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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08
    ‘막’ 형성된 계급에게 놓인 두 갈래 길
    양다슬

‘막’ 형성된 계급에게 놓인 두 갈래 길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 소통> 2008년 1․2월호 (2008년 1월 8일)

 

‘막’ 형성된 계급에게 놓인 두 갈래 길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구해근 지음, 창작과비평사, 2002년

 

그리 길지 않은 한국현대사 속에서 숫자는 ‘역사적 투쟁’의 법칙성을 나타내 주는 것처럼 보였다. 예를 들면, 1960년의 4.19 혁명, 1980년의 5.18 광주민중항쟁과 같이 10-20년 단위의 년도가 그러하다. 작년은 1987년 6월항쟁과 7,8,9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난 지 20주년이 되던 해였다. 또한, 1996-97년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난 지 10주년이 되던 해였다.

사람들이 이러한 시간적 흐름을 단지 ‘표지’해 주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그것 자체에 어떤 주술적 힘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뭔가 극복 가능한 희망을 찾고자 하는 심리적 동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학자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숫자가 반복적인 ‘시간적 주기’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숫자적 의미로만 본다면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1997년의 노동법개악 반대 총파업 투쟁이 일어난 지 10, 20주년이 되는 해인 2007년은 뭔가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해봄직한 해였다. 그리고 그 내용은 거대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조직적, 정치적 주체형성과 투쟁의 고양을 의미했다. 하지만, 작년 한 해 그 어떤 주술적 힘도 벌어지지 않았다. 역사에는 비약이 없다는 점을 믿는다면, 우리 노동운동은 아직 이러한 발전을 이루어낼 만한 실천을 하지 못한 것일 테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한국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시작해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의 출발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대한 이해와 이에 기반한 풍부한 논의일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2007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주노총은 조직노동 외 계급적 대표성을 갖추기 위한 활동에 게을리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역사에 대해 제대로 기록할만한 능력도, 의지도 없었고 그나마 기록된 자기 역사에 대해 그 구성원들과 나누고자 하지 않았다. 기껏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에서의 몇몇 정리만 있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회원들에게 책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구해근 하와이대학 사회학과 교수가 쓴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창작과비평사, 339쪽, 13,000원)이다. 이 책은 2001년에 구해근 교수가 영어로 쓴 책을 2002년에 신광영 선생이 번역을 해 출간되었다. 나는 이 책을 2004년 3월에 구입했는데, 몇 년 동안 읽지 않고 있다가, 2008년 신년에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저어했던 이유는 이 책이 1987년 이후의 노동운동사에 대해서 글의 비중상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1987년 이후의 역사가 중요하지 않아서라기 보다는, 한국 노동운동의 긴 역사를 ‘단절적’이기 보다는, ‘연속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구해근 선생의 특별한 시각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60년대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르는 긴 시간의 흐름을 ‘계급 형성’이라는 핵심 단어로 묶어 내고 있는 것이다.

 

구해근 선생의 ‘특별한 시각’은 바로, 책 제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영국의 맑스주의 역사학자 E.P. 톰슨의 기념비적인 저서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의 제목을 차용한 것과 같이 톰슨의 관점, 즉 계급을 역사주의적, 구성주의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관점을 수용한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계급을 “구조로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범주로도 보지 않”고 계급을 “사회적․문화적 형성으로서…다른 계급과의 관계 속에서만 정의될 수 있는 것…그 정의는 시간을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계급은 (코카의 주장처럼) “항상 형성 또는 소멸의 과정 속에 또는 진화나 퇴화의 과정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한국의 노동계급의 현재의 상태를 고정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정치적, 문화적 계기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실체로 파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시각 속에서 한국의 노동계급 형성을 살펴본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비교연구적 관점에서 대만이나 서구와는 다르게 나타나는 한국의 노동운동의 양상을 서술하고 그 원인을 밝히고자 한다.

 

이 책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대한 모든 내용들을 섭렵하여 담고 있지 않다. 자세한 내용과 관련해서는 다른 역사적 자료들이나 논문들이 더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하기 때문에 더욱 강점을 지닌 책이 될 수 있었다.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주요한 테마로 보고, 이의 계기와 과정, 조건과 이를 돌파하는 계급형성의 힘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다.

 

흥미롭게 볼 만한 점은 뒷부분에서 많은 외국의 노동분석가들과는 달리 구해근 교수는 한국의 경우 브라질, 남아공과는 다르게 ‘사회운동 노동조합주의’가 발전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구해근 교수는 그 원인을 첫째, 기업별 노조에 가해진 법적, 정치적 제약, 둘째, 낮은 실업수준과 적은 비공식 부문 규모, 셋째, 노조운동이 공장 특유의 문제에 몰두하면서 지역의 문제에 천착하지 않은 점 등으로 설명한다. 결국 한국의 노동운동은 그 운동의 폭발성, 전투성과는 상관없이 경제노조주의로 귀결되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IMF 이후, 현재의 조건 속에서 한국의 노동운동이 사회운동 노동조합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들이 이전과 달리 무르익고 있는가, 아닌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새로운 노동조합주의를 상상하면서, 과거의 우리 행동의 선택지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기업별 노조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었던 조건, 정당운동의 지체와 학출 활동가들의 조급함, 자본과 비교해서 “전략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의 불균형”을 초래한 원인들 등, 역사 속에서 배울 수 있는 수많은 오류와 실패들을 사심없이 지켜봐야만 할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노동운동이 더욱 힘든 구렁텅이로 밀려들어가고 있고, 수많은 비정규직들과 민중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하다. 80년대 말 형성된 한국 노동계급은 그러나 현재 ‘소멸’ 혹은 ‘퇴화’의 과정에 있을 지도 모른다.

 

구해근 교수가 결론적으로 얘기하듯이 한국의 노동운동은 아직 조직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약하고 허물어지기 쉬운 계급이다. 앞으로 이 계급이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계급조직을 갖추고 건설적인 미래상을 제시하면서 성숙한 노동계급으로 성장하는 길”이며, 또다른 길은 “협소한 노동조합주의에 몰두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분열되고 외부적으로는 고립되는” 길이다.

 

이 두 가지 갈래 길은 사실은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나타났으며, 미래의 순간순간마다 나타날 것이다. 그 갈래를 결국 선택할 주체는 한국 노동계급이며 그 선택 자체가 바로 계급을 고유의 모습으로 빚어내는 과정일 것이다.

 

이명박 시대가 시작되는 지금, 노동운동과 당 운동이 몰락과 쇄신의 갈래에 있는 지금, 우리는 지난 노동운동의 가장 빛나던 시대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선택을 위한 지혜와 결단력을 공급받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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