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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2006.5.22][인터뷰]진보우공(進步愚公) 김석준 부산시장 후보

최고 실업률, 최저 출산률 "부산 내게 맡겨라"

[인터뷰]진보우공(進步愚公) 김석준 부산시장 후보

 

 
 

2006년 5월 15일, 부산에 유세 지원을 위해 내려온 노회찬 의원은 부산 남구로 향했다. 한참 시민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데, 칠순의 한 할매가 노의원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요새 김석준이 잘 있나?”

민주노동당 대표 선수된 신동 김석준

아니, 부산의 칠순 할매가 ‘노회찬’을 알아보고, ‘김석준’ 안부를 묻다니. 뭔가가 있다고 생각한 노 의원은 그 할매에게 “우째 잘 아시냐”고 물었다.
할매, 과거를 회상하듯 먼 산을 바라보며 하는 말씀.
“내 김석준이 어릴 때부터 잘 안다. 우리 동네 ‘신동(神童)’이었지”

   
 
아닌 게 아니라 5대 종손인 그는 경북 봉화에서 부산 우암동, 감만동 양철지붕 ‘뜨거운 집’에 터를 잡은 어린 시절 이후 가족들과 주변의 지대한 관심을 온몸으로 받으며 커왔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살던 동네. 대문에서 바라보던 북항과 영도 봉래산의 세 봉우리.

김후보의 할아버지는 약주 한잔 걸치시면 어린 손자를 불러놓고 “세 봉우리가 보이는 집에서는 정승이 난다”고 하시면서 ‘가문을 일으키고 큰 인물이 되라’고 하셨단다. 그 소리를 또 하시고, 또 하시고 했단다. 하지만, 인생에는 평탄대로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감만동 신동은 감만동 출신으로는 최초로 부산중학교에 붙겠다고 자신했지만 입학시험에서 낙방했다. 2차로 동아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절치부심을 거듭하여 부산고등학교에 수석 입학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었다.

적을 알면 백전백승. 라이벌로 여기는 부산중학교 학생들 중 누가 공부를 잘하나 알아봤다. 그의 라이벌은 네 명으로 압축되었다. 부산중학교의 라이벌 중 하나가 지금은 의원이 되어 자신의 선거운동을 지원하러 내려온 노회찬 의원이었다.

그러나 이 네 명의 경쟁자는 다들 서울에 있는 경기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 김석준의 부전승으로 끝났다.

네 명 중 세 명은 대학에서 만났지만, 고대에 입학한 노회찬은 만나지 못했다. 다시 김석준에게 노회찬이라는 이름이 들려온 것은 바로 ‘인민노련’이 등장한 그때. 이후 민주노동당에서 김석준 후보는 ‘얼굴 없는 라이벌’이었던 노회찬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김석준 후보의 선대위원장을 맡고 있다. 둘의 관계는 맞수(?)에서 동지로 바뀌었다.

우공(寓公)의 선택, 진보정당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신동(神童) 김석준의 자호(自號)는 우공(寓公), 어리석은 늙은이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은 그의 인터넷 필명이다.

전국 최연소 교수가 되었고, 촉망받는 연구자의 길을 박차고 민주노동당이라는 길로 들어선 것만 보아도 그의 호는 잘 지은 듯도 하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성공을 바라는 그와 필자의 견해로 봐서는 민주노동당은 ‘남는 장사’이기도 한데, 그리 보면 우공(寓公)인지 현공(賢公)인지 헛갈린다.

   
 
2000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부산시당 정책위원장의 역할을 하던 그는 박순보 선생에 이어 부산시당의 대표 역할을 맡게 되었다. 당시 연제구에 출마한 박순보 선생이 예상보다 못한 8% 지지에 머물고, 당은 등록해소가 되면서 일정하게 패배감이 엄습하던 시기였다.

그는 당의 해결사 역할을 자처한다. “2년 남은 2002년 지방선거를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장에 걸맞게 지방선거 준비팀을 꾸렸고. 당시에는 획기적이었던 두툼한 지방선거 공약집도 만들었고. 부산지역의 힘으로. 그러다가 부산시장 후보까지 나가게 되었고 지부장까지 하게 된 거지.”

당시 그는 16.8%라는 높은 지지율로 민주노동당의 최대 승부처였던 부산, 울산, 경남 ‘진보벨트’의 중심에 우뚝 서 있었다.

김석준 후보가 진보정당에 대한 관심을 가진 것은 대학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당시 학생운동을 하던 동료들과 당시 김철이 이끌던 ‘사회당’의 강령을 구해 학습하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그가 진보정당에 대해 고민하던 시절은 ‘국민승리 21’이 만들어지던, 민주노총이 정치세력화를 본격화하던 그 시기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그는 노동자, 민중이 중심이 되는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97년, 민주노총의 개량화에 대한 우려들이 조금씩 싹트고는 있었고 정치세력화에 대해 수많은 문제제기들이 있었지만, 그는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이 결의를 했다. 입맛 맞는 거 찾으려면 어느 세월에 되겠나. 부족하더라도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국회의원 노무현을 향한 일갈, “진보정당을 만들자”

때는 1990년 1월 22일, 노동자 대중운동이 전노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던 순간 민정당, 민주당, 공화당은 3당 합당을 통해 보수대연합을 공표했다. 당시 민주당 국회의원이던 노무현 의원은 부산 신선성당 주임신부였던 송기인 신부에게 부산지역 재야 세력을 모아달라고 요청한다.

당시 전교조 교사들, 민교협 교수들, 민변 소속 변호사들, 청년학생들이 모여 비공식 연석회의 또는 간담회 형식으로 모였다. 민주당 잔류를 선언한 노무현, 김광일, 김정길 의원도 참석했다.

이날 발제를 한 노무현 당시 의원은 “국민이 만들어준 여소야대 지형을 배신하고 3당이 합당했다. 야당하라고 했는데 여당으로 간 것은 시민을 배신한 것이다. 현재 민주당은 무주공산이다. 변호사, 교수, 교사, 청년학생 모두 민주당에 들어와서 지구당 하나씩 차지하자. 그러면 다음 선거에 모두 당선된다”고 말했다.

   
 
김석준 후보는 노무현 의원을 정면에서 비판한다.
“87년 대선 당시도 YS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노태우가 31%를 득표했다. 31%는 골수 보수층이다. YS 찍은 55%는 YS가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30%가 따라간다. 지금부터 정치지형이 바뀌는 거다. 부산은 이제 야당도시가 아니고 여당도시, 보수도시가 되는 거다. 노무현 의원이 정말로 노동자들을 위해서 싸운 국회의원이라면 민주당 같이 하자고 할 게 아니다. 기왕 3당 합당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이참에 노동자 민중과 함께 진보정당 만들자고 제안하는 게 맞는 거다.”

그날로 노무현 의원은 ‘삐껴서’ “교수, 재야하고는 다시는 같이 일 안 한다”고 선언했으며 판은 깨졌다.

어쩌면 노무현 후보에 대한 일갈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리고 운동진영 전체에게 가한 일갈일지도 모른다. 거창에서 일어난 민주노동당 후보의 돈봉투 사건은 진보정당운동의 도덕성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김석준 후보는 노무현 정부의 허점을 “사회 전체를 경영하고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모자란다.”고 비판했다. 민주노동당에게도 해당된다고 그는 강조한다.

복지 예산 30% 확대…임산부와 12세 이하 무상의료 실시

민주노동당 김석준 부산시장 후보의 선거 슬로건은 ‘서민행복특별시’이다. 지난 선거 때의 ‘4번타자 김석준, 부산을 바꾸자’의 슬로건에서 진일보한 느낌이다. 그만큼 민주노동당은 4년 전에 비해 부산에 대해 많이 연구했고 정책을 생산했다.

“지난 선거 때 공약 중 많은 부분은 부산시나 중앙정부에서 상당 부분은 이미 시행하거나 시행을 계획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선거 준비 과정에서는 빠진 부분과 업그레이드 시켜야 할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썼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복지예산 30% 확대와 이를 기반으로 한 부산시 차원의 ‘임산부와 12세 이하 아동에 대한 무상의료 실시’이다.

   
 
흔히 얘기하듯이 지방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이 극히 미미하고 조세의 개혁을 수반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게 지역의 현실이다. 전국 최고의 (청년)실업률과 전국 최고의 비정규직율, 전국 최저의 출산율(0.98)을 자랑하는 부산에서는 무엇보다 복지공약이 필요한 조건이다.

한나라당 허남식 후보는 2020년 부산 인구를 450만으로 예상했지만, 김석준 후보는 이러한 과도한 인구 예측이 난개발과 재정 낭비를 부추긴다고 비판했다.

또한 그는 고용평등과 노동권리 확보를 위한 지자체의 계약준수제, 공공기관의 비정규직 단계적 철폐, 중소기업 취업보조금을 통한 1만 명 청년 일자리 창출, 대형할인점 진입규제와 영업시간 제한 등도 내세우고 있다.

부산시의 가용예산 8,000억 원 중 60%가 길 닦는데 들어가는 조건, 이것을 포기해야만 부산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중앙정부의 실업대책 예산 중 1/10만 부산에서 쓰면 청년실업을 상당히 해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민주노동당 부산시당의 돋보이는 점은 부산시 ‘자체 예산 확보’가 ‘가능하다’, ‘대안이 있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여기에는 김석준 후보와 함께 1년 이상을 함께 해 온 부산시당 정책위원회의 역할이 매우 컸다. 김석준 후보는 ‘부산박사’라는 별칭답게 1년 넘게 정책위원회 활동에 빠짐없이 결합해 왔다.

민주노동당, 정파 구도 운동권적 선민의식 벗어나야

사실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참여정부로 많이 흡수되었고, 지식인운동의 양적인 노력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학생운동도 거의 소멸했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할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김석준 후보 역시 이런 부분에 고민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처방을 제시한다.

“이제 대학에 기댈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 대학의 교수들에게 일정한 역할을 기대왔지만 이제는 할 사람도, 하고자 하는 사람도 없다. 다른 ‘진지’를 고민해야 한다. 당과 노동조합에서 일정하게 경험이 축적된 사람들, 검증받은 사람들을 우리는 당이라는 진지를 통해서 실력을 쌓도록 해야 한다. 20년 앞을 내다보고 운동사회와 당의 인적자원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인적망을 마련해 나가는 것을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일할 사람도 없지만, 그나마 있는 사람들조차 정파와 이해관계 속에서 소통이 어렵거나 아예 없다.

“인력을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방선거 이후에는 이런 상황이 온다. 사회 내에서 민주노동당에게 자기내적 한계, 예를 들어 정파구조나 운동권적 선민의식 등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은 싫건 좋건 요구받게 되어 있다.

   
 
당내 대중정치 지도자도 의도적으로라도 키워야 한다. 우리의 이상한 풍토중 하나는 자기보다 크면 눌러 앉히려는 습성이 있는 것 같아. 열린 마음을 가지고 크게 그림을 그리면서 서로를 끌어올려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당의 외연도 넓어지고 실력도 커지는 것이다.”

“실력 있는 대중정치 지도자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도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다. 아닌 말로 ‘봉기’를 통해 집권한다고 해서 국민들이 인정해 주는 게 아니다. 확고부동한 지지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을 ‘우공훈련소’로 만들어 한국사회 방향을 바꾼다

지방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마련하고, 지방정부에서의 당선과 집권을 통해서 자기 역량을 축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민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 진보가 과격하고, 어설프고, 촌스러운 게 아니라 세련되고, 능력 있는 게 진보라는 이미지를 심어줘야 한다. 정책도 제일 낫네, 사람도 제일 낫네 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예를 들어 울산이나 부산 또는 광역단체가 아니라도 거제와 같은 기초단체 등에서 단체장이나 의원으로서 검증받고 실험하고 공유하고 실천해 나가는 진보적 지역정치의 광범위한 실천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김석준 후보는 지난 2000년 이후 지방선거 이전에는 정책위원회를 중심으로 지방선거팀을 준비했었고, 2002년 지방선거 이후에는 ‘진보를 위한 부산정책연구소’를 만들었다. 현재 여러 조건 때문에 연구소 활동이 도중 중단되기는 했지만, 그는 지역의 집권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그야말로 선두에서 고민하고 실천해 왔다.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은 외국 진보세력의 지방전략에 대한 책을 번역 작업하기도 했다. 만약 이 책이 조금 더 일찍 출간되었더라면 얼마 전 출간된 진보정치연구소의 『런던 플랜』과 함께 당원들의 필독서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김석준 후보의 눈에는 민주노동당이 명실상부한 ‘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우공훈련소(寓公訓練所)로서의 당을 만드는 것, 이 훈련소가 한국사회의 경로를 ‘역사적인 회군’을 통해 수정하는 꿈을 그는 지금도, 예전에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자기관리와 겸손의 대명사 김석준

김석준 후보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겸손함에 놀란다. 어디서든 얼굴 붉히는 일이 없다. 점잖게 얘기를 하는 그의 모습을 보노라면, ‘진보의 겸손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어떻게 보면 돌아가신 故 김진균 선생님의 풍모가 느껴지기도 한다.

본인 스스로는 설레설레 손사래를 치겠지만. 자기 스스로를 우공(寓公)으로 낮추는 것, 그 능력이 그를 노동자 민중의 지도자로 붙잡아 두는 힘일 것이다. 노동자 민중에게 민주노동당은 확실한 대안이고, 그는 민주노동당의 확실한 대안이다.

그는 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이다. 세 번의 선거를 치러내면서 부산의 당원들은 그의 체력에 혀를 내둘렀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하여, 부산에서 김해까지 축구 원정경기를 다니고, 탁구, 달리기 등 못하는 운동이 없는 그다.

등산도 즐겨하고 운동도 즐겨한다. 얼마 전 지명(知命, 50세)에 이른 그가 아직도 민주노동당 체육대회에서 각종 종목의 ‘대표선수’로 선발되는 것을 보면 당으로서는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아직 당은 그를 부릴 수 있다. 그의 체력은 곧 부산당원들의 자존심이다. 부산시당 소식지에 실릴 예정인 어느 당원의 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지난 2003년 민주노동당에는 ‘진사달’이라는 모임이 있었다. 이름 하여 ‘진보사랑 달리기 모임’. 김석준 후보와 더불어 음주가무로 상태 안 좋은 몇 명의 당원들이 주요 회원이었다. 마라톤 1시간 하고 뒷풀이 술을 몇 곱절 시간으로 마셨다. 술 마시기를 철인마라톤대회 수준으로 했으니 살이 빠질 이유가 완벽히 없다.

결국 ‘진사달’ 모임도 반년 정도 유지되다 흐지부지 됐다. 하지만 김석준 후보는 매년 주요 마라톤대회에 참가해 달리기를 계속했다. 마지막 남은 ‘진사달’ 회원이었다. 지난 5월 7일 노동절기념 마라톤대회가 다대포 해안도로에서 있었다. 김석준 후보도 10km 코스에 참가했다. 김석준 후보의 전력을 잘 모르는 참모들은 대회가 있기 전부터 5km만 뛸 것을 권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석준 후보는 이날 10km코스를 59분34초99의 기록으로 완주해 참모들의 우려를 잠재웠다. 이 날 열린우리당 오거돈 후보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지만 500미터 정도 뛰고 말았다고 한다. 김석준 후보는 매년 노동절기념 마라톤대회와 각종 대회에 참가해 노동자, 서민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다. 마지막 남은 ‘진보사랑달리기’ 회원 김석준 후보, 그가 진짜 노동자, 서민 후보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박진현 부장)

   
 
그는 오래 전부터 운영하던 자신의 홈페이지에 꾸준히 일기를 써오고 있다. 홈페이지 주소도 부산시장답다. 선거운동 하느라 새벽 한 두시에 귀가를 하지만 자신의 활동을 인터넷 공간에 꾸준히 알리고 있다.

“어제는 밀린 거 이틀 치 쓰는데 정말 졸려가지고, 자판 두드리는데 눈이 감기더라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봤어요. 횡설수설한 거 같아서. 보니까 문장은 되더라고. 그래서 놔뒀어.”

그의 세심함. 그의 자상함. 그의 겸손함. 그의 굳건함. 70년대 긴급조치 9호 세대인 그가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에 투신한지 30년이 흘렀다. 하지만 그의 이력과 성품으로 봐서는 여전히 그에게 한국사회와 부산은 애증의 교착점이며 변화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는 오랜 세월을 탓하지 않는다. 무릇 우공에게 산을 옮기는 일은 단시간에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 한국 사회의 변화는 애초부터 자신의 평생의 과업이었다. 업보다. 그 업보를 모두가 함께 나누어 짊어지는 것, 세대를 이어 해 나가는 것, 이것이 우공의 꿈이 아닐까? 더 많은 우공들, 젊은 우공들을 그와 내가, 우리 모두가 기대해 본다.

 
2006년 05월 22일 (월) 09:26:35 양솔규 / 영남노동운동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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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2006.4.12]한나라당이 민주노동당원을 추적하고 있다?

 
 
 
 
> 뉴스 > 정치
 
 
한나라당이 민주노동당원을 추적하고 있다?
 
2006년 04월 12일 (수) 16:58:47 양솔규 현장기자
 

2002년 12월, 경남 창원에서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 선거운동을 하던 나는 알고 지내던 경남도민일보 기자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노무현을 지지하는 청년?

“양솔규씨, 민주노동당 탈당했어요?”
“아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신문사로 노무현 지지 팩스가 날라왔는데 양솔규씨 이름이 있더군요”
“띵~”

대선을 며칠 앞둔 상태에서 어느 노무현 지지자가 마산, 창원, 진해 등 경남의 동문회 등을 통해 학생운동 출신들을 조직해서 대선날짜를 상징하는 “노무현을 지지하는 경남 청년 1219인 선언”을 한 것이다. 흥분한 상태에서 신문사에 팩스를 보낸 사람에게 항의 전화를 했다.

“나는 민주노동당원인데 노무현 지지선언에 내 이름이 들어간 경로를 알려 달라”
“잘못은 했으나 나도 그건 모른다”
결국 여느 항의 전화가 그렇듯이 육두문자가 오간 후
“너 그 자리에 있어. 내 금방 갈테니까”
하면서 막을 내렸다.

전화를 끊자 경남도당 당원들이 “이중당적이 아니냐”는 눈초리와 의구심을 보내는 것이 아닌가. 나 그렇게 막 살지 않았다.

한나라당 마산시장 경선 여론조사를 민주노동당 부산당원에게?

   
 ▲ 필자에게 온 한나라당 마산시장 선출 여론조사 문자메시지
 
2006년 4월 11일 화요일 1시 51분, 낯선 그 남자에게서 문자 하나가 날라 들었다.
내용은, 한나라당 마산시장 후보 전수식, 황철곤의 여론조사를 통해 후보를 선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시덥지 않은 문자에 내 바쁜 일상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문자는 계속 이어졌다. 항의 전화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제발 전화 한번 걸어달라는 투다.
문자를 보낸 이에게 항의 전화를 했다. 하지만 전화가 꺼져 있다. 꺼진 전화가 문자를 보내다니. 무서워진다.

다음날,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저 편의 중년의 남자는
“자신이 보낸 것은 맞지만, 잘못 전송된 것 같다. 자기는 한나라당 당원도 아니고…”
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선관위에 신고할테니 그리 알라” 하고 일단 전화를 끊었다.

4월 12일 오후 12시 56분과 1시 45분에도 문자가 날아왔다.
이번에는 발신자 번호가 412로 뜬다. 아마도 한나라당 마산시장 후보 여론조사일인 4월 12일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이번에는 한나라당 경남도당으로 전화를 했다.

“우리는 모르는 일이다.”
“그럼 귀신이 보냈나? 한나라당 두 후보가 경선하는데 열린우리당에서 보냈냐? 민주노동당에서 보냈냐? 상식적으로 두 후보 측에서 보낸 거 아니냐?”
“왜 사람 말을 못 믿냐? 우린 보낸 적 없으니 선관위에 고발하든 말든 그건 댁이 알아서 해라”

경남 선관위에 고발을 하고 마산 선관위에 문의를 해보니
“지금 조사 중이다. 특정 인물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고 여론조사를 한다는 정보 정도로는 어떤 판단을 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마산 유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애매한 부분이 많다”고 한다.

한나라당 어느 후보 측에서 보냈는지, 단순한 한나라당 지지자가 보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마산과 한나라당과는 아무 상관없는 부산의 민주노동당원에게 도대체 왜 문자를 보내는 것일까?

노무현 지지선언도 하고, 한나라당 여론조사 대상자도 되어 보고. 선거는 참 희한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혹 나도 모르게 한나라당 당원이 되어 있는 건 아닌지.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정치적이었나? 나 그렇게 어리석게 살지 않았어.

듣자하니 한나라당 마산시장 선거에 현 시장과 전 부시장이 한판 붙는다고 한다. 여론조사 끝나기도 전부터 공정성 시비가 일고 있다. 어쩌면 여론조사 결과에 한나라당 경선 후보들은 불복할지도 모른다.

경남선관위와 한나라당 경남도당, 지역의 언론사 게시판에는 “제발 문자 보내지 말아 달라”는 글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 과거 야성(野性)이 강한 도시 중 하나였던 마산은 그러나 90년대 내내 보수와 토호의 아성이었다. 비리나 선거법 위반 혐의로 시장이 줄줄이 사퇴했고 국회의원이 구속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강건한 보수의 진지다.

더 이상 마산은 ‘파란 물이 넘실대는 가고픈 곳’도 아니고, 노동자, 서민에게는 여전히 팍팍한 삶의 터전일 뿐이다. 드라마 ‘야망의 세월’에서 정태(최수종)는 실미도에서 돌아와 마산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지금의 마산은 고향의 품과는 다르다. ‘끗나뿌린 마산의 품’을 한나라당이 채워준다고? 그 팍팍함을 더해줄 한나라당 시장 여론조사 결과는 차라리 재앙이 아닐까?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양솔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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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실>2006.4월 저무는 골목 안, 역사와 출구- 마창3부작

 

*출처: 영남노동운동연구소(http://www.ynlabor.net) <연대와실천>2006년4월호(제142호)


저무는 골목 안, 역사와 출구 - 마창 3부작

양솔규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지난 2월 25일, 신문에 실린 기사 하나가 내 눈을 잡았다.

“구로 노동자 문학회, 문패 내리던 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 자신이 문학에 그다지 관심이 있다거나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고, 90년대 초반 이후에는 매니아급의 문학 편력을 펼친 것도 아닌데, 횡한 바람이 가슴 한켠을 휩쓸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18년의 역사, 그러니까 1988년의 첫 시작의 설레임이 끝난 것이다. 마치 수줍은 손 잡던 연애가 파경으로 끝나듯이. 노동자의 글쓰기, 자기고백과 성찰, 현장성 있는 삶글, 이러한 수식들이 여러 문학단체나 행사들을 규정해주던 그 시기는 지났는가?
글만이 아니다. 이젠 민중가요도 보급되지 않는다. 김호철의 새 노래가 나왔다고, 테잎 하나 사서 복사해서 듣고는 뒷풀이 자리에서 문화의 전도사인양 목청 돋우며 ‘잘난 체’ 하던 그런 장면은 이제는 없다. 오로지 ‘파업가’와 ‘단결투쟁가’, ‘철의 노동자’ 등 몇 곡 외에는 듣지도, 부르지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신곡이 나오지 않느냐? 지금도 많은 문화활동가들은 앨범을 내고, 공연도 하지만 문화를 향유해야 할 동지들은 관심이 없다. 신곡을 풍성하게 담은 민중가요 노래책이 나오지 않은 지도 꽤 오래 된 것 같다. 많은 노동조합들은 집회용 CD를 제작보급하지만 신곡은 절대 없다. “내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10곡 넣을 때, 한 두곡씩 넣으면 안 되겠니?”
진보운동 속에서 문화운동을 고민하고, 급진적인 문화와 사회적 파급력을 고민해도 실천적으로 향유하지 않는 한 찻잔 속에 태풍이 될 수밖에 없다. 칠레와 네루다의 시, 빅토르 하라의 절절한 노래, 80년대 한국민중운동과 민중문화운동, 그 속에 있던 임진택과 오윤과 홍성담과 김호철. 알고 있으나 지금은 고민되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풀 수 있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날 보고 신세조졌다 한다, 동료들은 날 보고 걱정된다고 한다……노동운동 하고 나서부터 참 삶이 무엇인지 알았네.” 한국 노동운동의 또 다른 중심축이었던 마산창원에서 고승하 선생의 ‘고백’이라는 노래가 불리워지고, 전국적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던 시절, 확실히 입소문과 귀동냥의 강력한 파워는 그 시대를 풍성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그 마창에서 2005년과 2003년, 세 권의 책이 나왔다.

『마산 창원 역사읽기』(불휘, 2003)는 노동자들의 책은 아니다. 오랫동안 마산창원지역을 연구하던 마산창원지역사연구회에 있는 교수 또는 언론인, 전교조 선생 등이 쓴 글을 모은 책이다. 마창에서는 꽤 유명한 홍중조, 김재현, 이은진, 김주완, 김용택, 김건선, 박호철, 유장근, 박진해 선생 등이 쓴 책인데, 필자가 다양한 만큼이나 다양한 주제와 꼭지로 마창 지역의 오래된 역사를 재미있게 소개 하고 있다. 이 책이 나온 것을 처음 안 것은 2월에 마산 전교조 사무실에 갔을 때였다. 사실 필자도 이런 책이 나왔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청동기시대부터 10.18까지 여러 꼭지를 실었고, 이원수나 이은상, 장지연 등의 인물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면서 마창의 역사를 풀기도 한다. 또한 마창 노동자들의 삶과 밀접하거나 밀접했던 공간들, 예를 들어 어시장, 『마산문화』, 결핵병원과 월영대, ‘책사랑 도서관’ 등에 대해서도 소개를 하고 있다. 민간도서관 책사랑은 88년 처음 문을 열었는데 지역 노동자들의 이용에 초점을 맞추었고, 하루 이용자가 200명이 넘었으며 개관 후 6개월 만에 가입자가 1만 명을 넘었다. 서울로 치면 ‘사회과학 서점’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 마을 도서관의 성격을 혼합한 것이다. 여타 공간과는 다른 독특한 문화와 역사를 간직하는 ‘지역’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가? 새삼 부끄러워지게 만드는 책이다. 마산 오동동에 있는 ‘불휘’라는 지역 출판사가 정성스럽게 편집을 했으나 불행히도 품절된 상태이다. 부산에도 ‘산지니’라는 출판사가 있다. 과연 지금 부산, 울산, 경남에 있던 얼마나 많은 출판사들이 문을 닫았을까 생각해보면 지역의 ‘문화공동화’를 걱정하게 된다.

『출구』와 『저무는 골목에서 삶을 만나다』는 문학도서이고 비매품이다. 두 권 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옛 문예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만든 책이다. 『출구』는 구로노동자문학회와 함께 노동자문학운동을 해온 ‘마창노동자문학회 참글’의 열두번째 작품집이다. 구로노동자문학회 관련 신문기사의 부제는 이렇게 되어 있다. “노동자의 삶글 쓰기 어디서 ‘출구’ 찾나?” 막힌 출구를 부여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창노동자문학회 작품집『출구』라는 제목은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출구를 못찾은 구로노동자문학회는 결국 자기 손으로 스스로를 정리했고, 마창노동자문학회 참글은 『출구』라는 작품집으로 ‘출구’를 찾고 싶었을까?

문학회 회장 김건곤 형의 말을 들어보자.

이번 작품집은 5년 만에 발간되는 것이라 그런지 다른 어느 해 보다 감회가 다른 것 같습니다. 5년 도안 참글이 무엇을 했는지 일일이 기억조차 힘들지만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2006년에는 헤어진 발길들도 하나, 둘 참글로 돌아오는 꿈을 꿔 봅니다.

힘들게 힘들게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마창노동자문학회 참글의 처지가 과연 구로노동자문학회보다 나을까? 자신의 삶만큼이나 문학회 활동이 힘들테고, 그 힘든 삶들이 문학회 활동을 더 힘들어 할테고, 부족함이 채워지지 않으나 삶을 참되게 증명하기 위해 5년 만에 작품집을 낸 그들에게 우리는 사실은 무관심하지 않았나? 5년 동안 공장을 다니며 삶과 문학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 했으나 그 어느 것도 손아귀에 잘 달라붙지 않았을 지도, 그래서 스스로 무기력해졌을 수도 있겠다.

“문학이 부박해지고 노동자 민중의 통 큰 감동을 상실한 것은, 문학자체가 노동자 민중의 대지를 떠나는 것을 넘어 최소한의 70년대식 친구 의식조차도 버거워 한 그 순간이다”

결국 삶의 문제이다. 지난 5년보다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우리의 주위를 힘겹게 한 발 한 발 딛는 것이 숙제일테다. 참글이 그랬듯이. 우리에게도. 모두에게도.

『저무는 골목에서 삶을 만나다』는 2004년 마산창원진해 문학교실을 수강한 사람들을 주축으로 하고, 2005년 ‘마창노동자문학회 참글’에서 주최한 ‘르포문학 실기교실’에서 공부하고 취재하고, 발로 돌아다니면서 만든 책이다. 마창에서 오랫동안 고독하게 노동문학을 움켜쥐고 있는 김하경 선생이 두 행사의 중심에 있었고, 남해에 사는 괴짜(?) 사진작가 오남해 형이 마산창원진해를 다니면서 구석구석을 필름으로 기록했다. 글은 노동문학을 하는 오도엽 시인과 정윤, 이일균 도민일보 기자와 김규석, 신미란, 박미영 등이 썼다.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마산창원진해의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노인네들이나 토박이들에게서 그 동네의 애환과 변천, 고민과 부대낌을 담았다. 한때 전국 7대 도시에 들었다던 마산에는 어시장과 원조 아귀찜에 얽힌 사연들, 오동동 나래비골목과 통술집의 주당들의 취중추억이 빼곡하게 숨쉬고 있다. 마산의 관문인 양덕동에는 지금은 없어진 한일합섬, 이를 대체한 한일타운 아파트, 당시의 눈물나는 설움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한일여실 출신의 노동자들이 있다. 부림시장 옆 도둑놈 골목에는 ‘인자 이 골목은 끝나 뿟어’라고 말하지만 이 골목에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고, 그게 마지막 고집인 삶이 있다.

영원히 사라지는 게 있는가 하면, 사람의 기억은 지웠다가도 되찾을 수 있다. 콘크리트 지우개로 하나씩 지워져 가는 양덕동 골목, 결코 지울 수 없는 것이 보인다.(오도엽, 129쪽)

그렇게 되살아난 마산창원의 질긴 삶들이 담겨 있는 이 책을 보면서, 부산과 울산에는 얼마나 또 기가막힌 사연들과 변화들, 애환과 진솔한 재미가 흘러넘칠까 궁금해진다. 하지만 그 궁금증은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워질 수도 있다. 그래서 안타깝다.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이제 그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사진 한 장이라도 찍어둘 걸. 뼈아픈 반성이 회한으로 변했다. 사라져가는 골목과 거리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없어지기 전에 빨리 기록해야 한다. 바로 지금이다. 기록의 필요성이 절박해졌다.(김하경, 9쪽)

그나마 마창이라서 이런 걸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게다. 울산도, 부산도, 거제도 골목 안 이웃들이 있고, 거리엔 노동자들이 있다. 때론 안타까움이 용기를 갖게 만든다. 부디 그 용기가 충천해 돌아봄의 용기로 울산과 부산을 휘감기를 바란다. 역사를 만들고 기록하는 것은 출구를 찾는 것에 다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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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실>2006.2월 &quot;68운동&quot;

 

출처: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2006년 2월호

1) 이희영, 「한국 80년대 세대의 초상화: 독일 68세대와의 비교」, 이해영 엮음, 󰡔1980년대 혁명의 시대󰡕, 새로운세상, 1999년

 

[68운동]

양솔규(redstar@jinbo.net)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그의 유명한 저서 󰡔반체제운동󰡕 에서 “이제껏 세계혁명은 단 둘뿐이었다. 하나는 1848년에, 그리고 또 하나는 1968년에 일어났다. 둘 다 역사적인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둘 다 세계를 바꿔 놓았다”고 쓰고 있다. 1968년 혁명에 대한 웬만한 책들의 서평에는 거의 월러스틴의 언급을 빠뜨리지 않고 쓰고 있다. 본 서평도 어쩔 수 없이 월러스틴의 언급을 인용하고 말았는데 거기에는 한국 사회의 지적 변화를 언급해야 할 것 같아서이다. 월러스틴의 평 중 가장 중요한 언급은 1968년 혁명이 ‘세계’혁명이었다는 점도 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두 혁명‘만’이 세계를 ‘바꿔 놓았다’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두 혁명 외의 다른 혁명들은 세계를 바꿔놓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잉글리트 길혀-홀타이,『68운동』, 2006.1, 들녘코키토, 12,000원

사실 1980년대 운동권에게 있어서는 1968년 혁명은 거의 금기시되거나 애초 관심 밖이었던 것 같다. 내 자신이 그 세대가 아니어서 잘은 모르겠으나 그 시대는 소위 ‘혁명의 시대’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1968년 혁명과는 달리 80년대 꿈꾸던 혁명은 레닌의 혁명, 전위정당의 혁명을 뜻했다. 또는 대중조직의 성장을 담보해야만 하는 시기였다. 한마디로 ‘정치적으로 바빴고’ 바빴기에 빠른 길을 원했다. 68혁명과 같은 패배한 길보다는 ‘승리’가 필요했고, 그 염원은 서유럽보다는 러시아로 시선을 향하게 했다.

 

60, 70년대 젊은이들에게는 정확히 1968년의 영향이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유추해보자면 박정희의 쿠데타와 유신의 치하에 있었고, 좌파는 한국전쟁으로 소멸되었으며, 대학가는 여전히 80년대에 비해 느슨했다고나 할까? 대학가 밖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는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었고, 공화국은 도로 닦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68세대의 문화적 유산이 흘러들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전위예술의 소문이, 다른 한편으로는 비틀즈와 밥 딜런, 존 바에즈의 노랫소리가 말이다. 그렇다고 현해탄 건너편 일본의 좌파들이 나리타 공항에 상륙한 1968년의 세계적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있을 때 한국의 60, 70년대 젊은이들은 라디오나 듣거나 대학로 학림다방에 죽때리며 띵가띵가나 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섭섭해 할 지도 모르겠다. 대신 한국의 젊은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전쟁터였다. 베트남 전쟁에 총알받이와 살육자로 떠나야 했던 청년실업자들, 청년 노동자들이 있었다. 김수영은 이렇게 썼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이 혁명은 4.19혁명을 말한다. 혁명이긴 혁명이네.

80년대 젊은이들에게 그 시대는 ‘정치적으로 바쁘고’, ‘정신적으로 바쁜’ 시절이었겠지만, 60, 70년대 젊은이들에게 그 시대는 ‘경제적으로 바쁘고’, ‘육체적으로 고된’ 시절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40년의 세월이 다 되어가는 한국의 ‘지나가시는’ 세대들이나 68을 만든 외국의 ‘지나가시는’ 세대들의 젊은 시절을 논하는 것은 어쩌면 쓸데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클린턴도 힐러리도 블레어도 그 세대니.


80년대 프랑스의 5월운동에 관한 책이 번역되어 나왔으나(일월서각?) 그다지 관심을 끌었던 것 같지는 않다. 1979년 한나 아렌트의 「공화국의 위기」에 68학생운동과 관련한 표지 사진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나 어렸을 적 엄마 책꽂이에서 본 기억이니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회학에서는 신좌파의 스승들(밀즈,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한 관심은 80년대 이래 사라졌고 레닌이 사라진 후 ‘신사회운동’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철학도 마찬가지였고, 정치학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과 알게 모르게 연결된 1968년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는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나타났다. 1968년의 주역이었던 타리크 알리와 죠지 카치아피카스 등의 책이 출간되었다.

오랜 잠복기간을 지나 1968년에 대해 이제는 수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번역되기 시작한 1968년 혁명에 대한 책들은 이미 부담스러워지고 있다. 인터넷 블로그와 까페에는 1968년에 대한 기사, 논문, 책줄거리, 서평들이 꽉 차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심사는 저절로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학생운동의 쇠퇴가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분명해지던 시기인 1990년대 초반, 한국 학생운동의 한 정파는 1968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이무렵, 이들의 정치학교 자료집 “조반유리(造反有理))”에는 1968년에 대한 자료들과 해설들이 알차게 들어있다. 좌파의 보다 정통적인(?) 분파들은 이 정파를 심각한 어조로 훈계 내지는 조롱, 경계하였으나 대부분의 훈장님들은 이제는 자취를 감추었다. 예전 소련에서 번역된 「철학사전」(동녘)에는 1968년 사상가들과 이 운동에 대해 과연 훈장님처럼 비난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또 다른 한국 학생운동의 정파는 독일의 ‘자유대학’ 개념을 본따 ‘제3대학’ 등을 열기도 했다.

2000년 하고도 벌써 6년이 지난 지금 세대들에게 이 사건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사실은 필자의 세대에게도 뭔가 이상하게 받아들여졌듯이 지금도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뭔가 있는 듯 하나 뭔지는 모르겠는. 어쨌든 바꾼 혁명!

1월 25일에 출간된 따끈따끈한 책, 「68운동」은 이전의 1968년에 대한 책들에 비하면 매우 훌륭한 장점이 있는데 그것은 매우 짧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다. 이전의 책이 베트남 전쟁 등의 사건을 잘 알고 있거나, 마르쿠제, 아도르노, 밀즈 등의 사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재밌게 읽힐 수 있지만 이 책은 그렇지는 않다. 짧고 어렵지 않은 것. 그건 활동가들 취향이기도 하고, 직장인들 취향이기도 하다.

이 책을 쓴 잉그리트 길혀-홀타이는 빌레펠트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이다. 독일 역사학계에서 1968년 혁명에 대한 연구를 선도적으로 하고 있는 교수라고 한다. 이 책에는 1968년의 혁명의 사상, 혁명 전야의 스케치, 혁명 와중의 사건들, 문화, 동원 과정, 그리고 운동의 붕괴와 그 영향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흔히 1968년의 세계적 사건을 각 나라별 차이점을 부각시키기도 하지만 이 책은 독일, 서유럽, 미국의 혁명과정의 공통점을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1968년 혁명은 무엇보다 맑스주의 이론을 새롭게 해석했다. 교조적인 정통 맑스-레닌주의에 반기를 들었고 이러한 이론의 새로운 해석은 이후 맑스주의와 전세계 좌파의 사상적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또한 이들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었지만 ‘구좌파’에게도 반기를 들었다. 이들이 보기에 몇 가지의 사건들 ‘프라하의 봄’, ‘헝가리 침공’은 소련 및 구좌파의 숨길 수 없는 치부로 보였으며 사회주의의 새로운 차원과 경로를 인식해야만 하는 증거로 보였다.

민주노동당이 내세우는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애매모호하지만 의미 있어 보이는 그 용어는 바로 사민주의와 현실사회주의를 동시에 넘어서고자 했던 1968년의 깨달음이라는 점에서 1968년은 멀지만 가깝기도 한 과정이기도 하다.

네이버는 물론이고, ‘도전! 골든벨’에도 심심찮게 나오는 1968년이라는 주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다못해 조카나 후배가 물어볼 때 어슴푸레 대답이라도 해줘야 할 테니까. 1980년대를 살아온 분들에게는 이 책과 함께 각주의 논문이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1)

1960년대 세대 김근태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혹 ‘미워도 다시 한번’ 김대중이 아니라, ‘미워도 다시 한번 - 비판적 지지’가 또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오빠가 돌아왔다! 하면서! 1960년대, 당시의 날카로운 시대정신과 생동감만 가져오자! 68에서 후퇴하지도 말고, 스며들고 조우하며 전복하기로 하자! 어떻게? 책을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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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4.27시당논평>이념을 배제한 정당의 정체성? 우경화의 징후

<2004.4.27시당논평>이념을 배제한 정당의 정체성? 우경화의 징후

 

<논평>
이념을 배제한 정당의 정체성? 우경화의 징후
열우당은 히드라인가 카멜레온인가?

잡탕 열린우리당이 자신의 정체가 무얼까 목하 고민중이다. 그러다가 무릎을 치며 이렇게 외친다 “탈이념이라는 시대적 조류에 맞게 우리는 [개혁적 실용주의]다”라고! 이게 무슨 씨나락 까먹는 얘기냐 하면 어떤 바보가 “복사기냐 프린터냐? 니 정체를 밝혀라!” 그러니까 “복사기도 되고 프린터도 되는 그런 기계”라며 그 실용성을 자랑스럽게 선포하는 것과 비슷한 얘기다.

기계라면 괜찮은 얘기다. 그러나 국민을 대의하는 대의 정치에서 ‘부자도 대변하고 서민도 대변’한다면 그건 실용주의의 탈을 쓴 새빨간 거짓말이거나 정신분열이다. 총선 때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이 이런 말도 안되는 얘기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법인세도 깎아주고 복지도 확대하고’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은 때와 장소에 따라, 화자에 따라 달라진다. 열린우리당은 머리 아홉 개 달린 히드라인가? 죽 끓듯 변덕을 부리는 카멜레온인가?

‘이념은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면 모두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활동하는 것이 낫다. 개개 의원의 색깔이 다르다면, 어떤 근거로 정당을 구성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발언들은 열린우리당의 ‘잡탕’적 속성을 스스로 고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정동영 의장과 신기남, 김근태 당선자는 바로 3년 전 ‘사회개혁’을 외치던 소장파의 자리에 있었지만, 지금은 당의 지도부로 군림하고 있다. 불과 3년 만에 ‘개혁’이라는 ‘하고 싶은 정치’의 깃발을 버리고 ‘책임있는 정치’라는 미명하에 수구와의 타협을 준비하고 있다. 집권 과반수 당이 되자마자 국가보안법, 언론개혁 문제를 다루면 ‘정쟁의 소지’가 있다며 ‘중장기적 과제’로 미루려 하고 있고, 이라크 파병문제의 재검토는 ‘국가간의 합의’입네, ‘국회의 결정’입네 하고 구렁이 담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은 이라크 파병에 대한 태도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정간법 개정, 국가보안법 개폐, 집시법 재개정에 대한 열린우리당의 태도가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해 보일 것이다. 스스로 ‘개혁적 실용주의’라고 설레발을 치며 기회주의적 타협을 미화시키려 하지만 국민 모두를 계속 속이긴 힘들 걸!

2004. 4. 27. 민주노동당부산시당 대변인실

 

 

이창우 (2004-04-27 21:44:12)

양다슬님의 글을 좀 고쳐서 발표했습니다.
원문은 아래에 전재합니다.

이념을 배제한 정당의 정체성? 우경화의 징후
열우당은 히드라인가 카멜레온인가?

열린우리당은 오늘(27일) 당선자 워크숍 자리를 통해 “이념이 아닌 의사결정구조 속에서 정체성이 결정돼야 한다”고 밝혔다. 열린우리당은 자신들이 공언한 것처럼 역사상 처음으로 국회지배권력이 교체되었다고 한다면, 그 역사적 무게에 맞게 자신의 이념과 정체성을 명확히 하고 사회 변화를 끌고 나가는 책임 있는 여당으로서의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런데 ‘이념을 배제하고 실용적으로 접근’하겠다니. 정치의 담지자인 ‘정당’의 정체성은 ‘이념’을 통해 결정되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상식이다. 그런데,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은 때와 장소에 따라, 화자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인가? 열린우리당은 머리 아홉 개 달린 히드라인가? 죽 끓듯 변덕을 부리는 카멜레온인가?

소위 ‘개혁’을 자신의 이념으로 삼아, 또는 이미지화해 집권에 성공한 정권이 노무현 정권이고,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획득한 정당이 열린우리당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난데없이 ‘이념은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럴 바에는 모두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활동하는 것이 낫다. 개개 의원의 색깔이 다르다면, 어떤 근거로 정당을 구성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발언들은 열린우리당의 ‘잡탕’적 속성을 스스로 고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정동영 의장과 신기남, 김근태 당선자는 바로 3년 전 ‘사회개혁’을 외치던 소장파의 자리에 있었지만, 지금은 당의 지도부로 군림하고 있다. 불과 3년 만에 ‘개혁’의 깃발을 버리고 당내 정체성 논란에 찬물을 부으며 “봉합”을 외치고 있는 이들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파병철회는 아직 거론조차 되지 않고 있다. 민주적 권리는 사회적 차별 속에서 압살당했다. 열우당이 한나라당에게 ‘탄핵’문제를 훌훌 털고 가자고 요구하려면 독재시대의 억압도구였던 국가보안법과 집시법, 사회적 차별 등을 폐기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열린우리당의 행보가 우경화의 징후로 해석한다. 이러한 열린우리당의 행보는 끊임없이 민주노동당을 신자유주의 개혁분파와 연루시켰던 지긋지긋한 스캔들에 종지부를 찍는다는 점에서는 행복하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의 삶을 암담하게 한다는 점에서 불행하기 그지없다. 차라리 열린우리당은 탈색될 데로 탈색된 색깔을 드러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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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4.27시당논평>이념을 배제한 정당의 정체성? 우경화의 징후

<2004.4.27시당논평>이념을 배제한 정당의 정체성? 우경화의 징후

 

<논평>
이념을 배제한 정당의 정체성? 우경화의 징후
열우당은 히드라인가 카멜레온인가?

잡탕 열린우리당이 자신의 정체가 무얼까 목하 고민중이다. 그러다가 무릎을 치며 이렇게 외친다 “탈이념이라는 시대적 조류에 맞게 우리는 [개혁적 실용주의]다”라고! 이게 무슨 씨나락 까먹는 얘기냐 하면 어떤 바보가 “복사기냐 프린터냐? 니 정체를 밝혀라!” 그러니까 “복사기도 되고 프린터도 되는 그런 기계”라며 그 실용성을 자랑스럽게 선포하는 것과 비슷한 얘기다.

기계라면 괜찮은 얘기다. 그러나 국민을 대의하는 대의 정치에서 ‘부자도 대변하고 서민도 대변’한다면 그건 실용주의의 탈을 쓴 새빨간 거짓말이거나 정신분열이다. 총선 때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이 이런 말도 안되는 얘기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법인세도 깎아주고 복지도 확대하고’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은 때와 장소에 따라, 화자에 따라 달라진다. 열린우리당은 머리 아홉 개 달린 히드라인가? 죽 끓듯 변덕을 부리는 카멜레온인가?

‘이념은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면 모두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활동하는 것이 낫다. 개개 의원의 색깔이 다르다면, 어떤 근거로 정당을 구성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발언들은 열린우리당의 ‘잡탕’적 속성을 스스로 고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정동영 의장과 신기남, 김근태 당선자는 바로 3년 전 ‘사회개혁’을 외치던 소장파의 자리에 있었지만, 지금은 당의 지도부로 군림하고 있다. 불과 3년 만에 ‘개혁’이라는 ‘하고 싶은 정치’의 깃발을 버리고 ‘책임있는 정치’라는 미명하에 수구와의 타협을 준비하고 있다. 집권 과반수 당이 되자마자 국가보안법, 언론개혁 문제를 다루면 ‘정쟁의 소지’가 있다며 ‘중장기적 과제’로 미루려 하고 있고, 이라크 파병문제의 재검토는 ‘국가간의 합의’입네, ‘국회의 결정’입네 하고 구렁이 담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은 이라크 파병에 대한 태도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정간법 개정, 국가보안법 개폐, 집시법 재개정에 대한 열린우리당의 태도가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해 보일 것이다. 스스로 ‘개혁적 실용주의’라고 설레발을 치며 기회주의적 타협을 미화시키려 하지만 국민 모두를 계속 속이긴 힘들 걸!

2004. 4. 27. 민주노동당부산시당 대변인실

 

 

이창우 (2004-04-27 21:44:12)

양다슬님의 글을 좀 고쳐서 발표했습니다.
원문은 아래에 전재합니다.

이념을 배제한 정당의 정체성? 우경화의 징후
열우당은 히드라인가 카멜레온인가?

열린우리당은 오늘(27일) 당선자 워크숍 자리를 통해 “이념이 아닌 의사결정구조 속에서 정체성이 결정돼야 한다”고 밝혔다. 열린우리당은 자신들이 공언한 것처럼 역사상 처음으로 국회지배권력이 교체되었다고 한다면, 그 역사적 무게에 맞게 자신의 이념과 정체성을 명확히 하고 사회 변화를 끌고 나가는 책임 있는 여당으로서의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런데 ‘이념을 배제하고 실용적으로 접근’하겠다니. 정치의 담지자인 ‘정당’의 정체성은 ‘이념’을 통해 결정되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상식이다. 그런데,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은 때와 장소에 따라, 화자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인가? 열린우리당은 머리 아홉 개 달린 히드라인가? 죽 끓듯 변덕을 부리는 카멜레온인가?

소위 ‘개혁’을 자신의 이념으로 삼아, 또는 이미지화해 집권에 성공한 정권이 노무현 정권이고,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획득한 정당이 열린우리당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난데없이 ‘이념은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럴 바에는 모두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활동하는 것이 낫다. 개개 의원의 색깔이 다르다면, 어떤 근거로 정당을 구성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발언들은 열린우리당의 ‘잡탕’적 속성을 스스로 고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정동영 의장과 신기남, 김근태 당선자는 바로 3년 전 ‘사회개혁’을 외치던 소장파의 자리에 있었지만, 지금은 당의 지도부로 군림하고 있다. 불과 3년 만에 ‘개혁’의 깃발을 버리고 당내 정체성 논란에 찬물을 부으며 “봉합”을 외치고 있는 이들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파병철회는 아직 거론조차 되지 않고 있다. 민주적 권리는 사회적 차별 속에서 압살당했다. 열우당이 한나라당에게 ‘탄핵’문제를 훌훌 털고 가자고 요구하려면 독재시대의 억압도구였던 국가보안법과 집시법, 사회적 차별 등을 폐기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열린우리당의 행보가 우경화의 징후로 해석한다. 이러한 열린우리당의 행보는 끊임없이 민주노동당을 신자유주의 개혁분파와 연루시켰던 지긋지긋한 스캔들에 종지부를 찍는다는 점에서는 행복하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의 삶을 암담하게 한다는 점에서 불행하기 그지없다. 차라리 열린우리당은 탈색될 데로 탈색된 색깔을 드러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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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4.23시당논평>민주당 할아버지, '옥동자'의 싹수를 논하다?

<2004.4.23시당논평>민주당 할아버지, '옥동자'의 싹수를 논하다?

<논평>민주당 할아버지, '옥동자'의 싹수를 논하다?

민주당은 아직 걸음마도 떼기 전인 민주노동당에게 '남을 공격하고 깎아내리는 못된 버릇'을 가졌으며 '싹수가 뻔하다'고 했다. 노회찬 사무총장이 '희망을 주지 못하는 민주당'의 역사가 끝나고 있다고 언급한 것에 발끈한 것이다. 그런데 민주당 장전형 대변인의 22일 브리핑은 처음부터 끝까지 '남을 공격하고 깎아내리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제발 부탁하건대, '옥동자'에게 벌써부터 '남을 공격하고 깎아내리는 못된 버릇'을 주입시키지 않았으면 한다.

또한 장전형 대변인은 '이념정당의 출현이 국민에게 도움이 될 지 해가 될 지를 알 수 없지만 별로 발전할 것 같지 않다'고 언급했다. 이념정당이 출현했다면 예전의 정당들은 이념정당이 아니었단 말인가? 정당은 무릇 뜻 즉, 이념을 같이 하는 정치적 결사체로 알고 있다. 이념이 없는 집단인 민주당은 DJ 팬클럽 또는 '호남향우회'임을 커밍아웃한 것인가? 50년 팬클럽의 역사는 질 때가 된 것이 사실이다. 커밍아웃하는데 괜히 민주노동당을 걸고 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가 보기에 민주당은 민주노동당과 마찬가지로 '이념정당'이다. 그 이념은 50년 동안 '보수'였으며, 지금은 '수구'로 돌변하고 있다. 며칠 전 민주당의 이정일 사무총장은 '민주당과 자민련은 코드가 맞는다'고 언급하지 않았나? 우리는 민주당이 열린우리당으로 흡수되면서 붕괴될 것이라 보았지만, 알 수가 없다. 자민련과 통합할 지, 열린우리당에 통합될 지. 제발 자기의 정체성이 뭔지를 골똘하게 '생각하면서 발언'하기 바란다.

사실 민주노동당은 민주당의 '운명'에 대해 관심이 없다. '신생아'인 민주노동당의 관심사항은 '정치권 짝짓기', '사랑의 작대기'의 방향이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민중, 서민들의 삶이 어떻게 하면 풍요롭고 행복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에 모든 관심을 경주하고 있다.

민주당은 이번 총선에서도 50년 된 불판을 유지하려 했지만, 민주노동당은 50년 된 불판을 가는데 성공했고, 10점의 고기를 얹었다. 손님이 불판 갈아달란다고 화를 내면 장사가 되겠는가? 50년 된 불판이 잘 닦이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민주당이 불판을 잘 손질했으면 좋겠다. 진심이다.

2004. 4. 23 민주노동당부산시당 대변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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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4.21시당논평>'군기반장' 민주노동당 효과 탁월 입증

<촌 평>
'군기반장' 민주노동당 효과 탁월 입증
국회 개혁과제 선점 경쟁

이제껏 시민운동이 떠맡았던 정치권 감시 기능의 상당부분을 민주노동당이 떠맡게 되었다. 이제 강력한 '내부감시자'가 나타난 것이다. 베일에 싸인 국회운영은 낱낱이 만천하에 공개될 것이다. 무소불위의 국회의원과 거대정당들이 어찌 두렵지 않으랴.

그 효과가 바로 나타나고 있다. 17대 국회가 개원되지도 않았는데 각 정당들은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한다. 열린우리당은 '50년 적폐'를 해소한다고 하고, 한나라당은 '재산신탁관리'를 서약한다고 한다. 과연 두 보수정당이 '진실된' 마음으로 이러한 개혁과제를 추진해 나갈지 자신할 수는 없지만 사뭇 달라진 각 정당의 모습을 우리는 흐뭇하게, 그러나 예리하게 지켜보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명실공히 제3당이지만 의석수 10석에 불과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민주노동당은 줄기차게 '정치개혁'을 추진해 왔다. 다른 무엇보다도 '현대적이면서 글로벌 스탠다드한 정당'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정당은 '민주노동당' 뿐이다. 당원소환제, 상향식 공천제도의 명문화,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의 당비로 운영되는 정당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사당(私黨)', '붕당(朋黨)'과 같은 타당들을 제대로 된 '현대정당'으로 탈바꿈시키는데 우리만큼 적임자가 없을 것이다. '교사자격증'이 있어야 중고생을 가르칠 수 있는 법이다.

17대 국회가 개원되면 국회 '군기반장'이자 '스승'인 민주노동당은 전면적인 정치개혁에 나설 것이다. 또한, 50년 동안 '서민에게 세금을, 부자에게 복지를, 권력자에게 힘을' 제공한 국회가 민의에 따라 움직이고 노동자, 서민 등 다수의 뜻에 따라 행동하게 만들 것이다. 부디 '선생님'의 지도편달을 성실하게 받들어 '청출어람'의 본뜻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진검승부'할 맛이 나지 않겠는가? 노련한 선생님의 본격적인 트레이닝을 기대하시라!
긴장해!

2004. 4. 21 민주노동당부산시당 대변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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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의 김석준후보 지지를 반납하겠습니다.

<논 평>
반납합니다.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의 김석준후보 지지를 반납하겠습니다.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이하 실천연대)가 부산지역 18명의 열린우리당 후보 전부를 지지후보로 선정했다가 오늘 11시 회견에서 민주노동당 김석준 금정구 후보 한 명을 끼워넣어 발표했다. 김석준후보는 이들의 지지선언을 반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조국통일을 위해 감옥살이도 마다 않은 이성우후보와 2003년 평양의 8.15민족대회 민주노동당 여성대표였던 김은진후보를 배제한 이들의 정략적 지지선언에 들러리 서지 않겠다는 뜻이다. 불과 이틀만에 박원훈 후보에서 김석준 후보로 지지후보가 바뀐 이유는 명백하지 않으나, 지지후보 선정에 여론조사 결과를 고려했다는 점에서 '당선가능성'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실천연대는 '민주노동당과 열린우리당의 당선가능성이 높은 지역구에는 민주노동당에 표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금정에서 민주노동당 김석준 후보의 지지율이 급속하게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왜 거제 민주노동당 나양주 후보는 왜 제외되었는가? 우리는 실천연대의 지지후보 명단을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실천연대는 성사되지도 않을, 될 수도 없는 민주노동당과 열린우리당의 '후보 단일화'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실천연대는 정동영 의장과 마찬가지로 이번 총선이 '수구연합을 몰아낼 마지막 기회'라고 위기감을 부추기고 있다. 선거에 몰입된 나머지 '정치적 종말론'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단언하건대 민주노동당은 이번 총선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에게 마지막 기회란 없다.
실천연대와 달리 우리는 이번 총선을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아니라 진보 대 보수의 대결구도로 보며, 열린우리당 후보들이 진보적이지도, 민주적이지도, 개혁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들은 이라크 1, 2차 파병, FTA 비준, 집시법 개악, 근로기준법 개악, 경제특구법 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정책들이 '민주적 정책'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할 말이 없다. 실천연대가 민주노동당과 보수잡탕 열린우리당을 '진보개혁세력'이라는 조어를 통해 같은 울타리로 묶는데 불쾌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런 실천연대의 인식이 지난 시기 이미 낡을 데로 낡아진 '비판적지지, 대동단결론'과 동일하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떻게 '순정'을 유지하고 있는지 정말 놀랍다.
실천연대는 미국에 화답해 이라크 파병을 주도하고 미군 재배치에도 순종적인 열린우리당을 계속 짝사랑하기 바란다. 우리는 실천연대의 공개적 짝사랑 구애작전을 막을 생각이 없다. 그러나 제발 부탁하건대 실천연대는 민주노동당에 신경 꺼주기를 바란다.

2004년 4월 12일 부산시지부 대변인실

 

이창우 (2004-04-12 19:15:48)  
양솔규가 쓰다.
(2004-04-19 00:23:06)
민주노동당이 품을 더 크게 아울러야 합니다. 한나라당의 다수당을 막기위한 생각을 가진 사람중에 많은 사람들이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입니다.
실천연대의 발표를 더 크게 이해하고 품을 크게 가져야 합니다. 민주노동당에 신경을 꺼달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사람들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지 않습니까. 잘잘못을 떠나 더 크게 품어안으시길 바랍니다
지지자 (2004-04-19 11:55:29)
내가 민주노동당을 지원활동을 한 것이 웬지 후회스럽다..
민주노동당이 과연 이 정도 밖에 안되는 정당인가?
이것도 논평이라고 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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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4.12>열린우리당 모두 빠진 낙선대상 기준이 뭔가?

<2004.4.12>열린우리당 모두 빠진 낙선대상 기준이 뭔가?

 

<논 평>
열린우리당 모두 빠진 낙선대상 기준이 뭔가?
[통일시대 새정치 실현 17대 총선연대] 낙선대상 기준 이해 안가.

통일시대 새정치 실현 17대 총선연대(이하 새정치연대)는 4월 8일 반민족/반통일/반평화 후보를 심판하자며 낙선대상자를 선정해 발표했다. 선정 기준은 남북 교류 문제, 이라크 파병, 주한미군 철수반대 동의안, 민생외면, 부패 등이라고 밝혔다. 민주노동당은 이러한 기준들이 우리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새정치연대와 마찬가지로 공히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낙선명단을 보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라크 파병 문제가 선정 기준이고 각종 법률안 심의에 대한 자료를 참고했다고 밝혔지만 어찌된 일인지 열린우리당 후보는 낙선대상에 단 한 명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새정치연대는 열린우리당이 한-칠레 FTA 동의안과 이라크 파병 동의안을 주도했다는 것을 묵인하고 싶은지 모르나 민주노동당과 노동자, 농민은 또렷하게 인식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열린우리당이 주도하는 국회가 민족적이라거나, 통일 지향적이라거나 평화애호적일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새정치연대가 말하는 '평화'는 어떤 평화인가? 이라크 민중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이를 주도하고 당론을 바꾸지 않는 열린우리당과 파병을 계속 추진하고 있는 현 정부가 평화적이라고 강변하는 이유를 우리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우리 젊은이들을 이라크에 파병하면서 한반도에는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 열린우리당의 파병 찬성 당론이 발표될 때 새정치연대는 별나라에 있었는가?
새정치연대는 자신이 내놓은 낙선명단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양심적으로 명단이 작성되었는지 곰곰이 살펴보기 바란다.

2004년 4월 12일 민주노동당 부산시당 대변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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