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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부산3호]천 개의 눈, 천 개의 상상력 그리고 천 개의 진보정치

 

출처: 민주노동당 부산시당 <진보부산> 3호 (2004년 11월 15일)

 

천 개의 눈, 천 개의 상상력 그리고 천 개의 진보정치

 

-깊어가는 겨울 학습하는 정당이 되길 바라며

순정만으로는 2% 부족. 정진(精進)하는 자, 사랑을 얻는다!

                                                                  양솔규(중동서 당원,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발언하기의 두려움’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나르시스는 연못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환희했고 그리워했지만, 범인(凡人)들의 사고는 그렇게 짜지지 않는다. 즉, 신화의 인물과 땅위 인간의 자기애(自己愛)에는 넘어서지 못할 장강(長江)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발언’은 자신을 사회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의 일종이다. 가수는 공연이나 앨범발매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며,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유적(類的) 존재로서의 자신을 드러낸다. 운동권 용어로는 ‘개입’이라고도 한다. 드러낸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 자신의 부끄러운 점들이 여지없이 함께 드러나기 때문이다. ‘발언의 두려움’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동창회든, 조기축구회든 어떤 모임이든 간에 언제나 빠지지 않는 순서가 있다. 바로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이다.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는 것 말고도 권장되는, 때때로 강요되는 ‘신상명세서’ 까발리기, ‘민증 까기’의 순서는 지금껏 나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앞 순서에서 먼저 소개한 사람이 사람 녹이는 혀의 기술을 가졌다면 나는 더더욱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뭐라고 나를 소개해야 하나?’ 잔뜩 머리를 굴려본다. 곧 내 순서가 되면 구상한대로 소개를 하려 하지만, 머리는 하얘지고, 입은 굳고, 어지럽고, 앞이 안보이면서 더듬더듬 소개를 한다. 소개가 끝나면 대체 내가 뭐라고 떠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기소개 하나 하기 힘든 범인들에게 더군다나 세상을 바꾼다는 부담스러운 ‘당’ 내에서 발언하기란 영 어려운 것이 아니다. 워낙에 출중한 인물들이 모여 있기도 하거니와, ‘내가 말한 게 틀리면 어떡하지?’ 하는 부담감이 혀뿌리를 잡는다. 사실, 세상의 빛을 본지 오래지 않아서 ‘뜨거운 맛’이 어떤 건지 잘 모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당 중에서 자민련을 제외하고는 가장 오래된 당이라고 하는 민주노동당은,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뜨거운 맛’이 뭔지 알지 못한다. 이제 겨우 대중들에게 자기소개 한 정도일 뿐이다. 우리가 올해 4.15 총선 전, 또는 총선 시기 걱정했던 그것! 그것은 바로 민주노동당의 모습이 대중들에게 낱낱이 드러날 때 감당해야만 하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아니었던가?

민주노동당은 앞으로 전진만 하고, 사납게 달려들기만 하는 ‘사마귀’가 아니다. 오히려 민주노동당이 굳세게 지켜야할 모습은 충분한 양식과 내공을 갖추기 위해 준비하는 ‘개미’의 모습이다. ‘변방에서 중심으로, 변방에서 미래를’ 찬란하게 열어나가기 위해서는 민주적 토론과 학습 속에서 서로가 힘을 얻고 자신감을 얻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대중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꺼려하는 동굴 속 ‘박쥐’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미국 대선이 끝났다. ‘부시가 당선 될꺼야! 이미 결정 났어’ 말하고는 속으로 걱정하는 부류의 사람들도 있었다. 또 어떤 이는 ‘부시가 당선되든, 케리가 당선되든 마찬가지 아니냐’ 하고 짐짓 외면하기도 했다. 모두가 제국의 운명에 관심을 가졌으나, 우리는 제국에 개입할 방법이 없었다. 불가항력적인 패배가 역사에는 존재한다. 하지만 가능한 승리도 세상엔 있다. 단선적인 역사가 없다면, 아흔아홉 번의 연패란 없다. 우루과이 좌파의 선거 승리, 네덜란드 노동자들의 거센 저항의 물결도 있다. 우리에겐 이 땅 한반도가 무대다.

오늘도 내일도 생활 속에서, 현장에서 투쟁을 조직하고 열심히 뛰어다니는 순박한 우리 당원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눈물 한 아름 나게 아름답지만, 모든 ‘순정’이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니다. ‘순정’을 대중들이 알아줄 것인지는 목소리 크기나, 쪽수로 판가름 나지 않는다. ‘순정’이 ‘짝사랑’으로, 또는 ‘배신’으로 귀결될 운명이라면 그 순정은 거두는 것이 어느 모로 보나 현명하다. 사랑이 ‘눈물의 씨앗’이라고 믿고 있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순정’을 다 바쳐 사랑을 얻으려 한다면, 나의 ‘순정’이 어떠한지 알려야 한다. 고백하지 않고 어떻게 사랑을 얻을 수 있는가? 내 마음을 어떤 형식으로 갖춰, 어떤 방식을 통해 고백할 것인가? 나의 ‘순정’을 무엇에 쏟아야 할 것인가? ‘사랑한다면?…’ 우유 먹이는 걸로 그칠 것인가? 우리는 다음의 스케줄을 짜고 하나하나 갖추어야 한다. 세상엔 아흔아홉 번의 연패란 없지만, 아주 쉽게 승리의 고리를 놓칠 수도 있다. 자신감이 자만심이 되고, 뚝심이 아집이 되고, 결단이 경직성이 되며, 유연함이 우유부단함이 될 수 있다. 사랑에도 전략이 필요하다. 그 흔한 패배가 아니라, 역사적 패배는 우리가 흘린 눈물만큼이나 흔하다.

이제 가을이다. 곧 겨울이다. ‘개미’들이 해야 할 일은 지난 4.15의 환희를 추억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내년, 내후년을 준비하는 시기이다. 아니, 백년을 준비하는 시기다. 민주노동당이 ‘거대한 소수’가 되고자 한다면 아니, ‘거대한 소수’가 되고자 한다고 해서, 당의 실력을 키우고, 쓰임새 있는 정책을 만들고, 지역대중 속에 뿌리 내리는 일까지 당내 ‘거대한 소수’에게 맡겨 두어서는 안 된다. 서울의 마천루 속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는 영도 태종대의 절경은 우리가 그려야 한다. 우리가 상상해야 한다. 브레히트의 말처럼 당이 ‘천 개의 눈’을 가졌다면, ‘천 개의 눈’ 속에서 비치는 ‘수천 만 개의 상상화(想像畵)’가 그려져야 한다. 소수로는 부족하다. 가을과 겨울은 공부하기 좋은 계절이다. 상상하기 좋은 계절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비 케이는 ‘역사학자는 과거와 현재를 장악한 지배세력에 맞서 인민들에게 역사를 되돌려주는 일종의 로빈후드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민주노동당은 ‘역사만’을 되돌려주어서는 안 된다. ‘현재를 역사로 만들어’야 한다. ‘천 개의 눈으로 만 개의 상상화를 그리는 순정파 개미가 되어 인민에게, 인민과 더불어, 인민 속에서 현재를 역사로 만드는 핵심’이 되어야 한다. 실현(實現)은 손끝에서, 발끝에서, 신경세포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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