 미국, 캐나다 동포들의 세월호를 잊지않기 위한 노력

 


– 영하 17도에도 열린 세월호 정기집회
– 캐나다 토론토, 30일 <나쁜 나라> 무료상영

편집부

2016년 첫 달 셋째 주말인 지난 16일과 17일에 해외동포들의 세월호 집회가 영국과 미국, 캐나다의 대도시에서 있었다.

영국 런던에서는 21차 ‘가만히 있으라’ 침묵시위가 트라팔가 광장에서 열렸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매월 세 번째 토요일 정기적으로 열리는 침묵시위가 21차에 이르렀고, 2월 20일에 22차 시위가 예정되어 있다. 영국에 거주하는 이들 동포들은 한국 정부에 철저한 진상 규명을 위해 세월호의 보존 인양, 실종자 완전 수습, 책임자 처벌 그리고 재난방지 특별법을 요구했다.

미국 시카고에서는 세월호를 잊지않는 시카고 사람들의 모임(시카고 세사모)이 영하 17도의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정기피케팅을 계획대로 진행했다. 눈보라가 휘날렸던 뉴욕 맨해튼에서도 뉴욕뉴저지 세사모의 세월호 정기집회가 있었다. 뉴욕뉴저지 세사모는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플래시몹 영상과 유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담은 영상메시지(https://youtu.be/9ODpOZlmwRw )를 페이스북에 공유하기도 했다.

또 캐나다의 밴쿠버에서는 세월호를 기억하는 밴쿠버 사람들(세기밴)의 정기집회도 있었다. 노란 몸자보를 입은 캐나다 동포들은 노란 리본 등 한국에서 공수해온 액세서리들을 나누고, 세월호의 온전한 인양과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운동도 진행했다.

오는 30일, 캐나다 토론토에서는 세월호 다큐멘터리 <나쁜 나라> 상영회가 열린다. 미국 엘에이와 댈러스에 이어 해외에서 세 번째로 상영되는 것이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토론토 사람들(세기토)가 노스욕 시청 대회의실을 빌려 무료 공동체 상영을 한다. 미국과 일본, 유럽의 해외동포들도 2주기 전에 공동체 상영을 준비 중이다.

<다이빙 벨>이 세월호 침몰 직후의 구조 작업이 얼마나 허술했는지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면, <나쁜 나라>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얼마나 힘들게 진상규명 활동을 해오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내 아이가 왜 죽었는지를 밝혀달라며 시작된 싸움. 국회에서 광화문에서 청와대 앞에서 동거차도에서 희생자 유가족들은 아직도 싸우고 있다.

한편 세기토는 세월호사건 642일째 17일,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와 안전사회 건설을 촉구하는 해외동포 단식 릴레이(518일째)를 이어오고 있다.

토론토에 사는 김경천 씨는 “여럿이 함께라면 험한 길도 즐겁다”는 신영복 교수의 글씨와 함께 페이스북에 단식 후기 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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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휘호처럼 우리 ‘세월호를 기억하는 토론토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하루 한 끼 세월호를 기억하며 단식을 이어온 나날이 벌써 518일째입니다. 이 길이 험한 길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습니다. 또한 즐거운 길도 아니었습니다. 자식 잃고 길바닥에 던져진 채, 목숨 건 단식에, 삭발에, 삼보일배에, 오체투지에, 수십 번을 걸어서 팽목항까지, 이제는 동거차도에서 천막치고 인양작업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도, 비바람치고 눈보라는 혹한에도 그분들은 길 위에 계셨습니다. 그분들이야말로 험한 길을 걷고 계시고, 서로를 보듬으며 소소하게 즐거움을 느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들이야 말 그대로 그분들과 함께 서 있겠다는 마음뿐이며 저희들의 이 마음이 그분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보람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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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길도 아니고, 즐거운 일도 아니었지만 우리 동무들은 518일 동안 ‘함께’ 어깨 걸고 왔습니다. 각자의 순전한 마음을 모아 서로가 격려하고 밀고 당기며 왔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함께’ 갈 것입니다. 1,000일이 되더라고 문제없습니다. 우리는 ‘함께’할 것이니까요. 2016년 1월 17일 단식릴레이를 이어갑니다.” (토론토, 김경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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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런던에서 열린 21차 ‘가만히 있으라’ 침묵시위

(사진 제공: Remembering Sewol Disaster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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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눈보라 속에서 열린 뉴욕 세월호집회 (사진 제공: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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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세월호를 기억하는 밴쿠버 사람들)

 

[번역 저작권자: 뉴스프로, 번역 기사 전문 혹은 일부를 인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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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교수의 마지막 수업 "사회변화? 쉽지 않다고 봅니다"

 

[영상] 06년 6월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의 고별 강의 '신영복 함께 읽기'

16.01.19 08:34l최종 업데이트 16.01.19 09:14l
글·영상: 강신우(fabiuse)

 

 

지난 2006년 정년을 맞은 고 신영복 당시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는 매주 목요일 3시간씩 수업하던 <신영복 함께 읽기> 강의 중 마지막 1시간을 떼어 일반인에 공개했다. 그 마지막 고별 강의 현장을 오마이TV가 생중계하기도 했다.

이 강의에는 김성수 당시 성공회대 총장과 교수들, 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 학생과 시민, 기자들까지 몰렸다. 평소보다 열띤 분위기였던 강의 직후에는 즉석 사인회가 열리기도 했다. 통일혁명당 간첩단 사건으로 20년 20일을 꼬박 복역한 고 신영복 교수. 출소 후 89년부터 성공회대에서 첫 강의를 시작한 이래 정년이 되기까지 그는 쉬지 않고 마음껏 담론과 사상을 펼쳐왔다. 

"사람은 일생동안 참 멀리도 여행들을 떠나는데, 가장 먼 여행은 어디인가?"

고 신영복 선생의 10년 전 마지막 강의 영상과 10년 뒤인 18일 영결식 영상을 함께 엮어 재구성해보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다시보는 신영복 선생 고별 강의 "인생에서 가장 먼 여행은 어디?" 오마이TV가 생중계한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의 지난 2006년 마지막 강의에서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사람은 일생동안 참 멀리도 여행들을 떠나는데, 가장 먼 여행은 어디인가?"
ⓒ 강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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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정책연구원 "조선과 무조건 대화해야"

 
 
군축비확산센터 "외교적으로 가능할 때 북 비핵화해야"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6/01/19 [07:37]  최종편집: ⓒ 자주시보
 
 

 

▲     © 이정섭 기자


 
미국 정책연구원의 관계자들이 대조선 제재는 ‘보잘 것 없는 결과’만 냈을 뿐이라며 미국은 조선과 무조건 대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국의소리방송은 19일 네 번째 핵 시험을 감행한 북한(조선)을 비핵화의 길로 이끌기 위해 중국이 적극적인 대북 제재에 동참하면서 미국이 전제조건 없이 대화에 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고 보도했다.

 

필립 코일 수석연구원을 비롯한 미국 정책연구기관 군축비확산센터의 연구원들은 18일(현지시간) 언론 기고문에서 지금까지 조선에 대해 이뤄졌던 국제사회의 비난과 제재가 "보잘것없는" 결과만을 냈을 뿐이라며 이같이 주장했다.

 

군축 비확산센터 연구원들은 조선한 비핵화 회담이 성과를 내기 위한" 이들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하며 "안정되고 비핵화 된 조선이 중국의 이해에 맞기 때문에" 중국은 더는 조선을 감싸고돌아서는 안 된다며 중국의 역할을 강조했다.

 

연구원들은 구체적으로 중국이 "유엔에서 동맹(조선)을 보호하겠다며 거부권을 행사하면 북 비핵화를 위한 회담이 제자리를 맴돌 것"이라며 "중국이 추가 제재를 통해 북 지도부에 압력을 가하면 북은 협상 테이블로 돌아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이는 조선수소탄 핵 시험 이후 중국이 여러 차례에 걸쳐 제재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려하면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함께 "미국이 현재 조선에 대화 재개의 전제 조건으로 대화의 궁극적인 목표가 (조선의) 비핵화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런 조건을 없애야 한다."고 연구원들은 강조하며 조건 없는 대화를 주문했다.

 

연구원들은 "시간은 우리의 편이 아니고, 외교적으로 조선의 핵무장을 해제할 수 있는 동안에" 북 비핵화를 위한 대화에 나서야 한다며, 이란이 핵협상을 통해 핵개발 능력을 크게 줄인 것과 같은 방식을 조선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이며 정치 외교적 노력으로 핵문제를 해결할 것을 거듭 촉구했다.

 

한편 미국 동부 펜실베니아 주립대학의 존스홉킨스 교수는 국제관계대학원 산하 한미 연구소를 통해 밝힌 논문에서 “조선의 핵 프로그램이 어느 때보다 굳건해진 상황에선 기존의 제재 방식이 해결책이 아님을 인식하고 군사적, 외교적, 정치적인 모든 상황을 고려한 전략 가운데 효과적인 방법을 내와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 기존의 재재가 능사가 아님을 밝혔다.

 

부시 정권 후반 한반도 비핵화 6자회담에 관여했던 힐 차관보도 기존의 대북 제재 방식 보다는 한.미.중의 긴밀한 대화와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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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정부 최저 성장률, 최고 재정 적자 박근혜 정부’

 
김무성이 말한 ‘좌절과 분노’ 유발자는?
 
‘역대 정부 최저 성장률, 최고 재정 적자 박근혜 정부’
 
임병도 | 2016-01-19 09:15:3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신년기자회견 모습 ⓒ새누리당 홈페이지 갈무리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신년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김무성 대표는 ‘새해는 늘 덕담으로 시작하는 게 관례지만, 국내외 여건을 감안할 때 그렇게 말할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다.’라며 ‘많은 국민들이 지금 이 시대를 ‘위험과 불안의 시대’로 인식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덕담도 하지 못할 정도의 ‘위험과 불안의 시대’ 만든 주범은 누구일까요? 김무성 대표는 후진적인 정치, 역대 최악의 식물국회라는 평가를 받는 19대 국회가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김무성 대표의 말이 사실일까요? 도대체 위험과 불안의 시대를 만든 주범이 누구인지 경제 수치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역대 정부 최저 성장률, 최고 재정 적자 박근혜 정부’

김무성 대표는 신년 기자회견문에서 ‘경제’라는 말을 15번이나 했습니다. 경제가 중요하지만, 현 상황이 매우 불안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불안한 경제 상황을 만든 당사자는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는 대통령과 집권 여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도 엄청난 공격과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역대 정부의 성장률과 박근혜 정부를 비교해보겠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실질 GDP 성장률은 3.1%로 역대 정부 최저 수준입니다. 김대중 정부 5.3%와 비교하면 거의 반 토막 수준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를 보면 3년 연속으로 세수결손에 적자 추경 편성, 재정 적자 및 국가채무 급증 등 나라 재정이 거의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 4.5%까지 올랐던 성장률이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3.2%, 박근혜 정부는 3.1%까지 떨어졌습니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모두 새누리당이 집권 여당이었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주야장천 (밤낮으로 쉬지 아니하고 연달아)’창조 경제’를 외쳤던 박근혜 대통령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반문하고 싶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국가 채무는 12년말 443.1조 원에서 15년(추경) 579.5조 원으로 136.4조 원 증가했습니다. 집권3년차 국가채무 증가폭을 비교하면 역대 정부 최고 수준입니다. 앞으로 박근혜 정부의 재정 적자는 5년간 167조로 예상됩니다.

성장률은 최저, 재정 적자는 최고인 상황을 만든 사람이 야당입니까? 7년간의 집권 세력은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대표가 아니라 새누리당과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경제 수치로 본 노무현 정부 vs 박근혜 정부’

김무성 대표는 ‘경제가 위축되면서 일자리가 줄고 가계의 소득 창출이 어렵다 보니, 삶이 팍팍해지고 ‘좌절과 분노의 어두운 분위기’가 온 사회에 퍼져 있다’ 말했습니다. 일자리와 가계 소득 등의 경제 수치를 노무현 정부와 비교해보겠습니다.

노무현 정부 집권 말기 가구당 월평균 실질소득 증가율은 2.7%였습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 2013년 0.8%까지 떨어졌다가 2014년 2.1%에 도달했습니다. 소득은 낮아졌지만, 가계 부채는 2007년 665.4조에 비해 1,100조 원까지 늘었습니다.

2007년 7.2%였던 청년실업률은 2015년 6월 10.3%까지 치솟았습니다.이런 상황에서 비정규직과 쉬운 해고를 할 수 있는 노동개혁만 줄기차게 외치고 있는 사람이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노동개혁을 하지 못해 경제와 일자리가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참여정부 시절 859.7조 원이었던 대기업의 매출 총액은 2014년 1,539조 원으로 늘었습니다. 대기업과 재벌의 자산총액은 2,258.4조 원으로 2007년(1,161.5조 원) 이후 2배 가까이 증가했습니다.

한국 자동차회사가 전기차에 투자하는 게 아니라 부동산, 땅에 10여억 원이나 투자하고 있잖아요 그러고 나서 아파트 짓고 면세점 특혜나 받으려 하고 세금 감면해달라고 하고 특혜업체는 매일 법통과 시켜달라고 여당압박해서 지금 그 법들 갖고 얘기하는 것 아닙니까? 원샷법 재벌법 아닙니까? 외촉법 재벌법 아닙니까? 그래서 14,000개 일자리 만든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100개도 안 만들어진 거 아닙니까? 관광진흥법 이거 재벌법이구요 서비스산업발전법 이거 다 재벌법 아닙니까? 한국재벌이 이러니깐 한국의 성장동력이 망가지는겁니다. 양극화 때문에 온 국민이 다 알고 있는 것을 지금 부총리는 그것을 부정하고 있는거에요. 저는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자, 표를 봐주세요. 지금 박근혜 정부 사상 최대 재정 적자 납니다. 5년간 167조 재정 적자 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167조 어디로 갔습니까? 167조 재정 적자 내면서 누리과정 돈이 없다고 그것을 지방정부에게 맡기는 게 박근혜 정부의 정책 아닙니까? 167조 어디 갔습니까? 도대체!(더불어민주당 홍종학 의원)

대한민국을 위험과 불안의 시대로 만들고 이 사회를 좌절과 분노의 어두운 분위기를 만든 사람들은 박-대한민국을 위험과 불안의 시대로 만들고 이 사회를 좌절과 분노의 어두운 분위기를 만든 사람들은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이고, 집권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 것은 ‘너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참여정부 시절에 이 정도 경제 지표와 재정 적자, 실업률이었으면 어땠을까요? 그러나 지금 국민들은 위험과 불안의 시대에 그저 팍팍한 삶을 살아가면서 좌절 속에서 어둠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분노와 좌절 유발자에게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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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시작된 수소탄개발비사

2005년에 시작된 수소탄개발비사
 
한호석의 개벽예감 <188>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6/01/18 [10:35]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조선의 수소탄개발은 2005년에 시작되었다
2. 조선이 진행한 여섯 차례의 수소탄개발시험
3. 20톤급 극소형 핵탄을 왜 만들었을까? 
4. 다시 읽어보아야 할 조국통일유훈과 2016년도 신년사

 

▲ <사진 1> 조선은 2005년 2월 10일 외무성 성명에서 핵탄보유선언을 하면서 핵무력증강결심도 표명하였다. 당시 미국과 한국에서는 조선의 핵탄보유선언과 핵무력증강결심표명을 대미협상력을 높이려는 벼랑끝전술이니 뭐니 하면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은 2005년부터 핵탄을 증산하는 것과 함께 수소탄을 개발하기 위한 극비사업에 착수하였고,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2016년 1월 6일 조선의 핵과학자들이 자력으로 만든 시험용 수소탄이 거대한 폭음을 울리며 기폭하였다. 조선의 수소탄시험에 대해 알려면, 조선의 수소탄개발사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의 사진은 조선의 녕변핵시설에서 근무하는 핵기술자들이 방호복을 입고 5메가와트급 흑연감속로를 운전하는 장면이다. 촬영시점은 알 수 없다. '확인 또 확인'이라고 쓴 글씨가 보인다.     © 자주시보

 

1. 조선의 수소탄개발은 2005년에 시작되었다

 

미국이 조선에 대한 적대공세를 전례 없이 강화하면서 정세를 파탄으로 몰아넣고 있었던 2005년 초, 조선은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미국의 적대공세에 상응하는 보복공세를 취하였다. 당시 조선이 취한 대미보복공세들 가운데 하나가 핵탄보유를 선언한 것이었다. 2005년 2월 10일 조선은 외무성 성명을 통해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다”고 하면서 “핵무기고를 늘이기 위한 대책을 취할 것”이라고 밝혔던 것이다. <사진 1>


조선이 그처럼 명백한 어조로 핵탄보유를 선언하고 핵무력을 더욱 증강하겠다는 결심까지 표명하였는데도, 조선에 대해 오해와 편견부터 앞세우는 미국과 한국은 조선의 핵탄보유선언에 대해 “대미협상력을 높이려는 벼랑끝전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으면서 핵탄보유사실 자체를 부정하였다. 조선의 핵탄보유사실을 부정하였으니, 핵무력을 더욱 증강하겠다는 조선의 결심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 성명이 나왔을 때, 미국과 한국의 관심은 조선의 핵탄보유가 아니라 조선의 핵물질생산에만 집중되었었다. 그 때로부터 어언 13년이 지났다.


돌이켜보면, 지난 13년 동안 미국과 한국이 조선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앞세운 전략적 오판에 빠져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조선은 13년 전 외무성 성명에서 언명한 대로 자기의 핵무력을 비약적으로 증강시켰고 마침내 수소탄까지 보유하게 되었다. 13년 전 조선이 외무성 성명에서 언명한 “핵무기고를 늘이기 위한 대책”은 핵탄증산대책이라는 뜻만이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핵무력증강대책이라는 뜻을 내포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대책을 취할 것”이라는 그 말에는 핵탄증산결심 이외에 수소탄개발결심도 들어있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을 살펴보면, 조선은 핵무력을 증강하겠다는 결심을 표명한 2005년 초에 수소탄개발에 착수하였던 것이 확실해 보인다. 조선이 핵무력증강대책을 취하겠다고 공식 선언하였던 13년 전, 조선이 설정한 최종목표는 핵탄증산을 넘어 수소탄개발에 가닿아 있었다. 

 

▲ <사진 2> 조선은 2005부터 10여 년 동안 수소탄개발사업을 비밀리에 진척시켜왔는데, 위의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최첨단 첩보위성을 동원하여 조선의 움직임을 24시간 감시한다는 미국은 조선의 수소탄개발사업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오해와 편견을 앞세운 전략적 오판이 미국의 시야를 캄캄하게 가려놓았기 때문에 알지 못한 것이다. 조선의 수소탄개발사업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오판은 미국이 조선과의 정치군사적 대결에서 사실상 패하였음 말해준다.     © 자주시보


그런데 최첨단첩보장비를 동원하여 조선의 움직임을 24시간 감시한다는 미국은 조선이 2005년부터 추진해온 수소탄개발사업에 대해 알지 못했다. 오해와 편견을 앞세운 전략적 오판이 미국의 시야를 캄캄하게 가려놓았기 때문에 알지 못한 것이다. 조선의 수소탄개발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오판은 미국이 조선과의 정치군사적 대결에서 사실상 패하였음을 말해준다. <사진 2>


그런데 미국이 조선의 수소탄개발에 대한 정보파악에서 그처럼 완전히 실패한 것보다 더 한심하게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조선이 2016년 1월 6일 수소탄시험을 단행하였는데도 미국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뒤를 따라가는 한국의 모습도 미국의 그런 모습과 마찬가지다. 지난 13년 동안 반복해온 것처럼, 이번에도 미국과 한국은 조선의 수소탄시험 자체를 부정하는 이상한 난기류에 휩쓸리고 말았다. 하지만 조선의 수소탄시험을 부정하는 난기류의 흐름을 뜯어보면, 합리적 판단은 실종되고 오해와 편견만 흐르고 있음이 드러난다. 미국과 한국은 조선의 수소탄시험을 부정하는 까닭을 거론하면서, 조선의 수소탄시험에서 발생한 인공지진의 진동에너지가 자기들이 생각한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한, 매우 약한 진동에너지로 나타났기 때문에 조선이 수소탄시험을 단행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제1차 수소탄시험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제4차 핵시험이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수소탄(열핵융합탄)이 핵탄(핵분열탄)에 비해 100배, 1,000배 더 강력한 폭발에너지를 발생시킨다는 지극히 단순한 기초상식만 가지고 조선의 수소탄시험을 바라보면 오해밖에 생길 게 없다. 오늘날 복잡하게 전개되는 정세에서는 단순한 기초상식으로 해명하기 힘든 불가사의한 현상들이 때로 나타나곤 하는데, 조선의 수소탄시험이야말로 단순한 기초상식으로는 해명하기 힘든 불가사의한 현상이다. 그러므로 수소탄에 관한 기초상식을 들먹이며 조선의 수소탄시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횡설수설할 게 아니다.


수소탄은 군사과학기술의 최상위 종합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어떤 나라가 그것을 만들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몇 해 만에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간단한 물건이 아니다. 따라서 조선이 수소탄시험을 단행하기까지 조선의 핵과학자들이 고심어린 탐구와 실험을 진척시켜온 기나긴 개발과정이 있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비록 언론에 공개된 관련정보는 매우 제한적이지만, 그 개발과정을 더듬어 가면, 불가사의하게 보이는 조선의 수소탄시험의 실상에 가깝게 다가설 수 있다. 


2012년 3월 7일 미국의 군축문제전문지 ‘과학과 세계안보(Science and Global Security)’에 스웨덴의 기상학자 라-에릭 데예르(Lars-Erik De Geer)가 집필한 흥미로운 논문이 실렸다. 그 논문에 따르면, 한국, 일본, 러시아의 방사성핵종측정소들이 측정한 자료들을 정밀분석하였더니 함경북도 길주군에 있는 핵시험장에서 2010년 4월 중순과 5월 11일에 고농축우라늄을 사용한, 매우 약한 폭발에너지를 발생시킨 핵시험이 두 차례 진행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런 뜻밖의 연구결과가 발표되어 국제핵과학계의 관심과 논쟁을 불러일으키자, 2013년에는 크리스토퍼 롸잇(Christopher M. Wright)이나 저하드 워타와(Gerhard Wotawa) 같은 과학자들이 데예르의 연구결과를 뒷받침하는 논문들을 ‘과학과 세계안보’ 또는 ‘방사분석 및 핵화학(Radioanalytical and Nuclear Chemistry)’ 같은 학술전문지들에 잇달아 발표하였다.

 

▲ <사진 3> 이 사진은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만탑산에 있는 지하핵시험장을 촬영한 상업위성영상자료다. 촬영시점은 알 수 없다. 조선이 2010년 4월부터 2013년 6월까지 바로 이 지하핵시험장에서 수소탄개발시험을 여러 차례 진행하였다는 사실은 스웨덴, 미국, 중국의 과학자들이 국제학술지에 발표한 논문들에 입증되었다.     © 자주시보

 

그런데 다른 학자들은 2010년 4월과 5월 중에 조선에서 인공지진파가 발생한 적이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위에 열거한 세 과학자들이 발표한 연구결과에 대해 의혹의 물음표를 달았다. 그러나 중국과학기술대학의 지진학자들인 장먀오(張邈)와 원롄싱(溫聯星)이 2015년 1월 지진학전문지 ‘지진학 연구소식(Seismological Research Letters)’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2010년 5월 중에 기록된 지진측정자료를 새로운 미진검측방법으로 조사하였더니 2010년 5월 11일 오전 8시 8분 함경북도 길주군에 있는 핵시험장에서 인공지진이 발생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진 3>


2010년 5월 12일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조선식으로 독특하게 설계된 열핵반응장치에서 핵융합반응시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는 놀라운 소식을 보도하였다. 언론보도를 통해 그 소식을 들은 한국의 핵과학자들은 조선이 핵융합반응시험에 성공하였다는 소식은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하면서 믿지 않았다. 한국의 핵과학자들은 조선의 핵과학기술에 대해 오해와 편견부터 앞세우는 오랜 습관에 길들어졌으니 그런 신중하지 못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2. 조선이 진행한 여섯 차례의 수소탄개발시험


2010년 5월 12일 당시 조선은 핵융합반응시험에 성공하였다고 밝혔지만, 오늘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은 핵융합반응이 일어나는 수소탄을 개발하기 위한 시험, 다시 말해서 수소탄개발시험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조선의 수소탄개발시험이 성공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진 2010년 5월 12일 이후에도 조선의 핵시험장에서 새어나온 방사성핵종이 몇 차례 더 검출되었다.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은 2011년 3월 27일 방사성핵종인 제논(Xe)을 대기 중에서 검출하였고, 2013년 6월 21일부터 24일까지 기간에도 제논이 평상시 기준값을 넘어선 이상현상이 세 차례나 더 나타났다고 밝혔다. 당시 조선의 녕변핵시설단지에 있는 5메가와트급 흑연감속로는 가동되지 않고 멈춰있었으므로, 2011년 3월과 2013년 6월에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이 대기표본에서 검출한 방사성핵종은 녕변의 흑연감속로에서 새어나온 것이 아니라, 조선이 비밀리에 진행한 수소탄개발시험에서 새어나온 것이 확실하였다.


그런데 2013년 6월 하순 이후에는 방사성핵종이 검출되었다는 한국의 언론보도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으므로, 조선의 수소탄개발시험은 2013년 6월 하순에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조선은 2010년 4월 중순부터 2013년 6월 하순까지 총 여섯 차례의 수소탄개발시험을 비밀리에 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문제는, 조선의 수소탄개발시험에서 얼마나 강한 폭발에너지가 발생하였을까 하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데예르는 50~200톤에 이르는 폭발에너지가 발생하였다고 자기 논문에서 밝혔고, 장먀오와 원롄싱은 약 2.9톤(오차범위 0.8톤)에 이르는 폭발에너지가 발생하였다고 자기들의 논문에서 밝혔다.


그런데 양쪽에서 각각 제시한 측정값이 너무 큰 격차를 보인다. 이것은 그 두 측정값 가운데 어느 하나가 오류라는 점을 말해주는데,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장먀오와 원롄싱이 제시한 측정값이 오류인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핵탄을 기폭하여 핵융합반응을 일으킬 때, 아무리 극소형 핵탄을 기폭시킨 극소규모의 핵융합반응이 일어나더라도 폭발에너지가 3톤밖에 발생하지 않는 현상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핵융합반응시험에서 50~200톤급 폭발에너지가 발생하였다고 지적한 데예르의 견해가 이치에 맞는다.

 

▲ <사진 4> 2013년 6월 마침내 수소탄제조기술을 완성한 조선은 2014년 3월 30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핵시험을 진행할 것임을 예고하였는데, 새로운 형태의 핵시험이란 곧 수소탄시험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약 8개월 뒤인 2016년 1월 6일 조선은 예고한 대로 수소탄시험을 단행하였다. 위의 사진은 2016년 1월 6일 평양역 광장의 대형옥외전광판에서 조선의 수소탄시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긴급소식이 전해지자 그 앞에 모여든 평양시민들이 환호성을 터뜨리는 장면이다.     © 자주시보


위에 서술한 몇 가지 사실을 살펴보면, 조선은 50~200톤급 폭발에너지가 발생하는 극소규모의 수소탄개발시험을 2010년 4월 중순부터 2013년 6월 하순까지 여섯 차례 진행하여 수소탄제조기술을 3년 만에 완성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소탄제조기술을 3년 만에 완성한 조선은 2014년 3월 30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수소탄시험을 예고하였다. 조선은 그 성명에서 “적들이 상상도 하기 힘든 다음 단계조치들도 다 준비되여 있다. 핵억제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핵시험도 배제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면서 수소탄시험을 예고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고한 때로부터 약 8개월 뒤, 조선은 마침내 수소탄시험을 단행하였다. <사진 4>


2016년 1월 11일 <자주시보>에 실린 ‘경이로운 50킬로톤급 시험용 수소탄’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나는 조선이 1메가톤급 수소탄의 폭발에너지를 2만분의 1로 축소시킨 50킬로톤급 시험용 수소탄을 2016년 1월 6일에 성공적으로 기폭시켰음을 논증하였다. 그 날 진행된 조선의 수소탄시험에서 50킬로톤(50,000톤)의 폭발에너지가 발생하였다면, 이전에 진행된 수소탄개발시험들에서 발생하였던 폭발에너지의 최대값인 200톤보다 250배나 더 강한 폭발에너지가 발생한 것이다. 2016년 1월 6일에 진행된 수소탄시험에서 성공하였다는 것은, 이전의 수소탄개발시험에서 발생한 폭발에너지보다 250배나 더 강한 폭발에너지를 발생시켰다는 뜻이다.

 

관련기사 : www.jajusibo.com/sub_read.html?uid=25155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2016년 1월 6일에 진행된 조선의 수소탄시험에서 1킬로톤급(1,000톤급) 핵탄이 기폭제로 사용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조선이 2006년 10월 9일에 진행한 제1차 핵시험에서 사용한 핵탄이 1킬로톤급 핵탄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3. 20톤급 극소형 핵탄을 왜 만들었을까?


조선이 50~200톤급 폭발에너지를 발생시키는 극소규모의 수소탄개발시험을 진행하였다는 말은, 20톤급 폭발에너지를 발생시키는 극소형 핵탄을 핵융합반응 기폭제로 사용하여 그 시험을 진행하였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게 만든 극소형 핵탄은 그 폭발에너지가 최소 1킬로톤에 이르는데, 조선은 20톤급밖에 되지 않는 극소형 핵탄을 핵융합반응 기폭제로 만든 것이다. 이것 또한 핵탄에 관한 일반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불가사의한 일이다. 조선의 핵과학자들은 핵융합반응 기폭제로 쓰는 20톤급 극소형 핵탄을 과연 만들 수 있었을까? 

 

▲ <사진 5> 이 사진은 1962년 7월 17일 미국이 네바다 핵시험장에서 터뜨린 극소형 핵탄의 폭발시험장면이다. 그 시험에서 발생한 폭발에너지는 18톤밖에 되지 않았다. 20톤급 극소형 핵탄이 실제로 존재한 것이다. 수소탄개발에 힘쓴 조선의 핵과학자들도 핵융합반응 기폭제로 쓰기 위해 20톤급 극소형 핵탄을 만들었다.     © 자주시보


이 의문을 풀려면,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극소형 핵탄을 만들어낸 미국의 선행경험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1962년 7월 17일 미국이 네바다 핵시험장에서 극소형 핵탄을 시험하였는데, 그 시험에서 발생한 폭발에너지는 18톤이었다. 핵탄에 관한 일반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폭발에너지가 18톤밖에 되지 않는 극소형 핵탄이 실제로 존재한 것이다. <사진 5>


그렇다면 조선은 20톤급 극소형 핵탄을 핵융합반응시험의 기폭제로만 사용하려고 만들었을까? 그런 것은 아니다. 미국의 핵탄개발선례를 살펴보아도, 극소형 핵탄이 핵융합반응시험에서 기폭제로 사용된 것만이 아니라 실전무기로도 배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그런 선행경험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조선도 20톤급 극소형 핵탄을 만들어 핵융합반응시험 기폭제로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그 핵탄으로 두 종의 실전무기를 만들어냈다. 조선은 지난 6.25전쟁 시기부터 미국에게 피맺힌 원한을 갖게 되었으므로, 오늘날 조선의 핵과학자들이 첨단군사과학기술로 만들어내는 실전무기들은 미국에게 복수하려는 최후결전에서 사용할 첨단무기들이라고 볼 수 있는데, 20톤급 극소형 핵탄으로 만든 두 종의 실전무기도 그런 최후결전무기들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지난 시기 미국의 핵과학자들이 밟아왔던 핵탄개발경험을 살펴보면, 1960년대 초에 그들은 20톤급 극소형 핵탄으로 전술무기와 전략무기를 각각 만들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첫째, 1960년대 초 미국의 핵과학자들은 20톤급 극소형 핵탄으로 전술무기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Mk-54 핵배낭과 Mk-54 핵포탄이다. 1961년부터 1962년 초에 이르는 기간에 미국군이 실전배치한 Mk-54 핵배낭은 400개에 이르렀다. 


둘째, 1960년대 초 미국의 핵과학자들은 20톤급 극소형 핵탄을 내장한 전략무기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폴라리스(Polaris) A-1 잠대지탄도미사일(SLBM)이다. 조선에서는 잠대지탄도미사일을 수중대지상로케트라고 부른다. 1960년 7월 미해군은 폴라리스 A-1 잠대지탄도미사일 1차분 16발을 제조사에서 인도받아 실전배치하였는데, 바로 그 미사일 탄두부에 장입된 것이 W-47 수소탄이다. W-47은 20톤급 극소형 핵탄을 기폭제로 사용하여 600킬로톤의 핵융합에너지를 발생시키도록 설계된 탄두화된 수소탄이었다. <사진 6>

 

▲ <사진 6> 이 사진은 1960년대 초 미국의 첫 잠대지탄도미사일 폴라리스 A-1이 발사된 장면이다. 1960년 7월 미해군은 이 미사일 1차분 16발을 제조사에서 인도받아 실전배치하였는데, 그 미사일 탄두부에 장입된 것이 W-47 수소탄이다. W-47은 20톤급 극소형 핵탄을 핵융합반응 기폭제로 사용하여 600킬로톤의 핵융합에너지를 발생시키도록 설계된 탄두화된 수소탄이었다.     © 자주시보


조선의 핵과학자들이 미국 핵과학자들의 핵탄개발선례를 그대로 반복한다고 볼 수 없지만, 최근 조선이 세상에 공개한 두 종의 위력적인 전술무기와 전략무기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조선에서 전승절로 경축한 2013년 7월 27일 평양에서 진행된 조선인민군 열병행진에 이름도 생소하게 들리는 핵배낭부대가 처음 등장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핵배낭부대를 열병행진에 등장시킨 나라는 전 세계에서 조선밖에 없다. 조선인민군 핵배낭부대는 2015년 10월 10일 조선로동당 창건 70주년 열병행진에 또 다시 등장하여 자기의 존재를 과시하였다. 열병행진에 등장한 조선인민군 핵배낭부대를 보고 충격을 받은 한국군 관계자는 그 배낭 속에 방사능방호복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엉뚱한 상상을 하였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전시에 조선인민군 핵배낭부대는 20톤급 극소형 핵탄이 장입된 핵배낭을 메고 남진갱도를 통해 돌격명령이 내린지 1~2시간만에 적진에 은밀히 침투하여 핵배낭을 설치한 뒤 그것을 원격조종으로 기폭하는 전술핵공격을 전개할 것으로 예견된다. <사진 7> 

 

▲ <사진 7> 조선의 핵과학자들은 핵융합반응 기폭제로 사용하는 20톤급 극소형 핵탄을 가지고 핵배낭도 만들었다. 조선인민군 핵배낭부대는 2013년 7월 27일 전승절 열병행진에 등장한 데 이어 2015년 10월 10일 조선로동당 창건 70주년 열병행진에도 등장하였다. 위의 사진은 당창건 70주년 열병행진에 등장한 핵배낭부대의 행진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핵배낭부대를 열병행진에 등장시킨 나라는 조선밖에 없다. 핵배낭 속에는 20톤급 극소형 핵탄이 장입되는데, 전시에 핵배낭을 멘 특수전병력은 남진갱도를 통해 적진에 은밀히 침투하여 핵배낭을 설치한 뒤 원격조종으로 기폭하는 전술핵공격을 전개할 것으로 예견된다. 원격조종으로 기폭하므로 자폭공격이 아니다.     © 자주시보


둘째, 2013년에 핵배낭부대를 처음 세상에 공개한 조선은 2014년 10월부터 잠대지탄도미사일을 수중발사대에서 발사하는 사출시험을 진행하더니, 마침내 2015년 5월 8일 그 미사일을 전략잠수함에서 쏘아올리는 수중발사시험에 성공하였고, 2015년 12월 21일에도 또 다시 전략잠수함에서 그 미사일을 성공적으로 수중발사하였다. 2015년 11월 28일에도 그 미사일을 전략잠수함에서 수중발사하였으나 실패하였다는 미국과 한국의 언론보도는 오보였다. 이에 대해서는 2015년 12월 7일 <자주시보>에 발표한 나의 글 ‘북극성-1호 수중시험발사는 없었다’에서 자세히 논한 바 있다.

 

관련기사: www.jajusibo.com/sub_read.html?uid=24597

 

▲ <사진 8> 이 사진은 2015년 12월 21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관측선박에 탑승하여 참관하는 가운데 함경남도 신포 앞바다에서 진행된 잠대지탄도미사일 수중발사시험 중에 전략잠수함이 수중에서 발사한 북극성-1호가 화염을 뿜으며 하늘 높이 솟구쳐오르는 상승비행장면이다. 미국 군부는 2015년 5월 8일에 진행된 수중발사시험에서 북극성-1호를 발사한 잠수함을 신포급 잠수함이라고 지적했었는데, 2015년 12월 21일에 진행된 수중발사시험에서는 고래급 잠수함이 그 미사일을 발사하였다고 밝혔다. 고래급 잠수함은 이번에 처음 그 이름이 알려진 잠수함이다. 조선에서는 신포급이니 고래급이니 하는 분류명칭을 쓰지 않으므로, 미국 군부가 자의적 분류명칭을 달아놓은 신포급 잠수함과 고래급 잠수함이 어떻게 다른지 알기 힘들다. 미국 군부는 북극성-1호를 수중에서 발사한 조선의 전략잠수함이 신포급 잠수함인지 고래급 잠수함인지 헷갈리고 있다.     © 자주시보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20톤급 핵탄을 기폭제로 사용하는 수소탄두가 그 잠대지탄도미사일에 장착된다는 사실이다. 조선이 개발한 잠대지탄도미사일의 이름은 북극성인데, 그 이름은 미국이 1960년 7월에 처음 실전배치하였던 잠대지탄도미사일의 이름인 폴라리스와 같다. 북극성을 영어로 폴라리스라고 한다. 조선이 자기의 첫 잠대지탄도미사일에 붙인 이름을 미국의 첫 잠대지탄도미사일 이름과 똑같이 지은 것은 우연한 일치현상이 아니라, 폴라리스 A-1에 600킬로톤급 W-47 수소탄두가 장착되었던 것처럼, 북극성-1호에도 그에 상응하거나 또는 그보다 더 강한 파괴력을 가진 1메가톤급 수소탄두가 장착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2016년 1월 12일 <조선중앙통신사>는 ‘병진에 터쳐올린 정의의 폭음’이라는 제목의 논평기사에서 “우리는 소형화, 표준화, 규격화된 탄도로케트장착용 수소탄까지 완전무결하게 장비하게 되었으며 다종의 핵탄들을 지상과 해상, 공중에서 제한없이 운반할 수 있는 최첨단타격수단들을 그쯘히 갖추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사진 8>


조선인민군이 보유한 핵배낭이나 북극성-1호는 전형적인 비대칭무기들이다. 전시에 전개될 작전상황을 예상하면, 남진갱도를 통해 은밀히 침투한 조선인민군 특수전병력이 주한미국군기지들을 폭파하는 비대칭전에서 핵배낭을 사용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고, 수중에서 은밀히 접근한 전략잠수함이 주한미국군기지 폭파에 보복하려는 미국의 핵공격을 억제할 때 북극성-1호를 사용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조선이 2010년 5월 12일 20톤급 극소형 핵탄을 기폭제로 사용한 수소탄개발시험에 성공하고, 2013년 7월 27일 20톤급 전술핵탄으로 무장한 핵배낭부대를 세상에 처음 공개하고, 2015년 5월 8일 20톤급 핵탄을 기폭제로 내장한 수소탄두를 장착한 잠대지탄도미사일을 전략잠수함에서 쏘아올린 수중발사시험에 성공하고, 2016년 1월 6일 50킬로톤급 수소탄시험에 성공한 일련의 과정은 지난 5년 동안 조선의 수소탄개발사업이 얼마나 비약적으로 발전되어왔는지를 말해준다.


그러나 조선의 핵과학기술에 대해 오해와 편견부터 앞세우는 미국과 한국의 핵과학자들, 군사전문가들은 조선이 수소탄개발시험에 성공하였을 때 그것을 부정하였고, 조선이 핵배낭부대를 공개하였을 때 그것도 부정하였고, 조선이 북극성-1호 수중발사시험에 성공하였을 때 그것도 부정하였고, 조선이 수소탄시험에 성공하였을 때 그것도 부정하였다. 조선이 핵무력증강사업에서 이룩한 성과들에 대해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그처럼 무조건 부정으로 일관해온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동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도로 시작된 조선의 수소탄개발사업이 지난 10여 년 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마침내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지도로 완성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한반도 군사정세의 진상을 파악할 수 있다.

 

 

4. 다시 읽어보아야 할 조국통일유훈과 2016년도 신년사


조선에서는 자주적 평화통일을 강조한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조선에서는 자주적 평화통일을 말로만 강조하는 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조선이 국가적 과업으로 추진하는 자주적 평화통일의 구체적인 의미는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주한미국군을 철수시키고, 남북해외 각계각층 대표들이 참가하는 전민족적인 통일회담을 열어 평화통일방도를 합의하고 그것을 즉각 실행한다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주한미국군이 철수하면, 조선이 ‘남침’하여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크게 우려하지만, 그것은 철군반대론자들이 꾸며낸 기만에 우롱당한 결과다. 현실은 그런 우려와는 정반대로 전개될 것이다. 이를테면, 평화협정이 체결되어야 주한미국군이 철수하는 것이고,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 공고화될 것이므로 주한미국군 철수 이후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외세의 개입과 간섭을 배제한 전민족적인 통일회담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시기 조선은 미국을 상대로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핵협상도 진행하였고,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남북정상회담과 민족통일대회도 진행하였다. 그러나 조미핵협상의 성과로 나온 제네바 기본합의와 9.19공동성명, 그리고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로 나온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들의 일방적인 파기행위에 의해 실행될 수 없게 되었다.   

 

▲ <사진 9> 이 사진은 2013년 7월 27일 전승절 열병행진에 등장한 조선인민군 전차의 앞쪽을 확대한 사진이다. 이 사진에 보이는 전차는 조선에서 1992년식 중땅크 <천마-92>라고 부르는 전차다. 그 전차의 앞쪽에 '일당백'이라는 구호와 함께 '조선인민의 철전치원쑤인 미제침략자들을 소멸하라!'는 구호가 나란히 적혀있다. 이 전투구호는 조선인민군이 운용하는 모든 군사장비들에 적혀있다. 조선의 조국통일통일전략에 따르면, "남조선강점 미제침략군을 소멸하는 조국통일대전"과 "북과 남이 우리 민족끼리 정신으로 실현하는 자주적 평화통일"은 상호모순되는 대립물이 아니라, 짧은 기간에 순차적으로 연결되어 한반도 정세에 미증유의 대변혁을 일으키는 정세변화의 폭발적 전개과정이라고 한다.     © 자주시보


이처럼 극도로 악화된 정세는 조선에서 “조선인민의 철천지 원쑤”라고 극렬히 비난하며 적대시하는 미국군이 한국(조선에서는 남조선)에 주둔하는 한 자주적 평화통일이 실현될 수 없으므로, “최후결전을 벌여 남조선강점 미제침략군을 소멸해야” 남과 북이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할 수 있다는 그들의 기존 확신을 더욱 굳게 만들어주었다. 오늘날 그런 확신을 지닌 조선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남조선강점 미제침략군을 소멸하는 조국통일대전”과 “북과 남이 우리 민족끼리의 정신으로 실현하는 자주적 평화통일”은 상호모순되는 대립물이 아니라, 짧은 기간에 순차적으로 연결되어 한반도 정세에 미증유의 대변혁을 일으키는 정세변화의 폭발적 전개과정으로 보이게 된다. 조국통일문제에 대한 조선의 그런 관점과 견해를 파악할 때,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조국통일대전에서 승리하여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라는 유훈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사진 9>


조선의 언론보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조선에서 선대수령들의 조국통일유훈은 어떤 정치선언이나 결의표명이 아니라, 국력을 집중하여 하루빨리 관철해야 할 최고당면과업이다. 예컨대 일본의 시사월간지 <분게이슌주(文藝春秋)> 2003년 1월호에 보도된 ‘조선인민군 학습제강’이나 2013년 8월 <동아일보>에 보도된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전시사업세칙’ 요약본을 읽어보면, 그런 사정을 엿볼 수 있다.     


조선에서 선군절을 맞은 2012년 8월 25일부터 김정은 제1위원장이 조국통일대전에 대해 때때로 공언하는 것은 어떤 정치선언이나 결의표명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조국통일대전으로 선대수령들의 조국통일유훈을 하루빨리 관철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에서 말하는 조국통일대전은 조선이 미국의 무력침공을 받았을 때 피동적으로 전개할 반침략전쟁이 아니라, 선대수령들의 조국통일유훈을 실현하기 위해 ‘결정적인 시기’에 주동적으로 전개할 유훈관철전쟁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에서 조국통일대전이 하루빨리 관철해야 할 유훈과업으로 제시되었어도, 그 전쟁에서 승리할 조건이 갖춰져야 유훈과업을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과 미국이 피차 국운을 걸고 격돌하게 될 전쟁은 재래식 전쟁이 아니라 핵전쟁으로 될 것이므로, 조선은 핵전쟁으로 전개될 자기의 조국통일대전에서 승리할 확실한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문제를 군사학적 견지에서 살펴보면, 조선이 갖춰야 할 조건은 두 가지로 생각된다. 첫째 조건은 공격징후를 교전상대에게 노출하지 않으면서 전술핵탄을 사용하는 선제기습타격, 초정밀타격을 벼락 같이 집중하여 교전상대를 단숨에 제압할 초단기속결전 준비를 완료하는 것이고, 둘째 조건은 주한미국군이 조선인민군의 기습적인 포위공격을 받아 궤멸되는 경우 그에 격노한 미국이 본토에서 대규모 증원군을 파병하고 보복핵타격을 감행하게 되는 확전상황을 즉각적으로 차단, 억제할 전략적 타격수단을 보유하는 것이다.


지난 3년 동안 내가 발표한, 군사정세를 분석한 많은 글들에서 거듭 논해온 것처럼, 지금 조선은 위에서 언급한 그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이를테면,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초정밀타격력을 지닌 핵탄장착미사일을 발사하는 훈련을 진행하고, 조선인민군 핵배낭부대가 자기의 존재를 세상에 공개하고, 조선인민군 잠수함부대가 수소탄두를 장착하는 북극성-1호 수중시험발사에 성공하고, 조선의 군수공업부가 만든 시험용 수소탄의 폭발시험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그 두 가지 조건이 마침내 완비되었음을 실증해준 사변들이었다. 이런 사정을 간파하면, 지금 조선에게는 그들이 말하는 “조국통일대전의 결정적 기회”를 택하는 일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길게 서술한 내용을 이해한 뒤에,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2016년 1월 1일에 발표한 신년사를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올해 신년사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은 “침략자, 도발자들이 조금이라도 우리를 건드린다면 추호도 용납하지 않고 무자비한 정의의 성전, 조국통일대전으로 단호히 대답해나설 것”이라고 단언하였고, 그로부터 이틀 뒤 수소탄시험 최종명령서에 수표하였고, 다시 그로부터 사흘 뒤 인민무력부에서 “강령적인 연설”을 하였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이 2016년 1월 9일 인민무력부 회의실에서 “강령적인 연설”을 하였을 때, 현장에서 연설을 경청한 사람들은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인민무력부,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지휘성원들”이었다. <사진 10>

 

▲ <사진 10>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2016년 1월 9일 인민무력부를 방문하고 "강령적인 연설"을 하였다. 그 자리에는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인민무력부,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지휘성원들"이 참석하였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수소탄시험을 단행한 직후, 인민무력부를 방문하여 중대한 연설을 한 것은 미국을 비롯한 조선의 적대세력들이 조선의 수소탄시험을 구실로 조선을 자극하면 조국통일대전이 일어나게 될 것임을 예고한 것으로 해석된다.     © 자주시보


다른 나라 대통령들이 새해벽두에 발표하는 의례적인 연두교서는 추상적인 언사로 장식되지만, 조선의 최고영도자가 새해 첫날 발표하는 신년사에는 해당년도에 조선이 반드시 실행해야 할 방침과 과업이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전군과 전민이 신년사를 학습하고, 거기에 제시된 방침과 과업을 실행하기 위해 한 해 동안 힘쓰는 것이다. 더욱이 조선에서 ‘시대를 구분하는 역사적인 정치회합’으로 크게 기대하고 있는 조선로동당 제7차 대회가 열리는 올해에 발표된 신년사는 그 대회를 맞이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침과 과업이 제시된 것으로 하여 특별하다.


그런데 김정은 제1위원장이 그처럼 특별한 신년사에서 조국통일대전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나서 곧바로 수소탄시험을 명령하고, 계속하여 인민무력부에서 중요한 연설을 한 것은, 미국을 비롯한 조선의 적대세력들이 조선의 수소탄시험을 구실로 조선을 자극하면 조국통일대전이 일어나게 될 것임을 예고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도 지금 미국과 한국은 조선의 수소탄시험에 대해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조선에 대한 물리적, 심리적 자극강도를 단계적으로 높여가는 중이다. 조선이 그러한 물리적, 심리적 자극을 도발행위와 적대행위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래서 조선외무성은 2016년 1월 15일에 발표한 대변인 담화에서 “이러한 도발행위들과 적대행위들은 조선반도에서 정세를 격화시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필연코 불꽃이 튀게 할 것이다. 일단 화약고에 불이 당겨 폭발하게 되면 그 후과에 대한 책임은 도화선을 늘이고 불을 단 자들이 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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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170만원만 벌었으면” 청년 절반 근로빈곤 위기

청년에게 공정한 출발선을 ⑤ “딱 170만원만 벌었으면” 청년 절반 근로빈곤 위기
등록 :2016-01-17 19:16수정 :2016-01-18 11:15

 

지난 7일 안정애(가명)씨가 경기도 안산시의 한 포장마차에서 부모님의 장사를 돕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A  data-cke-saved-href="mailto:bong9@hani.co.kr" href="mailto:bong9@hani.co.kr">bong9@hani.co.kr</A>
지난 7일 안정애(가명)씨가 경기도 안산시의 한 포장마차에서 부모님의 장사를 돕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bong9@hani.co.kr
[더불어 행복한 세상]
방과후교사·안내원·공장…
일해도 가난한 정애씨 
해외여행 한번 가보는게 꿈
지난 7일 경기도 안산시의 한 포장마차에서 안정애(가명·28)씨가 손님들에게 떡볶이를 덜어주고 있다. 포차 안쪽의 오뎅통 위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그 사이로 정애씨의 부모님이 보인다. 부모님의 포장마차는 밤 9시 무렵이 가장 붐빈다. 그는 종종 퇴근 뒤 이곳에 들러 일을 돕는다.

 

수도권 전문대를 졸업한 정애씨는 한 공공기관 안내데스크에서 일한다. 한달에 130만원을 받는 파견사원이다. 2009년 직장생활을 시작한 정애씨는 그동안 다섯 군데나 회사를 옮겼다. 방과후교사(월급 70만원)→백화점 카드고객센터(월급 130만원)→공공기관 고객안내(월급 120만원)→살충제 생산공장(시급 5580원) 등을 전전했는데 모두 계약직이나 파견직이었다. 정애씨는 “200만원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한달에 딱 170만원만 벌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해외여행을 가보는 게 꿈이다. 아직 여권을 만들어본 적도 없다.

 

네 식구인 정애씨 가족의 월소득은 정애씨 월급에 부모님의 포장마차 수입 150만원을 합쳐 280만원 정도다. 정애씨보다 두살 어린 여동생은 대학을 나온 뒤 중소기업을 다니다가 그만둔 뒤 몇달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

 

50대 중반인 정애씨 아버지는 “애들 대학 보낼 때만 해도 식당을 하고 있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몇해 전까지 식당을 운영하다가 실패한 뒤 포장마차를 차렸다. 지난해 정애씨네는 갑자기 1억원의 빚까지 지게 됐다. 월세를 21만원에서 60만원으로 올려달라는 집주인 요구에, 울며 겨자 먹기로 은행 대출을 받아 집을 샀다. 가족은 정애씨가 기댈 수 있는 ‘안전망’이 아니다.

 

정애씨는 우리 사회 ‘가난한 청년’의 전형이다.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 의뢰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11월말 작성한 ‘청년 근로빈곤 사례 연구’ 보고서(초안)를 보면, 19~34살 청년층 가운데 ‘근로빈곤 위기계층’이 47.4%(2013년 기준)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보고서는 취업자, 실업자, 취업준비자, 구직활동 포기자 중 중위소득 50% 미만자인 ‘근로빈곤층’이거나, 불안정 취업과 실업의 반복으로 미래에 빈곤해질 징후가 보이는 이들, 즉 임시·일용직과 실업자, 취업준비자, 구직활동 포기자, 무급 가족종사자 등 ‘불안정 근로빈곤 상태’에 있는 이들을 ‘근로빈곤 위기계층’이라고 정의했다. 언제든지 빈곤층으로 추락할 위험이 있는 청년들이 절반에 육박한다는 의미다.

 

1990년 33.2%였던 우리나라 대학진학률은 2008년 83.8%까지 올라갔고 이후 내림세를 보였지만 지난해에도 70.8%에 이르렀다. 현재 청년세대는 70~80%가 대학을 나왔고 나머지도 거의 고등학교 교육을 마친, ‘고학력 세대’다. 하지만 사회는 이들에게 ‘학력인플레’만 강요했을 뿐, 삶을 안정적으로 꾸릴 수 있는 일자리는 주지 않았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말이 통용됐던 것은 지금은 힘들어도 성실히 일하면 월급이 오르고 삶의 기반이 튼튼해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과 때로는 가족들의 빚까지 껴안고, 기약없이 저임금·불안정 일자리를 떠돌아야 하는 이들에게는 ‘먼 옛날 이야기’일 뿐이다.

 

 

학자금대출 ‘빚의 시작’…“돈 벌어도 내돈이 아냐”

 

지난 7일 안정애씨가 안산시의 한 포장마차에서 부모님을 돕고 있는 모습.(위) 이승철씨가 지난 9일 서울 마포의 옥탑방에서 책을 보고 있는 모습. (오른쪽 아래)  한영수씨가 지난 8일 지방의 한 호텔에서 야근을 하고 있는 모습.(왼쪽 아래)  김봉규 김경호 선임기자 <A  data-cke-saved-href="mailto:bong9@hani.co.kr" href="mailto:bong9@hani.co.kr">bong9@hani.co.kr</A>, 한영수씨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지난 7일 안정애씨가 안산시의 한 포장마차에서 부모님을 돕고 있는 모습.(위) 이승철씨가 지난 9일 서울 마포의 옥탑방에서 책을 보고 있는 모습. (오른쪽 아래) 한영수씨가 지난 8일 지방의 한 호텔에서 야근을 하고 있는 모습.(왼쪽 아래) 김봉규 김경호 선임기자 bong9@hani.co.kr, 한영수씨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8년 일해도 월급은 130만원 정애씨가 8년째 회사를 다니면서 받는 월급 130만원은 최저임금(월 126만원가량, 주 40시간 근무 기준)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올해 기준으로 1인가구 중위소득(전체 가구를 줄을 세웠을 때 가운데 있는 가구의 소득)은 162만원이다. 빈곤선인 중위소득 50%보다 아래에 있는 건 아니지만, 실직이나 질병 등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 정애씨는 언제든지 빈곤층으로 밀려날 수 있다.

 

 

‘불안정 노동’ 정애씨

 

8년 일해도 월급은 130만원
비정규 탈출못해 ‘빈곤의 늪’

 

 

빚에 짓눌린 승철씨

 

학자금대출에 신용대출까지
“결혼? 또 빚내는 일은 절대 안해”

 

 

‘가난 대물림’ 영수씨

 

190만원중 100만원 가족 부양
“햄버거 사 먹는게 유일한 사치”

 

 

정애씨의 첫 일자리는 초등학생을 돌보는 방과후 교사였다. 하루 5시간씩 일하고 한달 70만원을 받았다. 1년의 계약기간이 끝난 뒤 미련없이 다른 곳을 알아봤다. 남들처럼 하루 8시간 일하고 제대로 된 월급을 받고 싶었다.

 

두번째 직장인 한 백화점의 카드고객센터에선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 고객들을 응대하는 일을 했다. 온라인 구직사이트에 나온 파견회사를 통해 들어갔다. 명절이 되면 카드회원을 직원 1인당 4~5명씩 늘려 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월급은 130만원으로 시작해, 6개월마다 5만원씩 올려줬다. 정애씨는 “그나마 여기서 일할 때는 여름휴가비도 5만원 정도 나왔고 명절 선물도 줬다. 지금 회사에선 추석에 김이나 참치세트도 안 준다”고 말했다. 공공기관과 계약을 맺는 파견회사가 3년마다 교체되는데, 이번 회사는 “월급이 짜기로 유명한 곳”이라고 했다. 구내식당에서 먹는 점심식사비도 대주지 않는다. 월급에서 고스란히 8만원가량이 나간다.

 

1년8개월 만에 정애씨는 다시 일을 그만뒀다. 백화점은 2년이 지나면 법에 따라 파견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해야 한다. 하지만 그 기간을 채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그랬다. 이후 들어간 곳은 지금 일하는 곳과는 또 다른 공공기관이었다. 한달 120만원을 받으며 2년 가까이 일했다. 2년이 가까워오자 역시 그만둬야 했다. 일하는 동안에 2년을 다 채우고 정규직이 된 사례는 들어보지 못했다.

 

지난해엔 제조업 생산현장에서도 일했다. 바퀴벌레 살충제를 만드는 회사에서 제품포장 업무를 맡았다. 최저시급 5580원(2015년 기준)과 주휴수당만 달랑 주는 곳이었다. 정애씨는 “일이 있으면 나가고 일이 없으면 나가지 않는 불규칙한 곳이었다”고 말했다. 2주씩 혹은 한달씩 일이 몰릴 때만 일하는 파견사원이었다.

 

정애씨는 ‘서비스 매니저’(고객 관련 업무를 분석·관리하는 일)로 경력을 쌓아가고 싶은 바람이 있다. 하지만 비정규직으로 회사에 취업할 때 그런 지원 동기를 물어보는 곳은 없었다. 그는 “회사를 너무 많이 옮기다 보니 사람이 점점 소심해지고 내가 부적응자인가 싶은 자책이 들 때가 있다”고 말했다.

 

정애씨는 앞으로 퇴근 뒤 아르바이트를 할 계획이다. 남자친구와 늦어도 4년 뒤에 결혼을 하고 싶어서다. 그러려면 지금부터라도 ‘저축’을 시작해야 한다. 그는 “대략 계산해보니 한달에 70만원정도는 적금을 들어야 결혼을 할 수 있겠더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청년층 절반가량이 ‘근로빈곤 위기계층’으로 분류된 가장 주된 원인은 불안정 노동으로 첫 일자리를 얻은 이후 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청년들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통계청 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2015년 8월)를 바탕으로 분석한 자료를 보면, 20대 임금근로자(348만4천명) 가운데 비정규직은 45.9%(160만명)에 이른다. 비정규직은 일자리가 불안정할 뿐 아니라 임금 수준도 낮다. 정규직의 절반 수준(49.8%)이다. 정애씨의 경우에서 보듯 이런 임금 수준은 시간이 흘러도 오르지 않는다. 취업, 결혼, 출산, 내집 마련 등의 정상적인 삶의 경로를 밟기 어렵다.

 

이병희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과거에는 노인·장애인 등 근로능력이 없는 이들에 대한 빈곤 개념만 있었는데 외환위기 이후 일을 해도 가난한 근로빈곤 개념이 생겨났다”며 “우리나라의 근로빈곤은 저임금 고용(중위임금 3분의 2 미만)에서 비롯되고 있는데 이 비중이 국제적으로도 매우 높은 수준이다. 90년대 초반까지 낮아지다가 외환위기 이후 다시 높아진 저임금 고용 비중은 현재 80년대 후반 수준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통계청 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2015년 8월)를 바탕으로, 청년층(15~29살·시간당 임금 기준) 저임금 고용 비중은 28.1%에 이른다. 이 비율을 국제비교 기준인 15~24살로 보면 46.1%나 된다.

 

■ 빚으로 산 대학졸업장 비싼 등록금 때문에 지게 된 학자금 대출은 청년들이 가난에 허덕이게 되는 또다른 이유다. 경북지역에서 대학을 다닌 이승철(가명·32)씨는 8학기 내내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했다. 미디어유통 분야에서 계약직 사원으로 일하는 그는 한달 200만원을 벌어서 원리금 상환에만 70만원을 쓴다. 졸업한 지 한참 지났지만 아직도 1200만원의 빚을 더 갚아야 한다. 그는 “이제 절반 정도 갚았다”고 말했다.

 

 몇해 전 “집 사는 데 돈이 부족하다”는 어머니에게 4천만원을 신용대출로 받아 드리면서 학자금 대출 상환은 더 늦어지고 있다. 승철씨는 “돈을 벌어도 내 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월급을 받으면 방세와 원리금 상환을 위한 돈을 떼어놓은 뒤 신용카드 선결제부터 신청한다. 그래야 소비를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더 이상 대출을 받고 싶지 않아 적자가 날 것 같은 달엔 식비를 줄인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배를 채우거나 삼각김밥을 사먹는다.

 

 승철씨는 3평(10㎡)이 채 안 되는 옥탑방 안에 등산용 텐트를 쳐놓고 산다. 그냥 자면 너무 춥기 때문에 외풍을 막으려고 텐트 안에서 잠을 자는 것이다. 서른을 넘긴 그는 결혼·출산 계획이 없다. 그는 “빚을 또 내야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서울에 있는 35살 이하 청년들의 대출 최초 발생 원인(2013년 토닥토닥협동조합 조사)을 보면, 학자금 대출이 44%로 가장 높다. 학자금 대출 상환을 여섯달 이상 밀린 신용유의자 규모도 2007년 3785명에서 2014년 4만635명으로 10배 이상 늘었다.(한국장학재단 자료)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대학을 나왔지만 이를 상환하고 저축을 할 만한 안정적 소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빈곤의 늪에 빠질 우려가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자료(2014년 교육거품의 형성과 노동시장 분석)를 보면, 4년제 대졸자 하위 20%와 2년제 대졸자 하위 50%는 고등학교 졸업자에 견줘서도 임금이 낮다. ‘대졸 빈곤층’이 양산될 위험이 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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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마저 어려우면… 가족부양까지 병행해야 할 경우 청년은 더 가난해진다. 수도권 3년제 대학을 나온 뒤 제주도의 한 중소호텔 시설관리팀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한영수(가명·25)씨는 한달에 190만원을 벌어 100만원을 집으로 보낸다. 빌딩 청소로 생계를 꾸리는 어머니를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일을 하다가 다친 아버지의 병원비도 보태야 한다. 집에는 빚도 있다.

 

영수씨는 주야간 교대제로 고된 일을 한다. 길게는 하루 15시간을 일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회사는 야근수당을 통상임금의 1.5배가 아닌 1.25배만 준다. 호텔 쪽은 “다른 호텔과 다르게, 파견직이 아닌 계약직으로 직접 고용해주니 그 정도는 감수하라”고 말했다. 실제로 호텔업계에서 계약직이나마 신입사원을 직접 채용해주는 일은 많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가 지난달 쓴 돈은 30만5030원이 전부다. 월급을 받더라도 돈이 들어가는 일은 웬만해선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외식비와 휴대전화 통신비, 교통비 등이 주요 지출내역이다. 옷은 거의 사지 않는다. 영화관에 가는 대신 마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본다. 많이 돌아다니지 않아서인지 교통비는 4250원만 썼다. 집 앞 맥도날드에서 가끔 사먹는 햄버거가 그에게 최대 사치다. 지금 다니는 회사도 기숙사와 식사를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점 때문에 오게 됐다. 영수씨는 “늘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서인지, 돈을 쓰지 않고 사는 일이 그닥 불편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원래 기자가 되는게 꿈이었다. 하지만 집안 사정으로 당장 돈을 벌어야하기 때문에 원하는 회사에 들어가기 위한 취업준비는 아직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영수씨는 “처음에는 제주도에 내려와서 올레길도 걸어보고 했는데, 요즘은 몸이 피곤해서 아무데도 가고 싶지 않다. 마음이 종종 우울해진다”고 말했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청년층이 대부분 부모와 같이 거주하고 있어서 비정규직 취업이 곧바로 빈곤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한국의 가족제도가 노동시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완충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라며 “하지만 가족이 이런 완충역할을 할 수 없거나 오히려 부양해야 하는 경우, 저임금일자리는 곧바로 빈곤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보건사회연구원은 이번 보고서에서 “청년의 노동시장 진입과 지위 유지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지만 현재 노동시장 상황을 볼 때 개선을 기대하기가 어렵다”며 “한번 빈곤을 경험하면 다시 빈곤을 경험할 가능성이 커지는 빈곤의 점착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청년 근로빈곤에 대한 적극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황보연 최우리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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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가기 : “나도 낙오자 될 수 있다” 불안에 떠는 청년들 
▶ 바로 가기 : 노인이어 청년 빈곤층 내몰려…미래사회 ‘부메랑’ 된다

 

연재더불어 행복한 세상-청년에게 공정한 출발선을

 

  • ① 청년 200인보
  • ② 탈조선 난민들
  • ③ 평생 월세세대의 등장
  • ④ 고용신분제 사회의 서막
  • ⑤ 일해도 가난한 청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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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언론이 나쁜 정치를 만든다


[이완기 칼럼] 정치불신과 진영논리 만드는 언론 자정시켜야
 
입력 : 2016-01-18  09:28:13   노출 : 2016.01.18  09:55:05

이완기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 media@mediatoday.co.kr 

한 사람이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은 채 길가에 버려져 있었다. 지나던 행인이 이 사람을 발견하고 여기저기 살피더니 “국회의원인데 이미 숨이 끊어졌군” 하며 그냥 지나치려 했다. 행인의 말에 놀라 의식을 되찾은 국회의원은 행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나 아직 죽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행인은 “요즘 국회의원의 말을 누가 믿나”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정치인들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담은 씁쓸한 우스갯소리다.

20대 국회의 선량들을 뽑는 총선이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이번 총선에서 여당인 새누리당이 180석을 넘을 확률이 80%라는 전망이 발표된 가운데, 약체 야당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던 야당 지지자들은 그마저도 더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등으로 사분오열되어 있는 현실에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러한 상황이 가져올 가장 큰 위험은, 극도의 정치 불신과 불투명한 전망 속에서 정치적 무관심이 확산되고 장기화될 뿐 아니라 그 폐해가 고스란히 유권자에게로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선거는 민주적인 권리행사의 소중한 기회이며 민주주의체제를 유지하는 중요한 정치수단이다. 물론 선거만으로 민주주의 체제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선거 과정에서 공표된 후보자들의 공약이 선거가 끝나기가 무섭게 폐기되는 일을 숱하게 보아왔고, 급기야는 정치인들의 불통과 독단으로 심화되어 왔음을 우리는 경험했다. 유권자를 기만하고 배신하는 이러한 정치행태에 대해 감시와 저항이 제대로 표출되었다면 오늘의 정치가 이처럼 국민을 외면하는 관성화된 독재로 퇴락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 국회 본관. ⓒ 연합뉴스
 

어찌되었든 또 한 번 기회가 주어진 정치심판의 시점에서 건강한 민주주의 정치풍토를 만들어내는 첫걸음은 유권자들 스스로 선거에 적극적 관심을 보이고 참여하는 것이리라. 국민이 정치를 무시하면 국민 또한 정치로부터 무시당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마땅한 선택지가 없다 하더라도 최선이 아니면 차선, 차선이 아니면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 주어진 여건에서 우리가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길이다. 혹자는 선택을 포기하는 것도 중요한 정치적 의사표명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예 투표장에 나오지 않는 것과 기권을 하더라도 투표장에 나와 투표인명부에 서명하고 기권표를 행사하는 것은 의미가 사뭇 다르다. 후자는 이 천박한 정치상황을 유권자가 주시하고 있음을 정치인들에게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정치인들의 나쁜 습속은 궁극적으로 국민의 무관심이 만들어준 결과다. 정치권 인사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병역비리, 부동산투기, 세금탈루, 인사청탁, 논문표절 등 추한 정치인들의 행렬이 개선되지 않는 것은 이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부족했고 선거를 통해 이를 심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러한 정치현실은 국민으로 하여금 정치에 환멸을 느끼게 하고 정치적 무관심으로 이어져 마침내 정치를 더러운 자들끼리의 진흙탕 싸움으로 만들어 왔다. 국민의 무서운 감시의 눈이 있다면 ‘하는 척’이라도 했을 정치인들이 이제는 아예 국민의 눈을 외면하고 유체이탈의 궤변을 늘어놓으며 안하무인의 뻔뻔스런 작태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배경에는 극도로 기울어진 언론지형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선거 때마다 언론은 제대로 된 후보자 정보로 참과 거짓을 가려 대중에게 알리기보다는 “모두가 나쁘다”는 식의 양비론으로 선거를 진흙탕 싸움으로 몰아갔다. 그런 언론보도는 정치불신과 함께 정치적 무관심을 조성함으로써 선거가 끈끈하게 짜여진 진영에 의해 결판나도록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대중과 정치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해야 할 언론이 건강하고 객관적인 여론 형성자로서의 지위를 팽개친 채 정파와 이념에 갇힌 패거리 진영의 한 축으로 기능해 왔던 것이다.

진영문화는 사회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이기고 지는 것 외에 어떤 가치도 발붙일 틈이 없는 진영문화는 과거 오랜 군부독재정권하에서 파생됐다. 진영문화는 민주정부 10년 동안 약화되는 듯 했다가 군부독재의 상징인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집권하면서 매우 깊이 뿌리내렸다. 아무런 가치 기준도 없이 진박, 친박, 중박, 비박, 탈박 등의 해괴한 말들이 횡행하는 것은 바로 이런 천박한 진영문화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진영문화는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적을 제압하기 위해 온갖 기만술과 선전술, 파괴 공작 등이 동원된다는 점에서 정의와 진실,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민주주의 문화와 동거할 수 없다.

선거정국에서 언론의 불편부당과 균형보도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하지만 언론이 지키고 경계해야 할 원칙들은 이 외에도 많다. 후보자들이 현재 하고 있는 말과 선전에만 의존하지 않고 후보자들의 과거 행적을 알려주는 것 또한 언론이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다. 그래야 그들이 하는 말의 진정성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고 했다”는 식으로 후보자의 말을 경마 중계하듯 보도하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진위를 따지는 것도 언론이 해야 할 일이다. 특히 언론은 정치 불신을 야기하는 후보자들 간의 네거티브 캠페인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동시에 유권자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선심성 공약에 대해서도 재원확보의 가능성, 정책의 타당성 등을 철저히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1월14일 총선 90일을 남겨놓은 시점에서, 시민단체 및 언론현업단체 등 총 28개 단체가 참여한 ‘2016총선보도감시연대’(총감연)가 출범했다. 지금 이들의 행보가 주목되는 이유는 오늘의 퇴락한 언론현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단순한 보도감시를 넘어 편향보도에 대한 행동지침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총감연은 발족 기자회견문에서 “언론이 전달하는 정보는 유권자들이 지지후보자를 결정하는 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전제하고 “국민은 언론에 올바른 정보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강조했다. 총감연은 언론에 대한 모니터 결과를 언론사에 배포하고 공개할 뿐 아니라 극심한 편향보도에 대해 언론중재위원회,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선거관리위원회 등에 제소함으로써 언론사와 해당 언론인에게 책임을 묻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더 공정한 언론, 더 성숙한 선거, 더 나은 민주주의를 다짐한 총감연의 활동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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