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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적 경제와 재생에너지 중심 사회를 향하여

 

<전진> 16호 (2007년 12월) 원고



 연대적 경제와 재생에너지 중심 사회를 향하여

양솔규 부산회원



필자는 요즘 이사할 집을 구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전세물량이 없는 속에서도, 가끔 깔끔하고 괜찮은 집이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집은 괜찮아도 ‘기름보일러’인 경우가 많다. ‘눈 딱 감고 2년만 살아봐?’ 하다가도 기름값이 오르는 걸 생각하면 그럴 자신이 없다.


2007년 겨울, 유가는 배럴당 97달러까지 치솟았다. 올해 초 60달러 선이었던 것을 상기해본다면 불과 1년 사이에 60%의 가격 상승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유가의 초고속 증가의 배후에는 초국적 금융투기자본이 도사리고 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아무리 수요의 증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가격상승폭을 설명하는 변수가 되기에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과 인도, 제3세계의 점증하는 수요 역시 무시할 수만은 없다. 중국과 인도의 에너지생산량 중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석탄에 비해서는 매우 낮은 편이다. 그러나 두 나라에서 석유의 수요는 엄청난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전세계적인 수요의 증가는 장기적인 석유가를 상승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러한 두 나라의 에너지수요의 급증은 다른 한편으로 심각한 환경문제를 야기한다.

이러나저러나, 기름값은 당분간 오를 것이고, 물가상승의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올 판국이다.


월드 워치(World Watch)의 2006년 판 ‘지구환경보고서’는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여 이례적으로 이슈가 아닌 ‘중국과 인도’라는 두 국가를 특집으로 구성했다. 만약 두 나라가 미국 수준의 자원 이용과 오염물질을 배출한다면 지구적 재난은 불을 보듯 뻔 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중국과 인도에게 이러한 자원 이용을 중단시킬 수 있을까? 현재, 중국의 석유자원 확보가 어려워진다면 세계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럴 경우 석탄 이용이 증가된다면 환경 리스크가 급속하게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2005년, 현대경제연구원)을 자본 측에서는 내놓고 있다.

초국적 금융자본이든, OPEC이든, 아니면 초국적 석유자본이든, 강대국이든, 이러한 자원 및 권력정보 독점체들이 사실을 아무리 왜곡하든 간에 분명한 사실은 화석연료의 사용은 ‘유한’하다는 점과, 수요와 공급 속에서의 가격 결정이 시장 속에서 이루어질 때, 힘없는 대다수 전세계 인민들에게는 재난과 빈궁만이 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2008년은 아무래도 석유와 석탄으로 대변되는 화석연료와 자본주의의 문제가 화두가 될 것이다. 바야흐로 ‘지구적 사회내부 관계 변혁’과 ‘지구적 사회-자연 관계 변혁’이 동시에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엘마 알트파터는 누구인가?


바로 이때, ‘생태 사회주의적(?)’ 시대인식을 담은 책 또는 ‘생태적 반자본주의 선언서’가 발간되었다.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정치학과 교수(현재는 은퇴)이자 비판적 사회과학 잡지 PROKLA의 편집위원인 엘마 알트파터(Elmar Altvater) 교수의 책, 『자본주의의 종말』(동녘, 2007)이 그것이다.1) 사실 엘마 알트파터는 세계적 명성에 비해서는 우리나라에 잘 소개되지 않았다. 1992년에 편역된 『위기와 조절』(창비)라는 조절이론적 접근 이론서에 논문 한 편이 번역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소셜리스트 레지스터(Socialist Register, 2002년호)에 실린 ‘성장 강박증(The Growth Obsession)’이라는 글이 신기섭 한겨레신문 기자의 블로그에 번역되어 있다.(http://blog.jinbo.net/marishin/)

1938년생인 그는 “소련에서의 환경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는 1968세대로서 정치경제학 이론에 영향을 미친 독일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현재 그는 ‘ATTAC’과 ‘세계사회포럼’의 자문단이기도 하다.

독일녹색당의 이론적 지주라고 알려진 알트파터의 책이 주목되는 또 다른 이유는, 자본주의 이외의 대안부재론(TINA; There is no alternative)이 운위되는 신자유주의 시대, 따라서, (영미식) 자본주의 vs (라인형) 자본주의만이 유일한 가능성으로서 주어지는 시대에 ‘자본주의의 종말’을, 그것도 라인형 자본주의인 ‘독일’의 학자가 논한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삼위 일치된 자본주의의 귀결, 지경학적 세계화와 지정학적 신제국주의


먼저, 알트파터는 ‘역사의 종말’을 논한다. 역사의 종말은 후쿠야마가 언급한 것으로서, “1989년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진 후 이제는 자본주의 생산 방식이 영원하고 무한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언술은 이미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물신적 특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실은 인류 역사는 두 가지 길로 향하고 있다고 한다. 첫째 길은 끝없는 자본주의의 길로서 또 다른 역사의 종말, 즉 파국이 놓여 있다. 두 번째 길은 확 트인 지대로서, 자본주의적 축적을 넘어서는 사회적 대안들이다. 필자와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두 번째 길이다.


“만약 역사가 계속되고, 수많은 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현재 실현되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정치적으로 계획되고…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최상의 세계로 부각된다면, 자본주의의 종말에 관해서도 숙고해 보아야 하며…검증해 보아야만 한다”(43쪽).


알트파터는 현실 자본주의의 사적 전유의 네 가지 형태를 제시한다. 첫 번째 전유 형태는 가치화이다. 원시적 축적 체제에 해당하는 이러한 가치화는 현재에도 일어난다. 두 번째 전유 형태는 절대적 잉여가치 창출이다. 세 번째 전유 형태는 상대적 잉여 가치 창출이다. 이 속에서 노동력과 (뿐만 아니라) 자연을 전유하는 효율은 새롭고 더 효율성이 높은 기술과 합리적인 조직을 통해 개선된다. 이러한 전유는 모든 시간적 공간적 경계를 넘어서려는 글로벌화 경향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며, 자본주의 지경학이 드러난다. 네 번째 형태는 지정학과 새로운 제국주의이다. 에너지 자원확보와 공급을 위해서는 글로벌 경쟁이라는 자본주의 지경학적 논리를 넘어 탈취, 절대적 잉여 가치의 확대, 글로벌 중심지로의 이전을 통한 전유 역시 요구된다. 이를 주도하는 것은 금융 자본이다.


알트파터가 보기에 현대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 사회 구성체’, ‘화석 에너지원’, ‘유럽 합리주의’가 결합된 삼위 일치된 체제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처음부터는 아니지만(나무) 불가피하게 화석 에너지(석탄)에 의존하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수백 명의 ‘에너지 노예들’과 결합해 노동 잠재력을 몇 배로 증가시켰다. 점차 자본주의는 자연의 적으로 변해갔다. ‘가능한 모든 세계들 중 최상의 세계’인 자본주의는 ‘역사의 종말(최종적 승리)’에 이르러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자신의 생활의 기반을 파괴시킨다. 이러한 삼위 일치된 자본주의는 경제와 사회적 과정의 ‘가속화’를 불러오며, 자연의 파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향한다. 시간 단축의 가속화는 공간을 압축하고 뛰어 넘는다. 질주논리적인 가속화 신드롬은 화석에너지원을 통해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 또한 유발시켰다. 화석 에너지가 없다면 애덤 스미스의 약속은 지켜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막스 베버와 좀바르트는 이를 두고 ‘자본주의와 화석 에너지 체제의 악마의 결혼식’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삼위 일치화 덕분에 인류는 놀랄 정도로 부를 증가시켰다. 이 체제는 성장을 물신화하는 체제이다. 산업혁명 이후 성장은 더 이상 노동력 공급과 토양에 의존하지 않고, 산업 노동의 생산성 증대에 의존하게 되었다. 포드주의-소비사회는 이러한 양상을 대표한다.

하지만 엄청난 불평등 역시 만들어냈다. 화석에너지 소비에 있어서도 미국과 서유럽은 다른 대륙을 능가하며, 온실 효과 가스 배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화석에너지원의 장점(시공간적 제약을 넘는다는 점) 중 하나는 화석 이차 에너지인 전기와 내연 기관의 연료를 통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대규모의 전기 생산뿐 아니라 소규모의 장난감, 주방용 기구, PC 등에 투입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이후 태양에너지원으로의 전환에 있어서도 고려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화석에너지원은 엄청난 단점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지구대기의 온실가스 문제를 야기하는 폐쇄된 에너지체제라는 점이다.


내부의 모순과 외부의 충격


알트파터는 페르낭 브로델의 생각에 주목한다. 브로델은 자본주의의 종말에 대한 조건으로 첫째, 내부의 모순의 첨예화와 둘째, 외부로부터의 격심한 충격, 셋째, 동시에 내부에서의 신빙성 있는 대안들이 생겨날 때 가능하다고 본다. 알트파터가 보기에 첫 번째는 바로 금융 세계화가 준비하고 있는 모순의 폭발이며, 두 번째는 유한한 화석에너지 공급의 파탄과 온실 가스로 인한 지구기후의 변화이다.


글로벌화된 자본주의에서 금융 분야는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된 후에도 미국은 달러 세뇨리지2)의 장점을 누린다. 금융위기 이후 많은 나라들은 달러 보유를 통해 외환보유고를 늘려왔다. 이는 자국의 소비를 억제하고 미국의 소비 지수를 높게 하며, 미국의 적자를 낮은 비용으로 메울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만일, 유로화를 통한 외환보유가 이루어지면, 다시 말해 외환보유의 다각화를 추구하게 되면 미국에게는 불리해질 수 있다. 현재 미국의 달러는 점차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3)

또한 금융 자본이 요구하는 수익률은 실물 경제가 지속적으로 뒷받침할 수 없다. 따라서 금융 시장의 위기 추세는 항시적이다. 세계적 규모에서 금융 자본이 요구하는 민영화, 탈규제, 자유화는 또한 신자유주의 지배의 도덕적 토대를 허물고 있다.


자본주의의 외부적 충격은 화석 에너지원의 고갈과 온실가스로 인한 지구기후 변화에 기인한다. 이러한 화석 에너지원의 고갈로 인한 자원 확보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역사의 종말’ 이후 전쟁이 점차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자원과 자원의 수송지역을 둘러싼 갈등은 점차 확대될 것이다. 군사적 수단을 이용한 석유 소비의 한계를 늘리려는 ‘석유 제국주의’의 시도는 테러리즘을 불러온다. 공급 카르텔인 OPEC과 수요 카르텔인 메이저 석유 회사들은 석유 매장량을 부풀리고, 기후학자들은 에너지소비와 지구 온난화의 연관성을 축소시키며, 선진국들은 온실 가스 배출 기준을 낮추는 등의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결국 외부적 충격의 크기를 증가시킬 뿐이다.


연대적 경제와 지속가능한 재생에너지 체계


따라서 우리는 페르낭 브로델이 얘기하는 세 번째 조건을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알트파터는 연대 경제와 지속가능한 태양에너지 체계만이 신빙성 있는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한 사회는 오직 혁명적 과정 속에서만 자본주의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사회 형태를 극복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한 대안들을 숙고하고 운동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종말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현실 사회주의와는 달리 역사적인 파열을 겪으면서 자체적으로 붕괴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안을 만드는 사회운동은 자본주의의 시장이 내세우는 행동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본주의 질서는 무엇보다 ‘등가성’에 기초한다. ‘상호성’은 비록 등가성 원리와는 차이가 나나 모순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상호성’은 다양한 결합을 생각해볼 수 있다. 등가성의 안전 장치가 될 수도 있지만 부패와 결합될 수도 있다. ‘재분배’ 원리를 캘리니코스는 글로벌 시대에도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저자는 이 원리는 소규모 사회에 적합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알트파터는 등가성과 상호성의 원리에 대립하는 ‘연대의식’과 ‘공평성’의 원리를 내세운다.

이미 에밀 뒤르켕은 ‘유기적 연대 의식’ 속에서 집단 의식과 사회적 결속이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연대 의식들은 모두 도덕적인데, 노동운동의 국제적 연대 의식도 도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E.P 톰슨 역시 시장 경제 외부의 ‘도덕 경제’라는 개념을 말한다.


“연대적 경제는 사회운동이 시간과 공간을 탈환하려고 노력하면서 이루어지는 성과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공간-시간의 절멸을 통한 ‘탈영토적 운동’에 맞서 사회운동은 어떤 의미에서 영토운동이 된다. 이전의 갈등의 장은 노동-자본-국가라는 말하자면 삼 주체의 코포라티즘적 관계였던 반면에 ‘사회 영토적 대결’에서는 전혀 사정이 다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첫째 테마들이 이전과는 달리 국민 국가와 관련되어 있지 않으며, 둘째, 정규적 계급 관계 밖에서 대결이 일어나기 때문이며, 셋째, 대결의 새로운 형태, 즉 중앙집권적이 아닌 차이 속의 동일성 추구가 일어난다. 넷째, 새로운 사회 주체들도 개혁과 혁명의 변증법에 따라 움직인다. 바꿔 묻자면, ‘연대의식인가, 야만인가?’ 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러한 야만의 목록에는 화석에너지를 둘러싼 강대국간의 전쟁이라는 절멸의 계기까지 포함된다. 야만은 오직 지속 가능한 사회로 이행함으로써만 물리칠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다섯째, 새로운 것의 자율적인 공간과 새로운 시간 리듬을 획득하고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섯째, 자본주의적 여건 내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숙고만으로는 부족하고, 이를 넘어서야 한다.


독일이나 브라질 등에 있는 협동조합, 공익재단, 자유 교환시장, 소액 신용기관과 같은 제3 섹터라 불리는 분야들이 연대적 경제의 일부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 지역을 넘어서 연대적 경제의 주도권은 국가적, 세계적 차원에서 보완하고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정부와 국가적 차원만이 아니라 글로벌 금융 시장에 대한 개혁 역시 필요하다. 이는 “지역, 지방, 국가 경제와 세계시장의 기관들을 새로운 형태로 결합”하는 것이다. 연대적 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영역들을 연결시키는 것과 집단적 조직 형태와 행동 전략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양산하는 탈취 전략에 맞서 영토를 재탈환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연대적 경제는 공간(재탈환된 영토)을 통해 태양에너지 사회와 연관된다. 그런데, 재생 가능 에너지와 에너지 소비 절약이 자본주의와 조화를 이룬다 할지라도(마치 독일처럼), 그 장점을 드러낼 수 없다. 재생 에너지는 더디며 가속화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재생 가능 에너지 체제로의 이행의 길 중 선택 가능한 길은 재생 가능 에너지를 투입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 화석 에너지원, 유럽 합리주의의 삼위일체화를 저지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태양에너지와 화석에너지 사이의 방화벽이 무너지고, 열린 에너지 체제가 만들어진다. 이제 생산과 소비, 즉 경제는 태양에너지의 변환 체제처럼 조직되어야만 한다. 또한 에너지 체제의 변경은 생산 방식뿐만 아니라 생활 방식의 변화도 요구한다. 또한 에너지 노예의 수를 줄이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러한 과제는 단기간 내에 이행될 수 없는 과제이기는 하지만, 곧 닥쳐올 석유 채굴의 정점(피크 오일; peak oil)을 방향 전환의 기회로 이용해야만 한다.


저자의 논리적 주장을 요약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300쪽이 넘는 분량에 게다가 압축적인 내용은 읽어나가기에 쉽지만은 않다. 더군다나 오타와 번역상의 문제까지 겹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책 내에는 수많은 역사적, 이론적, 실천적 쟁점들이 섞여 있고, 검토해봐야 할 내용들이 무궁무진하다. 권력의 문제부터, 국가의 문제, 발전과 생태, 민주주의의 문제까지.

저자에게 글로벌 금융자본주의는 이전의 자본주의와는 단절적인 시기로 규정하는 듯하다. 저자는 현행 자본주의의 유지는 곧 파국으로 끝난다고 단정 지으면서도,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우울한 파국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희망에 찬 새 지평의 시작, ‘대전환’의 계기로 그려나가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람시의 전망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지평의 중심에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이 존재한다. 저자에게 사회운동은 이전의 포드주의-사회 코포라티즘적 체제내화된 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의 종말’을 넘어선 근본 변혁을 꿈꾸는 운동으로 설정된다. 저자는 ‘사회주의’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탈자본주의의 세계, 즉 사회주의의 체제 구성 요소를 생각할 때 우리는 재생 가능 에너지체계를 필수적으로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만약 이러한 지구멸렬을 피하는 방법으로서 사회주의가 고려된다면, 이는 생태 재앙의 시급성으로 인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것이다.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오늘 당장, 아니면 아무리 늦어도 내일은 화석 에너지 체제에 대한 대안들을 만들어 내는 데 착수해야만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모하비 사막에 있는 세계 최대의 태양광 발전소인 Kramer Junction solar power plant

엘마 알트파터, 『자본주의의 종말』, 동녘, 2007

엘마 알트파터

월드 워치(World Watch),『지구환경보고서 2006』

덴마크 미델그룬덴 앞바다 풍력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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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감은 굶주림의 숙명을 이긴다『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연대감은 굶주림의 숙명을 이긴다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소통> 제2호(2007년 11․12월호) 서평글 (2007.11.6)

노동사회교육원 졸업생 양솔규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Jean Zigler) 지음, 갈라파고스, 2007년, 201쪽


우리는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을 통해 만들어진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무한한 생산력의 발전을 토대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정체를 토대로 하는 이전 사회와 다르다고 배워왔다. 참으로 자본주의의 무한한 생산력은 물질적 궁핍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보였다. 맑스 역시도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이 곧 해방의 조건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러한 풍요로운 전지구적 자본주의 아래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2005년 현재, 10세 미만의 어린이가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으며, 비타민 A 부족으로 인한 시력 상실이 3분에 1명 꼴로, 한 해 700만 명에게 일어난다고 한다. 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 5,000만 명이 심각한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고 한다.

현재, 지구에는 1분에 250명이 태어나는데 그 중 197명이 제3세계에서 태어난다. 그 중 많은 수는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에 묻히게 된다. 프랑스 철학자 레지 드브레는 이를 “나면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힌 아이들”이라고 표현한다.


반대로, 전 세계에서 수확되는 곡물의 4분의 1이 부유한 나라의 소들이 먹고 있다. 굶어죽은 아이들과 살찐 소라는 이러한 끔찍한 이분법이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살찐 소를 비롯한 육류소비는 주로 선진국에서 이루어지는데, 영양과잉 상태의 선진국 국민들은 살을 빼기 위해 다시 다이어트를 시작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진다. 우리가 채식주의자들의 주장의 타당성을 반박하기 힘든 것은 이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아의 참상, 그리고 기아를 ‘구조적’으로 양산하고 있는 사회적 구조에 대한 고발을 충실하게 하고 있는 책이 바로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인 장 지글러(Jean Zigler)가 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이다. 그는 1999년까지 스위스 연방의회의원(사회당)을 지냈으며, 실증적인 사회학자로 현재는 제네바 대학 교수이기도 하다.


초국적 식량자본은 과잉생산과 가격덤핑으로 제3세계의 식량 가격과 생산을 교란시킨다. 또한 초국적 식량자본은 시카고 곡물거래소를 통해 전세계 식량의 유통을 장악함으로써 이윤과 기아를 동시에 극대화(?)한다. 또한 초국적 식량자본이 생산하는 식량은 그 자체가 초국적 금융자본의 투기대상이기도 하다. 카지노 자본주의는 ‘밥’을 미끼로 번성한다.

부유한 나라들은 가격보장이라는 이름으로 식량을 대량으로 폐기처분하거나 농산물 생산을 제한하기도 한다.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세계225명의 대재산가의 총자산은 1조 달러가 넘는다. 이것은 전세계 가난한 자들의 47%(25억 명)의 연간수입과 맞먹는 수치이다. 빌 게이츠의 자산은 가난한 미국인 1억 600만 명의 총자산과 맞먹는다.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기아의 책임은 초국적 기업과 제국주의, 부패한 정치집단 및 독재자에게 있으며, 가장 큰 피해자는 어린이와 민주주의이다.

장 지글러는 또한, 북한의 기아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1995년 이후 기아로 인해 북한에서 죽은 인구는 200만 명에 달하는데 이 중 대다수가 어린이들이라고 한다. 장 지글러는 미국 등의 봉쇄 정책의 야만성에 대해서도 언급하지만, 김일성과 김정일의 ‘기아’를 무기로 한 강제노동수용소와 식량원조를 이용한 군사화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운다.

살인적인 세계 경제구조는 ‘구조적 기아’를 양산하고 있다.

이러한 ‘기아’를 ‘산아제한’의 수단으로 여기는 ‘멜서스주의자’들이 아직도 활개를 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기아’를 통해 인구가 감소함으로써 자연적 법칙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주장하는 것은 진실을 회피하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84년 기준으로 FAO의 평가에 따르면, 84년의 식량생산을 가지고도, 120억 명을 하루 2,400-2,700칼로리를 공급하며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한다. 하물며 2007년의 생산량으로는 몇 백억 명을 먹여 살릴 수 있지 않겠는가!


장 지글러는 1970년 칠레 인민전선의 첫 번째 행동강령을 언급한다. 15세 이하 모든 어린이에게 하루 0.5리터의 분유를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강령은, 그러나 칠레의 커피와 우유의 생산과 유통을 장악하고 있던 초국적 식품자본 ‘네슬레’는 아옌데 정부의 정상적인 가격하의 분유 구입 요구를 거부한다. 더구나 미국정부와 다국적기업, CIA 역시도 이를 조장한다. 1973년 결국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에 의해 아옌데 인민전선 정부는 무너지고, 아이들의 영양상태는 인민전선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


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Burkina Faso)라는 나라가 있다. 83년 젊은 군인 네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킨다. 대통령은 토마스 상카라 대위이며, 그의 동지들은 블레이즈 콤파오레, 앙리 총고, 장 밥티스테 링가이 등이다. 부르키나파소는 60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나라인데, 상카라가 집권한 당시, 절대 다수가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다. 상카라는 자주관리정책, 인두세 폐지, 개간 가능한 토지 국유화 등을 하면서 4년 만에 자급자족과 민주적 운영이 가능하게 부르키나파소를 변모시켰다. 하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프랑스와 코트디부아르, 가봉, 토고 등의 프랑스 꼭두각시 정권들은 상카라의 동지였던 블레이즈 콤파오레를 부추겨 상카라와 그의 동지들을 제거한다. 결국 부르키나파소는 이전의 사회로 돌아가고 만다.

상카라는 저자인 장 지글러와의 만남 속에서 39세까지 살다 간 혁명가 체 게바라를 언급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비관했다고 한다. 결국 상카라는 그의 우려처럼 39세의 나이를 넘기지 못하고 죽고 만다.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전쟁의 이면에는 제국주의와 초국적 자본이 벌이는 자원전쟁(석유, 다이아몬드, 곡물 투기 등)이 있으며, 이러한 전쟁은 다시 기아를 급증시킨다. 또한 아마존 등의 환경파괴는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사헬 지대의 사막화를 확대시키면서 경작지의 면적을 줄인다. 더군다나 중국, 인도 등의 산업화 가세로 인한 에너지 수요 폭증은 이러한 현상을 강화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결국, 에너지 위기와 지구 온난화, 중국, 인도 등의 산업화와 전세계 경제의 요동, 전지구적 ‘슬럼’의 확대와 ‘기아’의 심화,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장 지글러는 하지만 이러한 ‘기아’의 문제를 해결불가능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기아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각국이 자급자족 경제를 스스로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인적인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엎어야 한다.

장 지글러는 인도적 지원이 효율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FAO와 WFP가 지원하는 대상국이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구호단체는 크메르 루주 등 학살정권을 지원한 아픈 과오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원조보다는 개혁이 먼저라고 주장한다. 혁명적 행동은 인도적 구호를 뛰어넘는다고 주장한다. 그 과정에서 인프라 정비를 해야 한다.


기아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장 지글러는 이윤지상주의, 시장만능주의, 신자유주의와의 전면전을 선포하고, 기아에 대한 투쟁을 가로막는 행위자로 WB, IMF, WTO를 지목한다. “잘못된 것 안에 올바른 삶은 없다”는 아도르노의 말을 인용하며, 장 지글러는 말한다.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에 행복의 영토는 없다”고. “배고픔의 숙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부족한 것은 연대감이며, 국제공동체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하는 진짜 의지이다”라고.


따라서, “식량권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인권으로서, (망명자의 피보호권처럼) 새로운 국제 법규로서 시급히 도입되어야 한다”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추동력은 유약한 UN에서 찾을 수 없다고 본다. 희망은 사회운동, 비정부조직, 노동조합 등 전지구적 민간단체에 있으며, 이들의 “연대만이 워싱턴 합의와 인권 사이의 대립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짧은 분량(201쪽)에다가, 아들에게 설명하는 방식의 쉬운 문체로 되어 있다. 하지만, 중요한 지적은 모두 담고 있다. 아울러, 『슬럼, 지구를 뒤덮다』(창비, 마이크 데이비스),『초국적자본, 세계를 삼키다』(창비, 존 매들리),『세계의 빈곤, 누구의 책임인가?』(이후, 제레미 시브룩)을 본 책과 함께 읽으면, 더 깊은 이해와 풍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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