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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형성된 계급에게 놓인 두 갈래 길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 소통> 2008년 1․2월호 (2008년 1월 8일)

 

‘막’ 형성된 계급에게 놓인 두 갈래 길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구해근 지음, 창작과비평사, 2002년

 

그리 길지 않은 한국현대사 속에서 숫자는 ‘역사적 투쟁’의 법칙성을 나타내 주는 것처럼 보였다. 예를 들면, 1960년의 4.19 혁명, 1980년의 5.18 광주민중항쟁과 같이 10-20년 단위의 년도가 그러하다. 작년은 1987년 6월항쟁과 7,8,9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난 지 20주년이 되던 해였다. 또한, 1996-97년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난 지 10주년이 되던 해였다.

사람들이 이러한 시간적 흐름을 단지 ‘표지’해 주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그것 자체에 어떤 주술적 힘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뭔가 극복 가능한 희망을 찾고자 하는 심리적 동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학자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숫자가 반복적인 ‘시간적 주기’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숫자적 의미로만 본다면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1997년의 노동법개악 반대 총파업 투쟁이 일어난 지 10, 20주년이 되는 해인 2007년은 뭔가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해봄직한 해였다. 그리고 그 내용은 거대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조직적, 정치적 주체형성과 투쟁의 고양을 의미했다. 하지만, 작년 한 해 그 어떤 주술적 힘도 벌어지지 않았다. 역사에는 비약이 없다는 점을 믿는다면, 우리 노동운동은 아직 이러한 발전을 이루어낼 만한 실천을 하지 못한 것일 테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한국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시작해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의 출발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대한 이해와 이에 기반한 풍부한 논의일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2007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주노총은 조직노동 외 계급적 대표성을 갖추기 위한 활동에 게을리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역사에 대해 제대로 기록할만한 능력도, 의지도 없었고 그나마 기록된 자기 역사에 대해 그 구성원들과 나누고자 하지 않았다. 기껏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에서의 몇몇 정리만 있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회원들에게 책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구해근 하와이대학 사회학과 교수가 쓴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창작과비평사, 339쪽, 13,000원)이다. 이 책은 2001년에 구해근 교수가 영어로 쓴 책을 2002년에 신광영 선생이 번역을 해 출간되었다. 나는 이 책을 2004년 3월에 구입했는데, 몇 년 동안 읽지 않고 있다가, 2008년 신년에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저어했던 이유는 이 책이 1987년 이후의 노동운동사에 대해서 글의 비중상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1987년 이후의 역사가 중요하지 않아서라기 보다는, 한국 노동운동의 긴 역사를 ‘단절적’이기 보다는, ‘연속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구해근 선생의 특별한 시각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60년대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르는 긴 시간의 흐름을 ‘계급 형성’이라는 핵심 단어로 묶어 내고 있는 것이다.

 

구해근 선생의 ‘특별한 시각’은 바로, 책 제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영국의 맑스주의 역사학자 E.P. 톰슨의 기념비적인 저서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의 제목을 차용한 것과 같이 톰슨의 관점, 즉 계급을 역사주의적, 구성주의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관점을 수용한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계급을 “구조로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범주로도 보지 않”고 계급을 “사회적․문화적 형성으로서…다른 계급과의 관계 속에서만 정의될 수 있는 것…그 정의는 시간을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계급은 (코카의 주장처럼) “항상 형성 또는 소멸의 과정 속에 또는 진화나 퇴화의 과정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한국의 노동계급의 현재의 상태를 고정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정치적, 문화적 계기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실체로 파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시각 속에서 한국의 노동계급 형성을 살펴본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비교연구적 관점에서 대만이나 서구와는 다르게 나타나는 한국의 노동운동의 양상을 서술하고 그 원인을 밝히고자 한다.

 

이 책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대한 모든 내용들을 섭렵하여 담고 있지 않다. 자세한 내용과 관련해서는 다른 역사적 자료들이나 논문들이 더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하기 때문에 더욱 강점을 지닌 책이 될 수 있었다.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주요한 테마로 보고, 이의 계기와 과정, 조건과 이를 돌파하는 계급형성의 힘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다.

 

흥미롭게 볼 만한 점은 뒷부분에서 많은 외국의 노동분석가들과는 달리 구해근 교수는 한국의 경우 브라질, 남아공과는 다르게 ‘사회운동 노동조합주의’가 발전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구해근 교수는 그 원인을 첫째, 기업별 노조에 가해진 법적, 정치적 제약, 둘째, 낮은 실업수준과 적은 비공식 부문 규모, 셋째, 노조운동이 공장 특유의 문제에 몰두하면서 지역의 문제에 천착하지 않은 점 등으로 설명한다. 결국 한국의 노동운동은 그 운동의 폭발성, 전투성과는 상관없이 경제노조주의로 귀결되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IMF 이후, 현재의 조건 속에서 한국의 노동운동이 사회운동 노동조합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들이 이전과 달리 무르익고 있는가, 아닌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새로운 노동조합주의를 상상하면서, 과거의 우리 행동의 선택지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기업별 노조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었던 조건, 정당운동의 지체와 학출 활동가들의 조급함, 자본과 비교해서 “전략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의 불균형”을 초래한 원인들 등, 역사 속에서 배울 수 있는 수많은 오류와 실패들을 사심없이 지켜봐야만 할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노동운동이 더욱 힘든 구렁텅이로 밀려들어가고 있고, 수많은 비정규직들과 민중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하다. 80년대 말 형성된 한국 노동계급은 그러나 현재 ‘소멸’ 혹은 ‘퇴화’의 과정에 있을 지도 모른다.

 

구해근 교수가 결론적으로 얘기하듯이 한국의 노동운동은 아직 조직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약하고 허물어지기 쉬운 계급이다. 앞으로 이 계급이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계급조직을 갖추고 건설적인 미래상을 제시하면서 성숙한 노동계급으로 성장하는 길”이며, 또다른 길은 “협소한 노동조합주의에 몰두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분열되고 외부적으로는 고립되는” 길이다.

 

이 두 가지 갈래 길은 사실은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나타났으며, 미래의 순간순간마다 나타날 것이다. 그 갈래를 결국 선택할 주체는 한국 노동계급이며 그 선택 자체가 바로 계급을 고유의 모습으로 빚어내는 과정일 것이다.

 

이명박 시대가 시작되는 지금, 노동운동과 당 운동이 몰락과 쇄신의 갈래에 있는 지금, 우리는 지난 노동운동의 가장 빛나던 시대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선택을 위한 지혜와 결단력을 공급받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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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적 경제와 재생에너지 중심 사회를 향하여

 

<전진> 16호 (2007년 12월) 원고



 연대적 경제와 재생에너지 중심 사회를 향하여

양솔규 부산회원



필자는 요즘 이사할 집을 구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전세물량이 없는 속에서도, 가끔 깔끔하고 괜찮은 집이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집은 괜찮아도 ‘기름보일러’인 경우가 많다. ‘눈 딱 감고 2년만 살아봐?’ 하다가도 기름값이 오르는 걸 생각하면 그럴 자신이 없다.


2007년 겨울, 유가는 배럴당 97달러까지 치솟았다. 올해 초 60달러 선이었던 것을 상기해본다면 불과 1년 사이에 60%의 가격 상승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유가의 초고속 증가의 배후에는 초국적 금융투기자본이 도사리고 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아무리 수요의 증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가격상승폭을 설명하는 변수가 되기에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과 인도, 제3세계의 점증하는 수요 역시 무시할 수만은 없다. 중국과 인도의 에너지생산량 중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석탄에 비해서는 매우 낮은 편이다. 그러나 두 나라에서 석유의 수요는 엄청난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전세계적인 수요의 증가는 장기적인 석유가를 상승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러한 두 나라의 에너지수요의 급증은 다른 한편으로 심각한 환경문제를 야기한다.

이러나저러나, 기름값은 당분간 오를 것이고, 물가상승의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올 판국이다.


월드 워치(World Watch)의 2006년 판 ‘지구환경보고서’는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여 이례적으로 이슈가 아닌 ‘중국과 인도’라는 두 국가를 특집으로 구성했다. 만약 두 나라가 미국 수준의 자원 이용과 오염물질을 배출한다면 지구적 재난은 불을 보듯 뻔 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중국과 인도에게 이러한 자원 이용을 중단시킬 수 있을까? 현재, 중국의 석유자원 확보가 어려워진다면 세계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럴 경우 석탄 이용이 증가된다면 환경 리스크가 급속하게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2005년, 현대경제연구원)을 자본 측에서는 내놓고 있다.

초국적 금융자본이든, OPEC이든, 아니면 초국적 석유자본이든, 강대국이든, 이러한 자원 및 권력정보 독점체들이 사실을 아무리 왜곡하든 간에 분명한 사실은 화석연료의 사용은 ‘유한’하다는 점과, 수요와 공급 속에서의 가격 결정이 시장 속에서 이루어질 때, 힘없는 대다수 전세계 인민들에게는 재난과 빈궁만이 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2008년은 아무래도 석유와 석탄으로 대변되는 화석연료와 자본주의의 문제가 화두가 될 것이다. 바야흐로 ‘지구적 사회내부 관계 변혁’과 ‘지구적 사회-자연 관계 변혁’이 동시에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엘마 알트파터는 누구인가?


바로 이때, ‘생태 사회주의적(?)’ 시대인식을 담은 책 또는 ‘생태적 반자본주의 선언서’가 발간되었다.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정치학과 교수(현재는 은퇴)이자 비판적 사회과학 잡지 PROKLA의 편집위원인 엘마 알트파터(Elmar Altvater) 교수의 책, 『자본주의의 종말』(동녘, 2007)이 그것이다.1) 사실 엘마 알트파터는 세계적 명성에 비해서는 우리나라에 잘 소개되지 않았다. 1992년에 편역된 『위기와 조절』(창비)라는 조절이론적 접근 이론서에 논문 한 편이 번역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소셜리스트 레지스터(Socialist Register, 2002년호)에 실린 ‘성장 강박증(The Growth Obsession)’이라는 글이 신기섭 한겨레신문 기자의 블로그에 번역되어 있다.(http://blog.jinbo.net/marishin/)

1938년생인 그는 “소련에서의 환경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는 1968세대로서 정치경제학 이론에 영향을 미친 독일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현재 그는 ‘ATTAC’과 ‘세계사회포럼’의 자문단이기도 하다.

독일녹색당의 이론적 지주라고 알려진 알트파터의 책이 주목되는 또 다른 이유는, 자본주의 이외의 대안부재론(TINA; There is no alternative)이 운위되는 신자유주의 시대, 따라서, (영미식) 자본주의 vs (라인형) 자본주의만이 유일한 가능성으로서 주어지는 시대에 ‘자본주의의 종말’을, 그것도 라인형 자본주의인 ‘독일’의 학자가 논한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삼위 일치된 자본주의의 귀결, 지경학적 세계화와 지정학적 신제국주의


먼저, 알트파터는 ‘역사의 종말’을 논한다. 역사의 종말은 후쿠야마가 언급한 것으로서, “1989년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진 후 이제는 자본주의 생산 방식이 영원하고 무한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언술은 이미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물신적 특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실은 인류 역사는 두 가지 길로 향하고 있다고 한다. 첫째 길은 끝없는 자본주의의 길로서 또 다른 역사의 종말, 즉 파국이 놓여 있다. 두 번째 길은 확 트인 지대로서, 자본주의적 축적을 넘어서는 사회적 대안들이다. 필자와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두 번째 길이다.


“만약 역사가 계속되고, 수많은 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현재 실현되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정치적으로 계획되고…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최상의 세계로 부각된다면, 자본주의의 종말에 관해서도 숙고해 보아야 하며…검증해 보아야만 한다”(43쪽).


알트파터는 현실 자본주의의 사적 전유의 네 가지 형태를 제시한다. 첫 번째 전유 형태는 가치화이다. 원시적 축적 체제에 해당하는 이러한 가치화는 현재에도 일어난다. 두 번째 전유 형태는 절대적 잉여가치 창출이다. 세 번째 전유 형태는 상대적 잉여 가치 창출이다. 이 속에서 노동력과 (뿐만 아니라) 자연을 전유하는 효율은 새롭고 더 효율성이 높은 기술과 합리적인 조직을 통해 개선된다. 이러한 전유는 모든 시간적 공간적 경계를 넘어서려는 글로벌화 경향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며, 자본주의 지경학이 드러난다. 네 번째 형태는 지정학과 새로운 제국주의이다. 에너지 자원확보와 공급을 위해서는 글로벌 경쟁이라는 자본주의 지경학적 논리를 넘어 탈취, 절대적 잉여 가치의 확대, 글로벌 중심지로의 이전을 통한 전유 역시 요구된다. 이를 주도하는 것은 금융 자본이다.


알트파터가 보기에 현대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 사회 구성체’, ‘화석 에너지원’, ‘유럽 합리주의’가 결합된 삼위 일치된 체제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처음부터는 아니지만(나무) 불가피하게 화석 에너지(석탄)에 의존하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수백 명의 ‘에너지 노예들’과 결합해 노동 잠재력을 몇 배로 증가시켰다. 점차 자본주의는 자연의 적으로 변해갔다. ‘가능한 모든 세계들 중 최상의 세계’인 자본주의는 ‘역사의 종말(최종적 승리)’에 이르러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자신의 생활의 기반을 파괴시킨다. 이러한 삼위 일치된 자본주의는 경제와 사회적 과정의 ‘가속화’를 불러오며, 자연의 파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향한다. 시간 단축의 가속화는 공간을 압축하고 뛰어 넘는다. 질주논리적인 가속화 신드롬은 화석에너지원을 통해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 또한 유발시켰다. 화석 에너지가 없다면 애덤 스미스의 약속은 지켜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막스 베버와 좀바르트는 이를 두고 ‘자본주의와 화석 에너지 체제의 악마의 결혼식’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삼위 일치화 덕분에 인류는 놀랄 정도로 부를 증가시켰다. 이 체제는 성장을 물신화하는 체제이다. 산업혁명 이후 성장은 더 이상 노동력 공급과 토양에 의존하지 않고, 산업 노동의 생산성 증대에 의존하게 되었다. 포드주의-소비사회는 이러한 양상을 대표한다.

하지만 엄청난 불평등 역시 만들어냈다. 화석에너지 소비에 있어서도 미국과 서유럽은 다른 대륙을 능가하며, 온실 효과 가스 배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화석에너지원의 장점(시공간적 제약을 넘는다는 점) 중 하나는 화석 이차 에너지인 전기와 내연 기관의 연료를 통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대규모의 전기 생산뿐 아니라 소규모의 장난감, 주방용 기구, PC 등에 투입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이후 태양에너지원으로의 전환에 있어서도 고려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화석에너지원은 엄청난 단점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지구대기의 온실가스 문제를 야기하는 폐쇄된 에너지체제라는 점이다.


내부의 모순과 외부의 충격


알트파터는 페르낭 브로델의 생각에 주목한다. 브로델은 자본주의의 종말에 대한 조건으로 첫째, 내부의 모순의 첨예화와 둘째, 외부로부터의 격심한 충격, 셋째, 동시에 내부에서의 신빙성 있는 대안들이 생겨날 때 가능하다고 본다. 알트파터가 보기에 첫 번째는 바로 금융 세계화가 준비하고 있는 모순의 폭발이며, 두 번째는 유한한 화석에너지 공급의 파탄과 온실 가스로 인한 지구기후의 변화이다.


글로벌화된 자본주의에서 금융 분야는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된 후에도 미국은 달러 세뇨리지2)의 장점을 누린다. 금융위기 이후 많은 나라들은 달러 보유를 통해 외환보유고를 늘려왔다. 이는 자국의 소비를 억제하고 미국의 소비 지수를 높게 하며, 미국의 적자를 낮은 비용으로 메울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만일, 유로화를 통한 외환보유가 이루어지면, 다시 말해 외환보유의 다각화를 추구하게 되면 미국에게는 불리해질 수 있다. 현재 미국의 달러는 점차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3)

또한 금융 자본이 요구하는 수익률은 실물 경제가 지속적으로 뒷받침할 수 없다. 따라서 금융 시장의 위기 추세는 항시적이다. 세계적 규모에서 금융 자본이 요구하는 민영화, 탈규제, 자유화는 또한 신자유주의 지배의 도덕적 토대를 허물고 있다.


자본주의의 외부적 충격은 화석 에너지원의 고갈과 온실가스로 인한 지구기후 변화에 기인한다. 이러한 화석 에너지원의 고갈로 인한 자원 확보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역사의 종말’ 이후 전쟁이 점차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자원과 자원의 수송지역을 둘러싼 갈등은 점차 확대될 것이다. 군사적 수단을 이용한 석유 소비의 한계를 늘리려는 ‘석유 제국주의’의 시도는 테러리즘을 불러온다. 공급 카르텔인 OPEC과 수요 카르텔인 메이저 석유 회사들은 석유 매장량을 부풀리고, 기후학자들은 에너지소비와 지구 온난화의 연관성을 축소시키며, 선진국들은 온실 가스 배출 기준을 낮추는 등의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결국 외부적 충격의 크기를 증가시킬 뿐이다.


연대적 경제와 지속가능한 재생에너지 체계


따라서 우리는 페르낭 브로델이 얘기하는 세 번째 조건을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알트파터는 연대 경제와 지속가능한 태양에너지 체계만이 신빙성 있는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한 사회는 오직 혁명적 과정 속에서만 자본주의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사회 형태를 극복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한 대안들을 숙고하고 운동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종말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현실 사회주의와는 달리 역사적인 파열을 겪으면서 자체적으로 붕괴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안을 만드는 사회운동은 자본주의의 시장이 내세우는 행동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본주의 질서는 무엇보다 ‘등가성’에 기초한다. ‘상호성’은 비록 등가성 원리와는 차이가 나나 모순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상호성’은 다양한 결합을 생각해볼 수 있다. 등가성의 안전 장치가 될 수도 있지만 부패와 결합될 수도 있다. ‘재분배’ 원리를 캘리니코스는 글로벌 시대에도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저자는 이 원리는 소규모 사회에 적합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알트파터는 등가성과 상호성의 원리에 대립하는 ‘연대의식’과 ‘공평성’의 원리를 내세운다.

이미 에밀 뒤르켕은 ‘유기적 연대 의식’ 속에서 집단 의식과 사회적 결속이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연대 의식들은 모두 도덕적인데, 노동운동의 국제적 연대 의식도 도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E.P 톰슨 역시 시장 경제 외부의 ‘도덕 경제’라는 개념을 말한다.


“연대적 경제는 사회운동이 시간과 공간을 탈환하려고 노력하면서 이루어지는 성과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공간-시간의 절멸을 통한 ‘탈영토적 운동’에 맞서 사회운동은 어떤 의미에서 영토운동이 된다. 이전의 갈등의 장은 노동-자본-국가라는 말하자면 삼 주체의 코포라티즘적 관계였던 반면에 ‘사회 영토적 대결’에서는 전혀 사정이 다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첫째 테마들이 이전과는 달리 국민 국가와 관련되어 있지 않으며, 둘째, 정규적 계급 관계 밖에서 대결이 일어나기 때문이며, 셋째, 대결의 새로운 형태, 즉 중앙집권적이 아닌 차이 속의 동일성 추구가 일어난다. 넷째, 새로운 사회 주체들도 개혁과 혁명의 변증법에 따라 움직인다. 바꿔 묻자면, ‘연대의식인가, 야만인가?’ 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러한 야만의 목록에는 화석에너지를 둘러싼 강대국간의 전쟁이라는 절멸의 계기까지 포함된다. 야만은 오직 지속 가능한 사회로 이행함으로써만 물리칠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다섯째, 새로운 것의 자율적인 공간과 새로운 시간 리듬을 획득하고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섯째, 자본주의적 여건 내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숙고만으로는 부족하고, 이를 넘어서야 한다.


독일이나 브라질 등에 있는 협동조합, 공익재단, 자유 교환시장, 소액 신용기관과 같은 제3 섹터라 불리는 분야들이 연대적 경제의 일부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 지역을 넘어서 연대적 경제의 주도권은 국가적, 세계적 차원에서 보완하고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정부와 국가적 차원만이 아니라 글로벌 금융 시장에 대한 개혁 역시 필요하다. 이는 “지역, 지방, 국가 경제와 세계시장의 기관들을 새로운 형태로 결합”하는 것이다. 연대적 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영역들을 연결시키는 것과 집단적 조직 형태와 행동 전략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양산하는 탈취 전략에 맞서 영토를 재탈환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연대적 경제는 공간(재탈환된 영토)을 통해 태양에너지 사회와 연관된다. 그런데, 재생 가능 에너지와 에너지 소비 절약이 자본주의와 조화를 이룬다 할지라도(마치 독일처럼), 그 장점을 드러낼 수 없다. 재생 에너지는 더디며 가속화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재생 가능 에너지 체제로의 이행의 길 중 선택 가능한 길은 재생 가능 에너지를 투입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 화석 에너지원, 유럽 합리주의의 삼위일체화를 저지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태양에너지와 화석에너지 사이의 방화벽이 무너지고, 열린 에너지 체제가 만들어진다. 이제 생산과 소비, 즉 경제는 태양에너지의 변환 체제처럼 조직되어야만 한다. 또한 에너지 체제의 변경은 생산 방식뿐만 아니라 생활 방식의 변화도 요구한다. 또한 에너지 노예의 수를 줄이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러한 과제는 단기간 내에 이행될 수 없는 과제이기는 하지만, 곧 닥쳐올 석유 채굴의 정점(피크 오일; peak oil)을 방향 전환의 기회로 이용해야만 한다.


저자의 논리적 주장을 요약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300쪽이 넘는 분량에 게다가 압축적인 내용은 읽어나가기에 쉽지만은 않다. 더군다나 오타와 번역상의 문제까지 겹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책 내에는 수많은 역사적, 이론적, 실천적 쟁점들이 섞여 있고, 검토해봐야 할 내용들이 무궁무진하다. 권력의 문제부터, 국가의 문제, 발전과 생태, 민주주의의 문제까지.

저자에게 글로벌 금융자본주의는 이전의 자본주의와는 단절적인 시기로 규정하는 듯하다. 저자는 현행 자본주의의 유지는 곧 파국으로 끝난다고 단정 지으면서도,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우울한 파국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희망에 찬 새 지평의 시작, ‘대전환’의 계기로 그려나가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람시의 전망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지평의 중심에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이 존재한다. 저자에게 사회운동은 이전의 포드주의-사회 코포라티즘적 체제내화된 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의 종말’을 넘어선 근본 변혁을 꿈꾸는 운동으로 설정된다. 저자는 ‘사회주의’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탈자본주의의 세계, 즉 사회주의의 체제 구성 요소를 생각할 때 우리는 재생 가능 에너지체계를 필수적으로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만약 이러한 지구멸렬을 피하는 방법으로서 사회주의가 고려된다면, 이는 생태 재앙의 시급성으로 인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것이다.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오늘 당장, 아니면 아무리 늦어도 내일은 화석 에너지 체제에 대한 대안들을 만들어 내는 데 착수해야만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모하비 사막에 있는 세계 최대의 태양광 발전소인 Kramer Junction solar power plant

엘마 알트파터, 『자본주의의 종말』, 동녘, 2007

엘마 알트파터

월드 워치(World Watch),『지구환경보고서 2006』

덴마크 미델그룬덴 앞바다 풍력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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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감은 굶주림의 숙명을 이긴다『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연대감은 굶주림의 숙명을 이긴다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소통> 제2호(2007년 11․12월호) 서평글 (2007.11.6)

노동사회교육원 졸업생 양솔규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Jean Zigler) 지음, 갈라파고스, 2007년, 201쪽


우리는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을 통해 만들어진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무한한 생산력의 발전을 토대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정체를 토대로 하는 이전 사회와 다르다고 배워왔다. 참으로 자본주의의 무한한 생산력은 물질적 궁핍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보였다. 맑스 역시도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이 곧 해방의 조건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러한 풍요로운 전지구적 자본주의 아래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2005년 현재, 10세 미만의 어린이가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으며, 비타민 A 부족으로 인한 시력 상실이 3분에 1명 꼴로, 한 해 700만 명에게 일어난다고 한다. 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 5,000만 명이 심각한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고 한다.

현재, 지구에는 1분에 250명이 태어나는데 그 중 197명이 제3세계에서 태어난다. 그 중 많은 수는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에 묻히게 된다. 프랑스 철학자 레지 드브레는 이를 “나면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힌 아이들”이라고 표현한다.


반대로, 전 세계에서 수확되는 곡물의 4분의 1이 부유한 나라의 소들이 먹고 있다. 굶어죽은 아이들과 살찐 소라는 이러한 끔찍한 이분법이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살찐 소를 비롯한 육류소비는 주로 선진국에서 이루어지는데, 영양과잉 상태의 선진국 국민들은 살을 빼기 위해 다시 다이어트를 시작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진다. 우리가 채식주의자들의 주장의 타당성을 반박하기 힘든 것은 이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아의 참상, 그리고 기아를 ‘구조적’으로 양산하고 있는 사회적 구조에 대한 고발을 충실하게 하고 있는 책이 바로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인 장 지글러(Jean Zigler)가 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이다. 그는 1999년까지 스위스 연방의회의원(사회당)을 지냈으며, 실증적인 사회학자로 현재는 제네바 대학 교수이기도 하다.


초국적 식량자본은 과잉생산과 가격덤핑으로 제3세계의 식량 가격과 생산을 교란시킨다. 또한 초국적 식량자본은 시카고 곡물거래소를 통해 전세계 식량의 유통을 장악함으로써 이윤과 기아를 동시에 극대화(?)한다. 또한 초국적 식량자본이 생산하는 식량은 그 자체가 초국적 금융자본의 투기대상이기도 하다. 카지노 자본주의는 ‘밥’을 미끼로 번성한다.

부유한 나라들은 가격보장이라는 이름으로 식량을 대량으로 폐기처분하거나 농산물 생산을 제한하기도 한다.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세계225명의 대재산가의 총자산은 1조 달러가 넘는다. 이것은 전세계 가난한 자들의 47%(25억 명)의 연간수입과 맞먹는 수치이다. 빌 게이츠의 자산은 가난한 미국인 1억 600만 명의 총자산과 맞먹는다.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기아의 책임은 초국적 기업과 제국주의, 부패한 정치집단 및 독재자에게 있으며, 가장 큰 피해자는 어린이와 민주주의이다.

장 지글러는 또한, 북한의 기아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1995년 이후 기아로 인해 북한에서 죽은 인구는 200만 명에 달하는데 이 중 대다수가 어린이들이라고 한다. 장 지글러는 미국 등의 봉쇄 정책의 야만성에 대해서도 언급하지만, 김일성과 김정일의 ‘기아’를 무기로 한 강제노동수용소와 식량원조를 이용한 군사화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운다.

살인적인 세계 경제구조는 ‘구조적 기아’를 양산하고 있다.

이러한 ‘기아’를 ‘산아제한’의 수단으로 여기는 ‘멜서스주의자’들이 아직도 활개를 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기아’를 통해 인구가 감소함으로써 자연적 법칙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주장하는 것은 진실을 회피하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84년 기준으로 FAO의 평가에 따르면, 84년의 식량생산을 가지고도, 120억 명을 하루 2,400-2,700칼로리를 공급하며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한다. 하물며 2007년의 생산량으로는 몇 백억 명을 먹여 살릴 수 있지 않겠는가!


장 지글러는 1970년 칠레 인민전선의 첫 번째 행동강령을 언급한다. 15세 이하 모든 어린이에게 하루 0.5리터의 분유를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강령은, 그러나 칠레의 커피와 우유의 생산과 유통을 장악하고 있던 초국적 식품자본 ‘네슬레’는 아옌데 정부의 정상적인 가격하의 분유 구입 요구를 거부한다. 더구나 미국정부와 다국적기업, CIA 역시도 이를 조장한다. 1973년 결국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에 의해 아옌데 인민전선 정부는 무너지고, 아이들의 영양상태는 인민전선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


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Burkina Faso)라는 나라가 있다. 83년 젊은 군인 네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킨다. 대통령은 토마스 상카라 대위이며, 그의 동지들은 블레이즈 콤파오레, 앙리 총고, 장 밥티스테 링가이 등이다. 부르키나파소는 60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나라인데, 상카라가 집권한 당시, 절대 다수가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다. 상카라는 자주관리정책, 인두세 폐지, 개간 가능한 토지 국유화 등을 하면서 4년 만에 자급자족과 민주적 운영이 가능하게 부르키나파소를 변모시켰다. 하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프랑스와 코트디부아르, 가봉, 토고 등의 프랑스 꼭두각시 정권들은 상카라의 동지였던 블레이즈 콤파오레를 부추겨 상카라와 그의 동지들을 제거한다. 결국 부르키나파소는 이전의 사회로 돌아가고 만다.

상카라는 저자인 장 지글러와의 만남 속에서 39세까지 살다 간 혁명가 체 게바라를 언급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비관했다고 한다. 결국 상카라는 그의 우려처럼 39세의 나이를 넘기지 못하고 죽고 만다.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전쟁의 이면에는 제국주의와 초국적 자본이 벌이는 자원전쟁(석유, 다이아몬드, 곡물 투기 등)이 있으며, 이러한 전쟁은 다시 기아를 급증시킨다. 또한 아마존 등의 환경파괴는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사헬 지대의 사막화를 확대시키면서 경작지의 면적을 줄인다. 더군다나 중국, 인도 등의 산업화 가세로 인한 에너지 수요 폭증은 이러한 현상을 강화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결국, 에너지 위기와 지구 온난화, 중국, 인도 등의 산업화와 전세계 경제의 요동, 전지구적 ‘슬럼’의 확대와 ‘기아’의 심화,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장 지글러는 하지만 이러한 ‘기아’의 문제를 해결불가능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기아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각국이 자급자족 경제를 스스로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인적인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엎어야 한다.

장 지글러는 인도적 지원이 효율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FAO와 WFP가 지원하는 대상국이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구호단체는 크메르 루주 등 학살정권을 지원한 아픈 과오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원조보다는 개혁이 먼저라고 주장한다. 혁명적 행동은 인도적 구호를 뛰어넘는다고 주장한다. 그 과정에서 인프라 정비를 해야 한다.


기아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장 지글러는 이윤지상주의, 시장만능주의, 신자유주의와의 전면전을 선포하고, 기아에 대한 투쟁을 가로막는 행위자로 WB, IMF, WTO를 지목한다. “잘못된 것 안에 올바른 삶은 없다”는 아도르노의 말을 인용하며, 장 지글러는 말한다.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에 행복의 영토는 없다”고. “배고픔의 숙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부족한 것은 연대감이며, 국제공동체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하는 진짜 의지이다”라고.


따라서, “식량권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인권으로서, (망명자의 피보호권처럼) 새로운 국제 법규로서 시급히 도입되어야 한다”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추동력은 유약한 UN에서 찾을 수 없다고 본다. 희망은 사회운동, 비정부조직, 노동조합 등 전지구적 민간단체에 있으며, 이들의 “연대만이 워싱턴 합의와 인권 사이의 대립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짧은 분량(201쪽)에다가, 아들에게 설명하는 방식의 쉬운 문체로 되어 있다. 하지만, 중요한 지적은 모두 담고 있다. 아울러, 『슬럼, 지구를 뒤덮다』(창비, 마이크 데이비스),『초국적자본, 세계를 삼키다』(창비, 존 매들리),『세계의 빈곤, 누구의 책임인가?』(이후, 제레미 시브룩)을 본 책과 함께 읽으면, 더 깊은 이해와 풍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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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슬럼과 마주친 지구-<슬럼, 지구를 뒤덮다> 마이크 데이비스

2007년 8월 20일

노동사회교육원 회보 <연대와 소통> 창간호 원고

 

 

오늘, 슬럼과 마주친 지구

 

양솔규(노동사회교육원 회원)

 

 

<슬럼, 지구를 뒤덮다>, 마이크 데이비스, 돌베개, 2007년 7월

 

창원 터널을 빠져나와 남산동으로 향하는 길에 우리를 반기는 것은 높게 치솟은 아파트들이다. 그것도 <통일>이니 <두산>이니 하는 사원기숙사가 아니라, 새로 지어진 상업적인 아파트들이다. 창원 도시가 외곽으로 확장되고 있고 주거공간은 상품이 되었다. 도시는 행복해지는 것일까?

창원을 처음 봤을 때 이 도시는 너무 ‘행복’해 보였다. 길가에 심어진 푸른 잔디와 2층 빨간 벽돌 양옥집들이 평지에 가지런히 정렬한 모습은 공업도시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차라리 미국 영화에 나오는 중산층들의 마을 모습과 흡사했다. 또한, 군데군데 있는 공원들의 잔디와 분수대, 그리고 ‘평지’는 서울이나 부산과는 질적으로 다른 행복을 계획하는 도시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그러하기에 어쩌면 “슬럼”이라는 단어가 ‘창원’ 아니,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한국의 도시들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2003년 UN 인간정주위원회에 따르면, 한국은 슬럼 인구수로는 세계 12위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눈에 띄지 않는 셋방살이”가 새로운 슬럼을 형성하고 있다. 판잣집이 아니라고 슬럼이 아닌 게 아니다. 홍콩이나 도쿄, 서울과 같은 글로벌 메가도시(Mega City)에도 슬럼은 곳곳에 형성되고 있다.

우리에게는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창비, 1994)로 잘 알려진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 가 쓴 책 <슬럼, 지구를 뒤덮다>(원제: Planet of Slums)가 번역 출간되었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1946년에 태어났다. 정육점 직원, 트럭 운전수(그 유명한 팀스터 노조) 등으로 일했으며, 미국 신좌파 학생 조직인 SDS(민주사회를위한학생연맹) 등에서도 활동했다. 영국의 뉴레프트리뷰(신좌파평론) 편집진으로 일하며, 맑스주의적 환경주의, 도시사회학, 역사학 등을 공부하는 학자이다.

마이크 데이비스가 유명한 이유는, 단지 현장활동가와 연구자의 이력을 거치면서 형성된 이론과 실천의 접합 때문만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대단히 성실하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방대한 각주와 자료 목록은 그의 지적 성실함을 반영해 준다.

 

슬럼(slum)은 간단히 말하면 도시빈민 주택지구를 말한다. 우리로 치면, 달동네, 판자촌이라고 보면 되겠다. 옛날 서울의 상계동, 사당동, 봉천동 등에 거대하게 형성된 동네를 연상하면 된다. 그런데, 슬럼이 어쨌다는 것일까? 이 책의 부제는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이후 슬럼은 세계 도시의 ‘대세’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2007년 혹은 2008년은 세계사적인 시각에서 보면 획기적인 분수령이 되는 시기이다. 바로, 전 세계 인구 중 농촌 인구보다 도시 인구가 더 많아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도 20세기는 거대한 농촌인구를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나 인도, 중국, 남미, 동남아 등 수많은 ‘남반구’의 농촌은 거대한 대지의 크기만큼이나 압도적인 세계 인구를 ‘논’과 ‘밭’에 ‘저장’하고 있었다. 캘리니코스는 데이비스를 인용하면서, 자본주의 출현 이후 1950년 전까지 진행된 첫 번째의 도시화의 물결은 북반구(서구)에 주로 해당된 반면, 현재의 2차 ‘도시화’는 남반구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문제는 20세기 전체에 걸쳐 도시화의 속도가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도시화의 속도가 빨라진 것은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20세기 전반기 남반구를 장악하고 있던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 인민들이 도시로 몰려드는 것을 두려워했고, 온갖 장치를 이용해 도시 진입을 봉쇄했다. 그러나 2차 도시화는 탈식민지 시대, 신자유주의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힘들고 고된 농민들이 일자리가 많은 도시로 몰려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도시가 그들의 미래를 보장해준 것일까? 아니다. 마이크 데이비스에 의하면, “‘과잉도시화’의 추동력은 빈곤 재생산이지 일자리 공급이 아니다……도시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힘은…현저히 약화되었지만, 시골에서 사람들을 ‘밀어내는’ 전 지구적 동력들은 도시화를 지속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농촌에서 살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도시로 가는 것이다. 도시화는 곧 산업화라는 등식은 ‘2차 도시화’의 물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들이 정착하는 곳은 전 세계 도시의 빈민촌, 즉 ‘슬럼’이다. 슬럼을 부르는 명칭은 나라에 따라, 도시마다 다양하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 인도 뭄바이의 ‘촐’, 터키 이스탄불의 ‘게체콘두’, 미얀마 양곤의 ‘뉴필즈’ 등이 그것이다. 우리에게는 ‘달동네’ 라는 용어가 이에 해당될까? 빈민들이 도시 내에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는 곳은 더럽고, 불편하고, 토양과 식수는 오염되어 있고, 자연재해에 노출되어 있는 그런 곳밖에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빈민 지역도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안전하지는 못하다. 권력을 쥔 사람들에게 ‘가난한 자들의 저항의 사령부’가 될 지도 모르는 슬럼은 그들에게 더럽고, 위협적이다. 올림픽이나, 미인대회, 월드컵 등 국제행사를 앞두고 그들은 슬럼을 쓸어버린다. 또는 반란의 씨앗을 없앤다는 이유로, 개발 독점권을 얻기 위한 이유로 쓸어버리기도 한다. 불도저가 밀고나간 그 자리엔 중산층을 위한 주거단지가 세워진다. 한국의 88년 올림픽을 앞둔 철거는 ‘세계 슬럼 퇴거 사건사’에 2위로 기록되어 있다. 퇴거주민 수는 80만 명에 달했다. 베이징은 2008년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의 전철을 밟고 있다. 현재 진행형으로 말이다.

 

 

슬럼은 재난과 동거한다. 쓰나미가 몰려왔을 때, 빈민과 중산층은 동일한 피해를 입지 않았다. 위험요소의 노출 정도와 건물의 견고함 정도는 계급에 따라 다르다. 지진도 공평하게 작용하지는 않는다. 층진(層震)이라는 신조어도 그래서 생겨났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슬럼에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것은 ‘화재’이다. 특히 개발업자 등이 인위적으로 일으키는 방화를 ‘뜨거운 철거’라고 부른다. “들쥐나 고양이를 등유에 흠뻑 적신 후에 불을 붙여 말썽 많은 슬럼가에 풀어놓는” 방식이다. 방화는 개발업자에게 가장 손쉬운 해결방법이다.

 

신자유주의의 대리기구인 IMF와 세계은행이 추진하는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강요된 민영화는 제3세계의 빈민들에게 재앙으로 다가왔다. 교통의 사유화는 교통요금의 폭등을 가져왔고, 빈민들은 그나마 빠듯한 수입을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교통요금에 부담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배변권(排便權) 및 물 공급과 관련한 것이다.

북경의 어느 지역의 경우 화장실 하나를 6,000명 이상이 이용하기도 한다. 콩고의 킨샤사는 하수처리 시설이 전혀 없고, 나이지리아 나이로비에는 ‘날아다니는 화장실’이나 ‘스커드 미사일’에 의존하는데 이는 배설물을 담은 비닐봉지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들은 여성들에게는 더욱 위협적인데, 배변을 위해 밤을 기다린 여성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성추행과 강간이다. 도시 배변이라는 ‘사업’을 초국적 자본과 신자유주의 기구들은 ‘성장 산업’으로 주목하고 있다. 가나의 유료 공중화장실은 90년대 후반 민영화되었고,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다. 도시 슬럼에는 그 밖에도 매매혈(賣買血)과 아동 매춘, 아동 강제노동, 장기 판매 등이 비공식적 경제의 일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깨끗한 물은 가장 저렴한 약이자 가장 중요한 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HO에 따르면, 2025년에 500만의 제3세계 아이들이 물을 구하지 못해 질병으로 죽어갈 것으로 예측했다. 이런 점에서 최근 한국의 운동사회 내에서 ‘물’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는 것은 시류에 적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비참한 빈곤과 불평등을 가속화한 것은 80-90년대 진행된 국가의 후퇴와 공공부문 지출 축소 및 신자유주의 정책인 것은 명백하다. 농촌은 몰락하고, 실업률은 상승하며, 이에 따라 여성 및 아동들이 비공식 또는 불안정한 노동에 투입되었고, 보건 서비스는 민영화되면서 이용권을 상실했다. 중국의 국영기업이 민영화되면서 생긴 엄청난 수의 면직노동자(laid-off)와 호구에는 잡히지 않는 떠돌아다니는 민공조(民工潮)들의 수가 몇 억이다. 중국과 인도 역시 신자유주의 정책이 휩쓸고 있다. 단기적으로 먹고 살기 위해 선택하는 길은 장기적으로는 계급적 지위를 영속화하는 길이 되었다. 이에 반IMF 폭동 또는 총파업 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베네주엘라 카라카스에서 89년 일어난 폭동, ‘카라카소(Caracazo)’ 동안 최소 400명이 목숨을 잃었다.

 

1990년대에는 거대한 제2세계(현실 사회주의 국가들)가 자본주의로 편입됨에 따라 빈곤의 규모도 급증했다. UN에 따르면 1990년대 초 이러한 국가들에서 극빈층 인구는 1,400만 명에서 1억 6,800만 명으로 높아졌다. 푸틴 정부 하 러시아의 옛 아파트단지는 슬럼 상태가 되었고, 이는 “2차 세계대전 레닌그라드가 포위당할 당시의 상황”을 환기시킨다고 한다.

이제 도시는 “성장과 번영의 중심이 된 것이 아니라, 미숙련, 무방비, 저임금의 비공식 서비스업 및 무역에 종사하는 잉여 인간의 처리장”이 되었다. 곧 수동적 프롤레타리아화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비공식 부문에서 ‘활동’ 실업 상태로 존재하는 것뿐이다. ‘활동’ 실업이란 불완전고용과 위장 실업을 말한다. 그러나 증가하는 슬럼가에서 생계를 위해 온 가족이 나서면서, “‘비공식 부문’은 성장하지만 비공식 부문 내에서의 소득은 감소”하고 만다.

 

도시 슬럼은 이제 펜타곤과 전쟁 연구소 등 세계적인 공안기관들의 타깃이 되었다. 이들은 MOUT(도시화 지형에서의 군사작전) 개념을 정립하면서, 신세계질서의 가장 위협적인 곳으로 거대슬럼을 꼽는다. 도시 빈민과의 저강도 세계전쟁을 위한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전자(서구 도시)는 ‘방어’해야 할 ‘조국’의 도시들이고, 후자(제3세계 슬럼)는 ‘자유’ 세계 전체의 건강과 번영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악당들’을 지원하는 소굴”이다.

 

마이크 데이비스의 이러한 슬럼 분석은 다소 패배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배변권조차 보장받기 위해 목숨을 감내해야 하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도대체 저항은 어떻게 시작될 수 있고, 누가 저항할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지금 준비중인 이 책의 속편에서 슬럼 기반 투쟁의 역사와 미래를 연구할 것이라고 한다. 혹 여기에는 88년 상계동과 사당동 투쟁이 다뤄질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저자는 “인간 연대의 미래는 도시 빈민이 전지구적 자본주의 내에서의 최악의 주변성을 전투적으로 거부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물론 도시 빈민과 슬럼의 주민, 비정규노동자 및 실업자 등이 반드시 겹치는 동일한 집단은 아닐 테지만 상당부분 겹치거나, 겹쳐지는 ‘추세’라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세계 슬럼에는 획일적 주체나 일방적 경향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각양각색의 무수한 저항운동이 존재”한다. 이미 지배자들은(대표적으로 랜드 연구소) 이미 이를 간파하면서 세계 빈곤의 도시화가 ‘반란의 도시화’의 원인이라고 단정한다. ‘잉여인간’, ‘활동 실업’, ‘퇴축’과 같은 저자의 매력적인 신개념 속에서 저항의 실마리보다는 비참한 파국적 결과가 더 많이 느껴지지만 말이다.

 

20세기는 맑스주의의 예언과는 달리 도시혁명이 아닌, 수많은 농촌의 인민들을 근거로 한 민족해방투쟁과 사회주의를 가져왔지만(마치 중국혁명기 구추백, 이립삼의 노선처럼), 21세기의 판도는 이와는 다를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계급적 구성도, 지정학적 구성도 달라졌기 때문이며, 마이크 데이비스에 의하면 시장 안의 진정한 유목민(비공식 경제의 빈곤한 ‘수동적 프롤레타리아트’)이 급속하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제 어쩌면 지배층들이 예상하는 데로 ‘좌절과 분노’에 휩싸인 ‘비대칭 전투’가 예상 전투 지역인 카불, 라고스, 킨샤사, 마닐라, 북경, 뭄바이, 리우데자네이루, 모스크바, 방콕, 자카르타 등에서 벌어질 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전투는 시작되었을 지도!

아직 저자가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은 슬럼이라는 지정학 속에서의 전투상과 전력 분석은 저자의 차기작에 맡겨 두고, 일단, 우리는 우리가 전지구적 지정학 속에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일단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저자의 말대로 “슬럼이 대세”이기 때문이다. 반빈곤 투쟁과 반신자유주의 투쟁, 반자본주의 투쟁이 신자유주의 빈곤화라는 직조 속에서 교차하고 있다. 따라서, 투쟁의 지평이 넓어지고 있으며, 또한 투쟁의 성격이 그야말로 국제주의적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이 책을 통해 느껴보는 것도 굉장한 경험이 될 것이다. 마치 지구를 한바퀴 돌면서 ‘슬럼 관광’을 하게 만드는 이 책은 동시에 미래의 국제주의적 투쟁을 예행연습하는 효과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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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원2007.6]버스 노동자의 새벽을 위해

-노동사회교육원 2007년 6월 회보 양솔규 글(2007.6.8)


버스 노동자의 새벽을 위해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 / 안건모 / 보리 / 2006년 / 8500원, 310쪽

 

내가 버스운전사 안건모씨를 처음 본 것은 김용만, 김국진이 진행하던 MBC 느낌표 ‘칭찬합시다’ 프로에서였다. 그때가 언제였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린 학생들에게도 꽤 인기가 있던 ‘기사 아저씨’의 모습이 생각이 난다.

그 뒤로 언제 다시 안건모씨를 보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한겨레신문에 실리는 글은 꽤 재미있게 읽었던 거 같다. 불규칙하고 바쁜 생활 때문에 꼼꼼히 챙겨 읽지는 못했지만, 버스운전을 하면서 느끼는 소소한 일상을 재미있게 전달해 준다는 느낌은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나는 버스 관련 공부를 하게 되었고 마침 떠오른 것이 안건모씨가 지은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였다.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인 6월 1일, 나는 KTX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로 향했다. 열차 안에서 쏟아지는 졸음을 지우기 위해 안건모의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를 다시 붙잡았다. 한참 재미있게 읽고 있자, 열차는 벌써 서울역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서둘러 짐을 챙겨 개찰구를 나오고 있는데, 내 옆에 ‘안건모’씨가 있는 것이 아닌가? 여행을 다녀오는지 가방은 큼지막하게 부풀어 올라 있고, 특유의 뿔테 안경에, 개량한복 비슷한 윗옷, 튼튼해 보이는 운동화(등산화)를 신었다. 운동권스러운 실용적인 ‘패션’인 것으로 봐서는 맞는 거 같기도 한데. ‘에이, 설마 이런 우연이 있을라구’ 하다가 ‘밑져야 본전인데, 말이나 걸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안건모씨 아니세요?”

“맞는데요. 누구시죠? 어디서 본 듯한”

안건모씨는 부산에서 전날 시청자미디어센터 주최 강연을 마치고 하룻밤 묵고 KTX를 타고 올라오는 길이었다. 마침 나 역시 그 열차를 탄 것이었다.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


제1장에는 시내버스, 알고나 탑시다 라는 주제로, 손님들이 시내버스 운전사나, 시내버스 체계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을 여러 가지 일화를 섞어서 소개하고 있다.

버스 운전사들이 싫어하는 유형의 손님들, 졸음운전에 얽힌 사연들(교대제), 시간에 쫓겨 안절부절하는 손님들과 기사, 불친절한 기사와 그럴 수밖에 없는 시내버스의 사정. 돈 내는 여러 가지 유형의 손님들, 잔돈 거슬러가지 않는 손님들과 공돈버는 회사 등이 소개되어 있다.

제2장의 제목은 시내버스를 타는 사람들이다. 정말 시내버스를 타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기사들과 연관되는 우리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버스일터 모임의 고문변호사였던 정연순 변호사, 한화그룹 해고 노동자 명님, 상희, 미정, 할머니와 같이 사는 정희씨 등. 그 중 안건모의 단골손님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는데, 아무래도 이런 ‘안건모의 단골들’이 있었기에 그가 MBC 칭찬합시다에 출연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단골은 반가운 단골도 있지만, 보기 싫은 단골도 있단다. 술취한 사람, 돈 안 내는 사람 등. 이런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한마디 외침은 ‘또라이’다. 하지만 달님이나 현지 같은 안건모 팬클럽도 있는 듯 하다. 회사 차 번호 전체를 외우고 안건모의 차 1774호를 3,40분씩 기다리는 팬들 말이다. 이 책에 나온 사람들의 뒷날 후기까지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안건모의 ‘팬관리’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는 듯하다. 그래서 재미있고 더 마음이 따뜻해진다.

3장 삶이란 곧 싸움이다와 4장 시내버스를 정년까지는 본격적으로 시내버스의 문제점들에 대해 ‘참여관찰’한 장편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사업주와 어용 노동조합이 매년 차고치는 고스톱 비슷한 임금인상 투쟁과 요금인상, 그리고 파업. 이 신기한 ‘교감’에 대해 안건모와 버스일터는 용감하게 ‘들이’ 댄다. 사고가 나서 ‘자부담’을 요구하는 사측에 맞서, 구상권 청구할 수 없다는 단협 조항을 들이 대거나, 취업규칙을 어겼다는 사측에 맞서 근로기준법을 들이 댄다. 연월차 적치하지 않는 사측에 맞서고, 이렇게 10년의 ‘바위치기’를 통해 버스 현장도 서서히 변화된다. 급기야 버스 현장 최초로(?) 조합장 선거에 ‘민주파’를 출마시켜 선거다운 선거를 해보기도 하고 (물론 낙선했지만) 8억 가까이 되는 상여금을 꿀꺽하려는 사측에 맞서 일인시위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측도 만만치 않다. 징계와 해고 위협, 블랙리스트 심지어 테러로 맞선다. 하나씩 떠나가는 동료들(그래봤자 레미콘, 택시, 마을버스, 관광버스 등 ‘발통’ 노동시장이 한정되어 있지만), 힘빠지는 사람들. 익숙한 풍경들이다.


재미있는 내용으로는 버스 기사들의 “삥땅”이 있다. 워낙에 저임금이다 보니 오래전부터 버스 사측과 개별 노동자들은 ‘삥땅’이라는 관행을 유지해 왔단다. 임금은 박하게 줄테니 알아서 ‘돈통’에서 빼가라는 것이다. 버스 노동자들의 저임금이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안건모에 따르면 이것은 하나의 덫이기도 했단다. 항상 삥땅은 해고, 징계의 위협이 되어 돌아왔고, 노동자들은 순종했다. 몇 백원 커피값 벌려는 노동자에게 상여금, 밀린 임금, 퇴직금을 모두 포기하게 만드는 ‘건수’이기도 했다. 포기할래? 경찰서갈래?

교통카드 등이 만들어지면서 이러한 ‘삥땅’의 문화가 사라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 전에 CCTV가 만들어지면서 사라졌다는 것이 맞을 듯하다. 흩어져 홀로 노동하는 노동과정의 특성상 이러한 감시시스템은 정말 사측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는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CCTV는 결국 노동자에게는 배차간격 무시와 난폭운전을 유도한다.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의 글들은 한겨레신문과 작은책에 실린 글, 전태일문학상에 출품했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무엇보다 쉬운 글들이 ‘손님’들을 맞이한다. 모두가 한 번씩 경험해 봤고, 모두가 한 번씩은 생각해봤음직한 얘기들을 조리있게 설명한다. 알라딘에 가면 이 책에 대한 서평도 상당히 많이 나오는데, 부분적으로는 ‘시내버스’가 그처럼 우리 삶과 밀접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산에는 지하철이 있어 버스의 수송분담률이 낮기는 하지만 여전히 버스는 서민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운송수단 중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버스 노동자들의 노동과 서비스가 직접적으로 우리 삶에 밀접하기도 하다. 하지만 여태껏 나는 버스 노동자들에 대해 아무 것도 알고 있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노동자는 하나라고 말은 하지만, 그저 그런 미조직 노동자로 무의식 속에 방치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너도나도 하나씩 자가용을 끌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버스 노동자의 새로운 출발에 금속이나 여타 노동자들이 도와줄 기회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버스 기사의 얼굴을 유심하게 보게 되었다. 내가 운행지를 물을 때도, 거스름돈을 받을 때도, 앞차가 꾸물거릴 때도, 그의 표정을 살피며 책 속의 한구절 한구절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6월 초, 마창에서는 버스 파업이 있었나보다. 또 7월부터는 마산창원도 버스 준공영제를 실시한다고 한다. 또한 변형근로제의 일종인 Shift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되풀이되는 파업-요금인상과 버스 준공영제, 그리고 일련의 제도변화는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단다. 전면 공영제와 공공성 강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사관계의 무법천지를 바꾸는 길만이 요금과 임금의 인상 경로를 차단시킬 수 있고, 노동자와 승객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 안건모의 책을 보다 보면, 누가 버스를 거꾸로 가게 하는지, 그렇다면 누가 버스를 제대로 가게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과연 그날이 올까? 13만이나 되는 버스 노동자들이 7만의 어용 노조를 뒤엎고 민주노조의 깃발을 꽂을 수 있을 것인지, 흥분되는 순간이 기대된다. 한국노총이 복수노조 유예를 노사정 합의한 순간, 한국노총에 항의 농성하러 간 버스 노동자 3인은 아직도 실형을 살고 있다. 집행유예로 나올 것으로 예상한 버스 노동자 동료들은 과연 마련했던 고기와 술을 그날 밤 어떤 기분으로 먹고 마셨을까? 하지만 닭 모가지 비틀어도 새벽이 온다고 했던가? 이런 고전적인 글귀가 아직도 어울리는 까닭은 버스 현장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최호철이 그린 표지그림을 보며, 그림 속의 조는 소님과 손을 흔드는 기사, 장을 보는 차창 밖의 사람들을 보며, 이러한 아름다운 일상이 꿈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되는 날을 기대해본다. 버스 노동자는 프로다. 프로 기사(노동자)에게 영광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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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한그릇/교육원]지구화 한 그릇 드실래요?

 

-노동사회교육원 4월 회보 양솔규 글

-제호를 고민해 봤으나 떠오르지 않음. <연대하는 노동>, <노동과 교육><노동의 희망, 미래의 씨앗> <연대와 실천> <진보와 노동>, <노동의 창, 연대의 장><해방 심기> 등등.

-꼭지 이름 : 책 한 그릇 or 미래를 여는 책 or 책풍경, or 책 사냥꾼

<책 한 그릇>

  지구화 한 그릇 드실래요?

지구화, 현실인가 또 하나의 신화인가 / 구춘권 / 책세상 / 2000년 / 3900원, 142쪽

 

한미 FTA가 타결되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2007년 4월 2일), 각 뉴스 포털 사이트와 방송들은 FTA의 타결 소식을 급히 전달하고 있다. 어제 밤에는 민주노총 민주택시노조연맹 조합원이자 민주노동당 관악구위원회 당원인 허세욱 동지가 FTA를 막아내고자 54년을 함께 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지금 현재 허세욱 동지는 위독한 상태이다. 이제 우리 현실이 어떻게 변할 지, 각 산업별 득실은 어떻게 변할 지, 촌에 계시는 우리 할매, 할배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우리 고향은 이제 유지될 수나 있을런지, 만감이 교차하는 시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실은 한미 FTA가 되기 전부터 한국의 개방화 정도는 도를 넘고 있었다. 도를 넘고 있다는 점은 단지 양적인 부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속도의 부분 또한 의미하는 것이었다. 소위 ‘개발독재’ 시기로 일컬어지는 경제 개발 시기에 대한민국은 폐쇄적인 수출주도 보호 무역 정책을 가진 나라였다. 미국은 냉전 시대, 자신들의 동아시아 정책에 지정학적으로 한국이 중요했기 때문에, 한국의 경제 발전을 의도적으로 돕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폐쇄적이고 국가주도적인 경제체제는 외부 시장에 개방적이고 시장주도적인 경제체제로 ‘압축적’인 변화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계기는 김영삼 정권 시기의 세계화 전략과 그로 인한 ‘IMF 경제위기’였다.


배낭여행과 영어마을은 차라리 애교스러운 어린 것들의 유행일 뿐이다. 정작 무서운 것은 만성적인 실업과 저성장, 급격한 빈부의 격차와 저항의 붕괴, 교정의 불가능성이 아닐런지.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에서 보아 왔다. 이제 한국은 유럽식 사민주의의 길도, 영미식 신자유주의의 길도, 20세기 초의 사회주의의 길도, 일본식 길도 아닌, 남미식 종속적 신자유주의의 경로로 추락하고 말 것인가? 심히 걱정스럽다. IMF 이후 언제나 어려웠다고, 언제는 해뜰 날이었냐고 퉁명스럽게 내뱉을 지도 모르겠지만, 영화 매트릭스의 대사 한 꼭지를 인용한 우석훈 교수의 말은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괴물.”


이 책의 속지에는 “지구화의 패자와 희생자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적혀 있다. 과연 나는 세계화의 패자인지, ‘노동사회교육원’ 회원들은 세계화의 승자인지, ‘6시 내고향’이나 ‘전국 노래자랑’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패자인지, 승자인지 곰곰이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좋든 싫든, 세계화된 세계에 살고 있으며, 그 사회의 보다 나은 모습을 위해서 노력하고 기대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세계화에 대해서는 수많은 책들이 이미 나와 있다. “도둑 맞은 세계화(창비)”, “세계화와 싸운다(창비)”, “세계화 없는 세계화(시유시)”, “세계화 시대 초국적 기업의 실체(책세상”,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필맥)”, “아래로부터의 세계화(아이필드)”, “허울뿐인 세계화(따님)” 등등.

그러나 이 책의 강점은 당연히 “짧고, 값싼” 책이라는 사실에 있다. 또한, 수많은 ‘반세계화’ 교과서가 외국의 필자들이 쓴 반면에 이 책은 한국 사람이 썼다는 점도 장점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책의 경우 일차적인 목적이 ‘반세계화’를 말하고자 한다기 보다는, 세계화(또는 지구화 Globalization)라는 것이 어떤 경로를 밟으면서 등장했는지, 그 탄생의 역사를 요약해서 설명하는데 일차적 목적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이 짧다고 해서 쉽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를 책 100쪽으로 요약하는 것은 저자로서는 당연히 쉽지만은 않으며 또한, 독자의 입장에서도 마치 꿈을 꾸듯이 100년을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1쪽에 1년씩! 우리가 이러한 부분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든 적게 가지고 있든 간에, 어쨌든 간 우리의 나머지 삶을 ‘지구화된 세상’은 지배할 것이다. 그렇다면 좀 알아 두는 게 필요하다. 이 짧은 책으로 먼저 예습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자기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주워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하면서 복습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우리에게는 물론 자본주의 역사, 또는 세계화를 둘러싼 다른 여러 가지 책들을 함께 보는 것도 필요하며, FTA에 대해 분석해 놓은 책들도 역시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운동 진영에서도 반FTA와 관련하여 괜찮은 책 네 권 정도는 내놓았다. “투자자-국가직접 소송제(녹색평론사)”,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녹색평론사)”, “한미 FTA 이미 실패한 미래(사회운동)”, “한미 FTA 국민보고서(그린비)” 등. 물론 FTA 맹신도들이 매일매일 수 백 권의 책과 매스컴, 정부관료, 정당 대변인의 입을 통해 쏟아놓는 양에 비해서는 ‘새 발의 피’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이 책이 살핀 지구화는 바로 ‘포드주의적 축적체제’의 ‘경제적’ 위기에 대해 ‘정치적 개입’이 대단히 무력하게 되면서 나타난 과정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시장’의 전지전능함을 믿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지니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구화는 수익성 위기를 겪은 전 세계 자본가(특히 금융 자본)들의 ‘위로부터의 정치적 전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노동자, 민중들의, 즉,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전략’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적 지구화’의 핵심은 네 가지이다. 첫째 국제금융시장이 규제되어야 한다. 둘째, 지구적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셋째, 대안적 지구화는 환경적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넷째, 경제적 지구화를 규제하기 위해서 민주주의적인 전지구적, 지역적 국제협력기구가 필요하다. 한미 FTA의 타결로 인해 우리는 이러한 대안적 지구화를 해 나갈 지렛대나 무기(예컨대 국가의 힘)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너무 걱정만 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FTA이든, 지구화된 초국적 금융 체제이든, 어떠한 체제든 간에 실물 자본주의와 유리되어, 또는 사회를 초월한 체제는 영원할 수가 없다는 것이 자본주의 역사, 또는 인류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위기가 기회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좀 더 근본적으로 핵심에 다가서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지식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그람시의 경고를 상기하자. 지구화라는 현실을 분석하면 할수록 비관주의에 빠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낙관주의를 고수해야 한다……노동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등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모든 사회운동은 대안적 지구화의 희망이다. 전 지구적 연대만이 개별 국가들로 하여금 대안적 지구화의 길로 들어서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사회교육원의 회보가 이제 출발한다. 보라. 우리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어 나가고 있지 않은가? 어설플지도 모르지만 진지하게 탐색하는 다수를 소수가 어찌할 수는 없다. 다수의 깊음을 어쩌겠는가? 아무쪼록 회원 여러분께서 ‘책 한 그릇’으로 FTA 체결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을 삭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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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the Red’을 위하여, ‘USA the Red’를 위하여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 4월호 기고.


‘에릭 the Red’을 위하여, ‘USA the Red’를 위하여


양솔규(전진부산 회원)



에릭 포너(Eric Foner),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 알마, 2006년 11월





가만히 ‘역사’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세상이 내 마음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 같다. 내가 원하는 대로 또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세상이 만들어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게만 된다면야 ‘운동’이니 ‘혁명’이니 하는 말은 사전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맑스는 ‘브뤼메르 18일’에서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에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넘겨받아 직접 맞닥뜨리게 되는 환경에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라고 썼다. 내 안에 ‘역사’가 있는 것이며 ‘애미애비’를 전제하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나 엥겔스, 그람시와 같은 고전적 맑스주의의 흐름에서 ‘미국’이라는 사회는 매우 특이한 조건을 가진 사회로 보였나보다. 이들 사회는 전(前)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없는, 봉건적 조건이 거세된 순수한 의미의 자본주의로 여겨졌다. 말하자면 위대한 ‘역사적 전통’은 없는 대신에 선조로부터 내려온 ‘납덩어리’ 같은 부담도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의식과 계급전선이 왜곡되지 않고 투명하게 드러날 것으로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 시대에 있어서는 영국과 독일 등이 혁명의 도화선이 될 것으로 보였는지 모르겠으나, 조만간 미국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였다. 예컨대 새로운 시대의 준거점은 유럽이 아니라 미국으로 보였다.

하지만, 20세기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미국 자본주의의 ‘순결함’은 사회주의 이행의 모범정답을 제시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은 한계로 작용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매우 아이러니하다.


과연 미국은 ‘사회주의’를 거부하는가? 사회주의로 가기에는 너무나 편안한 사회인가? 아니면, ‘실천의 동력’이 없는 것인가? 생산력이 아직도 불충분한 것일까? 최종적인 질문을 던져보자면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


여기 이와 관련한 ‘글’이 있다. <에릭 포너,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 알마, 2006년 11월> 사실 ‘서평’란에 ‘책’이 아니라 ‘글’이라고 한 이유는 이 책의 모든 내용이 ‘미국 사회주의’와 관련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02년 미국에서 출판되었고 한국에는 2006년에 번역되었다. 이 책에는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에 대한 글뿐만 아니라, 역사가의 의미, 남아공에 대한 에세이, 러시아에 대한 글, 미국 흑인과 헌법 등 다양한 역사학자로서의 고뇌가 담긴 수필들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미국의 역사에 대해 쉽게 그리고 고급 해석을 바라는 독자들이 읽기에는 더없이 좋은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의 운동과 관련해서는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는가’를 제외하고는 약간은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만이 아니라, 미국의 역사, 저항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른 책들 역시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전제로 소개를 하고자 한다.


위의 질문은 예전부터 오래된 질문이기도 했다. 또한 나름 많은 학자들이 대답을 내놓기도 했다. 또한, ‘미국의 사회주의’의 ‘형성’이라는 실천적 문제는 ‘전진’ 동지들의 역사적 임무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미국의 (사회주의의 역사를 포함한) 역사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미국의 미래가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하는 점은 단지 미국에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수출주도 개방경제 체제인 한국이 외부의 조건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현실이며, 더군다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미국이라는 나라는 (남미가 미국의 앞마당이라면) 한국을 자신의 ‘베란다’ 정도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네그리 식 표현대로라면 미국 신자유주의의 확산의 결과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 변화했고, (제국=미국은 아니지만) 미국의 미래는 어쩌면 제국의 흥망성쇠를 가늠하는 결정적 열쇠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네그리는 지구 어느 곳이든 자신이 존재하는 곳이 곧 제국의 중심이라고 말했지만(실천의 의미를 부여해준다는 점에서는 고맙고 고무적인 발언이기는 하나), 내가 보기에, 또는 초국적 자본의 경영자가 보기에 그렇다고 본사를 부산이나 칸쿤에 가져다 놓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두 번째 이유는, 이게 더 중요한 이유일 수 있는데, 미국으로의 길이 어쩌면 우리의 앞날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맑스는 “자본”에서 “더 발전된 국가는 덜 발전된 국가들에게 그들의 미래상을 보여 준다”라고 했다. 물론 이러한 언급을 기계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당연히 없지만 말이다. 우리가 미국식의 사회로 변할 것이라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일이기도 하다. 미국 이외의 나라에게는, 그리고 초국적 자본의 지배블록 밖의 노동자계급에게는 이것은 하나의 재앙이 될 터인데, 그러한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이 제시하는 강력한 궤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미국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바로 이러한 점이 에릭 포너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저자인 ‘에릭 포너(Eric Foner)’는 말하자면 미국의 ‘에릭 홉스봄’ 같은 역사학자인 것 같다.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이면서 존경받는 역사학자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또한 미국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꽤나 정치적 보수주의자들로부터 민감한 인물인 것 같다. 마치 ‘강정구 교수’에 대해 한국 우파들이 난리를 치는 꼴이라고나 할까? 그에 대한 별칭이 ‘빨갱이 에릭 Eric the Red’ 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을 보면 에릭 포너가 단순한 학자라기보다는 정치적으로 실천적인 지식인이라는 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뉴레프트 리뷰나 먼슬리 리뷰 같은 잡지에 글을 실어 오기도 했다.


그에게 쏟아졌던 비판, 아니 언어폭력을 들어보자면,


“미국을 망치고 있는 1백인 가운데 75번째 인물”(버나드 골드버그, 언론인)

“소련 체제의 노골적인 옹호자이며 미국에 대해서는 앙심을 품은 역사학자”(존 패트릭 디긴스, 뉴욕시립대)

“단연 눈에 띄는 역사가이며 급진 분파 및 여론의 빨치산”(시어도어 드레이퍼, 역사학자)


또한 그에 대한 찬사를 들어보자면


“지난 20년 사이 가장 많은 저술을 발표한, 독창적이면서 영향력 있는 미국 역사가”(워싱턴 포스트)

“에릭 포너의 책은 미국의 모든 학교에서 읽어야 하는 필수적인 저작”(냇 헨토프, 언론인)

“에릭 포너는 다른 역사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스티븐 한, 펜실베니아대 교수)


그는 미국 역사학자 단체인 미국역사학자기구(OAH), 미국역사학회(AHA), 미국역사가협회(SAH), 세 단체의 회장을 모두 지낸 단 두 명 중 한 명이다. 그만큼 미국 역사학계와 미국 사람들에게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인 것 같다.


실제 에릭 포너의 글을 읽어보면 그다지 급진적이거나 위험한 사람 같지는 않다. 설마 이 사람이 권총이나 석궁을 들고 부시 대통령이나 대법관을 공격할 것 같지는 않다. 물론, 한 권의 책이 지배계급에게는 더 위험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한국에는 이 사람의 책이 처음으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마크 C. 칸즈가 쓴 “영화로 본 새로운 역사 2(소나무 출판사, 1998)”에 ‘역사학자 에릭 포너와 영화감독 존 세일즈와의 대화’라는 글이 번역되어 있다. 또한, 이 책을 번역한 손세호(현 평택대 미국학과 교수) 선생이 87년 ‘서양사론’에 쓴, 에릭 포너의 책인 “Nothing But Freedom(1983)”에 대한 서평이 4쪽 적혀 있을 뿐이다. 이 책에서 에릭 포너는 자신의 전공분야인 남북전쟁 이후 재건시대(Reconstruction Era)에 경제적 자원획득, 노동력 통제, 토지분배 등등의 문제에 있어 흑인노예와 농장주들의 투쟁 과정에 천착했다. 그리고 이들 간의 관계를 맑스주의적인 계급론에 입각해서 분석하고 있다.

또한, ‘진보저널 읽기모임(http://journal.jinbo.net/)’에서 먼슬리 리뷰에 실린 특집글을 번역했는데 (미국의 세기의 사회주의 잡지: 먼슬리 리뷰) 여기에 에릭 포너에 대한 언급이 딱 한 단어로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외국의 이론, 책, 주장들을 수입해서 매우 잘 버무리는 한국의 극성스러운 지식사회의 풍토를 생각해보면, 왜 ‘에릭’ 홉스봄이 알려진 만큼 ‘에릭’ 포너는 잘 안 알려졌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전진’이 꼭 ‘에릭’을 좋아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긴 요즘 ‘전진’과 ‘에릭’의 가는 길이 다르기는 하다.) 홉스봄이 영국에 국한되지 않는 세계사적 또는 유럽다국적 역사를 정리했다면, (영토로 보면 비슷하지만) 포너는 공간적으로 미국에 한정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 다르게 보자면, 한국의 진보적 서양사학자들이 게으르며, 특히 미국사 교수들이 너무나 ‘미국적’ 시각을 가져서인지도 모르겠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한국의 역사는 영국보다는 미국과의 상호작용이 너무나도 많았음에도 말이다. 오히려 김동춘 선생의 책(『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창비, 2004)이나 백승욱 선생(『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그린비, 2005) 같이 사회학자들의 분석들이 좀 더 대중적이거나 진지한 것 같다.


독일의 사회학자 좀바르트가 똑같은 질문을 던진 지 80년이 지났다고 한다. 그런데 에릭 포너가 보기에는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지금도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별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다고 한다.

첫째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너무 탈역사적으로, 추상적으로 취급하거나 상대방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마치 사회구성체 논쟁이 떠오르지 않는가?

둘째로, ‘부정의문문’에서 탐구를 시작했으니 대답이 탈역사적인 대답밖에는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질문’이 정확치 않은 바는, 유럽의 ‘사민당, 혹은 노동당’이 사회주의 정당 혹은 사회주의 정치라고 할 수 있는가와 관련이 된다. 사실은 이 질문은 미국에는 ‘사민당’, ‘노동당’이 없는 현실, 민주당과 공화당의 양당제라는 현실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에릭 포너가 보기에는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 라는 질문보다는 ‘왜 미국에서 사회주의가 한때 세력을 얻었다가 퇴장했느냐’ 혹은 ‘왜 유럽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주의적 전환이 일어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이 역사적 질문이며, 해답 가능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서유럽 사민주의는 포너가 보기에는 ‘마르크스주의 원론과 근본적으로 배치’되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의 좌파 정당들은 사회주의보다는 자유주의와 평등주의를 퍼뜨리는데 더 많이 이바지했으며,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추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미국 예외론’적 질문,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는 없는가?’라는 질문은 흔들리고 만다. 그렇다고 ‘미국 예외론’을 버리는 것이 자본주의 국가는 모두 똑같다는 것(사회과학적으로는 수렴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통적 양상을 가지고 ‘미국 예외론’을 설명하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계급운동이 노조 중심의 경제주의나 사회민주주의적 개량주의의 한계 안에 갇혀 있는 현상’은 미국에서 뚜렷한 바와 똑같이 유럽도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이무어 마틴 립셋의 “미국 예외주의(후마니타스, 2006)”와 비교해볼 수도 있다. (트로츠키주의에서 네오콘의 1세대로 전향한) 립셋의 ‘미국 예외주의’는 뛰어난 저작이기는 하지만, ‘미국인들의 자민족 중심주의 혹은 노골적인 우월주의 정치선전’에 빠져들게 만든다는 비판이 있다. ‘우리는 다르다’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자만심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튀는 행동(예를 들어 전쟁수행)의 알리바이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사회주의의 운명과 관련해 여러 가지 해석을 살펴보자.


첫째, 미국 노동자들이 현재의 조건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투쟁에 나서기보다는, 서부 이주 등 노동이동을 택한다는 이른바 ‘변경 테제’가 있다.(프레드릭 잭슨 터너) 일리가 있는 설명이기는 하나, 포너가 보기에는 ‘사회적 유동성은 정치적 안정성을 높이기보다는 해치는 교란 요인’일 수도 있기 때문에 위의 테제는 설명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둘째, 미국인들의 국민성 자체가 계급의식이나 사회주의는 물론 다른 급진주의에도 적대적이었다는 설명이다.(루이스 하츠, ‘일치’학파) 미국인들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따라서 로크식 개인주의 관점이 지배하게 되었고, 따라서 ‘봉건주의가 없으면 사회주의도 없다’는 식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식화에는 흑인이나 여성 등의 집단은 아예 분석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이러한 미국의 ‘통합성’에 대한 서술은 신노동사가 등장하면서 깨지게 되었다. 또한, 남부지역은 ‘봉건적’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여러 면에서 ‘전부르주아적’이었다는 것이다. 하츠의 논리대로라면 미국 남부는 사회주의의 온상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또한 미국 독립전쟁은 로크식 개인주의보다는 공화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포너가 보기에는 비자유주의적 사고방식 때문에 사회주의로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특정 형태의 급진적 관점이 끈질기게 살아남으면서 사회주의가 해야 할 역할을 대신했다는 것이다.


셋째, 미국 노동계급의 분열로 인해 사회주의 가능성이 없어졌다는 분석이 있다. 이 분석은 라이히, 고든 등의 분석인데 한국에도 번역되어 있다.(『분절된 노동, 분할된 노동자』, 신서원, 1998년. 노동시장론 등에서는 매우 중요한 저작이다.) 이들을 사회적 축적구조론자라고 일컫는데, 이들이 보기에는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하나의 거대한 단일 계급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종에 따라, 종족에 따라, 성별에 따라, 숙련에 따라 점차 여러 ‘노동계급들’로 분열되고 있다는 것이다.1) 한국  또한 이러한 분열이 노동시장 내 분절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또한 다양한 인종적 배경이 계급의식을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포너가 보기에는 이러한 사실은 분명 존재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나타나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보편적인 원인을 가지고 ‘미국 예외론’의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종족적 소속감이 특정 상황에서는 강력한 저항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넷째, 어쩌면 이 질문은 기각 여부와 상관없이 매우 중요할 수 있는데, AFL-CIO(미국노총)의 문제이다. 현재 미국의 총연맹은 ‘역사적인 분열’을 거쳐 두 개로 나눠져 있지만, 어쨌든 간에 미국노총은 그동안 흑인, 여성, 신이민자들 등이 노동운동에 참여할 수 없는 구조였거나, 노조 지도부가 계급투쟁보다는 자본과 타협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현실을 봐도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다. 말하자면 좌파들의 전통적인 주장이기도 한데, 에릭 포너가 보기에는 그렇다면 ‘잘못된 지도부’를 왜 조합원들이 선택하는 것인가? 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고에는 지도부를 제외한 나머지 조합원이나 미국 노동자들은 한결같이 단결돼 있고 전투적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는데 이를 뒤엎는 사례도 얼마든지 많다는 것이다. 예전 98년 당시 한국에서도 이런 식의 주장이 떠돌 때, 상당히 진위가 의심스러웠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다섯째, 미국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공짜로 주워졌기 때문에, 즉 미국 정치체제의 성격으로 인해 사회주의가 성공하지 못했다는 설명이 있다.(셀리그 펄먼) 하위적 요소로는 승자독식 대통령선거 제도 등이 양당제를 고착화시킨 점도 들 수 있다. 또한 미국 정치는 뉴딜 정책에서 보듯이 개혁 요구에 상당히 수용적이었으며 따라서 노동자들이 사회주의라는 정치적 ‘오버’를 할 필요가 없었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또한 사회당과 IWW에 대한 탄압에서 보듯이 직접적 탄압도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설명들을 모두 묶어서 포너는 다른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양상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미국보다 더한 탄압들도 있었으며(독일이나 스페인), 다른 설명들도 너무 지엽적이라는 것이다.


위와 같은 설명들이 대체로 ‘외재적’이었다면 사회주의 운동 ‘내재적’으로 실패의 요인을 따져볼 수도 있겠다. 여기에는 IWW, 사회당, 공산당 등의 역사적 분석이 필요하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 사회당의 노동계급과의 상대적 거리감과, 원칙성이(유럽과 다른 반전의 원칙을 고수) 미국 사회당을 몰락시켰다는 점. 미국 공산당은 유럽 사민주의 정당처럼 전시 국가 방위에 협조했다가 노동계급으로부터도 멀어지고 탄압에도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원칙이냐, 생존이냐 하는 점이 중요할 수 있다. 일종의 선택이 필요한 시기가 있는 것이다. ‘역사적 인정투쟁’을 선택하고 장렬하게 전사할 것이냐, 현실의 운동과 대중을 지키기 위해 잠시 ‘유연과 눈가림’을 할 것이냐? 언제나 투쟁에 있어서 다가오는 딜레마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 대해서는 설사 다소 주관적인 영웅심이나 다소 패배적인 느낌이 들지도 모르지만 두 개의 탁월한 저서 마이크 데이비스의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창비)와 리차드 O 보이어, 모레이스의 『알려지지 않은 미국 노동운동이야기』(책갈피)를 볼 필요가 있다. 또는 아주 최근에 나온 존 리드 평전(아고라, 2007)이나 워렌 비티가 주연한 영와 ‘레즈’를 참고할 수도 있다.


마지막 결론을 보자.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 하는 질문에는 바로 시간적으로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는 식의 논리가 깔려 있다. 유럽이 걸어간 사회주의 정당(사실은 사회주의를 포기한 사민주의)길을 미국이 따라와야 하는데 왜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마치 토끼가 지나간 길을 거북이가 따라와야 하는데 왜 거북이는 그 길로 안지나 갔을까? 묻는 것이다.


포너가 보기에는 토끼는 그 길로 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세히 보면 신자유주의 시대에 미국화가 진행되면서 유럽이 미국의 길을 뒤따라오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거북이가 저 앞에 있고, 토끼가 거꾸로 따라오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대중정치, 대중문화, 대량소비가 유럽보다 미국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아래서 사회주의적 정치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느냐 하는 딜레마를 미국 사회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부딪쳤다는 것이다. 계급이념 소멸에 관해 유럽은 미국의 사례를 보고 타산지석으로 삼으라는 메시지다. 그렇게 본다면,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왜 없는지 따지기 전에 너네들은 있었는지, 그리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미국처럼 되지 않으려면 뭘 해야 하는지 잘난 척 하지 말고 따져봐야 할 일인 것이다. 예전 90년대 초반 신경영전략이 대우조선을 뒤덮으면서 노동조합 활동이 힘들어졌을 때, 현대중공업 활동가들에게 대우조선 활동가들이 ‘너네들도 준비해라, 곧 닥친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한 공장에서 어쩐다고 될 일인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쩌면 중공업 활동가들은 당시 내부 준비를 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현재의 ‘세계혁명’의 출발이자 완성은 ‘미국혁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직된 미국 노동계급에게 이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고, 미국 내 다양한 내부 식민지들의 노동계급의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하고 있는 인종, 계급, 성, 정체성에 착목해야 할지도 모른다. 또는 포너의 기대처럼 유럽과 미국의 새로운 급진적 흐름이 부상할 지도 모른다. 또한 이러한 흐름이 미국 역사에서 되풀이 되는 그저그런 흐름으로 끝날 수도 있다.


우리의 상황은 어떨까? 아니, 우리는 유럽이 미국에게 던지는 약간은 오만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지도 못했다. 계급의 조건만을 보자면야 미국이나 한국이나 매한가지이며, 역사적 전통으로 따져 봐도 미국보다 나은 상황은 아닌 것 같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형성되었는가? 어쩌면 그럴 수도,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단일한가? 이 질문도 난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질문, ‘미국의 사회주의’를 따져보는 것은 우리에게는 학문적 관심이 아니다. 이미 이러한 제목을 가진 책들이, 논문이, 연구서들이 한국에도 나와 있고, 외국에도 나와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에릭’의 힘을 빌려 ‘전진’의 지렛대는 무엇이어야 하며, ‘전진’이 피해가야 할 것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따져봐야 하는 점이다.


과연 ‘전진’이 부르는 사회주의는, 그 애매하기 짝이 없는 ‘민주적 사회주의’는 사민주의인가? 그 이상인가? 우리의 사회주의는 역사적 조건을 충족시켜 가고 있는 중인가? 우리를 옥죄고 있는 노동시장과 정치제도는 어떻게 바꾸어야 하며, 한국 노동계급(들)의 역사적 배경인 한국전쟁, 북한, 기업별 노동조합, 계급정치와 의식의 후진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미국 노동계급, 또는 사회주의에 대한 질문에 순진한 호기심을 머금기에는 현실의 과제는 너무나 크기만 하다.


역사적 법칙을 그야말로 법칙으로 인식하고 있는 자는 단지 ‘열심히’만 살면 될지 모르지만, 법칙이 ‘실천’을 매개로 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또한 그 ‘실천’의 귀결은 ‘승리의 필연성’ 못지않게 ‘실천의 패배’로 역사화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악몽처럼 인식해야만 한다. 필연성이 가능성으로 전환되지 못하면 ‘승리의 필연성’은 ‘실패의 가능성’이 될 것이다. 봄에도 눈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패배의 가능성을 인식하는 것은 실천적으로 매우 중요할 것 같다. 그 악몽이 현실화되었을 때는 주체와 역사에게 치명적인 상황이 될 것이다. 이는 맑스가 가르쳐 준 무서운 잠언이기도 하지만, 미국 역사가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책의 원제는 Who Owns History?, 누가 역사를 소유하는가 이다. 노동계급이 역사를 소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부르주아지가 역사를 소유한다는 것이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같이 사이좋게 역사를 소유할 수는 없다. 중간은 없다. ‘전진’은 이 먹고 먹히는 길에서 작은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한국의 노동계급이, 운동이, 얼마나 많은 성취를 이룰 지는 우리 같이 힘을 합쳐보아야 할 것이다. 포너는 미국의 사회주의의 운명에 대해 좀 더 기다려봐야 한다고 했다.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소심할 필요도 없지만, 잘난 척 할 필요도 없다. 가보는 것이다. 나는 ‘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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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진 - 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의 비전

이매진 - 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의 비전

 

양솔규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redstar@jinbo.net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통권146호, 2006년 8월호

 

<이매진-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의 비전> / 이매진 / 13,000원 / 2006년 5월

1999년, 신자유주의의 또 다른 심장부 영국의 스코틀랜드에서는 ‘작은 승리’가 일어났다. 처음으로 구성되는 스코틀랜드 의회에 SSP(스코틀랜드사회주의당)의 토미 셰리단이 비례대표 21.5%의 지지로 입성하게 된 것이다. 그의 오른손엔 ‘독립 공화국’이라는 카드가, 그의 왼손엔 ‘사회주의자’라는 카드가 들려 있었다.

4년이 지난 2003년에는 토미 셰리단 외에도 5명의 의원이 더 배출되었다. 여전히 그들은 사회주의를 외치고 있으며, 노동당이 독점해 온 진보정치 비슷한 지형에 귀퉁이 하나를 차지한 것이다. 이것은 싫든 좋든 어쩔 수 없이 ‘노동당’(구노동당이든, 신노동당이든)을 선택하도록 ‘강요’ 당해 온 노동자들에게, 빈민들에게, 성소수자에게 자신의 꿈과 삶을 포기하지 않을 새로운 선택지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무나 오른쪽으로 가버려 이제는 ‘노동’당이라고 부르기조차 어색한, 이제는 ‘빈곤의 짜르’가 되어버린, 그래서 자신들조차도 ‘신’노동당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 당이 아니라, 민중에게 실질적인 통제권을 부여할 권력을 돌려주기 위해 투쟁하고 연설하고 모여서 집단적인 역사형성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당이 스코틀랜드 민중에게 생겼다. 그것을 SSP는 ‘홀리루드(의회가 있는 곳)를 향한 사회주의적 진전’이라 부른다.

 


이 책은 SSP의 대표적인 정치인 토미 셰리단과 ‘스코틀랜드 소셜리스트 보이스’의 편집자이자 SSP의 핵심적인 인물인 앨런 맥쿰즈가 함께 쓴 책이다. 이 책의 미덕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에 있다. 또한 한 문장, 한 문단이 짜임새가 있을 뿐만 아니라, 독창적인 예들과 비유, 폭소를 자아내게 하는 풍자, 적절한 인용과 글의 부드러움도 함께 만끽할 수 있다.

이매진, 비틀즈의 노래 제목이다. 이 책의 각 장의 제목과 책의 내용에는 존 레논의 노래가사나 제목이 쓰이고 있다. 저자의 말대로 ‘이매진이라는 노래 자체가 불평등과 착취, 인종주의와 전쟁이 없는 그런 사회주의 세상의 비전을 불러’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저자들의 책 제목으로서는 아주 ‘딱’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을 번역 출판한 출판사 이름조차 이매진이 아닌가.


우리가 이 책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한국과 스코틀랜드의 역사적 배경이 매우 다른 것만큼이나 공통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주장하는 SSP는 스페인의 카탈로니아와 바스크, 영국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등의 민족주의+좌파정치세력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이라는 고전적이면서 현대적인 쟁점에 천착하고 있다. 또한, 사상적 폐허 위에서 다시 사회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반자본주의세력의 결집을 선도하고 있다. ‘거대한 소수’ 전략의 성실한 발걸음이다.


민주노동당이 처한 현실에서 이러한 주제들은 많은 부분을 생각하게 하고 상상하게 한다. 그들이 ‘거대한 소수’ 전략을, 명확한 ‘사회주의’라는 기치를 내걸면서 ‘전진’하고 있을 때, 민주노동당은 늪에 빠진 자신의 발을 원망하며, ‘거세당한 소수’의 행보를 거듭하고 있었다. 당내 소수자 문제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시각은 따뜻하지도 않았으며, 정치적 슬로건과 전략의 채택을 놓고서는 단호하지도 않았다. ‘거대한 소수’를 바라보는 진짜 거대한 대중들의 시선을 민주노동당은 고정시키지 못했다. 채널을 고정시킬만한 내용이 부족했으며 채널을 좌지우지하는 리모콘을 민중들에게 돌려주지도 못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있고 움직이고 있으나 당의 숨소리는 잦아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SSP는 민주노동당이 승인할지도 모르는 광범위한 전선체의 토대 위에서 생겨났다. 하지만 경로가 다르다. SSP가 당적 통일전선체를 통일전선적 당이라는 실험을 통해 탄생했다면 민주노동당은 자기 외의 또 다른 옥상옥을 지으려 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문호를 열면 열수록 배타적으로 되어 버리는 마술같은 역설이 진행되고 있다. 21세기의 초입에서 20세기로, 19세기로 자신의 상상력을 후퇴시키는 것을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반동’이라고 불러야 하나.

SSP는 민족문제를 세계화시대의 반자본주의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와 결부하면서 ‘미래’를 예견해 나가는 지렛대로 삼고 있다면 민주노동당은 ‘현재’의 문제로 축소시키거나 그 자체에 매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우리가 바랬던 것은 소수가 다수가 되는 양적 확대 자체보다는 소수이면서도 ‘당당’하고 그 ‘당당’함이 곧 미래를 보증하는 선순환구조가 아니었던가. SSP가 ‘당당하게’ 초국적자본에 투항해버린 노동당과 보수당에게 맞서고 있는 것은 굉장한 경험이며 그 모습 때문에 이 책은 수많은 ‘몽상가’들에게 몰입의 기쁨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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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에 대한 단상

명성에 걸맞게, 구독한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그래볼까 생각중입니다.
예전에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조운동연구소에서 <신자유주의와 세계민중운동>,(한울.1998)이라는 책이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의 글들을 번역해 실었습니다. 소위 NL과 PD에 갇혀 있던 시각이 뻥 뚤리면서 시원한 감각과 혜안을 선물해 줬었지요. 그 책에 나온 필자 대부분은 이제 한국에서도 그리 낯설지 않게 되었고요. 아냐시오 라모네나 초스도프스키, 필립 르벨리, 존 홀로웨이 등이 그렇지요. 또한 그 책의 다양한 시각과 주제들(네그리와는 또다른 자율주의의 변종들, 사빠띠스타, MST나 UPS파업 등)도 이미 널리 알려졌습니다. 확실히 한반도의 반쪽에 갇힌 '섬'에 사는 것과는 다른, 총체적 시야를 제공했습니다. 한국사회의 지식층과 운동사회의 천박함, 지적 편식, 좁은 시야, 불합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신선한 교정제가 될 것임에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런데, 편집위원장이 박순성 교수(북한학과)이고 편집위원에 박세길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게 마음에 걸립니다. 프랑스판 기사 70%는 걱정할 필요 없지만, 한국 기사는 어떤 것들이 나올 지 우려됩니다.
박승흡씨가 발행인이라는 것도 걸리는 것 중 하나입니다. 매노와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비정규센터 등. 그 어마어마한 자원과 영향력만큼이나 걱정도 됩니다.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대중성에 있어 성공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르 몽드의 기사 대부분이 '분석적'이기 때문에 독자층이 무한증식하지는 않을 것이고요. 프랑스에서도 한정된 부수인데(영향력은 있지만) 척박한 동토에 뿌리박을 지는 미지수고 운동 사회 내에서는 일정한 선에서 정체될 것입니다. 대신 매노와의 기사교류를 통해서 영향력을 미치겠지요.

당연히 저도 레디앙 생각이 났습니다. 기자 숫자도 부족하고, 모든게 부족한 상태인데요. 레디앙을 기대하는 사람과 걱정하는 사람은 주변에 많기는 하지만, 기대와 걱정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사그러들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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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2006.5.26]북한과 조선일보는 '오버'하지마세요

북한과 조선일보는 '오버' 하지마세요

민주노동당 지지표 가운데 사표는 단 한표도 없다

 
 
 

“미국과 가까운 한나라당이 당선되면 안 된다. 열린우리당을 선택해야 한나라당을 이길 수 있다. 민주노동당을 찍으면 사표가 되기 때문에 민노당원이라도 열린우리당을 찍어야 한다”
(6·15 공동선언 남북 대학생 대표자회의에서 북측 대표들이 한 말, 경향신문, 5월 17일)


북에서 불어온 민주노동당 사표론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보수세력 이회창이 당선되면 안 된다. 노무현을 선택해야 이회창을 이길 수 있다. 권영길을 찍으면 사표가 되기 때문에 민노당원이라도 열린우리당을 찍어야 한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지지자들이 했던 말이다. 급기야 정몽준의 지지철회 이후에는 당시 민주당 당원들과 노사모 회원들이 민주노동당 사이트에 와서 구걸하다시피 했었다.

이회창이나 노무현이나 종속적 신자유주의 정권이기는 마찬가지고, 노동자 민중이 힘들기는 마찬가지라는 주장은 조금씩 무너졌다.

민주노동당 지지표 중 일부는 ‘비판적 지지’와 ‘민주노동당 사표’론에 휩쓸려 나갔다. 나는 당시의 권영길 대표의 심정을 가늠할 수 없다.

“친미보수세력을 규합...기(期) 정권탈취에 나서도록 사촉했다. 미국이 남한 정치에 개입해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면서 마음대로 주무르던 '주종관계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친미정권 부활 망상은 남한 주민들의 더 큰 반미항거에 부닥치게 될 것"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연합뉴스, 4월 30일)

“한나라당이 승리하면 미국에 추종하는 ‘전쟁머슴 정권’이 들어설 것, 가장 올바른 판단과 선택은 제일 당선 가능한 6·15 평화세력 후보에게 지지표, 평화표를 찍어주는 것. 다음해 대통령 선거에서 더 큰 것을 잃게 되고 결국 친미전쟁머슴 정권이 독버섯처럼 돋아나 당신(남한 국민)들은 전쟁의 제물로 될 것”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5월 18일 성명, 문화일보, 5월 19일)


나는 바꿔 말하고 싶다.

“북한 정권이 반평화, 신자유주의세력인 열린우리당 규합...기(期) 정권탈취에 나서도록 사촉했다. 북한이 남한 정치에 개입해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면서 마음대로 주무르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신자유주의정권,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정권 부활 망상은 남한 민중들의 더 큰 반신자유주의 반세계화운동의 항거에 부닥치게 될 것”

북의 끊임없는 내정간섭성 발언들이 과연 한국의 진보적 세력과 ‘집권’에 도움이 되었는지 의구심이 든다. 남한 정치판을 그토록 꿰뚫고 있다면 한국 사회에 아직도 팽배한 ‘레드 콤플렉스’를 잘 알 것이고,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제사지내듯이 주기적으로 ‘지령’ 비슷한 걸 발표하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열린우리당의 ‘사표론 제기’야 경쟁하는 당으로서 이해가 가지만, 휴전선 건너에서 선무방송 하듯이 하는 것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정치적 테러다. 자신의 ‘체제 생존’이 중요하다면 사표심리에 휩쓸리지 말고, 민주노동당과 교류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민주노동당 역시 조선사민당이나 만나면서 ‘남북정당교류’ 자랑하지 말기 바란다. 그러니 조선일보가 ‘사표론’과 ‘조선사민당과의 교류’를 연결시키는 것이다.(5월 25일자) 민주노동당 역시 이런 사표론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신이 정당임을 망각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여전히 다른 정치세력들은 민주노동당을 만만하게 볼 것이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당이면 당당하게 독자노선을 밝히는 것이 정도다.

민주노동당은 이미 사표 방지를 위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그것이다. 괜히 사표심리에 흔들릴 것이 아니라 정치개혁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다음 대선과 총선에서 북한과 열린우리당의 사표론과 비판적 지지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관철시키는데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의 정치적 오버

여기 또 하나의 ‘정치적 오버’가 있다.

불과 10여일 사이에 남북정상회담, 체제변동, 남북교류기금, 남북관계 도약 등 엄청난 과제와 선심(?)을 쏟아낸 것이다. 남북 장성급 회담에서는 북측이 드디어 서해안 북방한계선인 NLL의 무효화를 들고 나왔다. 그 과정에서 우리측이 NLL의 대안을 모색하는 듯 ‘양보의 기미’가 엿보였다.

느닷없이 민단과 조총련 대표가 끌어안는 사태가 일어나더니 민단이 탈북자 돕기를 포기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평택의 시위에서는 대한민국의 군대가 매 맞고 다치고 밀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총리와 국방장관, 그리고 여당의원들이 보인 행태와 발언은 국민들 사이에 ‘여기가 대한민국 맞는가?’라는 장탄식을 짓게 만들었다. DJ의 때맞춘 방북도 예사롭지 않다. 대한민국의 마지노선(線)이 무너지는 듯한 비감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 5월 22일)


평택의 시위에서 국민들이 매 맞고 다치는 사태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인권이 압살당하고 농민이 포박당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나보다. 군(軍)이 민(民)보다 위에 있나보다. 북한의 선군정치가 떠오른다.

요컨대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의 글과 북한의 성명서를 보고 있자면, 대한민국에서 살기가 무섭다. 한편으로는 미국이 쳐들어올 것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이 쳐들어올 것 같기도 하다. 언제나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다. 이 두 부류의 정치적 오버 때문에 대한민국의 불안은 심화된다.

박근혜 피습 배후, 북한 아니면 한나라당? 고약한 음모론들

이번 지방선거의 판을 흔든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테러에 대해서도 조선일보와 통일운동세력은 동일한 논리를 갖추고 있다. 일명 상대를 달리하는 음모론이다. 시절이 하수상하면 등장하는 음모론이 지난 ‘탄핵사태’ 이후 오랜만에 등장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이번 사건의 배후가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아진다...따라서 이번 사건의 조직적 배후가 있다면...역설적이게도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한나라당이다...자해소동을 벌일 만큼 한나라당에게 절박한 상황이 있었냐...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향후 남북관계와 대선구도를 고려하여 상황을 판단해 보면...미국과 한나라당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승리가 아닌 압도적 승리이며, 향후 남북관계의 발전을 차단할 수 있는 압도적인 정국 주도권이기 때문이다.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3대 애국운동의 해(2006년) 5월 24일)

그 기조와 기류가 바뀌어 남쪽에 보수정권이 들어서고 게다가 부시 미국정부와 일본내각의 우경화 내지 반북적 드라이브가 당분간 계속 유지된다면 김정일 정권으로서는 지금 손놓고 있을 처지가 아닐 것이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테러도 그의 대선 욕망을 꺾어 궁극적으로 현재 예상되는 대선 구도를 바꾸려는 기도로 보는 음모 이론도 가능하다.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 5월 22일)

누가 박근혜의 얼굴에 칼을 대었는가? 북한인가? 한나라당인가? 이런 논리를 보고 있어야 하는 것 자체가 고
역이다.

북한과, 조선일보, 일부 통일운동 진영은 자신들의 시각을 21세기에 맞게 ‘이노베이션’하기 바란다. 폐쇄적인 자기 울타리에 갇혀 광범위한 국민을, 대중을, 민중을 좌지우지하겠다고 한다면, 예컨대 ‘혼란을 부추기고 지령 때리기’에 골몰한다면 누가 편안하게 정책과 후보 면면을 살펴볼 수 있겠는가? 우리 민족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는가?

열린우리당 지지가 ‘역사적 사표(死票)’ 된다

2002년 대선 당시도 표를 구걸했던 열린우리당, 탄핵사태 때도 표를 구걸했던 열린우리당은 또다시 표를 구걸하고 있다. 부산에서는 ‘부산정권’이라고 강변하고, 광주에서는 ‘민주당과의 통합’ 운운했다. 25일에는 “싹쓸이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썩게 하고 와해시킬 것”이라며 “며칠만 매를 거둬 달라고” 했다. 선거 전에 또다시 민주노동당을 가리키며 구걸을 해올지 모른다.

국민들이 자신들에게 등을 돌리는 이유를 정말 모르겠다면, 정말 표를 ‘긁어오고’ 싶다면 자신들이 무엇을 해왔는지 뒤돌아보는 자세가 먼저일 것이다. ‘구걸’도 ‘반성’이 전제 되어야 퍼줄 마음이 생기는 법이다.

최초로 과반수를 넘겼을 때 열린우리당이 개혁은 하지 않고 노동자, 농민, 서민의 목줄을 조아 대었다. 아침 출근길, 열린우리당의 후보들을 보아라. 삼성맨 진대제 전 장관, 염홍철 전 한나라당 출신 대전시장, 부동산업자와 학원장이 태반이다. 이들이 ‘당선 가능한 평화개혁세력’이라면 그 평화개혁은 포기할 것이다.

“정권 재창출이 최고의 개혁, 중도개혁세력 대통합”
(임종석 열린우리당 의원, 2월 전당대회 발언, 데일리 서프라이즈)


정권 재창출이 최고의 개혁이라고 강변하는 데는 할 말을 잃는다. 정권 재창출을 위해 지지를 하고 싶어도 개혁한 게 있어야 하고, 평화 실현한 게 있어야 표를 줄 것이다. 기껏 한 것이라고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비정규직 개악안 통과시키고, 삼성 X파일에는 면죄부를 주며, 삼성에 항거한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에게는 3년 2개월을 때리는 정권에게 무엇이 예뻐서 표를 주겠는가.

어찌 “계급이나 계층의 이익을 넘어 민족공동의 이익과 평화를 추구합시다!”라고 외치는가? 국민들은 ‘지방선거 본연의 위상’을 바라는데 한국의 정치세력들은 아니, 남북한의 정치세력들은 너무나도 고민들이 많다. 바야흐로 ‘대선 전초전’이라 본다.

통일운동 관련 인사 역시 임종석 의원과 비슷한 발언을 한다.

“정권재창출이 곧 개혁·진보세력이 힘을 모아야... 대선에 적극 개입해 정권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내야 한다”
(민경우 전 통일연대 사무처장. 민족21, 창간 5주년 기획 기사 2006년 4월 1일)

개혁세력은 어떤 개혁세력을 말하는 것일까?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 개혁의 선두에 있었다. 노동자, 민중, 자연, 여성, 공공성, 복지에 대한 과감한 공세를 통해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이 개혁은 서민들의 삶을 곤궁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아래로부터의 통일의 가능성’조차 가둬 놓는다. ‘퍼주기’ 논란에 대한 빈곤층의 반발은 이를 증명한다. 한국의 평화와 통일, 개혁과 진보 정치세력은 민주노동당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 민족의 통일과 빈곤사회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비정규직 없는 세상, 평화가 넘치는 세상을 원한다면 대안은 민주노동당이다.

*이 글은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6월호(144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2006년 05월 26일 (금) 09:58:33 양솔규 현장기자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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