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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8/16
    예비군과 일상 정치(6)
    레니

예비군과 일상 정치

월-화 양 이틀간 예비군 훈련을 갔다 왔더랬다. 이번엔 동원 미지정으로 되어 출퇴근하며 훈련을 받았다.

전에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것을 꼽으라면 분명 "예비군 훈련"이 베스트 3 안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예비군 훈련에 참가한 사람들"을 추가하고 싶다. 분명 부대 밖에서는 나름 쓸모 있는 사람들일텐데, 어찌된 일인지 군복만 입혀 놓으면 귀차니즘과 이기주의의 화신으로 변모한다. 훈련 중에 하지 말라고 하는 일만 골라서 하고, 여기저기 엎어져 자다가 현역 군인인 교관이 깨우면 성질을 내고, 뭘 시켜도 무기력하고 흐느적 거리면서 밥먹을 때나 집에 갈 때만 되면 동작이 날렵해진다. (물론 나도 이런 사람들 중에 하나였지만)

이렇게 게으른 사람을 양산하는 데에는 예비군의 특수한 권력 관계에 원인이 있다. 예비군은 기본적으로 군인 신분이 아니기 때문에, 군대의 엄격한 계급 관계와 규율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또한 계급 관계를 따진다 하더라도 대부분 병장 제대를 한 사람들이라 교관의 역할을 수행하는 일반 병사보다 상위 계급에 위치한다. 따라서 예비군에게 가할 수 있는 최대한의 처벌이란 고작 집에 돌려보내는 강제퇴소인데, 뒷말이 나올까봐 두려워서인지 강제퇴소조차 잘 시키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나마 예비군에게 말발이 먹히는 사람은 강제 퇴소 권한이 있는 부대 장교와 동대장 뿐이고, 대부분의 시간에 통제를 담당하는 일반 병사들은 간청하다시피 하며 겨우겨우 교육을 끌고가게 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예비군 훈련을 가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참 애매하기 짝이 없다. 물론 거시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군사 훈련과 안보교육을 일방적으로 시키는 예비군 훈련은 철폐해야 마땅할 대상이다. 강제적으로 총을 들게 하고 사람을 죽이는 기술을 가르치기 때문에 불복종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옳다. 만약 훈련 불참시 벌금이 부담되어 예비군 훈련에 참가하더라도, 훈련을 사보타지 하고 사격은 철저히 거부하며 통제에 따르지 않는 것이 올바른 실천이겠다.

하지만 훈련을 사보타지 한다거나 통제에 따르지 않는 것은 예비군 누구나 하는 행동이다. 다만 대부분의 이들은 어떤 정치적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귀찮기 때문이고 결정적으로 반드시 명령에 따라야 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신병훈련소에서 이들은 교관의 고함소리에 움찔하며 순한 양처럼 훈련을 받았을 테지만, 예비군은 권력 관계에 있어 교관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에 당당하게 훈련을 사보타지 할 수 있다.

게다가 예비군이 훈련을 태만하게 받음으로써 결국 현역 병사로 복무하고 있는 교관들에게 피해가 돌아간다. 현역병은 장교과 예비군 사이의 묘한 권력관계 속에서 공통적으로 열위에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예비군의 태만으로 인해 현역병들이 장교들에게 질책을 받게 되는 광경을 종종 보게 되는데, 이럴 때엔 이들이 그렇게 불쌍해 보일 수가 없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예비군들이 현역병들이 책잡히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게을리 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가 많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훈련을 열심히 받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건 군대라는 특수한 권력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애매함이지만, 사회에서도 정치적인 올바름을 명확하게 인지함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야 할 때 어떻게 해야 할 지 애매한 경우가 많이 발생하는 것 같다. 정치적인 아젠다를 외치는 것과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받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분명 다른 차원의 문제다. 작년에 지음이 예비군 훈련에 참가하여 사격을 거부했다는 글을 읽은 적 있는데, 정치와 일상을 합치시키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깨닫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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