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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뭔가 근거있는-_- 얘기를 하는 곳입니다

2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5/16
    사악한 KT는 어떻게 공유기를 검출하는가(2)
    레니
  2. 2008/05/13
    비과학을 말하지 말고 안전을 말하라
    레니
  3. 2006/11/24
    The Meatrix
    레니
  4. 2006/10/25
    귀향 (Volver, 2006)(6)
    레니
  5. 2006/08/30
    네 종류의 사람(10)
    레니
  6. 2006/08/19
    괴물 (The Host, 2006)(2)
    레니
  7. 2005/07/14
    Fan Death in Korea(3)
    레니
  8. 2005/06/28
    리더와 팔로어
    레니
  9. 2005/05/09
    소모품(4)
    레니
  10. 2005/04/07
    분업(10)
    레니

사악한 KT는 어떻게 공유기를 검출하는가

...라는 글을 진보넷 위키에 써 놨습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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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과학을 말하지 말고 안전을 말하라

광우병과 관련한 논란 속에서 "괴담"이 주목받는 건 의외의 일이다. 정부는 조중동을 선봉으로 삼아 비과학적인 광우병 괴담을 가라앉히는데 총력을 다하겠다고 하는데, 이는 논란의 핵심을 잘못알고 있거나 피해가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광우병에 대한 갖가지 억측이 난무하는 것은 분명 사실이고 매우 비과학적인 얘기가 떠도는 것도 사실이다. 광우병이 공기로 전염된다던지 하는 괴담은 분명 아직 증명된 바가 없다. 얼마전 중앙일보 등의 언론은 한국인의 유전형질인 MM 타입이 광우병에 취약하다는 PD 수첩의 보도를 해당 연구자를 취재하여 "밝혀진 바 없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광우병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이런 반박들이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는 최종 명제를 증명해 주지 못한다. 광우병은 프리온prion 변형 단백질이 원인이 되고 있고, 이는 동물성 사료를 먹인 소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정도까지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왜 변형 단백질이 생겨나는지, 발병 메커니즘은 어떻게 되는지, 전염 경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지 등의 의학적인 규명은 아직 추론 단계에 있을 뿐이다. 광우병에 걸린 사람들이 100% MM 형질의 유전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MM 타입의 유전형질이 광우병에 취약하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증명할 수 있는 충분한 자료도 부족하거니와 광우병이 왜 MM 타입에 치명적으로 작용하는지 그 메커니즘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이 말은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고 보장할 수도 없다는 말이 된다. 결국 확률 게임이다. 95% 이상 광우병 발병 위험이 있는 30개월 이상 쇠고기를 신뢰도 95%의 표본 조사를 통해 안전하다고 통과 시킨 후, 알 수 없는 발병 메커니즘에 의해 광우병에 걸릴 확률 x%를 곱해 재수없게 걸리는 것이 현재의 광우병이다. 혹자는 이를 교통사고 난 확률보다 적다, 또는 벼락 맞을 확률 보다 적다, 더 심하게는 49억 분의 1이다, 라고 주장하며 미국산 쇠고기 먹겠다고 하지만, 그 확률 역시 비과학적일 수밖에 없으며 일종의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는 괴담이다. (처벌 대상?)

우리는 앞으로 쇠고기에 대한 불확실성의 세계에 살게 될 것이다. 물론 이미 우리는 교통사고 날 확률을 안고 버스에 타고 있으며, 마른 하늘에 벼락맞을 확률을 안고 걸어다니고 있다. 하지만 쇠고기를 먹으며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지 테스트해야 되는 상황, 게다가 그 확률이 얼마나 높은지 낮은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을 굳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인간 광우병의 치사율은 100%라는 사실이다. 제발 괴담이 비과학적이라는 근거를 찾아내는 정성으로 미국산 쇠고기가 100%, 하다못해 모 장관의 말 처럼 99.99% 안전하다는 근거를 찾아내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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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eatrix

 

뒷북일런지도 모르겠지만...

제목에서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The Meatrix".

약간 교육적이긴 한데, 그래도 재밌다.

한국어 자막도 있다는.ㅎㅎ

 

The Meatrix : http://www.themeatrix.com/intl/korean/

The Meatrix 2 : http://www.themeatrix2.com/korean/subtitled/

 

미스터 "햄더슨"에서 뒤집어졌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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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Volver, 2006)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들(이래봐야 <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그녀에게>, <나쁜 교육>, 그리고 <귀향>밖에 못봤지만)은 참 특이하다. 남부 유럽의 분위기가 묻어나는 화려한 색채와 라틴 음악, 다양한 성정체성을 지난 인물들이 벌이는 해프닝들은 물론 그의 영화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알모도바르는 매우 일관성있는 감독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혹자는 "감독이라면 당연히 일관적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같은 감독이 만들었다 하더라도 명작이 있는가 하면 졸작도 있고, 그녀/그의 색깔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전혀 다른 스타일을 추구한 작품들도 있다. 하지만 위에서 열거한 네 작품들에서는 "알모도바르 코드"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쉽게 발견된다.

이를테면 알모도바르가 그려내는 여성상이 그렇다. <귀향>를 같이 본 친구는 알모도바르에 대해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른 분들이 많을 수도 있지만) "여자만큼 여자들의 심리를 잘 안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내 입장에서 본다면, 게이라는 성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남성인 알모도바르가 그리는 여성상은, 뭐라고 딱히 정의내리기는 어렵지만 매우 일관성이 있다. 특히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드러나는, 힘든 삶 속에서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고 약해 보이지만 결코 꺾이지 않는 여성, 스테레오 타입화된 강한 어머니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어머니의 모습, 이런 점이 알모도바르의 여성상을 더욱 차별화되어 보이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귀향>의 카피로 많이 쓰이는 "위대한 모성"은 흔히 쓰이는 말 뜻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된다고 생각한다.<귀향>의 어머니는 극한의 어려움들을 "모성"으로 이겨내는 위대한-그래서 특별하고 영웅적인-어머니가 아니라, 주위의 형편없는 남자들에게 디이고 모진 세상에 시달리며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 누군가의 어머니이다.

<귀향>에서 라이문다의 어머니인 이렌느 역시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딸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딸들 앞에 나타나지 못하고 죽은 사람으로 지낸다. 라이문다는 자신을 겁탈하려는 의붓아버지를 찔려죽인 딸을 감싸주고 홀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꿋꿋한 여성으로 나오지만, 애증이 얽힌 감정의 대상인 어머니를 만났을 때 단지 위로받고 싶었던 딸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귀향>의 여성들은 혼자서도 잘 살 것 같지만 결국 누군가를 필요로 했던 여성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어머니와 딸로 이어지는 모계 속에서 유대를 발견하고 그 속에서 위안받는다.

하지만 이런 무거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귀향>의 곳곳에서 유쾌한 유머를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이런 유머가 알모도바르 영화들의 묘미인 것 같은데, 그의 코미디는 장진의 작품같이 톡톡 튀는 코미디도 아니고, 박찬욱이나 봉준호의 블랙코미디도 아니다. 그의 작품에서 나오는 웃음은 결코 가볍지 않지만 따뜻한 종류의 것으로서, 알모도바르는 분명 다른 영화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특이한 코미디를 그려내는 재능이 있다.

알모도바르는 <귀향>의 의미를 코미디로의 귀환, 여성들의 관계를 다룬 영화로의 귀환, 그리고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라 만차로의 귀환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귀환은 제다이의 귀환-_- 못지 않게 성공적이지 않나 싶다. 헐리웃에서 봤던 그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아름답고 매력적인 페넬로페 크루즈와 유령처럼 살아야 했던 어머니를 소화한 카르멘 마우라,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아구스티나 역의 블랑카 포스티요 등의 캐릭터들도 매우 훌륭하다.

알모도바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망설임없이 <귀향>을 보고 말았지만, 아마도 이런 알모도바르는 일관적인 모습이 그의 이름만으로 영화를 골라도 별로 실패하지 않는 이유가 아니까...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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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종류의 사람

"이 세상에는 네 종류의 사람들이 있네. 백치, 얼간이, 바보, 미치광이... 이렇게 네 종류가...

 

  ...(중략)...

 

  백치 말인데, 백치는 말을 하지 않아. 더듬더듬, 우물쭈물...

  아이스크림 콘을 이마에 쳐바르는자, 회전문을 반대쪽으로 쳐들어가는 자... 이게 다 그런 백치야.

 

  ...(중략)...

 

  얼간이는 좀더 복잡해. 사회적인 행동 양식에 문제가 있는 자들이야. 얼간이는 술잔 밖에서 말을 하는 멍텅구리들이야. (중략)

  얼간이는 술잔 속에 든 것을 이야기 하려고 하는데 그게 안 돼. (중략) 가령, 마누라 도망친 사람에게 자기 마누라 예쁘다는 자랑이나 늘어놓는 자가 바로 얼간이야. (중략)

  얼간이의 수요는 폭발적이야. (중략) 얼간이는 만나는 족족 사람을 황당하게 만들지만 늘 화젯거리를 공급하지.

 

  ...(중략)...

 

  바보의 행동에는 절대 틀림이 없어. 단지 판단을 틀리게 했으면 했지. 개는 다 애완 동물이다, 개는 다 짖는다, 고양이는 애완 동물이다, 그러므로 고양이도 짖는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들이 바로 바보야. (중략)

  바보는 속임수를 써. 얼간이를 식별하기는 아주 쉽네(백치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네). 그러나 바보는 당신처럼 합리적으로 추론할 줄 알아. 얼간이와 바보의 차이는 실로 머리카락 한 올이지.

 

  ...(중략)...

 

  미치광이는 식별이 쉬워. 미치광이는 요령을 모르는 바보라고. (중략)

  미치광이는 논리에는 하등 관심이 없어. 단견으로 만사를 해결할 뿐. 미치광이는 이것으로 저것을 증명하고 저것으로 이것을 증명하네. 미치광이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만나는 것이 무엇이든 그 광기로 확증하고 말아. 미치광이 식별은 간단해. 상식을 마구잡이로 휘두리는 자, 섬광과 같은 영감에 지나치게 기대는 자...(하략)"

 

- 움베르토 에코, <푸코의 진자>

 

 
...나...난 미치광이였단 말인가-_-;;;

 


♪ Evanescence - Everybody's Fool (Live Vers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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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The Host, 2006)

한국의 영화감독 중에서 그 이름만으로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은 오직 두 명 뿐이다. 바로 박찬욱, 그리고 봉준호 감독이다. <공동경비구역 JSA>로 먼저 이름을 알린 박찬욱 감독이었지만, 박찬욱의 작품을 좋아하게 된 것은 <복수는 나의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복수 3부작"부터었다. 반면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독특하기 짝이 없는 블랙코미디 <플란다스의 개>를 보면서 봉준호를 주목하게 되었는데, 데뷔작부터 기대를 가지고 봐 왔던 감독인만큼 봉준호에 거는 기대가 좀 더 크다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제가 우연히 고교 시절에 잠실대교 교각을 기어올라가는 괴생물체를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는데요"라는 봉준호의 말로 시작하는 <괴물>의 트레일러를 보고 난 후, 몇 달 동안 부풀어가는 기대와 함께 개봉을 기다려왔나 보다.

<괴물>이 한국영화의 신기록을 수립하네 마네 하는 얘기가 떠도는 지금, 그리고 이미 <괴물>에 대한 수백수천 건의 글들이 온/오프라인에 올라와 있고, 지금도 올라가고 있는 지금, 영화의 줄거리부터 시작하여 포인트, 의미 등을 다시금 떠드는 건 무의미할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_- 개인적인 느낌과 온/오프라인에 올라온 평론들에 대해 포스팅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1. <괴물>을 보고 "재미있다"와 "재미없다"는 의견이 분분하다. 사실 "재미"라는 요소는 99% 주관적인 판단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다. 개인적으로 <괴물>(을 포함한 봉준호의 영화)은 "잘 만들었다", "못 만들었다"는 잣대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영화는 연출, 시나리오, 캐스팅, 촬영, 음악 등 뭐 하나 빠지지 않기 때문에, 다 보고 나면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절로 나게 된다. (<괴물>도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가장 먼저 "히야~ 잘 만들었네"라는 말이 나왔다) 솔직히 에일리언보다, 심지어는 스타크래프트의 히드라리스크-_-보다 압도적이지 않은 <괴물>을 온몸을 긴장시키면서 보게 되는 것은 "잘 만든" 영화이기 때문이다.

2. 만약 <괴물>이 재미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봉준호의 블랙코미디를 만드는 재능 덕분이다. 그의 유머는 약간 냉소적이고 비뚤어진 측면이 있는데, 뭔가 어색한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어놓고 그것에 대해 맘껏 비웃게 하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지하 취조실에서 발생하는 묘한 웃음, <괴물>에서 박강두가 갇혀있던 컨테이너실을 개조한 병원에서의 웃음 등. <괴물>의 재미 중 상당부분은 이런 역설적인 유머에서 발생한다.

3. 아무리 정치/사회적인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괴물>을 보고 미국의 거대권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도입부의 맥팔랜드 사건부터 시작해, 에이전트 옐로우, 사건 은폐 노력 등 <괴물>에서 슈퍼파워로서의 미국은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의식할 수밖에 없을 만큼 노골적이다. (심지어는 영화 말미에 괴물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물고기가 북미산 외래 어종인 "베스"라는 점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이에 비해 괴물과 맞서는 모습은 철저히 한국적인 이미지를 지녔다. 박강두네 가족들이 들고 싸우는 무기만 하더라도 죽창(강두), 화염병(남일), 활(남주)이 아닌가. (그렇다고 "한국적"이란 의미에 오바할 필요까진 없겠지만)
  이런 대결 구도 앞에서 <괴물>을 반미영화로 읽는다 해서 하나도 이상할 것 없다. 봉준호는 인터뷰를 통해 이를 부정했지만 (아무래도 봉준호라면 "반미"라는 조야한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냉소적으로 바라볼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이미 영화가 개봉된 후 해석은 관객들의 몫이기 때문에 <괴물>을 반미영화로 만드는 것 자체가 별로 어색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미영화"라는 점을 굳이 부인하려고 애쓰는 모습들이 많다는 게 더욱 어색하지 않은가. (굳이 이런 어색한 투표를 할 이유가 있을까?)

4. 개봉 이후 쏟아져 나온 수많은 평론들 중에 개인적으로 지난 <씨네21>에 실린 정성일의 평론(#1, #2)이 가장 마음에 든다.(꽤 긴 글이지만 꼭 한 번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의 글은 현학적이고 영화적 지식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적 지식을 요구하지만, 이 평론은 그나마 쉽게 쓰였고 <괴물>에 대한 (용기있고) 독창적인 해석이 돋보인다.
  그는 <괴물>을 봉준호의 "정치적 커밍아웃"이라고 단정하면서 <괴물>에 대한 정치적인 독해를 주장한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의 맑스주의자 풀란차스의 정치론(le politique, la politique)을 끌어오면서, <괴물>을 사회구성체 속에 존재하는 계급적 관점으로 읽기를 원하고 있다. 그의 의견을 따르면, 괴물은 발생 자체부터 미군이 수도 서울의 중심에 주둔하고 있던 한국의 현실에서 기인한다. 현서가 괴물에 의해 잡혀가게 된 것은 그녀의 계급적 숙명 때문이고, 그 괴물을 추적하는 박강두의 가족에게 국가 권력과 사회는 괴물을 같이 잡으려 하기는 커녕 바이러스를 빌미삼아 그들을 잡아 가두려고만 한다.
  나는 이것과 유사한 스토리를 (최소한 하나 이상) 알고 있다. 대추리의 문제도 그렇고, 한미FTA의 문제도 그렇지만, 사회구조적으로 발생한 문제들에 대한 피해를 뒤집어 쓰는 사람들은 박강두의 가족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문제에 맞서 싸우려고 일어나면 국가와 사회는 문제의 본질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다른 빌미를 내세워 그들을 억압한다.
  물론 정성일의 독해가 약간 억지스러운 면도 있고 오바한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긴 하다.(이를테면 현서가 박강두의 꿈이라는 의견은 좀 억지스럽다. 만약 현서가 괴물에 잡혀갔을때 죽었다면, 마지막에 박강두가 괴물의 입에서 끄집어냈을 때 이미 해골이 되어 있을 것 아닌가) 하지만 그가 <괴물>을 보면서 응시한 포커스는 정확했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봉준호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라는 것도 정확한 해석이라는 생각이다.

5. 마지막으로, <괴물>은 분명히 좋은 영화이다. 칸에서 기립박수를 받았기 때문도 아니고, 천만 관객을 돌파했기 때문도 아니라, 논쟁을 생산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것도 판토마임 같이 전위적인 미적 표현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영화가 의미하는 바와 의도하는 바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괴물>은 드물게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봉준호의 가장 큰 재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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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 Death in Korea

난 최근까지

잘 때 선풍기 틀어놓고 자면 질식해 죽는다는 말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그건 나 뿐만 아니라 어무이나 할머니도 마찬가지여서

아침에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

죽으려고 환장했냔 말을 지금도 듣곤 한다.

 

근데...

이게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군-_-

선풍기로 인한 죽음은 한국에서만 발생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도시 괴담)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미디어의 힘이란... ( -_-)-b

 

오마이뉴스 기사

* 미디어다음 기사

* wikipedia의 Fan_death

 



♪ Chemical Brothers - Song To The Sir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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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와 팔로어

내가 다니는 회사의 교육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구성되었다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지만

나름대로 교육을 맡은 팀은 여러모로 (내 입장에서는 귀찮은) 노력을 한다.

보통 교육은 직급별로 이루어지는데,

나 같은 일반사원은 주로 실무과 관련된 교육을 받는 반면

팀장급은 조금 다른 종류의 교육을 받는다.

 

팀장들이 교육을 받고 오면 (군대용어로 알고 있는데) "전파교육"이라는 것을 실시한다.

주간회의 시간 중 일정 정도를 할애해서 팀장이 받은 교육에 대해 전달받는데

이제까지 들은 바에 의하면 대부분 "리더"와 "팔로어"에 대한 내용이었다.

 

뭐 이것저것 잡다한 내용이 있지만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리더는 "리더쉽"을 갖추어야 하고

팔로어는 "팔로어쉽"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리더와 팔로어 사이, 팔로어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

 

 

리더-팔로어로 이루어지는 조직 구성은 매우 일반적이며

아무리 리더의 권력을 배제하려 할지라도 조정자(집단)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르 귄의 <빼앗긴 자들>에 나오는 아나레스에도 PDC라는 조정집단이 있는 것처럼)

이들은 보통과는 다른 역할을 부여받으며 더 많은 책임을 가지게 된다.

리더를 이러한 조정자로 규정한다면 사실 위의 교육 내용을 크게 부정하지는 않는다.

(물론 교육에서는 보다 통속적인 의미의 리더를 상정하고 있었겠지만)

 

다만 "리더쉽"과 "팔로어쉽"을 인정하기에 앞서 분명하게 해야 할 지점이 있다.

즉, 리더와 팔로어가 분명하게 구분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누군가가(또는 어떤 집단이) 특정 시기에 일의 조정을 맡을 수도 있지만

이 구도는 계속적인 것이 되어서 안되고, 실제로 그렇게 될 수도 없다.

팔로어는 언제나 리더가 될 준비를 해야 하고,

리더는 언제나 팔로어의 위치에서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리더와 팔로어의 순환은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작년부터 진보블로그의 탑관리 방안(네오님의 제안, #1, #2)에 대해 생각해왔는데

많은 사람들에 의해, 최소한의 필터링을 거쳐,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것만이

가장 옳은 방식이라고 생각은 들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우리는 다이브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1871년의 파리, 1968, 1973년의 칠레, 그리고 베네주엘라까지

수많은 신화를 동경하면서도

스스로 자율적인 관리를 성공적으로 해낸 일천한 경험조차 없으며

미래에 대한 확신도, 자신감도 없다.

작은 실패조차 큰 실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고

다음 기회를 준비할 여유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포기하기 싫다면 해 보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다.

타고난 리더도 물론 있겠지만, 대부분의 리더는 만들어지는 것이고

모두가 리더가 될 수 있으려면 처음부터 경험을 쌓아갈 수밖에 없으니까.

 

다만,

LA 타임스의 교훈은 참고해야 할 듯-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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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품

솔직하게 얘기하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너무 재미가 없다.

 

회사에서 난 하나의 톱니바퀴로 기능한다.

내가 속한 파트는 "듀얼마스터시스템"이라는 방식으로 운영되는데 방식은 다음과 같다. 우선 파트의 업무를 크게 네 분야로 나누고 각 분야의 메인 담당자를 정한다. 그리고 각 담당자는 다른 분야의 메인이나 다름없는 서브 담당자가 되어 메인 담당자가 업무를 처리할 수 없을 경우 백업의 역할을 한다.

이 시스템은 단순하게 주담당자와 부담당자로 구분된 포디즘적인 분업체계보다 안정적이다. 부품 하나가 나가떨어지더라도 새로운 인원이 들어올 때까지 운영에 지장을 크게 주지 않는다. 그러나 톱니바퀴의 입장에서 보면 알아야 할 업무의 범위가 두 배(실제로는 그 이하이지만)로 늘어나는 셈이고, 실제로 결원이 발생할 경우 업무량이 엄청나게 폭주하기 때문에 결코 호감을 느낄 수가 없다. 이를테면 최근에 파트의 인원이 3명으로 줄었는데, 내 입장에서는 이 결과로 세 분야의 업무를 메인으로 처리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해버리는 식이다.

 

그렇지만 1인 1업무의 분업시스템은 질색이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긴 하지만, 전에도 얘기했듯이 나는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를 원하고, 어떤 업무를 주로 담당하던지간에 일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사고할 수 있는 시야를 가질 수 있기를 원한다. 나의 주요한 스킬은 아무래도 프로그래밍이고 이 분야에서 가장 큰 효율을 발생시키기는 하지만, 디자이너가 없다고 해서 페이지를 만들지 못하거나 기획자가 휴가갔다고 해서 새로운 기능을 추가 개발하지 못하는 상황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또한 기능추가를 위해 프로그래밍을 하더라도, 왜 이 기능을 기획하게 되었는지, 이 기능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 그리고 이 기능을 추가함으로써 어떤 효과를 얻게 되는지 알고 싶고 또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의미 따위는 제껴놓고 당위에 의해 일을 해야 할 경우가 생기기도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에는 효율성을 기준으로 최대한 빨리 끝내는 수밖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본다면, 프로그래밍에 더하여 UI 작업도 하고 있으며 기능에 대해서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계속 덧붙이고 있다. 동시에 이 기능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 역시 어느 정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 모든 것을 거의 혼자 하고 있다는 점이다. 회사에서는 이런 경험이 매우 흔하다. 개발 도중에 혼자 고민할 성질이 아닌 문제가 발견되기도 하는데, 기획자나 디자이너에게 물어봐도 "기술적인 것은 잘 몰라서..."라는 대답을 듣는다. 서로의 업무 영역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도 특별히 뭔가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혼자서 대단한 뭔가를 완성하는 것보다, 같이 고민하며 발전시키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 천재적인 누군가에 의해 혼자서 만들어낸 것에 비해 여럿이서 만들어낸 결과의 질이 더 떨어진다고 할지라도, 난 후자가 더 가치있다고 생각하고 더 보람을 느끼게 된다. 모든 것을 혼자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같이 고민하고 만들어가는 경험을 서로 많이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지금의 일이 재미없는 이유는, 클래스부터 UI까지 손을 대고 있으며 모든 가능한 경우의 수를 거의 혼자서 생각하고 있음에도, 이 기능의 의미를 고민하고 나눌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런 경우에 역시 해법은 효율성을 기준으로 최대한 빨리 작업을 마치는 것.
소모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소모품이 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덧붙여 요즘 새삼스레 깨달은 점 두 가지.

난 정말 일시켜먹기 까다로운 녀석이다. 회사에서 잘 부려먹는 것을 보면 역시 자본주의는 대단하다는 생각.

그리고 난 아마도 대학시절에 한총련 운동을 했어도 잘 적응했을 것 같다는 생각.

 

 


♪ "Bandits" OST - Pupp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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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업

난 요리를 하게 될 때 음식을 잘하는 사람이 주위에 있는 것이 싫다. 아무래도 먹는 문제에 대해서는 대강대강이 잘 통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요리를 잘하는 사람들은 주위를 맴돌면서 잘못하는 것이 없나 감시하고, 만약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면 지체없이 끼어들어 잔소리를 하며, 최악의 경우 내 자리를 밀어내고 자신이 요리를 마무리하기를 원한다. (요리에 관심있는 남성의 경우 엄마에 의해 부엌에서 밀려난 경험이 적어도 한두번쯤 있을 것이다.)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굳이 천재적인 재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들은 익숙해질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어느 정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중요한 것은 주위에서 이를 도와주어야 하고 특히 잘하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잘하는 사람은 이론적으로 잘 할수 있는 방법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줄 수 있고, 많은 경험으로 배울 수 있는 노하우를 알려줄 수 있으며, 자주 범하게 되는 실수에 대해 미리 주의를 줄 수가 있다.



그러나 공동작업을 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이렇게 일을 진행하면 확실히 효율이 떨어진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같은 일을 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잘하는 사람은 설명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빼앗기게 된다. 그래서 아마도 대부분의 조직들은 잘하는 사람이 잘하는 분야를 책임지는 분업이라는 방식으로 공동작업을 진행하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각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사람들로 작업이 돌아가게 될 때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한 분야에서 잘하는 사람이 빠지게 되면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해 또다른 잘 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단 것이다. 만약 잘하는 사람을 운좋게 빠른 시간 내에 구했다 하더라도 전임자만큼 익숙해지기 위해 어느 정도의 적응기가 필요하다.그래서 그 분야에 대해 새로운 사람이 투입되더라도 쉽게 익숙해질 수 있도록 문서화나 내부교육 같은 시스템화된 업무인수체계를 갖추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한 때 장안의 화제를 불러왔던 XP(eXtreme Programming)라는 개발방법론은 완전히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XP는 여러 요소들로 구성되는데, 이 중 "커뮤니케이션"과 "공동 소유"의 개념이 매우 특이하다고 생각한다. XP 방법론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생각한다. 개발자-관리자-클라이언트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물론이고 개발자-개발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역시 매우 중요하다. 동시에 XP는 코드의 공동 소유를 지향하는데, 각자 맡은 부분만을 열심히 개발하고 잘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코드라도 자신이 수정할 수 있고 개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TDD(Test Driven Development), 페어 프로그래밍, 코드 컨벤션 등이 같이 도출되는데, 결국 XP에서는 이 방법이 더 큰 효율을 낳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분업 시스템을 대단히 싫어한다. 물론 직접 일을 담당하는 실무자의 입장에서는 분업이 매우 편리한 방법일 수있다. 하지만 분업의 결과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결코 효율적이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효율성을 떠나 생각해 봐도 분업은 일의재미를 떨어뜨리고 총체적인 작업 전반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

불행하게도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면 갖출수록 더 많은 노동을 강요당하고 더 많은 책임을 져야만 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반대로 다양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면 누군가의 과다한 업무를 도와줄 수도 있고 지겨운 반복 노동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도 있으며 더 많은 상상력과 다 많은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잘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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