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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잘못된 '대통령 연두 업무보고' 관행

소신 있는 장관, 공무원은 모두 죽었나 한참 잘못된 '대통령 연두 업무보고' 관행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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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1.05  15: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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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아 통일부가 분주합니다.
남북대화 구상 때문에? 통일교육 준비 때문에? 탈북민 지원 때문에?
땡!!! 모두 틀렸습니다.
연말부터 통일부는 단 하나, 대통령 연두 업무보고 준비에 매달려 있습니다.

오는 22일 박근혜 대통령은 집권 4년차 통일외교안보 분야 연두 업무보고를 받습니다. 지난해 대통령 업무보고가 경제혁신-국가혁신-통일준비-국민행복이란 명칭으로 나누어 진행됐고, 통일부는 외교부, 국방부, 국가보훈처와 함께 ‘통일준비’ 업무보고에 참여했습니다.

국정 최고책임자가 각 부처의 연간 업무계획을 보고받고 지시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꼭 필요해 보입니다. 그런데 막상 업무보고를 준비하는 장관부터 말단 공무원까지 다들 표정이 밝아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단지 밝지 않은 정도를 넘어 곤혹스러움과 짜증이 배어있습니다.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그럴만도 합니다.

공무원 사회는 유난히 행정절차나 요식행위가 많고 벗어나기 힘들 정도로 꽉 짜인 틀이 옥죄고 있습니다. 더구나 대통령 앞에서, 그것도 박근혜 대통령 앞에서 장관들이 업무보고에 나서는 경우, 가장 전형적인 요식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감히 어떤 장관이나 기관장이 자기 방식대로 토론거리를 만들어 보고할 수 있을까요? 뻔한 순서에 따라 뻔한 내용으로 매끄럽게 보고하고, 지적사항 최소화, 칭찬 최대화를 이끌어내는 것 외에 무슨 관심이 있겠습니까?

그 뻔한 보고서를 ‘폼나게’ 만들기 위해 각 부처 공무원들이 대부분 한달 이상을 목매달다시피 매달리고 있는 모습은 한마디로 안쓰럽습니다. 회의를 주재하는 대통령은 짜여진 보고를 청취하는 인내력을 발휘할 뿐입니다. 토론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순서대로 돌아가며 ‘허공에 대고 한마디씩 하는’ 수준입니다. 대통령은 미리 써온 엄숙한 결론을 통보하고 마무리합니다.

   
▲ 지난해 '통일준비' 업무보고 모습. 통일부, 외교부, 국방부, 국가보훈처가 합동 업무보고를 했고, 통일부는 당시 류길재 장관이 보고자로 나섰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청와대도 이런 문제점을 알았던지 지난해 업무보고가 끝난 뒤 ‘국민행복’ 업무보고가 잘 됐다며 특별히 ‘비하인드 스토리’를 청와대 홈페이지에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부처들의 업무보고를 꼼꼼히 들으며 궁금한 점을 직접 질문하고, 부족한 부분에 대한 지원을 당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하인드 스토리’에 나온 내용을 보면 실소만 나옵니다. 박 대통령은 ‘대학교육의 구조적 문제 해결’로 “기업이 필요한 인재를 대학에서 교육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을 추진한다면, 청년들의 일자리 문제가 많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지난해 이러한 지시사항으로 청년 일자리가 늘어났다는 소식은 듣지 못 했습니다.

더구나 업무보고 마무리 발언으로 “오늘 보고한 과제들과 토론한 내용대로 정책이 잘 추진이 된다면, 올 연말까지 우리 국민들께서 연말에는 행복지수가 높아졌다 하는 것을 체감하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한다”고 말했지만 연말을 지난 지금 행복지수가 높아졌음을 체감하는 국민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하나마나한 매년 되풀이되는 대통령 연두 업무보고에 공무원들이 흥이 날 이유가 없고, 야근이나 주말근무까지 더해지게 되면 짜증과 불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정도가 아닙니다. 매년 되풀이되는 업무보고에서도 뭔가 새로운 보여줄 거리를 찾아야 한다는 중압감에 장관과 고위 공무원들은 안절부절 못 합니다. 통일부 장관은 4일 신년인사차 기자실에 들러 좋은 사업거리에 대한 아이디어를 기자들에게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통일부가 남북관계를 풀어가는 데 무슨 새로운 사업거리가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실제로 장관의 요청에 기자들이 금강산관광 재개나 남북 철도 연결 문제를 제기하자 장관은 아무런 대답도 못 했습니다.

금강산관광을 재개하면 남북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풀 수 있고 현 정부가 그렇게나 내세우고 있는 이산가족 문제의 진전도 비로소 여지가 생길 것입니다. 남북 철도.도로 연결을 비롯한 남북경제협력이야말로 남과 북 모두 상생할 수 있는 길임은 심지어 새누리당과 전경련, 대한상의까지 제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통령 연두 업무보고를 앞두고 DMZ 세계평화공원이니, 새로운 사업거리니 타령만 늘어놓아야 하는 장관의 처지가 참 안 돼 보입니다. 그 뒷받침을 하기 위해 행정고시라는 어려운 관문을 거쳤고 남북관계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엘리트 공무원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도 참 딱해 보입니다.

안 하니만 못한 대통령 연두 업무보고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대통령도 장관도, 공무원들도 모두 바뀌어야 합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자조는 적어도 장관이나 고위직 공무원들은 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다산 정약용은 일찍이 목민관의 덕목으로 율기(律己, 자신을 다스림)와 더불어 봉공(奉公, 공을 받듦)과 애민(愛民, 백성을 사랑함)을 꼽았습니다. 대통령의 레이저 눈빛을 맞지 않는 것보다 국민과 역사 앞에 충실한 공복의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2018년 평창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을 추가적인 환경파괴나 재정투입 없이 북한 마식령스키장을 이용해 분산개최해 보자는 소신 제안을 대통령 앞에서 당당하게 펼칠 장관도 공무원도 진정 없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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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

[항일연제.17]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위한 반일조직의 확대
 
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17)
 
이용섭 역사연구가 
기사입력: 2016/01/06 [08:14]  최종편집: ⓒ 자주시보
 
 

 

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17)

 

반일인민유격대 창건 준비과정과 창건 후 항일투쟁

 

6.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위한 반일조직의 확대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김일성 주석의 주도로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이 선포되었다앞서도 여러 번 언급을 했듯이 당시 복잡한 과정을 거쳐 치밀하게 준비를 한 다음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한 것이다여기에는 우선 가장 중요한 유격대원들이 손에 들고 적들과 맞서 싸울 무장장비를 준비하고또 동북만주와 남만을 무대로 투쟁을 할 때 유격대원들의 투쟁을 도와줄 백성들이 조직적으로 묶여져 있어야 한다동북만주는 중국의 영역이었기에 유격대가 원활하게 투쟁하기 위해서는 반일사상을 가진 중국인들과의 통일전선을 형성해야 했다마지막으로 유격대를 묶고 투쟁하는 것이 일회성이라거나 단시일 내에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장기전을 해야 하고드넓은 만주광야에서 강력한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한 두 개의 유격대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만주 각지에 조직적으로 연대를 해서 싸울 유격대를 창설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치밀한 준비를 하지 않고는 당시 세계 최강국에 속하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과 맞서 가열 차게 유격투쟁을 벌일 수가 없다새 사조를 받아들이고 이전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방향의 항일투쟁을 준비하던 젊은 조선인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정확히 인식을 하였다.

 

이에 따라 유격대창건에 앞서 위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공작하고 투쟁을 벌였다유격대를 창건하고 본격적으로 유격투쟁으로 넘어가기 전에 필요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동시적으로 해결해가는 과정은 대단히 험난하고 어려운 길이었다심지어 목숨을 던지면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경우도 수없이 많았다이러한 준비가 갖추어진 후에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한 것이다.

 

반일인민유격대를 묶는데 필수요소인 유격대원들이 무장하기 위해 무기를 획득해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전 장들에서 살펴보았다이번 장에서는 유격대를 묶기 전 유격대원들의 유격활동을 후원하고 원호할 일반백성들을 조직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일반백성들을 유격활동을 후원하고 원호할 수 있는 조직성원으로 참여하게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1920년대 말 이전 이미 만주 각지에는 민족주의계열을 독립운동단체들이 있었고 또 민족주의계열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단체들이 조직되어 있었다물론 당시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맞서 치열하게 무장투쟁을 벌여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느냐 아니냐는 또 다른 문제다따라서 당시로서는 젊은 층에 속하는 반일·항일세력들이 만주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 사이에 새로운 조직을 내온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다더구나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은 젊은 조선인들이 받아들인 새 사조 즉 공산주의사상을 가진 세력에게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버금가는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 단체들에서는 자신들과 같은 민족이면서 반일·항일투쟁의 길에 나선 공산주의계열의 항일운동가들을 대상으로 백색테러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반일의 길에 나선 것 자체가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찾겠다는 것으로서 자신들과 같은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하지만 당시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단체들에서는 반일·항일의 일념으로 투쟁에 나선 동족들을 대상으로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백색테러를 감행했다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도 서러운 일인데 자신들과 같은 지향을 가진 동족을 대상으로 테러를 감행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이 만주각 지역과 북부조선일대에 반일·항일유격투쟁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는 길은 이처럼 험난하였다비단 적의 무기를 빼앗아 자체 무장을 하는 것만이 목숨을 내대는 것이 아니었다한편으로는 적과 투쟁을 해야 하고 또 다른 편으로는 자신의 동족으로부터 당하는 백색테러와도 투쟁을 벌여야 했다.

 

백성들 사이에 유격투쟁을 지원해줄 조직을 묶어낸다는 것이 이렇게 험난하였다하지만 당시 젊은 조선인들은 가는 길이 위험하다고 물러서지 않았으며험난하다고 결코 주저앉지 않았다바로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젊은 조선인들은 백성들 사이로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호흡을 하면서 설득하고 때로는 함께 노동을 하면서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이렇게 가열차고 치열하게 노력을 했기에 백성들은 점차 젊은 조선인들이 지닌 민족주의사상과 새로운 사회의 건설방향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했다나중에는 백성들이 더 적극적으로 젊은 조선인들의 투쟁을 도와 나섰으며때로는 유격대원들과 한 전호 속에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무기를 들고 싸우기까지 하였다.

 

동북만주와 남만 그리고 조선북부지대에 사는 백성들을 하나의 반일조직으로 묶어내기 위해 젊은 조선인들이 얼마나 간고한 투쟁과 노력을 기울였는가우리는 이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자신의 조상들이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얼마나 간고한 투쟁을 벌였는지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악랄하고 야수적인 탄압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한다그런 후라야 2015년 12월 28일에 있었던 -일 정신대문제 합의와 같은 얼빠진 짓거리를 하지 않는다하지만 남쪽의 현실은 이와는 정반대로 이런 매국적이며 배족적인 합의를 지지하는 백성들이 무려 35.6%나 된다니 필자로서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이에 대해 보도한 오늘자 뷰스엔 뉴스의 소식을 아래에 간단히 올려준다.

 

5일 <중앙일보>에 따르면중앙일보 조사연구팀이 전국 성인 1천명을 상대로 지난해 12월 29~30“‘일본 정부가 책임을 통감한다며 재단 기금에 정부 예산을 투입하기로 한 것은 법적 책임을 인정한 것으로 본다는 정부 입장에 동의하느냐고 물어본 결과 동의한다가 47.6%, “동의하지 않는다가 47.9%로 팽팽했다. “모르겠다가 4.5%였다.

……

정부의 위안부 협상 결과에 대해선 불만족스럽다(‘매우 불만족한다’ 또는 약간 불만족한다’)는 응답이53.7%로 만족한다는 응답(35.6%)보다 많았다.

 

정부 발표 중 일본 정부가 합의사항을 이행한다는 전제로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는 내용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다는 응답(58.2%)이 동의한다”(37.3%)보다 많았다.

 

참으로 할 말이 없는 현재 배달겨레 반쪽이 살고 있는 남쪽의 현실이다위와 같은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40년간 이 나라를 빼앗고 세계사에 있어본 적 없는 악랄한 방법으로 식민지지배와 수탈을 한 역사에 대해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민족반역자들의 후손들이 권력과 재부 그리고 이 사회의 모든 기득권을 틀어쥐고 자신들의 직계조상의 반민족 반역행위를 숨기기 위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일본의 만행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오늘의 남쪽 현실에 대해 후세들은 과연 뭐라고 역사적 평가를 내릴 것인지 두렵기만 하다.

 

오늘자 새 소식을 올려준 것은 필자가 현재 연재를 하는 것도 기록으로 남아 후세들에게 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또 연재를 하는 내용과 직접 관련을 가지고 있기에 인용을 해보았다.

 

그럼 이제부터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해 젊은 조선인들이 동북만주와 남만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벌인 조직사업에 대해 여러 자료들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1) 연변조선족자치주 자료

 

젊은 조선인들이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해 동북만주와 남만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벌인 조직사업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 학술자료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될 수 있으면 자료를 전면 개제를 한다투쟁과정에 대한 생생한 기록과 또 증언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 먼저 오래 된 기념비를 가보았다한자리에 두 개의 기념비가 쌍둥이처럼 세워져있는데 앞쪽것은 화강암으로 다듬은 석비이고 한자쯤 뒤에 세워진 기념비는 오래된 목비였다석비엔 화룡시문화유물보호단위 약수동항일기념지 화룡인민정부 198561이라는 조한문으로 된 붉은 글이 새겨져있었다.

……

1930년 5월 27일 이곳에서 동북에서의 첫 번째 쏘베트정부가 성립되였다. 1930년 6월 10일 중공약수동지부가 성립되고 서기로서는 리봉삼이였다. 1930년 7월 10일 중공평강위워원회가 성립되고 서기는 주현갑조직부장은 리주헌선전부장은 황룡문비서는 윤준걸유일환이였다아래에 12개 지부가 있었다평강구위는 선후로 약수동-어랑촌-마고령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35년에 전부 파괴되였다. 1930년 8월 13일에 중공연화중심현위가 성립되고 서기로는 김창일조직부장은 정만준선전부장은 한별,군사부장은 박윤세였다. 1932년 음력 11월 4일에 항일녀영웅 김순희와 호조회장 정태준 등 13명 동지들이 이곳에서 희생되였다.

 

약수동쏘베트정부 탄생

 

1930년 5월에 진행된 붉은 5월 투쟁은 5월 23일부터 부분적 농촌에서 토지혁명투쟁에로 넘어갔다.약수동투도구달라자삼도구 등지의 농민들은 공산당조직의 령도밑에 선전대와 특무대를 조직하여 친일주구와 토호렬신을 청산하고 소작료계약서와 고리대문서를 불살라버렸다그들은 또 지주토호렬신 및 친일주구들의 식량과 재산을 몰수하여 빈곤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중공연변특별지부에서는 1930년 4월말 황포군관학교출신인 조선족공산당원 신춘(申春)을 혁명군중기초가 좋은 약수동일대에 파견하여 토지혁명을 전개하도록 했다. “붉은 5월 투쟁속에서 약수동의 농민들은 농민적위대를 조직하여 지주의 장원으로 쳐들어가 지주의 고리대문서를 태워버리고 량식과 재물을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930년 5월 27일은 약수동과 그 일대의 농민군중들에게 있어서 잊을수 없는 날이다약수동 상촌의 팔간집마당에서 열린 군중집회에서 신춘은 약수동쏘베트정부가 창립되였다!”고 장엄하게 선포하였다.이는 동북에서의 첫 민중정권의 탄생이였다그것도 일제치하와 봉건통치배들의 코앞에서 벌어진 력사적장거였다.

신춘은 쏘베트정부의 창립대회에서 약수동쏘베트정부창립의 력사적의의와 그 사명에 대하여 얼음에 박밀 듯 피력했다신춘의 열정적인 연설은 대회에 참가한 군중들의 가슴에 뜨거운 물결을 일으켜주기에 족했다대대손손 착취와 빈궁의 멍에에 짓눌려 짐승보다도 못한 삶을 살아온 가난한 무권리 농민들로 놓고보면 이건 크나큰 경사였다군중들은 쏘베트정부의 성원들을 선출하고 구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을 단행했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국민당군벌정부를 타도하자!”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빈고농들에게 나누어주자!”

토지혁명을 실행하자!”

쏘베트수립을 옹호한다!”

수백명 군중들은 목터져라 구호를 부르면서 시위대렬에 뛰여들었다약수동학교의 소선대원들은 붉은넥타이를 날리며 행진하였다구호와 노래소리가 삽시에 약수동 하늘가를 진감하였다.

 

나가자 나가자 싸우러 나가자

용감한 기세로 어서 빨리 나가자

제국주의 군벌들은 죽기를 재촉코

강탈과 학살은 여지없이 하노라

 

시위대 군중들은 지주와 일제주구놈들의 집앞에서 더 힘차게 구호를 웨치면서 단결된 힘을 과시했다.시위는 사흘동안 계속되였다분노한 군중들은 죄악이 하늘에 사무치는 일제주구 몇놈을 붙잡아 처단했다그리고 고리대금업자들의 재물을 몰수하여 빈곤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그자들의 고리대문서와 소작료계약서를 들춰내여 불태워버렸다리경천 등 10명으로 조직된 농민적위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순찰하면서 농민들의 시위투쟁을 보위하였다.

약수동의 농민들은 쏘베트정부창립대회의 결의에 따라 “5.30”폭동의 거세찬 투쟁에 뛰여들었다폭동후 일제경찰들은 약수동에 덮쳐들어 100여명의 청년을 체포하였다약수동쏘베트정부는 일제의 련속부절한 탄압으로 활동을 전개할수 없게 되었다하여 약수동쏘베트정부는 창립되여 3일만에 부득불 지하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

쏘베트정부의 수립은 연변에서의 하나의 큰 사변이 아닐수 없다그러나 이것은 필경 중국공산당의경로선의 산물이였다이에 대하여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 ‘붉은 5월 투쟁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동원하여 일으킨 첫 번째 반제반봉건투쟁입니다이 운동을 통하여 많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습니다비록 성숙되지 못한 투쟁이였지만 이번 투쟁은 거쳐 중국공산당의 영향을 조선인군중가운데 파급시켰습니다이번 투쟁을 거친후 동북에서 처음으로 되는 쏘베트정권을 수립하게 되었습니다이 투쟁의 교훈은 경이였습니다경황없는 상황에서 진행하였기에 리론과 실천을 결부시키지 못한 오유를 피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중공연변제1차당원대표대회

 

약수동은 또 중공연변제1차당원대표대회가 열렸던 고장이기도 하다.

……

1930년 7중공연변특별지부 서기인 왕경(조선인)은 중공만주성위 비서장 료여원과 함께 연변으로 되돌아왔다료여원은 성당위의 파견을 받고 중공연변특별지부를 협조하여 원 조선공산당원들이 개인의 신분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는 일을 심사하러 왔던 것이다료여원과 왕경은 친히 각 현에 가 원 조선공산당원을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흡수하는 사업을 하였다이리하여 당시 연변의 중공당조직은 신속한 발전을 가져왔다이런 토대에서 7월하순 료여원과 왕경은 연길현 의란구 남동에서 중공연화중심현위건립준비사업에 관한 회의를 소집하였다회의는 6일간 열렸는데 도합 15명이 참석했다회의에서는 중공중앙의 동북에서의 조선인농민투쟁과 조선인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할데 관한 지시정신을 학습하고 구당위를 건립하고 당원대표대회를 선거하는 등 문제들을 연구하였다회의후 회의에 참석했던 당간부들은 각지에 내려가 연화중심현위의 건립을 위한 준비사업을 하게 하였다.

 

중공연변특별지부 서기였던 왕경은 친히 약수동에 내려가 평가구당원대표회의를 열고 주현갑을 서기로 한 중공평강구위를 건립하였다공산당조직에서는 약수동을 당사업의 토대가 매우 좋아 당의 회의를 열기에 아주 적합한 곳으로 지목하고있었다.

 

1930년 8월 13각지에서 온 당원대표들은 약수동 웃마을에 모였다대표대회의에서는 중공중앙의 지시에 따라 공산당의 책략과 총로선을 관철할데 대한 조치를 세우고 원 조선공산당 당원들을 중공당원으로 흡수한 사업을 총결하였으며 7명의 위원과 2명 후보위원으로 구성된 중공연화중심현위 지도기구를 선거하였다이들가운데는 원 중공연변특별지부 서기였던 왕경중공만주성위 특파원 박윤서마준원 조선공산당 당원이였던 김성도한별리용국의 전(양말제조로동자), (건축로동자), (빈민)씨 성을 가진 당원대표도 있었다중공연변연화중심현위 위원회 부서와 간부진영은 아래와 같았다.

 

서기 왕경(조선인), 조직부장 마준(조선인), 선전부장 한별(조선인), 군사부장 박윤서(조선인), 청년부장 리용국(조선인), 녀성부장 김여신(조선인)

 

중공연화중심현위는 중공만주성위산하 직속인 연변에서의 공산당의 최고기관이였다중심현위 산하에는 개산툰구위 등 10개 구당위와 61개 기층당지부가 있었으며 당원은 도합 480명 있었다.

 

중공연화중심현위에서는 농민운동을 힘껏 발전시키였으며 공산당조직과 공청단조직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농민협회 등 대중단체를 결성하여 토지혁명을 실행하였다그리고 적위대유격대 등 무장단체를 조직하고 혁명위원회를 건립하여 지방폭동을 구체적으로 지도하였다이리하여 같은 해 9월에 이르러 연변지구의 당산당원공청단원들은 근 천여명이나 되었고 여러 대중단체들에는 5000여명의 군중이 참가하였으며 이런 조직영향하의 군중들은 5만여명에 달하였다.

 

(김철호연변항일사적지연구)

 

새 사조를 받아들이고 항일무장투쟁에 나선 젊은 조선인들이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김일성 주석 주도로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선포하였는데인용문은 유격대창설을 준비하기 위한 조직사업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다만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당시 동북만주 일대에서 벌어진 일반조선인들을 반일 항쟁에 나설 수 있도록 활발하게 조직사업을 벌인 조직은 새 형의 투쟁방향을 설정한 젊은 조선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인용문에도 언급이 있듯이 약수동 소비에트정권을 담당했던 인물들이 거의 조선인들이었다는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물론 인용문에는 조직사업을 중공당에서 발기하고 조직했다고는 하지만 성원들 대다수가 조선인들이다당시 조선인들이 조선의 독립을 떠나 어떤 투쟁을 한 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더구나 당시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은 자신들이 받아들인 사상을 통해 혁명정신을 높이고 이를 통해 항일투쟁을 강력하게 벌임으로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불타고 있었다.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공연화중심현위 지도기구 선거에 참석한 사람들이나 선출된 사람들 모두가 조선인들이다물론 인용문은 1931년에 있었던 5·30 폭동8·1폭동을 일으키기 직전에 조직된 기구로서 위에서 언급된 조직원들은 당시 중공당에 입당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여기서는 이들이 저지른 좌경모험주의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이들이 조직에 가담을 하는 것은 자신들 개인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데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이 지향을 하는 것은 조선의 독립이었다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되어 민족 앞에 씻지 못할 죄악을 저지르게 된 투쟁가도 있다.

 

위 인용문에 나오는 이들 가운데 민족 앞에 씻지 못할 죄를 저지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원 조선공산당 당원 이었다라고 언급된 김성도이다김성도는 반민생단투쟁에서 심각한 오류를 범하였다그는 반민생단투쟁을 이끌면서 수많은 조선인 항일혁명투사들을 처형하였다그가 주도하여 처형한 항일혁명투사들은 유격대간부들도 많았으며 심지어 작식대원으로 있는 조선인 여투사들도 민생단원이라고 몰아붙여 처형을 하였다결국 김성도 자신도 민생단 혐의자로 몰려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본 내용은 이송덕 선생이 답사 길에 반민생단투쟁을 이야기 하면서 들려준 이야기 이다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인가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에 와서 투쟁을 하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인데 동족인 공산당 간부에게 아무런 죄도 없이 모략을 받고 처형을 당해야 한다니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인가.

 

연변조선족자치주 학술자료 인용문은 당시 항일혁명투사들이 일반 백성들 사이에 들어가 조직사업을 하고그 사업이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을 잘 알 수 있게 해준다물론 후일 조직성원들과 백성들을 폭동으로 내몰아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조직이 혹심하게 파괴가 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단 여기서는 논하지 않는다다만 초기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의 조직사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만 참고를 하면 될 듯하다더해서 당시 만주지역에서 치열하게 투쟁을 하던 조직성원들은 거의 조선인들이었다는 점이다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도 잊지 말아야 한다.

 

후일 젊은 조선인들은 5·30 폭동8·1폭동의 오류를 심각하게 고찰을 하였으며이를 토대로 다시는 이전과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하고 조직사업을 확대해 나갔다.

 

이제 젊은 조선인 항일투사들이 동북만주와 남만 그리고 조선북부국경일대에서 일반백성들을 상대로 벌인 조직사업에 대한 남쪽의 자료를 보도록 하자.

 

 

2) 조직구성에 대한 남측자료

 

남측에는 체계적으로 항일유격대 창건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서 동북만주와 남만 그리고 조선 북부국경 일대에 반일조직을 꾸리고조직 확대를 위해서 투쟁을 한 사실에 대해 정리된 자료가 거의 없다앞서 참고자료로 활용을 했던 이종석 전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의 논문이나 한양대 신용하 교수의 논문에는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위해 만주지역과 조선북부 지역에 반일조직을 내온 것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물론 항일유격대를 연이서 창설을 하여 치열하게 항일전을 벌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이 있다.

 

이렇게 남쪽 빈약한 남쪽 자료의 한계로 인해 본 문제에 대한 분석대상으로 인용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다만 이전 장들에서도 인용을 하였지만 필자가 소유한 자료 중 유일하게 서적자료 한 가지만 이에 대해 간략히 기술이 되어 있기에 인용을 한다아래에서 이에 대한 자료를 인용하기로 한다.

 

❝ …항일유격대가 결성되는 데서 중요하게 제기되는 문제는 광범한 민중과의 연계를 강화하여 튼튼한 대중적 토대를 닦는 것이었다.

 

유격전은 본질상 민중들의 적극적인 참가를 전제로 하는 민중전쟁이다민중의 적극적인 참가와지지 ·성원은 유격대의 끊임없는 확대 · 강화와 유격전의 승리를 보장하는 기본 조건이다유격대는 튼튼한 대중적 지반을 쌓고 민중과의 혈연적 연계를 강화할 때만 장기간의 간고한 투쟁에서 부딪치는 애로와 난관을 극복하고 최후의 승리를 달성할 수 있다.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은 대중과의 연계를 무시하고 유격활동을 단순한 군사활동만으로만 인정하려는 군사모험주의적 경향을 배척하면서 노동자농민을 비롯한 광범한 민중과의 연계를 밀접히 하며 그들과의 사업을 강화하였다.

 

(항일무장투쟁사남혀우대동신서. 1988년 8월 29. 135)

 

비교적 간략히 언급이 되어있지만 정확한 분석이라고 볼 수 있다당시 동북만주와 남만 그리고 조선 북부국경일대에 반일조직을 내오는 구체적 사례를 거론했다거나 그 수행과정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 당위성과 의미에 대해서는 비교적 정확한 안목을 가지고 분석하였다.

 

유격대가 유격투쟁을 벌이는 지역의 백성들과 광범위하게 그리고 혈연적으로 유대를 맺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유격대가 백성들과 혈연적 유대를 가짐으로서 다음과 같이 몇 가지의 유격투쟁에 필수불가결한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다.

 

첫째유격대원들을 끈이지 않고 보충할 수가 있다새로운 유격대원들이 보충이 되지 않는다면 초기 창설된 유격대원들이 영활무쌍하고 연전연승을 한다 해도 그 유격투쟁은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그 이유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단기간의 유격투쟁을 한다면 몰라도 그 기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는데 유격대원들을 보충할 수 있는 자원을 확보하지 않고는 장기간의 유격투쟁에 대해서는 생각 할 수 없다따라서 당시 유격대를 창건하려던 젊은 조선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정확히 인식하였으며, 본격적인 유격투쟁에 들어가기 위해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한 주요한 사업으로 정하고 치밀하게 조직사업을 벌였다.

 

둘째동북만주와 남만 그리고 조선의 북부국경일대에 거주하는 백성들 사이에 반일조직을 꾸리고 그 조직을 부단하게 확장해나가는 것은 넓은 지역에서 반일·항일유격투쟁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는 일본제국주의 침략군대인 일본관동군과 조선주둔 일본군이 유격대토벌에게는 매우 어려운 장애가 된다유격대가 넓은 지역에서 투쟁을 벌이게 되면 아무리 많은 수의 군대를 가졌다 해도 군사력에 분산을 가져옴으로서 효율적인 토벌을 할 수가 없다이는 결국 유격대 토벌의 실패를 가져오게 되며 그 결과는 일본제국주의 세력의 대동아공영권의 실현이 한 낮 개꿈으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이다.

 

또 유격대가 일부지역에서 활동을 한다면 그 유격대는 우세한 장비를 보유하고 있으며대병력을 거느린 일본군에게 쉽게 토벌을 당할 위험이 대단히 높다따라서 광범위한 지역에 유격대를 조직하고 유격투쟁을 벌이는 것은 필수이다이를 위해 넓은 지역에 유격대를 창설하고 투쟁을 해나가는데 지역 백성들과 치밀한 연계를 맺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셋째유격대가 유격활동을 하는 지역의 주민들과 혈연적 관계로 맺어지면 유격활동에 필요한 후방지원이나 원호물자를 일정 정도 조달을 할 수 있다물론 여기에는 이전 민족주의 독립운동단체들처럼 나라의 세금을 거두어들이듯이 강제로 모금 액수를 정하고 징수하는 방법을 동원했던 것이 절대 아니다.철저히 백성들의 자발적 참여를 원칙으로 하였다때로는 유격대원들이 백성들의 살림을 도와주고 보살펴주는 활동도 하였다유격대원들은 유격구내의 주민들과 한 집안 식구처럼 함께 농사도 짓고 연료문제도 해결하고 농경지도 개간을 하는 등 강대한 일본제국주의 침략군대에 맞서 투쟁을 하면서도 끈임 없이 백성들과 함께 하였다즉 실천 속에서 백성들과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넷째적들에 대한 비밀자료를 정탐해내는 등 정보자료를 획득할 수 있는 통로도 되었다일본제국주의 침략 군대들이 주둔하고 있는 각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적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관찰을 하였으며그 사실을 즉시로 유격대에 통보를 하였다물론 당시 유격대가 적들의 움직임을 포함한 적의 정보자료를 주민들에게만 전적으로 의존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유격대가 획득할 수 있는 정보와 백성들이 전해준 정보자료를 종합하여 적들과 맞서 유리한 상황에서 투쟁을 벌일 수 있었다는 말이다.

 

다섯째백성들을 반일조직에 내세워줌으로서 나라를 잃고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에 이주해와 힘들게 살아가는 조선인들에게 조국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신심을 안겨주는 것이다이는 조선인들에게 조국해방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유격대와 한 전호 속에서 싸울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뒷 장들에서 다루겠지만 유격대와 백성들이 한 전호 속에서 싸워 불리한 상황에서도 적들을 물리치고 연전연승을 거둔 사례는 수없이 많다이미 다루었던 유격대의 내도산 전투도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여섯째일정 기간을 정해놓고 짧은 기간에 벌이는 유격투쟁이 아니기에 전투를 벌이는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들과 하나로 뭉치는 연계관계는 필수적이다장기간 벌이는 유격투쟁에서 지역주민들과 혈연적 관계로 연계가 되는 것은 유격대에게는 마르지 않는 샘물을 공급하는 물 원천을 가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위에서 이미 예를 든 것처럼 장기간 유격투쟁을 벌이기 위해서는 유격대원들이 끈이지 않고 보충이 되어야 하며비록 그것이 크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후방지원과 원호물자의 끈임 없는 지원은 일정한 기간을 정하지 않고 장기간 투쟁을 하는 유격대에게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이 유격대를 창설하기 전에 그 준비과정으로 백성들 사이에 반일조직 사업을 적극적으로 내밀었던 이유가 바로 위와 같은 것들이다바로 남측 자료는 비록 짧기는 하지만 위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이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3) 반일조직 사업에 대한 북측 자료

 

이제 반일조직 사업에 대한 북측 자료를 보기로 하자.

 

❝ 우리는 무장대오를 꾸리는데서 사람과 무기를 가장 중요한 두가지의 필수적요소로 보았다그런데 우리한테는 이 두가지가 다 부족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사람이란 군사정치적으로 준비된 인간을 의미한다우리한테는 정치를 알고 군사를 아는 사람조국과 인민을 위해 장기간 무장을 들고 싸울 준비가 되여있는 그런 청년들이 필요하였다.

 

우리는 한해반사이에 조선혁명군의 골간들을 거의다 잃어버리였다김혁김형권최효일공영리제우박차석과 같은 혁명군의 주력이 한해사이에 모두 전사하거나 감옥행을 한데다가 1931년 1월에는 중대장으로 활약하던 리종락이마저 조선혁명군과 관련된 소책자를 가지고 무기공작을 하러 가다가 김광렬장소봉박병화와 함께 일본령사관 경찰에 체포되였다군사물계에 밝은 김리갑도 감옥에 끌려갔고 백신한은 전사하였다최창걸과 김원우는 어떻게 되였는지 소식조차 알길이 없었다.

 

혁명군의 나머지력량가운데 군사경험이 있다는 대원들은 손가락으로 꼽을수 있는 정도였는데 얼마 안되는 그 대원들마저도 군중정치공작에 돌리다보니 무장대오에 망라시킬수 없었다내가 안도에서 유격대를 내오느라고 바쁘게 뛰여다닐 때 내곁에 있은 조선혁명군출신의 청년은 차광수 한사람뿐이였다.

 

국가권력을 쥐고있는 사람들 같으면 동원령이나 의무병력제와 같은 법으로 필요한 군사인원들을 손쉽게 충당할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런 방법으로 사람들을 모집할수 없었다법적장치나 물리적힘으로써는 대중을 혁명에 동원시키지 못한다한때 상해림시정부는 모든 국민들이 납세병역징발에 응할 의무를 지닌다는 조문을 헌법에 박아넣었지만 인민들은 그런 법이 채택되였다는것조차 모르고있었다국권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남의 나라 조계지 한구석에 앉아 국권을 행사하는 망명정부의 법이나 지령이 효과를 낼수 없다는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리치이다.

 

식민지민족해방혁명에서는 동원령이나 의무병력제와 같은 법적수단으로 사람들에게 총을 메울수 없다이 혁명에서는 혁명을 령도하는 수령과 선각자들의 호소가 법을 대신하며 매개 사람들의 정치도덕적자각과 전투적열정이 참군을 결정하게 된다대중은 그 누구의 요구나 지령이 없어도 자기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스스로 총을 멘다이것은 자주성을 생명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여있는 인민대중의 본성적행위이다.

 

우리는 이런 원리에 기초하여 안도와 그 주변에서 유격대에 망라시킬 대상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적위대소년선봉대로동자규찰대지방돌격대와 같은 반군사조직들에는 참군을 요구하는 끌끌한 청년들이 많았다추수춘황투쟁의 폭풍속에서 반군사조직들은 급속히 확대되였고 그 폭풍의 한복판에서 청년들도 몰라보게 성장하였다.

 

……

 

우리는 상비적인 혁명무력을 건설하기 위한 준비사업을 다그치면서 항일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을 축성하는 사업에도 특별한 관심을 돌리였다인민대중을 실천투쟁속에서 끊임없이 각성시키고 단련시켜 그들을 항일전쟁에 튼튼히 준비시키는것은 우리 혁명발전의 필수적요구였으며 광범한 대중이 자각적으로거족적으로 동원되는 여기에 바로 최후승리의 담보가 있었다.

 

1930년의 전례없는 흉작과 그에 따르는 혹심한 기근은 우리가 동만에서 추수투쟁에 이어 새로운 대중투쟁을 벌릴수 있는 조건을 지어주었다우리는 추수투쟁을 통하여 앙양된 군중의 투쟁기세를 늦추지 않고 일제와 친일지주들을 반대하는 새로운 춘황투쟁을 벌리도록 하였다춘황투쟁은 지주에게 쌀을 꾸어달라는 차량투쟁으로 시작되여 일제와 친일지주들의 량곡을 몰수하는 탈량투쟁으로일제의 앞잡이들을 청산하는 폭력투쟁으로 급격히 발전하였다.

 

춘황투쟁의 불길속에서 동만지방인민들을 혁명화하는 사업은 새로운 높이에로 발전하였다혁명에 대한 반혁명의 공세가 그처럼 악랄해지고있는 환경속에서도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대중속에 깊이 들어가 인내성있게 그들을 계몽하고 교양하였다대중단체들은 관문주의의 틀을 마스고 문을 활짝 열어놓았으며 대중을 실천투쟁속에서 부단히 단련시키였다.

 

그러나 이 사업이 어디서나 순풍에 돛단것처럼 그렇게 헐하게 진행된것은 아니였다한 마을을 혁명화하는 과정에 여러명의 혁명가들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참기 어려운 수모와 불신을 당하면서도 자기가 혁명가라는것을 밝히지 못하고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푸르허마을에서 겪은 체험도 바로 이런 경우에 속한다고 말할수 있다.

…… (푸르허 마을에서의 머슴꾼 노릇에 대한 자료는 이미 올려주었기에 여기서는 인용하지 않는다.)(세기와 더불어 중에서 푸르허마을 혁명화)

 

혹 위의 자료를 참고하고자 하면

[항일연재 8]반일조직 구성을 위한 푸르허에서의 "머슴살이일화를 보기 바란다.

→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24575&section=sc46&section2=>

 

북측 자료에 인용된 내용 중에서 추수·춘황투쟁에 대해서도 이미 [항일연재3] 1930년 "5.30폭동""8.1폭동"이 조선인들에게 끼친 참혹상에서 상세히 다루었다. [항일연재3]을 보지 못한 독자들은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24150&section=sc46&section2=>

 

인용문을 보아 알 수 있듯이 그나마 어렵게 꾸려왔던 조직은 1931년 극단적 좌경모험주의 노선을 걷고 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 사적 목적 실현을 위하여 조선백성들을 5·1폭동과 5·30폭동》 그리고 8·1폭동을 내몰게 됨으로서 혹심하게 파괴되었다조직을 이끌던 지도자들 뿐 아니라 대부분의 조직원들이 처형을 당하거나 철창 속에 갖히었으며 다행히 잡히지 않은 조직원들이라 할지라도 모두 도망자의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이렇게 혹심하게 파괴된 조직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당시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 지도자가 걸었던 길은 얼마이며 위험을 무릅쓴 사지판을 넘나든 것은 또 얼마였던가위 인용문은 이를 그저 함축적으로 표현을 한 것이지 구체적으로 기술하지는 않았다또 그 과정에서 희생된 항일혁명동지들은 몇이었던가물론 인용문에는 김혁김형권최효일공영리제우박차석 … 리종락” 등 주요인물에 대해서만 언급을 했지만 실제 혁명의 길에 나섰던 반일·항일투사들의 희생을 어찌 한 두 마디의 필설로서 다 나열을 할 수 있겠는가.

 

참고로 위에 든 예 가운데 박차석과 리종락은 중도 배신을 하고 후일 김일성 주석이 투항할 것을 회유하기 위해 일제의 개가 되어 사령부에 침투를 하였다박차석은 그나마 자신의 잘 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죄를 하였지만 리종락이는 끝내 자신의 반역죄를 합리화 하면서 끝까지 김일성 주석을 회유하려고 하였다이에 격분을 한 유격대원들에 의해 처단을 당하고 만다물론 세기와 더불에는 처단을 했다고 직접적으로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유격대원들이 격분하여 처리를 하였다고 하여 민족의 반역자 리종락이를 처단하였음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리종락이와 박차석은 김일성 주석이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화전에 설립한 화성의숙을 다닐 때 함께 수학을 하던 동료이자 1926년 10월 17일에 있었던 《ㅌ·ㄷ》의 성원이기도 하다또 리종락이와 박차석은 독립군에서 활동을 한 독립운동가출신이기도 하다이러한 자들이 민족을 배신을 하고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개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이와 같이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위한 그 준비과정은 대단히 험난했다적들과의 직접적인 싸움에서 수많은 동지들이 희생을 당했으며일부는 일본 영사관 경찰들에게 체포를 당하였고게 중에는 일시적 난관을 이겨내지 못하고 적들에게 투항을 하고 예전의 동료들에게 총을 들이대는 배신자들로 나왔다얼마나 간고했던가에 대해 굳이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다이에 대해 인용문은 우리는 한해반사이에 조선혁명군의 골간들을 거의다 잃어버리였다김혁김형권최효일공영리제우박차석과 같은 혁명군의 주력이 한해사이에 모두 전사하거나 감옥행을 한데다가 1931년 1월에는 중대장으로 활약하던 리종락이마저 조선혁명군과 관련된 소책자를 가지고 무기공작을 하러 가다가 김광렬장소봉박병화와 함께 일본령사관 경찰에 체포되였다.”라고 하여 그 과정이 얼마나 간고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난관앞에 주저앉을 젊은 조선인들이 아니었다. “대중은 그 누구의 요구나 지령이 없어도 자기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스스로 총을 멘다… 우리는 이런 원리에 기초하여 안도와 그 주변에서 유격대에 망라시킬 대상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적위대소년선봉대로동자규찰대지방돌격대와 같은 반군사조직들에는 참군을 요구하는 끌끌한 청년들이 많았다추수춘황투쟁의 폭풍속에서 반군사조직들은 급속히 확대되였고 그 폭풍의 한복판에서 청년들도 몰라보게 성장하였다.”라고 하여 당시 젊은 조선인 반일·항일투쟁가들은 부딪히는 어려움과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끈임 없이 가열 차게 조직을 내오기 위하여 투쟁을 벌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 1931년 가을과 1932년 봄에 벌어졌던 추수·춘황투쟁에서 고양된 백성들을 반일의 대오에 묶어 튼튼한 유격대지지 세력으로 키워나갔다이에 대해 인용문은 우리가 동만에서 추수투쟁에 이어 새로운 대중투쟁을 벌릴수 있는 조건을 지어주었다우리는 추수투쟁을 통하여 앙양된 군중의 투쟁기세를 늦추지 않고 일제와 친일지주들을 반대하는 새로운 춘황투쟁을 벌리도록 하였다.”고 하여 백성들이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맞서 투쟁을 할 수 있도록 지도하였음을 기술하고 있다이는 곧 유격대창건에 필수 요소인 일반백성들의 반일단체조직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성들을 반일조직에 묶어 세울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유격대원들 스스로 실천하는 실천투쟁에 있다이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도 간단히 언급을 하였다인용문은 인민대중을 실천투쟁속에서 끊임없이 각성시키고 단련시켜 그들을 항일전쟁에 튼튼히 준비시키는것은 우리 혁명발전의 필수적요구였으며 광범한 대중이 자각적으로거족적으로 동원되는 여기에 바로 최후승리의 담보가 있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일반백성들이 유격대와 혈연적으로 묶여질 조건은 그들에게 그 어떤 강압을 쓴다거나 회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유격대원들 스스로 그들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호흡을 하고 하나가 되는 실천투쟁을 함으로서 유격대에 망라되는 것이 자신을 지킨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바로 이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 김일성 주석 푸르허 마을에서 머슴살이 일화인 것이다이 말은 대중을 혁명화하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푸르허 마을을 혁명화 하는데 얼마나 힘들었으면 지도자가 직접 머슴으로 가장하고 들어가 주민들을 반일·항일혁명화를 했겠는가.

 

푸르허 마을 혁명화 과정에 대한 자료를 보면 마치 단편소설 한 편을 보는 듯하다그것도 웃음을 자아내는 그러나 웃음 보다는 눈물이 먼저 앞을 가리는 간고한 투쟁을 형상화 한 단편 희곡 소설 같다우리 조상들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얼마나 간고한 투쟁을 했는지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일화이다필자는 푸르허 마을 혁명화 과정에 대한 자료를 보면서 웃음눈물비장함이 동시에 깊은 심연으로부터 솟아오른다.

 

인용문은 푸르허 마을 하나의 예만 들었을 뿐이지 나머지 지역을 혁명화 하는데 그만한 어려움이 없었겠는가결코 아니다이미 앞선 답사기에서 다루었지만 흥륭촌을 일치된 하나의 반일조직으로 묶어세우는데도 얼마나 어려웠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이렇듯 당시 동북만주와 남만 그리고 조선북부국경일대에 반일조직을 내오는 것은 간고한 투쟁이었다.

 

당시 젊은 조선인들이 백성들 사이에 내온 반일 조직으로는 아동단소년단공청반일부녀회적위대,소년선봉대노동자 규찰대지방 돌격대 등이 있었다그 조직은 나이와 종사하는 분야에 따라 매우 다양하였다이와 같이 다양한 조직이 성장을 하면서 항일유격대를 지원하고 원호하였으며유격대원을 공급하는 풍부한 원천이 되었다.

 

→ 《계속

 

자료제공연변항일독립운동역사학자 이 송덕

사진제공이 창기 기자

 

 

 

 

※※※애독자 여러분께 양해를 구합니다.※※※

그동안 주2회씩 하던 [항일연재]를 필자 개인사정으로 인해 주 1회(수요일)만 연재합니다.

애독자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과 애독을 부탁드립니다.

 

2015년 1월 5

이 용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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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피땀으로 지은 집을 바칩니다"

[최후의 진술 - 박흥숙 편 ②]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 그의 놀라운 최후진술서
16.01.05 10:57l최종 업데이트 16.01.05 10:57l글: 이정환(bangzza) 편집: 홍현진(hong698)

모 든 법정 최후 진술에는 사람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떤 사건이 나와는 상관없는 뉴스라거나 케케묵은 역사책 속에나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한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들의 최후 진술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위치가 어디쯤인지도 가늠해보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
'최후의 진술-박흥숙', 1편에서 이어집니다.

스물아홉 청년이 이제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노신사가 됐다. 위인백(68) 5.18 교육관 관장이 말했다.

"좀 볼 수 있겠습니까."

A4지로 15매 분량의 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서 사본을 건넸다. 그로서는 37년 만에 다시 마주한 문서, 감회가 남다른 듯했다. 잠시 인터뷰를 멈췄다. 위 관장은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 그간 안녕하시옵니까. 가내 계절에 균안을(두루 편안하길) 복망하오며 이 글월을 올리나이다. 주제넘게도 제가 저 자신만은 능히 책임 지을 수 있다고 자부해 왔는데, 이렇게 큰 우를 범하고 보니, 동정을 받아야 하는 현실 앞에서, 그리고 동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애매할 정도로 변호사님과 많은 분들에게 폐를 끼치고 있으니 우물 안 개구리였던 저는 그저 송구할 뿐입니다. 박흥숙 올림."

"박흥숙 사건 유일한 생존자를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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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5월 방영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무등산 타잔 박흥숙'편. 당시 박흥숙이 재판정에 들어서는 모습.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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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4월 20일, 광주 무등산 덕산골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무허가 집들을 철거하던 철거반원 두 명이 쇠망치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또 다른 두 명 역시 병원으로 옮겼지만 숨을 거뒀고, 단 한 사람만이 겨우 생명을 건졌다.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 또 누군가의 아들이었을 그들은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결코 용서받지 못할 범죄를 저지른 이는 박흥숙. 그때 나이 23세, 세상을 경악하게 만든 사건의 주인공이라고 하기에는 평범한 쪽에 속하는 청년이었다.

전과는 없었으며 그의 체구는 오히려 왜소한 편에 속했다. 165cm가량의 작은 키, 자그마한 체격의 그가 어떻게 건장한 상대들을 제압하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는지,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다.

쇠 파이프로 만든 사제 총으로 위협했다고 했다. 평소 무예를 익히고 칼 던지기 등 십팔기에도 능숙하다고도 했다. 태권도에, 유도, 기합술까지 두루 섭렵한 무예의 고수라고 했다. 사실보다는 거짓, 그리고 허구에 더 훨씬 가까운 이야기들이 연일 신문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언론은 그에게 '무등산 타잔'이란 별명을 갖다 붙였다.

1977년 9월, 1심에서 박흥숙은 살인 및 살인 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다음 해 2월 광주고법은 항소를 기각했고, 그로부터 3개월이 흐른 5월 9일 대법원 형사부는 원심대로 사형을 확정 짓는다. 그리고 1980년 크리스마스이브, 박흥숙은 사형을 당한다. 위인백 5.18 교육관 관장은 2심 재판 당시 박흥숙의 변호를 맡았던 이기홍 변호사의 사무장으로 일했던 사람이다.

먼저, 그는 의외의 사실을 전했다. 당시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김아무개씨와 잘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했다.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후, 지금까지 교류하고 있으며 사건 이야기도 나눈 적이 있다고 했다. 위 관장은 "아주 바르고 좋은 사람"이라며 "그때 자기가 안 죽은 것이, 유도를 오래 해서 외부 충격을 더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같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37년 만에 다시 읽은 최후 진술서, 그의 반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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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등산 타잔' 박흥숙의 현장 검증 모습
ⓒ 보도사진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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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렇기에 위 관장이 박흥숙 사건을 지금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더 궁금해졌다. 한때 사형만은 면하게 하려고 사방팔방 뛰어다녔던 사람,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바로 그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와 보낸 사람. 하지만 일단은 참아야 했다. 그가 최후 진술서를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나는 무등산 덕산골에 살며 77년 4월 28일 철거반 공무원 피습 사건의 주인공으로 '한국판 이소룡', '무등산 독수리', '무등산 타잔' 등등 수많은 악의 대명사를 걸머진 그야말로 끔찍하고 흉악무도한 살인마로 알려진 박흥숙이다.

신성한 이 자리를 빌어 저의 지난날을 뼈저리게 뉘우치고 저의 울분 때문에 아깝게 희생돼버린 그분들의 영령을 위로하며 삼가 명복을 빈다. 또 많은 물의를 일으켜 국민 여러분에게 죄송하고, 유가족 여러분에게 너무나도 큰 죄를 지었다.

사 랑하는 부모, 사랑하는 자식, 사랑하는 형제를 잃고 애통해 하는 유가족들의 모습이 자나 깨나 눈앞에 어른거려 날이 갈수록 괴롭고 괴롭다. 나의 죄는 죽어 마땅하리다. 그 애통해 할 유가족들을 생각한다면, 그 어디에 댈 수 없는 커다란 슬픔을 안긴 유가족들을 생각한다면, 어찌 백번 죽는다 한들 죄 닦음이 다 될 수 있겠으며 무슨 말로 위로의 말씀을 드릴 수 있겠는가. 그저 죄송하고 죄송하다.

그러기에 이렇게 신성한 자리에서 재판장님께 나의 고충 일부나마 말씀드릴 수 있게 해준 데 대해 나라와 국민 앞에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서)

이 제부터 위 관장과 함께 박흥숙의 최후 진술서를 읽어 내려가려 한다. 되도록 원문 그대로 소개할 것이며, 이해가 다소 어려운 문장에 한해 일부 수정했다. 그리고 사건의 배경, 진술서에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 행간에 나타나지 않는 의미 등을 그때그때 덧붙이는 방식을 선택해 봤다.

이를 위해 1977년 월간 <대화>에 실렸던 '무등산 타잔의 진상' 르포, 르포에 실렸던 박흥숙의 일기, 2005년 방영됐던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무등산 타잔 박흥숙 편', 유경남(전남대 사학과 박사 과정 수료)씨가 쓴 논문 '1970∼80년대 무등산 개발 사업과 그 내파' 등을 참조했다.

또한 박흥숙의 동생 박정자씨, 박흥숙 구명운동에 나섰던 노영숙 오월 어머니집 사무총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유일한 생존자 김아무개씨는 인터뷰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했음도 밝힌다.

그리고 '지금' 위인백 관장은 박흥숙의 최후 진술서를 읽고 있다. 잠시 진술서에서 눈을 뗀 위 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포승줄에 묶여 재판정에 나오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요."

다시 이어지는 침묵,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미친 정신병자의 개소리라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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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서 사본. 그의 글씨는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사람의 그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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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인이야 어떻게 됐든 죄의 대가를 달게 받아야 하는 중죄한 몸으로써 무슨 말이 필요하겠으며 무슨 말을 더할 수 있겠는가. 구구한 변명이 앞선다는 것은 X달린 사내자식으로 도저히 취할 바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도 잘 알고 있으며, 이 말씀을 드리는 나 자신이 온전한 정신인지, 미친 것인지, 극과 극의 현존하는 현실에서 오락가락하는 '내 정신을 나도 모르겠다(원문 : 내가 알 바 아니다)'.

미친 정신병자의 개소리라 해도 좋고, 빗나간 영웅심의 궤변이라 해도 좋다. 또한 나 자신이 바라는 바이다. 하오나 다음에는 이 같은 불상사가 되풀이되지 않는다면 죽어 가는 몸으로써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서)

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서를 접하고 먼저 놀랐던 건 그의 글씨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사람의 그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논리의 정연함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소개하는지에 대해서는 인색했다. 단지, 자신이 지금, 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집중하고 있었다.

박흥숙의 2심 재판 당시 변호를 맡았던 이기홍 변호사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통해 "여러 사람을 희생시켰으니 마땅히 나는 죽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해달라는 식으로 그렇게 진술했었다"고 말했다.

위 관장도 역시 "법정에서 이야기하는 걸 보면, 주눅이 들거나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재판 결과에 대해서는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며 "자기 논리가 딱 정리가 됐던 사람"으로 박흥숙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래서 박흥숙이 최후 진술서에 "이 같은 불상사가 되풀이되지 않길 바란다"고 쓴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려 네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자신의 사건을 '불상사'로 표현했다. 그는 왜 이렇게 적었을까. 최후의 진술, 그다음 페이지에 실마리가 나와 있다.

"어머니, 이 집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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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흥숙의 어린 시절 모습
ⓒ 백상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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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사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그날그날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그야말로 영세민들에게는 안식처가 될 보금자리가 사활에 관계된다 해도 절대로 과언은 아닐 것이다.

우 리가 처음 영광에서 그곳 덕산골로 이사를 했을 때는 그 마을 산지기로 있는 이모네를 연줄로 하여 남의 집 셋방살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그도 말 못할 불행이 생겨서 어머니와 나와 동생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야 했고 나는 돼지 움막보다도 못한 보잘 것 없는 집이지만 짓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방 한 칸 의지할 데가 없어서 남의 집 변소를 들여다보지 않고, 남의 집 처마 밑을 들여다보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지금 말씀드리는 나의 고충, 조금이라도 이해하시기 어려우시리라. 내가 처음 집을 지을 당시 허가 없이 지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곳이 개발 제한 구역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며, 또 그 당시 어린 시절은 그런 것에 무관심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서)

박흥숙은 전남 영광군 노은 부락에서 1954년(주민등록상으로는 1957년)에 태어났다. 4남 1녀 중 둘째,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가난의 '뿌리'는 그로부터 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찾을 수 있다.

박흥숙의 동생 박정자(60·여)씨는 "증조할아버지가 동학난 때 영광군 동학군 대장을 하셨고, 관군에게 총을 맞고 돌아가셨다"며 "그때 집안이 완전히 풍비박산됐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가난에 가난이 더해진 것은 박흥숙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바로 다음 해에는 다섯 살 터울의 형마저 일찍 세상을 등졌다. 박흥숙은 어머니를 지키고, 남동생 둘과 여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 의 어머니는 식모 생활을 하기 위해 전북 내장사로 떠났고, 여동생 역시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박흥숙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점 점원으로, 열쇠 수리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단지, 먹고살기 위해,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박흥숙이 스무 살이 되던 해, 그는 한 가지 결심을 한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집을 짓기로 한 것이다. 광주 천변에 판자촌도 구할 수 없는 상황, 박흥숙의 눈길이 간 곳은 무등산. 계곡 입구에서도 30여 분을 더 걸어 올라가야 하는 덕산골 산등성이었다.

그곳에 박흥숙은 집을 짓기 시작했다. 박흥숙 이웃 주민 박승운씨에 따르면 "흙과 돌로 벽을 세우고, 지붕은 고물상에서 양철을 사다 만들고, 벽지는 밀가루 부대나 신문 같은 걸 주워다 바른", 말이 집이지 움막 수준의 거처였다.

하 지만 일을 해 가면서 집을 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박흥숙은 60여 일 동안 굶주려 가며 그 집을 지었다고 한다. 집을 짓다 쓰러진 그를 이웃 주민이 발견한 적도 있다고 했다. 1974년, 한 해를 보내면서 쓴 그의 일기에는 집을 짓는 과정에서 느꼈던 고통과 환희가 그대로 나타나 있다.

"고요한 적막 속에 새로운 생명 하나가 꿈틀거린다. 이제 괴롭고 어둡던 갑인년(1974년)은 나에게 많은 시련을 안겨주며 영원히 사라져 갔다. 만물은 조용히 우주 철칙에 따르고 유수는 주야로 쉬지 않고 흐른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어둡고 쓸쓸했고 고독했던 지난 12개월, 모두가 무정했고 한편 보람있는 시간들이었다. 나에게는 둘도 없는 인생의 클라이막스였다. 나는 울었고 쓰러져서 울었고,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조그마한 과실을 얻었다...(중략)

...내 집을 짓기 시작했다. 먹고 싶은 것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손이 부르터 피가 흘렀으나 약이 없어 바르질 못했다. 이숙네 후원으로 어느 정도 일을 끝냈다. 조그맣고 보잘것없는 집이었으나 어머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나는 집 일을 끝낼 때까지 도와준 순석이, 이숙, 이모에게 감사를 드리며 이 집을 어머님에게 바쳤다."

박흥숙이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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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5월 방영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무등산 타잔 박흥숙'편에서 소개한 사건 직후 현장 모습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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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족들을 함께 모여 살게 해 주는 공간, 집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비록 보잘것없는 형색이었지만 그래도 박흥숙 가족에게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동생 박정자씨는 인터뷰에서 "나와는 세 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도 오빠는 어른 같고 난 아기 같았다"며 "가난했어도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살 수 있었던 그때가 그래도 참 행복하고, 제일로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했다. 박흥숙은 그 집에 대해 최후 진술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중에사 모든 사실을 알았지만 당장 이사갈 여유도 없었고, 참, 피와 땀의 결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고생 고생 그 고생을 해서 지은 집을 차마 내 손으로 부술 수는 도저히 없었다. 당국에서도 지난겨울 1차 계고 당시까지는 집을 지은 지 5∼6년이 지나도록까지 말 한마디 없었으며 우리들도 그처럼 그런 산골에까지 계고장이 나오리라고는 신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예전에 미처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렇다고 자진 철거하라는 당국 명령을 받고 이를 묵인하여 그냥 주저앉아 있지만은 않았었으며 그 마을 모두가 그렇듯이 시내로 나가 방을 알아도 보았고, 또 어디 적당한 곳에 (천)막 칠 자리라도 없나 하고 몇 날을 두고 찾아 돌아다녀 보기도 하였다. 또 그 옆 마을 신림 부락 그런 종이쪽지가 7회나 나왔어도 아직껏 무사하다고 하기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고 설마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새 삼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시겠지만 지지난 겨울의 추위는 50년 만에 처음 있는 추위로 보리가 다 얼어 죽었을 정도며 4월 초까지 눈이 왔고 눈이 쌓여 있었지 않았는가. 추위에 떨고 가난에 떨어야 했던 그 산골에서는 이 혹독한 추위 때문에 '날씨가 풀릴 때까지(의역, 원문은 해풍해지도록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것이다." (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서)

박 흥숙이 "나중에야 알게 된 모든 사실", 그중 하나는 1972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무등산에 대한 본격적인 개발이 이뤄지는 시점에 가족들의 보금자리를 그곳에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케이블카 설치 계획까지 세워지면서 관광객들의 눈에 보이는 무허가 움막들은 당연히 철거돼야 하는 장애물들이었다는 점도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와 관련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광주 무등산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고 있다. 지난 72년 5월 전남 공고 제85호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무등산은 도립공원으로 지정만 됐을 뿐 그동안 방치됐었는데 작년 봄부터 광주 지구 5개년 개발 사업의 첫 단계 사업으로 착공, 관광 포장도로가 개설됐고 김덕령 장군의 묘역 성역화가 이뤄져 훌륭한 관광지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 호남 지방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무등산 관광 케이블카가 내년 말까지 설치돼 호남의 명산 무등산은 이제 새로 각광을 받게 됐다." (1975년 5월 21일자 동아일보)

가난에 떨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이 나라는...

그리고 박흥숙이 나중에야 알게 된 또 하나의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이 나라가 가난에 떨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냉혹하다는 것이었다. 위 관장이 다시 침묵을 깼다.

"시간, 되시나요?"

37년 만에 마주한 박흥숙의 최후 진술, 다 읽어보고 싶다는 뜻이었다. 다시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 '최후의 진술-박흥숙', 3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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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세계 최강대국은 바로 중국"

 

[유라시아 견문] 일대일로의 사상 ① : 지리 혁명과 공영주의(上)
이병한 역사학자 2016.01.05 06:10:04
중국학파

후안강(胡鞍鋼)을 만난 것은 2015년 5월이다. 내몽골 견문을 마치고 베이징에 들렸다. 초면은 아니었다. 2013년 태평양 건너 샌디에이고에서 처음 만났다. AAS(Association for Asian Studies) 회의장에서 '슈퍼 차이나'에 대한 호기로운 발표를 들었고, 저녁 리셉션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겨우 5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다.

그는 중국학계의 거물, 말을 섞고 싶어 하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나를 기억할는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지도 교수 이름을 팔았다. 중국에서 드물게 알려진 한국 지식인 가운데 한 분이다. '유라시아 견문' 연재도 보태었다. 일대일로에서 촉발된 기획이라며 인터뷰를 꼬드겼다. 일대일로의 밑그림을 그린 장본인이 바로 후안강이기 때문이다. 2013년 12월 국무원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2014년 1월 신장의 대학 학술지에 그 내용을 발표했다.

그를 신좌파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나는 회의적이다. 신좌파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신좌파, 자유주의파, 신유가 등으로 접근하는 중국 사상계의 분류법이 얼마나 적절한지 의문이다. 관성적이고 타성적이다. 나는 통으로 '중국학파'가 등장하고 있다고 본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학술 독립과 학문 자립이 진행 중이다.

아편 전쟁 이래 150년, 서학(자유주의)과 북학(사회주의)의 수용을 마치고 사상의 자력 갱생을 이루어 간다. 남방의 불교와 서역의 이슬람교를 수용한 끝에 宋學(송학)이 등장했던 1000년 전처럼, 동/서구의 좌/우를 포용하고 '中(국)學'을 회복해가는 것이다. 사상 면으로는 왕후이, 외교 쪽으로는 옌쉐퉁, 경제 방면으로는 후안강 등을 대표 격으로 꼽을 수 있겠다. 공히 학자이면서도 책사 역할도 하다. 그래서 재야의 '비판적 지식인'도 관방의 '어용 지식인'도 아닌 중국 특색의 '공공 지식인'의 전범을 확립해간다.

후안강은 1953년생이다. 신중국 수립 직후인 1950년대 태어난 이들의 특별한 세대적 경험이 있다. 10대에 문화 대혁명을 체험한다. 변방의 오지와 농촌으로 하방되었다. 20대에는 개혁 개방을 경험한다. 구미 유학 1세대이다. 즉, 세계 체제의 밑바닥부터 꼭대기까지를 20년에 걸쳐 두루 망라했다. 그래서 시야가 넓고 깊다.

학-석-박사를 상아탑에서만 곱게 보낸 이들과는 꽤나 다르다. 후안강은 중국에서 공학 박사를 마치고,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공학과 사회과학의 겸비, 그래서 '사회공학자'에 가깝다. 그가 집필한 책들은 각종 통계와 도표와 그래프로 가득하다. 자료를 집대성하고 재편집하는 '정보 디자이너'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이념적 편견이 덜하고, 인상 비평에 그치지도 않는다. 논증은 꼼꼼하고, 주장은 과감하다.

그가 칭화(淸華)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전공도 '공공관리학'이다. 행정학에 경영학을 결합시킨 학문이다. 송대 이래 중국의 천 년 관료제에 20세기 미국의 발명품인 경영학을 접목시켰다. 마흔 살에 집필한 <중국국가능력보고>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그 후 20년이 넘도록 국정 개혁 전반에 깊숙이 개입하고 조언해 왔다.

2000년부터는 중국 내정을 연구하는 칭화 대학교의 국정연구원 원장을 맡았다. 본인이 중국공산당 18차 전국 대표 중의 한 명이기도 하다. 이렇게 대학 캠퍼스와 중난하이(中南海)를 오가며 작성한 보고서들은 중국의 최고 지도자들이 필독하는 핵심 문헌으로 유명하다. "슈퍼 차이나", "중국몽",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 "일대일로", "신상태" 등 최근에 널리 회자되고 있는 개념과 조어 또한 그의 보고서에서 비롯되었거나 구체화되었다.

인터뷰는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지난 5월의 대면 인터뷰를 시작으로, 신장과 운남에서 두 번의 이메일을 주고받았고, 집필 직전에 한 번 더 이메일 인터뷰를 했다. 네 번의 온/오프라인 인터뷰를 대화 형식으로 재구성해 소개한다.
 

▲ 후안강 중국 칭화대학교 교수. ⓒ이병한


대사(大事)와 대전략(Grand Strategy)

이병한 : 칭화 대학교는 베이징에 올 때마다 들렸던 학교입니다만, 국정연구원은 처음 와봤습니다. 연구소 소개부터 시작해 볼까요?

후안강 : 지난 2000년에 설립되었습니다. 올해(2015년)로 15년 되었네요. 그간 다양한 국가 프로젝트를 수주 받아 연구를 진행해 왔습니다. 중국의 국가 경영에 '칭화의 목소리'를 반영해 왔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해 학문의 전문화, 체계화, 고급화도 이끌어 왔다고 자부합니다. 이론과 실무를 겸장한 박사와 박사후 연구원들을 다수 배출했습니다. 국가의 大事(대사)에 깊이 참여하는 고급 인재들을 집중적으로 양성해 온 것입니다. 실천적 학술 연구를 통하여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에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병한 :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시장 경제"라는 말도 이곳에서 제출한 개념이라고 들었습니다.

후안강 : 아닙니다. 덩샤오핑이 이미 말했던 바 있습니다. 다만 국정연구원이 그 개념을 더욱 구체화하고 이론화했다고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

이병한 :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후안강 : 어떤 경제 체제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나름의 장점이 있고, 또 단점도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 가장 이상적인 것은 없습니다. 가장 적합한 것이 있을 뿐입니다. 중국의 경제 기적은 그렇게 발생한 것입니다. 중국은 소련도 미국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소련형 사회주의도, 미국형 자본주의도 아닙니다. 중국의 국정과 정치 문화에 적합한 '중국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유일무이한 중국형 근대화입니다.

이병한 : 그 특징이 무엇인가요?

후안강 : 중국은 사회주의 제도의 장점을 십분 활용했습니다. 덩샤오핑은 "역량을 집중하여 大事(대사)를 처리한다"고 말한 적이 있죠. 중국의 인구는 세계 총 인구의 5분의 1입니다. 반면에 중국의 자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훨씬 적습니다. 인구는 많고 자원은 부족한 조건에서 재화와 서비스의 공급을 시장에만 일임할 수 없습니다.

유능하고 책임 있는 정부, 특히 중앙 정부가 전 사회의 자원을 집중하여 공공 재정, 공공 투자, 공공 정책 등 허다한 대사를 처리해야 대국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가장 중요한 경험은 중앙에 역량을 집중시키고, 그 집중된 역량 내부에서 민주를 가동시키는 '집중과 민주의 조화'에 있습니다. 이로써 그때그때 필요한 정책 결정이 이루어지고 각종 도전과 위기를 대처해 왔습니다.

이병한 : '민주집중제'는 중국만의 특색이 아니지 않나요? 굳이 원조를 따지면 소련일 텐데요.

후안강 :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 경제는 전통적 사회주의 계획 경제 체제를 초월했습니다. 동시에 자본주의적 자유 시장 체제도 능가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시장 경제 특유의 개방성, 포용성, 적응성, 혁신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과 국가의 보이는 손이 조화를 이룹니다. 시장의 혁신주의와 국가의 실력주의를 결합합니다. 만능 정부의 미신에 빠지지도 않고, 자유 시장을 숭상하지도 않습니다. 활력 있는 시장과 유능한 정부라는 '두 개의 손'으로 작동하는 중국의 독자적 체제를 개척한 것입니다. 계획 경제도 시장 만능도 아닌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시장 경제가 자리 잡았습니다.

이병한 : 여전히 추상적인데요.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가령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시장 경제'는 어떻게 작동했던 것일까요? 어떤 점이 체제의 비교우위라고 말할 수 있을 지요?

후안강 : 10년 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갈까요? 1998년 아시아 금융 위기가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 정부는 내수 확대 정책으로 대응했습니다. 2000년 서부 대개발이 대표적입니다. 서부의 기간 시설 설비에 투자를 집중함으로써 아시아 금융 위기를 돌파했습니다. 더불어 동북 3성의 노후화한 공업 기지를 재건하고, 중부 개발도 시작했습니다. 정보 산업에 박차를 가한 것도 이 무렵입니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에는 두 번째 내수 확대 정책을 실시합니다. 고속철과 고속도로 등 인프라 투자에 집중하여 불과 5년 만에 중국은 세계 최고의 인프라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를 발판으로 '일대일로'를 추진하게 된 것입니다.

1978년 개혁 개방을 살펴볼까요? 중국은 점진적 개혁으로 혁명적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와 동유럽, 소련이 경험했던 '쇼크 독트린'과는 달랐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국유 자산을 민영화, 즉 '사유화'시키는 남미형과 동구형과는 달랐습니다. 그랬다면 소련 해체 초기처럼 일부의 고급 인력만 시장 경제에 적응해서 고수입의 혜택을 누렸겠죠.

반면 중국의 개혁 개방은 '장기 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의학적 접근이라고 할까요. 대증요법이 아니라, 원기와 근기를 살리는 것입니다. 장기적 정책 수립과 실천이 가능한 것은 무엇보다 정치의 안정에 있습니다. 정치 안정을 토대로 점진적인 양적 변화를 추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질적인 변화, 혁명적 성과를 거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지구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되는 시기에 중국만은 6억의 인구를 빈곤에서 구해낸 것입니다. 6억은 세계 인구의 10%입니다.

이병한 : 개혁 개방이 중국형 근대화라면, 일대일로는 중국형 세계화의 출발일까요?

후안강 : 중국의 대전략(Grand Strategy)입니다. 대전략은 대국의 필수품입니다. 그리고 대국만이 소비할 수 있는 희귀품이기도 합니다. 중국은 정치, 경제, 외교, 문화, 환경 등 모든 분야에서 대전략을 수립할 수 있는 역량과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일국의 흥망성쇠는 대개 5단계를 겪습니다. 성장기, 신속한 발전기, 강성기, 완만한 발전기, 상대적 쇠락기입니다.

2050년까지 중국은 공업화, 도시화, 현대화를 완수할 것입니다. 세계 최대 인구의 국가에서 일어나는 1000년 만의 대전환이죠. 저는 개혁 개방 직전까지가 중국의 성장기였다고 봅니다. 1980년부터 2020년까지가 신속한 발전기입니다. 개혁 개방에서 비롯한 고도성장기이죠. 2020년부터 중국은 강성기에 진입합니다. 종합 국력 지수에서 중국이 미국을 앞지르게 됩니다.

이병한 : 이른바 '슈퍼 차이나' 말씀이시죠?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2021년)에 슈퍼 차이나로 등극하여,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에 절정을 구가한다는 전망이신데요. 최근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쓴 칼럼이 흥미로웠습니다. 일대일로를 따라서 중국형 발전 모델이 인도네시아부터 폴란드까지 유라시아로 확산될 것을 우려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미국은 뒤늦게라도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참여해서 '자유 민주주의' 모델을 사수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후안강 : 그야말로 미국식 사고방식 아닌가요? 중국은 미국처럼 내정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모든 국가는 자국의 상황과 문화에 적합한 정치 체제를 가질 자유와 권리가 있습니다. 신중국의 일관된 원칙이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천하는 넓고, 할 일은 많습니다. 중국의 대전략은 大事(대사)에 전념하지, 小事(소사)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일대일로는 中國(중국)의 독주가 아닌 萬國(만국)의 합창입니다. 러시아의 유라시아경제연맹, 몽골의 '신 초원의 길', 인도의 '인도양 면화길', 터키의 네오-오스만주의, 한국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등과 건설적으로 합류할 수 있습니다.

(下(하)편에서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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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현대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논문보다는 잡문 쓰기를 좋아한다. 역사가이자 언론인으로 활약했던 박은식과 신채호를 역할 모델로 삼는다. 뉴미디어에 동방 고전을 얹어 아시아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Digital-東學' 운동을 궁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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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암살 당한 아버지와 똑같은 독재자

 
 
디플로마트, 한국 언론의 자유 철저하게 감시 받아
 
뉴스프로 | 2016-01-05 10:18:2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박근혜, 암살 당한 아버지와 똑같은 독재자
-디플로마트, 한국 언론의 자유 철저하게 감시 받아
-표현의 자유에 적대적 태도를 가진 대통령
-뉴스프로와의 인터뷰도 언급해

외교전문지 디플로마트가 한국의 언론자유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다. 특히 디플로마트는 박근혜가 아버지인 독재자 박정희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비판가들의 우려가 타당성이 있음을 지난 3년 동안 보여주고도 남았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기사는 “박근혜 정부의 언론 통제 시도는 1961년에서 1979년 암살당할 때까지 한국을 지배했던 그녀의 아버지 박정희와 똑같은 독재적 사고를 가진 대통령이라는 인식을 더욱 부추겨 줬다”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며 박정희가 암살당한 불행한 사실을 상기시키기까지 했다.

디플로마트는 최근 8만5천여 명이 모였던 민중봉기에 대해 노동법 개정과 함께 역사교과서 국정화 계획이 주요 동기였다며 국정화 계획이 “박근혜가 일부 교과서에 나타난 친북적 편향을 없애기 위해 국정화 계획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이들은 이를 한국의 험란한 근대사, 특히 박근혜 자신의 아버지의 과거사에 보수주의적 해석을 가미하려는 책략으로 본다”고 국정화 강행의 꼼수를 꼬집었다.

디플로마트는 “반대 의견에 대응하는 박근혜 정권의 태도는 표현의 자유에 적대적 태도를 가진 대통령이라는 그녀의 평판을 더욱 악화시켰다”며 마스크를 쓴 일부 시위자들을 IS에 비유하며 공공집회 중 복면 착용 금지를 촉구한 사실을 소개하기도 했다.

디플로마트는 “표현의 자유는 현 한국 정부 하에서 하루하루 부식되어 사라지고 있다”는 진보 뉴스 사이트 코리아 익스포제의 편집장 구세웅씨의 인터뷰 인용에 이어 본 뉴스프로 임옥 대표와의 인터뷰도 소개했다.

임 대표는 인터뷰에서 “지난 3년 동안 한국 정부가 언론을 겁주려는 일반적 경향이 점차 높아져 왔다”고 전한 뒤 올해 국경 없는 기자회에서 실시한 국가별 언론자유지수 평가에서 한국이 60위를 기록해 2006년 사상 최고를 기록한 31위에서 급격히 하락했다고 지적하며 한국의 악화되는 언론 상황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디플로마트는 산케이 가토 지국장 법정공방 사건, 본인의 가게에 박근혜는 독재자라는 포스터를 붙였다가 경찰로부터 곤욕을 치른 사건 등을 소개하며 “한국 정부와 정부의 고위직 인사들이 민주주의 국가가 무엇인가에 대해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가장 우려스럽다. 그들은 북한, 그리고 테러리즘과 같은 광범위한 위협들로부터 민주주의 한국을 보호하겠다는 결의에 차있다. 그러나 그들은 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민주주의적 원칙들을 지킬 생각은 확실히 없다”는 구세웅씨의 발언을 소개하기도 했다.

디플로마트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명예 훼손, 국가보안법 등이 남용되고 있다며 특히 국가보안법은 국제엠네스티로부터 대대적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받아왔다고 지적했다. 디플로마트는 기사 말미에서 한국인들은 서양 민주주의 국가 국민들뿐만 아니라 케냐, 필리핀, 페루를 포함한 훨씬 덜 개발된 국가의 국민들보다도 표현의 자유를 덜 지지하는 것으로 밝혀진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결과를 소개하며 “가장 큰 문제는 많은 한국인들이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뉴스위크 코리아 언론인 이기준 씨의 말로 기사를 마무리해 눈길을 끌었다.

외신의 눈에 확실한 독재정권으로 자리 잡은 박근혜 정권. 그 정권 아래에서 표현의 자유마저 빼앗긴 한국 국민들은 이제 외신들의 눈에 표현의 자유조차 빼앗겨도 저항하지 않는 무력한 민중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한다.

감수 : 임옥

In South Korea, freedom of speech under scrutiny
한국의 언론 자유는 철저히 감시받는 중

John Power

Even before she was elected president of South Korea, Park Geun-hye’s loudest critics saw in her shades of her dictator father, who brutally suppressed dissent during the 1960s and 70s. To her opponents, Park’s almost three years in power since have more than justified those fears.

한국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이전부터 박근혜의 신랄한 비판가들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반대 의견을 가혹하게 억압했던 아버지 독재자의 모습을 그녀에게서 보았다. 그 때 이후로 그녀의 반대자들에게 있어 박근혜가 집권한 지난 3년은 그런 두려움이 타당했음을 보여주고도 남았다.

From launching defamation lawsuits against critics to a plan to take over the publishing of history books used at schools, the Park administration’s efforts to control speech have fueled the perception of a leader wed to the same authoritarian ideology of her father Park Chung-hee, who ruled South Korea from 1961 until his assassination in 1979.

비판가들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역사교과서 출간을 정부가 주도하려는 계획에 이르기까지 박근혜 정부의 언론 통제 시도는 1961년에서 1979년 암살당할 때까지 한국을 지배했던 그녀의 아버지 박정희와 똑같은 독재적 사고를 가진 대통령이라는 인식을 더욱 부추겨 줬다.

“There is no need to mince words: Freedom of expression is eroding every day under the current South Korean government,” Se-Woong Koo, editor of the liberal news website Korea Expose, told The Diplomat.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표현의 자유는 현 한국 정부 하에서 하루하루 부식되어 사라지고 있다”고 진보 뉴스 사이트 코리아 익스포제의 편집장 구세웅 씨가 디플로마트에 말했다.

Recently, such concerns have found voice in opposition to Park’s initiative to entrust the state with authoring history textbooks used at schools from 2017. Along with planned labor reforms, the proposal was the main spark for two mass rallies held in Seoul in recent weeks that attracted an estimated 85,000 people.

최근 그러한 우려가 2017년부터 학교에서 사용될 역사교과서의 집필을 정부에게 맡기려는 박근혜의 계획에 대한 반대로 나타났다. 노동 개혁안과 함께 교과서 국정화 계획은 몇 주전 서울에서 열린 두 번의 대규모 시위에 약 8만5천 명을 참여하게 한 주요 동기였다.

While Park has argued the textbook plan is necessary to remove pro-North Korea bias in some books, others see the move as a ploy to put a conservative spin on the nation’s turbulent modern history, especially the legacy of her father. The elder Park enjoys considerable respect among older Koreans for overseeing the country’s explosive economic rise, but remains controversial overall for his anti-democratic rule and persecution of opponents.

박근혜가 일부 교과서에 나타난 친북적 편향을 없애기 위해 국정화 계획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이들은 이를 한국의 험란한 근대사, 특히 박근혜 자신의 아버지의 과거사에 보수주의적 해석을 가미하려는 책략으로 본다. 박정희는 한국의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주도한 점에 대해 나이 든 세대로부터 상당한 존경을 받지만 전반적으로는 반 민주적 지배 방식과 반대자들에 대한 가혹한 처우로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Apart from the textbook plan itself, the Park’s administration’s response to dissent on the issue has further exacerbated her reputation as a leader hostile to free expression. After the anti-government rallies, Park compared some masked protestors with ISIS, calling for a ban on face coverings at public demonstrations. When American journalist Tim Shorrock wrote in The Nation magazine several weeks later that Park was “following in the footsteps of her dictator father,” the South Korean Consulate-General in New York contacted the magazine to complain, the writer claimed.

국정교과서 발행 계획은 차치하더라도, 이에 대한 반대 의견에 대응하는 박근혜 정권의 태도는 표현의 자유에 적대적 태도를 가진 대통령이라는 그녀의 평판을 더욱 악화시켰다. 반 정부 집회들이 열린 이후, 박근혜는 마스크를 쓴 일부 시위자들을 IS에 비유하며 공공집회 중 복면 착용 금지를 촉구했다. 미국인 기자 팀 쇼락 씨에 따르면 <네이션>지에 박 대통령이 “독재자 아버지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글을 기고한 지 몇 주 뒤 뉴욕 총영사가 연락해 해당 기사에 대해 항의를 했다고 한다.

“I am afraid that there is a general tendency of press intimidation by the South Korean government that has been increasing over the past three years,” said Lim Og, a journalist at online media outlet NewsPro.

온라인 언론사 뉴스프로의 언론인 임옥 씨는 “지난 3년 동안 한국 정부가 언론을 겁주려는 일반적 경향이 점차 높아져 왔다”고 우려했다.

Lim pointed out that South Korea ranked just 60th in this year’s press freedom index by Reporters Without Borders, a drastic fall from its best-ever ranking of 31st in 2006.

임 씨는 올해 국경없는 기자회에서 실시한 국가별 언론자유지수 평가에서 한국이 60위를 기록해 2006년 사상 최고를 기록한 31위에서 급격히 하락했다고 지적했다.

The recent controversies follow a raft of other attempts by the government, or legal authorities under its influence, to manage speech unfavorable to the president. In one incident last month, police questioned a shopkeeper after he put up posters at his premises that called the president a “dictator’s daughter.” Then there is the ongoing trial of Kato Tatsuya, the former Seoul bureau chief of Sankei Shimbun, a Japanese daily. Kato faces up to seven years in prison if convicted of defaming the president by repeating rumors about her whereabouts on the day of last year’s Sewol ferry disaster.

대통령에 비우호적인 표현을 통제하기 위한 정부 및 산하 법률 기관들의 다방면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최근 논란이 있었다. 일례로, 한 가게 주인은 지난 달 본인의 가게에 박 대통령을 “독재자의 딸”이라 지칭한 포스터를 게재했다가 경찰의 질문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일본 산케이신문 가토 다쓰야 전 서울지국장을 둘러싼 법정공방이 현재 진행 중이다. 만일 작년 세월호 참사 당시 박 대통령의 행방에 대한 루머를 재언급한 것에 대해 대통령 명예훼손으로 유죄판결을 받는다면 가토 씨는 최고 7년형까지 선고받을 수 있다(역주: 가토 다쓰야는 12월 17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The government and its ranking figures present the greatest worry, in that they have an outdated notion of what a democratic nation is,” said Koo. “They say they are determined to protect democratic South Korea from far-ranging threats such as North Korea and terrorism. But they clearly have no interest in safeguarding democratic principles including freedom of speech.”

“한국 정부와 정부의 고위직 인사들이 민주주의 국가가 무엇인가에 대해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가장 우려스럽다”며 “그들은 북한, 그리고 테러리즘과 같은 광범위한 위협들로부터 민주주의 한국을 보호하겠다는 결의에 차있다. 그러나 그들은 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민주주의적 원칙들을 지킬 생각은 확실히 없다”고 구 씨는 말했다.

While some see an especially profound threat to free expression in the current president, South Korea has always had severe constraints on expression during its short democratic history.

어떤 이들은 현 대통령 하에서 표현의 자유가 특히 심각하게 위협 당하고 있다고 보지만 그 짧은 민주주의 역사 속에서 한국은 표현에 대해 항상 극심한 제한을 해왔다.

The country’s constitution does not contain any endorsement of free speech as unambiguous as the 1st Amendment in the United States, qualifying its protections with references to public morality, social ethics and the honour of individuals.

한국의 헌법에는 공중도덕, 사회윤리 및 개인의 존엄과 관련하여 이의 수호를 의무화하는 미국의 1차 수정헌법처럼 표현의 자유를 명료하게 지지하는 조항이 없다.

One especially powerful brake on expression is the National Security Law, an anti-communist statute that potentially makes any praise of North Korea a crime. While seen as a necessarily bulwark against communist contamination from North Korea by many conservatives, the law has come in for repeated criticism from activist groups such as Amnesty International.

특히 표현의 자유에 대한 한 가지 강력한 제재는 북한에 대한 어떤 칭찬도 범죄 행위로 규정지을 수 있는 반공법안 국가보안법이다.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이를 북한으로부터의 공산주의 오염을 막기 위한 필요 불가결한 방어책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국가보안법은 국제앰네스티와 같은 활동가 단체들로부터 거듭 비판을 받아왔다.

“As (the) NSL includes vaguely-worded clauses which allow overly broad application, to intimidate and imprison people simply exercising their human rights, Amnesty International has been calling (on) the government of South Korea to abolish or substantially amend the NSL in line with the country’s international human rights obligations and commitments,” said Hiroka Shoji, East Asia researcher at Amnesty International.

“국가보안법은 애매한 문구들을 지니고 있어서 자신의 인권을 행사하고 있을 뿐인 사람들을 위협하고 구금할 수 있도록 지나치게 폭넓은 법의 적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국제 엠네스티는 한국 정부에게 국가보안법을 폐기하거나 혹은 국제인권에 대한 의무와 약속을 나타내도록 대대적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해왔다”고 국제앰네스티 동아시아 담당 연구관 히로카 쇼지는 말했다.

The country’s defamation laws are also notably strict, and have routinely allowed democratically-elected administrations, including those from the liberal side of the aisle, to quash criticism. Unlike in much of the democratic world, defamation is treated as a criminal as well as civil matter, carrying the threat of heavy fines or years in jail.

한국의 명예훼손법 또한 특히 엄격하며, 진보 진영을 포함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들이 비판을 억누르는 수단으로 일상적으로 이를 사용해왔다. 대부분의 민주주의적 세계와는 달리 명예훼손은 민사문제일 뿐 아니라 형사 사건으로 취급되며 무거운 벌금이나 수년간의 징역형을 수반한다.

Whether or not because of a status quo that has long been ambivalent about freedom of expression, it’s far from clear that the public en masse is disturbed by Park’s clampdown on speech.

표현의 자유에 대해 오랫동안 양면적인 태도를 보여온 현 상황 때문이든 아니든 간에 일반 대중이 박근혜의 이러한 탄압으로 인해 불편을 겪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For months, the president’s approval rating has fluctuated in the mid-40s, a relatively strong showing for a mid-tenure president in South Korea, where the public is notorious for eventually turning against its leaders in overwhelming numbers. And while attitudes have since shifted somewhat against the textbook plan, an opinion poll carried out in October by Gallup Korea showed the public dead spilt on the issue.

지난 수개월 동안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임기 말에 이르며 대통령에 대해 압도적인 수치로 대중이 등을 돌리는 것으로 악명 놓은 한국에서 재임기간 절반에 이른 대통령으로서는 비교적 높은 40% 중반에서 등락을 거듭했다. 그리고 이후 역사교과서 계획에 반대하며 민심이 다소 바뀌긴 했지만, 10월에 갤럽코리아가 실시한 여론 조사는 역사교과서 문제에 대해 국민이 절반으로 갈라졌음을 보여줬다.

If the public remains relatively apathetic about moves to control speech, part of the explanation may lie in different cultural values. In a recent survey of 38 countries carried out by the Pew Research Center, South Koreans were found to be less supportive of freedom of expression than not just people in democratic Western countries, but also those of several far less developed nations including Kenya, the Philippines and Peru.

일반인들이 언론 통제에 대해 비교적 무관심하다면 이에 대한 설명을 다른 문화적 가치에서 어느 정도 찾을 수도 있다. 퓨 리서치 센터가 38개국에 대해 실시한 최근 조사에서 한국인들은 서양 민주주의 국가 국민들뿐만 아니라 케냐, 필리핀, 페루를 포함한 훨씬 덜 개발된 국가의 국민들보다도 표현의 자유를 덜 지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The biggest problem is many Koreans don’t think freedom of expression is important,” said Lee Ki-jun, a journalist with Newsweek Korea. “Most of them seem to be satisfied with current level of freedom of expression. They often put many things like public order, national interest and prestige above it.”

“가장 큰 문제는 많은 한국인들이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뉴스위크 코리아 언론인 이기준 씨는 말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현재 수준의 표현의자유에 만족해 하는 것 같다. 그들은 표현의 자유보다 공공질서, 국가이익, 체면 같은 것들을 종종 우선시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9&table=c_sangchu&uid=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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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한국에서 위안부 합의 효력은 행정부 교체 여부에 달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6/01/05 13:01
  • 수정일
    2016/01/05 13:0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연내 해결하려던 朴 … 지지율 하락 및 강력한 비판
 
김일미 기자
기사입력: 2016/01/04 [13:36]  최종편집: ⓒ 자주시보
 
 

[플러스코리아타임즈 = 김일미 기자] 프랑스 최대 일간지 <르몽드>가 최근 벌어진 한일간 위안부 문제 합의에 대해 두 나라 정상의 정치적 위험성이 커졌으며 각자 다양한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한국에서는 이 합의가 당사자들의 표현처럼 “결정적이고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은 다가올 대선에서 행정부가 교체되는가 여부에 달려있다고 분석했다.

 

도쿄에 상주하고 있는 필립 메스메르 특파원은 ‘위안부 : 한일 정부가 역사적 분쟁을 정산한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고 “양국 관계를 개선시키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걸림돌”이었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두 나라 정부가 합의했다고 전했다.

 

기사는 일본 정부의 10억엔 지원과 한국 정부의 재단 설립, 아베 총리의 전화를 통한 사과 등 합의 내용과 일련의 사건들을 열거하면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미국 국무부 대변인 등의 긍정적인 반응을 소개했다.

 

이어 양국의 두 정상들이 처한 상황을 분석했다. 특히 이전까지 강력하게 위안부의 존재에 대해 부정하고 사죄를 거부하던 아베 총리가 입장을 바꾼 배경이 철저히 실용주의적 측면에서 온 것이라며 그를 ‘일본의 닉슨’으로 비유했다.

 

기사는 지지도 하락을 맛보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합의의 정당성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내야하고,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답해야 한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행정부의 교체가 합의의 최종적 효력에 영향을 미치게 됐다고 적었다.

다음은 뉴스프로가 번역한 <르몽드> 기사 전문이다.

 

번역 및 감수 : Sang Phil JEONG

기사 바로가기 ☞ http://bit.ly/1ZAojT0

« Femmes de réconfort » : Tokyo et Séoul soldent un contentieux historique

“위안부” : 한일 정부가 역사적 분쟁을 정산하다

Par Philippe Mesmer (Tokyo, correspondance)

필립 메스메르(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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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_lemonde_fr_20151231_100928(1)

 

Une statue représentant une « femme de réconfort » devant l’ambassade du Japon à Séoul, lundi 28 décembre.


지난 12월28일 서울의 일본 대사관 앞에 설치된 ‘위안부’ 동상의 모습.

 

Pour Séoul, c’était « le principal obstacle à l’amélioration des relations bilatérales » avec le Japon. Le dossier douloureux des femmes dites « de réconfort » – euphémisme désignant les dizaines de milliers de femmes, coréennes, chinoises ou encore néerlandaises victimes d’un système d’esclavage sexuel créé avec la complicité de l’armée, pendant les guerres du Japon impérial dans les années 1930-1940 – empêchait les deux actuels alliés des Etats-Unis en Asie de l’Est d’entretenir des liens apaisés. L’accord annoncé sur ce sujet lundi 28 décembre doit permettre d’améliorer des relations au plus bas.

 

한국 정부로서는 일본과의 “양국 관계를 개선시키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걸림돌”이었다. 일명 ‘위안부’ – 1930~1940년 사이 일본 제국주의가 벌인 전쟁에서 군대가 공모해 만든 성적 노예 시스템의 희생자이던 한국인, 중국인 그리고 네덜란드인 여성 수만명을 완곡하게 부르는 방식이다 – 로 불리는 고통스러운 여인들의 소송 사건은 현재 동아시아 지역 내 미국의 우방인 두 연합국의 원만한 관계를 방해해왔다. 12월 28일 월요일 이 주제에 대한 합의가 이뤄져 관계 개선이 가능하게 됐다.

 

Dans un entretien téléphonique avec la présidente sud-coréenne, Park Geun-hye, le premier ministre nippon, Shinzo Abe, a présenté ses « excuses et ses remords sincères » sur cette question. L’accord marque l’entrée des deux pays dans une « nouvelle ère », a-t-il souligné.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이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을 표현했다. 또 그는 이번 합의로 두 나라가 “새로운 시대”로 들어서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Mme Park avait rappelé l’importance du règlement du dossier des « femmes de réconfort » lors du sommet du 2 novembre avec M. Abe, première rencontre entre les deux dirigeants depuis leur prise de fonction. Elle souhaitait qu’une solution soit trouvée avant la fin 2015, année du cinquantenaire des relations diplomatiques entre les deux pays et du 70e anniversaire de la fin de la colonisation de la péninsule par le Japon.

 

박 대통령은 집권 이후 처음으로 마련된 지난 11월 2일 아베 총리와 정상회담 자리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의 중요성이 대해 강조한 바 있다. 박 대통령은 한일 양국의 외교 정상화 50주년이자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가 종식된지 70주년이 되는 2015년이 끝나기 전까지 이 문제의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

 

Présenté comme « définitif et irréversible », l’accord prévoit la création d’une fondation par le gouvernement sud-coréen. Cette entité recevra « en une fois » 1 milliard de yens (7,6 millions d’euros) du Japon et devra, selon le chef de la diplomatie nippone, Fumio Kishida, « restaurer l’honneur et la dignité et soigner les blessures psychologiques de toutes les anciennes femmes de réconfort ». Quarante-six survivantes sont concernées.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고 소개된 이 합의를 통해 한국 정부는 재단을 설립하기로 했다. 이 재단은 일본으로부터 ‘한 번에’ 10억엔을 받아 조성되고, 일본 후미오 기시다 외무상에 따르면 재단은 “모든 위안부 여성들의 정신적 고통을 치유하고 명예와 존엄를 회복하는데” 힘써야 한다. 현재 생존자는 46명이다.

 

« Atténuer les blessures »

“상처를 어루만지다”

 

Les deux voisins prévoient de « ne pas se critiquer ou s’accuser au niveau international sur cette question, notamment à l’ONU ». Séoul s’engage également à discuter avec les associations ayant installé en 2011 devant l’ambassade du Japon une statue symbolisant les « femmes de réconfort ». Y voyant une atteinte à sa dignité, Tokyo souhaite que celle-ci soit retirée.

 

두 이웃 나라는 “이 문제에 대해 서로 비판을 자제하고 특히 유엔에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기”로 했다. 한국 정부는 또 2011년 일본 대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을 설립한 시민단체와 대화에 나서기로 했다. 위안부 소녀상이 자신들의 체면을 구긴다고 본 일본 정부는 동상이 철거되기를 바라고 있다.

 

Le secrétaire général de l’ONU, le Coréen du Sud Ban Ki-moon, a salué l’accord conclu, tout comme les Etats-Unis, inquiets des mauvaises relations entre leurs deux principaux alliés en Asie de l’Est. Le porte-parole du département d’Etat, Mark Toner, y voit un moyen de « progresser vers l’atténuation des blessures passées ».

 

한국인인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은 동아시아 두 주요 연합국의 아슬아슬한 관계를 걱정하는 미국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이 합의를 반겼다. 미국 국무부 마크 토너 대변인은 “과거의 상처를 어루만지도록 더 나아가는” 길이라고 밝혔다.

 

S’il est validé par les deux gouvernements, estime Yuki Tatsumi, du centre de réflexion américain Stimson, « l’accord lèvera le principal obstacle à l’engagement diplomatique et à la coopération des deux pays sur les questions sécuritaires qui les concernent », notamment à propos de la Corée du Nord. Il est également, selon Mme Tatsumi, « le trop attendu premier pas vers la réconciliation du Japon et de la Corée du Sud ».

 

미국 스팀슨센터의 유키 다쓰미 연구원은 합의가 양국 정부에 의해 발효가 된 것이라면 특히 북한을 상대로 한 “안보와 관련해 양국 사이의 협력과 외교적 진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걸림돌이 제거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 “일본과 한국의 화해를 위해 너무 오래 걸린 첫 걸음”이라고 덧붙였다.

 

Le « Nixon du Japon »

‘일본의 닉슨’

 

L’enjeu semble avoir eu raison des risques politiques, élevés pour les deux dirigeants. Fervent nationaliste et soutenu par un fort courant négationniste, M. Abe a souvent contesté les accusations formulées sur la question des « femmes de réconfort ». Il a critiqué la déclaration de 1993 du porte-parole du gouvernement d’alors, Yohei Kono, qui ­exprimait « des remords à toutes les femmes qui subirent des souffrances physiques et mentales irréparables ». Ce texte reconnaissait l’implication des autorités militaires.

 

관건은 두 나라의 정치지도자들 모두에게 이번 합의가 정치적 리스크를 키운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일제의 어두운 역사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열렬한 민족주의자 아베 신조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제기된 내용들을 종종 부인해왔다. 그는 1993년 일본 정부 대변인 요헤이 고노가 “돌이킬 수 없는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겪은 모든 여성들에게 사죄”를 표명한, 일명 고노 담화를 비판했다. 이 담화는 일본 군국주의가 연관됐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Lors de son premier passage à la tête du gouvernement en 2006-2007, Shinzo Abe avait évoqué l’absence de « preuve tangible » de coercition de l’armée dans le recrutement des femmes. Dès son retour au pouvoir fin 2012, il évoquait la révision de la déclaration de M. Kono. En juin 2014, un document affirmait qu’elle reposait sur des témoignages non vérifiés et qu’elle avait été rédigée avec l’aide de diplomates sud-coréens. Une demande a été adressée à l’ONU – et rejetée – pour une révision du rapport rédigé en 1996 sur la question des « femmes de réconfort ».

 

2006~2007년 아베 신조가 처음으로 총리 자리에 올랐을 때, 그는 그 여성들을 선발하는데 있어 군대가 강제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2012년 말 두 번째로 집권하자, 그는 고노 담화의 수정 문제를 거론했다. 일본 정부는 2014년 6월 고노 담화는 증명되지 않은 판단에 의해, 한국 외교부의 도움을 받아 작성됐다는 내용의 문서를 발표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유엔이 정리한 1996년 보고서의 수정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Shinzo Abe, le 28 décembre à Tokyo.

12월 28일 도쿄에서 아베 신조.

 

Le revirement de M. Abe sur la question, qui lui vaut déjà d’être qualifié de « Nixon du Japon » pour son pragmatisme, répondrait à sa volonté de contenir les ambitions chinoises, mais également à une pression des Etats-Unis. Shinzo Abe devra s’assurer que la puissante frange nationaliste de son administration ne sabote pas la dynamique engagée.

 

위안부 문제에 대한 아베의 돌변은 실용주의자의 측면에서 그를 ‘일본의 닉슨’이라 부를 만 하다. 그의 입장 변화는 중국의 열망을 억제하는 동시에 미국의 줄기찬 요구에 부응한다. 아베 신조는 행정부 내 강력한 민족주의자 그룹이 이 일을 훼방놓지 않도록 안심시켜야 한다.

 

Il devra également répondre aux critiques de Pékin, qui a réagi à l’accord en s’interrogeant sur la non-inclusion des « femmes de réconfort » chinoises. Lu Kang, porte-parole du ministère chinois des affaires étrangères, a rappelé que le recrutement forcé de ces femmes était « un grave crime contre l’humanité commis par l’armée japonaise ».

 

또한 그는 이번 합의에서 중국인 위안부에 대해서는 포함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한 중국 정부의 비판에도 답해야 한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 루캉은 위안부 여성에 대한 강제 동원은 “일본 군대에 의해 자행된 심각한 인권 범죄”라고 주장했다.

 

En Corée du Sud, Mme Park, dont la popularité décline, va devoir convaincre les « femmes de réconfort » et leurs soutiens du bien-fondé de l’accord. Des critiques s’expriment déjà sur la modicité du budget prévu et l’exclusion des familles des femmes décédées. Elles déplorent également que Tokyo ne reconnaisse pas sa « responsabilité légale » dans cette tragédie. Enfin, l’aspect « définitif » du texte reste soumis aux changements d’administration.

 

지지도가 하락 중인 한국의 박 대통령은 생존 위안부들을 설득해야 하고, 이번 합의의 정당성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러나 벌써 보잘 것 없는 지원금 규모와 이미 사망한 위안부 여성의 가족들에 대한 배제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또한 일본 정부가 이 비극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결국 합의문의 ‘결정적인’ 측면은 행정부의 교체에 달려 있다.

 


원본 기사 보기:plus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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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들이 나라에 바다를 이루게 해야 한다”

 

 

<초점> 김정은 새해 첫 현지지도 현장은 과학기술전당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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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1.04  18: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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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은 제1국방위원장은 1일 첫 공개활동으로 평양 쑥섬 과학기술전당을 찾아 준공식 테이프를 잘랐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지난해 첫 대외활동으로 평양 육아원.애육원을 찾았던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올해는 과학기술전당 준공식에 참석해 테이프를 끊었다. ‘김정은식 애민정치’에 이어 과학기술 발전을 통한 ‘경제강국 건설’ 의지를 행동으로 보인 것.

김정은 제1위원장은 “조선노동당 제7차대회를 맞는 새해의 첫문을 과학으로 열었다”며 “지식경제시대인 오늘 교육부문에서 교육조건과 환경을 일신시키기 위한 사업을 줄기차게 밀고나감으로써 사회주의경제강국건설을 앞당기는데 한몫 단단히 할 인재들이 나라에 바다를 이루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은하3호 모형 설치, 인민대학습당에 비견

평양 쑥섬에 자리한 과학기술전당은 연건축면적 10만 6천6백여㎡로 기초과학기술관, 응용과학기술관, 지진체험실, 기상과학실험실 등 부문별 실내 과학기술전시장과 야외과학기술전시장, 5백석 규모의 과학자숙소가 들어섰다.

쑥섬은 대동강 하류 양각도와 두루도 사이에 있는 섬으로 1948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맞서 열린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가 폐막한된뒤 김일성 주석이 김구, 김규식 선생 등과 ‘쑥섬협의회’를 가진 곳으로 ‘쑥섬혁명사적지’로 관리되고 있다.

   
▲ 대동강 쑥섬에 완공된 과학기술전당은 인민대학습당에 비견되는 '최신과학기술보급거점'이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조선중앙통신>은 실내 과학기술전시장은 원자구조를 본딴 건물로 내부에는 은하3호 로켓 실물모형이 자리하고 있으며, 태양광과 지열 등을 활용해 조명과 냉난방을 가동하고 있고, 외부에는 분수공원과 과학기술상징탑이 세워졌다고 전했다.

우주발사체 은하3호는 2012년 12월 12일 인공위성 광명성3호를 궤도에 진입시킴으로써 북한이 세계 10번째로 ‘스페이스 클럽’에 가세하게 된, 북한 과학기술력의 상징이다.

과학기술전당 완공에 발맞춰 평양역-미래과학자거리-과학기술전당을 있는 11.7km 구간 무궤도전차도 운행된다. 김광성 수도여객운수국 처장은 “평양역앞에서부터 주체건축의 본보기거리, 노동당시대의 선경거리로 일떠선 미래과학자거리를 지나 과학기술전당(쑥섬)까지 무궤도전차가 운행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마디로 ‘평양 신 시가지 투어’를 무궤도전차를 타고 즐기도록 한 것.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세기 80년대에 전민학습의 대전당인 인민대학습당을 마련해주신 위대한 수령님들의 숭고한 뜻을 높이 받들어가시는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께서 지식경제의 시대인 21세기에 우리 인민들에게 선물로 안겨주시는 최신과학기술보급거점”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평양의 중심 김일성광장 정면에 자리한 인민대학습당은 고 김일성 주석 70세 생일을 기념해 1982년 4월 개관했으며, 연면적 10만㎡, 10층 건물로 3천만 권의 장서를 보관할 수 있는 서고와 6천 석의 좌석을 가진 종합도서관이다.

그간 북한 당국은 평양을 방문하는 외부인들에게 사회주의 교육기관의 상징으로 인민대학습당을 주요 참관 코스로 안내했다. 따라서 김정은 시대의 과학기술보급거점인 과학기술전당을 또 하나의 참관 코스로 내세울 것으로 보인다.

자강력제일주의와 ‘우리의 기술’

   
▲ 과학기술전당 내부에 설치된 은하3호 실물 모형. 북한 과학기술력의 상징이자 자부심이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 미래과학자거리와 과학기술전당으로 상징되는 ‘과학기술’ 중시 정책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일관된 전략적 방향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김일성 주석이 주체사상을 창시해 정치사상강국을 일궜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선군사상으로 군사강국을 이룩했다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강성대국의 마지막 고지인 경제강국을 이룩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 북측의 시각이다.

또한 김정은 제1위원장이 내세우고 있는 ‘인민대중 제일주의’, 즉 애민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도 인민생활 향상은 필수적이다. 김 1위원장은 2012년 4월 김일성 주석 탄생 100돌 경축 열병식에서 첫 공개연설을 통해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며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하자는 것이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아울러 “일심단결과 불패의 군력에 새 세기 산업혁명을 더하면 그것은 곧 사회주의 강성국가”라고 정식화하고 “우리는 새 세기 산업혁명의 불길, 함남의 불길을 더욱 세차게 지펴올려 경제강국을 전면적으로 건설하는 길에 들어서야 할 것”이라고 제시하기도 했다.

올해 신년사에서는 “과학기술로 강성국가의 기초를 굳건히 다지고 과학기술의 기관차로 부강조국건설을 다그쳐나가려는 우리 당의 결심과 의지는 확고하다”며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들에서 과학기술보급실을 잘 꾸리고 운영을 정상화하여 근로자들이 누구나 현대과학기술을 배우도록 하며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과학기술의 힘으로 풀어나가는 사회적기풍을 확립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은 군수분야에서 인공위성을 궤도에 진입시키는 등 상당한 과학기술 수준을 확보했지만 이같은 일부 분야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산업분야에서는 사회주의 특유의 ‘부족 경제('shortage economy)’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김 1위원장이 신년사에서 “사회주의강성국가건설에서 자강력제일주의를 높이 들고나가야 한다”며 “우리는 자기의것에 대한 믿음과 애착, 자기의것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강성국가건설대업과 인민의 아름다운 꿈과 리상을 반드시 우리의 힘, 우리의 기술, 우리의 자원으로 이룩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을 필두로 한 서방세계의 경제제재와 중국의 미지근한 경제협력 상황 등을 감안하면 ‘우리의 힘, 우리의 기술, 우리의 자원’에 근거하는 방법이 유일한 출로인 셈이다.

“인재들이 나라에 바다를 이루게 해야 한다”

   
▲ 지난해 완공된 평양 미래과학자거리. 평양의 스카이라인을 바꾸어 놓았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김정은 제1위원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백두산영웅청년발전소와 청천강계단식발전소, 과학기술전당과 미래과학자거리, 장천남새전문협동농장을 비롯하여 당의 사상과 정책이 구현된 만년대계의 창조물들과 사회주의선경마을들이 수없이 일떠서 1년을 10년 맞잡이로 비약하며 전진하는 조국의 기상을 과시하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미 평양 방문객들을 통해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는 미래과학자거리는 평양의 도심 풍경을 바꾸어 놓았고, 평양시민들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자식들이 과학자가 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는 최신 기류가 전해지고 있다. 과학자들에게는 이곳 40~50평 규모의 최신식 고층 아파트를 제공하는 등 우대정책이 많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과학기술전당을 둘러본 김정은 제1위원장은 “정말 요란하오. 대단하오. 별천지요. 쑥섬에 천도개벽이 일어났다”고 감탄했고, 1일 첫 현지지도에서 “사회주의경제강국건설을 앞당기는데 한몫 단단히 할 인재들이 나라에 바다를 이루게 해야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미래과학자거리에 이어 과학기술전당을 중점 건설대상으로 건설을 독려해 완공함은 물론, 새해 첫 현지지도 현장으로 과학기술전당을 택해 ‘과학기술 발전을 통한 경제강국 건설’의 확고한 의지를 실제로 내보인 것은 분명하다.

과연 김정은 제1위원장은 오는 5월 열리는 제7차 노동당대회에서 어떠한 경제개발 장기계획 내놓을지, 최종적으로 경제강국 건설을 달성한 ‘북한의 덩샤오핑’이 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초점> 김정은 새해 첫 현지지도 현장은 과학기술전당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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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1.04  18: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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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은 제1국방위원장은 1일 첫 공개활동으로 평양 쑥섬 과학기술전당을 찾아 준공식 테이프를 잘랐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지난해 첫 대외활동으로 평양 육아원.애육원을 찾았던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올해는 과학기술전당 준공식에 참석해 테이프를 끊었다. ‘김정은식 애민정치’에 이어 과학기술 발전을 통한 ‘경제강국 건설’ 의지를 행동으로 보인 것.

김정은 제1위원장은 “조선노동당 제7차대회를 맞는 새해의 첫문을 과학으로 열었다”며 “지식경제시대인 오늘 교육부문에서 교육조건과 환경을 일신시키기 위한 사업을 줄기차게 밀고나감으로써 사회주의경제강국건설을 앞당기는데 한몫 단단히 할 인재들이 나라에 바다를 이루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은하3호 모형 설치, 인민대학습당에 비견

평양 쑥섬에 자리한 과학기술전당은 연건축면적 10만 6천6백여㎡로 기초과학기술관, 응용과학기술관, 지진체험실, 기상과학실험실 등 부문별 실내 과학기술전시장과 야외과학기술전시장, 5백석 규모의 과학자숙소가 들어섰다.

쑥섬은 대동강 하류 양각도와 두루도 사이에 있는 섬으로 1948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맞서 열린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가 폐막한된뒤 김일성 주석이 김구, 김규식 선생 등과 ‘쑥섬협의회’를 가진 곳으로 ‘쑥섬혁명사적지’로 관리되고 있다.

   
▲ 대동강 쑥섬에 완공된 과학기술전당은 인민대학습당에 비견되는 '최신과학기술보급거점'이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조선중앙통신>은 실내 과학기술전시장은 원자구조를 본딴 건물로 내부에는 은하3호 로켓 실물모형이 자리하고 있으며, 태양광과 지열 등을 활용해 조명과 냉난방을 가동하고 있고, 외부에는 분수공원과 과학기술상징탑이 세워졌다고 전했다.

우주발사체 은하3호는 2012년 12월 12일 인공위성 광명성3호를 궤도에 진입시킴으로써 북한이 세계 10번째로 ‘스페이스 클럽’에 가세하게 된, 북한 과학기술력의 상징이다.

과학기술전당 완공에 발맞춰 평양역-미래과학자거리-과학기술전당을 있는 11.7km 구간 무궤도전차도 운행된다. 김광성 수도여객운수국 처장은 “평양역앞에서부터 주체건축의 본보기거리, 노동당시대의 선경거리로 일떠선 미래과학자거리를 지나 과학기술전당(쑥섬)까지 무궤도전차가 운행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마디로 ‘평양 신 시가지 투어’를 무궤도전차를 타고 즐기도록 한 것.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세기 80년대에 전민학습의 대전당인 인민대학습당을 마련해주신 위대한 수령님들의 숭고한 뜻을 높이 받들어가시는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께서 지식경제의 시대인 21세기에 우리 인민들에게 선물로 안겨주시는 최신과학기술보급거점”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평양의 중심 김일성광장 정면에 자리한 인민대학습당은 고 김일성 주석 70세 생일을 기념해 1982년 4월 개관했으며, 연면적 10만㎡, 10층 건물로 3천만 권의 장서를 보관할 수 있는 서고와 6천 석의 좌석을 가진 종합도서관이다.

그간 북한 당국은 평양을 방문하는 외부인들에게 사회주의 교육기관의 상징으로 인민대학습당을 주요 참관 코스로 안내했다. 따라서 김정은 시대의 과학기술보급거점인 과학기술전당을 또 하나의 참관 코스로 내세울 것으로 보인다.

자강력제일주의와 ‘우리의 기술’

   
▲ 과학기술전당 내부에 설치된 은하3호 실물 모형. 북한 과학기술력의 상징이자 자부심이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 미래과학자거리와 과학기술전당으로 상징되는 ‘과학기술’ 중시 정책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일관된 전략적 방향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김일성 주석이 주체사상을 창시해 정치사상강국을 일궜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선군사상으로 군사강국을 이룩했다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강성대국의 마지막 고지인 경제강국을 이룩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 북측의 시각이다.

또한 김정은 제1위원장이 내세우고 있는 ‘인민대중 제일주의’, 즉 애민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도 인민생활 향상은 필수적이다. 김 1위원장은 2012년 4월 김일성 주석 탄생 100돌 경축 열병식에서 첫 공개연설을 통해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며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하자는 것이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아울러 “일심단결과 불패의 군력에 새 세기 산업혁명을 더하면 그것은 곧 사회주의 강성국가”라고 정식화하고 “우리는 새 세기 산업혁명의 불길, 함남의 불길을 더욱 세차게 지펴올려 경제강국을 전면적으로 건설하는 길에 들어서야 할 것”이라고 제시하기도 했다.

올해 신년사에서는 “과학기술로 강성국가의 기초를 굳건히 다지고 과학기술의 기관차로 부강조국건설을 다그쳐나가려는 우리 당의 결심과 의지는 확고하다”며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들에서 과학기술보급실을 잘 꾸리고 운영을 정상화하여 근로자들이 누구나 현대과학기술을 배우도록 하며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과학기술의 힘으로 풀어나가는 사회적기풍을 확립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은 군수분야에서 인공위성을 궤도에 진입시키는 등 상당한 과학기술 수준을 확보했지만 이같은 일부 분야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산업분야에서는 사회주의 특유의 ‘부족 경제('shortage economy)’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김 1위원장이 신년사에서 “사회주의강성국가건설에서 자강력제일주의를 높이 들고나가야 한다”며 “우리는 자기의것에 대한 믿음과 애착, 자기의것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강성국가건설대업과 인민의 아름다운 꿈과 리상을 반드시 우리의 힘, 우리의 기술, 우리의 자원으로 이룩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을 필두로 한 서방세계의 경제제재와 중국의 미지근한 경제협력 상황 등을 감안하면 ‘우리의 힘, 우리의 기술, 우리의 자원’에 근거하는 방법이 유일한 출로인 셈이다.

“인재들이 나라에 바다를 이루게 해야 한다”

   
▲ 지난해 완공된 평양 미래과학자거리. 평양의 스카이라인을 바꾸어 놓았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김정은 제1위원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백두산영웅청년발전소와 청천강계단식발전소, 과학기술전당과 미래과학자거리, 장천남새전문협동농장을 비롯하여 당의 사상과 정책이 구현된 만년대계의 창조물들과 사회주의선경마을들이 수없이 일떠서 1년을 10년 맞잡이로 비약하며 전진하는 조국의 기상을 과시하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미 평양 방문객들을 통해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는 미래과학자거리는 평양의 도심 풍경을 바꾸어 놓았고, 평양시민들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자식들이 과학자가 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는 최신 기류가 전해지고 있다. 과학자들에게는 이곳 40~50평 규모의 최신식 고층 아파트를 제공하는 등 우대정책이 많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과학기술전당을 둘러본 김정은 제1위원장은 “정말 요란하오. 대단하오. 별천지요. 쑥섬에 천도개벽이 일어났다”고 감탄했고, 1일 첫 현지지도에서 “사회주의경제강국건설을 앞당기는데 한몫 단단히 할 인재들이 나라에 바다를 이루게 해야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미래과학자거리에 이어 과학기술전당을 중점 건설대상으로 건설을 독려해 완공함은 물론, 새해 첫 현지지도 현장으로 과학기술전당을 택해 ‘과학기술 발전을 통한 경제강국 건설’의 확고한 의지를 실제로 내보인 것은 분명하다.

과연 김정은 제1위원장은 오는 5월 열리는 제7차 노동당대회에서 어떠한 경제개발 장기계획 내놓을지, 최종적으로 경제강국 건설을 달성한 ‘북한의 덩샤오핑’이 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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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총장 발언 부적절, 피해자 가슴 못 박는 행위”

인명진 “‘위안부 망발’ 반기문이 대선후보 1위?…정신 바짝 차려야”

등록 :2016-01-04 10:40수정 :2016-01-04 13:02

 

 

인명진 목사. 한겨레 자료사진
인명진 목사. 한겨레 자료사진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강하게 비판
“박 대통령 위안부 협상 본인이 밝힌 원칙에 안 맞아”
“반기문 총장 발언 부적절, 피해자 가슴 못 박는 행위”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지낸 인명진 목사가 반기문 UN사무총장의 한-일 위안부 협상 지지 발언에 대해 “망발”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인 목사는 4일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나와 한-일 위안부 협상에 대해 “피해자가 수용할 수 있고, 국민이 납득할 수준이어야 한다”는 박근혜 대통령 본인이 밝힌 위안부 협상 원칙을 스스로 뒤엎은 것이라며, “그동안 아무 얘기도 않다가 (갑자기) 그런 기준에서 벗어난 협상 결과가 나오니까 국민들은 당황하고 피해자들은 분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 목사는 또 반 총장의 발언에 대해 “참으로 부적절한 말”이라며 “그동안 UN에 있는 여러 인권기구들이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수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책임자 기소’ 등을 일본 정부에 계속해서 권고했는데, UN 사무총장이 이 3가지 조건에 아무 것도 이뤄지지 않은 이 협상을 ‘잘 됐다, 위대한 결정이다’, 이건 망발”이라며 “대선후보 지지율 1위가 되는 분이 이런 말을 하면 피해자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다음은 인 목사의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한일 위안부 합의를 놓고 논란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고 계세요? “어떻게 이 문제를 볼 거냐라는 기준, 그것은 저는 박근혜 대통령 자신의 원칙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위안부 문제를 외교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으로 삼고 지금까지 해 왔거든요.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초부터 계속했던 얘기는 두 가지 원칙이었어요. 하나는 피해자가 수용할 수 있는 방안이어야 된다. 두번째는 국민이 납득할 수준이어야 한다. 얼마 전에 12월2일 한일 정상회담 때도 박 대통령이 직접 아베 신조 총리에게 얘기했던 원칙이거든요. 그런데 지금 피해자들이 수용하고 있는가 하는 거거든요. 그 다음에 국민이 납득할 수준인가 많은 국민들이 납득할 수가 없다, 지금 이러는 거거든요. 이렇게 박 대통령이 천명했던 기준으로 보면 이 협상이 결코 이게 잘된 협상이다, 이렇게 볼 수가 없는 거잖아요”

박근혜 대통령의 과거 위안부 문제 관련 일본 정부에 대한 발언 내용
박근혜 대통령의 과거 위안부 문제 관련 일본 정부에 대한 발언 내용

   -그러면 도대체 박근혜 대통령께서 세웠던 원칙을 왜 깨면서까지 왜 서둘러서 연내에 마무리지었을까요? “저는 두 가지로 보는데, 하나는 박 대통령 뜻을 협상 실무자들이 모르지 않았는가 이런 생각이 들고요. 박 대통령이 알았으면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보고를 하고 재가를 받았을 텐데 무슨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는가. ‘한일 관계가 이렇게 가다가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또 미국이라든지 여러 가지 국제 관계에 있어서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라는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국제적인 관계에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면 이 방법이라도 잘했어야 한다, 피해자들을 우선 만났어야 되는 거다, 협의 과정에서” -당사자와 소통…. “‘일을 이렇게밖에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국민들에게도 설명을 했어야 되는 거다. 그동안 아무 얘기도 안 하고 국민들은 그저 ‘이번 위안부 협상은 박 대통령이 아주 확고한 그런 원칙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대로 될 거다’, 우리 그렇게 믿고 있었잖아요” -철석 같이 믿고 있다가 뒷통수 맞은 셈이다. “그런 기준에서 벗어나는 협상 결과가 나오니까 국민들도 당황하게 되는 것이고 피해자들은 분노하게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번 합의는 과연 국민이 원하면 뒤집어질 수 있는 합의인가 아니면 불가역적인 것이 될 것인가. 어떻게 보십니까? “불가역적이다, 다시 뒤집을 수 없다, 저는 그것을 보고도 깜짝 놀랐습니다. 저게 무슨 말인가. 세상에 불가역적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 그런 생각을 저는 했고요.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 정부 하에서 다시 뒤집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 국제사회에서 맺은 조약 아닙니까? 이걸 쉽게 뒤집는다는 것은 정말로 국제여론에 이게 합당할 건가 이런 겁니다. 그러니까 애당초 빨리 서둘러서 이런 타협을 하지 말고 그냥 한일 관계는 다른 것은 그냥 풀어나가고 사실 위안부 문제는 계속해서 가지고 갔어야 될 그런 카드거든요. 그냥 이렇게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되고, 계속 가지고 가면서 일본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이걸 압박을 해야 할,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아주 유일한 그런 카드였는데. 국익에 도움되는 일이었는데 이걸 쉽게 버렸다는 점에서 참 아쉽게 생각해요. 저는 이거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여론이 이렇고 하니까 일본과 협의를 해서 예를 들면 최소한도 위안부 피해자 분들이 말씀하시는 대로 아베 총리가 직접 찾아와서 사죄하는 것.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그다음에 제일 민감한 문제가 소녀상 문제인데 이걸 우선 옮긴다, 그러면 돈 10억엔 받고 옮긴다 그런 인상을 지우기가 힘들잖아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저는 이 문제는 굉장히 민감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위안부 소녀상을 그 앞에 두느냐 아니냐,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이 되지만 그건 아니거든요. 국민적인 자존심이 걸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피해자들을 설득하는 과정을 가져야 합니다. 외교부 차장, 차관 보내는 게 무슨 일입니까, 이것은. 최소한도 장관이라도 가야지. 장관보다 더 높은 총리가 가든지 해야지. 저는 박 대통령이 할머니들을 좀 청와대로 모셔오든지 아니면 찾아가든지 자초지종 이렇게 저렇게 해서 내가 본래 이런 생각을 가지지 않았느냐. 불가피했다 설명을 사전에 했으면 더 좋을 뻔했고. 사후라도 그런 노력이라도 하지.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으면 얼마나 허망하겠어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해 11월30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부르제공항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1) 행사장에 도착해 박근혜 대통령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파리/연합뉴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해 11월30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부르제공항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1) 행사장에 도착해 박근혜 대통령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파리/연합뉴스

   -많이 분노하고 계시는데. 반기문 총장은 반대입니다. 반기문 총장이 박 대통령에 연휴에 전화해서 ‘위안부 협의에 축하한다. 비전을 갖고 올바른 용단 내린 것에 대해 역사가 높게 평가할 것이다’, 이렇게 밝혔습니다. 이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참으로 부적절한 말입니다. 우선 UN사무총장으로서 부적절한 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동안 UN에 있는 여러 인권기구들이 뭐라고 했는가.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수용해야 한다. 피해자에 대한 정의 회복과 배상을 해야 된다, 책임자를 기소해야 한다. 이게 UN인권기구들이 일본 정부에 계속해서 권고했던 내용이에요. 그런 UN의 수장인 사무총장이 이 3가지 조건에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이 협상을 잘 됐다, 위대한 결정이다, 이건 망발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면 망발이라고 할 정도로 할 표현을 반기문 총장은 박근혜 대통령한테 했을까요? “글쎄 말입니다. 속고 있는 것으로 많은 국민들이 지금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UN 사무총장 말고도 한국인으로도 이런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지금 이 문제 때문에 국내가 시끄럽고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 여론이 빗발치고 있는데. 이런 상황을 감안하지 않고 이런 말을 하면 지금 기름을 끼얹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다른 사람도 아니고 UN 사무총장이 이런 말을 하면 더군다나 다음번에 무슨 대선후보 지지율 1위가 되는 분이 이런 말을 하면 피해자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행위예요.” -그러면 이 행보가 반기문 총장에게 약이 될라고 보세요, 독이 될 거라고 보세요. “우리 국민들이 정신차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역사의식과 인권의식을 가진 사람을 대선후보 지지율 1위로 꼽는다. 우리 국민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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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년에 박근혜가 뛰면 뛸수록

병신년에 박근혜가 뛰면 뛸수록
[김종철 칼럼] 주권도 정치도 경제도 회복 불능이 될 뿐
 
입력 : 2016-01-04  10:11:24   노출 : 2016.01.04  11:59:36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 media@mediatoday.co.kr 
 

병신년(丙申年) 새해 첫날 대통령 박근혜는 청와대에서 국무총리 황교안 등 80여명과 함께 떡국을 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24년 만에 타결됐고 여러 나라와 FTA(자유무역협정)도 맺어서 경제영토도 크게 확장된 만큼, 이런 외교적 성과들이 실제로 경제 활성화로 이어지고 국민들이 더욱 큰 혜택을 누리게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정부 각 부처가 세심하게 정책과 민생을 챙겨 달라.”

“위안부 문제가 24년 만에 타결됐다”는 것은 박근혜와 새누리당을 비롯한 수구보수세력의 주장일 뿐이다. 지난해 12월 28일 한국 외교부장관과 일본 외무상이 위안부 문제에 관한 ‘최종적·불가역적 합의’를 발표하자 나라 안팎에서 비판이 들끓었는데도 박근혜는 마치 그것들은 모두 헛소리라는 듯이 ‘24년 만의 타결’을 자화자찬한 것이다. 아베가 ‘법적 책임’을 언급하지 않은 채 “위안부 문제는 12월 28일로 끝났다”고 공언했는데도 박근혜는 단 한 마디 항의도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위안부 할머니들이 “정부가 당사자들의 의견도 묻지 않고 일본 정부가 내겠다는 10억엔에 우리의 고통과 수난을 팔아버렸다”고 분노했고, 시민사회에서는 “100억원을 우리가 모아 재단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 대표 문재인은 “한국과 일본 정부의 합의는 국회의 동의가 없었으므로 무효임을 선언한다”고 밝혔다. 한 국제법 전문가는 “그 합의가 조약의 성격을 띤다면 대통령 박근혜는 탄핵 대상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박근혜는 우이독경으로 일관했다.

‘12·28 합의’가 일본 아베 정부와 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합작품’이라는 사실은 국내외 진보적 언론의 한결 같은 평가였다. 두 나라가 중국의 ‘대국굴기’를 억제하고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강화하기 위해 한·미·일 삼각동맹을 견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한·일 간에 오랜 세월 ‘목에 가시’가 되어 있던 위안부 문제를 단칼에 처리해버렸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졌다. 박근혜 정권은 일본과 미국 사이에서 주권국가의 지위를 포기해버린 셈이 되었다. “미국·일본과의 군사동맹 강화를 위해 최대의 경제동맹인 중국과 등을 지게 되었다”는 비판에도 설득력 있게 대답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 박근혜 대통령이 1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신년 조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박근혜가 한국의 정치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은 새삼 지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집권세력 안에서도 자기 비위에 맞지 않는 정치인들을 ‘배신자’로 몰아 추방하고 국회의 입법권을 침해함으로써 삼권분립을 무너뜨리는가 하면 주권자인 국민 다수를 ‘혼이 없는 인간’ 또는 ‘비정상’으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오직 자신과 ‘충신들’만이 정의롭고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는, 그야말로 독선적인 언행을 일삼은 것이다.

박근혜는 지난 1일의 ‘떡국 조찬’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올해는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마무리 짓는 해인만큼 4대 개혁의 튼튼한 받침대 위에서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이 서로 긍정적 효과를 내서 국민이 바라는 성과를 많이 내야 할 것이다.”

대통령 취임 이래 3년이 가까워지도록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이 성과를 내기는커녕 공염불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박근혜 자신만 모르고 있다고 보아야 할까? 특히 경제는 올해 안에 1997년의 ‘환란’ 못지않은 위기에 부닥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조선일보·미디어리서치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58.6%가 그런 전망에 동의했다고 한다(<조선일보> 1월 1일자).

박근혜를 향해 자주 직설적 비판을 가해온 경제학자 이동걸(동국대 초빙교수)은 <한겨레> 2015년 12월 27일자 칼럼(‘착취형 성장정책의 파국적 종말’)에서 박근혜의 대선공약이 거의 모두 부도수표가 되었다고 잘라 말했다.

“경제민주화는 시작도 전에 내팽개쳐버렸고 (···) 반값 등록금은 무늬만 반값인 채 끝났고, ‘깃털 뽑기’ 식 서민 증세와 담뱃세 인상으로 ‘증세 없는 복지’는 ‘복지 없는 증세’로 둔갑하고 말았다. 무상급식, 무상보육, 노인연금, 4대 중증질환, 행복주택, 행복전세도 대부분 변질되거나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말 뒤집기의 선수다.”

박근혜는 지난 1일 조찬에서 아래와 같이 ‘독려’했다고 한다.

“역사는 우리와 상당히 멀리 떨어진 이야기로 생각하기 쉽지만, 지금 이 시간도 지나고 나면 역사가 된다. 먼 훗날 돌아보았을 때 국가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시기에 우리의 사명이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위해서 아쉬움이 없이 뛰고 또 뛰었다고 돌아볼 수 있도록 올 한해 열심히 뛰자.”

박근혜가 병신년에 열심히 뛸 방향을 예측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한국사교과서 국정화를 통한 역사쿠데타는 강행할 것이고, 세월호 참사의 진상, 특히 그 자신의 ‘행방불명 7시간의 행적’은  특조위의 조사 대상에서 아예 지우려 할 것이다. ‘친박’으로도 모자라 ‘진박’이 되어야 새누리당 공천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갖은 방책을 동원한다는 것은 이미 현실로 나타났다. 박근혜와 그 추종자들의 기대대로 새누리당이 오는 4월 총선에서 개헌선을 확보한다면 장기집권이나 이원집정제 도입을 기도하리라는 점도 억측이라고 반박할 수 있겠는가? 박근혜가 ‘뛰고 또 뛸수록’ 많은 국민들은 불안해질 것이다. 그런 불안을 말끔히 씻어내려면 민주·진보진영이 하나가 되어 총선에서 승리한 뒤 내년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이루어야 한다. 이 시점에서 갈등과 분열을 거듭하고 있는 야권을 향해 주권자들이 “하나가 되라”는 압력을 가하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 이 글은 ‘뉴스타파’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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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신년사에 담긴 정책 방향: 내부 혁신과 국제적 고립 탈피

 

<새연재> 정창현의 ‘색다른 북한이야기’ (1)

정창현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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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1.04  08:4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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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표> 신년사로 본 북한의 노선과 정책방향

   
▲ [작성 - 정창현]

새해 첫날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4년 연속 육성 신년사를 발표했다. 특히 올해는 지난해 각 분야의 성과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김 제1위원장의 연설 모습을 대신해 관련 영상을 편집해 보여줬다. 시각적으로 더 강렬하게 지난해 성과를 대중적으로 전달하려는 새로운 시도였다.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신년사를 통해 경제 발전과 인민생활 향상에서 새로운 전환을 마련하기 위해 경제강국 건설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김 제1비서는 지난해와는 달리 경제 분야의 과업을 정치.군사 분야보다 먼저 제시했다.

올해의 구호도 “조선로동당 제7차대회가 열리는 올해에 강성국가건설의 최전성기를 열어나가자!”로 정했다. 5월 초로 예고된 노동당 7차대회 개최를 앞두고 경제분야에서 우선적으로 성과를 내겠다는 구상이다.

전반적으로 올해 신년사는 김정은 체제 출범 첫 해인 2012년 4월 6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와 4월 15일 첫 공개 대중연설에 나타난 김 제1위원장의 구상과 노선이 잘 반영돼 있다는 느낌을 준다.

내용 면에서 새로운 정책 제시는 없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그러나 김정은시대 북한의 전반적 노선과 지난 한 해 동안의 흐름을 고려해 올해 신년사를 구체적으로 독해해 보면 북한의 정책방향과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올해 신년사의 키워드는 '인민중시, 인민존중, 인민사랑의 정치'

   
▲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1일 신년사에서 '애민정치'를 정식화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올해 신년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정치, 사상분야에서 김정은 체제 등장이후 지속적으로 강조됐던 노동당의 유일적 영도체계와 유일적 영군체계 확립이 언급되지 않는 대신 ‘인민중시, 인민존중, 인민사랑의 정치’가 핵심으로 부각된 것이다.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가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그만큼 당, 정, 군에 대한 김정은 제1위원장의 유일적 영도체계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북한 자체 판단이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올해 신년사에서는 “일심단결은 주체혁명의 천하지대본이며 필승의 무기”라며 정치, 사상분야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일심단결’을 제시했다. 북한은 국가목표인 ‘사회주의 강성국가’ 건설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치(사상) 강국, 군사 강국, 경제 강국을 이뤄야 한다고 표방해 왔다. 이를 김정은 제1위원장은 2012년 첫 공개연설에서 “일심단결과 불패의 군력에 새 세기 산업혁명을 더하면 그것은 곧 사회주의 강성국가입니다”라고 표현했다. 즉 정치(사상)강국의 핵심을 ‘일심단결’로 규정한 것이다.

지난해 10월 10일 당창건 70돌 열병식 연설에서 김 제1위원장은 무려 90여 회나 ‘인민’을 언급하면서 ‘인민제일주의’를 강조했고, ‘인민중시, 군대중시, 청년중시’라는 3대 전략을 제시했다. 그리고 올해 신년사에서는 “인민중시, 인민존중, 인민사랑의 정치”를 구현해야 한다며 ‘김정은식 애민정치’를 정식화했다.

이에 앞서 김 제1위원장은 2013년 1월 제4차 당세포 비서대회 연설에서 “김일성 김정일주의는 본질에 있어서 인민대중제일주의”라고 정식화했다. 이후 북한에서는 ‘인민대중 제일주의’란 용어가 빈번하게 쓰였다.

김 제1위원장은 2013년 첫 신년사에서 ‘모든 것을 인민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인민대중에게 의거하여!’란 구호를 제시했고, 2014년 신년사에는 “일군을 위하여 인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위하여 일군이 있다”라고 ‘인민대중제일주의’를 풀어서 설명했다.

2015년 신년사에서도 “당사업 전반을 인민대중제일주의로 일관시켜 전당에 인민을 존중하고 인민을 사랑하며 인민에게 의거하는 기풍이 차 넘치게 하고 당 사업의 주되는 힘이 인민생활향상에 돌려지도록 하여야 합니다”라며 ‘인민대중제일주의’란 용어를 다시 한 번 사용했다.

2008년 신년 공동사설에서 처음 언급됐던 ‘인민생활제일주의’란 표현이 김정은시대에 와서 ‘인민대중제일주의’란 표현으로 공식화된 것.

언론이나 북한전문가들이 자주 쓰는 표현대로 주민들의 지향과 의식변화를 수용하지 않으면 체제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점을 북한 당국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이 2013년 ‘경제 건설과 핵 무력 건설 병진노선’을 채택하면서 처음으로 국방보다 경제를 앞세운 것도 이러한 인식의 반영인 셈이다.

일심단결의 방안으로 인민생활 향상과 간부 혁신 강조

   
▲ 김정은 제1위원장은 신년사에서 '자강력제일주의'를 제시했다. 사진은 평양 미래과학자거리에 들어선 창광상점 내부 모습. 북한 언론은 "국산품이 가득하다"고 보도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김정은시대 북한은 ‘일심단결’이 인민생활 향상과 간부들의 사업방식 혁신에 있다고 보고 있는 듯하다. 김 제1위원장은 2012년 4월 첫 공개연설에서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며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하자는 것이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이라고 언급했고, 올해 신년사에서는 “인민생활문제를 천만가지 국사가운데서 제일국사로 내세우고 있습니다”라고까지 표현했다.

다만, 인민생활 향상이 단기간에 이룰 수 있는 과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앞으로도 북한은 이를 지속적으로 강조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반영하듯 올해 신년사 “경제강국건설에서 전환의 돌파구”를 열자면서도 제시한 각 분야의 목표들도 새로운 내용은 거의 없고, 김정은시대에 들어와 북한이 계속 강조하는 정책 방향만 제시됐다. 전력, 석탄, 금속공업, 철도운수 등 4대 선행부문의 강조, 농산, 축산, 수산부문의 혁신,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명제품, 명상품 생산, 중요생산시설들과 교육문화시설, 살림집들 건설 등이다.

그나마 눈에 띄는 새로운 용어로는 ‘자강력제일주의’를 꼽을 수 있다. 김 제1위원장은 “사회주의강성국가건설에서 자강력제일주의를 높이 들고나가야 한다”면서 “강성국가건설대업과 인민의 아름다운 꿈과 리상을 반드시 우리의 힘, 우리의 기술, 우리의 자원으로 이룩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신년사에서 “모든 공장, 기업소들이 수입병을 없애고 원료, 자재, 설비의 국산화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리”자고 호소한 것에서 한 발 더 나가 ‘자강력제일주의’란 개념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알맹이도 없고 새로운 정책도 없어 보이는 올해 신년사의 경제분야는 오히려 경제정책의 연속성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세부적으로 보면 목표에 미달한 분야도 있지만 큰 틀에서 지난 몇 년간의 정책기조를 유지해도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셈이다.

특히 최근 몇 년간 농업과 수산업, 경공업, 관광분야의 괄목한 성장세와 물가안정 등은 주목할 만하다. 북한은 적어도 먹는 문제만큼은 ‘식량 생산 600만톤’을 달성해 3년 안에 해결할 수 있다는 전망을 하고 있는 듯하다.

오히려 북한의 관심은 곡류 생산보다 채소, 축산, 버섯 재배, 양어 등으로 옮겨졌다. 식량과 비료 수입의 지속적 감소는 이런 측면에서 주목된다. 식량과 비료 수입이 감소돼 먹는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 상황이 아니라 먹는 문제가 풀리고 있기 때문에 식량과 비료 수입이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북한이 경제 관리 분야의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의 전면적 확립을 거론했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김 제1위원장은 2014년 이른바 ‘5.30노작’을 통해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의 핵심개념으로 ‘사회주의 기업책임관리제’를 제시했고, 이에 따라 협동농장에 포전담당책임제가 도입됐으며 공장.기업소에 책임경영제가 정착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의 전면 확립은 구체적으로 이 같은 포전담당책임제와 기업 책임경영제의 전면 시행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북한은 외부에서 ‘개혁 개방적 조치’라고 평가하는 정책이나 조치들을 가급적 공식문서에서 언급하는 것을 피하고 있다.

또한 북한은 ‘일심단결’ 강화를 위해 당 운영의 혁신과 간부들의 자세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올해 신년사에서는 일심단결의 강화를 위해 당조직들이 “민심을 틀어쥐고 광범한 대중을 당의 두리에 튼튼히 묶어세우며 일군들속에서 일심단결을 좀먹고 파괴하는 세도와 관료주의, 부정부패행위를 반대하는 투쟁을 강도 높게”벌릴 것을 제시했다. 일심단결을 위해서는 주민 생활 향상과 함께 고질화된 간부들의 관료주의와 부정부패가 척결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2013년 1월 제4차 당세포 비서대회 연설에서 세도와 관료주의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고, 그해 12월 장성택 숙청을 통해 세도와 관료주의 척결에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 후 북한에서는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대대적인 검열이 이뤄졌고, 올해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관료주의와 부정부패는 비단 북한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다만 북한의 경우 심각한 경제난과 비정상적인 당 운영으로 이 문제가 심각한 수준일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4월에 발간된 조선노동당 정치이론지 『근로자』에는 당 안에서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폐해들이 적나라하게 제시돼 있다.

“조건에 빙자하면서 우는 소리만 하고 당정책을 말로만 외우는 패배주의적 현상, 사무실에 앉아서 전화질만 하면서 당 정책관철에 투신하지 않는 형식주의적인 일본새, 사업을 대담하게 전개하지 못하고 시키는 일이나 적당히 하면서 앉아뭉개는 요령주의적 현상 등 책상주의자, 건달군식사업방법을 가지고서는 당의 로선과 정책이 철저히 관철될 수 없다.”

2014년 5월 평양 평천구역에 건설 중이던 아파트가 붕괴된 사고도 부실 시공과 간부들의 감독 소홀로 발표됐지만, 근본적으로는 ‘물자 빼돌리기’ 등 부정부패가 원인이었다. 북한이 ‘공포정치’라는 외부의 평가를 받으면서까지 ‘부정부패와의 투쟁’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평화협정 체결, 8.25남북합의 이행 제시 : 적극적 대외 행보와 관망적 자세

   
▲ 김정은 제1위원장은 8.25합의 이행을 위한 대화분위기 조성을 촉구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김정은 제1위원장은 대외관계에서 ‘경제.핵 병진노선’이나 핵 관련 언급이 없이 미국에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했고, 남쪽에는 6.15공동선언, 10.4선언의 존중과 이행, 지난해 8.25합의 이행을 위한 대화분위기 조성을 촉구했다.

일단 핵 관련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은 중국과 미국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러시아와는 적극적인 관계개선 및 경협 확대를 도모하겠다는 것이고, 미국을 향해서는 평화협정 논의 수용을 촉구한 것이다. 특히 김 제1위원장의 방중 시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초청 여부가 주목된다.

우선 남북관계분야에서 김 제1위원장은 최고위급회담을 언급했던 지난해와 달리 박근혜 정부의 대북 국제공조 노력을 강하게 비판했다. 우선 박근혜 정부의 ‘평화통일론’이 흡수통일론에 기초해 있다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김 제1위원장은 “남측이 북남대화와 관계개선의 흐름에 역행하여 우리의 ‘체제변화’와 일방적인 ‘제도통일’을 로골적으로 추구하면서 북남사이의 불신과 대결을 격화시켰다”고 지적했다.

또한 북한은 “우리 민족을 분렬시킨 것도 외세이며 우리 조국의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것도 다름아닌 미국과 그 추종세력”이라며 ‘외세 배격’을 강조했다. 북한은 남북대화가 열릴 때마다 미국의 입김이 작용해 진전되지 못했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 듯하다.

대표적으로 지난 해 12월 남북 당국회담 직전에 미국이 북한의 개인과 기관 10곳을 추가 제재대상으로 지정함으로써 남북간 금강산관광 재개 논의를 어렵게 만들었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북한의 급변사태에 대비한 통일문제를 중국과의 외교적 의제로까지 삼은 것에 대해서도 불편한 심기를 표출했다. 신년사는 남측 당국이 “외세와 야합하여 동족을 반대하는 모략소동에 매여달리면서 우리 민족내부문제, 통일문제를 외부에 들고다니며 청탁하는 놀음을 벌려대고있다”며 “이것은 외세에 민족의 운명을 내맡기고 민족의 리익을 팔아먹는 매국배족행위”라고 강력 비난했다.

지난해 신년사에서 김 제1위원장이 최고위급회담을 언급하면서 “남조선당국은 외세와 함께 벌리는 무모한 군사연습을 비롯한 모든 전쟁책동을 그만두어야 하며 조선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적 환경을 마련하는 길로 발길을 돌려야 합니다”라며 남북관계 개선 위해서는 긴장 완화와 평화적 환경 마련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과 비교하면 비판 수위를 높인 셈이다.

남북 당국회담에 대한 북한의 기대수준이 크게 낮아진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북한은 2014년에 ‘중대제안’, ‘특별제안’, 황병서 총정치국장 등 ‘측근 3인방’의 인천방문 등을 통해 남북대화에 돌파구를 열려고 했고, 2015년 신년사에는 “북남 사이 대화와 협상, 교류와 접촉을 활발히 하여 북남관계에서 대전환, 대변혁을 가져와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남측이 요구한 이산가족상봉은 성사됐지만, 후속 논의로 예상한 금강산관광 재개에 대해서는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한 것을 두고 북한 내부에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특히 김 제1위원장이 신년사에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방향과 기준을 제시해 북한이 남북대화에 유연성을 갖기가 어려워진 측면도 있다. 김 제1위원장은 “남조선당국이 진정으로 북남관계 개선과 평화통일을 바란다면 부질없는 체제대결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총의가 집대성되여 있고 실천을 통해 그 정당성이 확증된 조국통일3대원칙과 6.15공동선언, 10.4선언을 존중하고 성실히 리행해 나가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며 “남조선당국은 지난해 북남고위급긴급접촉의 합의정신을 소중히 여기고 그에 역행하거나 대화분위기를 해치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 6.15, 10.4공동선언의 존중과 이행의지를 보이고, 8.25합의를 해치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북한이 먼저 중단된 당국회담을 제안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다만 김 1위원장은 2012년 첫 공개연설에서 언급한 내용과 동일하게 “우리는 북남대화와 관계개선을 위해 앞으로도 적극 노력할 것이며 진실로 민족의 화해와 단합,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와도 마주앉아 민족문제, 통일문제를 허심탄회하게 론의할 것”을 재확인해 대화의 문은 열어놓았다.

북한은 올해 신년사에서 “내외반통일세력의 도전을 짓부시고 자주통일의 새시대를 열어나가자!”는 구호를 제시됐다. 한미일 국제공조를 견제하고, 다방면의 남북교류를 추진하겠다는 표현으로 들린다. 당국회담이 어렵다면 8.25합의 6항에 명기된 ‘다양한 분야에서의 민간교류 활성화'를 먼저 추진해 당국회담의 분위기를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통일부 당국자도 “남북 간 대화의 문을 열어놓고 평화통일의 한반도 시대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정부의 입장은 확고하다”고 밝혔다.

남과 북 모두 대화의 문은 열어놓았지만 누가 먼저 대화를 제의하고, 어떤 의제를 논의해 합의를 이끌어낼 지에 대해서는 동상이몽이다.

올해 신년사에서는 대외관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그만큼 북한의 대외환경이 유동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다만 미국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꿔 평화적 환경을 마련하자는 제안을 받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

지난해 북한은 경제건설을 위한 평화적 대외 환경 조성에 나섰다. 북한은 미국, 중국의 입장을 고려해 남북대화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8.25합의 이후 미국을 향해 평화협정 체결을 반복적으로 제안했다.

북한은 지금까지의 협상이 성과를 얻지 못한 가장 주요 원인이 ‘미국의 대조선적대시정책'에 있으며, 그 기본표현은 “대규모 합동군사연습 강행과 핵 타격 수단들의 남조선에로의 반입 등 군사적 도발행위들”이라면서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모든 문제의 발생근원인 미국의 적대시정책의 종식이 확인되면 미국의 우려사항을 포함한 모든 문제들이 타결될 수 있다”(외무성 대변인담화, 2015. 10. 17)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미국의 대북정책 특별대표 성 김은 “우리가 평화체제(peace regime)나 평화조약(peace treaty)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며 “정전체제를 대체하는 평화체제로 가려면 그 전에 비핵화의 핵심 이슈에서 중요한 진전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대응했다.

그러자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담화(2015.12.2)을 통해 “미국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 전에 먼저 비핵화에서 중요한 전진이 이룩되어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아직도 사방을 돌아다니며 비핵화와 6자회담 재개에 대해 떠들고 있다"면서 “평화협정체결문제와 비핵화문제를 뒤섞어놓으면 어느 하나도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은 실천을 통해 여실히 증명된 진리"라고 반박했다.

이러한 미국과 북한 사이의 공방, 즉 미국의 선(先)비핵화, 북한의 선(先)평화협정 논의 사이에서 접점을 찾기는 쉽지 않다. 다만 비핵화와 평화협정 논의의 동시진행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지난해 12월 16일 대니얼 크라이튼브링크 미국 백악관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은 9.19공동성명과 다수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른 의무인 비핵화를 완전히 이행하겠다는 약속을 보여주고 비핵화의 길을 걸어 내려간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며 북한이 비핵화 이행을 확약하는 것을 전제로 북한이 요구하는 사항들을 포괄적으로 논의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미국 정부가 비핵화 문제에서 '중요한 진전'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논의 가능성 자체를 일축해왔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발언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고위당국자도 2017년 1월 종료되는 오바마 정부 임기내에 북핵 문제의 돌파구를 찾을 가능성에 대해 “절대로 (북핵 해결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단순히 희망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평양의 선택지를 좁히기 위한 광범위한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발언들은 8.25합의 이후 나온 북한의 평화협정 제안과 관련해 북미간 물밑접촉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며, 미국과 북한 사이에 ‘선택적 대화’를 위한 힘 겨루기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전히 핵심 쟁점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을 어떻게 불가역적으로 동시 진행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그러나 한미일 군사공조가 확립돼 한미일 공조차원에서 대북제재와 압박을 강화할 경우 북한의 강한 반발이 예상되며, 이럴 경우 한반도는 다시 한번 군사적 긴장고조의 위기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

   
▲ 올해는 당대회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경제건설을 위한 대외환경 조성 차원에서 정상외교에 나설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 사진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지난해 10월 당창건 70돌 기념행사 참석차 방북한 류윈산 중국공산당 상무위원을 접견하고 있는 모습. [자료사진 - 통일뉴스]

전반적으로 2016년에 북미대화와 남북관계가 급진전될 가능성은 구조적으로 크지 않다. 남과 북, 미국 중 어느 당사자도 주도적으로 상대방이 수용할 수 있는 대안을 내놓기 쉽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정세를 움직이는 키는 남과 북, 미국이 쥐고 있다. 중국은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지만 독자적으로 정세를 움직일 위치에 있지 않다.

박근혜 정부는 통일대박과 통일준비, 원칙 있는 대북정책을 내세우고 있지만 보수층의 통일담론 선점, 국내 정치 활용에 치우쳐 있으며, 내심 북한의 급변사태 또는 북한의 굴복을 상정하고 있는 듯하다. 4월 총선이 끝날 때까지는 남북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오바마 행정부도 아직까지 ‘전략적 인내’를 기조로 외부의 영향에 의한 북한의 변화 혹은 정권붕괴 등을 통해 북한이 비핵화를 수용하는 상황을 상정하고 있다.

반면 북한은 국제적 고립 탈피를 위해 전방위적으로 외교공세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은 2013년 2월 핵실험이후 대북제재가 강화되자 ‘국제 고립 탈피’를 핵심과제로 설정했으나 장성택사건이 터지면서 사건 수습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에는 정상외교를 모색했으나 대내외적 상황이 맞지 않아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올해는 당대회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경제건설을 위한 대외환경 조성 차원에서 정상외교에 나설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

이러한 측면을 고려할 때 2016년 한반도 정세는 북미간의 힘겨루기 결과에 따라 규정될 것으로 전망되며, 노동당 7차대회 개최 후인 8월까지가 분수령이 될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남북관계를 국내정치에 활용하는 카드로 쓸지, 남북철도 연결사업을 추진함으로써 경제적 실리를 선택할 지도 북미관계의 향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지난해 8.25합의를 이끌어냈던 김관진 국가안보실장과 황병서 총정치국장 라인이 가동된 ‘남북 2+2회담’을 다시 열어 이산가족상봉 정례화, 금강산관광 재개 합의, 남북 철도.도로 연결 등에 포괄적으로 합의를 이끌어내는 방안 외에는 다른 돌파구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도 5월 당대회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돌발변수만 없다면 미국과의 대화, 북중관계 회복 등에 중점을 두면서 남북교류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전반적으로 보면 올해 상반기까지는 ‘대화국면’이 유지될 수 있지만, 그 기간 동안에 안정적인 대화틀을 만들지 못하면 하반기에는 다시 소강국면 내지 긴장국면으로 변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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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올해 강성국가 최전성기 해로"

 
 
북, “부정부패. 세도. 관료주의와 강도 높게 투쟁”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6/01/03 [08:43]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이정섭 기자

 

김정은 제1위원장의 신년사를 접한 지도부가 제7차 로동당 대회가 열리는 올해에 강성국가건설의 최전성기를 열어나갈 비상한 열의와 불타는 각오에 넘쳐 있다고 밝히며 결의를 다졌다.
 
연 합뉴스는 지난 2일 조선로동당 기관지인 로동신문 사설과 기고문을 인용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신년사에서 '강성국가 건설의 최전성기를 열어나가자'고 밝힌 이후 북한 지도부와 매체들의 지지 및 실천 결의가 잇따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선로동당 김기남 선전담당 비서는 로동신문 기고문을 통해 "신년사에 접한 온 나라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 장병들, 인민들은 당 제7차대회가 열리는 올해에 강성국가건설의 최전성기를 열어나갈 비상한 열의와 불타는 각오에 넘쳐 있다"고 강조했다.

 

김기남 비서는 "민심을 틀어쥐고 광범위한 대중을 당의 두리(주위)에 튼튼히 묶어세우며 일꾼들 속에서 세도와 관료주의, 부정부패행위를 반대하는 투쟁을 강도높이 벌려 주체의 혁명적당, 어머니당의 본태를 고수하고 인민 대중의 요구와 리익을 철저히 옹호보장 하도록 하겠다."며 일꾼들의 사소한 잘 못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박태성 평안남도 책임비서는 "청년돌격대원들의 애국심을 더욱 키워주고 잘 보살펴주며 이끌어줘 그들이 강성국가 건설의 전투장마다 기적의 창조자, 청년 영웅이 되게 하겠다."며 청년들의 의지를 피력했다.

 

김영철 전력공업성 부상은 "신년사에서 노동당 제7차 대회를 맞는 뜻 깊은 올해 경제강국 건설의 돌파구를 여는데서 전력문제를 제일 선참으로 강조했다"며 "나라의 전력문제를 책임진 일꾼의 한사람으로서 위치와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심장으로 절감하게 된다."고 전력문제 해결을 반드시 관철해 나갈 결심을 다졌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지난 1일 신년사에서 "경제강국 건설에 총력을 집중해 나라의 경제발전과 인민생활 향상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켜야 한다"면서 특히 "전력 문제를 해결하는데 전당적, 전국가적 힘을 넣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경공업성 오경철 부상은 "(지난해는) 우리 경공업 분야에서도 전례 없는 성과가 이룩된 자랑찬 승리의 해였다"고 평가했고, 허성철 국장은 "경공업 공장들에서 원료 자재의 국산화를 실현하는 문제를 경공업 발전의 생명선으로 틀어쥐고 끝장을 볼 때까지 완강하게 밀고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박문호 평양시당 위원회 비서는 평양방송과 인터뷰에서 "신년사를 통해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또다시 애국의 불, 투쟁의 불, 신념의 불을 달아주셨다"고 말했다.

 

이밖에 북 매체들은 평양화력발전연합기업소와 무산광산연합기업소 등에서 생산성 향상을 위한 노력운동이 벌어지고 있다고 전해 신년사 관철전에 나서고 있음을 시사했다.

 

한편 북은 강성국가 건설의 담보가 과학기술에 있음을 천명한 가운데 새해 첫 공개 행사로 김정은 제1위원장이 참가한 가운데 과학기술전당 준공식으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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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위안부 합의 승인, 결국 아베 각본대로?

 
일본 언론 보도 “3월말 미국 방문해 한미일 정상회담”… “야치 프로젝트도 일본측 요청”
 
입력 : 2016-01-04  09:18:42   노출 : 2016.01.04  09:34:34
문형구 기자 | mmt@mediatoday.co.kr  

 

박근혜 정부와 아베 신조 내각의 위안부 문제 합의가 결국 미국 입회하의 국제적인 확증이라는 절차를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 주요언론은 아베 신조 총리가 올해 3월말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차 미국을 방문하여 한미일 정상회담을 갖고 위안부 문제의 합의 내용을 미국이 확인하는 방안을 조정하고 있다고 3일 보도했다.

마이니치 신문은 “총리는 3월31일, 4월1일 워싱턴에서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는 동시에 캐나다도 방문할 전망”이라며 “방미시에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과 미·일 정상회담을 갖고 한일 양국에서 작년 12월에 합의한 위안부 문제의 해결과 관련해 미국이 합의내용을 확인하도록 조정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3월31일 개막하는 핵안보정상회의를 계기로 3국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며 이 자리에서는 한·일 양국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합의를 마련한 것을 미국이 확인하는 형태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가 지난 6월 22일 일본대사관 주최로 열린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 리셉션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한일간의 위안부 문제 합의를 한미일 정상회의 등의 자리에서 미국이 승인하는 방안은,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타결로 만들기 위한 일본 정부의 복안이었다. 앞서 28일 타결된 한일 외무장관 간 합의가 일본 정부의 구상들을 그대로 반영했다는 점에서 볼 때 미국 입회하의 승인 절차가 추진되고 있다는 일본 언론의 보도 역시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한일 외무장관 간 위안부 합의가 나오기 3일 전인 지난달 25일, 일본의 기시다 외무장관은 외무성 기자단에 대한 브리핑을 통해 한일 위안부 협상의 대체적인 시나리오를 발표한 바 있다. 즉 △일본 정부가 위안부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확충하기 위한 1억엔의 새로운 기금 창설을 제안 △아베 총리가 ‘국가의 책임’‘사죄’를 중시하는 한국의 입장에 대해 “책임 통감” 등 수위에서 언급 △합의문에 “최종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이라는 표현을 명기 △소녀상 철거는 협상타결 이후 한국이 자발적인 형태로 옮기는 방안 등이었다.

이와 함께, 양국 외상 간에 ‘최종결착’이 합의된 경우, “양국 정상이 제3국을 섞어 합의를 확인하는 방안”도 일본 정부에 의해 제시됐었다. 즉 내년초로 예정된 정상회담에 미국을 입회시켜 국제적인 확증을 받아내겠다는 것이었다. 지지통신은 이같은 조치가 한국 측이 이를 다시 정치문제화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일본 당국자의 말을 전했다.

1억엔의 기금 한도가 10억엔으로 증액된 것을 제외하면, 일본 정부가 한일 외무장관 회담에 앞서 내놨던 시나리오들은 거의 원안대로 진행되고 있다. 한국 내에서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 합의의 후속 처리를 위한 외교 당국 국장급 협의도 빠르면 이달 안에 열릴 예정이다.

이번 위안부 합의를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 ‘획기적’인 결론으로 이끌어낸 이병기-야치 채널 역시 아베 신조 총리의 요구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아사히신문은 31일 “일본 측의 요청으로 두 정상의 의향을 반영할 수 있는 협상 채널이 올해들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면서 “어느덧 일한 모두, 이 채널을 ‘야치 프로젝트’라고 부르게됐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4월 시작된 외교 당국의 국장 협의가 실질적인 진전을 보이지 않으면서, “외무성 국장이 직접 (아베)총리에게 보고하는 일본과 달리 한국은 윤병세 외교부 장관 등을 거쳐야하므로 일본의 의향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야치 프로젝트’가 가동됐다고 아사히는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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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 일본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합의 무효” 수요시위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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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시각 6일 세계주요도시에서 연대수요집회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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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독재 2인자 JP, 전두환 "안 되겠어" 한마디 하자…

 

 
[김종필에게 묻는다 ⓹] 만년 2인자 JP의 권력욕… 내각제 카드 불발, 퇴장해야 할 때 외면하다 결국 퇴출
 
입력 : 2015-12-30  09:53:39   노출 : 2016.01.03  10:03:27
장슬기 기자 | wit@mediatoday.co.kr    

지 난 3월2일부터 중앙일보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증언록은 중앙일보 기자들과 작가까지 동원돼 114회까지 이어졌고, 웹툰으로 재구성됐으며 책으로도 만들어질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하지만 증언록 곳곳에는 역사왜곡과 미화의 흔적이 보입니다. 미디어오늘은 이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증언록의 이면을 살펴보고 중앙일보가 하지 않은 김종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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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전 국무총리(JP)는 중앙일보 증언록에서 “군부의 중심은 나”였다며 “박정희는 권력의지가 약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절대권력을 넘보지 않았고 대의를 먼저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JP는 자신을 겸손한 2인자로 표현하지만 1인자를 향한 욕망은 여기저기서 새어 나온다. JP의 권력욕은 이미 1960년대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고다마 불충사건’

고다마 요시오(1911~1984)라는 일본인이 있다. 미국 CIA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석방된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이다. 폭력조직에서 활동하며 ‘우익의 거괴’, ‘정재계의 흑막’ 등의 별칭으로 불린 극우인사다. 하루는 고다마가 김형욱 중정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실 내가 숙소인 반도호텔에서 석정선, 김용태, 김종락 세 분을 만났죠. 그분들 말씀이 이 나라에는 JP가 있으니 박정희 대통령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앞으로 한국과 뭘 하려고하면 실권자인 JP와 손잡지 않으면 말짱 헛것이라며 협력을 요청하더라고요.” 

고다마는 김형욱에게 그 세 명이 자신에게 이런 말도 했다고 전했다. “사실 혁명(5·16)을 주도한 것도, 그 후 모든 정책 결정도 JP 머리에서 나온 것이며 박정희는 상징적 존재일 뿐이라는 거죠. 쉽게 말하면 허수아비라는 겁니다.” JP가 중앙일보 증언록에서 자신이 박정희를 설득하며 혁명을 이끌어 갔다고 했던 말과 비슷한 맥락이다. 

황당한 사실은 일제 식민지배가 끝난 지 20여년이 지난 시점에 여전히 국내 실력자들이 고다마와 같은 일본 실력자에게 한국 차기 대통령에 대해 상의했다는 것이다. 

고다마는 박정희와 만주시절 친분을 쌓았고, 우익 폭력단체 ‘동성회’를 조직한 재일교포 정건영, 아베 신조 현 일본 총리를 외손자로 두고 있는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 한국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특별고문을 역임한 세지마 류조(일본군 장교, 이토추 상사 회장) 등과 막후에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이끈 인물 중 하나다. 

1971년 2월 고다마는 한일친선에 공이 있다는 이유로 2등급 수교훈장인 광화장을 한국 정부로부터 받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당시 집권당인 민주공화당(공화당) 인사들은 고다마와 친분을 쌓았다. JP는 정건영을 통해 고다마와 친분을 쌓았다. 김형욱, 박종규, 김용태, 석정선 등 실세들도 고다마를 자주 만났다. 

석정선(JP 육사동기), 김용태, 김종락(JP의 셋째형)은 박정희 정권 2인자였던 JP와 친한 사람들이었다. 박정희는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를 통해 JP 주변인들이 JP 대통령 만들기와 관련해 고다마의 협조를 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중정부장 김형욱은 고다마와 JP계 3인의 대화를 도청한 테이프를 박정희에게 보고했고 3인은 중정에 연행됐다. 이를 ‘고다마 불충사건’이라고 한다. (김형욱 회고록, 김종필과 이후락의 떡고물 참고)

2인자는 1인자를 꿈꾼다

JP는 증언록에서 “1인자는 2인자를 소외하거나 무력화하고 싶어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며 “조금도 의심받을 만한 일은 하지 말고, 때가 올 때까지 1인자를 잘 보좌해야 한다”고 ‘2인자 철학’에 대해 말했다. 고다마 불충사건은 1인자에게 의심받을 만한 일을 하다 걸린 일이다.  

1인자는 영구집권을 꿈꿨다. 3선 개헌 얘기는 1967년 6월 7대 국회의원 선거 전부터 나왔다. 당시 야당은 “공화당이 다수의석을 차지하면 3선을 위한 개헌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화당은 7대 총선에서 개헌 선인 의석 3분의 2를 넘기자 1969년 1월 윤치영 공화당 의장서리가 3선 개헌 논의를 본격적으로 꺼냈다.  

JP는 69년 2월 “이 나라의 민주 정치와 박 대통령을 위해 3선 개헌을 반대한다”고 말했다고 증언록에서 주장했다. 박정희는 이미 두 번(1963년, 1967년 대선)이나 대통령을 했고, 1967년 대선은 부정선거 논란에도 휩싸였다. 이런 상황에서 초법적 국가기구인 중정의 창립자이자 쿠데타 정부 2인자 JP의 입에서 나온 “민주 정치”라는 단어는 사뭇 어색하다. 

   
▲ 김종필 국무총리(1971~1975)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오른쪽) 사진=국가기록원
 

JP가 3선 개헌에 반대했던 이유는 따로 있다. 1인자의 장기 집권은 2인자로서 애가 타는 일이다. ‘현대 정치사와 김종필’에 따르면 박정희의 후계자 문제는 심각한 정치쟁점이었다. 1967년 선거 후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지지하는 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인사들 간 경쟁이 치열해졌다. 

이 책에 따르면 1968년 5월 공화당은 ‘당내 사조직을 만들어 해당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김용태, 최영두, 송상남을 전격 제명했다. ‘박정희 3선 개헌을 저지하고 당의장 JP를 1971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다 들킨 것’이 실제 원인이었다.  

JP 증언록에 따르면 박정희가 JP를 따로 불러 3선 개헌 동참을 요청했다. 박정희는 JP의 손을 꼭 잡았고, 눈에 눈물이 고인 채 이렇게 말했다. “이봐. 같이 죽자고 혁명 해놓고, 혼자 살려고 그래? 60년대엔 빈곤을 겨우 퇴치했는데, 70년대엔 중화학 공업을 일으켜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야 할 것 아니야. 이 길을 같이 가자.” 

JP는 경제발전을 위해 1인자의 눈물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현대 정치사와 김종필’ 저자 이달순은 JP가 개헌 찬성으로 돌아선 이유를 “만일 JP가 동지들과 끝까지 (3선개헌을) 막았더라면 숙청을 당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JP의 2인자 철학에 따르면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는 소리와 같다. 

3선 개헌안은 결국 통과됐다. 1971년 3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박정희는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됐고, JP는 새로 신설한 당 부총재로 선출됐다. 같은 해 6월 박정희의 제7대 대통령 임기가 시작되면서 박정희는 JP를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JP의 첫 번째 국무총리 임기는 1975년 12월까지 이어졌다.  

절대로 1인자를 넘겨다보지 말라

JP가 강조한 2인자 철학 첫 번째는 “절대로 1인자를 넘겨다보지 말라”다. 유신정권시절 국무총리였던 JP가 2인자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얻게 된 교훈은 아닐까? 1976년 코리아게이트 사건 이후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프레이저 위원회)가 미 의회에 보고했던 ‘프레이저 보고서’에는 JP가 국무총리에서 경질되기 직전 상황이 나온다.  

1973년 초 박정희는 슐 아이젠버그가 진행하는 상업 프로젝트의 편의를 봐주도록 정부에 지시했다. 박정희는 한국정부가 캐나다산 CANDU 핵 반응로(핵개발용)를 구매하도록 했고, 아이젠버그는 대리인 역할을 했다. 아이젠버그는 1960년대 초 미국이 경제개발 계획들이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경시했을 때 필요한 자금을 지급해 박정희에게 우호적인 인물이다.

프레이저 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아이젠버그는 핵 반응로 판매 수수료 등으로 200만 달러를 받았는데 이 중 일부를 민충식과 JP가 뒷돈으로 받았다. 이 사실을 청와대에서 알게 돼 JP는 국무총리, 민충식은 한국전력 사장에서 해임됐다. 민충식은 친 JP 인물로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참여해 대통령 정무비서관을 역임했고 73년부터 한전 사장으로 일했다.  

JP는 증언록에서 “건강상의 이유”로 사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JP는 “정치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특유의 ‘디바이드 앤드 룰(divide and rule:분할 통치)’ 통치술로 나를 힘들게 했다”고 덧붙였는데 이게 사퇴한 진짜 이유에 가까워 보인다. 여기서 ‘분할통치’는 2인자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또 다른 실력자를 통해 견제하게 했던 박정희의 통치술을 가리킨다. 

JP의 국무총리 사퇴의 이유에 대해 프레이저 보고서는 “박정희 돈에 손 댄 후 쫓겨났다”고 했다. 더 정확하게는 “편의를 봐주라”는 1인자의 지시를 온전히 따르지 않은 것을 말한다. 

   
▲ 김종필 전 국무총리.
@연합뉴스
 

1인자의 사망, 결정적 기회 

JP는 증언록에서 “내가 아는 한 박 대통령은 돌아가실 때까지 누구에게든 권력을 넘겨줄 분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죽자 JP는 공화당 총재가 됐다. JP는 공화당 요직을 개편해 ‘JP 체제’를 만들며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부상했다. 

10·26 후 전두환과 JP의 메신저 역할을 한 박재홍(박정희의 장조카) 전 민자당 의원도 전두환이 12·12사태 이전까지 JP를 대세 인물로 봤다고 전했다. 박 전 의원에 따르면 전두환이 JP에게 요구한 사항은 5·16세력만 끼고돌지 말라, 육사 8기생만 편애하지 말라(전두환은 육사 11기), JP 비서실 잡음을 정리해달라, JP가 일본 측인 건 알지만 앞으로 미국과도 친하게 지내달라 등 네 가지였다.  

18년을 집권한 독재자가 죽고 민주화 바람이 불며 재야인사들이 복권되자 프라하의 봄에 빗댄 ‘서울의 봄’이라는 말이 퍼졌다. 재야인사 뿐 아니라 1인자의 그림자만 밟았던 JP에게도 봄이 오는 듯했다. 하지만 권력은 온전히 JP에게 넘어오지 않았다. JP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어도 봄 같지 않구나)’이라고 당시 정국을 표현해야 했다. 

1980년 1월17일 전두환은 언론사 간부들과 술자리에서 “JP는 안 되겠어”라고 했다. 봄은 꽃피지 못하고 다시 겨울로 되돌아갔다. 10.26 이후 만발했던 개헌논의가 얼어붙고 1980년 5월17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내린 신군부는 모든 정치활동을 중단시켰다. 당시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육군소장은 중정부장,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까지 겸임하고 있었다.

JP는 신군부에게 부정축재로 쌓은 216억4648만원을 몰수당했다. 1980년 6월 공화당 총재직에서도 물러났다. 그리고 전두환 집권기 7년 동안 잊혀졌다. 1987년 구 민주공화당 정치인들을 모아 만든 신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JP는 13대 대선에서 8%(4위)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다. 당시 노태우 36.6%(당선), 김영삼(YS) 28%, 김대중(DJ) 27%를 각각 얻었다. 

물 건너간 대통령 “내각제 하자”

JP는 원래 내각책임제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10·26 직후인 1980년 1월 ‘주간한국’과 인터뷰에서 “정부조직은 대통령 중심제가 좋다”고 밝혔고, 같은 해 3월 기자간담회에서도 “대통령은 언제라도 총리를 경질할 수 있어야 하며, 이원집정부제는 반대한다”고 밝혔다. 5·16쿠데타로 내각제(2공화국 장면내각)를 붕괴한 뒤 강력한 대통령의 2인자 특혜를 누려온 상황에서 차기 대통령이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서 자연스런 발언이다. 

하지만 13대 대선이 끝나고 대통령 당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JP는 1988년 1월 기자간담회에서 내각제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JP를 중심으로 한 신민주공화당은 3당 합당(노태우+YS+JP) 결과 민주자유당으로 흡수됐다. 3당 합당 후 JP는 YS에게 내각제를 하자고 요구했다. 

강력한 차기 대권주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대통령의 권력을 이어받는다. JP 증언록에 따르면 YS는 ‘자신이 민자당 총재-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명예총재-JP는 최고위원’을 각각 맡는 수직적 지도체제를 제안했다. 다음 대통령이 자신이라고 믿었던 YS는 내각제에 부정적이었다. JP는 계속 1인자의 그림자만 좇아야 했다. 

JP가 말하지 않은 2인자 철학

JP는 YS를 지지했고, DJ와는 DJP연합까지 했지만 결국 내각제를 거절당했다. 박정희가 3선개헌이나 유신을 밀어붙일 때 반대하는 JP에게 “임자 한번만 도와줘, 이번만 내가 하고 다음은 임자 차례”라고 하며 설득했을 때도, YS가 민자당 대선후보 시절 JP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나 다음은 당신’이라고 했을 때도, 3당이 합의한 ‘내각제 합의서’를 YS가 뒤엎었을 때도 JP는 절대 자신의 입을 통해 상대를 비난하지 않았다. 

   
▲ 김대중 대통령 취임 축하리셉션에서 김 대통령과 김종필 국무총리 지명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절대권력에 저항하지 않는 것이 2인자의 덕목이다. 그래서 자신의 입을 대신할 JP계보를 만드는 것도 경계했다. 친 JP계로 불리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DJ의 동교동계, YS의 상도동계에 버금가는 계보는 없었다. 절대권력에 대항하기 위한 DJ, YS의 계보가 곧 집권의 발판이 됐다는 점에서 JP 계보가 취약했던 것은 그를 영원히 2인자로 머물게 한 원인이기도 했다. 

2인자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YS정부 시절 JP는 ‘5·18특별법’을 반대했다. 이 법은 자신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재산을 빼앗고 정치권에서 쫓아낸 전두환·노태우를 처벌하는 법이었다. 훗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당시에도 JP가 총재로 있던 자유민주연합(자민련) 당론으로 탄핵을 찬성하면서도 JP 본인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다. 

JP는 증언록에서 2인자는 “참을 수 없는 것도 참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JP는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자 1990년 9월 성균관대에서 “민주화 전환기에 노 대통령을 선택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며 “노 대통령 말고 누가 현 시국을 조화롭게 이끌 수 있겠는가”라고 찬양했다. 

YS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직전인 1993년 1월 당무회의를 주재하며 “차기 대통령의 윤허를 받아 회의를 주재하게 됐다”며 다시 바뀐 1인자를 깍듯하게 모셨다. YS에게 레임덕이 찾아온 1997년 JP는 “이제 눈을 감기 전에 가야 할 길이 남았다”며 대선 출마를 시사했다. 

   
▲ 1998년 김대중 제15대 대통령 취임식 행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부부(왼쪽)와 김영삼 전 대통령 부부(오른쪽) 사진=국가기록원
 

97년 대선 역시 DJ에게 밀렸고, JP는 공동정부를 약속받으며 국무총리에 올랐지만 총리가 실권을 갖는 내각제까지 얻어내진 못했다. JP는 증언록에서 DJ가 당시 외환위기 수습을 위해 내각제를 못할 것 같다고 말하자 자신은 “정상의 고뇌를 이해한다”며 내각제 포기를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대의를 위해 권력을 포기한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퇴장해야 할 때를 외면한 JP는 퇴출됐다. 자민련은 창당 첫 총선 1996년에 50석을 얻었지만 2000년 총선에서 17석으로 쇠락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정당지지율을 2.8% 밖에 얻지 못해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던 JP마저 낙선했다(지역구만 4석). 당시 13%의 지지를 얻은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에게도 밀린 참패였다.  

JP는 이 상황을 증언록에 이렇게 표현했다. “세상에 타다 남은 나무토막처럼 추한 게 없다. 아낌없이 타야 한다. 활활 타서 하얀 재가 돼야 한다. 어떤 인생도 자기를 다 태울 자격이 있다. 정치적으로 나는 완전 연소됐고 재만 남았다.” 어렸을 때 ‘일야일권(一夜一卷) 독파주의(讀破主義)’라며 밤마다 책 한 권씩 읽은 사람답게 JP의 수사는 화려했다. 

JP는 “좀 더 장엄하게 정치와 이별하고 싶었다”며 “내일 또다시 떠오를 태양을 기약하며 서해의 붉은 낙조로 빨려 들어가는 햇덩어리가 되길 나는 욕망했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JP눈 내년 총선에서 공주지역 출마예정인 정진석 전 새누리당 의원의 후원회장을 맡았다. 해당 지역 공주고(JP 19회 졸업생)에는 JP 흉상 건립이 추진 중이다. 그의 욕망은 식지 않은 것인가? 

* <김종필에게 묻는다> 연재목차

1. 증언록 다시보는 이유와 5·16

2. 한일회담

3. 4대의혹사건과 공화당 창당

4. 황태성 사건, 첫번째 간첩조작

5. 1인자를 꿈꿨던 영원한 2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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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대연합론자’ 김근태와 야권의 분열

‘민주대연합론자’ 김근태와 야권의 분열

등록 :2016-01-02 11:03수정 :2016-01-02 16:08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표(오른쪽)와 안철수 무소속 의원이 30일 오전 도봉구 창동성당에서 열린 고 김근태 전 의장 4주기 추도미사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표(오른쪽)와 안철수 무소속 의원이 30일 오전 도봉구 창동성당에서 열린 고 김근태 전 의장 4주기 추도미사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성한용의 정치막전막후 54]

2016년으로 넘어오기 이틀전인 2015년 12월30일 김근태 전 의원 4주기 추모식이 열렸습니다. 창동성당에서 열린 추모미사에 문재인 대표와 안철수 의원이 참석했습니다. 두 사람은 미사 전에 잠시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언론에 이미 보도된 내용 그대로입니다. “신당 작업은 잘 돼갑니까?”(문재인) “예, 지금 시간은 촉박하지만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연말연시 다 없을 것 같습니다.”(안철수) “총선 시기에 맞추려면 시간이 별로 없죠?”(문재인) “네네, 다들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선거구제 획정도 끝나지 않아서. 지금 어떻게 진행돼가고 있습니까?”(안철수)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면서 잠시 말이 얽혔다가 대화가 다시 이어졌습니다. “종교가 가톨릭이신가요?”(문재인) “저희 아내와 딸도 견진까지 다 받았습니다.”(안철수) “우리 안 대표는요?”(문재인) “하하하. 저는 가톨릭학생회 출신입니다.”(안철수) 그리고 두 사람은 미사를 드리러 성당으로 올라갔습니다. 안철수 의원은 가톨릭학생회 출신이지만 종교가 없습니다. 문재인 대표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추모미사에 이어 진행된 추도식에서 문재인 대표는 매우 인상적인 추도사를 했습니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민주주의자 김근태 선배님. 우리는 선배님이 없는 네 번째 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이곳에 오는 내내 선배님과의 추억들, 특히 고문 후유증 때문에 힘들어하시던 모습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고 있는 지금, 선배님의 부재가 우리를 더욱 춥게 만듭니다.” “김근태 선배님은 온 평생을 민주주의를 위해 살았습니다. 스스로 투쟁으로 쟁취하고 지켜온 민주주의 안에서 자유와 정의가 넘치는 나라를 꿈꾸셨습니다. 선배님이 없는 네 번째 겨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국민의 희망은 절망으로, 꿈은 포기로 바뀌었습니다. 남은 것은 오직 무능과 무책임으로 점철된 정부, 고통 받는 국민 위에 군림하는 불통의 정부만 있을 뿐입니다.” “선배님의 마지막 호소를 아프게 기억합니다. 2012년을 점령하라. 선배님은 병상에 계시는 동안에도 호소하셨습니다. 그 간절했던 호소는 선배님의 당부를 받들지 못했다는 뼈아픈 반성과 함께 여전히 우리들 가슴에 뜨겁게 살아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김근태가 되어야 합니다.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미완의 희망을 우리가 함께 해내야 합니다.” “하나가 되지 않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선배님이 우리에게 남긴 말씀입니다. 선배님은 이미 이기는 방법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기기 위해 더 혁신하고 더 단합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 큰 통합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더 강한 야당, 더 단단한 야당이 되어 박근혜 정권에 맞서 이겨야 합니다. 그것이 선배님의 간절한 희망을 이루어드리는 길일 것입니다.” “선배님.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내년 추도식 때는 총선 승리의 소식을 자랑스럽게 보고드리고 2017년의 희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선배님의 유언 집행을 더 지체하지 않겠습니다. 김근태 선배님. 편히 쉬십시오.” 추도식 사회를 맡은 최상명 우석대 교수가 안철수 의원과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에게 추도사를 부탁했지만 안철수 의원은 사양했습니다. 박용만 회장은 고인과의 특별한 관계를 회고하는 내용으로 짤막한 추도사를 했습니다. 추모미사가 끝나고 성당 밖으로 나가는 문재인 대표와 안철수 의원에게 기자들이 따라붙었습니다. 문재인 대표는 ‘안 의원과의 만남이 어색하지 않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어색할 수도 있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앞으로 좋은 경쟁을 해 나가야 하고 언젠가 또 합치기도 해야 하고 길게 보면 같이 가야 할 사이니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무소속 안철수 의원이 30일 오전 서울 도봉구 창동 성당에서 열린 고 김근태 4주기 추모미사에서 맞은편 자리에 착석해 있다. 뉴시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무소속 안철수 의원이 30일 오전 서울 도봉구 창동 성당에서 열린 고 김근태 4주기 추모미사에서 맞은편 자리에 착석해 있다. 뉴시스

안철수 의원은 기자들과 이런 문답을 주고 받았습니다. -문재인 대표가 추도사에서 야당 통합을 말했다. “제 원칙은 이미 얘기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까 추도사는 부탁을 받았습니다만 제가 말씀드리기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사양했습니다.” -사양하신 이유는? “저보다 더 많은 노력들을 한 분들이 거기 많이 계신데 저는 자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인영 의원이 앞으로 오라고 했는데 거절한 이유는? “이인영 의원이 제 앞에 앉으시는게 맞다고 봤습니다.” -어떤 의미인가? “고 김근태 고문께선 대한민국 민주화의 상징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그 정신을 기리고 그리고 계승할 책무가 있습니다. 또 인재근 의원님 사실 처음 선거에 나서실 때 제가 도와드렸습니다. 당시 유일하게 제가 두 분을 도와드렸습니다. 제가 노원 선거 때 당이 다른데도 제가 무소속이었는데도 직접 오셔서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지금 현재는 같은 복지위 소속입니다. 그런 깊은 인연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찬을 안했는데. “예 저는 영세는 받지 않았습니다. 가톨릭학생회 출신으로 거기서 제 아내도 만나고 했습니다.” -미사에서 김근태 정신 얘기가 많이 나왔다. 신당 추진과 맞닿아 있을까? “아까 신부님을 포함해 여러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 김근태 전 고문님, 그 생각과 정신을 기리고 꼭 후배들이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재인 대표가 김근태 정신을 얘기하며 통합을 강조했다. “통합에 대해서는 제가 벌써 세번에 걸쳐 말씀드렸습니다.” -문재인 대표에게 선거구 협상을 물었는데? “사실 지금이 소선거구제를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몇달전부터 간절하게 바랐지만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루 남았습니다. 밤새워서라도 여야가 협의해서 소선거구제를 조금이라도 바꾸길 바랍니다. 지금 바꾸지 못하면 20대 국회에서 현재 의원 300명 전원이 바뀌더라도 똑같은 모습이 됩니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어렵습니다. 밤을 새워서라도 정의화 국회의장님과 여야 대표가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아주길 간절하게 소망합니다.” 김근태 4주기에 만난 문재인과 안철수
어색한 짧은 대화 뒤 미사집전 함께해 “여기 올 자격없다”는 싸늘한 눈길엔
김근태 민주대연합론과 반대된 행보 때문
그건 바로 연합의 기본이 양보에 있는데
문재인·안철수는 서로를 불신하고 있고
두 지지자들 ‘안빠’ ‘문빠’ 부르며 증오 김근태가 말한 민주대연합론의 참뜻을
두 의원은 뭐라고 응답할까
문재인 대표와 안철수 의원은 각자 차를 타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추도식 참석을 추모객들이 꼭 반긴 것만은 아닙니다. 추모미사에 참석했던 한 국회의원은 “당을 분열시킨 문재인 대표나 안철수 의원 모두 김근태 정신을 말할 자격이 없다. 오늘 여기에 올 자격도 없다”고 싸늘하게 말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김근태 정신이 무엇일까요? 최상명 교수가 최근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정치인 김근태는 ‘민주대연합론자’이다. 대연합은 힘을 합쳐 보다 큰 적을 이기는 정치전략이다. 그래서 대연합은 약한 소수자의 희망이 될 수 있다. 또 대연합은 참여하는 사람들의 양보와 희생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대연합이 필요한 국면, 대연합을 말하는 정치인들은, 늘 그 전제에서 ‘나는 예외다’였다. 김근태만이 예외를 스스로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결국 김근태만이 양보하고 희생했다. 많은 사람들은 ‘나’를 주장하면서 싸운다. 그러나 김근태는 ‘나’를 희생하면서 싸웠다. 정권을 내어주는 일이 그동안 우리 국민의 피와 땀, 열사들의 숭고한 죽음과 희생으로 일구어 온 민주주의를 일순간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김근태는 양보하고 희생했다. 그리고 대연합을 이루는 다수의 뜻에 복종하고 헌신했다. 민주주의자의 길이었다.” 김근태 전 의원의 정치 노선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김근태 전 의원은 1985년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의해 전기고문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재야의 지도자였던 김근태 전 의원은 1992년 ‘민주대연합을 통한 민주정부 수립’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민주대연합 후보(김대중)는 패배했습니다. 김근태 전 의원은 그 뒤에도 민주대연합을 통해 냉전적 수구세력과 싸워야 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민주대연합론은 김영삼 정권에 면죄부를 주고 3당합당을 사후적으로 합리화시켜준다는 등의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3당합당을 거부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도 민주대연합론을 비판했지만 시간이 흐른 뒤 태도를 바꿨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근태 전 의원을 통해 정치란 교조의 원칙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기반을 잃지 않으면서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켜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고 고백한 일이 있습니다. 김근태 전 의원은 2007년 재집권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스스로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뒤 대선주자 연석회의와 대통합신당 창당 합의를 이끌어냈습니다. 최상명 교수의 글에 나온대로 민주대연합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참여하는 사람들의 양보와 희생’입니다. 연합을 하려면 서로 양보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재인 안철수 두 사람은 같은 정당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서로에게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서로를 불신했습니다. 물론 따져보면 둘 중에 더 잘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안철수 의원이 탈당했고 야권은 지금 분열하고 있습니다. 추모미사에 참석했던 국회의원이 문재인 안철수 두 사람을 강하게 비판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민주화의 대부’로 불렸던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의 전신) 상임고문의 4주기 추모행사가 30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 마석모란공원 묘역에서 열렸다. 연합뉴스
‘민주화의 대부’로 불렸던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의 전신) 상임고문의 4주기 추모행사가 30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 마석모란공원 묘역에서 열렸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표와 안철수 의원은 돌아갔지만 김근태 전 의원 4주기 추모행사는 이어졌습니다. 오후 1시30분 마석 모란공원 김근태 묘역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기동민 전 서울시 부시장이 사회를 봤고 유인태 의원이 제례를 집전했습니다. 홍익표 의원이 축문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우원식 의원과 이동진 도봉구청장이 추도사를 했습니다. 우원식 의원이 김근태 전 의원에게 보내는 편지가 추모객들의 가슴을 때렸습니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근태 형님. 올해도 어김없이 형님의 벗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계절이 바뀌듯 남은 벗들의 삶도 조금씩 변해가지만, 형님을 향한 애끓는 심정만큼은 결코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형님.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형님의 눈빛이 아직도 생생한데, 나지막하지만 또렷한 그 목소리가 귓전을 맴도는데, 벌써 4년이 지났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그러나 요즘 제게는 형님의 선한 눈빛이 매서운 서릿발처럼 느껴집니다. 나지막한 목소리는 꾸짖음이 되어 돌아옵니다. 박근혜 정부의 광폭한 노동개악에 맞서 흔들림 없이 버티고 있는데도, 국민이 을로 전락한 세상을 바꾸고자 중소기업, 노동자, 영세자영업자를 비롯한 이 땅의 서민과 점점 더 굳건히 손잡고 가려 하는데도, 어쩐지 형님이 바라던 국민들의 편안한 삶은 험난해져 가기만 하고, 민주주의는 후퇴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왜곡도 도를 넘어 친일이라는 굴종의 역사를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형님이 살아생전 그토록 강조하신 민주대연합,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말씀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습니다. 최후의 보루마저 무너져 내리는 암울하고 참담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 대해 형님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계실겁니다. ‘이 땅의 민주세력이 하나되지 못하고 어찌 국민의 고통받는 삶을 지킬 수 있느냐.’ ‘혁신을 내부를 갈라놓는 도구로 악용하면서 어찌 세상을 진전시킬 수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국민들의 삶은 도탄에 빠져만 가고 있는데 힘을 모두 합쳐도 부족할 판에 그 알량한 대권욕 때문에 우리는 부서져만 가고 있습니다. 저희는 그것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못난 후배들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바라보고 계실 형님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다시한번 다짐합니다. 형님은 희망은 힘이 세다고 하셨죠. 저희는 형님이 말씀하신 힘이 센 그것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근태 형을 기억하는 우리들부터 오직 국민의 삶을 위한 길만 가겠습니다. 국민의 삶과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통일을 위한 형님의 민주대연합의 긴 여정에 함께 했던 우리들입니다. 지도도 나침반도 없는 길을 걷는 심정이지만 반짝이는 별처럼 김근태의 유지를 이정표 삼아 뚜벅뚜벅 걷겠습니다. 더불어 전태일 열사와 이소선 어머니, 문익환 목사님, 그리고 수많은 열사와 동지들까지 이 곳에 잠들어 있는 이 땅의 노동의 권리와 민주주의, 통일을 바라던 모든 이들의 염원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근태 형님 앞에서 잡았던 손, 결코 놓지 않고 우리는 여기에 다시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간직하고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수백 수천의 김근태가 되어 돌아오겠다는 약속, 꼭 지키겠습니다. 김근태의 이름, 부끄럽지 않게 살겠습니다. 사랑합니다. 형님. 보고싶습니다. 형님. 또 다시 만날 날까지 편히 쉬십시요. 우원식 의원은 을지로위원회 위원장입니다. 또 김상곤 전 경기도교육감이 주도한 당 혁신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했던 사람입니다. 우원식 의원이 말한 ‘혁신을 내부를 갈라놓는 도구로 악용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힘을 모두 합쳐도 부족할 판에 그 알량한 대권욕 때문에 부서져만 가고 있는 우리’는 또 누구일까요? 우원식 의원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대표와 안철수 의원은 혁신을 명분으로 갈등했습니다. 안철수 의원은 혁신전당대회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탈당했습니다. 문병호 황주홍 유성엽 김동철 임내현 권은희 등 탈당한 의원들은 이른바 ‘친노패권주의’를 청산해야 당을 혁신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두가 상대에게 혁신을 외치며 갈라서고 있는 것이 지금 야권의 모습입니다. 부서져 가고 있는 것은 야권 전체입니다. 정당과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지지자들도 부서져 가고 있습니다. 안철수 의원 탈당 이후 문재인 대표와 안철수 의원 지지자들은 서로를 ‘안빠’ ‘문빠’라고 부르며 헐뜯고 증오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회관계망과 언론을 자세히 살펴보면 야권 분열을 위한 공작도 확실히 작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슷한 장면이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1987년 12월 김영삼-김대중 후보 단일화 실패 이후 두 사람의 지지자들은 상대 후보를 ‘색광’ ‘빨갱이’로 부르며 증오했습니다. 정치공작 세력의 이간책이 틈을 더 벌렸습니다. 대통령 선거 결과는 노태우 민정당 후보의 승리였습니다. 분열의 상처는 그 이후 우리나라 정치와 역사를 뒤틀었습니다. 야권의 갈등과 분열이 시작된 이후 김근태 전 의원이 살아 있다면 뭐라고 했을까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습니다. 우원식 의원의 추도사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무조건 다시 합치라는 것은 해법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김근태 전 의원이 말했듯이 주먹을 쥐고 악수를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김근태 전 의원 4주기가 야권의 갈등과 분열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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