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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선 후보? 스피커가 커져 좋다"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복지는 세금 환원, '공짜' 개념 불성립"
 
"Denn Armut ist ein großer Glanz aus Innen." 가난을 모욕하지 마라. 가난은 내면에서 비치는 위대한 빛이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시인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의 시에 나온 구절이다. 돈과 권력이 인간의 먹을 것을 위협할 수 있을지라도 인간의 내면의 빛을 가리지는 못한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소년 이재명. 초등학교 졸업 후 동년배들은 교복을 입고 학교로 향할 때 그는 더러운 회색 작업복을 입고 공장으로 향했다. 공장 프레스에 팔이 끼여 비틀어졌지만, 가난하고 무능한 자신의 탓이지 사회의 구조적 잘못이란 것을 그때는 몰랐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좀 더 높은 자리에서 사람을 부릴 수 있는 관리자가 되기 위해 공부했다. 장애인이 이 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공부만이 살 길이었다. 대학 4년 내내 교련복을 입고 다니며 사법고시에 매달렸다. 그러던 그가 평생을 함께할 공동체를 만났다. 사법 연수원에서 만난 동료와 선후배는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미래의 희망을 함께 꿈꾸기에 충분했다. 경기도 성남에서 인권변호사와 시민사회 활동가로 불의와 맞서 진흙탕을 밟을 때 공동체의 변함없는 지지와 도움으로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복지를 비롯한 모든 사회서비스는 시민이 내는 '세금'을 '행정'이라는 수단을 통해 환원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공짜'라는 개념이 성립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기득권과 권력층이 '복지'를 시혜적이고 소비적인 것으로 왜곡하며 스스로 정부의 역할을 외면함으로써 본래의 의미를 훼손시킨 것이다. 국가는 시민의 기본적 삶의 권리를 보장하고, 공적 재산을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불요불급한 지출을 막아 시민들에게 환원하는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야 한다." 

그가 삶을 통해 경험한 복지의 개념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대표가 되겠다고 나온 사람들에게 시민이 표를 주는 것은, 가난하지만 아름답고 고귀하게 살 수 있도록 불의한 세력의 힘을 조정하라는 의미다. 아울러 이를 거슬렀을 때는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뜻이다. 

"망가진 시스템 안에서 대다수의 개인은 계속 무시당하고 배제당하고 박탈당한다.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 개인적 역량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사회 시스템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다. (중략) 지는 것도 습관이다. 지기만 하는 것은 진영 전체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철저하게 준비해 이길 수 있는 싸움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 뭘 하더라도 대충하지는 않을 거다."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댓글에 가감 없이 '핵 직구'를 날리는 이재명. 그가 앞으로도 늘 시민들과 소통하며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찬란하게 밝은 빛을 비추는 일을 계속하길 바란다.
 

▲ 이재명 성남시장. ⓒ프레시안(최형락)


- 유년시절부터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본인과 가족 모두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 공장 생활을 하는 중에 삶의 조건을 바꾸기 위한 수단으로, 공부를 선택한 건가. 

당시 대부분이 가난했다. 가난의 유일한 탈출구는 공부라고들 했다. 공장에서 생활하며 보낸 유년시절은 괴롭고 암울했다. 폭력이 일상이었다. 너무 힘들어서 나를 두들겨 패던 공장 관리자가 고졸인 것을 보고, '나도 고졸이 되면 때리는 관리자가 될 수 있겠다'라는 생각에 공부를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80년 전두환 쿠데타 이후, 드디어 길이 열렸다. 81년에 본고사가 없어지면서 전국 모든 학생이 학력고사를 보게 됐고, 1등부터 64만 등까지 매겨진 점수에 따라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몇 등 이상부터는 대학 등록금을 면제해주는 장학제도도 생겼다. 이때 '죽도록 공부해서 대학에 가겠다'는 생각으로 이듬해 82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이게 다 전두환 장군 덕이다.(웃음) 스스로도 '전두환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녔다고 얘기한다.

- 초등학교 이후 오랜만에 한 공부였을 것 같다. 낮에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 공부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서울에 올라와 6년간 공장 생활을 했다. 1976년 딱 중고등학교 과정인 나이에, 친구들은 학교로 향할 때 나는 공장을 전전했다. 공장 생활 2년쯤 사고를 당해 장애를 가지게 됐다. (두 팔을 뻗으며) 나는 지금도 차렷 자세가 안 된다. 한쪽 팔이 휘어서 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은 해야 했으니, 불편한 몸으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해서 1978년 고입검정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대입검정고시를 봤다. 그리고 1년간 대입 공부를 해서 대학에 진학했다. 운이 좋았다.  

당시 아버지, 어머니와 7남매가 단칸방에서 생활했다. 형제들도 다 공장에 다녔는데, 한 데서 같이 얽혀 살면서 일하고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공장에서 돌아와 밤에 공부하면 식구들이 잠을 설친다고 해서 불화도 좀 있었다. 특히 아버지는 그 어렵던 시기에 대학을 다니다 중퇴했는데, '공부해서 뭐하느냐'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공부하는데 별로 협조적이지 않았다. 나중에 대학에 간 뒤에야 조금 바뀌었다. '기대도 안 했는데, 되네?' 하고 생각한 것 같다.(웃음)  

- 1982년 중앙대 법학과에 들어갔다. 그동안 공부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던 아버지도 아들이 법대에 입학했을 때는 좋아했을 것 같다.  

처음부터 법대에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돈을 제일 많이 주는 대학에 간 거다. 의대와 법대 중 합격선이 가장 높고 최대한 손해를 덜 보는 과를 택했다. 의대는 실습비 등 자기 돈이 많이 드는데, 법대는 그렇지 않다더라. 당시 공장 월급이 8만 원 정도였는데, 법대에 들어가면 등록금 면제에 한 달에 20만 원씩을 더 받았으니, 엄청 많이 받은 것이었다. 그 돈으로 집 생활비도 보태고, 공장 다니던 형님의 입시 공부까지 도왔다. 나름 입신양명(立身揚名)했다.  

- 소위 정상적으로 열심히 공부만 해서 서울 소재 대학교에 들어온 학생들과 다른 이력을 가지고 대학에 들어갔다. 외롭지는 않았나? 

외로웠다. 대학 4년은 물론 사법연수원을 마친 후에도 나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당시 중앙대 법대는 가난해서 온 학생이 많았기 때문에,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퇴하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난 중·고등학교 연고도 하나 없이 전혀 다른 세계에서 대학 시절을 반항적으로 보냈다. 교련복에 코트 한 벌을 걸치고 고무신 신고 4년을 다녔다.(웃음) 졸업할 때까지 사회가 낯설었다. '남의 세상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들에게 사법고시와 행정고시가 있다고 들은 후, 그렇게 판검사와 고위직 공무원이 되는 구나를 알게 됐다. 당연히 처음부터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 법대에 간 것은 아니었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취직이 안 되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시 공부만이 살 길이었다.  
 

ⓒ프레시안(최형락


- 대학은 그동안 속했던 환경과 전혀 다른 환경이었다. 어떤 충돌을 경험했나?

대학에서 충격받은 게 하나 있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 1980년 공장에서 일할 때 일어났는데, 당시 동료와 선후배 모두 '전라도, 나쁜 놈들이다. 폭도다. 북한과 짜고 대한민국을 폭력적 방법으로 뒤엎으려는 용공분자'라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 전라도 사람들을 많이 비난했다. 그런데 대학 입학 후,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내 자신이 너무 창피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생각하니, '내 자신이 원래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닌데, 정보의 왜곡으로 내가 나쁜 놈이 됐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정말 나쁜 짓이다. 사람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하는 것도 나쁜 짓이지만, 국민에게 온갖 거짓말로 속이는 것 또한 나쁜 일이다. 국민 대부분은 그렇게 왜곡된 정보 속에서 문제의식 없이 자신의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일이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면, 반드시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한 가지는, 그동안 공장에 다니면서 산업재해로 장애인이 돼도 피해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다른 세계에서 넓은 시야로 보니 이것 또한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가 크게 작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잘못된 사회 구조에서 개개인이 억울한 경우가 많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종의 의식화가 된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내 경험을 잘 활용해 살아온 환경 자체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 계속 공장에 있었으면, 이런 인식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렇다. 만약 대학에 가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지금쯤 일간베스트 회원으로 살고 있을지도….(웃음) 그동안 인생을 위험하게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만약 정상적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면, 타고난 반항 기질 때문에 깡패가 됐을 것이다.(웃음) 물론 공장 생활을 하면서 여기저기 다치고 잃은 것도 많지만, 그 짧은 시간이 오히려 인생의 자양분이 된 것 같다.  

- 사법연수원에서 만난 동료와 선후배 덕에 인생의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했다고 말했다. 개인의 입신양명을 넘어 타인을 돕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계기 있나.  

대학 입학이 내 인생의 제일 큰 전환이었다면, 사법연수원에서는 또 다른 변화를 겪었다. 그곳에서 '세상은 너무 이상하다. 이 이상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고, 그 과정에서 삶이 많이 구체화됐다. 대학 시절 학생 운동하는 친구를 보며 '이건 너무 소모적이지 않은가?'라는 생각과 동시에 '나중에 역량을 키워 사회 운동을 하겠다'는 (일종의 기회주의적인) 생각이 있었는데, 사법연수원에 들어가고 나서 새 삶이 시작된 것이었다.  

1986년에 사법고시 합격해서 87~88년 2년 동안 사법연수원을 다녔다. 당시는 격변기로, 소위 87년 체제가 만들어지던 때였다. 이런 시대적 환경 속에서 함께 사법연수원 생활을 한 18기 동기들이 가장 격렬했다. 사법연수원에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불량 서클' 같은 것이 있는데, 내가 좀 쓸 만해 보였는지 그 그룹에 차출당했다.(웃음) 지금 새정치민주연합 문병호 의원, 정성호 의원 등과 함께 '우리가 이 사회에서 모종의 역할을 하자'고 결의하고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을 하기 위해 지역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성남으로, 문병호 의원은 부평으로, 정성호 의원은 의정부로 갔다.  

- 지역에 갔을 때 준비된 게 있었나. 

전혀 없었다. 다만 동기들과 일종의 '도원결의(桃園結義)'를 하고 지역에 내려갔을 때는 이미 그 지역에 자체적으로 조직된 모임이 있었다. 세미나 등 각종 모임을 찾아다니면서 사람들과 여러 관계가 만들어졌다. 사법연수원에 있을 때 노동상담소 지원 활동을 하며 알게 된 장명국 선생(현(現) <내일신문> 대표), 최영희 전 의원(구(構) 민주통합당) 등과 성남에서 첫 지역 활동을 시작했다.  

- 비슷한 뜻을 가진 동료를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덜 외롭다'는 뜻이다. 혼자였다면 두렵고 불안했을 텐데, 동료를 보면서 '그렇지 않다(외롭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노무현 대통령이 당시 사법연수원에서 강의를 했는데, 그때 '변호사 하면 최소한 밥은 먹고 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저렇게도 살 수 있구나!' 싶었다. 그런 자신감에 1988년 사법연수원 시절 학회에서 기수들끼리 '정기승 대법원장 인준 반대 서명 운동'을 했는데, 성명서를 내가 썼다. 잘릴 각오를 하고 쓴 건데, 다행히 잘리지는 않았다. 연수원에서 만난 동료와 조직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게 많은 힘이 되고 있다.  

- 인권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로 성남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이 과정에서 공권력의 위협, 따돌림, 비난, 오해, 경제적 어려움 등을 감수해야 했을 텐데, 그럼에도 그 길을 걸을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나.

한번 시작했는데, 자존심이 있지 중간에 멈출 수는 없지 않나. 흔히 쓰는 말로, '곤조(일본어로, '근성(根性)'에서 나온 말)'라고 해야 할까? 고집이 셌던 것 같다. 끝을 보지 않고 중간에 그만두면 그동안의 삶이 너무 허망해질 것 같았다. 내가 좀 집요한 면이 있다. '뒤끝 작렬'이라고 해야 하나?(웃음) '책임에 관해서는 끝까지 묻고, 받은 건 (좋은 쪽으로) 반드시 갚아 준다'는 게 내 신념이다. 주변 관계도 그렇고, 작은 것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시민운동을 할 때는 실질적인 위협이 있었다. 2002년 분당 파크뷰 개발 특혜를 폭로했다고, 첫 번째로 구속됐다. 그 뒤로 여러 가지 일이 있었는데, 6연발 가스총을 소지하고 다닌 적도 있다. 물론 총기 소지 허가를 받았다. 가스총을 아주 비싼 값에 사서 양복 뒷주머니에 차고 다녔다. 새벽마다 전화해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는데, 어쩔 수 없었다. 한 번은 '눈감아주면 20억 원을 주겠다'고 회유하더라. 그때마다 불안하고 힘들었지만, '하던 일은 마저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끝장을 봤다. 결과적으로 나도 감옥 가고 저들도 감옥 갔다. (웃음). 나는 잠깐 가고 저들은 길게 가고.(일동 웃음) 

이 과정에서 결국 '사회적 부(副)'라고 하는 것이 '누군가가 대규모의 이익을 취하면, 그만큼 다른 사람 주머니에서 조용히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물론, 진짜 노동을 해서 부가가치가 생기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부당하게 이익을 얻는 것에 대해서는 '공짜'란 없다. 내게 20억 원을 주겠다고 회유한 사람들의 사업을 계산해보니, 그들이 얻은 이익만 약 3~4000억 원이더라.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등 재벌 3세들이 겨우 몇백 억 원의 세금을 내고 몇조 원의 이익을 얻는데, 절대로 '공짜'가 아니다.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빠져나간 것이다. 이런 일을 용서하면 안 된다. 돈은 곧 '마귀'다. 이런 이야기를 평소에도 한다. '돈과 업자는 천사의 얼굴을 한 마귀다.' 평소엔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그렇지만, 결국은 성완종과 같은 비극적 결말에 이르게 된다. 이게 바로 돈의 본질이다. 

- 2004년 성남시장 출마를 시작으로, 2007년 민주당 부대변인 역임하며 정치에 발을 들였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2010년 성남시장에 당선됐다. 사법과 시민운동의 길에서 정치행정가로 전환한 계기는? 

결정적 계기는 2002년 수정·중원구 등 본 시가지 종합병원 폐업으로부터 시작된 성남 시립의료원 문제였다.(2003.12.29 주민 1만 8595명이 성남시 지방공사의료원 조례 제정 발의) 당시 성남에 50만 명이 살았는데, 병원 두 개가 문을 닫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돈이 안 되니까 철수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공병원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립의료원 설립운동을 시작했다. 경로당을 찾아다니며, 정말 어렵게 시립의료원 설립조례 주민발의를 위해 1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았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싸웠는데, 시의회 의원들이 47초 만에 날치기로 부결시키고 도망갔다. 당시 방청하고 있던 우리 모두 울고불고, 책상 위로 뛰어 올라가 명패도 던지며 도망가는 의원을 잡으려고 쫓아 다녔다. 그 모습을 한 기자가 찍었고, 내가 대표로 특수공무집행방해·재물손괴·치상 등의 이유로 수배됐다.  

2004년 3월 28일 오후 5시. 내 인생을 명확하게 결정한 날이었다. 수배 중이라 주민교회 지하실에 숨어 있었는데, 당시 보건의료노조 간부였던 선배와 초밥을 같이 먹으며 억울한 마음에 울다가 '그냥 우리가 시장이 돼서 직접 만들자!'고 결심했다. 내 목표는 분명했다. 성남에 공공의료원을 하나 만들자는 것이었다. '2005년부터 조직 활동을 시작해 무소속으로 돌파해보자'고 했다. 그런데 2005년 당시에는 정당공천이 없었던 시의원도 공천을 받도록 제도가 바뀌어 버렸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우리가 열린우리당을 점령하자'며 용기백배해서, 성남에서 5300명 당원을 조직해 입당했다. 지금은 새누리당 소속인 신영수 전 성남시장 후보(현(現) 성남발전연합 상임대표)가 열린우리당으로 출마하려다가 중간에 포기해 2006년 출마할 때는 당에서 후보가 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가 노무현 정권 말기였기 때문에 열린우리당으로 나와 봤자 떨어질 게 뻔해서 다들 출마를 하지 않은 거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우리는 '뭐, 이렇게 널널하고 쉽노?' 하면서 돌진했다.(일동 웃음) 결국 득표율 27퍼센트(%)로 떨어졌다. 우린 이 일을 지금도 '대학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 2010년에 시장이 됐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2013년 11월, 10년 만에 내 손으로 시립의료원을 착공했다. 내후년이면 완공된다. 우연인지 몰라도, 시립의료원 착공 시기가 홍준표 경남지사가 진주의료원을 없앨 때였다. 그래서 의료공공성을 강화하려는 성남과 진주가 자주 비교됐다.  

노무현 정부의 가장 큰 치적은 정치제도의 개혁을 통해 나 같은 사람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첫 번째는 '기간당원제'라는 제도를 통해 정당이 민주화된 것이다. 두 번째는 '선거공영제'로, 일정 수치 이상 득표하면 선거 비용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크게 손해 보지 않고, 정치를 할 수 있게 된다. 단순한 제도개혁으로 보이지만, 이를 통해 정치 부패의 고리를 하나 끊어낸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인권변호사 시절, '형식적으로나마 법률과 상식을 지키는 정상적인 사회가 되도록 하자'고 결심했다. 시민운동은 그 내용을 채우는 일이었고, 정치인은 이 일을 현실에서 실행할 수 있는 자리다. 

- 공공의료원 설립은 본인의 철학에 기반을 둔 것이었나.  

법률을 전공한 사람으로 사회적 약자와 관련한 법에 관심이 있었고, 스스로도 사회적 약자에게 기여하는 삶을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인간 사회가 동물 사회와 다른 것은 '절제'인데, 욕망은 개별적 선택만으로는 절제가 안 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욕망은 정치나 행정, 실력으로 제압할 수밖에 없다. 인간 다수를 모두 행복하게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해주는 것이 헌법적인 의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인 인권, 최소한의 인간적 삶은 의식주 해결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의식주를 포함하여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현대 사회는 (정말, 말도 안 되는데…) 진실처럼 유통되는 신화가 많다. 그 중 하나가 의료원 문제다. 의료는 당연히 개인이 책임져야 하고, 또 의료기관은 이익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구성원이 최소한의 삶을 위해서는 먹고 자고 입어야 하는데, 거기에 더 중요한 것이 건강을 잃었을 때 다시 건강한 삶을 되찾게 해주는 의료 문제다. 이것은 국가의 의무다.  

현 정부는 보통 사람의 건강 증진에 대해서는 열심히 연구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공원과 체육시설을 만들어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일 등. 그런데 정작 국민이 건강을 잃었을 때 돈 없이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참, 이상하다. 후자가 더 중요한 것 아닌가? 더구나 민간에서 의료비를 커버할 수 없으면, 공공에서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의료가 돈벌이 영역으로 치환되면 안 된다.  

이런 기본적인 사고로, 시립의료원 설립 운동을 시작했고 하다 보니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됐다. 유럽은 공공의료 비중이 70%가 넘고 영국은 90%다. 미국이나 멕시코 같은 국가도 30%가 넘는데, 정작 한국은 10%다. 요즘은 더 떨어져서 9.8% 정도다. 공공의료 비중이 낮아도 너무 낮다. 이제는 국민이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개인이 좋은 병원에 가는 것은 자유지만, 최소한의 의료는 제공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기초생활수급자에게 기본적인 식(食)을 제공하면서, 왜 치료는 안 해주나.  

- '무상의료, 공공의료' 정책은 의료 행위로 돈을 버는 사람들의 이익과 대치되는 주장이라 반대가 심하지 않나.  

보통 치과의사, 한의사, 약사들은 동의한다. 일반 의사들은 의견이 나뉜다. 물론 그들에게는 의료 행위가 먹고사는 수단이니 이해는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의료 영역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과다 확장한 게 문제다. 하다하다 안되니 원격진료다, 법인화다 하면서 다른 의료 행위마저 잠식하려 한다. 일반 환자는 물론, 극소수 자본화된 의료인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의료인도 피해자가 되는 일이다. 그래서 지금은 일반 의사들 사이에서도 넓은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시립의료원 설립 운동 중 가장 어려웠던 일은 오히려 일반 시민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사람들에게 시립의료원이라고 이야기하면 자꾸 시골의 2층짜리 회색건물을 상상한다. 싸구려 더러운 시설에 무능한 의사가 있는 곳으로 생각한다. 이런 생각 때문에 공공의료가 점점 더 낙후되고 죽어간다. 이처럼 부정적 현실과 인식의 반복으로 인해 공공의료는 싸구려, 불친절, 더러운 곳이라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이 인식을 깨고 공공의료를 확충하려고 했다. 공공의료기관 의료인에게 월급도 제대로 주고 양심에 따라 진료할 수 있게 하면, 의료인도 자부심을 가지고 하지 않겠나. 그러나 일부 공공의료의 현실은 매출을 얼마나 올리는지에만 혈안이 돼서 이틀만 먹으면 될 약을 열흘 또는 한 달 치를 처방한다. 매출을 기준으로, 순위를 매겨 의료인을 노예화하는 셈이다. 이건 비정상적이다.  

- '무상급식, 무상교육, 무상교복, 무상산후조리원' 등 전면적인 무상복지를 실현하고자 한다. 복지에 대한 생각을 조금 더 설명해 달라. 

복지를 비롯한 모든 사회서비스는 시민이 내는 '세금'을 '행정'이라는 수단을 통해 환원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공짜'라는 개념이 성립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기득권과 권력층이 '복지'를 시혜적이고 소비적인 것으로 왜곡하며 스스로 정부의 역할을 외면함으로써 본래의 의미를 훼손시킨 것이다. 국가는 시민의 기본적 삶의 권리를 보장하고, 공적 재산을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불요불급한 지출을 막아 시민들에게 환원하는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야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현재 정치, 경제, 복지, 외교, 역사, 문화, 스포츠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본인의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 사람의 생각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분야를, 전문적인 부분까지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가능한 원천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일단 주변의 조언을 많이 듣는다. 토론도 자주 한다. 뭐든지 최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공부한 다음, 지지 않을 싸움만 골라서 하는 편이다. 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느 교과서에도 나오지만, '작은 승리를 많이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지는 것도 습관이다. 지기만 하는 것은 진영 전체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철저하게 준비해 이길 수 있는 싸움을 해야 한다. 물론 불가피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일단 준비를 잘해야 한다. 이순신 장군이 23전 23승을 했는데, 이유는 단순하다. 지는 싸움은 피하고, 철저하게 준비해 이기는 싸움을 했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 뭘 하더라도 대충하지는 않을 거다.

-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저지르면, 사람들이 '저 사람 혹시 사고치는 것 아냐?'라고 불안해하며 돕지 않는다. 그러나 준비를 철저히 하고 경험을 충분히 한 사람에게는 분명 '도움'이 온다.

- "부정부패의 구조를 극복하고 노력만큼의 성과가 보장되는 정상적인 사회, 주권자의 진정한 의사가 최대한 관철되는 민주적인 사회"(이재명 시장 블로그 중)를 꿈꾼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사회는 한국 사회에서 아직까지 충분히 경험한 바 없다.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종교, 도덕, 법률, 정치 영역 모두 근본에서는 큰 차이 없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종교가 추구하는 것도 결국 '인간 존중'을 출발점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존귀한 존재로 인정하는 것 아닌가? 인류 5000년 역사에서 인간 사회가 만들어낸 여러 가지 통치 시스템 중 민주주의가 가장 잘 만들어진 제도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 시스템은 '한 사람을 그 체제의 주인으로 인정한다'는데 가치가 있다. 이것은 종교의 본질과 일치한다. 사람을 귀히 여길 뿐 아니라,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이다. 그 국민을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 그런데 모두가 주권자로 정치에 참여하기 어려우니까 대리인 제도를 둔 것이고, 다수결을 택한 것이다. 대리인의 제1 의무는 구성원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며, 그 사회의 최종 목표는 구성원 최대 다수가 최대의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여기에서 출발한다. 구성원 개개인에게 '희망이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개인이 자원이나 부(富), 기회를 공평하게 가져야 된다. 이는 곧, 실질적 평등을 의미한다.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라는 측면에서 실질적 평등이 이뤄지는 사회가 돼야 구성원도 가능성을 갖고 꿈꿀 수 있다. 개개인이 꿈과 열정을 갖고 살아갈 때 사회도 국가도 건강해진다. 자원이나 부를 소수가 독점해버리면 개인도 엄청나게 불행하지만, 그 체제도 종말을 고하게 된다. '민주주의'라는 가치는 기회의 균등·실질적 평등·출발점에서의 평등이다. 물론 실현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되게 해야 한다.  

- 시장이라는 행정가의 위치에서 본인의 철학을 담은 정책을 마음껏 실현할 수 있는 것 같다. 만약 국회의원이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을까? 

어디에 있으나,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시민운동가, 인권변호사, 그리고 앞으로 국회의원이나 다른 공직을 맡더라도 차이를 못 느낄 것이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것이다. '불법적인 일이나 나쁜 짓만 아니면 다 하겠다'는 말이다. 지금 시장직도 운동하듯이 한다. 정치가 특별히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운동가로, 모든 사람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 그 자체가 참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환호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 신 난다. 그들에게 꿈을 줄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보람이다. 

'시장'직은 수단에 불과하다. 실제로도 시민단체 집행위원장할 때보다 조금 낫더라. 상근 근무자 한 명과 연간 예산 2500~3000만 원 정도로, 여러 일을 했다. 지금은 상근자만 3000명 이상이고 예산은 2조4000억 원이나 되니,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다. 이런 측면에서 '시장'직이라는 유용한 수단 하나를 확보한 것이다. 이것뿐이지,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모르지만, 손에 든 무기의 크기가 다를 뿐이다.

생각보다 개인의 역할이 크다고 확신한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몫도 엄청 크다. 나도 그 중 한 명이다. 공장노동자로, 혈연도 지연도 학연도 빽(?)도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갖고 있었던 것은 다만, 사람에 대한 믿음이었다. 한 명이 한 명을 설득해 같이 하면 두 명이 되고, 이렇게 모여 엄청난 시너지가 발생한다. 정책 하나를 결정할 때 구성원 모두가 n분의 1로 결정 권한을 갖는 게 아니다. 다수는 무관심하지만, 소수의 관심 있는 사람들이 경합해 그 중 센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관심 있는 소수, 옳은 생각을 가진 소수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요즘 SNS를 열심히 하는 이유다. 트위터(11만여 명)와 페이스북(2만 8000여 명) 팔로워 덕에 이제는 웬만한 언론사 하나쯤의 공격은 반격할 수 있다.  

- 지난 2월 SNS에서 "여당은 권력을 이용해 제 지지층만 챙기는데, 야당이 계속 지지층을 잃어가면서 여당지지층을 배려하면 승부는 이미 끝난 거다"라며, 여야 모두를 비판했다. 양대 정당의 기득권 구조를 만든 정치제도, 특히 선거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지난해 '정당공천제' 논란 당시 생각이 정리됐다. 수도권은 잘못된 정치제도의 피해가 작은 편으로, 공천받은 사람들끼리 실질적인 경쟁이 이뤄지기 때문에 공천제가 지속 가능하다. 하지만 실질적 경쟁이 없는 지역에서는 공천제를 폐지하는 것이 맞는다고 본다. 그러나 영호남에서 특정 정당이 공천을 하면 100% 당선이 되는데, 정당 공천이 무슨 의미가 있나. 자기들끼리 시장이며 군수며, 마음대로 결정하는 공천은 하지 않느니만 못 하다. 이는 민의를 왜곡하는 수단이다.  

현 소선거구제가 갖는 문제가 워낙 크다. 영호남 공천자는 바로 당선되기 때문에, 공천만으로 국회의원이 사실상 결정되는 정당 내 구조가 보완돼야 한다. 지금 논의하고 있는 '비례대표제 확대안'이 좋다고 생각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지난 2월 국회에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을 제안했는데, 내 생각에는 선관위의 안보다는 전국 차원의 비례대표 방식인 독일식 선거제도가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결국 국회 차원에서 조정되어야 한다. 문제는 국회의원들이 '현행 소선거구제에서 선관위가 제안한 권역별 비례대표제로라도 바꿀 생각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를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 선거제도에서 대의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장점이 많은 민주주의가 망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국회의원이 국민의 뜻을 반영하지 않고 당의 눈치만 본다는 것은 국민의 의사를 배반하는 것이고 민주주의를 왜곡하는 것이다. 이 점을 고쳐야 하는데, 결국 (하나마나하는 소리 같지만) 국민이 해야 된다. 또 향후 대통령 선거를 통해 강력하게 쟁점화해야 실현할 수 있다. 

-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안철수 의원과 함께 지난달 10일 한국갤럽이 발표한 2017년 대선 후보군(차기 정치 지도자)에 처음으로 이름이 올랐다. 기분이 어땠나. 

미국 출장 중이었는데, 지인에게 문자가 왔더라. 그래서 '장난치고 있네!'라며 가볍게 답장했다. 그런데 귀국 후 관련 기사를 찾아 확인하고 조금 놀랐다. 생각보다 좀 빨리 이름이 거론됐다는 생각도 들었다.(웃음) 유권자들이 대선에 벌써 관심을 두는 건가 싶어서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좋기도 했다. 대선 후보군에 이름이 올라서 좋기보다는, 내 스피커가 좀 더 커졌다는 측면에서 좋다는 뜻이다. 세상에 대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더 크게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군인에게 총이 있다면, 정치인에게는 입이 있다. 정치인에게 말은 무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스피커가 커졌으니(영향력이 늘었으니), 잘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운 일이기도 하고. 그것 말고는 변한 게 없다.  
 

ⓒ프레시안(최형락


-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직까지도 민주적 마인드, 시민 의식이 상당히 부족한 것 같다. 이런 인식이 어쩌면 젊은 세대로 갈수록 더 부족해지는 것 같다. 자기들끼리 아웅다웅하며, 자신이 무능해서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지. 이것이 왜 기울어진 운동장이 됐는지, 왜 나한테 불리하고 특정 소수에게는 유리한 시스템이 됐는지 생각 못하고 있다. 

망가진 시스템 안에서 대다수의 개인은 계속 무시당하고 배제당하고 박탈당한다.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 개인적 역량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사회 시스템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다. 시스템이 공정하게 작동할 수 있게,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구조를 만드는 것도 개인의 몫이다. 이러한 조건에서만 개인적 노력도 매우 큰 성과를 낼 수 있다. 내 삶의 조건은 내가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실망하기 전에 한 번 되돌아보고, 작은 관심과 참여를 통해 삶의 조건을 바꿔야 한다. 

사실 이것은 젊은 청년들만의 책임은 아니다. 전 세대가, 특히 기성세대가 책임져야 할 문제다. 교육을 통해 '공공의 이익(공리, 公理)이 개인적 이익과 무관하지 않다'고 끊임없이 예기하고 토론하며 실험도 계속해야 한다.  

- 어렵고 힘든 시절 자살을 기도했다고 들었다.  

주변에서 이 얘기는 너무 살벌하다고 하지 말라고 하더라.(웃음) 그래도, 뭐…. 어느 순간 공장에서 일하다 기계에 끼어 팔이 비틀렸는데, 정말 못 견디겠더라. 암울했다. 더러운 회색 작업복이 아닌 깨끗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볼 때 너무 부러웠다. 삶이 마치 절벽 끝에 매달린 것 같아 두 번 정도 시도했는데, 안 되더라. 진짜 죽으려고 했다면 죽었을 텐데, 덜 힘들게 죽으려고 하니까 잘 안된 것 같다.(웃음) 그 당시는 너무나 힘들어 시도한 것이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축복이다. 

- 인간이라 갖게 되는 열등감, 자신 없음, 스스로에 대한 불확실 등 내적 고민은 어떻게 극복하는 편인가. 

나는 열등감을 느낄 요소가 많다. 장애인이고, 중·고등학교도 못 다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것 하나하나가 나의 재산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모든 일은 다 양면이 있다. 음지만큼 양지가 있고, 산이 높은 만큼 골의 깊이가 있는 것이다. 나쁜 것과 비슷한 양만큼 어딘가에 좋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됐다. 그래서 어떤 나쁜 상황에도 좋은 요소를 찾아 잘 활용한다.  

의식 속에 존재하는 열등감만큼 무의식 속에 똑같은 크기의 우월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그래서 악조건이 닥쳐도 별로 괴로워하지 않는다. 난 공격을 당하면,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한다. 진짜 위기는 기회다. 오히려 가능성이 더 많아지지 않나. 통상적으로 좋은 측면에는 기회가 별로 없다. 누가 나한테 '종북'이라고 하면, 나는 달려든다.(웃음) 적의 공격이 집중되는 곳이 우리의 주력지(主力地)인 것이다. 피하지 않는다. 이게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되는 순간, "그럼, 딴 거 하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떠날 것이다. 

- 이재명에게 자유란? 

간절히 바라고 꿈꾸는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자유'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자유롭다. 시장직 또한 자유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기 때문에 언제든 버릴 수 있다. 대체 가능한 다른 수단이 생길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현재에 미련이 크게 없다. 그러니까 용감하다. 무언가에 너무 연연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연연하는 순간, 정상적 판단이 어렵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음에 뭐 할래?'라고 묻는다. 나도 모른다. 그때 가서 가다 보면 길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삶의 큰 방향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강을 만나면 배를 타고 들을 만나면 말을 타고 가면 된다. 미리 정할 필요가 없다. 정한다고 내 마음대로 되나? 그런 것도 없는 것 같다. 방향만 정하고 최선을 다하면, 길이 생기고. 그러다 죽을 때쯤 '그동안의 삶이 창피하진 않았네'라는 생각이 들면, '잘 살았구나' 생각할 것이다. 그런 삶을 살고 있고, 그래서 나는 자유롭다.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는 비례대표제포럼 손어진 간사가, 정리는 손어진 간사와 정치경영연구소 조경일 연구원이 담당했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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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70년과 친절한 국정원


 국정원의 현영철 처형 첩보 공개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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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5.14  08: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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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가 좋을 때는 대화를 책임진 남측의 통일부와 아태, 민화협, 민경련 등의 모자를 쓴 북측의 통일전선부가 전면에 나서 실력을 발휘하곤 한다. 남북관계를 담당하는 이른바 ‘통-통 라인’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어그러지면 군과 정보기관의 목소리가 커지고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 자리잡은 한반도가 여전히 ‘정전 상태’에 처해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최근 남북관계가 악화되자 북한의 군사력이 어마어마하다는 보도들이 나오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의 ‘김정은 체제’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북쪽에서도 마찬가지로 연일 미사일 발사와 사격훈련이 벌어지는가 하면 ‘남한 간첩’들을 내세운 기자회견이 열리기도 한다. 남북의 군과 정보기관이 본색을 드러내는 셈이다.

고사총 총살과 반역죄 처형 ‘첩보’

국가정보원이 13일 국회 정보위원회에 대면보고하고, 통일부 기자단에게 ‘북한 내부 특이동향’이라는 무려 11쪽에 걸친 친절한 자료를 제시하며 현영철 북한 인민무력부장의 숙청 사실을 공개했다. 특히 “고사총으로 총살했다는 첩보도 입수 되었다”, “‘반역죄’로 처형되었다는 첩보도 있다”고 밝혔다.

국정원이 북한 내부의 특이동향을 브리핑한 것도 드문 일이지만 첩보 수준의 동향까지 여과없이 브리핑한 것은 이례적이다. 정보와 첩보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정보는 첩보자료들을 평가, 분석, 종합, 판단하는 과정을 거쳐서 ‘가치가 평가되고 체계화된 지식’이지만 첩보는 ‘단편적 불규칙적 지식’에 불과하다. 따라서 통상 국가기관이 첩보를 대외적으로 발표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북한의 전 통치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여동생 김경희 전 당비서의 사망 ‘첩보’는 수없이 나돌았고, 언론에 보도된 것만도 여러 차례다. 국정원이 맨날 김경희 사망 첩보를 언론에 공개했다면 아마 조롱거리가 됐을 것이다. 국정원이 현영철 관련 첩보를 공개하자 ‘정치적 의도가 뭐냐’, ‘무슨 뉴스를 덮으려고 이런 기사거리를 제공하느냐’는 비아냥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 매체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고사총 총살’, ‘반역죄 처형’을 기정사실인 양 대문짝만하게 보도하고 있다. 종편은 지치지도 않고 종일 ‘카더라’ 방송으로 도배하고 있다. 정보기관은 확인 과정을 거치지도 않은 북한 첩보를 의도적으로 흘리고 언론은 검증은 커녕 더 부풀려 받아쓰는, 낯뜨거운 ‘아니면 말고’식의 북한 보도의 악습을 생생히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전의 달콤한 유혹

사실 국정원은 2013년 12월 3일 장성택 숙청 국회 정보보고로 큰 재미를 본 적이 있다. 대선 댓글 공작과 화교 탈북자 간첩 조작 사건이 드러나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던 ‘원세훈 국정원’은 이 정보보고로 극적으로 회생했다. 그날은 여야가 국정원 개혁특위에 합의하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장성택 숙청 정보보고로 개가를 올린 이후 ‘남재준 국정원’은 ‘김정은 체제 불안정론’을 퍼트리며 자신의 입지를 다져갔고, 이에 따라 박근혜 정부는 사실상 출발부터 ‘북한 붕괴론’에 근거해 대북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김정은 체제는 건재했고, 오히려 박근혜 정부의 최대 치적거리라던 외교분야에서 최근 커다란 구멍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빛샐 틈 없는’조차 없다던 한미동맹이 무색하게 미국은 한국보다는 일본과의 동맹을 우선시하고 있음을 만천하에 공표했고, 한국과 중국의 공동의 적으로만 알았던 일본의 아베 총리는 반둥에서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악수를 나누고 미국 상하양원에서 연설했다. 더구나 하필 바로 그 시점에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1주기를 비켜가며 별볼일 없는 해외순방에 나섰다가 구설수를 키웠다.

이같은 상황에서 국정원은 4월 29일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이 러시아 전승절에 참가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북한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해 국정원은 웃음거리가 됐다. 외교부는 부랴부랴 한.미 6자회담 수석대표 회동을 추진해 지난 5일 북한과 조건 없는 ‘탐색적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발표했고 이어 13일 국정원의 현영철 처형 첩보가 공개됐다.

친절한 국정원, ‘눈두덩을 내린 모습’?

국정원은 최근 6개월동안 김정은 제1위원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마원춘 국방위 설계국장, 변인선 총참모부 작전국장, 한광상 당 재정경리부장 등이 “사라져 버렸다”며 “공포통치의 정도가 높아지고 있으며, 간부들 사이에서도 내심 김정은의 지도력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친절한 ‘해석’까지 제공했다.

 

   
▲ 국정원이 13일 제공한 '북한 내부 특이동향' 자료에 포함된 <노동신문> 4월 26일자 사진. 인민군 훈련일꾼대회에서 현영철이 '눈두덩을 내린 모습'이라고 노란선으로 친절하게 표시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더욱 가관인 것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참석한 ‘훈련일꾼대회’에서 현영철이 ‘눈두덩을 내린 모습’이라며 5월 1일자 <노동신문> 사진을 제시했다. 국정원이 숙청 사유 중 하나라며 노란 원으로 친절하게 지목해준 현영철이 “졸고 있는 불충스런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은 기자의 편견 때문일까?

 

또한 국정원이 현영철의 최근 위상과 동정으로 “2014년 11월 구소련 야조프 전 국방상 생일행사 참석차 러시아를 방문하여 푸틴 대통령을 면담”하고 “2014년 4월 제4차 모스크바 국제안보 컨퍼런스에 참석하여 ‘핵전쟁 불사’ 내용의 연설을 하고, 러시아 국방장관을 면담”했다고 적시했다. 보수언론들은 김정은 제1위원장의 러시아 전승절 불참과 현영철 숙청을 연관지은 보도들을 쏟아내며 맞장구를 치고 있다.

당장 현영철 숙청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반론이 제기지고 있다. 러시아의 한국 전문가 게오르기 톨로라야는 <스푸트니크>와의 인터뷰에서 “과연 행사중 졸았다는 이유로 숙청했다는 논거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면서 “특히, 러시아가 현재 북한에 무기 공급을 금지하는 제재조치에 동참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북한에 S-300을 공급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는 것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실장은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김정은 기록영화에 이틀전(11일)까지 계속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처형’ 또는 ‘숙청’되었다고 국정원이 발표하고 있어 정보분석의 기본적인 원칙이 무시되고 있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또한 “‘숙청’은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처형될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는 극단적인 처벌을 의미한다”며 “왜 정부가 아직 확실히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이 시점에 성급하게 내놓았는가”라는 의문도 제기했다.

광복 70주년, 남북은 정보 전쟁 중?

최근 북한과 한미 간에는 치열한 공방이 수면 위아래로 벌어지고 있다. 북한은 인공위성 발사를 예고하는가 하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수중 시험발사 등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전문가들은 실제로 오는 10월 10일 당창건 7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북한이 인공위성 발사나 핵실험을 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앞서, 지난 3월 26일에는 ‘남측 간첩’ 두 명을 기자회견에 내세우고 중국 단둥지역 국정원 거점이 30개 정도라고 밝히기도 했다. 단순한 남측 억류자 개인의 일탈행위가 아닌 남북 정보기관 간의 대규모 정보전쟁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지난 5~7일 민간 차원의 남북해외 공동행사 준비위원회 대표자회의는 중국 선양(심양)에서 회의를 갖고 6.15, 8.15공동행사 추진 등을 담은 공동보도문을 채택, 8일 공동발표하기로 했다. 그러나 북측은 이를 보도하지 않고 있다가 12일에야 남측 정부가 “대화 타령을 목이 쉬도록 늘어놓고”있다며 5.24조치 해제와 한.미 연합군사연습 중단부터 하라고 반격했다. 6.15공동행사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다가 8.15공동행사는 반드시 남쪽에서 개최해야 한다는 남측 정부에 ‘의구심’을 보인 것이다.

다시 국정원은 친절하게 현영철 처형 첩보를 흘려 ‘김정은 체제 흠집내기’로 이에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이래서야 광복 70주년, 6.15공동선언 15주년을 맞아 분단시대를 하루라도 빨리 마감하자며 남북교류를 추진하고 있는 민간의 노력이 설자리가 있겠는가?

분단 70년을 맞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에 노벨평화상 수상자 두 명을 포함한 세계 여성평화운동가들이 DMZ(비무장지대)를 걸어서 건너오겠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있지만 우리 정부는 여전히 ‘관계 부처 협의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분단이 외세 탓만은 아니었듯 분단의 고착화도 남탓만은 아니라는 현실이 비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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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에 “GOP때 더 죽이고 자살할 걸…”

최씨 현역때 ‘관심병사’…괴롭힘 당한듯
등록 :2015-05-13 21:50수정 :2015-05-13 23:25
 

최씨 총기난사 왜?

“인생이 허무하다” 우울증 보여
동원훈련 입소전부터 계획한 듯
피해자들과 같은 부대 근무 안해
13일 예비군 훈련장에서 총기를 난사한 최아무개(23)씨의 주머니에서는 유서가 발견됐다. 최씨는 유서에서 “왜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죽고 싶다. 사람들을 다 죽여버리고 나도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박증으로 되어 간다… (현역 시절) GOP(근무) 때 다 죽여버릴 만큼 더 죽이고 자살할 걸 기회를 놓친 게 너무 후회된다… 내일 사격을 한다. 다 죽여버리고 나는 자살하고 싶다…”고 썼다. 예비군 훈련장에 입소하기 전부터 총기 난사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의도한 ‘계획된 사건’이었던 셈이다.

 

유서를 본 전문가들은 최씨가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었고, 이것이 우울증 증세로 이어졌을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홍성열 강원대 심리학과 교수는 “다른 이들을 죽이고 자신도 죽겠다는 내용에 비춰 보면 대인관계에서 비롯한 우울증으로 추측된다. 또 군에 있을 때 상급자 등으로부터 고통을 받은 경험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홍 교수는 “신경증의 일종인데, (최씨는) 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거기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다 결국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수렁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김형중 부산외대 법경찰학부 교수는 “‘인생이 허무하다’는 내용이 범죄를 부른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자존감이 다른 사람들과 전혀 어우러지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김 교수는 “유서에 ‘75발 수류탄’ 등의 내용이 나오는데 자칫 더 큰 사고가 날 뻔했다”고 했다.

 

최씨는 2013년 10월 제대했다. 국방부는 “최씨가 군에 있을 때 ‘보호·관심병사’(B등급)였다”고 밝혔다. 당시 A등급은 특별관리, B등급은 중점관리, C등급은 기본관리 대상자로 분류됐다. 국방부는 “복무중 부대에서 밀착관리를 했다고 한다. 최씨에게 우울증 등이 있었는지 확인중”이라고 했다.

 

최씨의 예비군 훈련장 입소는 이번이 두번째다. 최씨는 자신이 쏜 이들과 현역 때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지 않았다. 최씨와 피해자들은 전날 예비군 훈련소에 입소해 같은 7중대에 배속됐다.

 

최씨의 형은 사고 직후 예비군 훈련소로 와 동생의 주검을 확인했다. 국방부는 “형은 아무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최씨 형제와 가족은 비교적 화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씨가 입대한 뒤 가족들은 여러 차례 편지를 통해 “엄마, 이모, 형, 누나 다들 너를 사랑한다”며 관심을 나타냈다. 부대 생활의 어려움을 걱정하며 “고참들이 괴롭히더라도 ‘깡다구’ 있게 행동하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한편 최씨가 한살 때 작고한 그의 아버지는 교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해온 ‘여호와의 증인’ 신도였다고 한다. 여호와의 증인 쪽은 “최씨는 우리 신도가 아니다”라고 했다.

 

최씨가 쏜 총에 맞은 이들은 군 응급차량과 119구급차량으로 근처 병원들로 이송됐다. 오른쪽 뒷머리에 총상을 입은 박아무개(24)씨는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응급실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숨졌다. 같은 병원으로 옮겨진 윤아무개(24)씨도 오른쪽 목 부분을 관통한 총알이 폐 윗부분까지 뚫고 들어갔는데, 이날 밤 결국 숨졌다. 윤씨의 형(25)은 “대학 1학년 때 입대한 동생은 이번에 2년차 예비군 훈련을 받았다. 자동차학과에 다니는 동생이 자기 차보다 좋은 내 차를 타고 싶어했는데, 차를 빌려주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전혀 실감이 안 된다”고 했다.

 

방준호 허승 최우리 김미향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아래는 육군 공보과에서 밝힌 유서 전문이다.

 

 

 

언제부터인가 모르겠지만 왜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수 없이 내 머리를 힘들게 하고 있다. 무슨 목적으로 사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살아있으니깐 살아가는 것 같다. 하기 싫고 힘들고 그럴 때 잠이라는 수면을 하면 아무 생각도 안나고 너무 편하다 깨어있는게 모든 것들이 부정적으로 보인다. 내 자아감, 자존감, 나의 외적인 것들, 내적인 것들 모두 싫고 낮은 느낌이 밀여오고 그렇게 생각한다.

 

죽고 싶다. 영원히 잠들고 싶다. 사람들을 다 죽여버리고 나도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박증으로 되어간다. 나는 늙어가는 내 모습 이 너무 싫고 나의 현재 진행형도 싫다. 그래서 후회감이 밀려오는게 GOP때 다 죽여버릴만큼 더 죽이고 자살할 걸 기회를 놓친게 너무 아쉬운 것을 놓친게 후회 된다. 아쉽다. 75발 수류탄 한 정 총 그런 것들이 과거에 했었으면 후회감이 든다. 내일 사격을 한다. 다 죽여버리고 나는 자살하고 싶다.

 

내가 죽으면 화장 말고 매장했으면 좋것다. 그런 다음 완전히 백골화가 되면 가루를 뿌리던가 계속 매장하던가 했으면 한다. 왜냐하면 인생 살면서 수많은 신체의 고통이 있었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화상당하였을 때와 화생방했을 때 죽어가는과정이란게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여 죽는게 두렵다. 그게 가장 두렵다. 그래서 죽어있으면 화장하게 되는데 죽으면 아무것도 아에 없지만 화장이란 과정자체는 훼손 및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미안하다. 모든 상황이 싫다. 먼저가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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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민중항쟁과 미국의 개입

5.18광주민중항쟁과 미국의 개입 (1) 항쟁 발발 이전
 
 
 
우리사회연구소 이준영 상임연구원 
기사입력: 2015/05/13 [16:33]  최종편집: ⓒ 자주시보
 
 
 

 

 

유신체제의 붕괴는 우연이 아니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의 큰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5.18광주민중항쟁은 군사독재정권의 재등장을 저지하고,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민중들의 위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유신의 암흑 속에서 숨도 쉬지 못했던 이 땅의 민중들은 박정희의 죽음 이후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습니다. 유신헌법이 철폐되고 민주헌법이 제정되어 민주권력이 성립하기를 바라던 국민들의 소망은 전두환 일당의 쿠데타와 광주에서의 유혈 진압으로 인해 좌절되고 말았지만, 광주 민중들의 숭고한 희생은 끝내 1987년 6월의 민주화를 이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한편 광주항쟁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 항쟁의 과정에서 한미관계의 모순이 새롭게 드러났다는 점입니다. 특히 1970년대 말 한미관계의 악화 분위기 속에서 한국에 박정희를 대신할 정권이 들어섰으면 하는 미국의 희망이 전두환 군벌을 묵시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는 점은 광주항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싸이러스 밴스(Syrus Vance)는 1979년 2월, 주한 미 대사 글라이스틴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습니다. “미국의 목표는 점점 더 번영하고 있는 남한과의 경제적 관계를 통해 미국의 경제적 이익의 몫을 최대한 얻어내는 것이다.”이는 1970년대 말, 미국이 한국에서 더욱 철저하게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시켜 줄 세력을 찾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오직 안정을 원했을 뿐

 

  박정희가 살해당하고 난 이후의 한국정치는 그야말로 한편의 스릴러 영화처럼 긴박하게 흘러갑니다.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는 그날 밤 즉시 체포되었고,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습니다.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수사를 진행합니다. 최규하는 12월 6일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체육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전두환은 12월 12일 ‘민주주의를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던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축출하고 군부 내 사조직인‘하나회’를 중심으로 하극상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미국은 야당이나 민주화운동세력이 정권을 잡을 경우 한국사회가 위기로 치달아 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미국은 한국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자신들의 대한반도 정책인 강력한 반공정권 수립과 이를 통한 안정적인 체제 유지를 모두 실패하게 될 수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한국 독재정권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미국은, 10.26이후 소위 야당이나 민주화세력을 아예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미국의 공식 외교문서들은 민주화운동세력을 “방해주의자, 야권의 완강한 충돌주의자, 소수의 극렬 기독교 재야인사들” 등으로 폄훼했습니다. 그러면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10.26 이후 한국의 정치세력이 자신들의 집권을 위해 미국에 접근해왔다면서 실제적인 민주화보다 자신들의 권력 차지에 혈안이 된 한국 정치인들을 비웃었습니다.  

 

▲ 10.26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전두환 보안사령관     © 자주시보

 

 

박정희 없는 유신체제, 신군부의 등장

 

  결과적으로 10.26사건은 전두환의 신군부체제를 탄생시켰습니다. 신군부체제는 박정희 없는 유신체제로, 여전히 반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군사정권의 연장이었습니다.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은 10.26 이후 신군부의 등장을 예고하는 듯 “민주주의는 쿠데타나 암살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힘으로 이뤄야 진정한 민주주의 입니다.”라며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10.26이 김재규의 말처럼 ‘혁명’이 아니라 사건에 그치게 된 것 역시 이 때문입니다. 10.26은 김재규 식의 테러방식으로는 군사독재가 해체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한국 민중들은 광주민주항쟁이라는 유혈투쟁과 6월민주항쟁이라는 전국민적인 투쟁 없이는 민주화도, 미국으로부터의 자주화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었습니다.

 

 

신군부와 미국, 오래된 밀월관계

 

  미국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 이전부터 신군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아니, 전두환 등 신군부 일당은 오히려 미국이 양성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현재 자료공개의 범위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지만 1971년 미 국방성에서 나온 ‘군사원조 및 해외 군수판매자료’를 참고하면 1950년에서 1970년 사이 제3세계 군부의 장교들 중 미국에서 훈련받은 한국군이 세계에서 최고로 많았습니다. 동북아시아의 전체 도미 유학 훈련생의 숫자가 8만9342명인데 이 중 한국은 2만 1063명으로서 라틴아메리카 전체의 2만 3878명과 맞먹는 수준이었습니다. 한국 다음으로 대만이 1만 9732명, 3위가 통일 이전의 베트남으로서 1만 6364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둔 미군 고문단을 포함한 군사지원단의 수를 보아도 1971년 현재 한국이 716명으로 두 번째인 대만의 216명과 비교해 볼 때 미국이 한반도에 두는 군사적 비중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1971년은 닉슨정권하에서 미국의 세계전략이 유럽 중심으로 편재되어 있을 때인데도 이 정도이니 이후 레이건 시대에는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할만합니다.

 

 

▲ 베트남전쟁 당시 백마부대 29연대장이었던 전두환이 예하부대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다.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은 베트남전쟁을 통해 미군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 자주시보

 

  쿠바혁명 이후 제3세계의 군사정권에 대한 지원을 강화한 케네디 정권 하에서 발생한 5.16쿠데타는 한국에 친일군벌 인맥의 장성급과 신진친미군부세력의 정치권력적 결합을 가져왔습니다. 1960년 당시 위관급 장교였던 전두환·노태우·차지철·최세창·장기오 등은 미국의 특수훈련부대 유학을 다녀왔으며, 이들은 공수부대로 불린 특전사 창설의 주축세력이 되었습니다. 미국은 장기적인 구상 하에 친미군부인맥을 육성해왔습니다. 전두환 등 이들 친미장교 그룹은 이후 베트남전에서 미군의 지휘 하에 반게릴라전 실전경험을 축적하고 돌아와 군의 중책을 맡게 되었으며, ‘하나회’라는 군부 내 사조직을 만들어 결국 자신들의 정권 창출에까지 성공하게 됩니다. 유신말기 박정희 정권의 2인자 행세를 하던 차지철은 하나회의 대부를 자처했으며, 독재자였던 박정희 자신도 하나회를 친위세력으로 여기며 특별히 보호해 주었다고 합니다.

 

 

10.26사태와 12.12쿠데타, 미국은 어떻게 움직였나

 

  10.26사태와 12.12쿠데타가 연달아 일어났을 때, 미국은 매우 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미국의 동북아 군사전략의 핵심적인 지역이었던 한국에서 대통령이 살해된 사건은 한국뿐만 아니라 동북아 전체에서 미국의 이해를 뒤흔들 수 있는 사변이었습니다. 미국은 박정희가 살해된 다음날 즉시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에게 ‘미국 정부가 즉각적인 협조와 지지를 보내기로 함’을 알렸습니다. 12.12쿠데타가 발생했을 때에도 한국군의 작전권을 가지고 있었던 주한미군사령관 존 위컴(John A. Wickham)은 노태우가 전방을 지키는 9사단 병력을 이끌고 서울에 들어오는 것을 제지하지 않았으며, 전두환 대 정승화의 군부 내 갈등에 대해 자제를 요청하면서 ‘중립’을 지켰습니다.(서중석, 2007, 161쪽)

 

결국 미국은 신군부를 한국의 새로운 통치집단으로 인정했습니다. 전두환은 1980년 3월 들어 이른바 ‘K공작’(King의 머리글자)을 가동하고, 4월에는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현역 군인이라 정식 부장에는 취임하지 못함)하며 본격적인 집권 야욕을 드러냅니다. 5월이 되자 이른바 ‘80년 서울의 봄’이라고 하여, 신군부와 재야·대학생들의 기싸움이 전면화됩니다. 신군부군은 ‘서울의 봄’ 시기에 일어난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공수부대의 투입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1980년 봄, 전두환의 ‘K공작’이 진행되는 동안 미 대사관과 주한미군은 신군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이 당시 상황에 대한 미국의 인식과 개입양상은 다음과 같은 외교전문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 1980년 2월 미국은 전두환이 38선 후방에서 북한과 싸우기 위해 훈련을 받은 특전사단을 시위 진압을 위해 광주로 동원할 계획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었음.   


• 1980년 5월 8일 미 국방정보국이 합동참모국에 7공수 특전여단(광주에서의 최악의 만행에 책임이 있는)이 “전주와 광주의 대학들의 불안을 잠재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고 보고함.

 

• 1980년 5월 8일 글라이스틴이 특수부대가 “가능한 학생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옮겨졌다고 워싱턴에 보고함.

 

• 1980년 5월 9일 글라이스틴이 전두환과 만나서 미국은 남한이“만약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 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 경찰과 군대를 강화하는 긴급대책”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발언함.

 

• 1980년 5월 9일 미 국무부와 국방정보국의 전문: 미국은 전두환에게 군대를 학생시위에 동원할 수 있도록 하는 적절한 승인을 해주었음을 명시함.

 

• 1980년 5월 10일 미 국무부 차관 크리스토퍼가 글라이스틴에게 보낸 전문: “우리는 경찰과 군대를 강화하려는 남한의 계획에 반대하지 않아야 한다.”

 

• 1980년 5월 16일 미국은 제 20사단을 그들의 작전통제권에서 방출함. “워싱턴에 있는 그의 상관들과 의논한 후에” 위컴은 제 20사단이 광주로 배치될 수 있도록 승인함.  

(조지 카치아피카스,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 2008-5-29 (강연자료)  

 

   1980년 5월 미국의 ‘개입’은 은밀하면서도 매우 치밀하게 추진되었습니다. 미 국무부와 국방부는 전두환의 군대 동원 계획을 알고 있었음은 물론이고, ‘적절한 승인’을 통해 군대 동원을 가능케 해주었습니다.

 

  1980년 5월 15일, 십 만 명 이상의 대학생들이 서울역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것을 지켜본 신군부와 미국은 사태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는 시위대 중 일부가 미 대사관 담장을 넘으려 시도하는 모습을 보며 실질적인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이에 신군부는 드디어 ‘권력 접수’를 위해 계엄의 전국 확대, 비상기구의 설치, 국회해산 등을 결의하고 5.17쿠데타를 일으킵니다. 허수아비 대통령을 옆에 낀 신군부가 대한민국을 접수해버린 것입니다.

 

 

*5.18광주민중항쟁의 전말

 

10.26사태로 박정희가 암살되자, 당시의 국무총리이던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가, 그해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제 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당연히 유신헌법이 철페되고 민주적 헌법이 제정되어 직선제 선거로 새로운 권력이 성립되기를 바라던 국민들의 소망과는 동떨어진 일이었습니다.

 

최규하가 대통령이 된 이후 헌법개정이 논의되면서 이른바 이원집정제 등이 거론되는 한편, 박정희 암살사건의 조사를 맡았던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과 9사단장 노태우 소장 등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세력이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마침내 육군참모총장이며 계엄사령관인 정승화가 박정희 암살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을 벌여 정승화를 보안사령부 취조실로 연행한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공수특전단장 정병주 등의 부대가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출동했지만, 그 속에도 전두환 등과 내통한 세력이 있어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수도권지역의 주요 지휘관을 교체하려고 하자 이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12.12쿠데타로 전두환 등이 군부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이후 전두환은 최규하를 압박하여 중앙정보부장 서리직을 겸함으로써 권력찬탈의 야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해 전국의 대학생들과 재야세력 등은 강력한 반대운동을 펼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1980년 ‘서울의 봄’입니다.

 

그러나 전두환 등은 10.26사태로 내려졌던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1.정치활동 정지, 언론·출판·보도·방송의 사전검열, 2.대학에 대한 휴교조치, 3.북괴와 동일한 주장이나 용어 사용 금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계엄포고10호를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야당지도자 김대중을 체포하고 김영삼을 연금했습니다.

 

광주에서는 전두환 일당인 ‘신군부’의 계엄 확대와 휴교령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학생들은 휴교령이 내린 교내로 진입하려 하다가 계엄군의 제지로 실패하자, 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했습니다. 계엄군의 저지가 격렬해졌고, 그 과잉진압에 분개한 일반 시민들이 가담하여 시위는 하루 사이에 시민항쟁으로 발전했습니다. 학생과 시민이 합세한 민중항쟁은 곧 수세에서 공세로 바뀌어갔습니다.

 

학생시위에서 시작하여 민중항쟁으로 변한 광주항쟁은 2백여 택시 운전사들의 차량시위를 계기로 노동자·도시빈민·회사원·점원 등이 폭넓게 참가하여 쇠파이프와 각목 등으로 ‘무장’함으로써 폭력 저항으로 변해갔습니다.

 

정부 쪽에서는 최규하 과도정부의 신현확 내각이 물러났고, 현지 ‘신군부군’ 내에서는 광주지방의 향토사단과 그와 별도로 투입된 공수부대 사이에 ‘지휘체계의 이원화’가 빚어졌습니다. 시민대표와 도지사 간의 협상이 결렬되자 항쟁 참가자들은 본격적으로 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심에 모인 약 10만명의 군중 속에는 각처의 무기고에서 탈취한 카빈총으로 무장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시민의 일부는 근처 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를 탈취하여 무장하는가 하면, 이웃 고을 화순탄광 광부들의 협조로 다량의 화약과 뇌관을 확보하기도 했습니다. 이윽고 나주·영산포·화순 등지의 경찰관서에서 카빈총·엠원총 등 8백여 자루와 5만여 발의 탄환을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반입함으로써, 본격적인 ‘무장시민군’이 형성되었습니다.

 

▲ 경찰서 무기고 등을 습격해 카빈총·엠원총 등으로 무장중인 시민군     © 자주시보

 

주로 노동자, 공사장 인부, 구두닦이, 넝마주이, 접객업소 종사원, 부랑아, 날품팔이, 학생으로 구성된 ‘시민군’은 계엄군 임시본부인 전남도청을 기관총과 소총으로 맹렬히 공격하여 ‘신군부군’을 ‘전략상 후퇴’하게 만들었습니다.

 

민중항쟁 발발 4일만에 ‘신군부군’이 후퇴함으로써 교도소를 제외한 광주시 전체가 ‘시민군’의 점령 아래 들어갔습니다. 후퇴한 계엄군은 항쟁의 확산을 막기 위해 광주시 외곽을 봉쇄했습니다. 계엄군에 의해 포위된 광주시내에서는 관료·목사·신부·기업가 등 15명으로 구성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은 군대 투입반대, 연행자 석방, 사후보복 금지, 부상자·사망자 치료와 보상 등의 조건으로 신군부와 교섭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 교섭조건은 항쟁 당초의 요구였던 계엄철폐, 김대중 석방, 군사정권 퇴진 등이 포함되지 않은 반면 시민군의 일방적 무장해제만이 제시되었다 하여 항쟁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신군부군’쪽도 이들 조건을 수용하지 않아서 교섭은 성과 없이 끝났으나, 이 과정에서 이미 시민군이 가진 무기의 절반 정도가 반납되었습니다.

 

교섭이 결렬되고, 광주 시내에서 시민궐기대회가 계속되면서 항쟁의 확산을 주장하는 기층민중 출신의 새로운 집행부가 구상되었습니다. 이 집행부는 시민군 조직을 갖추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미국의 압력이나 일반 국민들의 여론 및 저항으로 ‘신군부’세력의 집권 기도가 좌절되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당시 시민군이 보유한 무기는 총 5400여 점이었으나, 반납 후에는 1000여 점 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군부군 쪽은 전투사단과 공수여단 약 4천 명의 병력으로 5월 27일 새벽 3시를 기해 ‘진압작전’을 감행했습니다. 이 진압작전은 신군부군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약 4시간 만에 종료되었습니다. 이로써 10일간에 걸친 광주민중항쟁은 일단락되었습니다.


5.18광주민중항쟁과 미국의 개입 (2) 항쟁 발발 이후
 
 
 
우리사회연구소 이준영 상임연구원 
기사입력: 2015/05/13 [16:47]  최종편집: ⓒ 자주시보
 
 

5.17쿠데타와 광주에 대한 군대투입, 미국은 알고 있었다.

 

  1980년 5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신군부가 민중들의 열망과는 반대로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총칼로 군부독재를 연장하려고 했을 때 미국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그리고 신군부의 5.17군사정권 연장 쿠데타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이 광주에서 격렬하게 일어났을 때, 미국은 광주에서의 항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국이 한국인들의 생명이나 민주화보다, 친미 군부정권의 안정을 더욱 중요시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무렵 미국은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한국의 정국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둔 것으로 보입니다. 신군부는 1980년 초부터 적 후방에 투입되어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최정예부대인 공수특전단들에게 ‘충정작전’이라는 이름의 폭동진압작전을 대대적으로 지시합니다. 공수특전단은 이미 부마항쟁과 서울 일부 지역에 투입되어 시위 진압과정에서 가공할 잔인성을 보여주며 야만성을 드러낸 집단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주한미국과 미국정보당국은 이들의 속성과 훈련동향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주한미대사 글라이스틴의 외교전문에 따르면 미국과 신군부는 1980년 5월 무렵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격화될 경우 이들 특수부대를 동원해 진압하는 문제에 대해서 긴밀하게 조율했으며, 신군부가 군사적 행동을 하기 전에 상호 간에 사전 협의를 할 것을 약속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신군부는 시위 진압을 목적으로 이동하는 부대의 동향을 한미연합사에 상세히 보고하고 있었고 상호간에 긴밀한 조율이 오갔습니다.(박만규, 2003, 223쪽)

 

 

미국과 신군부의 긴밀한 조율 속에서 결정된 공수부대 투입

 

  5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되자, 광주에는 금마에 주둔 중이던 제7공수특전여단 33·35대대 병력이 투입되었습니다.이들은 2월부터 폭동진압을 위한 ‘충정작전’ 훈련을 받은 인간병기들이었습니다. 광주는 선혈이 낭자한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시민들의 저항은 오히려 더 거세지고 조직화되어 갔습니다. 광주에서 시위가 대규모로 확산되자, 5월 22일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은 한미연합사 소속의 한국군 20사단의 네 개 연대를 ‘폭동진압(Riot Control)’용으로 허용해 달라는 신군부의 요청을 승인해주었으며, 데프콘3 수준의 경계태세를 발동해 신군부의 광주 진압을 전후방에서 지원해주었습니다.

 

  한편, 미국은 나중에 여러 인터뷰에서 광주에 대한 무력진압작전을 5월 25일에서 27일로 늦춘 것은 자신들의 인도적 배려에 기초한 노력의 결과라고 주장한 바 있지만 이것 역시 거짓말이었음이 탄로 났습니다. 도청 진압작전이 27일로 연기된 것은 오히려 신군부와 미국 간의 주도면밀한 군사작전 모의의 결과였습니다.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도청 진압작전은 미국의 공중지휘용 공군기와 항공모함 코럴시호의 한국 작전배치시간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5공 청문회 당시 이희성의 증언)

   

 

▲ 해제 및 공개 된 5.18당시의 CIA비밀문서     © 자주시보


 

미국은 방조자가 아니라 공모자

 

  미국 정부는 1989년에 광주학살을 해명하면서 자신들은 광주의 상황을 잘 모르고 있었고, 사태를 제어하려 했지만 신군부가 말을 듣지 않았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미국의 변명은 거짓이었습니다. 5.18 이전부터 공수부대의 훈련과 작전이동을 상세하게 알고 있던 주한미군과 미 정보당국의 행태를 본다면, 이들은 충분히 광주에서의 학살을 예견하고 있었으며 참상을 보면서도 묵인하고 있었다고 믿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 미국은 광주학살을 묵인한 방조자가 아니라, 명백히 책임이 있는 공모자였습니다. 미국은 5.17쿠데타를 용인했고 공수특전단의 광주 및 주요도시 출동을 승인했으며, 한국군의 학살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미국은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정권을 잡은 신군부가 만든 일종의 군사혁명위원회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통해서 파쇼권력을 행사할 때 이를 지지했습니다. 게다가 미국은 보수정권인 레이건 행정부의 출범 후 첫 방미인사로 전두환을 초청함으로써, 신군부 정권이 국제적인 정당성을 얻게 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백악관은 전두환의 방미가 “전두환의 입지를 공고히 해 주면서 전두환 정권의 합법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해 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미국에게서 신군부의 잔인무도한 학살행위에 대한 문제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 광주항쟁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존 위컴은 한국인을 들쥐에 빗대면서 비하했다.     ©자주시보

 미국 정부는 기본적으로 광주항쟁을 ‘폭동’과 ‘무질서’에 대한 군부의 정당한 ‘질서회복 노력’이라고 보았습니다. 주한미군사령관 존 위컴은 광주의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에 “한국인은 들쥐와 같은 민족이어서 누가 지도자가 되는 복종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한국의 국민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는 망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1980년 8월 27일 AP통신과의 회견에서 “10월 사태 이후 미국이 한국 공작에서 가장 성공한 일은 전두환 정권이 수립된 것이다.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며 우리 보람도 크다.”고 말해 노골적으로 전두환에 대한 호감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5월 21일 주한미대사 글라이스틴은 본국으로 보낸 전문에서 “군부가 상당한 무력을 사용해서 질서를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광주항쟁의 원인을 ‘지역주의적 정서’, ‘호남인들의 오랜 소외감과 불만’, 그리고 ‘김대중 등 특정 정치인 차원의 문제’로 치부했습니다. 이는 이후 신군부가 광주항쟁을 매도할 때 사용하던 전형적인 궤변이 되었습니다.

  다음의 외교전문들은 미국이 광주항쟁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짐작케 해주는 것들입니다.

 


• 1980년 5월 19일 한미연합사령관 존 A 위컴 주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얼마나 빨리 힘을 규합하고 어떤 형태로 그것을 가져갈 것인가이다.”

 

1980년 5월 21일 글라이스턴이 DC에 보낸 전문: “광주에서의 대규모 반란은 아직 통제밖에 있으며 걱정스러운 상황을 야기하고 있다.”, “…대규모의 폭도가 일시적으로 도시를 장악하고 있으며…”

 

1980년 5월 22일 미 국방부 대변인, 위컴이 “한국 정부로부터 나의 작전 지휘권 아래 있는 특정 한국군을 시위대의 진압작전에 동원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요구를 받고 이를 수락, 동의하였다”고 시인했음을 발표함.

• 1980년 5월 23일 워싱턴에서 미 국무부 대변인 호딩 카터(Hodding Carter), 카터 정부는 “남한의 정치 자유화에 대한 압력을 연기하는 한편 안보와 질서의 회복을 지지하기로 결심했다.”고 발표.

 

• 1980년 5월 24일 미국, 한국에 미국군의 코랄함대가 도착할 때 까지 광주 진압을 연기해달라고 요구함.

 

• 1980년 5월 25일 국무장관 무스키의 전문: “광주의 상황은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바뀌었다고 언급”. 그의 정보통은 “온건파 수습위는 상황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고 과격파가 등장해 세력을 장악했다. 인민재판이 열렸고 약간의 처형이 이뤄졌다. 학생시위대는 혁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신원미상의 무장한 과격파들로 대부분 대체되었다”라고 보고함.

 

• 1980년 5월 26일 글라이스틴이 워싱턴에 보낸 전문: “광주의 상황”은 “더욱 나쁜 쪽으로 과격한 전환을 했다.과격파들로 이뤄진 무장그룹과 심지어 인민재판과 처형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 1980년 5월 26일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글라이스틴에게 미국이 평화로운 해결을 중재해줄것을 요청. 글라이스틴은 대답을 거절함.

 

• 1980년 5월 31일 카터 대통령, CNN과의 인터뷰에서 “때로는 안보의 중요성이 인권의 중요성보다 우위에 서야 한다”고 발언 함.

 

(조지 카치아피카스,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 2008-5-29 (강연자료) 
 

  

5.18광주항쟁을 통해 드러난 미국의 맨얼굴

 

  전두환 일당이 벌인 12·12쿠데타가 국가 내부의 권력구조를 뒤바꾼 격변이었다면, 공수부대의 학살에 뒤이은 광주항쟁은 한국의 국가와 민중과의 관계 뿐 아니라 한미관계를 재구조화하는 전환점이었습니다. 광주에서 일어난 학살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민주주의 수호자로서의 미국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미국은 반공을 지향한다면 그 정권이 비록 독재정권이라 할지라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맨얼굴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광주항쟁 이후 한국에서 미국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1980년 6월에 만들어진 「광주 시민 의거의 진상」이라는문건입니다. 문건은 광주항쟁 과정에서 드러난 미국의 맨얼굴을 직시해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미국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는 미국을 참으로 오랫동안 혈맹의 우방으로 생각하고 신뢰해왔다. (…) 그런데 이번 광주사건을 비롯한 10·26 이후의 일련의 미국의 태도에 대하여 우리는 종전과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한미 협의 하에 실시되는 국군의 작전이 어떻게 동족을 살육하는 데 이용되었으며, 미국은 이에 동의할 수 있었을까. (…)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옹호가 미국의 국가이익에 우선할 수 없다는 미국의 기본입장이 분명하게 드러난 이상 우리는 미국을 새로운 눈으로 주시해야 한다.” 

   

▲ 1985년 5월 23일, 70여 명의 대학생들이 서울 미국문화원을 기습 점거, 농성을 벌였다.     © 자주시보

 

 

‘광주학살 배후조종 미국은 물러가라’, 반미운동의 시대 개막되다

 

  광주의 시민군까지도 미국을 자신들의 구원자라고 여기고 있던 친미국가 한국에서 드디어 반미운동이 태동하게 된 것입니다. 광주학살에 미국의 동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데 이어 레이건이 ‘학살의 원흉’ 전두환을 노골적으로 지지하자, 미국에 대한 한국 민중들의 적개심과 배신감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그 결과 1980년대 한국의 역사는 군사독재와 미국적 세계관에 대한 치열한 저항의 기록으로 점철 되었습니다. 많은 대학생들이 구속당할 각오를 하면서 ‘광주학살 배후조종 미국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고, 때로는 미 문화원을 점거하거나 미 대사관에 대한 항의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대학생들의 반미시위는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광주항쟁과 뒤이은 1980년대의 반미시위는 미국을 영원한 ‘우방’으로 여겨왔던 한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광주항쟁을 통해 한국인들은 냉정한 ‘제국’이자 탐욕적인 ‘외세’로서 미국의 면모를 각성하게 되었으며, 비로소 미국에 대해 자주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끝)

 

*참고문헌
 

서중석, 『한국현대사 60년』, 역사비평사, 2007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 3』, 돌베개, 2010

김기협, “1987년 6월, 전두환은 왜 군을 출동시키지 못했나?”, 2011-11-04, 프레시안

박만규, 「신군부의 광주항쟁 진압과 미국문제」, 『민주주의와 인권』, Vol3. No1.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03

조지 카치아피카스,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 2008-5-29 (강연자료)

이삼성, 「광주학살, 미국·신군부의 협조와 공모 : 최믄 미국 외교문서를 통해 본 5·17쿠데타, 광주학살과 미국의 대외정책」, 『역사비평』, No.34, 1996

이삼성, 『미래의 역사에서 미국은 희망인가』, 당대, 1995

이삼성. 『미국의 대한정책과 한국의 민족주의 : 광주항쟁·민족통일·한미관계』, 한길사, 1993

장준갑, 김건, 「1980년대 초반(1980-1981) 한미관계 읽기」, 『미국사연구』, Vol.38, 한국미국사학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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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비늘돔의 '마법', 산호 깨뜨려 산호섬 만든다

파랑비늘돔의 '마법', 산호 깨뜨려 산호섬 만든다

조홍섭 2015. 05. 12
조회수 2623 추천수 0
 

산호섬 형성하는 퇴적물의 85%는 파랑비늘돔이 배설하는 산호 부스러기

기후변화 취약하는 산호섬 지키는 효자 물고기, 화려한 무늬로 성 전환도

 

Richard Ling_Bicolor_parrotfish.jpg» 화려한 무늬와 색깔의 수컷으로 성전환한 파랑바눌돔. 산호섬의 유지와 형성에 핵심 기능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진=Richard Ling, 위키미디어 코먼스  
 
열대와 아열대 얕은 바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물고기의 하나가 파랑비늘돔이다. 초록이나 파랑 바탕에 분홍빛 무늬가 선명한 이 물고기는 색깔이 아름다운 물고기일 뿐 아니라 자라면서 성과 모습을 바꾸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무엇보다 파랑비늘돔은 산호의 건강을 지키는 물고기다. 산호나 바위 표면을 부지런히 깨뜨려 먹는다. 이 과정에서 산호의 증식을 돕고 산호 표면에 조류가 너무 자라는 것을 막는 구실을 한다. 
 
이에 더해 파랑비늘돔의 새로운 생태적 기능이 발견됐다. 이 물고기가 배설하는 모래가 산호섬의 주성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산호섬을 유지하고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일꾼인 셈이다.

 

Chris Perry2_s, University of Exeter.jpg» 다양한 파랑비늘돔이 서식하는 몰디브 바카루 섬의 산호섬 모습. 사진=크리스 페리, 엑시터 대학
 
크리스 페리 영국 엑시터 대학교수 등 연구자들은 과학저널 <지질학> 최근호에 실린 논문을 통해 파랑비늘돔이 산호섬 형성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를 정량적으로 조사한 결과를 밝혔다. 산호섬은 오로지 산호에서 나온 퇴적물로만 만들어진다. 
 
연구자들이 인도양에 있는 몰디브의 바카루 섬에서 측정한 결과 파랑비늘돔이 전체 퇴적물의 85% 이상을 만들어냈다. 산호나 암석 ㎡당 5.7㎏의 모래를 형성했다. 이는 파랑비늘돔이 산호 표면을 삼킨 뒤 조류 등 먹는 부분을 뺀 나머지를 배설하면서 나온 것이다.
 
페리 교수는 “산호섬은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에 가장 취약한 곳”이라며 “파랑비늘돔 집단과 서식지를 잘 보호하는 것이 몰디브 산호섬에 퇴적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핵심”이라고 이 대학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Chris Perry_s, University of Exeter.jpg» 몰디브 산호섬 주변 해역에서 산호를 부스러뜨려 먹는 파랑비늘돔. 사진=크리스 페리, 엑시터 대학

 
산호는 해양생물다양성을 유지하는 핵심적인 장소다. 연간 생태계 서비스의 가치는 300억 달러로 추산된다. 
 
그러나 광범한 백화현상과 함께 수온 상승으로 인한 질병 확산, 오염과 환경파괴가 겹쳐 5억 인구의 생계가 달려있는 산호의 미래에 빨간불이 켜진 상태이다.

 

Nhobgood_Parrotfish_turquoisse.jpg» 앵무새 부리처럼 생긴 단단한 이를 지닌 파랑비늘돔의 일종. 산호 생태계에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 사진=Nhobgood, 위키미디어 코먼스

 
파랑비늘돔은 전 세계에 약 90종이 있으며 주로 인도양과 서태평양 산호에 다양한 종이 서식한다. 앵무새 부리 같은 이가 달렸고, 대부분이 암컷으로 태어나 수컷으로 성전환하는 물고기로 유명하다. 색깔도 처음엔 칙칙한 갈색이나 회색, 붉은색이다가 수컷으로 변신해서는 선명한 초록이나 파랑에 분홍 무늬로 아름다워진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C.T. Perry, P.S. Kench, M.J. O‘Leary, K.M. Morgan, and F. Januchowski-Hartley, Linking reef ecology to island building: Parrotfish identified as major producers of island-building sediment in the Maldives, Geology, First published on April 27, 2015, doi: 10.1130/G36623.1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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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라의 주인 되기 위한 전제조건

김용택 | 2015-05-13 11:00:1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진수성찬을 차려놨는데 먹지 못하고 영양실조가 걸려 있다면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가? 우리 민초들의 삶이 그렇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행사만 제대로 한다면 얼마든지 좋은 세상에서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 수도 있을 텐데, 그 권리행사를 못해 온갖 수모를 당하며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눈뜨지 마! 깨어나면 안 돼!, 가만히 있어!”

 <이미지 출처 : 한겨레 장봉군 만평>

인류의 역사는 수탈의 역사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잔인한 역사다. 불의한 지배세력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민초들이 깨어나지 못하게 해 왔다. 이데올로기를 통해 마취시키고, 교육을 통해 우민화하고, 종교를 통해 운명론을 가르치고, 언론을 통해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고, 드라마며 영화며 안방극장을 통해 성을 충동질하고 온갖 문명의 이기를 동원해 ‘가만 있으라!’고 달래고 윽박지르고 협박해 왔다.
 
마취에서 깨어난 사람… 어쩌다 이데올로기 세뇌에서 깨어난 사람이라도 나올라치면 그런 사람을 가만두지 않는다. 권력은 깨어난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연좌제로 반공법으로 이적 찬양 고무죄로 묶어 빨갱이가 되고 종북세력이 된다. 진보적인 지식인, 양심적인 사람을 수용할만큼 권력은 너그럽지 못하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권력에 기생하는 사람들 매국노, 변절자, 배신자, 기회주의자, 이기주의자… 이들이 양심을 팔고 아부하고 비위를 맞춰 권력이 필요로 하는 제도며 법이며 정책을 만들고 공생관계를 유지해 왔다.

골품제사회에서 민초들은 자신이 귀족들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믿었을까? 계급사회 민초들은 운명론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이나 평등의식이 있었다면… 그 틀을 깰 수 있는 용기만 있었다면, 자신은 물론 자녀들까지 그런 비참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은 어떤가? 모든 사람들이 인간의 존엄성이나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복지사회인가?

세상에는 자유와 경쟁을 우선가치로 삼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복지와 평등을 우선으로 하는 국가도 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아닌 우리와 같은 자본주의 국가지만 유럽의 선진국가들은 삶의 질이나 복지면에서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의료는 물론 교육까지 무상이다. 여기다 대부분의 꾸민들은 우리처럼 천정정부지로 치솟는 집값이며 주택난에 허덕이지 않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 전국건설산업노동조합연맹>

극단적인 양극화와 사회경제적인 지위는 물론 부의 대물림까지 허용되는 폐쇄적인 사회를 바꿀 수는 없을까? 열심히 일하면 우리도 유럽의 선진국차럼 복지의 혜택을 누리며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을까? 말로는 민주니 자유니, 평등이라고 하지만 그런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교육을 통해 무한경쟁을 끊고 서민들도 사람대접 받으며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이상적인 나라는 저절로 만들어 지는 게 아니다. 학교가 우민화 교육을 하고 언론이 국민을 마취시키고 있는 한 민주주의도 평등사회도 복지국가도 불가능하다. 이 시대 교육은 어떤 사람을 길러내야 할 것인가? 일등지상주의…? 영재교육…? 지금과 같은 무한 경쟁, 신자유주의 교육으로 국민 모두가 행복한 세상,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을까?

첫째, 시비를 가릴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야 한다.

우리 교육은 국어, 영어, 수학과 같은 도구적인 교과가 자신의 삶의 질이나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에 이런 공부가 학교 수업의 핵심이다. 그것도 점수 몇 점으로… 제대로 된 교육이라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줘야 한다. 국어니 영어, 수학은 그다음 일이다. 사람 같지 않는 사람 머리 속에 들어 가 있는 도구적인 지식 몇 가지가 그 사람의 인품을 좌우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둘째, 사람 볼 줄 아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평생 사귀고 만나며 살아야 할 사람… 그 많고 많은 사람 들 중에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분별하지 못한다면 불행한 인생을 살 수도 있다. 좋은 친구도 좋은 반려자도 볼 줄 알아야 하지만 민주시민으로서 대표자를 볼 줄 아는 안목이 없다면 본인은 물론 이웃에까지 민폐를 끼치게 된다. 우리사회가 이 지경이 된 것은 유권자들이 합법적인 공간에서 투표권만 제대로 행사했다면 우리 사는 세상은 훨씬 좋아지지 않았을까? 가해자를 지지하는 청맹과니를 깨우치지 못하는 교육은 죽은 교육이다.

셋째,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을 키워야 한다.
 
오늘날 학교가 길러낸 인간상은 머리만 있고 가슴이 없는 사람이다. 기능적인 면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인간적인 면에서는 철저한 이기주의적인 인간, 주관적인 융통성 없는 인간을 길러내고 있다. 내게 좋은 것, 내가 선이요, 우리라는 의식, 공동체 의식을 찾아보기 어렵다. 세상을 이해타산으로 보는 안목으로는 더불어 사는 사람도 민주시민도 길러낼 수 없다. 경쟁 지상주의 교육을 하는 학교에서는 철학이 없는 우민화 교육이 있을 뿐이다.

네째, 주권의식, 민주의식을 갖도록 일깨워야 한다.
 
노동자의식이 없는 노동자는 시민이 아니라 노예일 뿐이다. 주권의식이 없는 국민, 민주의식이 없는 시민도 마찬가지다. 지배계급을 민중이 각성하지 못하도록 교육으로 언론으로 이데올로기로 마취시키고 있다. 깨어나지 못하는 무지로 인해 기득권이 대물림하는 세상을 유지하고 있다. 복지도 민주주의도 평등 세상도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 한 복지도 정의도 평등한 세상도 꿈일 뿐이다. 민주의식, 시민의식이 없는 나라에는 지배자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마취된 국민들의 불행한 삶이 계속 될 것이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30&table=yt_kim&uid=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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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황당한 방산비리 사건을 아시나요?

 
문형철 2015. 05. 12
조회수 354 추천수 0
 

  진흙포탄, 돈지랄 전차를 아시나요? 
  연이은 방산비리 관련 뉴스가 약방의 감초처럼 자주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 방산비리의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저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이들 무기는 그야말로 황당하고 어이없어 보이고 그래서 우스운 헤프닝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나라의 명운을 거는 사건이기도 했고, 권력과의 이권 결탁 등 지금 우리 시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일들이었기에 여전히 큰 교훈을 준다. 
                                   
권력형 방산비리의 ‘고전’ 진흙포탄

 

 진흙으로 포탄을 만들 수 있을까? 가능하다. 일찍이 화약의 원조인 중국에서는 진흙으로 포탄을 만든 역사가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아주 참담했다. 원래 진흙포탄은 훈련용으로만 사용되는 훈련탄이었다. 하지만 청나라 해군에게 이 진흙포탄이 실전에 사용되는 실탄으로 지급됐다. 그 결과  일본해군과 비교해 엄청난 수적 우세를 보였던 청의 해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고 청일전쟁에서 패하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청나라 해군은 진흙포탄을 지급받게 된 것일까? 
 그 속사정은 이렇다. 청의 서태후가 자신의 별장(이화원)을 만드는데 해군 예산을 6년간이나 털어먹었다. 그 바람에 청국 해군은 총포, 탄약 구입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곤란을 겪는다. 이를 안 청나라 해군의 포탄납품업체가 실전 포탄은 비싸니까, 콩과 진흙, 석탄으로 만든 가격이 훨씬 싼 연습용 포탄을 실전용이라고 속이고 납품을 한 것이다. 막상 해상전투가 벌어지니 일본 함정에서 쏘는 포탄은 청나라 함정을 박살내는데 청나라 함에서 쏜 포탄은  콩과 진흙, 석탄가루만 사방으로 뿌리고 말앗다. 이미 청에 패한 전력을 가지고 있던 일본의 해군은 설욕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던 터라, 진흙포탄의 청나라 해군은 무참하게 패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진흙포탄은 일본에 승리를 가져다주었고 청나라에게는 시모노세키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을 가져다주었다. 동아시아 근대사 최초의 권력형 방산비리였던 진흙포탄은 두나라의 향방을 엇갈리게 하는 큰 단초가 되었다는 분석도 있을 정도다.

 

개떡 같은 맛이 민수시장에 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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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에 납품된 허쉬 초콜렛. 맛없는 보급 쵸콜렛 덕분에 애프터마켓이라는 위문품산업이 활기를 보인다.

 

 어린 시절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들에게 “미군을 보면 무엇이 떠오르냐”고 묻는다면 “초콜렛”이라고 답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군의 막대한 전쟁물자 중 가운데 전투식량(C 레이션)에서 빠지지 않는 대표적인 물자가 쵸콜렛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군의 대명사인 쵸콜렛이 2차대전까지 형편없는 맛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 미군의 쵸콜렛을 방산비리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 형편없는 맛이 오히려 민간 관련 산업을 활성화시킨 재미난 사례이기에 언급하려고 한다.
 초콜렛 대명사 허쉬가 미군에 군납을 시작한 것은 1937년, 그 당시 전투식량을 개발 중이었던 미국 군수사령부의 로간 대령은 허쉬사와 접촉하여 전투식량에 사용될 초콜릿을 개발하여 달라고 요구한다.  당시 미군당국이 요구한 군사요구도는 “무게는 4온스 (약 113그램)에 상온에서 녹지 않아야 하며 맛은 삶은 감자수준의 단맛에 고열량일 것”이었다.  삶은감자보다 나은 당도에 고열량이라는 조건은 한마디로 맛은 포기하고 인체를 죽지 않게 버티게만 하는 쵸콜렛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에 허쉬사는 이 네 가지 조건에 맞춰 무게 4온스에 약 49도에서 녹지 않으며 1,800칼로리를 제공하는 초콜릿을 만들었다. 미군당국은  맛이 너무 좋으면 병사들이 일상 중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일부로 맛없게 주문을 했다고 하지만, 반대로 이렇게 맛이 없었기에 보급품보다 민수품을 선호하게되는 풍조가 만연했고 그 결과 고향의 여친이나 부모, 형제들이 사제 초콜릿을 참전병용 선물상자를 통해 보내는 ‘애프터 마켓’이 활성화 되게 된다. 이 외에도 ‘문파이(moon pie)'라고하는 원조 쵸코파이도 납품이 되는데 상용품보다 마쉬멜로 함량이 떨어져 야전에서 벽돌처럼 굳어지게 되는데  이러한 불량한 맛과 질이 민수제과업에 반대로 호황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효율성 무시 많으면 장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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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P45 극히 조악하고 장전하는데 시간이 걸려 대부분 한번 발사후 버리는 것이 현실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악평의 무기를 들자면 영국군의 S-T-EN 일명 스텐기관단총과 미국의 FP45 리버레이터가 가장 대표적인 악평무기였다. 영국군의 스텐기관단총은 근접전투에서 효과를 보인 독일군의 MP40에 자극을 받아 급조된 기관단총이었다. 영국군은 스텐을 만들기 이전에 부랴부랴 소화기들을 긁어모았고 기관단총도 수입했지만 비싼 가격에 영국전쟁성이 곤혹을 표명하자 대량생산이 가능한 기관단총을 만들어 냈는데 이것이 바로 스텐기관단총이었다. Mk.1~3까지 세 가지 버전이 나왔지만, 가격의 문제로 품질은  점점 더 조악해졌다. 실제로 쇠파이프와 공업용 스프링으로 몸통과 완충장치를 만들어서 개머리판을 떼버리면 쇠파이프라고 불릴 정도로 엉성한 모습이었다. 모양새뿐만 아니라 성능도 아주 개판이었는데 안전장치가 너무나 부실해서 교전 직전까지  탄알집 결합을 금지할 정도였는데 실제로 바닥에 떨어트리면 격발이 될 정도였다. 그래서 영국군에서는 총을 적 참호로 던지면 격발되서 독일군을 제압 할 수 있다는 투척무기라는 풍문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배관공의 악몽’, ‘죽음의 탭댄스’라는 악명을 얻었고 레지스탕스도 줍지 않는다는 악평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얼마나 찍어댔는지 전쟁 후에 약 400만정이 중동 등지에 뿌려졌고 인도의 치안군은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스텐 기관단총과 함께 악명을 얻은 무기로는 2등을 하라고하면 서러울 녀석이 있었으니 바로 미국의 FP45 리버레이터다. FP45는 2차대전 중에 레지스탕스를 지원하기위해 만들어진 권총이었다. 폴란드 망명정부의 무기 지원요청에 따라 빠르고 싸게 만들기 위해 GM사가 제작하게 되었는데 당시 미군의 군사요구도는 “빠르고 싸고 대량으로 만들어야 할 것, 공중투하와 은닉성을 보장하기위해 작고 가벼워야 함, 정규생산라인을 방해해서는 안 됨, 적이 주워도 사용하지 못하게 할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9밀리 탄을 쓰는 독일제 명품권총인 루거와 발터에 호환되지 않게 위력이 강한 45구경탄을 쓰게 만들어졌다. 레지스탕스들의 기록에 따르면 “탄종이 맞지 않아 독일군이 사용하지 못하기 보다는 너무나 후진성능 때문에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언급되었을 정도로 장난감에 가까운 열악한 성능이 큰 문제였다.
 사용제원에 따르면 사거리는 고작 8미터였고 이것도 정확히 사살하기 위해선 3미터 이내까지 접근해야만 피해를 줄 수 있었다. 3미터까지 접근해야 하는 또다른 이유는 한발 발사하면 버리고 도망을 가야할 정도로 조악했기 때문이었다. 
 FP45는 절판 두 개를 합쳐 리벳으로 고정하는 형태였고 그래서 사거리와 정밀도을 위해 필요한 강선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42년 6~8월 사이에 100만정이 제작되었지만, 실제로 레지스탕스에게 활용된 것은 극히 미비했고 영국수송기들도 공중투하를 단념해 미국본토에서 잠을 잘 무렵 미국은 FP45를 항일저항군 지원용으로 공중투하를 했고 의외로 일본군을 상대로 다소의 전과가 있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전쟁말기 물자부족으로 목총을 사용하게 될 정도로 물자부족이던 일본군이 이걸 노획해 사용했는데 이걸 다시 노획한 미군들이 FP45를 일본제라고 생각하는 웃지 못 할 상황도 발생했다고 한다.
 
로비로 인한 돈지랄 프랑스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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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군사 박물관에 전시된 R-35 전차

 

 2차대전 직전이었던 1933년 프랑스군은 새로운 경전차 개발계획을 발표하고 1935~36년경에 일련의 전차들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선정된 전차는 1종이 아닌 무려 3종이나 되었다.  원래 1933년 당시 프랑스군은 경전차 개발 사업에 참석한 5개 업체의 시제품중 하나를 선정해 양산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최초로 선정되었던 것은 르노 사의 R-35였다. 
 하지만 르노사의 R-35선정에 미심쩍은 부분들이 많았고 결국은 르노사의 격한 로비로 선정되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르노와 경쟁관계였던 호치키스 사와 FCM 사가 강하게 반발해 정치·경제문제로 사건이 크게 비화되었다. 이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서 결국 프랑스 육군은 3개 업체의 경전차 모두를 양산모델로 복수선정하게 되었고 납품계약을 체결해 제식화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기형적 군납품 선정은 결국 ‘돈지랄’에 불과했다. 실제로 3개사의 전차들은 같은 개발제원 하에서 만들어져 비슷한 외관에 비슷한 성능이었고(FCM-36은 생산량도 작았고 다소 차이는 있음) R-35와 H-36은 각기 1000대 이상이 생산되어 프랑스 기갑전력의 중추가 되어버렸다. 거기에 프랑스군이 보유한 Somua S-35전차와 비교했을 때 열악한 성능으로 평가되어 국내외로부터 악평에 시달여야만 했다. 결국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을 상대로 제대로 된 전과도 없이 물러서야 했다. 업체의 로비와 군의 한심한 사업자 선정이 부른 ‘돈지랄’의 결과는 무참한 패전이었다. 우리군도 다양한 무기를 개발해 한 가지 임무에만 활용한다는 점을 보면 왠지 2차대전 프랑스군과 닮은 모습이 있는 것 같다. 스웨덴이 한 가지 무기를 다양하게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현실과 비교한다면 결코 프랑스군의 ‘돈지랄’은 웃고 넘길 수만은 없는 상황이지 않을까

 

스웨덴, 바사호의 교훈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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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사 박물관에 전시된 전함 바사의 모형

 

 스웨덴 스톡홀름 소재의 바사박물관(The Vasa Museum)은 거대 호화전함 바사호와 관련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바사호는 바사 왕가의 구스타프 2세 시절인 1625년에 건조를 시작해 1628년 8월 완성되었다. 당시 스웨덴은 북유럽 발트해 주변 제국 건설에 필요한 막강한 해군력을 절실히 필요로 했기에 국부의 상당부분을 이 전함 건설에 쏟아부었다. 
바사호는 그러한 전략적 필요로 진수된 전함 중의 하나였고 450명이 탑승가능하고 64문의 화포가 탑재 가능한 막강한 화력을 지니고 있던 가장 강력한 야심찬 군함이었다. 하지만 국내외 귀빈 등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수식을 마치고 부두를 떠난 뒤 얼마 못가서 돌풍에 배가 기울었고 열린 포문으로 물이 들어 수 분만에 침몰하고 말았다. 
 국부의 상당부분을 투입했던 거대전함이 어이없이 물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스웨덴의 입장에서는 그리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역사의 일면이지만, 스웨덴은 침몰한지 333년이 지난 1961년 이를 인양해 특수보존 처리 후 현재의 바사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바사호의 침몰은 현재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부의 상당부분을 투입하고 눈 깜짝 할 사이에 바사호와 함께 소중한 인명과 국부를 바닷속에 수장시켜버렸다는 것은 오늘날 스웨덴 사회가 중요시하는 안전과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산무기정책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통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앞서 언급된 황당방산비리와 결함을 스웨덴인들은 큰 교훈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글 문형철 디펜스 21 + 기자 captin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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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북한 모습은?

2015년 4월, 북한 모습은?
 
 
 
nk투데이 이동훈기자 
기사입력: 2015/05/13 [00:25]  최종편집: ⓒ 자주시보
 
 

 

북한이 에볼라 바이러스 방역 조치를 개정해 사실상 외국인이 북한에 들어오는 것에 대한 제한 조치를 취한 것을 해제한 지 2달가량 지났습니다. NK투데이는 최근 북한 상황을 들어보기 위해 지난 4월 4일부터 11일까지 북한을 방문한 신영순 국제푸른나무 공동대표와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신영순 대표는 고아원의 식량사정이 아주 많이 좋아졌으며, 전기 사정이 어려웠지만 태양광 전원기(태양전지) 등 대체에너지로도 충당한다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평양에 있는 상점에서는 중국산보다 질이 좋은 북한상품도 많이 볼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다음은 신영순 대표와의 인터뷰 전문입니다.

 

 

이번 방북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고아원에 가축을 전달하기 위해 국제푸른나무 후원자 미주동포, 캐나다 동포 등 세분을 모시고 총 4명이 황해북도 사리원과 강원도 원산에 있는 고아원과 롱아학교 등에 다녀왔습니다.

 

 

 

 

고아원의 시설은 어떤가요? 그리고 봄철에 식량사정이 여러울텐데 고아원의 식량사정도 알려주십시오.

 

이번에 방북했더니 평양에 고아원은 이미 새로 건축되어 아이들이 새 건물로 다 이사를 했고, 원산과 사리원에도 고아들을 위해 건물을 정부에서 새로 크게 짓고 있습니다.

 

 

고아원 식량 사정은 아주 많이 좋아진 상태예요. 정부에서 전적으로 지원을 해주어서 어려움이 별로 없는 것 같았습니다! 북측 정부에서 하루에 물고기, 계란, 식량 등을 공급해주고 있어 아이들의 건강이 매우 좋아졌고, 표정들도 아주 밝아졌어요.

 

 

 

 

고아원에 가축을 전달하는 사업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국제푸른나무가 고아원과 장애인 특수학교에 가축 지원을 한 것은 몇 년 전부터 시작을 했는데, 저희는 장애자련맹을 통해서 고아원들과 장애인 특수학교에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동물들이 아이들의 정서에도 좋습니다.

 

저희가 전달하는 가축은 키워서 아이들의 식용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돼지, 염소, 식용토끼, 닭, 오리 등이 있습니다.

 

북한은 “풀을 고기로”라는 슬로건으로 오래전부터 염소, 양, 토끼를 고아원이나, 특수학교에서 키우고 있습니다.

 

저희 국제푸른나무 지원은 더욱 풍성한 단백질 영양이 장애인들과 고아원에 공급되어 따뜻하고 생명 있는 민족의 아름다운 나눔이 되기를 바랍니다!

 

 

 

 

 

북한에 고아들을 입양하는 사람들이 있고 수십 명의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혹시 알고 계신가요?

 

북한은 오래 전부터 혼자 사는 사람이나, 부부가 아이들을 데려와 자기 자식처럼 여러 명을 키우는 분들이 있어요. 평양에서 텔레비전 방송에 소개되는 것을 저는 직접 보기도 했고요. 

 

장애인 고아의 경우에는 장애자련맹에서 위탁가정 시스템을 시도 하는데 아직은 초기로 알고 있습니다.

 

 

평양에서 지방으로 이동할 때 북한의 고속도로 상황은 어떤가요?

 

저희가 북한에서 이용하는 8인승과 35인승 전용 차량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평양에 가면 이 차량을 이용합니다.

 

평양부터 사리원까지는 아스팔트 고속도로입니다. 평양에서 사리원 시내까지 40분 걸려서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평양에서 원산까지는 시멘트 포장도로입니다. 평양에서 원산까지는 약 2시간 30분 걸렸습니다. 중간에 신평 휴게실에 15분 쉬기도 했어요. 아주 아름다운 호수와 바위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고속도로를 다니는데 불편함이 없었어요.

 

 

북한에서 수력발전 비중이 높은데, 가뭄 때문에 수력발전이 안되어 전기사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실제 가본 북한의 지금 전기사정은 어떤가요?

 

북한의 전기 사정이 긴장된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풍력발전기나 태양광 전원기를 이용하여 대체 에너지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 사무실에서 텔레비전, 컴퓨터, 전깃불 등에 태양광 전원기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뭄이 이어지고 있긴 했는데 저희 들어가기 전날과 이틀 후에 비가 내렸습니다. 가뭄 상황이 약간이라도 해소 될 수 있었길 기대합니다.

 

 

 

비행기를 이용하여 평양에 가셨을 것 같은데 최근 순안공항을 신축하고 있고 거의 다 완성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새롭게 지어진 순안공항 내부 모습 등을 보셨는지요?

 

평양 순안 비행장이 전체 유리로 되어 아름답게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어요! 그리고 새 비행기 활주로도 모두 새로 만들어져 완성이 다 되었고요. 

 

새 비행장 내부는 아직 못 들어가 보았으나, 제가 곧 다시 평양 방문을 할 예정입니다. 그 때 새 비행장으로 도착할 수도 있겠네요. 기대하고 있습니다.

 

 

 

 

고아원에 가축을 지원하는 사업 외에 빵공장도 방문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공장들에 가 보셨습니까?

 

저희가 2003년에 세운 사리원 빵공장에 갔습니다. 사리원에 우리 빵공장에서는 고아들의 간식으로 아주 맛있는 빵을 만들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바쁜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공장은 사리원 빵공장에만 가서 다른 공장의 상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최근 북한이 경공업을 강조하고 새로운 상점도 많이 생긴다고 하는데 이번 방북에서 북한의 백화점이나 상점에 가보셨습니까?

 

지금은 북한에 산업화 바람이 일어나고 있어서 많은 질이 좋은 상품들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상점과 백화점에 가서 직접 생필품, 과자, 빵, 비누, 치약 등을 구입하기도 하였습니다. 중국 것보다 품질이 좋은 것들도 많았어요.

 

 

북한 장애인 예술단의 미주 공연을 추진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번 방북에서 협의가 있었는지요?

 

미주공연이 아니라 캐나다 공연을 추진 중입니다. 가능하면 미국도 순회공연을 하려고 하는데, (성사되려면) 북미관계와 남북관계가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번 인터뷰 때 국제푸른나무 주력 사업이 대동강장애인종합회복원 건축 착공이라고 하셨는데, 이것과 관련하여 협의를 진행하셨는지, 진행하셨다면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요?

 

남북관계가 꽉 막힌 상황에서 100억이나 드는 건축을 한다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장애자련맹과 협의하면서 너무 상황이 어려워, 저 개인적으로는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조선장애자련맹 부위원장님이 7월 말까지 기다려보자고 하셔서 계속 희망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 사업이 남북 복지에 정말 중요한 것인 만큼 사업이 성사되기 위해 남북관계가 더 좋아지길 학수고대 하고 있습니다.

 

 

이번 방북이 약 6개월 만에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북한에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 중 기억에 남는 변화를 소개해 주신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6개월만에 평양에 갔더니 시내에 새로운 아파트 건물들이 보였고 대동강 강가도 새로 단장되고 있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평양시내에 자동차들도 많이 붐비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이 놀랐던 것은 순안 비행장이 외국인 관광객들로 많이 붐비고 있었다는 겁니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붐비는 평양 순안공항!!

 

그리고 어디가나 상점이나, 백화점에 물건이 풍성하게 쌓여있고, 판매대도 사람들이 상품 구입을 위해 많이 붐비고 아주 분주했습니다!

 

 

 

 

 

 

 

 

 

 

앞으로 방북 계획은 어떠십니까?

 

아직 확정은 되지 않았지만 조만간 다시 방북을 하려고 합니다.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열심히 해야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빨리 남북관계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끝)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항상 노력하시고, 바쁘신 와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국제푸른나무 신영순 대표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최근 북한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제공해주신 국제푸른나무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정리 이동훈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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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권연대, 정종욱 통준위부위원장 해임촉구 기자회견 열어

'흡수통일 아이콘'이 광복 70년 준비위원장?민권연대, 정종욱 통준위부위원장 해임촉구 기자회견 열어
김준성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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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5.12  16: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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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권연대는 12일 통일준비위원회 앞에서 정종욱 부위원장 해임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준성 통신원]

흡수통일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정종욱 통일준비위원회 민간측 부위원장이 국무총리와 함께 광복 70년 준비위원회 공동위원장까지 맡고 있어 민간통일단체들이 반발하고 있다. 통일준비위원회는 박근혜 대통령이 위원장을 맡고, 통일부 장관이 정부측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대통령 직속기구로 지난해 8월 첫 전체회의를 개최하고 본격 활동을 시작했다.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는 12일 오후 정부서울청사 창성동별관 통일준비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흡수통일 논란을 일으킨 정종욱이 어떻게 민족사적인 광복 70년을 준비하는 행사 책임자를 맡을 수 있는지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며 해임을 촉구했다.

정 부위원장은 지난 3월 10일 ROTC 중앙회가 주최한 조찬 포럼에서 ‘통일 로드맵 가운데 비합의적인 통일, 체제 통일에 관한 것도 있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당시 정 부위원장은 논란이 되었던 흡수통일 발언을 용어 선택의 잘못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정 부위원장은 3월 12일 ‘한반도 평화통일의 미래’를 주제로 한 기조연설에서 ‘북한의 시장화가 북한 내부의 경제 발전을 촉진시키고 주민들의 삶을 향상시켜 북한 스스로 올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북한 체제변화를 주문하는 발언을 계속했다.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통일준비위원회 전문위원이 북한 붕괴 대응방안이 담긴 USB를 가지고 개성공단으로 들어갔다가 북한 측에 적발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 기자회견에는 권오창 우리사회연구소 이사장(왼쪽), 윤한탁 민권연대 명예의장(가운데) 등이 참석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준성 통신원]

김수근 서울 민권연대 공동대표(새바람 대표)는 기자회견문에서 “흡수통일은 북한 급변사태 또는 북한붕괴론에 입각한 무력을 동반한 통일방식으로 한반도를 전쟁위기로 몰아갈 수 있는 위험한 정책”이라며 “정종욱과 같은 인물이 광복 70주년 행사를 준비하게 된다면 8.15 행사는 평화통일의 8.15가 아니라 체재대결의 난투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자회견 사회를 맡은 김성일 민권연대 사무총장은 박근혜 정부에 5월 17일까지 정종욱 부원장을 해임할 의사가 있는지 답변해줄 것을 요청했다. 민권연대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질의서를 통해 정종욱 부위원장의 해임의사를 묻고 17일까지 답변을 요청한 바 있다.

민권연대는 이날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17일까지 통일준비위원회 앞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1인시위를 벌일 계획이며, 정부의 대응 결과를 지켜본 뒤 기자회견 등을 통해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민권연대 관계자는 “정종욱 부위원장에 해임 요구가 시한 내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통일준비위원회 해제를 촉구하는 행동으로 나설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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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조단 조사보고서 총괄책임자인 해군 대령 법정 증언

천안함 조사보고서 작성 장교도 1번어뢰설계도 못봤다
 
합조단 조사보고서 총괄책임자인 해군 대령 법정 증언
 
김원식 | 2015-05-12 10:12:5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합조단 조사보고서 총괄책임자인 해군 대령 법정 증언

지난 2010년 3월 26일 발생한 천안함 침몰 사건에 관해 당시 국방부가 발표한 조사결과 보고서 작성을 총괄한 합동조사단(합조단)의 군 관계자가 침몰의 원인으로 지목된 이른바 ‘1번 어뢰’ 설계도를 보지 못했다고 밝혀 또 다른 논란이 예상된다.

이 같은 사실은 11일(이하 한국시각), 신상철 전 민군 합동조사위원(현, ‘진실의길’ 대표)의 천안함 명예훼손 소송(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 담당)의 증인 심문을 통해 드러났다. 이날 증인으로 출석한 신희안 해군 대령(현 작전사령부 연습훈련 차장, 천안함 사건 당시 합조단 총괄 담당)은 변호인의 반대 심문 과정에서 “1번 어뢰 설계도를 본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본 적은 없다”고 답변했다.

신 대령은 이날 검사 측 심문 과정에서 “천안함 사건과 관련하여 국방부가 홈페이지에 공개한 자료와 나중에 조사 결과로 발표한 자료가 다소 차이가 보인다”는 질의에 “최초 문서 작성에는 군사적 용어가 있어 이를 국민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용어로 바꿨을 뿐, 전체 조사 결과 내용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이에 검사 측은 일일이 해당 서류를 제시하며 “그렇다면 천안함 조사 결과 보고서는 증인이 작성한 것이 맞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신 대령은 “천안함 조사 결과 보고서는 제가 최종 취합했고 다시 각 합조단 분과에 확인해 제가 (다시) 작성한 것이 맞다”고 대답했다.

국방부가 2010년 5월 20일 공개한 ‘1번 어뢰’ 도형은 결국, 가짜로 판명되었다.ⓒ민중의소리

이에 관해 변호인 측은 반대 심문 과정에서 “그렇다면 (천안함 사건의 원인으로 지목된) 1번 어뢰의 제원이나 기타 자세한 사항이 나와 있는데, 증인은 이 어뢰의 설계도를 본 적이 있는가”라고 질의했다. 이에 신 대령은 “설계도를 직접 본 적은 없다”고 답했다. 변호인 측이 재차 “천안함 사건의 조사 결과 보고서를 총괄한 증인이 (해당 어뢰의) 설계도를 보지 못했다는 것인가”라고 묻자 신 대령은 “(합조단) 각 분과에서 올라오는 서류를 취합하는 업무를 한 관계로 설계도는 보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이에 변호인 측은 “그렇다면 증인(신 대령)이 본 것은 합조단 보고서에 있는 (이때 변호인 측은, 합조단 보고서에 있는 이른바 ‘1번 어뢰’ 개략도(Schematics)를 제시하며) 이 서류라는 것이냐”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변했다.


천안함 민간 합조단장에 이어 합조단 실무자도 ‘1번 어뢰’ 설계도 본 적 없다

앞서, 지난해 11월 15일 천안함 사건 합조단 민간조사단장이었던 윤덕용 교수는 ‘민중의소리’와의 단독 인터뷰를 통해 “1번 어뢰 설계도를 직접 보지 못했다”고 밝힌 바 있다. 윤 교수는 당시 인터뷰에서 “어뢰 설계도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며 “설계도가 컴퓨터 파일로 되어 있다는 것은 들었고 그 파일에서 일부를 프린트해서 천안함 사건 조사 결과 발표 시 사용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에 관해 기자가 재차 질의하자, 윤 교수는 “국방부 측으로부터 어뢰에 관해 영문으로 된 자료로 상세한 설명을 들었다”며 “수거한 어뢰가 수집된 정보와 동일하며 북한산 어뢰라는 것은 당시 미국 측 전문가들도 다 인정한 사실”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기자는 이와 관련해 지난해 11월 4일,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이 어뢰의 설계도(CD) 및 관련 팜플릿 전체를 공개하여 줄 것”을 국방부에 청구했으나, 국방부는 “상기 자료는 군사기밀보호법에 따라 비밀로 지정된 자료로, 공개 시 국가안보 및 외교문제 발생 등에 따라 공개할 수 없음을 알려드린다”며 이른바 ‘1번 어뢰’의 설계도를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국방부는 “다만, 천안함 폭침이 북한의 소행임을 입증할 수 있는 어뢰의 설계도(이미지)와 일부 제원은 국방부에서 발간한 합동조사결과 보고서에 수록되어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천안함 관련 재판 과정에서, 당시 천안함 사건 조사결과 보고서를 총괄한 해군 장교마저 국방부가 주장하는 이른바 ‘1번 어뢰’의 설계도를 직접 본 적이 없고, 단지 국방부가 조사결과 보고서에서 발표한 제원 등이 담긴 개략도를 본 것이며, 해당 사항을 취합해서 보고서를 작성했을 뿐이고, 이를 당시 “민간 합조단장이었던 윤덕용 교수가 발표한 것으로 안다”고 증언했다. 따라서 천안함 침몰 사건의 원인으로 지목된 이른바 ‘1번 어뢰’의 실체와 둘러싼 또 다른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2010년 3월 26일 침몰됐다 4월 15일 인양된 천안함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민중의소리’에 게재된 필자의 기사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1&table=newyork&uid=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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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통신위성은 은하-3호에 싣지 못한다

정지통신위성은 은하-3호에 싣지 못한다
 
한호석의 개벽예감 <158>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5/05/11 [12:30]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위성관제종합지휘소를 왜 평양 도심에 신축하였을까? 
2. 2년 동안의 분사시험을 거쳐 신형 로켓엔진을 만들다
3. 은하-3호에 싣지 못하는 정지통신위성
4. 우주환경시험기지 건설하고 우주선 만든다

 

▲ <사진 1> 김정은 제1위원장이 새로 건설된 위성관제종합지휘소의 연혁실을 돌아보고 있다. 거기에는 지난 시기 조선이 쏘아올린 3기의 운반로켓과 거기에 각각 탑재된 3기의 위성을 축약, 모사한 모형들이 전시되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감회 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것은, 이 사진에서 보이지 않지만, 1998년 8월 31일 농구공처럼 생긴 첫 시험위성 광명성-1호를 싣고 발사된 조선의 첫 운반로켓이 솟구쳐오르는 사진이다.     © 자주시보

 

 

1. 위성관제종합지휘소를 왜 평양 도심에 신축하였을까?


2015년 5월 3일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새로 건설된 위성관제종합지휘소를 현지지도한 소식을 보도하였다. <사진 1> 위성관제종합지휘소는 국가우주개발국 산하에 있고, 국가우주개발국은 우주공간기술위원회 산하에 있다. 2014년 4월 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결정에 의해 신설된 국가우주개발국은 조선의 우주개발계획을 작성하고 실행하며, 우주개발사업을 감독하고 통제한다. 

 

▲ <사진 2> 이것은 새로 건설된 위성관제종합지휘소 주건물을 정면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곡선과 직선을 비반복적으로 배치한 현대적 건축양식이 건축미학을 한껏 뽐내고 있는데, 건물 전체가 마치 소나무가 빽빽히 들어찬 산자락에 건물이 안겨있는 것처럼 보인다. 표지석에는 우리말로 위성관제종합지휘소라고 써넣었고, 그 밑에 영국식 영어로 쌔들라잇 컨트롤 센터라고 써넣었다. 조선에서는 미국식 영어가 아니라 영국식 영어를 쓴다.     © 자주시보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제963군부대 군인건설자들이 착공의 첫 삽을 뜬 날로부터 불과 8개월 만에 위성관제종합지휘소를 완공하였다고 한다. 위성관제종합지휘소는 기본건물, 보조건물, 측정소들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사진 2>에서 보는 것처럼 위성발사 전 과정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주현시실, 위성을 관제하는 조종실 및 보조현시실, 궤도회전 중인 위성을 관측하는 광학관측실, 위성발사를 지켜보는 참관자들을 위한 관람실,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의 연구활동과 생활편의를 위한 전자도서실, 휴게실, 회의실, 사무실, 식사실, 침실 등이 있다.

 

▲ <사진 3> 평양의 도심은 8개 행정구역으로 구성되었고, 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부심은 11개 행정구역으로 구성되었다. 부심을 구성한 11개 행정구역 면적이 엄청나게 넓은 까닭은, 300만 평양시민들에게 공급하는 농산물을 생산하는 협동농장들이 거기에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평양 도심의 8개 행정구역 가운데 5개 행정구역은 서평양에 속하고, 3개 행정구역은 동평양에 속한다. 서울의 한강은 강북과 강남 사이로 흐르는데 비해, 평양의 대동강은 동평양과 서평양 사이로 흐른다. 평양의 주요기관들은 동평양에 거의 집중되어 있는데, 위성관제종합지휘소도 동평양에 속하는 보통강구역에 건설되었다.     © 자주시보


상업위성사진을 온라인에서 제공하는 미국 회사 ‘구글 어스(Google Earth)’로부터 제공받은 평양지역 위성사진을 분석한 <연합뉴스> 2015년 5월 5일 보도기사에 따르면, 위성관제종합지휘소는 평양 보통강구역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사진 3>에 나온 평양시 약도에서 보는 것처럼, 보통강구역은 평양 도심의 6개 행정구역 가운데 하나다. 105층 류경호텔,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이 보통강구역에 있다.

 

▲ <사진 4> 상업위성사진에서 위성관제종합지휘소의 위치를 찾아보았더니, 놀랍게도 배산림수형 명당자리에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었다. 위성관제종합지휘소 앞에 보통강이 흐르고, 뒷쪽에는 수림이 울창한 야산이 위성관제종합지휘소를 감싸안고 있다. 이 위성사진은 위성관제종합지휘소가 완공되기 전에 촬영된 것이다.     © 자주시보


조선의 언론매체들이 보도한 사진을 보면, 위성관제종합지휘소는 야산 앞자락에 건설되었다. 위성에서 촬영된 <사진 4>에서 보는 것처럼, 야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위성관제종합지휘소 앞에 보통강이 흐른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자연환경친화사상인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위성관제종합지휘소가 자리를 잡은 터야말로 배산림수(背山臨水)형 명당자리인데, 우리 조상들은 집터를 그런 명당자리에 잡으면 모든 일이 잘 되고 흥한다고 믿었다.


평양의 중심에 있는 김일성광장에서 위성관제종합지휘소까지 직선거리는 4km밖에 되지 않는다. 위성관제시설을 수도 한 복판에 건설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조선밖에 없다. 거주인구가 300만 명인 수도 한 복판에 위성관제시설을 건설한 것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매우 파격적인 발상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런 파격적인 발상은 김정은 제1위원장의 우주강국건설구상에 따른 것이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위성관제종합지휘소 건설을 직접 발기하시고 명당자리에 위치도 잡아주시였”으며, “위성관제종합지휘소가 일떠선 곳의 해발고는 비록 높지 않지만 이곳은 우리 민족의 존엄이 응축되여 있는 것으로 하여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곳”이라고 하였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위성관제종합지휘소를 왜 평양 도심에 건설하도록 지시한 것일까? 


첫째, 우주개발은 현대과학기술이 집대성된 최첨단분야다. 국력강화와 사회발전에 필수불가결한 통신, 교통, 산업, 환경, 국방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우주개발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우주과학기술을 선점한 몇몇 강국들이 21세기 과학기술발전을 선도하고 있다. 오늘 ‘천하제일강국’을 건설하는 시대적 요구를 자임한 조선에게 우주개발은 그 요구를 실현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된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김정은 제1위원장이 조선의 국가발전을 추진하는 주요거점들 가운데 하나인 위성관제종합지휘소를 조선의 심장부인 평양에 건설하도록 지시한 의도를 알 수 있다. 평양 도심에 위성관제종합지휘소가 건설됨으로써 조선국가우주개발국 소속 과학자, 기술자들은 우주개발을 정력적으로 이끄는 최고영도자의 세심한 지도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받으며 최첨단돌파전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 <사진 5> 이것은 위성관제종합지휘소 내부시설의 일부를 촬영한 사진들이다. 위쪽 사진은 회의실이고, 아랫쪽 사진은 위성발사를 지켜보는 참관자들을 위한 관람실이다. 앞으로 조선이 위성을 발사하는 날, 그 관람실에는 조선의 위성발사를 지켜볼 세계 각국 인사들이 가득차게 될 것이다.     © 자주시보


둘째, 우주개발에 필요한 설비들은 하나같이 최첨단설비들이다. 그런 최첨단설비를 마련하려면 국가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입하여야 한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새로 건설된 위성관제종합지휘소를 현지지도하면서 “위성관제종합지휘소에 최첨단설비들을 더 보강해주”어야 한다고 지시하였는데, 그 지시는 조선의 국가자원이 우주개발에 필요한 최첨단설비를 마련하는데 집중적으로 투입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평양 도심에 위성관제종합지휘소가 건설됨으로써 조선국가우주개발국 소속 과학자, 기술자들은 최상의 연구조건에서 최첨단설비를 사용하며 우주개발사업을 더 빠른 속도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사진 5>

 
셋째, 우주개발의 직접적인 담당자는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인데, 그들의 생활조건을 최상의 수준에서 보장해주어야 우주개발사업이 더욱 빠른 속도로 추진될 것이다. 평양 도심에 위성관제종합지휘소가 건설됨으로써 조선국가우주개발국 소속 과학자, 기술자들은 최상의 생활환경에서 최첨단돌파전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 <사진 6> 이 사진은 로켓엔진을 시험분사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시험대에 수평으로 설치되어 거대한 화염을 내뿜는 이 로켓엔진은 2002년 6월 미국에 설립된 민간우주개발기업 스페이스 익스플러레이션 테크놀로지스에서 개발한 팰컨로켓엔진이다.     © 자주시보


 
2. 2년 동안의 분사시험을 거쳐 신형 로켓엔진을 만들다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은 2013년부터 2014년까지 2년 동안 서해위성발사장에서 로켓엔진분사시험을 집중적으로 실시하였다. 로켓엔진분사시험은 로켓엔진 시제품을 시험대에 수평으로 놓고 연소, 분사하면서 추력발생, 연소시간 등을 측정하는 시험이다.


일본 텔레비전방송 <NHK> 2014년 2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서해위성발사장에서 2013년 12월 25일 여섯 번째로 로켓엔진분사시험이 실시되었다. 이것은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이 2013년 한 해 동안 로켓엔진분사시험을 여섯 차례나 실시하였음을 말해준다. 평균 두 달에 한 차례씩 계속 실시한 것이다.  
미국의 국제안보협력센터(CISAS) 소속 위성사진분석가 닉 핸슨(Nick Hansen)은 2014년 7월 29일 미국의 대북정보분석 웹싸이트 <38 노스(North)>에 서해위성발사장 위성사진을 분석한 논문을 실었는데, 그 논문에 따르면, 서해위성발사장에서 2014년 3월 22일부터 5월 21일까지 로켓엔진분사시험이 집중적으로 실시되었고, 6월 10일부터 준비되어온 로켓엔진분사시험이 8월 초부터 또 다시 실시될 것으로 예견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우주개발국이 2013년에 이어 2014년에도 로켓엔진분사시험을 집중적으로 실시하였음을 말해준다. <사진 6>
올해 2015년에 들어와 서해위성발사장에서 로켓엔진분사시험이 재개되었다는 언론보도가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2013년 초에 시작된 로켓엔진분사시험은 2014년 말에 종료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로켓엔진분사시험에서 매우 오래고 풍부한 경험을 축적하였는데, 2013년부터 2014년까지 2년 동안에 그러한 것처럼 로켓엔진분사시험에 집중한 적은 없었다. 로켓엔진제작기술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이른 조선이 로켓엔진분사시험을 2년 동안 지속적으로, 집중적으로 실시한 것을 보면,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은 이제껏 조선에서 만든 적이 없는 고성능 로켓엔진을 만들기 위해 그처럼 많은 노력을 집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이 2년 동안 지속적으로 노력하여 완성한 신형 로켓엔진은 얼마나 강력한 것일까? 


한국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아시아경제> 2014년 4월 4일 보도에 따르면, 서해위성발사장에서 로켓엔진을 시험분사할 때 촬영한 위성사진에 나타난 그을음, 연소시간, 동체크기를 보면, 분사시험에 사용된 로켓엔진은 “대포동 계열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한 ‘대포동 계열’이란 2012년 4월과 12월에 조선이 쏘아올린 운반로켓 은하-3호를 뜻한다. 한국 정부 관계자는 그가 “대포동 계열”이라고 부른 은하-3호에 장착된 로켓엔진이 2014년에 시험분사된 것처럼 보았으나, 그런 관측은 빗나간 것이다. 과거에 사용했던 로켓엔진을 시험분사에 다시 사용하는 경우는 없다. 분사시험은 신형 로켓엔진을 개발하기 위한 것이므로, 분사시험에는 새로 만든 로켓엔진 시제품이 사용되는 것이다.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은 은하-3호 로켓엔진보다 더 강력한 신형 로켓엔진을 개발하기 위해 만든 로켓엔진 시제품을 시험분사한 것이다.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이 2년 동안 노력을 집중하여 새로 개발한 신형 로켓엔진은 은하-3호 1단 로켓엔진보다 더 강력한 것이 분명한데, 신형 로켓엔진의 성능은 어느 정도인가? 이 흥미로운 물음에 답하려면, 아래의 정보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 <사진 7> 이 사진은 2012년 4월 서해위성발사장 조립건물 안에서 은하-3호를 수평으로 놓고 조립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얼마 전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은 이 운반로켓의 1단 로켓보다 2.2m 더 긴 신형 1단 로켓을 제작하였다. 신형 1단 로켓엔진의 추력은 1,200kN으로 추정된다.     © 자주시보


첫째, 2014년 10월 2일 미국의 위성사진분석가 닉 핸슨이 미국의 관영라디오방송 ‘미국의소리(VOA)’와 진행한 대담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서해위성발사장에서 로켓엔진분사시험이 실시될 때, 차량길이가 23.5m가 되는 수송열차가 그 시험장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체길이가 20m 정도인 1단 로켓 시제품을 시험분사하였음을 말해준다. 은하-3호 1단 로켓의 동체길이가 17.8m이었으므로,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은 은하-3호 1단 로켓보다 동체길이가 2.2m 정도 더 긴 신형 1단 로켓을 제작한 것이다. <사진 7> 


둘째, 미국의 군사전문 웹싸이트 <글로벌 씨큐리티(Global Security)>에 현시된 자료에 따르면, 은하-3호 1단 로켓엔진의 추력은 1,050kN이다. 1N(뉴튼)은 질량 1kg의 물체를 1초 동안 1m 이동시키는 운동력(추력)을 표시한 측정단위인데, 1kN(킬로뉴튼)은 1N의 1,000배다. 미사일, 운반로켓, 항공기 등에 장착된 각종 엔진의 추력은 kN이라는 국제공용측정단위로 표시된다.  
은하-3호 1단 로켓엔진의 추력이 1,050kN이었으므로, 그 1단 로켓보다 동체길이가 2.2m 정도 더 긴 신형 1단 로켓의 엔진추력은 1,200kN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은 1,200kN의 추력을 내는 신형 1단 로켓엔진을 제작한 것이다.

 

▲ <사진 8> 이 사진은 2012년 4월 13일 은하-3호에 실려 발사된 광명성-3호 1호기가 발사 직전 외부인들에게 공개되었을 때 촬영된 것이다. 당시 은하-3호는 발사 직후 서해에 추락하는 바람에 광명성-3호 1호기도 소실되었다. 광명성-3호 1호기는 광명성-3호 2호기와 똑같이 제작된 것이다. 우주선진국들은 위성발사에 실패할 것에 대비해 위성과 운반로켓을 2기씩 만든다. 2012년에 조선도 그렇게 하였다.   © 자주시보

 

▲ <사진 9> 이것은 광명성-3호 1호기 윗부분을 확대한 사진이다. 사진의 오른쪽에 옆으로 누운 원통형 물체에는 감지기가 들어있고, 왼쪽에 세워진 원통형 물체에는 지구를 촬영하는 촬영기의 렌즈가 들어있다. 거기에 둥그렇게 설치된 전선은 촬영기가 그 렌즈를 통해 촬영한 영상자료를 X-밴드 안테나로 보내주는 연결전선이다. X-밴드 안테나는 촬영기가 촬영한 지구관측영상자료를 지상의 위성관제종합지휘소로 송신한다.     ©자주시보

 

 

3. 은하-3호에 싣지 못하는 정지통신위성


러시아 언론매체 <스뿌뜨니끄> 2015년 4월 17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우주공간기술위원회 박경수 부위원장은 러시아 통신사 <이따르-따스>와 진행한 회견에서 “현재 조선의 기술연구집단이 지구관측위성과 정지통신위성을 제작하는 데 매진하고 있다”고 하면서, “지구자원탐사, 기상관측, 국가경제발전, 인민생활향상 등을 위해 령도자의 위대한 구상을 받들고 장기간에 걸쳐 단계적으로 우주정복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담에서 주목하는 것은, 조선의 기술연구집단이 지구관측위성과 정지통신위성을 제작하는 데 매진하고 있다고 밝힌 대목이다. 그 발언은 신형 1단 로켓엔진을 제작한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이 그 신형 로켓에 실어 쏘아올릴 지구관측위성과 정지통신위성을 만드는 제조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된 정보를 분석하면, 아래와 같은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첫째,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은 2015년 5월 8일에 발표한 대변인 담화에서 “우리가 만들어 가지고 있는 각종 위성들도 그 누가 미싸일이라고 하여 그대로 인정되는 것도 아니며 그 존재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더욱 아니”라고 언명하였다. 이 문장에 따르면,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은 각종 위성을 이미 만들어놓은 것이다.


자국산 인공위성을 자국산 운반로켓에 실어 쏘아올리는 우주개발선진국들은 발사에 실패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똑같은 위성을 2기씩 만들어놓는다. 조선도 2012년에 광명성-3호를 은하-3호에 실어 쏘아올릴 때 그렇게 하였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위에 인용한 조선국가우주개발국 대변인 담화에 나온 문장은 조선이 쏘아올릴 각종 위성들 가운데 일부가 이미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정은 조선이 당창건 70주년을 맞는 오는 10월 10일 이전에 지구관측위성과 정지통신위성을 쏘아올릴 것임을 예고해준다. 지구관측위성과 정지통신위성의 연속발사는, 조선의 표현을 빌리면, “조선로동당 창건 70돐에 드리는 가장 훌륭한 선물”로 될 것이다.


둘째, <사진 8>에서 보는 것처럼, 2012년 12월 12일 성공적으로 발사된 조선의 첫 실용위성 광명성-3호 2호기는 지구관측위성이었다. 그런데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은 지구관측위성을 왜 또 다시 만드는 것일까? 질량이 100kg인 광명성-3호 2호기는 고성능 지구관측위성이 아니다. 광명성-3호 2호기 윗부분을 확대한 <사진 9>를 보면, 그 위성에 간단한 장비들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은 광명성-3호 2호기보다 성능이 더 좋은 고성능 지구관측위성을 새로 만드는 것이다.


둘째,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은 고성능 지구관측위성만이 아니라 정지통신위성도 만들고 있다. 조선에서 정지통신위성이 제작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지통신위성이란 정지궤도(geosynchonous orbit)에 진입하여 지구의 자전속도와 같은 속도로, 지구의 자전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지구 주위를 원형으로 회전하는 위성이다. 정지통신위성의 비행속도 및 비행방향이 지구의 자전속도 및 자전방향과 같기 때문에, 지구에서 바라보면 그 위성은 정지궤도를 따라 회전하지 않고 어느 위치에 정지된 것처럼 보인다.


광명성-3호 2호기가 진입한 저지구궤도(Low Earth Orbit)는 지구 해수면으로부터 160~2,000km 떨어진 낮은 우주공간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해, 정지궤도는 지구 해수면으로부터 35,786km나 떨어진 매우 높은 우주공간에 자리잡고 있다. 지구관측위성이나 우주정거장은 저지구궤도에 쏘아올려야 하고, 정지통신위성은 정지궤도에 쏘아올려야 한다.
그런데 은하-3호에는 부피와 질량이 큰 정지통신위성을 실을 수도 없고, 정지궤도까지 먼 거리를 날아갈 수도 없다. 은하-3호는 길이 32m, 지름 2.4m, 질량 91t, 추력 1,354kN이다. 그러므로 조선이 정지통신위성을 쏘아올리려면 은하-3호보다 훨씬 더 큰 운반로켓을 새로 만들어야 하고, 매우 강력한 추력을 내는 로켓엔진을 만들어야 한다.


이 글의 집필시점인 2015년 5월 초순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이 은하-3호보다 더 크고 강력한 신형 운반로켓을 이미 만들었는지 아니면 아직 만드는 중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위에서 언급한 <스뿌뜨니끄> 보도기사에서 조선우주공간기술위원회 박경수 부위원장이 신형 운반로켓을 제작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신형 위성을 제작하는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을 보면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은 신형 운반로켓을 이미 만들었고, 지금은 그 로켓에 실을 신형 위성을 만드는 중인 것으로 보인다.

 

▲ <사진 10> 이것은 중국이 1990년부터 1995년까지 기간에 정지통신위성을 실어 쏘아올린 창정-2E를 촬영한 사진이다. 조선이 정지통신위성을 쏘아올리려면 창정-2E와 같은 급의 운반로켓을 만들어야 한다.     © 자주시보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이 만든 신형 운반로켓은 어떤 것일까? 이 문제를 해명하려면, 중국이 정지통신위성을 쏘아올리기 위해 만든 운반로켓을 비교대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 쏘아올린 정지통신위성의 질량은 3.3t이었는데, 중국이 그 위성을 정지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사용한 운반로켓은 창정(長征)-2E다. 3단으로 제작된 창정-2E는 길이 49.7m, 지름 3.35m, 질량 460t, 추력 5,923kN이다.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이 정지통신위성을 쏘아올리려면 창정-2E와 같은 급의 운반로켓을 만들어야 한다. <사진 10>


독일의 로켓전문가 노르베르트 브뤼게(Norbert Brűgge)는 자기의 웹싸이트에 현시한 서해위성발사장 분석기사에서 그 발사장에 있는 46m 높이의 9층 발사대가 60m 높이의 12층 발사대로 증축되었는데, 그렇게 증축된 발사대에서는 신형 엔진을 장착한, 지름 3m의 신형 운반로켓이 발사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브뤼게는 그 증축된 발사대에서 발사될 신형 운반로켓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지만, 중국의 창정-2E처럼 길이가 50m 정도, 지름이 3m 정도, 질량이 450t 정도인 신형 운반로켓이 멀지 않아 그 증축된 발사대에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예견된다.


그런데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이 신형 운반로켓을 개발하는 데서 결정적인 문제는 창정-2E만큼 강한 추력을 내는 로켓엔진을 만드는 것이다. 만일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이 창정-2E처럼 6,000kN의 추력을 내는 강력한 로켓엔진을 만든다면, 그 신형 로켓엔진을 장착한 운반로켓의 동체길이와 동체지름은 50m 정도, 3m 정도로 각각 길어질 것이고, 그 로켓의 동체질량도 450t 정도로 늘어날 것이다.

 

▲ <사진 11> 이것은 러시아가 2004년부터 현재까지 사용하는 운반로켓 소유즈에 장착된 부착식 보조엔진을 촬영한 사진이다. 이 부착식 보조엔진은 러시아가 2001년에 개발한 RD-117 로켓엔진 5기를 한 다발로 묶어 강력한 추력을 내도록 설계되었다. 이 로켓엔진 1기의 추력은 1,021kN이므로, 1단 로켓의 추력총량은 5,105kN이다. 러시아가 최근에 소유즈 로켓을 쏘아올린 때는 2014년 12월 26일이다.     © 자주시보

 

1,354kN의 추력을 내는 은하-3호를 만든 경험밖에 없는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이 6,000kN의 추력을 내는 엄청나게 강력한 신형 운반로켓을 은하-3호 발사 이후 불과 3년 만에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은하-3호의 추력과 창정-2E의 추력 사이에 너무 큰 격차가 있기 때문에,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이 창정-2E만큼 강력한 신형 운반로켓을 그처럼 짧은 기간에 만드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위에서 논한 것처럼,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이 2013년부터 2014년 까지 2년 동안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 1,200kN의 추력을 내는 신형 1단 로켓엔진을 이미 만들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 신형 로켓엔진 4개를 한 다발로 묶은 부착식 보조엔진(strap-on booster)을 만들면, 4,800kN의 추력을 낼 수 있다. 4,800kN의 추력을 내는 부착식 보조엔진을 1단 로켓으로 사용하면 추력총량이 6,000KN에 이르는 3단형 운반로켓을 발사할 수 있는 것이다. 
러시아나 중국도 정지통신위성을 쏘아올리기 위해 운반로켓 1단에 4개의 로켓엔진을 한 다발로 묶은 부착식 보조엔진을 장착하였다. <사진 11> 세계적 수준의 로켓제작기술을 가진 조선이 그런 부착식 보조엔진을 만드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즈음 조선의 언론매체들이 반복적으로 보도하는 것처럼, 오는 10월 10일 조선로동당 창건 70주년을 “정치적 열의와 로력적 성과로 맞이하자”는 전투적 구호를 들고 노력하는 조선에서는 비약과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우주개발분야도 예외로 될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조선의 우주개발사업이야말로 당창건 70주년을 맞이하여 자기의 국력을 세상에 과시할 중대사이므로, 조선국가우주개발국 소속 과학자, 기술자들은 정지통신위성을 쏘아올릴 추력 6,000kN급 신형 운반로켓을 만들기 위한 투쟁에서 “불타는 애국심과 창조적 열정을 남김없이 발휘”해왔던 것이다.

 

▲ <사진 12> 이 사진은 2011년 11월 17일 우주비행을 마치고 중국의 내몽골자치주에 착륙한 중국의 유인우주선 선저우-8호를 촬영한 것이다. 중국의 우주선은 공처럼 생겼다. 조선의 과학자, 기술자들은 자기들이 처음 보는 첨단설비라도 그 모습이 촬영된 사진 한 장만 보여주면 자기 식으로 만들어낸다고 하는데, 이 사진에 나온 공처럼 생긴 우주선을 만들려는 것일까?     © 자주시보

 

 

4. 우주환경시험기지 건설하고 우주선 만든다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은 2015년 5월 8일에 발표한 대변인 담화에서 “우리에게는 나라의 과학기술과 경제발전, 국가방위에 필수적인 각종 실용위성을 계속 쏘아올리는 것을 예견한 종합적인 국가우주개발계획이 있다”고 밝혔다. <조선신보> 2012년 12월 12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의 국가우주개발계획은 2012년에 시작되어 2016년에 끝나는 우주개발 5개년 계획인데, 고성능 지구관측위성과 정지통신위성을 쏘아올리는 우주개발사업이 그 계획에 들어있다.


2014년 12월 10일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이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진행한 우주과학기술토론회에서 우주개발 5개년 계획의 또 다른 측면을 볼 수 있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그 토론회는 “인공지구위성과 운반로케트의 제작 및 발사기술을 비롯한 우주과학기술과 관련한 기초리론, 응용부문의 론문발표와 학술교류를 통하여 나라의 우주과학기술을 빠른 기간에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목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눈길을 끄는 것은, ‘우주비행체의 체계공학적 설계방법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이 그 토론회에서 발표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점이다. 논문제목만 보고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이제껏 인공지구위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오던 조선의 우주과학자들이 우주비행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주비행체란 우주선을 뜻하는 말이다. 조선의 우주과학자들이 연구토론회에서 우주비행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은, 우주선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가 조선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진 12> 


김정은 제1위원장이 새로 건설된 위성관제종합지휘소를 현지지도하면서 제시한 몇 가지 과업들 가운데는 우주환경시험기지를 건설하는 과업도 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우주와 꼭 같은 환경 속에서 위성시험을 할 수 있는 우주환경시험기지를 건설해주”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우주환경시험기지라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인데, 우주와 똑같은 환경 속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하는 특수시설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 <사진 13> 이 사진은 러시아 우주인들이 우주와 똑같은 환경에서 적응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제작된 원통형 특수시설 KS-5411을 촬영한 것이다. 우주정거장에 체류한 러시아 우주인들이 이 특수시설에서 적응훈련을 하였다. 이번에 김정은 제1위원장이 건설과업으로 제시한 우주환경시험기지는 그런 특수시설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은 우주개발 1차 5개년 계획을 완수한 뒤에 우주선을 쏘아올릴 준비에 착수할 것이다. 비약적인 발전이 아닐 수 없다.     © 자주시보

 

그런데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이 만드는 지구관측위성이나 정지통신위성은 우주와 똑같은 환경에서 시험할 필요가 없다. 우주와 똑같은 환경의 특수시설에서는 우주선을 시험한다. <사진 13>에서 보는 것처럼, 러시아 우주인들은 우주환경과 똑같이 제작된 특수시설에 들어가 적응훈련을 받았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김정은 제1위원장이 이번에 우주환경시험기지를 건설할 과업을 제시한 것은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이 위성만이 아니라 우주선도 만들 것이라는 점을 예고해주는 것이다.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이 정지통신위성을 쏘아올림으로써 우주개발 1차 5개년 계획을 완수한 뒤에는 우주선을 개발하는 우주개발 2차 5개년 계획을 추진할 것으로 예견된다. 


미국, 러시아, 중국 같은 우주개발선진국들의 경험을 보면, 정지통신위성을 쏘아올린 다음에 우주선을 쏘아올리는 발전경로를 밟아왔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중국은 1990년 7월 16일에 정지통신위성을 실은 창정-2E를 처음으로 쏘아올렸고, 1995년 12월 28일에 그 운반로켓을 마지막으로 쏘아올렸는데,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99년 11월 19일 중국에서 처음으로 만든 우주선을 쏘아올렸다. 중국의 첫 무인우주선 선저우(神舟)-1호는 지구궤도를 14바퀴 회전한 뒤 21시간 11분 만에 내몽골자치주에 착륙하였다. 


인류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Yuri Gagarin)을 태우고 1961년 4월 12일에 저지구궤도에 진입한 소련의 유인우주선 보스또크(Vostok)-1호의 1단 로켓으로 사용된 부착식 보조엔진의 추력은 3,8884kN이었고, 그 운반로켓의 추력총량은 4,850.5kN이었다. 그런데 위에서 논한 것처럼,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은 4,800kN의 추력을 내는 부착식 보조엔진을 1단 로켓으로 사용하여 추력총량이 6,000KN에 이르는 강력한 운반로켓을 새로 만들었으니, 우주선을 실을 운반로켓은 이미 해결된 것이고, 우주선 제작기술만 개발하면 되는 것이다.


2015년 4월 17일 조선우주공간기술위원회 박경수 부위원장은 러시아 통신사 <이따르-따스>와 진행한 회견에서 “평화적인 우주개발사업에서 앞서가는 러시아가 이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성과를 거두기를 바라며, 올해 조로친선의 해를 계기로 우주연구분야에서 조선과 로씨야 간의 협력이 시작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가 바라는 대로 조선과 러시아가 우주과학기술분야에서 서로 협력하면, 조선은 자기의 첫 우주선을 개발하는 일정을 더 앞당길 수 있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새로 건설된 위성관제종합지휘소를 현지지도하면서 “평화적인 우주개발은 우리 당과 인민이 선택한 길, 선군조선의 합법적인 권리”라고 지적하였고, “민족의 존엄과 자존심을 걸고 진행하는 중대사인 우주개발분야에서도 최첨단을 돌파하려는 것은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이고 의지”이므로 “주체조선의 위성은 앞으로도 당중앙이 결심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련이어 우주를 향하여 날아오를 것”이라고 말하였다. 우주정복을 향한 김정은 제1위원장의 확고한 결심과 강렬한 의지를 따르는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의 최첨단돌파전에 의해 ‘천하제일강국’ 건설을 향한 조선의 우주개발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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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청룡부대의 작전, 한국에선 왜 파묻혔나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5/05/12 09:51
  • 수정일
    2015/05/12 09:5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김당의 톺아보기] 베트남 종전 40주년 르포 ②가해와 피해의 기억은 만날 수 없는가

15.05.12 08:29l최종 업데이트 15.05.12 08:29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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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리 중대에 배속된 군사진사 로널드 해벌(Ronald Haeberle)이 자신의 개인 사진기로 찍은 학살사진. 1969년 11월 12일 프리랜서 기자 시모어 허시(Seymore Hersh)의 미라이 학살 특종보도를 계기로 그해 11월 20일 클리블랜드에서 발행되는 <플레인 딜러>라는 일간지에 처음 게재되고 <라이프(Life)>지에 실려 '더러운 전쟁'이라는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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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종전 40주년에 맞춰 취재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베트남전 관련 자료와 책자를 읽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참전군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펴낸 공식문헌과 통계, 그리고 한국군이 수행한 민사심리전에 관한 학위논문, 최근까지 <한겨레>에 연재된 '박태균의 베트남전쟁'(1~34회) 등이다.

참전군인들의 무용담으로만 전해온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처음 공론의 장으로 나온 것은 1999년부터다. 당시 호찌민대 역사학과(석사과정) 학생이자 <한겨레21> 통신원이었던 구수정씨가 처음 발굴해 전했다. <한겨레21> 고경태 기자는 구수정 박사의 과거사 발굴작업을 이어받아, 1968년 2월 12일 베트남의 한적한 농촌마을 퐁니·퐁넛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을 복원해 최근 책(<1968년 2월 12일>)으로 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기사는 한국 사회에 공명과 파란을 일으켰다.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베트남전 사죄운동과 평화박물관건립 추진의 계기가 되었다. 반작용도 컸다. 보도에 격분한 고엽제 피해자 단체 회원들은 <한겨레> 사옥에 난입했다. 최근 베트남전 종전 40주년을 맞이해 피해자들이 처음 한국을 방문했지만, 참전 단체 회원들의 항의시위로, 1968년 2월 12일 그날처럼 신변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풀리지 않는 의문, 왜 평행선일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생겼다. 그날의 아비규환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와 우연히 학살장면을 목격한 제3자(미군 병사)가 카메라에 담은 '현장감식' 사진, 그리고 주월 미군사령부와 주월 한국군사령부를 오간 공식서한 등은 하나같이 한국군의 '피 묻은 손'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베트남전 참전 단체와 군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민간인 학살 문제 제기 이후 나온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의 민사심리전을 다룬 논문에서도 양민 학살 사건은 '미제'로 남겨져 있다.

"한국군의 경우에도 미군 등 다른 연합국 군대에 비해 효율적인 대민작전을 전개했다고 하나, 일부 부대의 무리한 무력 위주 작전으로 일부 지역에서 대민 피해를 유발하게 됨으로써, 국지적인 부작용을 낳게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양민학살' 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최용호,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의 작전 및 민사심리전 수행방법과 결과>, 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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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찌민 시내의 전쟁증적기념관 앞에 선 구수정 박사(왼쪽)와 박물관 관계자. 구수정 박사는 유학생 시절인 1999년 참전군인들의 무용담으로만 전해온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실을 처음 발굴해 공론의 장으로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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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이렇게 평행선을 달리는 것일까? 베트남 호찌민시에 있는 전쟁증적(證積)박물관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박물관 2층은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사용한 각종 살상무기와 고엽제 피해, 그리고 밀라이 양민 학살 등을 주제로 한 '전쟁범죄관'이다. 베트남전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미군과 한국군뿐만 아니라 남베트남군과 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 사이에서도 발생했다. 세 가지 범주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의 공통점은 베트남전의 분수령이 된 1968년 1월 30일의 '뗏(Tet, 구정) 공세' 뒤에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베트남인들은 최대의 명절인 음력설(뗏)을 전후해 1주일 이상 휴가를 갖고 각종 민속놀이를 즐긴다. 베트남 전쟁 때도 뗏 명절에는 1주일 정도 휴전하고 명절을 즐겼다. 그런데 68년 뗏에는 NLF와 북베트남군이 구두 휴전 약속을 깨고 100곳이 넘는 남베트남 도시에서 동시다발로 기습공격을 펼쳤다. 사이공 시내의 주월 미군사령부와 미국대사관마저 기습공격을 당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은 베트남전의 승리를 낙관했다. 1965년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웨스트모어랜드 주월미군사령관은 1967년 11월 미국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베트남전쟁의 '끝이 보이는 단계'에 와 있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사이공 시내까지 들이닥친 뗏 공세로 웨스트모어랜드의 공언이 허풍일 수 있다는 의심이 들자, 미국 언론들은 막대한 병력과 무기를 쏟아부은 존슨 정부의 베트남 정책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구정 대공세로 응우웬 왕조 시절의 수도였던 후에(Hue)까지 빼앗겼다. 이후 막강한 화력으로 도시의 80%가 폐허로 변할 만큼 포격을 퍼부어 후에를 탈환했다. 이 과정에서 NLF와 북베트남군은 후에에 살고 있던 민간인 수천 명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전후 북베트남은 NLF에 의한 후에에서의 비전투원 살해를 인정했다. 관련 기록은 전쟁증적박물관에 전시돼 있지 않다.

반전 여론 확산시킨 미국 언론의 베트남전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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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년 뗏(구정) 공세 당시 사이공 경찰국장 응웬 녹 로안이 베트콩 장교를 노상에서 권총으로 사살하는 장면은 전세계의 반전 여론에 즉각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68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이 사진은 베트남전에서 노획한 총기들과 함께 전시돼 있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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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당시 뗏 공세에 밀린 남베트남군과 미군의 반격작전에서 벌어진 참상은 여과없이 전 세계에 전파되어 미국과 유럽에서 반전 여론을 불러일으키는데 기여했다. 전쟁은 비정하지만 언론에게 특종의 보고(寶庫)이다. 남베트남 경찰국장의 베트콩 즉결처분 장면과 미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울부짖는 소녀 사진, 미군의 미라이(Mỹ Lai) 학살 보도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뗏 공세 당시 사이공 경찰국장 응웬 녹 로안이 베트콩 장교를 노상에서 권총으로 사살하는 장면은 전 세계의 반전 여론에 즉각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나중에 베트콩 장교는 남베트남 장교와 부인 등을 살해하다가 붙잡혀 즉결 처분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에디 아담스가 찍은 이 사진은 AP 통신을 통해 전 세계 신문에 실림으로써 베트남전 반전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1968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이 사진은 베트남전에서 노획한 총기들과 함께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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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년 6월 미군의 네이팜탄 폭격을 받고 옷에 불이 붙어 벌거벗은 채 도망쳐 나오는 장면을 찍은 이 사진은 전 세계에 반전과 종전을 이끌어내는 여론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AP 통신의 사진기자 닉 우트가 찍은 이 1973년 퓰리처상 수상작은 지뢰와 부비트랩 등 각종 살상무기와 함께 전시돼 있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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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베트남전에서 나프타를 주원료로 한 소이탄인 네이팜탄을 사용했다. 72년 6월 사이공 인근의 한 마을의 절에 있던 소녀는 네이팜탄 폭격을 받고 옷에 불이 붙어 벌거벗은 채 도망쳐 나와야 했다. AP 통신의 사진기자 닉 우트가 찍은 벌거벗은 소녀의 사진은 전 세계에 반전과 종전을 이끌어내는 여론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 1973년 퓰리처상 수상작은 지뢰와 부비트랩 등 각종 살상무기와 함께 전시돼 있다.

1968년 3월 16일 남베트남 손미마을(미라이)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은 베트콩의 뗏 공세에 대한 미군의 보복작전이 그 동기였다. 미 육군 찰리 중대는 이날 공격헬기를 타고 미라이에 진입했으나 적군을 찾을 수 없자 가옥을 수색해 사람들을 마을 한가운데로 몰아세우고 자동화기로 학살했다. 최대 504명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는 모두 비무장 민간인이었으며 상당수는 여성과 아동이었다. 몇몇 희생자는 성폭력과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시신 중 일부는 훼손된 채 발견되었다. 

베트남에 가본 적도 없는 프리랜서 기자 시모어 허시(Seymore Hersh)는 AP 기자로 2년 반 동안 국방부를 출입했던 시절에 알았던 취재원으로부터 미라이 학살 사건을 듣고 두 달 동안 파헤쳐 1969년 11월 12일 처음 폭로했다. 그러자 찰리 중대에 배속된 군사진사 로널드 해벌(Ronald Haeberle)은 자신의 개인 사진기로 찍은 학살사진을 11월 20일 클리블랜드에서 발행되는 <플레인 딜러>라는 일간지에 처음 게재하고 <라이프(Life)>지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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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증적기념관의 미라이 학살 관련 증거자료. 미 보병사단의 찰리중대는 공격 헬기를 타고 남베트남의 한적한 농촌마을인 손미(미라이)에서 최대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아래 사진은 학살 현장을 지휘한 윌리엄 캘리 중위와 어니스트 메디나 대위. 그 아래 희생자 명단이 적혀 있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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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버틸 수 없었던 미군은 진상조사에 착수해 장교 14명을 체포했다. 하지만 군사재판에서 형사처벌을 받은 건 현장지휘관이었던 윌리엄 켈리 중위뿐이었다. 그럼에도 미국 언론은 미라이 사건 보도로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 명분을 잃게 만들었고, '더러운 전쟁'이라는 여론 확산을 통해 국가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결과적으로 전쟁을 단축시키고 더 이상의 인명 피해를 막는 데 기여했다. 박물관에는 당시의 학살 현장 사진은 물론, 가해자의 사진과 피해자의 이름이 함께 전시돼 있다. 

68년 뗏 공세는 베트남전의 전설적인 지휘관 보 응웬 지압이 지휘하지 않은 유일한 전투였다. NLF와 북베트남군은 사이공에서 5개 루트로 공세를 펼쳤는데, 대통령궁을 목표로 한 공격조는 절반이 죽었고, 미 대사관 공격조는 전원이 사망했다. 또한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대대적 반격으로 민간인 학살을 포함한 더 많은 피해가 초래되었다. 구수정 박사에 따르면, 이 때문에 뗏 공세는 미국과 세계의 여론을 움직여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40여 년만에 비판적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청룡부대의 뗏 공세 반격작전과 민간인 학살 사건

68년 뗏 공세는 그때까지의 게릴라전과는 양상이 다른, 미군을 겨냥한 정규전이었다. 뗏 공세는 한국군, 특히 '해병대는 후퇴가 없다'는 신념을 가진 청룡부대에도 충격이었다. 공교롭게도 청룡부대는 미군을 겨냥한 뗏 공세 직전에 주둔지를 추라이에서 미 제5해병연대 관할이었던 호이안 지역으로 옮기고 이틀 뒤에 공격을 당했다. 전열을 채 다듬기도 전에 기습을 당한 청룡부대는 '해병대 사전'에 없는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격에 나선 청룡부대는 괴룡작전(68. 1. 30~3. 13)을 전개해 실지를 사흘만에 수복했다.

구수정 박사가 2000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은 80여 건으로 9000여 명이 학살된 것으로 집계되었다. 고경태 기자가 같은 해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발굴한 문서를 보도한 바에 따르면, 당시 미군은 한국군 민간인 학살과 관련, 꽝남성의 퐁니·퐁넛(68. 2. 12)과 호앙쩌우(68. 10. 22) 그리고 푹미(69. 4. 15) 등 세 가지 사건에 대해 진상조사를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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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증적박물관에 전시된 베트남전(1962~1973년) 당시 남베트남의 미국 '위성국가' 군대의 주둔지역 지도. 오른쪽 상단이 청룡부대를 포함한 한국군 주둔지역으로 한국군은 가장 먼저 참전해 가장 늦게까지 남았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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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건 모두 청룡부대 작전지역에서 발생했다. 특히 뗏 공세에 대한 반격으로 전개된 괴룡작전에서 발생한 퐁니·퐁넛 사건은 미라이 사건보다 한 달 앞서 발생했다. 우연히 현장을 목격한 미 해병 제3상륙전부대 본(Vaughn) 상병이 카메라에 담은 이 사건에 대해 미군은 이렇게 기록했다.

"한국 해병2여단 1대대 1중대가 마을 주변을 일렬종대로 지나던 중 저격을 받자 마을을 공격. 앞 소대에서 민간인들을 후송시켰으나 뒤에서 대부분 사살됨. 79명(또는 69명)의 베트남 여성과 어린이들이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죽음. 한국 해병 1명 부상."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베트콩 나타나면 마을을 몰살시켰어요", 한겨레, 2015. 1. 17)

목격자와 피해자 그리고 현장감식 사진이 움직일 수 없는 물증으로 남아있는 민간인 학살의 대표적 사례인 미라이 사건과 퐁니·퐁넛 사건의 공통점은 뗏 공세에 대한 반격, 즉 보복작전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미국 언론은 사실을 보도한 반면에, 한국 언론은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국 언론은 파병 당시는 물론, 그 이후로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와 관련된 어떤 사진도, 스트레이트 기사도, 탐사보도도 하지 않았다. 미라이 학살 보도 이후, 미국 언론은 동맹군의 민간인 학살로 보도 영역을 넓혔다. 1970년 1월10일 <뉴욕 타임스>는 '한국군이 수백 명의 베트남 민간인을 살해했고, 주월미군사령부의 고위 장성이 한국군에 대한 조사를 중단시켰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한국 언론은 외신을 인용한 보도조차 안 했다. 박정희 정권의 철저한 보도통제 때문이었다.

'고통과 기억의 연대' 외면하는 국가 지도자의 언론의 책임

하나의 전쟁이 미국에서는 '더러운 전쟁'으로 기억되고 소비되는 반면에, 한국에서는 아직도 '정의의 전쟁'이나 '불행한 전쟁'으로 기억되는 1차적 배경은 양국 정부의 어정쩡한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 정부는 베트남전에서의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해 어정쩡한 사과를 한 이후 입을 닫고 있다. 해외자본 투자유치를 통해 경제발전을 꾀하고 있는 베트남 정부 또한 '미래를 위해 과거는 덮어두자'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한국은 2014년말 현재 베트남의 최대 투자국이다.

한국 정부가 민간인 학살에 대해 사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1년 8월 방한한 쩐 득 르엉 베트남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사과했다. '민간인 학살'이란 표현을 쓰진 않았지만, 이 문제가 처음 공론화된 시점이어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사과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노무현 대통령도 2004년 베트남 방문시 "마음의 빚이 있다"는 말로 에둘러 유감의 뜻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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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을 국빈 방문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9일 오전(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에 위치한 호찌민 전 국가주석의 묘소를 방문, 헌화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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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베트남 방문시 호찌민 묘소에 헌화했다. 2001년 김대중이 사과했을 때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손상시킨 것"이라고 발끈했던 박근혜도 2013년 9월 대통령으로서 호찌민 묘소에 헌화하고 참배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사과는커녕 유감 표시도 없었다. 

진정한 사과는 피해자가 수용할 때까지 하는 것이다. 독일 메르켈 총리는 "나치 과오에 대한 책임에는 마침표가 없다"고 했다. 국가 지도자의 반복된 사과는 국민들에게 '고통과 기억의 연대'로 계승된다. 그런데 이명박-박근혜는 국가의 책무를 계승하지 않고 있다. 베트남전 학살 피해자들이 살아있는데도 가해자들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1차적 배경이다. 

2차적 배경은 권력을 감시하는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언론 환경과 도미노 이론이 국제질서를 지배하던 냉전시대 환경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미국 언론과 비교해 한국 언론은 사실 보도 그 자체에서도 무기력하거나 게을렀다. 역사적 문헌자료와 전쟁증적기념관에서 확인한 것은 베트남전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과 관련, 미국 언론은 사실을 보도했지만, 한국 언론은 사실을 외면했다는 점이다.
 
 

○ 편집ㅣ손병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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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년, 이렇게 웃어본 날은 처음이다"

 
[현장] '고잔동 하늘땅별 텃밭' 만들던 날
이명선 기자2015.05.12 07:20:13

 

"매번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분노했는데, 오늘 같은 날은 참 좋다. 마음껏 웃으니 정말 좋다." 

단원고 2학년 10반 고(故) 이경주 양의 엄마 유병화 씨는 딸의 이름을 딴 강아지 '쭈쭈'를 품에 앉은 채 환하게 웃었다. 같은 반 고(故) 이은별 양의 이모도 "지난해 4월 16일 이후, 오늘처럼 웃고 농담하는 건 처음"이라며 "진짜 좋다. 진짜 좋아!"를 반복했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에 모처럼 웃음꽃이 폈다. 흙을 나르고 모종을 심는 사이 웃음이 민들레 홀씨를 타고 번졌다. 노인정으로 마실 온 할머니들, 나들이 차 집을 나온 가족들,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아이들까지 텃밭 주변에 모였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과 지역 주민 50여 명은 지난 10일 416기억저장소 인근에 '고잔동 하늘땅별 텃밭'을 만들었다. 텃밭 만들기는 세월호 참사의 중심 지역인 고잔동 주민들과 4.16정신을 잇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하늘땅별 마을공동체 준비팀'(가칭)이 기획한 첫 행사다.  

텃밭은 오혜란 마을공동체 준비팀 팀장이 안산 농업기술센터 텃밭 사업 공모에 참여해 자금을 마련한 뒤, 고잔동 현대빌라 주민들의 협조로 과거 놀이터였던 공터를 제공받았다. 마이금 도시농업연대 대표는 이날 흙과 모종 준비를 도왔으며, 마을공동체 '반월사랑'은 닭볶음탕과 김치전 등 음식으로 연대했다. 
 

 

▲ 10일 '고잔동 하늘땅별 텃밭' 만들기에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건우네·경주네·다혜네·동혁이네·범수네·수빈이네·은별이네, 제훈이네, 준우네, 주현이네 등)과 4.16기억저장소, 안산 시민단체, 그리고 지역 주민들이 함께했다. ⓒ기억저장소(권용찬)

 


'벚꽃이 피는 것도 싫다'던 세월호 가족, 새 생명을 키우다 

2시간여 만에 별 모양 텃밭이 만들어졌다. 상추와 고추를 심던 유 씨의 손이 흙 범벅이 됐다. 쭈쭈의 발에도 덩달아 흙이 묻었다. 유 씨는 먹을거리지만, 새 생명을 심었다는데 고무되어 있었다. 

"나라에서는 (세월호 참사에 대해) 제대로 된 책임조차 지지 않으려 한다. 절망감이 크다. 그럼에도 세월호 가족들 마음이 얼마나 수수한지…. 새 생명을 키우겠다고 텃밭을 만들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인데, 나라에서는 우리를 자꾸 밟으려고만 한다. 1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유 씨는 경주의 유품을 딸 생일 즈음이던 지난해 9월 택배로 받았다. 수학여행을 떠난 지 150일 만에 돌아온 아이의 가방과 교복에는 참사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렇게 1년. 박근혜 정부는 반쪽짜리 세월호 특별법 시행을 강행했으며, 세월호 가족들은 독립적인 진상규명 활동을 시작하겠다고 선포했다. 

세월호 가족과 공동으로 텃밭을 소유하게 된 현대빌라 거주민 김미경 씨는 "'벚꽃이 피는 것도 싫다'는 한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다"며 "가족들에게 이런 공동체 활동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면서 "텃밭 만들기 같은 마을공동체 활동은 세월호 참사 여부와 관계없이 이뤄질 수 있는 일"이라며 "다른 주민들도 '세월호'라는 선입견이 아닌, 우리 마을의 일이라는 생각으로 공동체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매주 화요일 공동체 준비팀 이야기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는 이미숙 씨(안산시 부곡동 거주)는 "세월호 가족들이 '안 되는 건가? 너무 거대하다'라는 좌절감에 빠져있다"며 세월호 참사가 제2, 제3으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했다. 이 씨는 "텃밭을 매개로 세월호 가족들과 주민들이 이웃으로 만났듯 일단 만나야 정치적·사회적 오해도 풀린다"며 "공동체 의식을 가진 크고 작은 모임이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 단원고 2학년 10반 故 이경주 양의 엄마 유병화 씨와 강아지 쭈쭈. ⓒ기억저장소(권용찬)

 

▲ 단원고 2학년 9반 박예지 양 엄마 엄지영 씨(왼쪽)와 경주 엄마 유병화 씨(가운데), 그리고 416기억저장소 신서영 총무팀장(오른쪽). ⓒ기억저장소(권용찬)


"분노의 표정, 나눔의 표정이 되다" 

현재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에는 416기억저장소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준비 모임이 한창이다. 하지만 416기억저장소를 이끌고 있는 김익한 명지대학교 교수는 지난달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기억저장소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을 돕는 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며 공동체 모임은 "유가족과 시민이 모여 스스로 실천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김 교수는 텃밭 만들기에 애쓴 이들에게 막걸리 한 잔을 건네는 것에 만족했다.   

김종천 416기억저장소 사무국장은 "고잔동 주민 입장에서도 서울 광화문에 가지 않더라도 함께할 수 있는 장(텃밭)이 생겼다"며 "텃밭은 '모두들 안산으로 와라. 세월호 가족이 밥 한끼 대접하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오늘 세월호 가족들 얼굴이 분노의 표정에서 나눔의 표정이 됐다"며 흐뭇해했다. 

이천환 마을공동체 준비팀 준비위원(한사랑병원 병원장)은 "세월호 가족 한두 명만이라도 오늘 하루 웃고 즐기는 감정을 느꼈다면 큰 성과다. 공동체 활동을 위한 최소한의 출발점, 작은 첫 삽을 펐다"며 겸손해했다. 특히 새싹이 열매를 맺기까지의 과정을 보며 '무엇을 키우고 만들어 나가야겠다'는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 삶에 대한 욕구를 회복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텃밭"이라고 강조했다.  

"텃밭 만들기에 함께한 이들 모두 강아지가 뛰노는 모습을 보고 좋아했다. 한 생명이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을 보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렇게 지켜본 '내 새끼'가 한날한시에 사고를 당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수백 명의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고 해결해 나가는 과정은 다르다. 요즘 '사람마다 제각각인 마음을 어떻게 모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이해관계가 다르더라도 서로의 마음에 와 닿을 수 있는 시점 또는 계기가 있지 않을까? 바로 그때 진정한 공동체가 시작될 것이다."


▲ 안산시 인근 주민이 두 아이와 함께 '고잔동 하늘땅별 텃밭' 만들기에 참여했다. ⓒ기억저장소(권용찬)

 

▲ 단원고 2학년 7반 故 이수빈 양의 엄마 박순미 씨(왼쪽)와 김익한 명지대 교수(오른쪽). ⓒ기억저장소(권용찬)

 

▲ 단원고 2학년 4반 故 최성호 군의 엄마 엄소영(왼쪽)와 2학년 5반 故 김건우 군의 엄마 노선자 씨(오른쪽). ⓒ기억저장소(권용찬)

 

▲ 단원고 2학년 4반 故 김동혁 군의 아빠 김영래 씨(오른쪽). ⓒ기억저장소(권용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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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새 둥지를 틀었다면, 딱 3주만 모른척 하면 돼

집에 새 둥지를 틀었다면, 딱 3주만 모른척 하면 돼

김봉균 2015. 05. 11
조회수 1639 추천수 0
 

길어야 3~4주만 기다리면 되는데, 아쉬운 생명 경시

황조롱이, 딱새도 둥지 틀어, 불편 참으면 잊지못할 경험

 

1.jpg» 황조롱이가 아파트 베란다에 놓인 화분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우리 집에 새가 둥지를 틀고 새끼를 기르고 있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군가 이렇게 물어온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만약 둥지가 굉장히 아슬아슬한 위치에 있어 바로 어떠한 조처를 하지 않으면 자칫 둥지 안의 새끼가 다칠 수 있는 상황이거나, 둥지를 당장에 치우지 않으면 생활하는데 아주 많이 불편한 상황이 아니라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2주, 아무리 길어도 딱 3주만 그냥 가만히 두고 기다려주세요.”
 
사람이 살아가는 집에 새가 둥지를 튼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닙니다. 물론 제비와 같이 천적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소 덜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의 곁에 둥지를 트는 습성이 있는 종을 제외한다면 말이죠. 
 
제비가 아닌 다른 새들도 사람의 집에 둥지를 트는 경우가 종종 목격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도심 속 아파트나 높은 고층건물에도 말이죠.
 
2.jpg» 사람이 있는 곳엔 자신과 새끼를 위협하는 천적의 접근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제비는 사람의 왕래가 잦은 재래시장 처마나 간판 밑에 둥지를 트는 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보통 새들은 종마다 둥지를 트는 곳이 다릅니다.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은 새끼를 안전하게 기를 수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만약 아파트 화단이나 베란다처럼 공간이 안전하고 적합하다고 판단된다면 둥지를 트는 것 역시 충분히 가능합니다.
 
3.jpg» 종종 도심 속 건물이나 아파트에서 새끼를 길러내는 맹금류 황조롱이.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통해 아파트 베란다에 둥지를 튼 새의 이야기를 접하신 적이 있을 겁니다. 보통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천연기념물 323-8호 황조롱이인 경우가 많습니다.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에도 매년 여름 아파트에 둥지를 튼 새를 구조해달라는, 조처를 해달라는 연락을 종종 받았는데 대부분은 황조롱이였습니다.
 
황조롱이는 탁 트인 평원을 마주하고 있는 암벽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길러냅니다. 만약 탁 트인 평원을 마주한 아파트가 있다면 황조롱이에게는 암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꽤 적합한 번식장소가 될 수 있지요.
 
물론 이렇게 도심 속 건물이나 아파트 베란다 등에 둥지를 트는 새가 황조롱이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장 흔히 목격되는 황조롱이는 3월 말에서 4월 말 사이에 산란을 합니다. 알은 5월 중에 부화를 하게 되고 약 3주, 아무리 길어봐야 한 달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이 지나면 모두 둥지를 떠나갑니다.
 
4.jpg» 베란다에 위치한 에어컨 실외기 위에 자리 잡은 황조롱이 가족. 
 
장소와 환경 자체는 이들에게 꽤 적합했겠습니다만, 이들은 미처 사람까지 고려하지 못했었나 봅니다. 보통 새끼를 길러내는 새들을 목격하게 되면 반응이 여러 가지로 나뉩니다.
 
자신의 집에 새가 둥지를 튼 사실을 신기해하고 기뻐하며, 될 수 있는 한 도움을 주려고까지 노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무섭다, 더럽다, 시끄럽다 등의 이유로 못마땅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야생동물구조센터에 전화를 걸어 자기 집 베란다에서 새가 새끼를 기르고 있는데 더럽고 시끄러우니 당장 베란다에서 끄집어내라며 난리를 치던 이도 있었습니다.
 
육추 중인 새끼 새의 위치를 함부로 옮기는 것은 새끼 새들의 생존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굉장히 위험하기 때문에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길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집주인을 완고하게 거절을 하였고, 어쩔 수 없이 임시로 인공 둥지를 만들어 아파트 옥상에 설치한 뒤 새끼를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5.jpg» 길어봐야 3주면 떠날 친구들인데, 결국 베란다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걱정되는 마음에 지켜보았더니 다행히도 어미가 포기하지 않고 새끼를 돌보러 나타났습니다. 
 
또 한 번은 어느 학교에서 구조신고를 해 온 적이 있습니다. 교실 내부에 딱새가 둥지를 틀고 새끼를 기르고 있는데 시끄럽고 더러워서 둥지를 떼어냈으니 데려가 달라는 연락이었습니다. 
 
사실 말이 좋아 구조였지 쫓아낸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미 딱새는 새끼를 도저히 기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고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영어와 수학도 중요하지만 자연과 생명의 소중함을 경시하는 학교에서 과연 우리 아이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6.jpg» 학교 교실에 둥지를 틀었다는 이유로 쫓겨난 딱새 가족. 이 학교에서는 자연과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쳐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비가 둥지를 많이 트는 재래시장을 둘러보면 너무나 쉽게 안타까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둥지를 떼어낸 흔적, 지어진 둥지를 사용할 수 없게끔 둥지 내부에 이물을 넣어놓은 모습 등을 말이죠.
 
보통 제비의 배설물이 떨어져 바닥을 더럽힌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둥지를 없애거나 둥지 내부에 이물을 넣어놓은 모습을 보노라면 조금의 불쾌함과 불편 때문에 찾아온 새의 번식 자체까지 꼭 막아야 했는지 속이 상합니다. 
 
배설물로 인한 오염이 문제라면 둥지 아래에 임시로 배변이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배변판 하나만 달아놓아도 해결될 일인데 말이죠.
 
제비는 진흙과 지푸라기 등을 수백, 수천 번 물어 날라야 겨우 집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품어내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 정녕 우리에겐 불편함, 번거로움, 더러움인가요?
 
7.jpg» 제비의 배설물이 바닥으로 떨어져 더럽혀진다는 이유로 제비의 번식을 방해하기 위해 둥지 안에 이물을 넣어 놓은 모습. 
  
8.jpg» 진흙과 지푸라기 등으로 둥지를 짓고 있는 제비. 수백, 수천 번 물어 날라야 겨우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신의 집에 새가 둥지를 튼 사실을 신기해하고 기뻐하며, 될 수 있는 한 도움을 주려고까지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선박에 둥지를 튼 제비를 위해 새끼가 다 자라 떠날 때까지 한 달간 경제적 손실을 무릅쓰고 어업을 하지 않았던 어민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에게 생명존중의 귀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9.jpg» 공사 중인 아파트 베란다에서 발견된 수리부엉이 새끼의 모습. 아파트 관계자들은 감사하게도 수리부엉이가 무사히 둥지를 떠날 때까지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10.jpg» 자신의 아파트 실외기 위에 둥지를 튼 황조롱이가 행여 뙤약볕에 더워하지는 않을까 우산으로 그늘을 만들어주고, 사냥에 실패하는 날이 계속되자 먹이까지 챙겨주시는 집주인. 
 
자, 그렇다면 우리 집에 새가 둥지를 틀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가장 좋은 방법은 새끼가 모두 이소할 때까지 자극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동시에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딱 2~3주 정도만 불편함을 감수하고 모른 척 해주시면 된다는 이야기죠.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둥지의 위치가 계속해서 자극을 줄 수밖에 없는 곳에 있다거나, 새 생명의 탄생 과정을 관찰하고자 싶으실 때가 그런 경우입니다. 그런 때에는 몇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1. 과하지 않은, 주기적인 관찰이 필요
새끼가 높은 곳에 위치한 둥지에서 떨어지는 등의 사고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정상적인 육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선택한 둥지 장소가 너무 비좁거나 조금은 부적합한 환경으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주기적으로 관찰을 한다면 이런 문제를 미리 방지할 수 있고, 사고가 났더라도 빠른 대처가 가능해집니다. 하지만 역시 너무 자주, 가까이서 관찰을 하게 되면 악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2. 아직 알을 품고 있고 있는 상황이라면 불필요한 자극은 최소화
어미는 알을 품고 있는 포란 시기에 굉장히 예민해집니다. 사람의 과도한 자극이나 접근으로 인해 둥지와 알을 포기하고 떠나기도 합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선 불필요한 자극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일단 알에서 새끼가 부화한다면 새끼를 지켜내려는 모성애가 더 강해지기 때문에 포기할 확률이 낮아지므로 꼭 관찰하고 싶다면 되도록 포란이 끝난 후부터 진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3. 새끼 기르는 과정에 과도한 관여는 금물 
어떤 이는 우리 집 베란다에 황조롱이가 둥지를 틀었다며 기쁜 마음에 돼지고기며, 소고기며 이것저것 준비해서 제 자식 돌보는 마음으로 먹여주기도 합니다. 야생동물을 위하는 그 마음은 참으로 감사하지만 이 역시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먹이를 주는 과정에서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고 이는 나중에 자연에서 살아갈 때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어미 중 한 마리가 돌아오지 않는다든가, 궂은 날씨가 계속되어 먹이사냥을 못한다면 부분적으로 먹이주기에 관여해 도움을 줄 수는 있겠습니다. 황조롱이와 같은 맹금류의 먹이로는 영양분과 확보의 용이성 측면에서 닭 날개를 으깬 뒤 적당한 크기로 잘라 주는 게 가장 좋습니다.


새가 둥지를 짓고 알을 낳아 부화시킨 후 새끼를 길러내기까지 약 2달 정도가 소요됩니다. 그 중 둥지를 짓고 알을 낳아 품는 한 달은 사실 불편할 것도 없습니다. 아주 조용하고 흔적도 많이 남기지 않기 때문이죠.
 
문제는 새끼가 부화하고 나서입니다. 먹이를 한번이라도 더 받아먹기 위해 소리 내 울고, 성장을 위해 종일 먹이를 먹기 때문에 배변활동도 많이, 자주 합니다. 때문에 새끼가 태어나 둥지를 떠날 때까지 약 한 달은 꽤 불편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러나 시끄럽고 내 집의 일부가 더러워진다 하더라도 새 생명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불편함을 감내할 용의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불편한 한 달은 야생동물에겐 평생에서 가장 중요한 한 달입니다.
 
11.jpg» 시끄럽고 내 집의 일부가 더러워진다 하더라도 새 생명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불편함을 참아낼 만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글·사진 김봉균/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 재활관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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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예물 목걸이 만들려 돌고래 집단 살육

신부 예물 목걸이 만들려 돌고래 집단 살육

조홍섭 2015. 05. 08
조회수 8481 추천수 0
 

솔로몬제도 전통 돌고래 몰이 사냥, 2013년 한 철에 1700마리 죽여

돌고래 이 값 급등이 사냥 재개 불러…일본, 페루, 페로스제도 등서도 사냥

 

Omnifilm Entertainment Ltd.jpg» 솔로몬 제도에서 카누를 이용한 몰이사냥으로 돌고래를 잡는 모습. 사진=Omnifilm Entertainment Ltd

 
남태평양 서부에 위치한 솔로몬 제도에서는 전통적으로 돌고래를 잡아왔다. 돌고래 떼를 발견하면 카누 20~30척이 U자 모양으로 둘러싼 뒤 여러 개의 얇은 돌을 포개 만든 짝짜기 같은 도구를 물속에 담가 소음을 낸다.
 
‘소리 그물’에 막힌 돌고래 떼가 유일하게 터진 얕은 해안 쪽으로 도망치면 배에서 창으로 찔러 죽인다. 사냥의 주목적은 돌고래의 이를 얻는 것이다.
 
돌고래 이는 전통적인 화폐로 쓰였고 신부에게 줄 지참금, 장식품 등으로 쓰인다. 최근엔 이의 값이 급등하면서 현금을 확보하거나 고기로 팔기 위한 포획도 늘고 있다.

 

m.oremus.jpg» 솔로몬 제도의 몰이 사냥으로 잡은 돌고래에서 채취한 이로 만든 목걸이와 장신구. 사진=Marc Oremus
 
비정부기구와의 합의 아래 한동안 중단된 솔로몬 제도의 돌고래 사냥이 재개되면서 2013년 한 해에만 1700마리 가까운 돌고래가 포획되어 해당 수역 돌고래 집단이 위협에 놓였다는 보고가 나왔다.
 
마크 오레무스 뉴칼레도니아 남태평양고래연구소 컨소시엄 생물학자 등은 2013년 3월 이 섬에서 진행된 돌고래 포획 실태를 조사해 과학저널 <왕립학회 공개과학> 최근호에 논문으로 발표했다.
 
솔로몬 제도 말라이타 섬의 파나레이 마을은 오랜 돌고래 몰이 사냥 전통이 있는 곳이다. 20세기 초에 처음 알려졌지만 훨씬 오랜 기원을 갖는다. 19세기 중반 선교사가 들어오면서 중단됐다가 1948년 다시 시작됐다. 화폐경제의 물결이 밀려든 1960년대에는 이웃 마을들도 돌고래 사냥에 나섰다.
 
비록 전통적인 사냥이지만 사냥 방법이 잔혹하고 동물복지에 문제가 있다고 본 미국의 환경단체 지구 섬 연구소(EII)는 마을 발전을 위한 재정지원을 하는 대신 사냥을 중단하기로 주민들과 합의했다. 그러나 2012년 사냥 중단 협약을 맺지 않은 마을이 사냥을 재개하자 이 약속은 속절없이 깨졌다. 
 
연구자들은 이 값이 치솟은 것을 그 배경으로 들었다. 돌고래 이 하나에 2004년 0.14달러 하던 것이 2013년 그보다 5배인 0.68달러로 올랐다.

 

F1_large2.jpg» 파나레이 마을에서 2013년 포획한 돌고래 이의 모습. a 알락돌고래, b 스피너돌고래, c 큰돌고래. 사진=오레무스 외 <왕립학회 공개 과학>
 
연구자들은 2013년 석 달 동안 이 마을에서 포획한 돌고래는 알락돌고래 1500마리, 스피너돌고래 159마리, 큰돌고래 15마리인 것으로 추정했다. 기존 문헌 등을 종합하면, 파나레이 마을에서만 1976~2013년 사이에 몰이 사냥으로 1만5000마리 이상의 돌고래를 죽였다. 연평균 포획 개체수는 813마리에 이른다.
 
연구에 참여한 스코트 베이커 미국 오리건주립대 교수는 “이것은 세계에서 기록된 돌고래 사냥 가운데 최대 규모의 하나로 일본에서 벌어지는 더 산업화한 사냥에 버금간다.”라고 이 대학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일본 타이지에서는 ‘전통’이라며 대규모로 잔인하게 돌고래를 잡아 논란이 일고 있다. 타이지의 돌고래 사냥 문제는 2010년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상을 수상한 <더 코브>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돌고래 몰이 사냥은 이밖에 페로스 제도와 페루 등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Erik Christensen -Hvalba_26-08-06_(3).jpg» 영국과 아이슬란드 사이에 있는 페로스 제도에서 몰이 사냥으로 잡은 돌고래들. 사진=Erik Christensen
 
그러나 파나레이 마을 주민들은 ‘돌고래 사냥 재개가 마을 사이의 갈등을 잠재우고 평화를 불러왔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주민들도 과잉 포획의 문제는 알고 있지만 대규모 선망 어선의 그물 탓에 잘못 걸려들어 죽는 돌고래가 더 문제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포획 대상인 돌고래가 세계적으로는 멸종위기종은 아니지만 이 섬에 고립돼 진화한 집단이기 때문에 체계적인 모니터링과 보전을 위한 관리가 시급하다고 논문에서 지적했다.
 
베이커 교수는 “대형고래는 국제포경위원회(IWC)에서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소형 고래 사냥에 대해 관리 조언을 해주거나 할당량을 결정하는 국제기구나 정부간 기구는 없다. 규제도 받지 않고, 종종 기록도 되지 않는 포획이 세계 일부 지역 돌고래 개체군의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던져주고 있다.”라고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Oremus M, Leqata J, Baker CS. 2015  Resumption of traditional drive hunting of dolphins in the Solomon Islands in 2013. R. Soc. open sci. 2: 140524. http://dx.doi.org/10.1098/rsos.140524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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