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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하루하루 생각나는 것들을 모아 조각퍼즐처럼 모아놓으면 언젠간 '나'를 완성할 수 있을까?

20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12/06
    희한한 병(5)
    엉망진창
  2. 2006/11/19
    공부할 때가...(7)
    엉망진창
  3. 2006/11/13
    사는 얘기, 생각(4)
    엉망진창
  4. 2006/10/12
    일기 06.10.12
    엉망진창
  5. 2006/10/12
    BLU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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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10/10
    동생 군대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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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9/28
    우울모드 다시 돌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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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6/09/13
    귀차니스트의 남산배경 사진 몇 장(2)
    엉망진창
  9. 2006/09/06
    비온다.(1)
    엉망진창
  10. 2006/09/03
    부치지 못한 편지(3)
    엉망진창

사는 얘기, 생각

 #1,

  몸 안좋다고, 선배와의 약속을 깨고...약 먹고 일어나니 딱~ 약속한 시간.ㅋ

  몸도 괜찮아졌는데, 이제서 오시라고 할 수도 없고 해서 약간 민망.

  하지만 역시 소주는 무리였을거예요. 비오는 날엔 역시 막걸리와 파전이잖아요 ㅋ

  담번엔 동래파전 가요.^^

 

요즘 고뿔이 대세라. 저도 그 대열에 합류했었읍죠. 뭐, 심각한 정도는 아니고.

원래 철이 바뀔 때마다 감기에 걸리니, 올해도 마찬가지인게죠.

공부는 기분 내킬때마다 하고 있고, 지쳐간다는게 확실히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죽을만큼 싫을 정도는 아니고, 나름 즐기고 있으니 절대 걱정마시길.

좀 더 깊게 파고 싶은데, 시간적 여유가 안되서 그런거죠.

이거이거...장수생의 대열에 끼고 있는건가요?ㅋㅋ

 

 

#2.

아, 금방까지 시험과 관련한 얘기 주절주절 썼다가 지워버렸어요.

도저히 답이 안나와서요. 가장 큰 이유는 사태를 분석하고 정리할 정신적 여유가 없는거예요

 

교원수급정상화를 기조로 들고, 한동안 집회얘기가 나돌았을 때,

잠시 생각했던건.

분명하게 전체 구조가 변하고 있고, 그 틀에서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

정규직은 줄어들고, 비정규직,기간제가 확산되는 사회구조 속에서 교원 역시 마찬가지이고,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교원수급정상화도, 교육 정상화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전교조가 학교 내외에서 수많은 교육문제로 내부적인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꾸 그 틀안에서만 진행하고 있는 것 같다는

시선도. 물론 모든 것은 전교조의 책임으로만 몰고 갈수는 없지만요.

 

그리고, 자꾸 파편화되고 개인적이 되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에도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고 일종의 문화가 만들어지는 순간,

폭발적인 분노가 한순간에 자책과 무기력으로 정리되는 것.

현실적이라는 말 속에 내포된 기회주의와 타협, 규제와 이해타산적인 모습까지도.

 

뭐,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눈에 들어오는데, 도저히 정리할 재간이 없더라구요.

아무래도 실질적인 내용과 대안이 비어있어서 그런거겠죠?

 

아...안그래도 정리해야할 문제들이 많은데

난 정말 왜 이렇게 생각만 가득한 걸까요??

 

 

#3.

끝이 별로 안남았는데, 뭐. 이 상태로 계속 가다간 붙을수가 없는 지경이죠. 켘

그래도 애초에 일종의 나에 대한 시험과정 및 검증과정으로 삼고 시작했던거니까

나머지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해보려구요.

 

ㅎㅎ 시험끝나면 꼬옥~놀아주세요 매일매일^^

아니면 어디로 도망가버릴거예욧!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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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06.10.12

#1. 끄적끄적

 

오늘 블로그에 글을 많이 쓰는군.

뭐, 일상에 변동이 많은 것도 아닌 삶인 주제에 나불거리기는 잘한다. 내 특기.

 

동명이인.  뜨악

순간 내 이름이  네이버 검색 2위로 올라 깜짝 놀라다.

흔한 이름도 아니거늘.쩝.

황진이를 4위로 제치고 금방 10월 모의고사도 해치웠다. 푸하하하 1위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건 왜 일까. 그냥 어딘가에 드러난다는게 싫어서(익명성 너무 좋아!)

아...나도 이름 바꾸고 싶어진다. 삼순이처럼!

순간 이름을 지어주셨던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워지는건 또 뭔가. 쩝.

뜬금없지만, 생각이 나면, 또 써주는게   인.지.상.정 !  쳇

 

 

#2.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일 때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장에서 영정 사진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앞으로는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죽음'이란 것과 직면해서 나온 눈물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보인 반응은? 놀라셨단다. 내가 울거라곤 생각을 못하셨다나.

 

그렇다. 난 할아버지와 그다지 좋은 관계는 아니었던 거다.



할아버지는 늘 집에 계시는 걸 좋아했다. 취미는 바둑, 서예, 화단가꾸기. 뭐 이런거.

그래서 늘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아버지 친구분들이 집으로 오셔서 바둑을 두곤 했다.

마치 우리 집이 기원같았는데, 난 그게 늘 싫었다.

왜냐면 그 만큼 우리 엄마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 친구분들의 시중을 들어야했으니까.

일찍 시집 온  울 엄니는 고된 시집살이에도 홀시아버지를 모시며 군말없이 살던 착한 며느리였다. 

어렸을 땐 잘 몰랐는데, 나이가 들면서 정확해지시는 할아버지의 배꼽시계에 맞춰

우리 엄니는 삼시 세끼에 간식까지 늘 정성스럽게 차려 상을 내 보냈다. (대단도하시지..)

 

 

지금이나 예전이나 생각해보면, 할아버지는 결코 인자한 성품은 아니셨던 것 같다.

늘 다가가기 어렵고, 무서웠다. 커다란 안방에서 "얘야~"를 외치시면

뛰어갔던 어머니의 종종 걸음 수만큼 할아버지와의 거리감이 컸다.

생전에 살아계실 때엔 한번도 할아버지와 겸상을 했던 적이 없었다. 늘 어머니는 상을 두번

차려야했고, 난 어머니와 고모와 함께 두 번째 상에서 기름진 반찬을 구경하며 밥을 먹었다.

 

 

그러던 할아버지와 크게 틀어진 건 자장면 한 그릇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잠깐 어딘가로 외출하신 동안, 점심에 자장면을 시켜먹었는데, 세상에.

할아버지 당신 드실 것과 남동생 것 두 그릇만 시킨게 아닌가.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에 자장면이 비쌌나? 이런 생각까지 들었는데, 설령 그랬더라도

빈 그릇에 덜어라도 줬어야지...(으흑...비굴해.) 그런 것도 없이 난 손가락만 빨았다.

 

다행히 엄마가 곧 들어와서 손가락 빨다가 엄청 울면서 억울해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난 먹을거 가지고 차별하는 사람이 제일 싫더라.

그 순간에도 할아버지는 울음을 뚝 그치라고 나를 혼냈다. (정말 미워~)

어머니도 속상했는지 다음날인가 할아버지 외출하셨을 때 자장면을 시켜줬는데,

난 동생도 같이 먹는게 대단히 맘에 안들었던 모양이다.

그 땐 어려서 할아버지보다 옆에서 좋아라 춘장을 빨던 동생이 더 얄미웠었는데,

엄마가 시켜 준 자장면을 먹을 때 동생에게 단무지는 절대 못 먹게 했던 기억도 난다.ㅋ

 

 

할아버지와 같이 산건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고작 3년.

그 전에는 작은 할아버지와 약수터도 함께 다니고, 아양도 떨면서 재잘거리던 산소녀였는데

(하하..사당에서 살던 때...작은 할아버지도 집에 계시는 걸 좋아하셨지. 그런거보면 유전인가?

그래도 작은 할아버지는 내가 참 좋아했다.) 할아버지와 살면서 억압된게 참 많았던 것 같다.

 하다못해 할아버지 친구분께서 용돈으로 주신 돈은 단돈 100원이라도 꼭 허락을 맡고 써야했으니까.

 

 

돌아가실 때에도 집에서 삼일장을 지내느라 어머니가 많이 고생하셨는데,

그 날 밤 꿈에서.   

생전 내겐 웃지도 않던 할아버지가 웃으시면서 내 손목을 잡으며 같이 가자고 말하던

그 순간은 아직도 기억한다. 그 꿈속에서 기괴하게 웃는 할아버지의 배를 그동안 억눌린 만큼 있는 힘껏 발로 찼던 순간도.

이런 말은 그렇지만 사실 얼마나 속 시원했는지..

 

 

앗, 어쩌다가 얘기가 이렇게까지 왔네.

암튼 이런 기억을 갖게 해 주신 분이 내 이름도 지어주셨는데,

이런 사유로 이름 바꾸고 싶다고 동사무소에 쓰면, 불효막심한 년이 되는건가??

 

 

 

 

#3.

뭐, 십년도 넘게 예전에 돌아가신 분 생각해서 뭘 하겠어.

아직도 내 이름이 네이버 검색 1위려나?

어...벌써 내려갔네. 세상 정말 순식간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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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리우스님의 [green] 에 관련된 글.

 

세 번이나 해봤는데, 그래도 또 블루가 나온다.

블루만 100%인건 너무 하잖아.

 

 

You scored as Blue. You are considered to be a very calm person who takes things one at a time and does not worry too much about the consequences. Whatever happens, happens, is your moto. You are the one people come to for advise on most topics, because you are filled with limitless knowledge. You can handle any situation.

Blue

100%

Purple

94%

Black

89%

White

78%

Orange

72%

Green

72%

Red

67%

Yellow

39%

Pink

17%

 

 

 


Which Colour Represent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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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군대 갔어요

 

 

오늘 하나있는 남동생이,  드디어 군대를 갔습니다.

원래는 지난 2월경에 갈 예정이었는데,  한참 군대 총기 사건이니 말도 많고

이 놈이 사고를 치기도 해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입영 연기를 했었죠.

더 이상 연기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드디어 군대를 갔는데, 또 군대 갈 때가 되니,

북핵 문제가 대두되고 군대에 경계령이 내려졌다는 보도가 계속 되더군요. 훗 (고생좀하겠어)

 

제 동생과 전 우애깊은 남매애를 찾는 관계는 아닙니다. 흐음. 수 많은 일화를 다 말할 수는 없고...

군대 가기 전, 생명 보험을 들겠다고 난리를 치는 녀석.

어머니는 "그런 일이 생겨도 안되지만, 혹시 나쁜일이 생겨도 난 그 돈 못 받는다"라고 하시며

거절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한 말 했죠.

"아냐, 꼭 보험 들어. 난 그 돈 쓸래"

물론!! 결국 생명보험을 들지 못했어요. 군대에 입대한다니까 보장이 많은 보험에선 거절하더군요.

그래서 오늘 배웅하는 차 안에서 말해줬죠

"보험도 안 들었으니까, 몸 사려."

 

어렸을때에는 동생을 참 많이 좋아했어요. 뽀얀 피부에 바가지머리가 너무 귀여워서

동생을 데리고 돌아다니며 "제 동생이예요^^"라고 하루종일 돌아다닌 적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놈이 하도 밖으로 싸돌아다녀서 피부가 검어질무렵

우린 서로 아는 체하지 않게 됐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일부러 그런건 아니였는데 말이죠.

아마 서로 각자의 삶을 살게 되면서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는 그런 사이가 된 것 같아요.

 

그런 그 녀석의 가식적인 모습을 기억하는건,

동생이 효자라고 주변 사람에게 거짓소문이 날 무렵이었습니다.

우연히도 작은 이모가 증인이 된 '붕어빵 사건'덕분이었죠.

제 동생이 중학생이었을 무렵, 집으로 오는 길에서 제 동생과 이모가 마주쳤죠.

그런데 이모의 말에 따르면, 교복 속 가슴 깊이 무엇을 품고 오더랍니다.

알고보니 어머니께 드릴 붕어빵이 식을까봐 가슴에 품고 뛰어가는 길이었다는 겁니다.(쳇, 말도 안돼!!)

그 말을 전해들은 우리 어머니야 감동에 감동의 트위스트를 추셨답니다.

하지만, 전 알고 있었죠. 붕어빵을 가슴 속에 품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효심이 아니라 추운 겨울,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때문이었음을. (따뜻하잖아!)

나중에 진짜 엄마한테 주려고 뛰어왔어?라고 물으니, 이 얍삽한 놈, 그저 웃기만 하더군요.

 



이런 동생이 군대를 가니, 우리 어머니. 입영 몇 주 전부터 눈물에 눈물을 흘리셨죠.

하지만, 나이도 스물 둘, 키도 190이나 되는 이 거구를 누가 쉽게 건드리겠습니까.

다만 걱정되는건 욱하는 성질과 뒤에 숨은 소심함의 결정체라는 점이나,

시류에 잘 편승하고 줄타기를 워낙 잘하는 놈이라 시간이 지날수록 걱정은 사라집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나이나 덩치에 관계없이 한없이 걱정되고 불안하고 그런가봅니다.

어머니는 의정부에서 아들 손을 꾸욱 잡고 눈물을 참고 또 참더니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내 눈물을 글썽거리며 "아들이 보고싶다"를 외치십니다.

손에는 '입영안내서'와 '은나노 <슈퍼> 깔창' 껍데기를 들고서 말입니다.

 

 

동생이 부대에 들어가기 전

제발 전경으로 배치되지 않으면 좋겠다고 걱정해줬습니다.

키가 커서 확률이 높다는데, 아... 정말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누군가에게 동생이 맞는 장면보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에 기대서 누군가를 때리는 장면은

너무 끔찍해서요. 시키면 다 할 놈이라 더 걱정입니다.ㅠ.ㅠ

 

그리고 이런 말을 했어요.

군대 문화라는게 무시할 수 없을테니, 네가 맞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나중에라도

절대 네가 누군가를 때리지 말라고 말입니다.

 

아,혹시 파병 지원하라고 하면, 무조건!!! 잠자코 있으라고도 했군요.

 

 

짧은 인사를 나누고 "잘 다녀올께"라는 동생의 말이 귓가에 닿을무렵,

이 녀석은 벌써 100m즈음 뛰어가고 있습니다. 한번도 뒤돌아보는 법이 없더라구요.

어머니는 행여나 아들모습을 놓칠까 운동장을 빙 돌아서 아들이 있는 뒤쪽으로 뛰어갑니다.

저도 따라갔습니다.

 

처음으로 입대식이라는 걸 구경하면서 마음이 불편하더라구요.

대대장이란 사람이(누군지 얼굴도 안 보입디다) 인사라고 하는 말이

남자는 강인해지기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조국의 부름을 받고 왔으니 환영한다나 뭐라나

짤막한 "사나이로 태어나서~"로 시작하는 군가를 들으면서

동생 또래 혹은 더 어린 애들이 눈물을 훔치며 자꾸 부모님을 찾는 모습이 눈에 보였거든요

제 동생은 의정부로 갔는데, 오늘 3000명이 입대를 한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이렇게 입대를 한다니까, '군대'라는게 장난이 아니게 느껴지더군요.

군대라는 거, 국가라는 거. 제 동생이야 '신체 건강한 군필자'의 범주 내에서 살아가기 위한

과정을 겪는 것이라는 생각까지 미치고서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근데...정말 사람이 빈 자리가 크다는 말이 조금씩 느껴지네요.

제 방 꼬진 컴퓨터가 망가지면 시스템 복원은 누가 해줄지...ㅠ.ㅠ

당장 냉장고에 있는 환타, 치킨, 고기, 과일, 우유, 아이스크림...이런 건 누가 먹을지.

당분간, 어머니 옆에 꼬옥 붙어 있어야겠어요.

마음이 허전하시다네요. 저도 약간은 보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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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모드 다시 돌입

 

 

 

 

또 시작.

현대인의 만병의 근원, 스트레스.

그리고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우울모드.

이젠 술로 달래주는 것도 지치는 중.

 

어떻게 해야할까?

쏟아내기를 하고 싶은데 쏟아낼 그 무언가가 없다는게

참 슬픈일인 것 같다.

 

달려보는 거라고 끝없이 자기 최면을 걸면서도

늘 깨어나는 건 또 나.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일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도 나.

이렇게 무의미한 말들을 쏟아내는 것도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자판을 두들두들 거리는 것도 나.

 

아무도 보고 싶지 않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고

무덤덤해지는 걸 때론 즐기고 있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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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차니스트의 남산배경 사진 몇 장


 

생각해보면 서울 곳곳에 돌아다닐 만한 곳이 많다. (물론, 삶의 여유와 발품은 필수다.)

 2주일에 한번 쯤(몸이 찌뿌둥하고, 도서관도 마침 휴관해주는 날엔-.-;)  바깥 바람을 쐬려고  남산으로 향한다.

서울 도심에 편하게 오를 수 있는 산이 있다는 건 꽤 매력적인 일이다.

 

버스가 이끌어주는 대로  남산타워까지 오르는 입구에 당도하면,

그 짧은 코스를 헉헉 거리며 오른다. 운동 부족? 맞다. 

그래도 나는 가파른 경사에 만족하며, 꼭대기에 올라서는

공자가 뭐시기 산을 오르며 느꼈을 호연지기를 상상해본다.

그래, 아등바등하지 말자.  

                                           그 순간, 늘 산통깨는 건 연인들.

'저기요, 사진 좀 찍어주세요'(뷁, 셀카질 하란 말이다.)

 

아이들이 햇빛 받으며 뛰어놀고, 가족과 함께 단란한 오후를 보낼 무렵.

난 그것도 등산이라고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꾹꾹 누르며,

모르는 애들 옆에서 맥주를 한 캔 마셔준다.

그리고 나선?

혹여 산책로를 따라 주욱 걸어 내려왔을 것을 상상했다면, 그건 섭섭.

난 그저 바람 좀 쐬려고 갔을 뿐이므로

 

그냥 버스타고 내려온다. 랄라~

 



p.s)

 

 

 

국립과학원 옆 114계단에서. 이 애들은 전혀 모르는 아이들 .^^;;

 

옛날에 이 계단이 전생, 현생, 내생의 삼세의 인생사에서

인간이 느끼는 고통과 번민이라던 108번민을 상징하는 108계단이 아닐까란 상상을 해봤으나...

실제로 세어본 결과 114개의 계단이었다.

 

 

이 계단은 절대...네버...

내려는 가봤지만, 올라가 본 적은 없다.

더운 여름 이 계단을 오르는 건 자기학대라고 생각했었던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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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온다.


(from naver)

 

 

 

raining.

비가 온다.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깥 바람이 시원하다. 바람이 제법 선선한게 정말 가을이다.

빗소리가, 바람이, 날씨가 변했다.

다르게 들리고, 다르게 느껴지고, 그래서 좋다.

 

좋다.

마음 한쪽은 선선하고 텅 비어있는데, 그 느낌이 나쁘지 않다.

아직 마음속에 있는 말을 담아낼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했다.

그릇이 비어있다.

 

달관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고, 체념과는 거리가 있는

마음의 상태.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면서 바람과 비가 적절하게 평형을 이뤄주는 느낌이다.

썩 나쁘지 않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오늘은 잠을 아주 잘 잘것만 같다.

 

 

 

 

 

p.s) 문제는 그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주체의 태도이다.

    정말 문제는 "존재"가 아니라 "태도"이다. 그 때 이 말하는 걸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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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못한 편지

부치지 못한 편지     

 

 

내일 모레 그 녀석과 약속을 잡았다.

  말년 휴가때 한 번 본 것 말고는 군대가기 전이나 후나 본 적이 없으니, 대학교 때 몇 년을 붙어다닌 사이치고는 꽤 시기를 두고 만나는 셈이다. 원래 계획은 면회(?)도 가주고, 선물이나 편지도 가끔 보내줄 생각이었지만, 늘 그러하듯 생각은 생각에서 멈추는 스탈.

  이 녀석에게   제대 하기 전.  계획했던 편지 한 통을 부쳐주려고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내 발목을 끄는 귀차니즘 때문이다. 두 블럭 떨어진 우체국까지 가서 우표를 사기가 힘이 들었던거다. 그래서 이 편지는 내 방 책상 서랍 속에 고히 모셔진 채

 

'부치지 못한 편지'가 되어버렸다.  (사실 부치지 못한 편지는 이거 말고도 또 있다.)

 

 'F4' 에게 "삼십"으로 통하는 그 녀석에게 줄 이 편지를 얘기 하려면, 말 많고 탈 많았던 옛 기억으로 돌아가야한다.

 

 

내 기억은.

 삼십에 대한 내 기억은 내 운동의 시작과 맞물려 있어서 쉽지 않은 작업이다.

 

학생운동을 처음으로 나와 관련지어 생각했던 때. 그 때로 돌아간다.

다른 운동세력은 거의 전멸하고, 민족주의 세력만 몇몇 과를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때,

캠 좌파라는 이름으로 나와 내 동기는 혈혈단신으로 단대 선거에 출마했다.

캠 내에서 그나마 확고한 역사를 가진 세력과 힘 겨루기는 지는 것이 뻔한 승부였다.

 

그래도 우린 의미를 가지고 활동했었고, 승부는 졌지만 꽤 유의미했다고 지금도 평가한다.

물론 이 때의 체험은 나나 내 동기나  '대중운동 경험의 부재'라는 원체험으로 작용해 이후 운동을 하는데 있어서 한 편으로 압박해 올 때도 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현재를 다잡을 수 있는 소중한 밑거름이 된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기까지의 과정은.

사실 쉽지 않았는데, 이건 내 개인적인 체험에서 비롯된 거다.

  

2000년대의 대학생활.

취업을 위해 토플 책을 끼고 살아야하고,

너 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해야 살아남는다고 강요하는 환경이 지배적이기 시작한

그 틈에서 살아온 나의 이야기이다.




옛날 기억들.

대학교 2학년 때 나는 '불어'에서 '국어'로 전공을 바꿨다. 여러 요인이 작용하긴 했는데,

직접적 이유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어쨌든, 얻은게 있으면 잃는 게 인생사.

내 경우엔 '사람과의 관계맺음'이다. 전과한 나와 내 친구들은 그걸 '알량한 텃새'라고 불렀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에 적응하기 힘든 나에게 단대 선거 출마는

사실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던 거다.

안 그래도 과에서 내 이미지는 좋지 않은 편이었는데, 그 모든 이유는 '전과'에서 시작했다.

 

  학기 초 학회비를 이중으로 납부하라는 과학생회의 요구에 부당하다는 내용으로

 500여명의 연서명을 받아 선배들 얼굴에 날려줬다.

물론 처음에 논리적으로 옳지 않은 결정이라고 설득했으나, 돌아오는 건

 "다 이해하는데 그냥 너희가 희생해"라는 어처구니 없는 논리가 화가 났던 거다.

 난데 없는 서명운동에 놀란 학생회 선배들은 우리의 요구에 순응했지만,

대신 우리는 '싸가지 없는' 스타일의 소유자로 무수한 눈초리를 받았다.

  

 여기에 턱없이 부족한 장학금도 한 몫 했던 거지.

한 학년당 40명 정원에 장학금은 고작 네 다섯명. 유감스럽게도 그 장학금은 매번 전과생들이 독차지했다.

국어과 특성상 소문이 뒤로만 도는데, 꼭 돌고 돌아 귀에 들어오는 소문들이다.

내용이야 우리가 어디서 굴러온 개뼈따귀로 자기들 몫을 뺏어가는 것 같아 못마땅하다는 내용이었다.

본의아니게 왕따가 되어버린게다. (ㅠ.ㅠ이게 웬일)

 

그런데 단대 선거에 떡하니 출마하는게 자기들도 당황스런 시츄였나보다.  민족 계열에서 단대 선거 정후보로 평소 과에서 사람좋기로 소문난 동기가 나왔다. 과에선 난리가 났다.

같은 과에 후보가 둘이 나올 수가 있냐며 어떤 선배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초리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나올 수 있으니까 나온거 아니냐' 나야 속으로 몇 번을 소리질렀지만, 한번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제길. 그 땐 어렸던거다.

 

 

 선거 기간동안 가늠할 수 있는 득표 수를 세워보는데, 비참했다.

득표수가 적은 것에서 오는 비참함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제한된 것에서 오는 좌절감이었다.

국어과도 불어과도 어느 곳에서도 속하지 못한 채 둥둥 떠내려가는 '낙동강 오리알'신세 같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처지를 보고 어느 동지가 농담으로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하니까 좋지?"

평소 내 성격이면 좋게 흘려보냈을텐데, 정색하면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고 딱 잘라말했다.

아직도 그게 기억나는 걸 보면 지대 짜증났던 거다. 지금이었으면 사과하라고 소리질렀을텐데 ㅋ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내부에서 생활하는게 만만치 않았다.

선거에 들어가기 전 이런 생각으로 출마하니 지지해달라고 부탁했던 몇몇 복학생 선배들에게서 돌아오는 말은

"네 생각에 동의해. 그런데 앞에서 나서서하기엔 그렇고, 뒤에서 응원하고 있을께"

젠장. 지금 생각해보니 완전 비겁모드. 그래도 그 때엔 그것마저도 고마웠다.

과 전용 게시판엔 상대편이 과선배니 유의깊게 보라는 내용과 우리쪽을 비방하는 글로 가득했는데,

 내가 지금도 용서하지 않는 구린늑대새끼는 공약을 씨부렁거리는 글을 올려놨다.

단대가 사범대인만큼 당시 상대평가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워 이데올로기 공략을 펼쳤는데,

구린 늑대는 어디서 굴러온게 말도 안되는 공약을 내세웠다고 흥분하는 글을 썼다.

 그 때 당시 열받던 건 선거가 끝나고 이듬해 학교에서 정말 인원 수가 적은 과목에 대해

절대평가를 시행하는 걸 보고 (당선된) 학생회의 성과라고, 가능한 일이었다고 글을 쓴 일이다. 카멜레온 같은 놈. 찔리는게 있었던 거다.

 

 

뭐, 준비되지 않았고, 미숙한게 많았던게지.

개인적으로는 만약 여기서 끝이 났더라면 지금의 난 아무 고민없이 잘 살았을텐데,

우라질 학교가 적절하게 탄압을 해준 덕에 이렇게 살고 있다.

그 때 이후 학생운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는데, 대신 과에서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후배 하나 만나려치면, (물론 내가 펑크낸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마치 내가 사람을 안 좋은 물로 끌어당기거나 조종하려는 인물로 묘사되서 쉽게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건진 사람이 삼십이다.

이리저리 잘 도망다니던 삼십이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사회를 보려하고 고민하려고 하던

그 때.

내가 겪었던 같은 어려움을 그 친구도 토로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척박한 토양. 그 가운데 지닌 열기. 미숙함. 계속해서 학습되는 무기력감. 

미안하고 고맙고 그랬다.

 

 

삼십에 대해

 

대학생활동안 건진게 뭐냐고 물으면 내 가치관 그리고 사람이라고 대답한다고 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건진게 뭐냐고 물으면 난 그 중 하나가 '삼십'이라고 말한다.

내가 관계한 사람이 몇몇 되지 않아서^^;;

 

제대를 앞두고 말년 휴가를 나온 삼십은 대뜸 말한다. 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난 그러라고 했다.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다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이런 모습만은 보이지 말길.

권력과 타협하지 않기.

 

부치지 못한 편지에 이런 내용들이 담겨져 있는데, 이걸 줄까 말까 고민중이다.

이사하면서 버린 것도 같고...쩝.

뭐, 만나서 직접 말할 수도 있겠지? 뭐가 나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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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험생으로 돌아가면서

지난 월요일부터 오늘까지 미뤘던 숙제 하나를 끝내 놨다.

이제 첫 단추를 끼운 셈인데, 시작했다는 안도감 하나가 만족감까지 불러일으키길래,

마구마구 마음을 눌러줬다.

 

이전에 블로그에 쓰려고 눌러놨던 글 하나도 오늘 써보려고 마음 먹었다.

글발은 오를 때 확 나가줘야지, 안 그럼 잊어버린다.

공부해야겠다고 맘 먹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를 짓누르는 게

왜 작년만큼 공부를 안하는걸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물음

 

이 물음에 대해 어제 친구 병문안 하면서 작년에 같이 공부헀던 소시미양과 얘기를 하는

가운데 조금은 풀렸다. 이 고민을 나만 하고 있었던 건 아니였던 거다.

 

소시미양도 책을 보면 아는 것 같고, 하지만 정확하게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불안감이 자기를 휙휙 감싼다고 했다.

이제 공부를 시작한 달팽이양은 오늘 문자까지 보내왔다. 복귀가 안된다고.

겡끼양은 자기주도적 학습을 위해 고립을 선택한지 두달만에 빨리 만나자고 소시미에게 말했다고 한다.

나보다 일년 반 먼저 공부를 시작한 친구는 요즘 연애한단다.

같이 스터디했던 언니는 2월에 다가올 결혼에 슬슬 마음이 쓰이기 시작하는 것도 같다.

다아들...난리인게다. 혹시...내 주변인들만 이런건가...

 

 

그래도 9월이 시작되면 다들 본업으로 돌아가겠지란 생각도 든다.

나도 그럴 것 같다. 이제 곧 100일이다. ㅠ.ㅠ

고3 때도 안챙긴 백일을 나이짝 들어서 챙기게 되다니...

 

 

 

시간 정말 빠르다.

 

 

 

앗...쓰다보니 원래 쓰려던 글이 아니다.

원래는 작년에 공부하면서 힘들었던 거 쓰려고 했는데...

작년에 내가 선택한 고립에 힘이 들어서 맨날 울면서 공부했었는데,

이젠 그러기 싫다는 내용이 원래 쓰려던 내용이었다...쩝

 

뭐, 인생은 늘 이런거 아니겠어.

무계획적 삶과 무계획적 글쓰기. 내가 좋아하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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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몇일 쨰 블로그에 글을 쓰다 지우다를 반복했다.

특별히 쓰려는 글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 때 그 때 생각들을 적어가다가

시간이 부족해서 그랬다.

 

언젠가 읽은 글 중에서 

쓰고 싶은 글이 없는 사람은 그만큼 말로 표현을 많이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고 했다.

말로 하거나 글을 쓰는 표현행위가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라면서.

반대로 생각해보니, 말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만큼 쓸 거리도 많아지겠다고 생각했다.

딱 내가 그런가 싶은데, 별 내용도 아닌 내용을 지껄이길 반복하고 있다.

말이 줄어드는 대신 안으로 곱씹는 내용이 많아지는게다.

 

병이 또 도져서 소설을 쓸까 생각하고 있는데,

내 인식의 경계가 좁아서 인물을 구상해도 주변 사람들의 특성만 짜집기 하고 있길래

그만뒀다.

나중에 욕 먹을 것 같아서.ㅋ

 

아,젠장.

하루에도 수십번 나와 타협하고 돌아온다. 역시 제일 넘어서기 어려운 상대.

 

공부를 하도 안해서 주변 사람들이 한마디씩 한다.

네,네, 알겠습니다.

이젠 정신 차린다구요.

 

 

아, 나도 관념적이고 우울하지 않은 그런 글 쓰고 싶다.

스물 여섯. 이제서야 성장통을 겪는건가, 머릿속에 온갖 생각들로 가득차다.

 

무의식속에서 아웅거리는 정체성찾기와 자꾸 좌절되는 현실 앞에

나를 넘어서기가 힘이 든다.

 

이상의 이상한 시들이 이해되는 지금 시점에

머릿속에서 13인의 아해가 부딪히고 앙앙거리는데

어떻게 명랑하고 쾌활하게 살 수 있냐고.

 

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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