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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6/26
    김종인 국회의원 략사(2)
    양다슬
  2. 2006/06/11
    싸우는 운동화, 스니커즈 만세!
    양다슬

김종인 국회의원 략사

김종인 前수석 22년만에 다시 강단에
 
[한국일보 2003-09-01 18:36]
 
김종인(金鍾仁ㆍ63)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22년 만에 대학 강단에 다시 선다.김 전 수석은 이번 2학기부터 건국대 석좌교수로 임용돼 경제학과 대학원에서 ‘고급계량경제학’을, 내년 1학기에는 ‘재정이론 특수연구’를 강의하게 된다고 건국대는 1일 밝혔다. 김 전 수석은 지난 1981년 11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서강대 경제학과 강단을 떠난 지 22년 만에 다시 대학에 돌아오게 됐다.김 전 수석은 독일 뮌스터대 경제학 박사로 11, 12대 국회의원, 보사부장관을 거쳐 노태우 정권 후반기인 90~92년 청와대 경제수석을 역임했으며,14대 국회의원을 거쳐 현재 국민경제자문회의 자문위원직을 맡고 있다. 특히 그는 청와대 경제수석 시절 재벌이 보유한 비업무용 부동산의 매각을유도한 ‘5ㆍ8조치’, 삼성그룹 상용차사업 승인 반대 등 강력한 개혁정책을 펴 재벌들로부터 ‘공산주의자’라는 비난까지 받았다. 그는 이런 개혁성 때문에 올 초 참여정부 조각 때도 막판까지 유력한 경제부총리 후보로거론됐다.

김 전 수석은 “이론보다는 현장에서 체득한 경험과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노력하겠다”며 다시 강단에 서는 각오를 밝혔다.건국대는 김 전 수석 외에 박춘호(朴椿浩ㆍ73) 유엔 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을 법학과 대학원 석좌교수에, 유희열(柳熙烈ㆍ56) 전 과기부차관, 신정식(辛廷植ㆍ51) 전 에너지경제연구원장을 각각 정보통신대학원, 경영대학원 석좌교수로 임명했다.

 

김종인 전 청와대 수석, 민주당 입당
 
[오마이뉴스 2004-03-17 14:11]
 
[오마이뉴스 이한기 기자]
 
▲ 17일 민주당에 입당한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과 조순형 대표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윤상
 

[기사 대체 : 17일 낮 12시20분]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17일 오전 기자회견을 갖고 민주당에 입당했다. 민주당은 김 전 수석에게 비례대표 2번을 배정하고, 조순형 대표와 추미애 상임중앙위원 등과 함께 공동 선대위원장을 맡기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태영 전남도지사와 조성준 의원 등 탈당 도미노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거물급' 인사의 영입이어서 민주당은 오랜만에 밝은 표정이었다. 대표적인 재벌 개혁론자로 알려진 김 전 수석은 참여정부에서도 경제부총리 등의 하마평에 자주 올랐고, 민주당은 물론 열린우리당에서도 영입에 공을 들여왔다.

 

조순형 대표는 환영사에서 "탄핵정국으로 민주당이 내외로 어려운 시기에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김종인 박사가 민주당에 동참하기로 결단해주어서 축하와 감사, 환영의 말씀을 드린다"며 "김 전 수석은 대통령 경제수석·장관·국회의원 등 폭넓은 국정·행정 경험을 쌓아온 분으로 개혁적인 경제관과 신념으로 경제학계의 두터운 신망과 존경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종인 전 수석은 "사실 학계에 있다가 정치에 입문해 국회와 행정부 등을 체험했고, 지난 10년 동안은 정치와 거리가 먼 외곽에서 한국 변화과정을 지켜봤다"며 "탄핵정국 등으로 국민이 갈리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정계에 입문해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던 차에 민주당에서 입당 요청을 받았다"고 밝혔다.

 

민주당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김 전 수석은 "우리나라 정당들이 여러 개 있다가 사라지는 가운데서도 야당의 명맥을 이어오고 여야 정권교체를 이룬, 정통성을 확보한 정당이 민주당이라고 판단했다"며 "분당 이후 정체성 혼돈도 있었지만, 이번 탄핵정국에서 정체성을 확보하는 과정에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김 전 수석은 '탈당 도미노가 이뤄지고 있는데, 입당을 결정한 계기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정당이라는 게 조직체이고, 조직원은 (조직의) 기본 룰을 지키는 게 상도"라며 "도저히 그 조직에서 생존하기 어렵고, 제약을 느끼면 나갈 수밖에 없다, 이해관계를 달리해 탈당하는 사람은 탈당하는 것이고 소신에 맞게 돕는 사람은 돕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는 노 대통령 탄핵에 대해서 "이미 한 번 결정이 난 사안이니까 절차대로 진행하는 것 외에는 다른 얘기를 할 것이 없다"고 밝혔다. 이어 탄핵에 대해 찬성인지 반대인지를 묻는 질문에도 그는 "거기에 대해 이렇고 저렇고 할 이야기가 없다"고 즉답을 피했다.

 

다음은 김종인 전 수석의 약력이다.

 

△서독 뮌스터대 경제학 박사 △73년 서강대 교수 △79년 서독 쾰른대 객원교수 △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재무분과위원 △11·12대 국회의원 △87년 사회개발연구소 소장 △89년 국민은행 이사장 △89∼90년 보건사회부 장관 △90년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92년 14대 국회의원 △93∼94년 무소속 국회의원 △대한발전전략연구원 이사장(현).

/이한기 기자 (hanki@ohmynews.com)

 

 

[인맥 연구] 유럽학파 제철 만났다 ①
 
[매경이코노미 2003-01-17 09:00]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독일에서 ‘나일강의 기적’을 일으켰던 루 드비히 에르하르트 전 수상을 벤치마킹하는 것은 아닐까.

에르하르트 전 수상은 ‘사회적 시장경제’를 도입해 독일 경제부흥 기초를 닦았던 인물이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미국식 시장경제에 사회주의를 가미한 독일식 시장경제의 핵심이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복지를 강조한 스웨덴식 시장경제와도 차이를 보인다.

사회적 시장경제의 기본 사상은 질서와 조화에 있다. 이런 점에서 사 회적 시장경제를 추종하는 경제학자들을 질서경제학파로 분류한다. 질서는 시장에만 맡겨선 안되고 정부가 일정 부분 개입해야만 잡힌다 고 믿는다. 질서경제학자를 양산하는 대표적인 곳이 독일 프라이부르 크대와 쾰른대이다.

에르하르트 전 수상은 사회적 시장경제를 달성하기 위해 뮐러 아르막 이라는 경제학자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일부에서는 인수위에 들 어간 권기홍 영남대 교수와 이종오 계명대 교수를 뮐러 아르막에 비 유하기도 한다. 인수위에 참가한 김대환 인하대 교수와 정명채 농어 촌경제연구원 부원장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 이들이 이런 평가를 받 는 이유는 범 사회적 시장경제를 표방한 유럽지역에서 수학했기 때문 이다.

유럽파는 당분간 핵심세력으로 부각될 가능성이 높다. 프랑스에서 공 부한 이창훈 박사(한라대 명예총장)는 “‘철의 실크로드’가 열리면 유럽과 아시아는 한 덩어리가 될 것이고 미국식보다 유럽식이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 전망한다. 박기안 경희대 교수는 “이제 통합의 시대가 열렸다. 한반도 통일을 준비하는 시점에서 유럽통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며 본격적으로 ‘유럽식 연구’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주한 독일 대사 보좌관인 김태구 박사는 “행정 수도를 이전해야 할 한국 입장에서 행정수도를 본에서 베를린으로 옮긴 독일이 벤치마킹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전망한다.

현재 활동중인 유럽파 경제 경영학자들 가운데 윗자리를 차지하는 사 람은 단연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다. 독일 뮌스터대에서 경제 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노무현 새 정부 국무총리로도 거론되고 있 다. 그는 외국어대 교수를 걸쳐 보건복지부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낼 만큼 활동폭이 컸다. 김대중 정부 때도 여러 차례 하마평에 올랐다. 정운찬 서울대 총장도 김종인 박사를 따른다. 경제수석 시절 김종인 박사는 ‘경제민주화’를 주창했다.

그동안 유럽파는 국내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미국파 싹쓸이’ 상 황에서 목소리를 낸다 해도 청취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경제 경영 학회에서도 유럽파는 소외되기 일쑤였다. 재계나 관계에서도 유럽파 는 철저히 소외됐다.

▶학계◀

국내에서 유럽파는 학회 중심으로 꾸준한 활동을 지속해 왔다. 유럽 관련 학회의 원조는 한국유럽학회다. 현재 독일 베를린대 교수로 활 동 중인 박성조 박사 중심으로 한국유럽학회가 만들어졌다. 박성조 교수는 독일 베를린자유대 정치학박사 출신이다. 나종일 2대 회장(현 주영 대사) 뒤를 이어 유임수 3대 회장(이대 교수) 체제가 되면서 경 제 경영학 박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유임수 교수는 독일 쾰른대 경제학박사로 김해천 전 고려대 교수와 이필우 전 건국대 교수와 함께 국내 쾰른대 인맥을 이어가는 핵심 인 물이다. 유럽지역을 통틀어 김해천 전 교수가 유럽 1호 경제관련 박 사로 인정받는다.

한국유럽학회는 경제와 정치 전공 교수들이 번갈아가면서 회장직을 맡고 있다. 유임수 교수(3대 회장)에 이어 이종원 수원대 교수(영국 로마대 국제경제학박사)가 5대 회장을 맡았고 올해 들어 김한원 경희 대 교수(이탈리아 밀라노국립대 경제학박사)가 학회를 이끌고 있다.

김한원 회장은 “유럽관련 학회 중에서 유일하게 학술진흥재단 등재 학회지인 ‘유럽연구’를 만들고 있을 만큼 학회활동이 활발하다”며 우리나라도 유럽지역에 좀더 깊은 관심을 보여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

한국유럽학회가 경제와 정치 법률 전공 교수들의 모임이라면 한국EU 학회는 경제경영 전공자들로만 구성됐다. 김세원 서울대 교수를 중심 으로 94년 만들어졌다.

독일 소재 대학 경제 경영학박사 출신들의 모임으론 한독사회과학회 와 한독경상학회가 있다. 한국사회과학회는 박기안 경희대 교수가 이 끌고 있고 한독경상학회는 심지홍 단국대 교수가 회장으로 활동한다.

박기안 교수는 김해천 전 고려대 교수-이필우 전 건국대 교수-유임수 이화여대 교수 등으로 이어지는 독일 쾰른대 출신이다. 심지홍 교수 는 독일 콘스탄츠대에서 학부에서부터 석박사 과정을 모두 다녔다.

쾰른대와 함께 ‘사회적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출신들도 상당수 있다. 이번에 대통령 인수위에 참가한 권기홍 영남 대 교수와 안석교 한양대 교수가 국내 프라이부르크대 인맥의 중심에 서 있다.

동국대 총장 후보에 올랐던 조희영 교수(독일 본대 경제학박사)와 나 성린 한양대 교수(영국 옥스퍼드대 경제학박사)도 활동영역이 넓은 유럽파 학자로 꼽힌다.

<이제경 기자 / 김소연 기자 / 김병수 기자>

<매경ECONOMY 제1189호>

[인맥 연구] 유럽학파 제철 만났다 ②
 
[매경이코노미 2003-01-17 09:00]
 
▶관계◀

유럽에서 수학한 대표적인 관료출신은 김종인 전 청와대 수석이다.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그는 독일 뮌스터대에서 72년 경 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재경부에서 유럽파로 속하는 인물은 방영민 세제총괄심의관(프랑스 H ES경영대학원 경영학박사)을 비롯해 강승모 금융협력과장(프랑스 파 리정치대 경제학박사), 조원동 IMF 자문관(영국 옥스퍼드대 경제학박 사), 이호철 IBRD 파견(프랑스 파리1대학), 유복환 EBRD 파견, 영국 캠브리지대 정치경제학박사, 진양현 WCO 파견(헝가리 부다페스트대 경제학박사), 진승호 주상해 총영사관 파견(영국 맨체스터대 경제학 박사), 노승숙 행정법무담당관실 사무관(폴란드 바르샤바대 경제학박 사) 등이다.

방영민 세제총괄심의관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상속증여세 완전포 괄주의 도입과 관련해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방 심의관은 “지 하경제를 없애기 위해선 제도적인 장치를 만들어야 함은 물론 국민 의식 수준도 함께 선진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승모 금융협력과장은 대외시장 개방과 관련해 국내 금융시장 파급 효과를 분석하고 대응책을 짜는 일을 도맡아한다.

공정거래위원회에는 모두 4명의 유럽 박사가 있다. 공정위에 특히 유 럽파가 많은 배경은 80년대 후반(공정위 전신인) 경제기획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경제기획원은 소속 공무원 중 1∼2명이 유럽 지역 국가장학금을 받고 유학갈 수 있게 한 유럽장학생 제도를 도입 했다. 이 제도가 유지된 4년여간 이전엔 없던 유럽 유학생들이 생겨 났고 이들 대부분이 귀국 후 공정위로 발령나면서 공정위에 유난히 많은 유럽파가 생겨난 계기가 됐다.

최고참 선배는 남선우 공보관. 85년 프랑스 파리10대학에 간 남 공보 관은 “향후 OECD가입, WTO 출범 등 유럽에 위치한 기구와 많은 연관 이 생겨날 것이라는 선배 조언에 유럽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역시 파리10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아 남 공보관의 직속 후 배가 된 김원준 경쟁촉진과장은 유학 전 기획원 예산실에 근무한 것 역시 남 공보관과 같다. 당시 예산실에서 노동부 예산업무를 담당하 며 산재보험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는 김 과장은 논문도 ‘사회복 지와 성장과의 관계’를 주제로 잡았다.

두 사람과 비슷한 시기에 파리에서 유학생활을 함께 한 김상준 하도 급기획과장은 그러나 성향이 확연히 다르다. 김 과장이 다닌 학교는 파리1대학. 1대학을 선택한 김 과장은 “당시 유럽으로 간다고 하니 다들 미국으로 가는데 웬 유럽이냐며 말리는 사람이 많았지만 극좌부 터 극우까지 조화롭게 존재하는 프랑스 유학시절 경험이 향후 무슨 일에든 중도 시각을 유지할 수 있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박상용 심판관리관은 93년 영국 리버풀대에서 ‘개도국 외채관리의 리스크 분석’이라는 논문으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산업자원부 정만기 무역진흥과장 역시 파리10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원래부터 시장에서의 정보 불평등에 관심을 기울였다 는 정 과장은 이런 관심이 자연스레 프랑스 유학으로 이어졌다고 전 했다.

95년 산자부로 돌아온 정 과장은 수출과에 근무하던 외환위기 직후 ‘무역거래기반 조성에 관한 법률’을 제안했고 이 제의가 채택되면 서 법안 제정까지의 실무를 담당했다.

“보통은 산자부가 개발 위주 부서라는 인식 때문에 형평과 관계된 업무와 무관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실제로는 그 어느 부서 보다 적용할 부분이 많은 부서”라는 게 정 과장의 일설이다.

보건복지부는 영국 박사 3인이 유럽식 선진복지 정책을 국내에 심고 있다.

“유럽은 미국과 달리 사회 전체의 연대를 강조하죠. 이런 분위기로 사회복지가 앞서 있죠. 복지부 성격상 유럽파가 상대적으로 많은 게 사실입니다.”

이상영 보건부 기획예산담당관은 ‘복지만큼은 학문이나 실제 시스템 이나 유럽이 앞서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영국은 사회복지학 분야에서 학문적 명성이 높아 복지부 공무원 들에게 인기있는 유학국가. 유학중이거나 다른 정부 기관에 파견 나 가 있는 인원을 포함하면 모두 10명이 넘는다.

이상영 기획예산담당관, 노길상 복지정책과장, 한익희 국제협력담당 관 등 세 명은 영국에서 사회복지 분야 박사학위를 따 복지부내 영국 박사 3인방으로 통한다.

복지부 기획예산 업무를 총괄하는 이상영 과장은 97년 영국 켄트대에 서 사회정책분야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 주제는 ‘사회복지정책 형 성과정’에 관한 것. 따라서 사회복지의 전반적 흐름에 대해 정통하 다. “사회 민주주의 전통이 강한 유럽은 성장보다는 분배를 강조하 는 기조가 강하죠.”

노길상 복지정책과장은 이 과장과 행시 동기(26기)로 94년 영국 브리 스톨대에서 사회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분야는 빈곤정책. 노 과장은 특히 98년 연금제도과장을 역임하면서 현재의 국내 연금제도 개혁 작업에 참여했다.

한익희 국제협력담당관도 영국 브리스톨대학에서 공부했다. 논문 주 제가 ‘복지국가 형평성과 의료정책’일만큼 의료보험 분야에 관심이 많다.

▶재계◀

재계에서 유럽파를 찾기란 쉽지 않다. MBA(경영학석사)만 하더라도 미국 일변도다. 30대그룹 재계 인물 경영인 가운데 두산건설 박용훈 부회장이 유일한 유럽파 MBA(독일 쾰른대)다. 한국유럽학회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이창훈 비벤디워터코리아 사장은 프랑스 파리10대학 정 치학박사 출신이다. 비벤디워터사는 프랑스에서 매출 2위를 자랑하는 다국적기업. 한라대 총장을 지낸 이창훈 박사는 프랑스에서 수학한 인연 때문에 비벤디워터 한국법인 대표를 맡고 있다.

파라다이스 김희주 부사장은 프랑스 그르노블대 경제학 박사 출신으 로 산업연구원에서 몸담다 3년전부터 파라다이스 경영인으로 변신했 다. LG CNS 이상근 전략사업팀 부장은 독일 베를린대에서 경영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제경 기자 / 김소연 기자 / 김병수 기자>

<매경ECONOMY 제1189호>

개혁성향에다 소신파 .. 개각때마다 나오는 '김종인 중용說'
 
[한국경제 2000-08-04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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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당 의원과 6공때 보사부장관 경제수석을 지낸 "옛 사람"의 기용설이 왜 나오나"

경제부총리등 요직 중용설이 나도는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과 가까이서 호흡해 보지 않은 다수는 이런 의문을 던진다.

그와 함께 일했던 전현직 공무원들은 대부분 그에 대해 "개혁성향이 강하고 통이 큰 남자"라는 인물평에 주저하지 않고 있다.

청와대에서 그를 보좌했던 K청장은 "청와대 수석회의때면 보통 다른 수석들은밑에서 써준 것을 들고 가는데 그는 본인 노트만 달랑 들고 들어가 보고했다"고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평소에도 세세한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채 큰 줄기를 잡아가는 스타일"이라고 전했다.

중하위직에서 한단계씩 올라가면서 그만큼 성장하는 정통 관료들과 달리 유학(독일 뮌스터대학)-대학교수(서강대 경제학과)-국회의원-장관(과거 보사부)-청와대 수석의 경력을 거치면서 나름대로 소신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데 익숙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선이 굵고 복잡한 문제를 쉽게 정리하는 능력이 빼어난데다 업무 추진력도 좋았다"

동갑나기로 70년대 그가 교수일 때부터 교분을 쌓아온 진념 기획예산처 장관도이처럼 그에 대해 호평을 했다.

90년초 경제수석으로 부임했을 때는 청와대에 있던 지역균형발전기획단이란 조직을 없애 버렸다.

"산업이란 것이 필요에 의해서 생기는 것인데 수도권집중 등을 억지로 막는다고 효과를 낼 수 있느냐"는 논리였다.

대신 이석채 박운서씨 등 1급 비서관들과 협의,사회간접자본(SOC)투자기획단을신설했다.

그러면서도 경제력 집중에 따른 부작용에는 큰 관심을 보여 6공 후반기에 재벌개혁을 시도했다.

토지 공개념제도를 반영해 재벌들의 과다한 부동산 소유를 제한하는 90년 5.8조치가 그의 작품이다.

함께 일했던 관계자는 "재벌들에 밀리지도 손을 벌리지도 않은 드문 인물이었다"고 회고했다.

독일에서 공부한데다 이같은 경제관으로 인해 생산적 복지 등 DJ노믹스와 접점이 크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이다.

DJ가 요직에 쓰고 싶어하는 정운찬 교수는 "요즘같은 때는 김 수석이 적격"이라고 말했다.

첫 대법원장이었던 가인 김병로 선생에 대한 DJ의 남다른 존경이 그 손자인 김 수석에 대한 호평으로 이어진 면도 있다고 주위에서는 말한다.

그러나 임기말 동화은행 뇌물수수건으로 구속된 경험이 큰 흠집으로 남아있다.

일부에서는 이 사건을 "역로비에 걸린 낙마"라고 말하기도 한다.

기업들은 그의 스타일에 잔뜩 긴장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허원순기자 huhws@ hankyung.com

희망 일기(3월 15일) 편승하지 않고, 사술에 현혹되지 않고
신장식  2004-03-16 01:02:29, H : 94, V : 5


월 15일 흐리고 따뜻함

민주노동당 후보로서는 처음으로 중앙일보 17대 총선 싸이트의 '이사람'이라는 코너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와 오늘 시청 앞 중앙일보까지 나가서 인터뷰를 했다. 여전히 탄핵이 주요 이슈다. 솔직 담백하게 입장을 전했다. 인터뷰를 진행한 coolgirl 김미정 기자는 수긍하는 눈치다.

서둘러 전철을 타고 지역으로 돌아와서 동네 지인과의 점심식사, 그리고는 전화. 후원의 날에 방문에 주신 분들께는 감사의 전화를, 그날 오지 못하신 분들께는 후원를 부탁하는 전화를 드렸다. 만만치 않은 조건이지만 전화를 드려보니 굳이 비관할 필요도 없는 상황이다. 결국 원칙과 소신은 평가 받으리라는 확신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저녁은 남재희 선배가 주선해 주신 자리였다. 김종인 박사, 참여연대의 김상조 교수, 그리고 당과 함께 하는 몇 분들과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많이 배울 수 있는 자리였고, 또 당의 원칙을 돌아보고 점검할 수 있는 자리였다.

12시가 좀 넘어서 전화가 온다. 한나라당이라는 거악도 싫지만 정동영을 비롯한 열린우리당의 소악도 너무 역겹다는 선배의 전화다. 그는 지금 기자다. 악착같이, 정말 죽기 아니면 살기의 마음으로 민주노동당이 이번에 득표를 많이 해야 한다는 애끓는 목소리를 전한다. 그래야 한다, 그리해야 옳은 일이다. 다소 뜨악했던 선배와의 관계가 부쩍 좋아질 것 같다. 민주노동당은 갈길을 가야한다. 편승하지 않고, 사술에 현혹되지 않고 우리의 길을 뚜벅뚜벅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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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운동화, 스니커즈 만세!

싸우는 운동화, 스니커즈 만세!

한겨레21 2006년05월26일 제611호

검정색 구두와 하얀색 운동화의 시대는 가고 형형색색 스니커즈의 시대로 … 세계적 디자이너의 명품에서 구멍가게 옆의 아디칼라까지 그 화려한 스펙트럼

 

▣ 나지언 피처 에디터

 

지난 4월12일 밤 12시, 뉴욕의 한 상점 앞에 일군의 젊은이들과 경찰들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둘러싸여 있다. 순찰을 나온 경찰이 말한다. “아니, 도대체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은 나이키 매장 앞이었고, 그로부터 10시간 뒤 그래픽 아티스트 스태시가 디자인한 ‘나이키 에어맥스 스태시 블루 팩’ 리미티드 에디션이 판매될 예정이었다.


△ 디자인과 색감으로 무장한 스니커즈는 여자의 발을 해방시키고 남자를 고민의 즐거움에 빠뜨린다. <위쪽>, 나이키가 ‘에어 조든’ 시리즈를 발표하면서 운동화는 운동장을 벗어났다. (왼쪽아래), ‘아디칼라’ 화이트 시리즈는 아크릴 물감 등과 세트로 판매한다. 만화 스니

 

멀쩡하게 생긴 한 남자는 경찰의 의아함에 화답이라도 하듯 말한다. “만약 저 스니커즈를 구한다면, 집에 가서 울 것만 같아요.” 당신이 보기에 미친 게 분명하다고 생각되는 이 젊은이들은 시카고, 마이애미, 보스턴 등지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으며 특별한 스니커즈의 첫 판매를 기다리느라 며칠 밤을 새웠다. 그들이 갈구하던 스니커즈는 25만원에 판매됐으나, 65만원까지 가격이 오르기도 했다.

 

“저걸 손에 넣으면 울어버릴 거야”

 

태초에 운동화가 있었다. 1980년 나이키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것은 단지 운동화에 지나지 않았다. 운동화는 새것이 더 촌스럽다고 생각됐으며 해질 때까지 신는 게 그들의 정체성이라 믿었다. 그러나 나이키가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의 도구로 운동화를 불러줬을 때, 그리고 곧이어 형형색색 ‘에어 조단’ 시리즈를 발표했을 때, 운동화는 운동장을 벗어났다. 다 큰 남자들이 나이키 에어 조단을 손에 넣고 펑펑 우는 장면을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1990년, 스니커즈는 이제 공간의 제약성을 벗어나 어디든 활보할 수 있게 됐다.

그러니까 1990년, 축구 용품 브랜드로 알려진 푸마는 세계적인 디자이너 질 샌더와 손을 잡았다. 질 샌더는 푸마의 축구화 ‘푸마 킹’을 스니커즈 형태로 변형한 ‘푸마 아반티’를 내놓았다. 나이키와 아디다스의 경쟁에 밀리던 푸마는 푸마 아반티의 슬림하고 날렵한 디자인으로 인해 인기를 한 몸에 받았고, 국내에서는 뒤늦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지난해 명동과 신촌, 압구정 거리를 아반티가 모두 쓸고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질 샌더에 질세라, 다른 디자이너들도 스니커즈 디자인에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다. 일단 짭짤한 수입을 낸 푸마는 1999년 ‘블랙 스테이션’이라는 고급 스포츠 캐주얼 라인을 새로 론칭했다. 이후 프라다 디자이너 출신 닐 바렛, 슈퍼모델 크리스티 털링턴, 그리고 일본의 야스히로 미하라 등을 영입한 푸마는 다양하고 신선한 제품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아디다스는 일본의 요지 야마모토, 리복은 폴 스미스와 손잡고 명품 스니커즈를 생산해냈으며, 반스는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와 함께 ‘마크 제이콥스 슬립온 제트’라는 앙증맞고 귀여운 스니커즈를 만들어냈다.


△ 스니커즈는 신발이 아니라 예술이다. 디자이너들도 스니커즈 디자인에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다.

 

 

전세계가 스니커즈 열풍이다. MTV는 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스니커즈 마니아들을 찾아나섰으며, ESPN은 라는 프로그램으로 스니커즈 탐방을 시작했다. 이제 스니커즈는 운동장을 벗어나 TV에 침투했으며, 사무실과 고급 레스토랑에까지 발을 뻗었다. 파워워킹할 때 신는 허여멀건 운동화와 달리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디자인과 색감으로 무장한 스니커즈는 슈트에다 신어도 손가락질 받지 않는 게 장점이다. 이제 여자들은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 냄새 나는 스타킹과 퉁퉁 부은 발과 싸우는 대신, 그냥 양말을 벗어던지면 된다. 고무신의 여성 평등 기조에까지는 못 미치지만, 스니커즈는 여자의 발을 옥죄던 하이힐에서 일주일에 단 며칠 만이라도 해방될 수 있는 숨구멍을 부여했다.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캐리가 소리쳐 불렀던 ‘마놀로 블라닉’ 구두 대신 이제 ‘스니커즈 만세’를 외칠 일이다. 그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키가 조금 작아진 것뿐이다. 남자들은 또 어떤가. 그들이야말로 수많은 종류의 스니커즈 앞에서 뭘 골라 신어야 할지 고민하는 즐거움에 빠졌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검정색 구두와 하얀색 운동화가 전부인 줄 알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 평소에는 나이키 에어 맥스를 신어도,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에는 슈트에 캔버스 스니커즈를 신고 넥타이 하나만 매주면 되는 시대인 것이다.

 

돈을 숨기는 포켓과 안창의 국경 지도

 

모든 사람을 평소의 키 그대로 가감 없이 보여주는 스니커즈는 평등한 신발이다. 이렇게 평등을 외치는 신발이다 보니, 목까지 단추를 채워야 하는 레스토랑보다는 아무렇게나 입어도 되는 거리에서 더 빛이 난다. 격식이나 형식 대신 자유와 평등을 입은 스니커즈는 제품 제작에서도 그 믿음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최근 스니커즈 열풍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은 ‘커스터마이징’, 자주 쓰는 용어로 ‘튜닝’이다. 커스터마이징은 소량 생산되는 비싼 디자이너의 스니커즈를 사느라 돈을 모으거나 유명한 예술가들이 만든 스니커즈를 사느라 밤새워 충혈된 눈을 하고서 줄을 서야 하는 번거로움을 모두 없애주는 편리한 마케팅이다. 이제 소비자들은 스니커즈에 마음대로 그림을 그려넣고 색을 칠하고 장식하는 ‘나만의 스니커즈’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마케팅의 가장 선봉에 있는 아디다스는 1983년 시작했다가 시대를 앞서갔다는 이유로 외면받은 ‘아디칼라’ 시리즈를 다시 내놓았다. 아디칼라 화이트 시리즈는 흰색 운동화와 아크릴 물감과 사인펜, 스프레이 등이 하나의 세트로 판매된다. 디자인에 따라 레벨 1에서 6까지 여섯 종류가 있는데, 레벨이 높아질수록 가격이 싸지고 판매 수량도 많아진다. 명동에 있는 아디칼라 매장에 가면 배우 이천희가 만든 ‘도시’ 스니커즈, 만화 <츄리닝> 만화가들이 만든 ‘츄리다스’ 등 다양하고 재미있는 스니커즈를 만나볼 수 있다. 나이키의 ‘ID’, 퓨마의 ‘몽골리안 바베큐’ 프로젝트 역시 같은 맥락이다.


△ 스니커즈는 젊으니이들의 열광을 등에 업고, 소비와 생산의 개념을 바꿔놓았다. 매장에서 스니커즈를 고르는 젊은이들.

 

덕분에 커스터마이징 아티스트들도 뜨고 있다. 나이키 튜닝으로 유명한 에드슨의 튜닝화는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다. 이렇게 스니커즈는 소비의 개념을 바꿔놓고, 더 크게는 시대가 고수하는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까지도 가져왔다.

앞에서 말한 거리의 예술가 스태시의 스니커즈처럼 각 스니커즈 브랜드는 좀더 자유롭고 다양한 예술의 형태를 스니커즈와 접목시키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리복의 바스키아 스니커즈는 요절한 천재 화가 바스키아의 작품과 사인을 활용한 제품이며, 아디다스는 팝 아티스트 키스 해링의 작품을 스니커즈에 도입했다. 우마 서먼이 영화 <킬 빌>에 신고 나온 매끈한 스니커즈는 일본의 오니쓰카 타이거 제품이었지만, 나이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타란티노 감독의 <킬 빌>에 대한 오마주를 바치기 위해 신발 앞에 일어로 ‘빌을 죽여라’(Kill Bill)라고 써 있는 킬빌 슈즈를 따로 제작했다. 이제 스니커즈는 단순히 신발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이다. 젊음과 자유를 상징하는 스니커즈를 전선에 매다는 등 다양한 스니커즈 아티스트들도 생겨났다. 컨버스나 나이키가 체 게바라를 광고나 제품에 자주 도입하는 게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스니커즈는 돈 많은 패션 피플의 소장품이나 할 일 없는 젊은이들의 수집품만은 아니다. 스니커즈를 보면 사회가 읽힌다. 소비와 생산의 개념을 바꿔놓은 스니커즈는 다양한 정치·사회적 이슈를 반영하기도 한다. 브루클린 아티스트 주디스 워다인은 미국에 밀입국하는 멕시코인들을 위한 상징적인 스니커즈, 즉 ‘보더 스니커즈’(Border Sneakers)를 만들었다. 일명 ‘브링코’(Brinco·스페인어로 ‘도약’이라는 의미)라 불리는 이 스니커즈는 신발끈에는 라이트와 나침반을 붙였으며, 안쪽에는 돈이나 진통제를 숨길 수 있는 포켓이 있다. 그리고 발 안창에는 국경 지도가 그려져 있다. 주디스 워다인은 1천 개의 보더 스니커즈를 통해 미국 사회에서 이민자들의 문제를 이슈화했다. 한편, 아디다스는 아디칼라 시리즈 중 디자이너 베리 맥기가 디자인한 스니커즈 때문에 미국 내 아시아 커뮤니티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가 그린 아시아인들이 뻐드렁니와 찢어진 눈이라는 정형화된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게 반발의 이유였다.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들어간다

 

FEIT(Fight) 스니커즈는 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부패, 그리고 부정과 싸운다는 의미에서 제품명과 회사명이 ‘파이트’며, 대량생산이 아니라 전문가들이 일일이 수작업으로 섬세하게 만들어낸 명품이다. 나이키 ID는 ‘덩크 7 자선 컬렉션 스니커즈’로, 판매 금액을 전액 비영리단체에 기부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제품 역시 전세계에서 30명 정도만 가질 수 있는 희귀 소장품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소비와 생산의 개념을 바꿔놓은 스니커즈 마케팅만이 할 수 있는 운동일 것이다.

스니커즈는 이미 우리 일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으며, 생산과 소비 그리고 예술에 대한 많은 개념들을 바꿔놓았다. 최근 아디칼라 마케팅을 보면, 그들은 스니커즈가 사회·문화적 맥락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제대로 파악한 게 분명하다. 그들은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스니커즈가 들어간다는 취지 아래 뉴욕에 있는 7개의 작은 구멍가게에 아디칼라를 전시하기 시작했다. 골목길 코너에 있는 작은 상점 안 음료수 냉장고 등지에 놓여 있는 아디칼라 스니커즈는, 스니커즈가 얼마나 우리 일상에 가까이 들어왔는지를 방증하는 사례다. 물론 이렇게 스니커즈 하나에 거창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기자나 하는 일이고, 당신들이 할 일은 지금 당장 달려가 마음에 드는 스니커즈를 하나 사서 하루 종일 일하느라 지친 발에게 위로를 건네는 것이다. 그게 스니커즈의 가장 큰 미덕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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