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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적 경제와 재생에너지 중심 사회를 향하여

 

<전진> 16호 (2007년 12월) 원고



 연대적 경제와 재생에너지 중심 사회를 향하여

양솔규 부산회원



필자는 요즘 이사할 집을 구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전세물량이 없는 속에서도, 가끔 깔끔하고 괜찮은 집이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집은 괜찮아도 ‘기름보일러’인 경우가 많다. ‘눈 딱 감고 2년만 살아봐?’ 하다가도 기름값이 오르는 걸 생각하면 그럴 자신이 없다.


2007년 겨울, 유가는 배럴당 97달러까지 치솟았다. 올해 초 60달러 선이었던 것을 상기해본다면 불과 1년 사이에 60%의 가격 상승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유가의 초고속 증가의 배후에는 초국적 금융투기자본이 도사리고 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아무리 수요의 증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가격상승폭을 설명하는 변수가 되기에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과 인도, 제3세계의 점증하는 수요 역시 무시할 수만은 없다. 중국과 인도의 에너지생산량 중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석탄에 비해서는 매우 낮은 편이다. 그러나 두 나라에서 석유의 수요는 엄청난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전세계적인 수요의 증가는 장기적인 석유가를 상승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러한 두 나라의 에너지수요의 급증은 다른 한편으로 심각한 환경문제를 야기한다.

이러나저러나, 기름값은 당분간 오를 것이고, 물가상승의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올 판국이다.


월드 워치(World Watch)의 2006년 판 ‘지구환경보고서’는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여 이례적으로 이슈가 아닌 ‘중국과 인도’라는 두 국가를 특집으로 구성했다. 만약 두 나라가 미국 수준의 자원 이용과 오염물질을 배출한다면 지구적 재난은 불을 보듯 뻔 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중국과 인도에게 이러한 자원 이용을 중단시킬 수 있을까? 현재, 중국의 석유자원 확보가 어려워진다면 세계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럴 경우 석탄 이용이 증가된다면 환경 리스크가 급속하게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2005년, 현대경제연구원)을 자본 측에서는 내놓고 있다.

초국적 금융자본이든, OPEC이든, 아니면 초국적 석유자본이든, 강대국이든, 이러한 자원 및 권력정보 독점체들이 사실을 아무리 왜곡하든 간에 분명한 사실은 화석연료의 사용은 ‘유한’하다는 점과, 수요와 공급 속에서의 가격 결정이 시장 속에서 이루어질 때, 힘없는 대다수 전세계 인민들에게는 재난과 빈궁만이 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2008년은 아무래도 석유와 석탄으로 대변되는 화석연료와 자본주의의 문제가 화두가 될 것이다. 바야흐로 ‘지구적 사회내부 관계 변혁’과 ‘지구적 사회-자연 관계 변혁’이 동시에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엘마 알트파터는 누구인가?


바로 이때, ‘생태 사회주의적(?)’ 시대인식을 담은 책 또는 ‘생태적 반자본주의 선언서’가 발간되었다.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정치학과 교수(현재는 은퇴)이자 비판적 사회과학 잡지 PROKLA의 편집위원인 엘마 알트파터(Elmar Altvater) 교수의 책, 『자본주의의 종말』(동녘, 2007)이 그것이다.1) 사실 엘마 알트파터는 세계적 명성에 비해서는 우리나라에 잘 소개되지 않았다. 1992년에 편역된 『위기와 조절』(창비)라는 조절이론적 접근 이론서에 논문 한 편이 번역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소셜리스트 레지스터(Socialist Register, 2002년호)에 실린 ‘성장 강박증(The Growth Obsession)’이라는 글이 신기섭 한겨레신문 기자의 블로그에 번역되어 있다.(http://blog.jinbo.net/marishin/)

1938년생인 그는 “소련에서의 환경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는 1968세대로서 정치경제학 이론에 영향을 미친 독일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현재 그는 ‘ATTAC’과 ‘세계사회포럼’의 자문단이기도 하다.

독일녹색당의 이론적 지주라고 알려진 알트파터의 책이 주목되는 또 다른 이유는, 자본주의 이외의 대안부재론(TINA; There is no alternative)이 운위되는 신자유주의 시대, 따라서, (영미식) 자본주의 vs (라인형) 자본주의만이 유일한 가능성으로서 주어지는 시대에 ‘자본주의의 종말’을, 그것도 라인형 자본주의인 ‘독일’의 학자가 논한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삼위 일치된 자본주의의 귀결, 지경학적 세계화와 지정학적 신제국주의


먼저, 알트파터는 ‘역사의 종말’을 논한다. 역사의 종말은 후쿠야마가 언급한 것으로서, “1989년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진 후 이제는 자본주의 생산 방식이 영원하고 무한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언술은 이미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물신적 특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실은 인류 역사는 두 가지 길로 향하고 있다고 한다. 첫째 길은 끝없는 자본주의의 길로서 또 다른 역사의 종말, 즉 파국이 놓여 있다. 두 번째 길은 확 트인 지대로서, 자본주의적 축적을 넘어서는 사회적 대안들이다. 필자와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두 번째 길이다.


“만약 역사가 계속되고, 수많은 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현재 실현되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정치적으로 계획되고…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최상의 세계로 부각된다면, 자본주의의 종말에 관해서도 숙고해 보아야 하며…검증해 보아야만 한다”(43쪽).


알트파터는 현실 자본주의의 사적 전유의 네 가지 형태를 제시한다. 첫 번째 전유 형태는 가치화이다. 원시적 축적 체제에 해당하는 이러한 가치화는 현재에도 일어난다. 두 번째 전유 형태는 절대적 잉여가치 창출이다. 세 번째 전유 형태는 상대적 잉여 가치 창출이다. 이 속에서 노동력과 (뿐만 아니라) 자연을 전유하는 효율은 새롭고 더 효율성이 높은 기술과 합리적인 조직을 통해 개선된다. 이러한 전유는 모든 시간적 공간적 경계를 넘어서려는 글로벌화 경향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며, 자본주의 지경학이 드러난다. 네 번째 형태는 지정학과 새로운 제국주의이다. 에너지 자원확보와 공급을 위해서는 글로벌 경쟁이라는 자본주의 지경학적 논리를 넘어 탈취, 절대적 잉여 가치의 확대, 글로벌 중심지로의 이전을 통한 전유 역시 요구된다. 이를 주도하는 것은 금융 자본이다.


알트파터가 보기에 현대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 사회 구성체’, ‘화석 에너지원’, ‘유럽 합리주의’가 결합된 삼위 일치된 체제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처음부터는 아니지만(나무) 불가피하게 화석 에너지(석탄)에 의존하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수백 명의 ‘에너지 노예들’과 결합해 노동 잠재력을 몇 배로 증가시켰다. 점차 자본주의는 자연의 적으로 변해갔다. ‘가능한 모든 세계들 중 최상의 세계’인 자본주의는 ‘역사의 종말(최종적 승리)’에 이르러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자신의 생활의 기반을 파괴시킨다. 이러한 삼위 일치된 자본주의는 경제와 사회적 과정의 ‘가속화’를 불러오며, 자연의 파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향한다. 시간 단축의 가속화는 공간을 압축하고 뛰어 넘는다. 질주논리적인 가속화 신드롬은 화석에너지원을 통해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 또한 유발시켰다. 화석 에너지가 없다면 애덤 스미스의 약속은 지켜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막스 베버와 좀바르트는 이를 두고 ‘자본주의와 화석 에너지 체제의 악마의 결혼식’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삼위 일치화 덕분에 인류는 놀랄 정도로 부를 증가시켰다. 이 체제는 성장을 물신화하는 체제이다. 산업혁명 이후 성장은 더 이상 노동력 공급과 토양에 의존하지 않고, 산업 노동의 생산성 증대에 의존하게 되었다. 포드주의-소비사회는 이러한 양상을 대표한다.

하지만 엄청난 불평등 역시 만들어냈다. 화석에너지 소비에 있어서도 미국과 서유럽은 다른 대륙을 능가하며, 온실 효과 가스 배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화석에너지원의 장점(시공간적 제약을 넘는다는 점) 중 하나는 화석 이차 에너지인 전기와 내연 기관의 연료를 통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대규모의 전기 생산뿐 아니라 소규모의 장난감, 주방용 기구, PC 등에 투입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이후 태양에너지원으로의 전환에 있어서도 고려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화석에너지원은 엄청난 단점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지구대기의 온실가스 문제를 야기하는 폐쇄된 에너지체제라는 점이다.


내부의 모순과 외부의 충격


알트파터는 페르낭 브로델의 생각에 주목한다. 브로델은 자본주의의 종말에 대한 조건으로 첫째, 내부의 모순의 첨예화와 둘째, 외부로부터의 격심한 충격, 셋째, 동시에 내부에서의 신빙성 있는 대안들이 생겨날 때 가능하다고 본다. 알트파터가 보기에 첫 번째는 바로 금융 세계화가 준비하고 있는 모순의 폭발이며, 두 번째는 유한한 화석에너지 공급의 파탄과 온실 가스로 인한 지구기후의 변화이다.


글로벌화된 자본주의에서 금융 분야는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된 후에도 미국은 달러 세뇨리지2)의 장점을 누린다. 금융위기 이후 많은 나라들은 달러 보유를 통해 외환보유고를 늘려왔다. 이는 자국의 소비를 억제하고 미국의 소비 지수를 높게 하며, 미국의 적자를 낮은 비용으로 메울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만일, 유로화를 통한 외환보유가 이루어지면, 다시 말해 외환보유의 다각화를 추구하게 되면 미국에게는 불리해질 수 있다. 현재 미국의 달러는 점차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3)

또한 금융 자본이 요구하는 수익률은 실물 경제가 지속적으로 뒷받침할 수 없다. 따라서 금융 시장의 위기 추세는 항시적이다. 세계적 규모에서 금융 자본이 요구하는 민영화, 탈규제, 자유화는 또한 신자유주의 지배의 도덕적 토대를 허물고 있다.


자본주의의 외부적 충격은 화석 에너지원의 고갈과 온실가스로 인한 지구기후 변화에 기인한다. 이러한 화석 에너지원의 고갈로 인한 자원 확보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역사의 종말’ 이후 전쟁이 점차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자원과 자원의 수송지역을 둘러싼 갈등은 점차 확대될 것이다. 군사적 수단을 이용한 석유 소비의 한계를 늘리려는 ‘석유 제국주의’의 시도는 테러리즘을 불러온다. 공급 카르텔인 OPEC과 수요 카르텔인 메이저 석유 회사들은 석유 매장량을 부풀리고, 기후학자들은 에너지소비와 지구 온난화의 연관성을 축소시키며, 선진국들은 온실 가스 배출 기준을 낮추는 등의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결국 외부적 충격의 크기를 증가시킬 뿐이다.


연대적 경제와 지속가능한 재생에너지 체계


따라서 우리는 페르낭 브로델이 얘기하는 세 번째 조건을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알트파터는 연대 경제와 지속가능한 태양에너지 체계만이 신빙성 있는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한 사회는 오직 혁명적 과정 속에서만 자본주의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사회 형태를 극복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한 대안들을 숙고하고 운동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종말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현실 사회주의와는 달리 역사적인 파열을 겪으면서 자체적으로 붕괴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안을 만드는 사회운동은 자본주의의 시장이 내세우는 행동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본주의 질서는 무엇보다 ‘등가성’에 기초한다. ‘상호성’은 비록 등가성 원리와는 차이가 나나 모순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상호성’은 다양한 결합을 생각해볼 수 있다. 등가성의 안전 장치가 될 수도 있지만 부패와 결합될 수도 있다. ‘재분배’ 원리를 캘리니코스는 글로벌 시대에도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저자는 이 원리는 소규모 사회에 적합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알트파터는 등가성과 상호성의 원리에 대립하는 ‘연대의식’과 ‘공평성’의 원리를 내세운다.

이미 에밀 뒤르켕은 ‘유기적 연대 의식’ 속에서 집단 의식과 사회적 결속이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연대 의식들은 모두 도덕적인데, 노동운동의 국제적 연대 의식도 도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E.P 톰슨 역시 시장 경제 외부의 ‘도덕 경제’라는 개념을 말한다.


“연대적 경제는 사회운동이 시간과 공간을 탈환하려고 노력하면서 이루어지는 성과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공간-시간의 절멸을 통한 ‘탈영토적 운동’에 맞서 사회운동은 어떤 의미에서 영토운동이 된다. 이전의 갈등의 장은 노동-자본-국가라는 말하자면 삼 주체의 코포라티즘적 관계였던 반면에 ‘사회 영토적 대결’에서는 전혀 사정이 다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첫째 테마들이 이전과는 달리 국민 국가와 관련되어 있지 않으며, 둘째, 정규적 계급 관계 밖에서 대결이 일어나기 때문이며, 셋째, 대결의 새로운 형태, 즉 중앙집권적이 아닌 차이 속의 동일성 추구가 일어난다. 넷째, 새로운 사회 주체들도 개혁과 혁명의 변증법에 따라 움직인다. 바꿔 묻자면, ‘연대의식인가, 야만인가?’ 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러한 야만의 목록에는 화석에너지를 둘러싼 강대국간의 전쟁이라는 절멸의 계기까지 포함된다. 야만은 오직 지속 가능한 사회로 이행함으로써만 물리칠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다섯째, 새로운 것의 자율적인 공간과 새로운 시간 리듬을 획득하고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섯째, 자본주의적 여건 내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숙고만으로는 부족하고, 이를 넘어서야 한다.


독일이나 브라질 등에 있는 협동조합, 공익재단, 자유 교환시장, 소액 신용기관과 같은 제3 섹터라 불리는 분야들이 연대적 경제의 일부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 지역을 넘어서 연대적 경제의 주도권은 국가적, 세계적 차원에서 보완하고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정부와 국가적 차원만이 아니라 글로벌 금융 시장에 대한 개혁 역시 필요하다. 이는 “지역, 지방, 국가 경제와 세계시장의 기관들을 새로운 형태로 결합”하는 것이다. 연대적 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영역들을 연결시키는 것과 집단적 조직 형태와 행동 전략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양산하는 탈취 전략에 맞서 영토를 재탈환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연대적 경제는 공간(재탈환된 영토)을 통해 태양에너지 사회와 연관된다. 그런데, 재생 가능 에너지와 에너지 소비 절약이 자본주의와 조화를 이룬다 할지라도(마치 독일처럼), 그 장점을 드러낼 수 없다. 재생 에너지는 더디며 가속화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재생 가능 에너지 체제로의 이행의 길 중 선택 가능한 길은 재생 가능 에너지를 투입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 화석 에너지원, 유럽 합리주의의 삼위일체화를 저지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태양에너지와 화석에너지 사이의 방화벽이 무너지고, 열린 에너지 체제가 만들어진다. 이제 생산과 소비, 즉 경제는 태양에너지의 변환 체제처럼 조직되어야만 한다. 또한 에너지 체제의 변경은 생산 방식뿐만 아니라 생활 방식의 변화도 요구한다. 또한 에너지 노예의 수를 줄이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러한 과제는 단기간 내에 이행될 수 없는 과제이기는 하지만, 곧 닥쳐올 석유 채굴의 정점(피크 오일; peak oil)을 방향 전환의 기회로 이용해야만 한다.


저자의 논리적 주장을 요약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300쪽이 넘는 분량에 게다가 압축적인 내용은 읽어나가기에 쉽지만은 않다. 더군다나 오타와 번역상의 문제까지 겹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책 내에는 수많은 역사적, 이론적, 실천적 쟁점들이 섞여 있고, 검토해봐야 할 내용들이 무궁무진하다. 권력의 문제부터, 국가의 문제, 발전과 생태, 민주주의의 문제까지.

저자에게 글로벌 금융자본주의는 이전의 자본주의와는 단절적인 시기로 규정하는 듯하다. 저자는 현행 자본주의의 유지는 곧 파국으로 끝난다고 단정 지으면서도,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우울한 파국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희망에 찬 새 지평의 시작, ‘대전환’의 계기로 그려나가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람시의 전망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지평의 중심에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이 존재한다. 저자에게 사회운동은 이전의 포드주의-사회 코포라티즘적 체제내화된 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의 종말’을 넘어선 근본 변혁을 꿈꾸는 운동으로 설정된다. 저자는 ‘사회주의’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탈자본주의의 세계, 즉 사회주의의 체제 구성 요소를 생각할 때 우리는 재생 가능 에너지체계를 필수적으로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만약 이러한 지구멸렬을 피하는 방법으로서 사회주의가 고려된다면, 이는 생태 재앙의 시급성으로 인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것이다.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오늘 당장, 아니면 아무리 늦어도 내일은 화석 에너지 체제에 대한 대안들을 만들어 내는 데 착수해야만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모하비 사막에 있는 세계 최대의 태양광 발전소인 Kramer Junction solar power plant

엘마 알트파터, 『자본주의의 종말』, 동녘, 2007

엘마 알트파터

월드 워치(World Watch),『지구환경보고서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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