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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2008)


<다크 나이트>...
개봉하기 전부터 엄청난 기대를 불러 일으키더니 아니나다를까 미쿡에서 흥행 돌풍을 몰고 왔는데.
(흥행 수입 역대 2위 - 1위는 <타이타닉>)
한국에선 음습한 분위기 때문인지 배트맨 브랜드가 별로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미쿡보다는 그 열기가 좀 덜한 감이 있긴 하다.

개인적으로도 "배트맨? 훗-_-" 하는 생각도 있었고
미쿡애들이 좋아하는 영화 스타일에 별로 믿음이 가지 않기도 해서
(얘들은 <에일리언 vs 프레데터> 같은 영화도 흥행작으로 만들어 주지 않는가)
<다크 나이트>를 그다지 기대하고 본 건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다크 나이트>는 DC코믹스의 원작임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수퍼히어로 영화라고 칭해도 손색이 없다. (기존엔 <스파이더맨 2>)

<괴물>의 경우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일단 단상만 몇 개 적어본다.
(아래부터는 스포일러이므로 알아서 봐 주시길)

1. <다크 나이트>를 보기 전에 들은 얘기로는,
수퍼히어로물의 특징인 히어로(선) vs 악당(악)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요즘엔 선악의 모호한 경계 같은 주제마저도 진부해 진 경향이 있어 이런 내용에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근데 실제로 <다크 나이트>를 보면 배트맨이 착한 놈 맞고, 조커가 나쁜 놈 맞다.
특히 (이미 고인이 된)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는 단지 "나쁜 놈"이라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그는 자신의 말처럼 "혼돈Chaos" 그 자체이며 아무 이유 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이해 불가능한 악당이다.
여기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히스 레저에 대해 첨언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2. 선 vs 악이라는 구도를 진부하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이 하비 덴트, 즉 투페이스다.
히스 레저에 의해 투페이스라는 캐릭터가 좀 죽는 듯 해서 아쉽지만,
<다크 나이트>의 가장 중요한 캐릭터가 바로 투페이스다.
배트맨-투페이스-조커는 각자 다른 캐릭터에게 영향을 주면서 영향을 받는다.
하비 덴트는 조커의 등장으로 인해 고담 시티를 지키는 백기사로 부상했지만,
조커의 계략과 배트맨이 자신의 정의를 행한 결과로 인해 투페이스라는 악당으로 변모한다.
조커는 "넌 나를 완전케 한다You complete me"라는 자신의 말처럼 배트맨이 존재로 인해 더욱 완전한 악당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배트맨은 이들과의 싸움을 통해 스스로의 사명을 규정하게 되고,
결말부의 자신의 말처럼 영웅으로 죽는 것보다 악당으로 살아남기를 선택하게 된다.
투페이스를 만든 것이 조커와 배트맨이고, 조커를 완전체로 만든 것이 배트맨이라면,
이들로 인해 배트맨은 브루스 웨인이 아닌 배트맨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3.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조커가 실험한 "죄수의 딜레마"다.
시민들이 타고 있는 배(A)와 죄수들이 타고 있는 배(B)에 각각 폭탄을 실어놓고 서로 상대방의 폭탄을 터뜨릴 스위치를 준다.
지정된 시간까지 어느쪽에서도 폭발이 일어나지 않으면 조커는 두 배 모두 폭파시키겠다고 위협한다.
이것은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를 응용한 것이다.

A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은 3가지 가능성이 발생한다.
 - B에서 먼저 스위치를 누르고 A에서 스위치를 누르지 않는다. - A 사망, B 생존
 - B에서 스위치를 누르지 않고 A에서 먼저 스위치를 누른다. - A 생존, B 사망
 - B에서 스위치를 누르지 않고 A에서도 스위치를 누르지 않는다. - A, B 모두 사망 (조커에 의해)

A의 입장에선 B가 스위치를 누르건 누르지 않건 관계없이 스위치를 눌러야만 생존할 수 있다.
이것은 B도 마찬가지여서 A의 선택과 관계없이 먼저 스위치를 눌러야만 생존 가능하다.
결국 둘 다 스위치를 누르게 되면 양 쪽 모두 파멸하게 되는 딜레마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핵무기 폐기 협상이 잘 되지 않는 이유도 이와 동일한 딜레마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인지, 결과적으로 두 배 모두 스위치를 누르지 않았고
배트맨이 그 전에 조커를 찾아내 스위치를 무력화시켜 승객들을 구하게 되는데,
재미있는 것은 스위치를 누르지 않게 된 과정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시민들이 탄 배에서는 투표까지 한 끝에 죄수들의 배를 폭파시키도록 결과가 나왔지만,
아무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 못하면서 결국 스위치를 누르지 못했다.
이는 투표라는 익명성의 행위와 스위치를 누른다는 공개된 행위의 차이가 가져오는 결과인 듯 하다.
하지만 죄수들의 배에서는 간수들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죄수의 리더가 나서서
"당신들이 하지 못한 것을 내가 해 주겠다"며 스위치를 뺏아 바다에 던져버린다.
자신이 살기 위해 (범법자들이 탄 배이긴 하지만) 상대를 죽이려고 한 시민들의 투표 결과와 (민주주의적 방식)
리더의 독단적이지만 생명을 건 인간적인 결정이 (권위주의적 방식)
일종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듯 하다.

4. 여하튼 <다크 나이트>는 수퍼히어로 영화지만 묘하게 철학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것이 <스파이더맨> 같이 수퍼히어로의 고뇌가 아니라,
수퍼히어로와 악당들의 싸움에 말려드는 평범한 사람들의 고뇌라는 점에 있어서 더욱 특이하다.
당분간은 <다크 나이트>가 최고의 수퍼히어로 영화라는 데 있어 이견이 없을 듯 하다.

PS 1. 크리스토퍼 놀란은 <메멘토> 이후 지지부진하다가 드디어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는데 성공한 듯 하다.
그렇다면 나이트샤말란에게도 희망이 있단 말인가? ㅎㅎ

PS 2. 신혼여행으로 홍콩에 갔을 때, 길거리에 웬 사람들이 떼거리로 몰려있고 교통 통제하는 장면을 보고 그냥 지나친 적이 있다.
다음날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에서 크리스찬 베일과 모건 프리만이 <배트맨> 시리즈 촬영을 했다는 기사가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지 1면에 나오는 것이 아닌가 젠장-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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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Once, 2006)

지하철을 타고 가려는데 마침 갖고 있던 책을 다 읽어버린 경우는 MP3 플레이어의 배터리가 나간 경우보다 난감하다. 이런 경우 가장 만만한 해결책은 영화 잡지를 사는 것이다-물론 운 좋게도 눈길을 끄는 기사가 타이틀로 나왔을 때의 얘기지만. 결국 <원스>를 보게 된 것은 이렇게 산 <씨네21>에서 강렬한 낚시 기사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스>는 뮤지컬 영화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음악과 음악의 연결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노래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군무가 시작되며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뮤지컬 영화들과는 달리 <원스>는 매우 사실적인 뮤지컬 영화라 할 수 있다. 영화에 나오는 노래들은 단 1곡을 제외하고 현장에서 녹음된 버전이며, 주인공 남녀인 글렌 한사드Glen Hansard와 마르게타 이글로바Markéta Irglová는 실제 뮤지션들이다. 글렌 한사드는 "더 프레임스The Frames"라는 밴드의 리더이며 마르게타 이글로바는 한사드와 같이 앨범을 냈었다. 또한 <원스>의 감독인 존 카니John Carney 역시 "더 프레임스"의 베이시스트였던 경력이 있다.

<원스>에서 대단한 드라마를 기대할 필요는 없다. 그만큼 한사드와 이글로바, 그리고 데모 앨범 작업을 같이 하는 밴드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환상적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로 활기넘치지만 뭔가 우충충해 보이는 더블린의 거리와 대대로 내려온 듯한 오래된 가게들, 다들 한 음악하는 파티 참가자들, 가난한 이민자들, 그리고 마치 한국의 동해안 같은 바다는, 음악으로 교감하면서도 서로의 마음이 전해질 듯 전해지지 않는 주인공 남녀와 매우 잘 어울린다.


 

사실 <원스>는 글로 설명하려면 그닥 할 말이 많지 않은 영화다. 어쨌든 한 번 "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한 번 "들어야"인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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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다의 환상 (黑と茶の幻想)

개인적으로 난 온다 리쿠(恩田 陸)의 팬이다. 아마 지금까지 국내에 나온 온다 리쿠의 작품은 거의 다 읽었을 것 같은데, 확실히 이 사람 소설은 색다른 뭔가가 있다고 느껴진다.

온다 리쿠의 작품을 특징 짓는 단어는 "미스테리"와 "초감각"이다. 온다 리쿠의 모든 작품이 미스테리물인 것은 아니지만, 그의 역량이 가장 빛나는 장르가 바로 미스테리물임은 분명하다. 미스테리물에서 그녀의 스토리텔링 기술은 매우 뛰어나다. 정체모를 무언가에 대한 긴장감, 적절히 배치한 복선 등 최소한 클라이막스까지 숨쉴 틈을 주지 않는 그녀의 기술은 책장 넘기는 속도가 점점 가속되며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요인이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그녀의 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온다 리쿠의 미스테리는 결말을 잘 짓지 못한다. 터질 듯 팽팽하게 부푼 긴장감을 한 방에 터뜨리는 지나치게 충격적인 결말은 생뚱맞게 보일 때가 많다. "지나침이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처럼, 지나친 결말이 작품의 전체적인 균형을 깨뜨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이는 <황혼녘 백합의 뼈>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이다. 이 소설은 반전에서 반전을 거듭한 결말을 제시하는데, 최후의 반전만 없었으면 최소한 수작으로 남을 수 있었을텐데, 너무 지나친 마지막 반전이 결국 이 소설을 범작으로 만들고 말았다. (물론 개인적인 평가지만)

이런 의미에서 <흑과 다의 환상>은 긴장감과 결말이 절묘하게 균형잡힌 수작이라 할 수 있다. 상/하권으로 나뉘어 제법 무시못할 분량을 자랑하지만, 이 작품을 읽으며 한 순간이라도 지루하게 생각되었던 것이 없었던 것 같다. 네 명의 동창들이 Y섬의 태고적 삼림으로 전설의 벚나무를 보기 위해 투어를 떠나는데, 한 명씩 화자가 되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이들 사이의 숨겨진 관계들이 드러난다는 꽤 단순한 내용이다. 하지만 시점이 바뀔 때마다 이들의 숨겨진 비밀이 드러나고, 그 비밀들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또다른 동창을 매개로 하나로 연결된다.

<흑과 다의 환상>은 장이 바뀔 때마다 사람이 하나씩 죽어나가고 보이지 않는 공포에 심장이 조여드는 류의 미스테리는 아니다. 오히려 <밤의 피크닉> 같이 여러 사람이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며 나누는 대화가 중심이라 잔잔한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서로가 숨겨왔던 비밀이 하나씩 공개되는 과정과 이들의 숨겨진 관계에서 오는 갈등은 결코 무시못할 긴장감을 가져다 준다. 이 작품은 확실히 다른 미스테리물과는 차별되는 매우 고급스러운 작품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이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하 <삼월>)이라는 온다 리쿠의 전작에 나오는 액자 소설이라는 것이다. 물론 설정이 약간 바뀌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삼월>에서 먼저 예고편이 나온 후 발간된 본편 같은 느낌이다. 온다 리쿠는 자신의 작품과 등장 인물들로 이런 장난을 곧잘 친다. <흑과 다의 환상>의 중요한 인물인 의문의 죽음을 당한 동창 카지와라 유리도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에 등장한 인물이다.

에구 초감각까지 더하면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온다 리쿠의 초감각 이야기는 다른 작품 소개 때 써야겠다. 여튼 이 작품, 강추다( -_-)-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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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워 (D War, 2007)

솔직히 <디워> 관련 뉴스가 릴리즈 될 때만 해도 이 영화가 이렇게까지 선전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미 <용가리>를 제작할 때도 신지식인이니 뭐니 하며 떠받들다가, 영화의 대실패 이후 사기꾼 취급을 당하던 심형래 감독이기에, <디워> 역시 개봉 시기가 2006년에서 계속 연기될 때마다 전작의 케이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디워>는 개봉했고 예상과 달리 여름 극장가의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흥행 면에서 볼 때는 <디워>가 <괴물>의 기록을 깨네마네 하는 형국이지만, <디워>는 <괴물>과 본질적으로 다른 영화다. 물론 특수효과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으며(총제작비 <괴물> 약 100억원, <디워> 최대 700억원 - <디워>의 제작비는 아직 논란의 대상이 다) 한국산(産) 블록버스터를 표방했다는 점, 그리고 영화 그 자체와는 무관하게 논쟁을 생산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두 영화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괴물>은 (봉감독의 말에 따라) 순수오락영화로 볼 수도 있지만 (평론가들의 말에 따라) 사회풍자영화로 읽을 수도 있는 반면, <디워>는 오락영화에 애국주의가 결합된 매우 감정적인 영화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미 인터넷에서는 격렬한 찬반논쟁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어제 방송된 "100분 토론"에 의해 이 논쟁은 한층 과열됐 다. <디워>는 솔직히 신선한 논쟁꺼리를 제공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애국주의 마케팅"이라는 종교논쟁적인 논점으로 인해 논쟁이 격화되고 있는 것 같다. 뭐 여기선 "애국주의 마케팅"은 일단 스킵하고 영화 자체에 대한 단상만을 정리해 보자.

1. <디워>를 재미있게 본 사람이든 재미없게 본 사람이든,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웬만하면 수긍할 수 있는 사실이 두 개 있다. "특수효과 지대로 썼다"와 "스토리 디게 엉성하다"라는 점이다.
  일단 특수효과부터 얘기하면, 개인적으로는 <디워>의 특수효과는 대단히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특수효과, 그 중에서도 CG는 3D모델링을 얼마나 잘 했느냐가 승부의 관건이 아니다. 아무리 3D모델링을 잘 해서 사람과 똑같이 생긴 캐릭터를 만든다 해도, 실사와 CG가 잘 융합되지 않으면(흔히 말하는 "CG가 뜨면") 특수효과빨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괴물>의 특수효과가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은 동적인 괴물의 움직임이 한강과 원효대교와 잘 맞물려 돌아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디워>의 CG장면에서의 카메라워크 또한 훌륭하다. 조선시대 장면에서 "부라퀴" 군단이 마을을 공격하는 장면에서 "부라퀴" 병사들 사이로 지나가는 카메라워크는 CG이기 때문에 가능한 장면이고, CG의 힘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아파치 헬기의 체인건 사격에 나즈굴 비슷하게 생긴 새에 총알이 박히는 모습을 세밀하게 표현한 것 등, 디테일도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점을 종합할 때 <디워>의 CG는 높게 평가받을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2. 그리고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한 것이 바로 스토리다. <디워>는 단지 시나리오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내러티브 그 자체가 엉성하기 짝이 없는 것이 문제다. 심형래 감독에게 엄청난 반전이나 미려한 미장센을 바라는 게 아니다. 단지 자연스럽게 영화에 몰입할 수 있도록만 해 준다면 만족스러울텐데, 스토리 전개의 호흡 조절(초반은 너무 느리고 후반은 너무 빠르다), 뜬금없는 장면전환(부라퀴의 출현으로 차가 꽉막힌 LA에서 순식간에 교외로 탈출, 지구가 아닌 듯한 마지막 장면), 하도 어색해서 민망할 정도인 배우들의 연기(특히 많이 나오는 얘기지만 조선시대 배우들의 연기), 동서양이 짬뽕된 어이없는 설정(조선 병사들과 오크 군단의 대결이라-_-)  등 <디워>는 도저히 몰입을 할래야 할 수 없는 영화다.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가 이렇게 흥행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영화 자체의 평론은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3. 애국주의 외에 <디워>의 흥행을 도와주는 요소가 또 있는데, 바로 심형래 감독의 외길 인생 스토리다. 일본애들이 좋아하는 근성(곤조)을 한국인들도 좋아라 하는 것 같은데(김성모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이 황우석 사건과 마찬가지로 열성적인 지지자를 만들어 낸 것 같다. (심형래 감독과 황우석 박사의 사례는 매우 유사한 점이 많고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디워>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에 나오는 심형래 감독의 인생 스토리는, 비충무로 개그맨 출신인 심형래 감독이 영화판에서 느낀 설움의 토로이고, 영웅대접을 받다가 사기꾼으로 전락했던 과거에 대한 서운함이면서, 이젠 정말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었다는 자신감의 표출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심형래 감독의 이런 인생역정이 꽤 매력적인 스토리이긴 하지만, 아직 그런 영상을 자신있게 보여주기엔 영화 감독으로서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현존하는 영화 감독 중 누구보다 대중과 가까이 있었던 심형래 감독이기에 그런 식의 접근이 가능하리라 생각은 되지만, <우뢰매> 성인판 같은 <디워>의 완성도로 봐서 그 영상은 어쨌든 마케팅 수단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디워>와 연관된 애국주의와 논란은 기회가 되면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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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容疑者Xの獻身, 2006)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의 <용의자 X의 헌신>은 매우 성공한 추리소설이다. 일본 대중문학 신진작가들의 등용문이라 할 수 있는 나오키상 2006년 수상작이고, 한국에서도 처음 출판된지 1년만에 적어도 8쇄 이상을 찍어내는 데 성공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책을 누구 빌려주는 바람에 정확한 수치는 알 수가 없지만)

작가는 책 곳곳에서 단서들을 흘리고 독자들은 최대한의 두뇌를 동원하여 결말을 맞추려 하는 것이 추리소설인만큼, 추리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극과 극일수밖에 없다. 추리소설의 트릭이란 어린애도 눈치챌 수 있을만큼 허접해도 욕먹고, 누구도 맞출 수 없을만큼 복잡해도 욕먹고, 논리적으로 비약해도 욕먹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결말 부분에 앞의 스토리에 나오지 않은 근거를 갑자기 꺼내는 김전일은 재미가 없다.) 게다가 <용의자 X의 헌신>은 처음부터 범인의 정체를 드러내놓고 시작하기 때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한 번씩 돌려가며 범인을 찾는 쏠쏠한 재미도 없다. 이 책은 트릭 자체가 재미없으면 끝장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Notice : 아래 내용은 스포일러입니다. 책을 읽으시려는 분은 절대 읽지 말아주세요.

이렇게 위험한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용의자 X의 헌신>은 매우 성공적인 추리소설이다. "달마" 이시가미는 연정을 품고 있는 야스코 모녀의 살인을 은폐하기 위해 모종의 트릭을 꾸민다. 이시가미의 트릭은 매우 대담해서 원래 시체는 잘게 분리하여-_-;;; 딴 데 감추고, 자신이 노숙자 "기사"를 살해하고 그 시체를 원래 시체인 것처럼 위장하는 것이다. 이 트릭의 전모는 스토리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데, 이 트릭을 눈치채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 살인이 일어난 시점이 경찰이 시체를 발견한 날의 전날인 3월 10일이 아니라 3월 9일이었다는 점, 둘째, 노숙자 "기사"가 살인이 일어난 이후 갑자기 사라졌다는 점.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중요한 사실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스토리 곳곳에 이를 추리할 수 있도록 교묘한 장치를 해 놓았는데, 그 중 스토리의 제일 처음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 스토리는 이시가미가 "출근 길"에 노숙자들이 모여사는 강가를 지나가며 "기사"를 보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 장면은 그 다음 이시가미가 도시락 집에서 야스코를 만나는 장면으로 전환되며 금방 기억에서 사라져버렸는데, 만약 이 장면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이시가미가 3월 10일, 11일 오전에 휴가를 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야스코 모녀의 살인이 이시가미가 출근한 날인 3월 9일이 일어났다는 점을 추리할 수 있었을 것이며, "기사"가 매일 앉아있던 벤치가 비어있다는 묘사를 통해 "기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추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를 추리할 수 있었으면 마지막 장면의 충격도 훨씬 덜했겠지만...

Notice : 스포일러 끝

물론 <용의자 X의 헌신>이 미덕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시가미의 트릭이 워낙 정교한 나머지 이시가미의 의심하며 그의 범행을 밝혀내는 유가와 마나부의 추리는 논리적이라기보다 직관적인 면이 강하다. 그리고 야스코를 헌신적으로 사랑한 나머지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는 이시가미나, 이시가미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그를 끝까지 의심하는 유가와 역시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두 얘들은 천재니깐 뭐...(천재면 용서된다-_-)

이 책의 리뷰 중 많이 지적되는 부분이 오자와 탈자 문제이다. 하지만 난 그닥 오자 때문에 불편하단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판을 거듭하며 개정된 결과인지 아님 오자에 신경쓸 여유도 없이 스피디하게 책을 읽어서 그런지 잘 모르겠다. <용의자 X의 헌신>은 결점도 많이 가지고 있는 책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시가미의 훌륭한 트릭과 히가시노 게이고의 치밀한 구성은 추리소설 본연의 재미를 느끼게 하는데 충분하다.

사실 <용의자 X의 헌신>은 "감성적인 추리소설"이라는 점을 크게 어필하며 인기를 끈 부분이 있다. 분명 야스코에 대한 이시가미의 말 그대로 헌신(獻身, 몸을 바침)적인 사랑은 다른 추리소설과 색다른 점이긴 한다. 하지만 <용의자 X의 헌신>은 정교한 트릭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훌륭한 추리 소설이라 생각한다. 역시 추리소설의 진정한 가치는 "누구나 맞출 수 있으면서도 쉽게 맞출 수 없는 트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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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시의 마법사 (A Wizard of Earthsea, 1968)

얼마 전 포스트에서 지브리의 완성도 지지리도-_- 낮은 <게드전기>에 대해 혹평을 했었는데, 원작도 안 읽어보고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게 좀 민망스러워 <어스시의 마법사>를 읽기 시작했더랬다. <빼앗긴 자들>과 <바람의 열두 방향>에서 르 귄이라는 작가의 책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이번엔 마음 단단히 먹고 스타트를 끊었다. 그런데 이게 웬 걸. 생각보다 책이 술술 읽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4권인 <테하누> 전까지의 얘기였지만-_-

(네오스크럼님이 알려주신대로) 르 귄의 <어스시> 시리즈는 5권의 장편과 7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국내에는 <테하누Tehanu: The Last Book of Earthsea>까지 장편 4권만 번역되어 들어와 있다. 단편 중 두 편은 <바람의 열두 방향>에 실려있는데, 나머지 단편들은 아직 번역 안된 듯하다.

주의 : 이하 스포일러성입니다.

<어스시> 시리즈에서 주인공은 "새매"라 불리우는 "게드"다. <게드전기>를 보면서 상당히 궁금했던 점 중 하나가 주인공은 아렌인데 왜 작품 이름은 "게드전기"인가...하는 것이었는데, 사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게드의 활약상은 3권인 <머나먼 바닷가The Farthest Shore>까지가 마지막이다. 4권인 <테하누>에서 게드는 마법사로의 힘을 잃고 자신감까지 잃어버려 존재감이 매우 희박해진다. 대신 2권인 <아투안의 무덤The Tombs of Atuan>에서의 "아르하"가 성장한 "테나"와 화상입은 꼬마아이 "테루"가 <테하누>의 스토리를 끌어가게 된다.

위의 설명만 봐도 <어스시> 시리즈가 상당히 방대한 스토리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리즈의 미덕은 스토리의 덩치만 큰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잘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스시>라는 또 하나의 세계는 "칼과 마법과 용"으로 대표되는 판타지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독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 진부한 전형성을 탈피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어스시>의 이름의 법칙을 들 수 있겠다. <게드전기>에도 이 내용이 다뤄지기는 하지만 그닥 중요하단 느낌을 받지는 못했는데, <어스시의 마법사>에서 게드가 로크에서 거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 들콩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줄 때,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려준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행위인지 느낌이 팍 온다. 또한 용의 존재 역시 여타 판타지 소설들과 다르다. <어스시> 시리즈에서 용은 인간의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아예 다른 존재다. 하지만 <테하누>에서 용과 인간이 사실은 한 종족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것을 암시하는 노래가 나오는데, 이러한 발상들 자체가 <어스시> 시리즈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구성하는 요인이 아닌가 한다.

<어스시> 시리즈의 평을 검색해 보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3권인 <머나먼 바닷가>를 최고의 작품으로 친다. <머나먼 바닷가>는 악의 화신인 거미과 맞선 게드의 이야기이도 하고, 고귀한 핏줄을 타고난 소년 아렌의 성장기이도 하다. 어떻게 보면 <머나먼 바닷가>는 판타지 소설의 공식에 상당히 충실한 작품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나 싶은데, 어떻게 보면 르 귄의 작품치고는 상당히 의아한 작품이 아닌가 한다.

개인적으로는 시리즈 중에서 <테하누>를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고 싶다. <테하누>에서 르 귄은 마법사 세계의 뿌리깊은 가부장적 가치관을 다루고 있다.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주인공의 위치를 게드가 아닌 테나와 테루가 담당하고 있는데, <테하누>는 이들이 마초스런 남성들-마법사, 불량배, 심지어는 테나의 아들까지-에게 당하는 고난이 스토리의 대부분이라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이 과정을 거치면서 테나는 가부장적인 부조리한 세상을 인식하게 되고,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1~3편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바른 사고방식을 가진 것처럼 묘사되었던 게드마저도 자신이 지닌 가부장성을 드러내는 부분이 재미있다.

<테하누>에서는 분명 전편이 지닌 경쾌함-주인공이 악의 무리를 해치우는-은 발견할 수 없다. 대신 테나와 테루가 여성-장애인으로 겪게되는 갖은 고난을 따라가며 분노와 함께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답답함의 시간이 길어서였는지, 마지막에 칼레신이 등장하여 악당들을 쓸어버렸을 때의 통쾌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 같다-_-ㅋ

스포일러 끝

이건 달군의 이야기였지만, <게드전기>의 개봉을 계기로 <어스시> 시리즈의 나머지 번역판이 나와주길 바랬는데, 흥행 실패 때문인지-_- 영 소식이 없는 듯 하다. <테하누> 이후의 이야기인 는 2001년에 출간되었는데, <테하누>의 부제에서 "어스시 마지막 이야기"라고 해 놓고 후속작을 낸 이유도 심히 궁금하다. 얼렁 번역되어 나와 줬으면 하는 바램이 있네~

* 번역안된 단편들과 에 대해 싸락눈님이 쓰신 글들이 있다. 원서를 마음껏 읽을 수 있는 분들, 부럽기 짝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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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t I'd Died And Gone To Heaven

 

Bryan Adams - Thought I'd Died And Gone To Heaven

 

 

어릴 적에  인상깊게 본 뮤비인데, 지금보니 약간 촌시럽기도.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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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각기동대 S.A.C 2nd GIG (Ghost In The Shell S.A.C 2nd GIG, 2004)

전작을 뛰어넘는 후속작은 드물다. 제작 전부터 전작의 경계 안에서 이야기를 전개해야 하는 제한을 안고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전작의 아우라가 대단하면 대단할수록 오히려 그 아우라에 짓눌리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우리가 보아온 숱한 후속작들이 그렇게 제작되었고, <에일리언>, <매트릭스>, <스크림>, 그리고 갖가지 "맨" 시리즈들이 그랬듯이 참신했던 전작의 설정과 캐릭터를 다른 스토리로 한 번 더 반복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의미에서 <공각기동대> 시리즈는 상당히 특이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전에 언급한 적이 있듯이 원작 만화와 오시이 마모루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그리고 TV판 <공각기동대 S.A.C>(이하 ) 사이의 복잡한 원작 관계도 그렇지만, <공각기동대>와 는 일반적인 전작-후속작 관계라고 하기엔 애매한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둘은 분명 원작 만화의 설정과 캐릭터를 안고 출발했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전뇌화된 사회에 대한 해석과 철학에는 분명 차이점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극장판 <공각기동대>는 조작된 기억을 사실로 믿고 있던 남자의 에피소드와 고스트에 대한 쿠사나기의 집착 등은 모두 전뇌화 시대의 자기 정체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자신이 사회 전체에서 고유한 개체임을 증명해 주는 것은 오로지 고스트 뿐인데, 이 고스트라는 것이 미시세계의 쿼크 입자처럼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거니와 그 실체를 증명할 방법조차 모호하기 때문이다. <공각기동대>에서 일련의 사건들은 쿠사나기 개인의 고민으로 수렴해 가고, 쿠사나기는 인형사와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자아를 탄생시키면서 결말지어진다. 결국 <공각기동대>는 쿠사나기라는 한 개인에 대한 스토리이다.


반면 의 경우에는 쿠사나기 개인보다는 "공안 9과"라는 팀에 주목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도 쿠사나기의 비중은 매우 높지만, 개별 에피소드에는 공안 9과의 멤버들이 그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한 는 전뇌화 사회에서 충분히 발생 가능한 테러 사건인 "웃는 남자笑い男" 사건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웃는 남자"를 사이에 두고 공안 9과와 "세라노 게노믹스"라는 거대 마이크로 머신 회사, 그리고 여기에 이해관계가 강하게 얽혀 있는 정치권이 벌이는 싸움이 주요 스토리 라인이지만, 제목인 Stand Alone Complex의 의미대로 "웃는 남자"라는 오리지널의 부재, 카피들의 등장, 그리고 이 카피들의 영향력 등 사회적으로 생각해 볼 만한 이슈를 같이 다루고 있다. <공각기동대>와 비교하면 는 매우 사회적이며 정치적이며, 동시에 철학적이다. 결국 세라노 사장의 죽음-스캔들의 발각으로 인한 정권 교체-공안 9과의 해체로 가  결말 지어지는 것은 보통 사회적인 문제가 봉합되는 방식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으며, 결말부에 나오는 도서관에서의 "웃는 남자"와 쿠사나기+아라마키의 대담(및 스카웃제의-_-)은 가 지닌 철학적 문제제기를 총정리하는 마당이라 할 수 있다.


 

<공각기동대 S.A.C GIG>(이하 )는 이보다 스케일이 크다. 대신 전작에 비해 사회적인 비중이 줄어들고 대신 정치적인 비중을 크게 키운 모습이다. 은 복잡한 아시아 난민 문제가 주요 스토리 라인이다. 여기서 아시아 난민이란 비핵대전(헉 <애플시드>?)으로 인해 한반도가 황폐화되었고 이들이 보트피플이 되어 주변국으로 몰려가 생긴 것인데...뭐 한국인이라고 보셔도 무관하겠다-_- 의 제작에 우익 성향의 오시이 마모루 군국주의 성향의 시로 마사무네가 참여했다는 것을 상기해 볼 때 이해가 갈 만한 설정이기도 하다.

여튼, 난민 문제를 둘러싼 스토리는 매우 복잡하다. 크게는 "난민을 배척하려는 일본 정부 + 개별 11인을 위시한 우익적인 일본 국민" vs "한 때는 개별 11인이었지만 어떠한 이유로 난민의 지도자가 된 쿠제 히데오 + 아시아 난민"의 대립구도이면서, 쿠제, 그를 추적하는 공안 9과,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프로듀스하려는 고다 카즌도와의 쫒기고 쫒는 관계가 핵심이다. 만약 현실 세계에서 일어났더라도 큰 정치적/사회적 이슈인 난민 문제를 다루다 보니까 얘기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나중에는 미국과 중국의 개입이 나오고 핵을 쏘네마네하는 민감한 주제까지 등장하는 등, 은 웬만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못지 않은 큰 스케일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다만 에서의 철학적인, 또는 사회적인 문제의식은 에 다소 못미치는 듯 하다. 에서는 사이버 토론방에서의 네티즌 찌질이-_-들의 토론과 앞에서 설명한 도서관에서의 대담 등에서 Stand Alone Complex라는 주제에 대해 다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전뇌화 사회의 Stand Alone Complex를 과연 있을 법한 현상이고 현재 네트워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다...라고 인식할 수 있었다.

에서도 쿠제의 난민과의 소통 방식이나 그의 혁명론을 통해 다소 철학적인 내용들을 끌어낼 수는 있긴 하다. 하지만 전공투 세대에서 더 이상 진보한 것이 없는 것 같은 오시이 마모루의 혁명론 탓인지 의 철학은 그다지 깊이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명제를 쿠제가 긍정하는 대목에서 드러나는데, 그는 이 말을 함으로써 "난민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기를 원하는 계몽적인 혁명 지도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네트워크에 난민들의 고스트를 업로드-_-한다면서 이것을 (맑스의 의미와는 사뭇 다른) 상부구조로의 상승이라는 이상야릇한 말로 포장한다. 개인적으로는 고다보다 비중이 높다고 생각하는 이 쿠제라는 캐릭터는, 좋게 말하면 다면적인 캐릭터이고 나쁘게 말하면 모순적인 캐릭터이다. 그리고 이것은 큰 스케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한 철학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의 결과가 아닌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보는 것처럼, 화려한 액션과 숨막히는 긴장감, 물 흐르는 듯한 사건 전개, 그리고 다치코마의 자기 희생에서 나오는 감동의 물결까지, 무척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대사가 너무 많아서 뒤로 돌려가며 봐야 했던 에 비해 조금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취향의 문제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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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ad Angel

 

 

 

의 세번째 트랙.

가을엔 왠지 Kent를 들어줘야 할 것 같은;;;

 


Kent - Den döda vinkel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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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드전기 : 어스시의 전설 (ゲ-ド戰記, 2006)

얼마 전에 지브리의 새 애니메이션 <게드전기>가 스크린에 걸렸다. 미야자키 할배의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상상 너머의 세계를 그려내는 그림과 신비로운 음악, 탁월한 연출로 인해 하야오 옹과 스튜디오 지브리라는 이름에 나름의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게드전기>를 개봉 전부터 눈여겨 보게 된 것은 "지브리"라는 이름보다는 "어슐러 르 귄"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아직 르 귄의 작품으로는 <빼앗긴 자들>과 <바람의 열두방향>밖에 읽지 못했지만, SF 문학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탄탄한 세계관과 고유한 사회구성, 그리고 그러한 사회 구조에서 도출되는 캐릭터 등이 매우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이미 개봉 전부터 <게드전기>를 기대한 사람들은 매우 많았으리라.

...그러나-_-

<게드전기>의 평을 검색해보면 대충 분위기가 짐작되겠지만, <게드전기>는 (웬만해서는 이런 평을 하지는 않는데) 엄청난 졸작이다. 일단 연출 자체가 너무나 어설퍼서 긴장감있게 스토리를 끌고나가기는커녕 개연성을 맞추기에도 급급해 보인다. 캐릭터들은 역시 지나치게 평면적인데다가, 그들의 히스토리를 설명해 주는 것이 거의 없어서, 작품과 캐릭터가 따로 노는 느낌이다. 영화는 주인공인 아렌이 그의 아버지를 칼로 살해하고 도망쳐나오는 장면에서 시작하는데, 난 영화가 끝날때까지 아렌의 이 행동이 설명되기를 기대했으나 결국 끝까지 납득하지 못했다. 다만 전형적인 지브리 풍의 아름다운 미술과 배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간 3D만큼은 인정받을만 하지만, 예쁜 그림을 보고 싶으면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을 보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한숨)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원작은 4편으로 이루어진 르 귄의 <어스시의 마법사> 시리즈다. 같은 배경을 공유하면서 서로 다른 이야기인 이 시리즈는, 르 귄이 어린이와 어른 모두가 읽을 만한 작품으로 썼다는 말처럼, 그녀의 작품 중 그나마 어렵지 않고 재밌게 읽을 수 있다고 한다-_- <어스시의 마법사>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하이타카, 즉 게드로서, 원작에서는 <게드전기>에 등장하는 나머지 인물들인 아렌, 테루, 거미 등이 같이 나오지 않는다 한다. 또한 자신의 그림자에 쫒기는 아렌은 원작에서 하이타카의 어린 시절 이야기라고 하니, 독자적인 세계관을 지닌 4편이나 되는 판타지 소설을 한 편의 애니로 압축하는 것이 분명 쉽지는 않았을 것이고, 너무나 성급한 일이었음이 분명한다. (또 한숨)

그래서 하야오 할아버지가 아들은 미야자키 고로에게 감독을 맡긴 것이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뭐 속설에는 하야오 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로가 감독을 맡았다고 하는데, 아무리 잘 봐 줘도 지브리 식의 전형적인 성장 스토리에 짜맞춘 듯한 <게드전기>를 보면, 하야오 옹도 자신의 실수를 통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르 귄은 지브리 스튜디오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름을 믿고 <어스시의 마법사>를 영화화하기로 했다 한다. 그러다 낮은 완성도의 <게드전기>를 보고 이에 대해 자신의 홈페이지에 답변을 실었다는 뒷 얘기가 있다. 잉글리시의 압박이 느껴지신다면 번역글(#1, #2)을 보시라.

결국 지브리는 강력한 이 한 방으로 <센과 치히로의 모험>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으로 쌓았던 신뢰를 다시금 무너뜨리고 새로운 우려를 낳게 하고 말았다. 이와 더불어 극장에서 본 애니메이션은 90% 확률로 실패한다는 나의 징크스도 재현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_-; 애니의 세계는 핏줄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닌가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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