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양혜규]폐가, 시간에 갇힌 기억의 공간

폐가, 시간에 갇힌 기억의 공간

 

인천 부둣가 작가의 외할머니집
무너진 천장·벗겨진 벽 그대로
“고민하는 관객과 교감하고파“

 
 
한겨레 노형석 기자
 
 
유럽파 설치작가 양혜규씨 첫 개인전 ‘사동 30번지’

젊은 설치작가 양혜규(35·왼쪽)씨의 전시장은 곳곳이 부서지고 무너진 옛 왜식 집이다. 삭을 대로 삭은 천장의 나무 이음매 곳곳에 구멍이 뚫려 햇살이 들어온다. 벽에는 벗겨진 벽지가 너덜거렸다. 먼지와 폐자재가 깔린 다다미 방들의 폐허 같은 바닥 위에 방울등과 사이키델릭 조명등이 깜빡거린다.

유럽에서 호평받으며 활동해온 이 유학파 작가의 첫 국내 개인전은 항도 인천의 부둣가 부근 폐가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19일 시작한 전시 ‘사동 30번지’는 으레 하는 개막 행사도 없었다. 서울에서 1시간 이상 전철을 타고 동인천역에 내린 뒤 물어물어 사동 주택가에 파묻힌 폐가를 찾은 관객들은 좁은 실내에서 또다른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이곳을 찾느라 발품 들였던 일상의 시간들이 폐가 속에서 숨쉬어온 또다른 심연의 시간 속으로 잠기는 듯한 환각이다.


 

“이 폐가는 고인이 되신 외할머니가 8년 전까지 살던 집입니다. 어릴 적 크고 풍성하게 보였던 이 집이 이제는 왜소하게 보이더군요. 신기하지 않아요. 시간 속에서 기억이 변질된 거죠. 그 신비스런 변화를 머금은 공간 속에서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굴절을 이야기해보려고 한 겁니다. ”

작가는 지난겨울 유년의 기억이 깃든 폐가를 답사한 뒤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관계를 담은 일종의 판타지아를 만들겠다고 구상했다. ‘새로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산더미처럼 쌓인 폐가 안팎의 쓰레기를 치워내면서 만들었다’는 이 역설적 설치작업은 그래서 이젠 살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폐가 곳곳에 넘실거리는 결핍을 조용히 일깨워준다.

부서지고 벗겨진 벽들로 이어지는 폐가의 이미지는 거칠고 남루하지만, 조형물과 조명등의 배치는 뜻밖에도 매우 섬세하고 치밀하다. 낮게 내려온 백열등이 비추는 문간방 바닥의 스프레이 칠한 나뭇조각들, 마루와 건넌방에 흩어진 기하학적 모양의 색종이 조형물과 방울등, 사물을 정지사진처럼 비추는 스트로보 조명, 관객들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 등이 작가의 의도를 연출하는 적절한 소품이 되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자칫 진부한 향수로 덧입혀질 수 있는 집에 얽힌 구체적인 사연을 일부러 비워내고, 다분히 추상화한 조형물들을 배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버린 옷장과 소파에 천으로 감싼 건조대를 놓은 안방, 숫자가 뒤죽박죽된 시계, 거울 등이 등장하는 마루와 건넌방 등의 모습들을 통해 작가는 시간의 질곡을 피할 수 없는 인간존재와 공간의 함수관계를 차분하게 되짚어 보고 있다.

일상 사물, 현상의 뒤안에 도사린 보이지 않는 구조와 힘들 사이의 간극은 작가 양씨가 유학시절부터 패션, 음성 등의 다른 영역을 아우른 개념적 설치작업에서 일관되게 추구했던 관심사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보이지 않는 소우주를 지니고 있으며, 시간은 바로 그들 소우주들을 은연중 소통시키는 매개체라는 사실을 작가는 폐가란 매체를 빌려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네덜란드에서 같이 활동한 기획자 김현진씨와 의기투합한 이 전시를 두고 작가는 “관객들이 쇼핑하듯 작품 이미지들을 소비하는 전시장 대신, 발품 들이더라도 고민하고 숙고하는 관객들과 교감하는 전시를 하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인천/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기사등록 : 2006-08-22 오후 07:35:28 기사수정 : 2006-08-22 오후 07:41:37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