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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운동화, 스니커즈 만세!

싸우는 운동화, 스니커즈 만세!

한겨레21 2006년05월26일 제611호

검정색 구두와 하얀색 운동화의 시대는 가고 형형색색 스니커즈의 시대로 … 세계적 디자이너의 명품에서 구멍가게 옆의 아디칼라까지 그 화려한 스펙트럼

 

▣ 나지언 피처 에디터

 

지난 4월12일 밤 12시, 뉴욕의 한 상점 앞에 일군의 젊은이들과 경찰들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둘러싸여 있다. 순찰을 나온 경찰이 말한다. “아니, 도대체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은 나이키 매장 앞이었고, 그로부터 10시간 뒤 그래픽 아티스트 스태시가 디자인한 ‘나이키 에어맥스 스태시 블루 팩’ 리미티드 에디션이 판매될 예정이었다.


△ 디자인과 색감으로 무장한 스니커즈는 여자의 발을 해방시키고 남자를 고민의 즐거움에 빠뜨린다. <위쪽>, 나이키가 ‘에어 조든’ 시리즈를 발표하면서 운동화는 운동장을 벗어났다. (왼쪽아래), ‘아디칼라’ 화이트 시리즈는 아크릴 물감 등과 세트로 판매한다. 만화 스니

 

멀쩡하게 생긴 한 남자는 경찰의 의아함에 화답이라도 하듯 말한다. “만약 저 스니커즈를 구한다면, 집에 가서 울 것만 같아요.” 당신이 보기에 미친 게 분명하다고 생각되는 이 젊은이들은 시카고, 마이애미, 보스턴 등지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으며 특별한 스니커즈의 첫 판매를 기다리느라 며칠 밤을 새웠다. 그들이 갈구하던 스니커즈는 25만원에 판매됐으나, 65만원까지 가격이 오르기도 했다.

 

“저걸 손에 넣으면 울어버릴 거야”

 

태초에 운동화가 있었다. 1980년 나이키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것은 단지 운동화에 지나지 않았다. 운동화는 새것이 더 촌스럽다고 생각됐으며 해질 때까지 신는 게 그들의 정체성이라 믿었다. 그러나 나이키가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의 도구로 운동화를 불러줬을 때, 그리고 곧이어 형형색색 ‘에어 조단’ 시리즈를 발표했을 때, 운동화는 운동장을 벗어났다. 다 큰 남자들이 나이키 에어 조단을 손에 넣고 펑펑 우는 장면을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1990년, 스니커즈는 이제 공간의 제약성을 벗어나 어디든 활보할 수 있게 됐다.

그러니까 1990년, 축구 용품 브랜드로 알려진 푸마는 세계적인 디자이너 질 샌더와 손을 잡았다. 질 샌더는 푸마의 축구화 ‘푸마 킹’을 스니커즈 형태로 변형한 ‘푸마 아반티’를 내놓았다. 나이키와 아디다스의 경쟁에 밀리던 푸마는 푸마 아반티의 슬림하고 날렵한 디자인으로 인해 인기를 한 몸에 받았고, 국내에서는 뒤늦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지난해 명동과 신촌, 압구정 거리를 아반티가 모두 쓸고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질 샌더에 질세라, 다른 디자이너들도 스니커즈 디자인에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다. 일단 짭짤한 수입을 낸 푸마는 1999년 ‘블랙 스테이션’이라는 고급 스포츠 캐주얼 라인을 새로 론칭했다. 이후 프라다 디자이너 출신 닐 바렛, 슈퍼모델 크리스티 털링턴, 그리고 일본의 야스히로 미하라 등을 영입한 푸마는 다양하고 신선한 제품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아디다스는 일본의 요지 야마모토, 리복은 폴 스미스와 손잡고 명품 스니커즈를 생산해냈으며, 반스는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와 함께 ‘마크 제이콥스 슬립온 제트’라는 앙증맞고 귀여운 스니커즈를 만들어냈다.


△ 스니커즈는 신발이 아니라 예술이다. 디자이너들도 스니커즈 디자인에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다.

 

 

전세계가 스니커즈 열풍이다. MTV는 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스니커즈 마니아들을 찾아나섰으며, ESPN은 라는 프로그램으로 스니커즈 탐방을 시작했다. 이제 스니커즈는 운동장을 벗어나 TV에 침투했으며, 사무실과 고급 레스토랑에까지 발을 뻗었다. 파워워킹할 때 신는 허여멀건 운동화와 달리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디자인과 색감으로 무장한 스니커즈는 슈트에다 신어도 손가락질 받지 않는 게 장점이다. 이제 여자들은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 냄새 나는 스타킹과 퉁퉁 부은 발과 싸우는 대신, 그냥 양말을 벗어던지면 된다. 고무신의 여성 평등 기조에까지는 못 미치지만, 스니커즈는 여자의 발을 옥죄던 하이힐에서 일주일에 단 며칠 만이라도 해방될 수 있는 숨구멍을 부여했다.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캐리가 소리쳐 불렀던 ‘마놀로 블라닉’ 구두 대신 이제 ‘스니커즈 만세’를 외칠 일이다. 그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키가 조금 작아진 것뿐이다. 남자들은 또 어떤가. 그들이야말로 수많은 종류의 스니커즈 앞에서 뭘 골라 신어야 할지 고민하는 즐거움에 빠졌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검정색 구두와 하얀색 운동화가 전부인 줄 알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 평소에는 나이키 에어 맥스를 신어도,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에는 슈트에 캔버스 스니커즈를 신고 넥타이 하나만 매주면 되는 시대인 것이다.

 

돈을 숨기는 포켓과 안창의 국경 지도

 

모든 사람을 평소의 키 그대로 가감 없이 보여주는 스니커즈는 평등한 신발이다. 이렇게 평등을 외치는 신발이다 보니, 목까지 단추를 채워야 하는 레스토랑보다는 아무렇게나 입어도 되는 거리에서 더 빛이 난다. 격식이나 형식 대신 자유와 평등을 입은 스니커즈는 제품 제작에서도 그 믿음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최근 스니커즈 열풍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은 ‘커스터마이징’, 자주 쓰는 용어로 ‘튜닝’이다. 커스터마이징은 소량 생산되는 비싼 디자이너의 스니커즈를 사느라 돈을 모으거나 유명한 예술가들이 만든 스니커즈를 사느라 밤새워 충혈된 눈을 하고서 줄을 서야 하는 번거로움을 모두 없애주는 편리한 마케팅이다. 이제 소비자들은 스니커즈에 마음대로 그림을 그려넣고 색을 칠하고 장식하는 ‘나만의 스니커즈’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마케팅의 가장 선봉에 있는 아디다스는 1983년 시작했다가 시대를 앞서갔다는 이유로 외면받은 ‘아디칼라’ 시리즈를 다시 내놓았다. 아디칼라 화이트 시리즈는 흰색 운동화와 아크릴 물감과 사인펜, 스프레이 등이 하나의 세트로 판매된다. 디자인에 따라 레벨 1에서 6까지 여섯 종류가 있는데, 레벨이 높아질수록 가격이 싸지고 판매 수량도 많아진다. 명동에 있는 아디칼라 매장에 가면 배우 이천희가 만든 ‘도시’ 스니커즈, 만화 <츄리닝> 만화가들이 만든 ‘츄리다스’ 등 다양하고 재미있는 스니커즈를 만나볼 수 있다. 나이키의 ‘ID’, 퓨마의 ‘몽골리안 바베큐’ 프로젝트 역시 같은 맥락이다.


△ 스니커즈는 젊으니이들의 열광을 등에 업고, 소비와 생산의 개념을 바꿔놓았다. 매장에서 스니커즈를 고르는 젊은이들.

 

덕분에 커스터마이징 아티스트들도 뜨고 있다. 나이키 튜닝으로 유명한 에드슨의 튜닝화는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다. 이렇게 스니커즈는 소비의 개념을 바꿔놓고, 더 크게는 시대가 고수하는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까지도 가져왔다.

앞에서 말한 거리의 예술가 스태시의 스니커즈처럼 각 스니커즈 브랜드는 좀더 자유롭고 다양한 예술의 형태를 스니커즈와 접목시키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리복의 바스키아 스니커즈는 요절한 천재 화가 바스키아의 작품과 사인을 활용한 제품이며, 아디다스는 팝 아티스트 키스 해링의 작품을 스니커즈에 도입했다. 우마 서먼이 영화 <킬 빌>에 신고 나온 매끈한 스니커즈는 일본의 오니쓰카 타이거 제품이었지만, 나이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타란티노 감독의 <킬 빌>에 대한 오마주를 바치기 위해 신발 앞에 일어로 ‘빌을 죽여라’(Kill Bill)라고 써 있는 킬빌 슈즈를 따로 제작했다. 이제 스니커즈는 단순히 신발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이다. 젊음과 자유를 상징하는 스니커즈를 전선에 매다는 등 다양한 스니커즈 아티스트들도 생겨났다. 컨버스나 나이키가 체 게바라를 광고나 제품에 자주 도입하는 게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스니커즈는 돈 많은 패션 피플의 소장품이나 할 일 없는 젊은이들의 수집품만은 아니다. 스니커즈를 보면 사회가 읽힌다. 소비와 생산의 개념을 바꿔놓은 스니커즈는 다양한 정치·사회적 이슈를 반영하기도 한다. 브루클린 아티스트 주디스 워다인은 미국에 밀입국하는 멕시코인들을 위한 상징적인 스니커즈, 즉 ‘보더 스니커즈’(Border Sneakers)를 만들었다. 일명 ‘브링코’(Brinco·스페인어로 ‘도약’이라는 의미)라 불리는 이 스니커즈는 신발끈에는 라이트와 나침반을 붙였으며, 안쪽에는 돈이나 진통제를 숨길 수 있는 포켓이 있다. 그리고 발 안창에는 국경 지도가 그려져 있다. 주디스 워다인은 1천 개의 보더 스니커즈를 통해 미국 사회에서 이민자들의 문제를 이슈화했다. 한편, 아디다스는 아디칼라 시리즈 중 디자이너 베리 맥기가 디자인한 스니커즈 때문에 미국 내 아시아 커뮤니티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가 그린 아시아인들이 뻐드렁니와 찢어진 눈이라는 정형화된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게 반발의 이유였다.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들어간다

 

FEIT(Fight) 스니커즈는 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부패, 그리고 부정과 싸운다는 의미에서 제품명과 회사명이 ‘파이트’며, 대량생산이 아니라 전문가들이 일일이 수작업으로 섬세하게 만들어낸 명품이다. 나이키 ID는 ‘덩크 7 자선 컬렉션 스니커즈’로, 판매 금액을 전액 비영리단체에 기부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제품 역시 전세계에서 30명 정도만 가질 수 있는 희귀 소장품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소비와 생산의 개념을 바꿔놓은 스니커즈 마케팅만이 할 수 있는 운동일 것이다.

스니커즈는 이미 우리 일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으며, 생산과 소비 그리고 예술에 대한 많은 개념들을 바꿔놓았다. 최근 아디칼라 마케팅을 보면, 그들은 스니커즈가 사회·문화적 맥락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제대로 파악한 게 분명하다. 그들은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스니커즈가 들어간다는 취지 아래 뉴욕에 있는 7개의 작은 구멍가게에 아디칼라를 전시하기 시작했다. 골목길 코너에 있는 작은 상점 안 음료수 냉장고 등지에 놓여 있는 아디칼라 스니커즈는, 스니커즈가 얼마나 우리 일상에 가까이 들어왔는지를 방증하는 사례다. 물론 이렇게 스니커즈 하나에 거창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기자나 하는 일이고, 당신들이 할 일은 지금 당장 달려가 마음에 드는 스니커즈를 하나 사서 하루 종일 일하느라 지친 발에게 위로를 건네는 것이다. 그게 스니커즈의 가장 큰 미덕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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