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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뭔가 근거있는-_- 얘기를 하는 곳입니다

2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3/17
    덜컥(4)
    레니
  2. 2005/03/07
    Call me, call me(9)
    레니
  3. 2005/03/05
    카메라를 든 사람(4)
    레니
  4. 2004/11/18
    과일깎기(9)
    레니
  5. 2004/11/08
    Anger Is A Gift(4)
    레니
  6. 2004/11/01
    반말의 가치란(4)
    레니
  7. 2004/10/31
    Poison the well
    레니
  8. 2004/10/18
    You're So Great(6)
    레니
  9. 2004/09/14
    문턱(1)
    레니
  10. 2004/08/05
    집단의 이름으로, 전체의 이름으로(11)
    레니

덜컥

슈아님의 블로그 이름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하려면"이다.

난 저 질문의 답이 무엇인지 너무나 궁금하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사상을 이해하려면

논쟁이나 대화, 활동으로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이겠지만,

이와는 별개로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잘 알 수 없는 일도 있다고 생각한다.

 

포스팅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가 종종 있다.

처음에는 쉽게쉽게 써내려 가다가 그만

마치 과속방지턱에 덜컥 걸린 것처럼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상태.

앞으로도 뒤로도 나아갈 수 없으면

"나만 볼래요"를 체크하고 저장해 버린다.

 

미류님의 기술에 대한 포스트에 트랙백을 하려고 포스팅을 하고 있었다.

난 기술을 알고 있는 사람은

쉽게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점점 알아야 할 지식이 많아지더라도

지식을 공유함으로써 기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쉽게 시작할 수 있었다.

기술을 익히는 과정을 요리를 배우는 과정과 비교하면서

나의 경험을 통해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젤루핀님의 포스트를 만나면서 얘기가 달라졌다.

젠더에 의해 기술에 대한 접근을 차별한다는 것은

분명 어렴풋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라디오를 분해하다 고장내도 칭찬받는 남자아이(나)와

리모콘을 뜯어보다가 들켜 혼나고 마는 여자아이(동생).

컴터를 뜯어 만지는 것이 두렵다고 말한 여자후배.

 

하지만 이 이상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사실 자신이 없다.

여성들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을

너무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어설픈 지식, 어설프게 겪은 경험, 어설프게 이해했다는 생각으로는

나의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다.

하지만 입을 봉인하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답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너무나 분명하다.

 

더 많은 소통과

더 많은 경험과

더 많은 고민과

일상에서 드러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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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l me, call me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호칭에 대해 상당히 민감한 편이다.

오래 전에 반말에 대한 포스트를 쓴 적이 있는데

존대말/반말을 쓸 때와 비슷하게 누군가를 부르는 호칭 역시

어떤 관계를 의미할 때가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어릴 적 부르는 별명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그 시절 기억을 떠올려 보면 우리 모두는 별명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는데

집단 내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애들은 무난한 별명을 선점했고

싸움을 못하거나, 공부를 못하거나, 별나게 생겼거나, 키가 작거나 등등의 이유로 인해

권력 관계의 하층에 거주하는 인민들은 하나같이

땡칠이, 땅콩, 똥파리, 오리, 저팔계, 이티 등의 많이 쓰는 별명부터 시작해

차베스-_-, 춘자-_-, 소장 등의 이상하기 짝이 없는 별명까지 달아야 했다.

(이 중 차베스는 성이 "차"씨라는 이유로 차베스가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그런 개연성이 어떻게 나왔는지 궁금하다.

덕분에 베네주엘라의 차베스 정권 얘기를 첨 들었을 때 이상하게 웃겼다는-_-)

 

이런 권력관계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특별히 어떤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주길 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특히 개명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 자신의 이름 뜻을 설명해 주면서

왜 바뀐 이름으로 자신을 호명해야 하는지를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 의미는 곧 까먹게 되고

별 생각없이 바뀐 이름에 적응하는 게 대부분이지만)



난 XX씨라고 호명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회사에서 노동자의 입장으로 그렇게 불리는 것에는 불만없다.

(지금 회사에서는 XX님-_-이지만)

어짜피 직장 내에서의 관계란 자본가와의 계약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이상을 바라지도 않고 있으니까.

문제는 스스럼없이 이름을 부르는 친구 사이는 아니지만

형식적인 직장 동료 이상의 의미를 갖는 사람들이다.

 

블로그를 쓰게 되면서 알엠님의 센스로 인한 아주 우연한 계기

난 "레니"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XX씨라는 호칭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새로운 이름을 적극적으로 홍보-_-하기로 했다.

기존에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이미 실명이 익숙해져버린 상태이니 할 수 없지만

진보넷 안에서도 새로 관계를 맺게 된 사람에게는

XX씨보단 "레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하곤 했는데

아무래도 이건 내가 좋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이 편하게 부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결과가 언제나 성공적이지만은 않았다.

 

재미있게도 XX씨와 레니를 동시에 알고 있는 사람의 경우

대화하는 도중 두 이름을 혼용해서 사용할 때가 있는데

듣고 있다 보면 "XX씨"와 "레니"를 각각 쓸 때마다

뭔가 의미가 다를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물론 쌩뚱맞게도 그것을 직접 물어본 적은 없지만

내 입장에서는 레니라고 불러줄 때의 말이 더 호감이 가게 되더라구.ㅎㅎ

 

겨울 동안의 정리 기간을 거치면서 새로 결심한 것 중 하나는

나의 활동 공간에서는 "레니"라는 이름만을 쓰기로 하겠다는 것이다.

일단 XX씨라는 호칭 자체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어감이 싫고

직장이라는 공간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비현실성과

활동에서 느껴지는 현실감을 어느정도 분리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반말을 할 수 있는 관계가 될 것을 대비하여-_-

미리 반말에 자연스러운 호칭에 적응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ㅋ

 

물론 XX씨의 기존 사용자-_-들이 불편해 할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본인이 싫다는데. :)

호칭을 듣는 사람의 강력한 의사를 무시하고

XX씨, XX야 등의 실명을 사용하거나

레니씨(아아 이건 절망이다. OTL), 레니님(이건 좀 낫군-_-) 등의

엽기적인 돌연변이를 생산하는 분에게는

5초간 침묵하기, 못 들은 체 하기, 또는 생까기-_- 등의

다양한 스킬을 적극 활용할 생각이다.ㅎㅎㅎ

 

...는 위의 말들은 농담이고-_-

왜 레니라는 이름을 쓰려고 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겠지.

(저러다가 순식간에 왕따되기 쉽상일 듯 하군)

뭐 노력하기 나름 아니겠어요. :)



♪ Cowboy Bebop OST - Call me call m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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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든 사람

알엠님의 영화 "엄마..."가 개봉을 했다.

개봉 첫날의 보고서-_-를 보니,

일단 만족스러울 만큼의 관객들은 오지 않았나 보다.

"난 유료관객이 될테야!"라면서 시사회도 짼 나로서는

양심이가 뭐라뭐라 하는 소리를 애써 외면하는 중이다-_-

 

알엠님의 보고서-_- 중에

"영화 속 주인공들과 같은 이들이 함께 해주길 바라는 마음"과

"더이상 문화영역에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이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에

정말 공감한다.

 

대딩 시절 마지막 학기에 "영상사회학"이란 수업을 들었었는데

그 수업은 기말에 제출하는 다큐멘터리가 학점의 반을 차지한다.

생전 카메라라고는

장농 속에 고이 간직된 10년된 필름카메라 외엔 들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

캠코더라는 고가장비를 들고 다큐를 찍어야 한다는 게 너무 생소했는데

다행히 같은 조에 촬영과 편집 경험이 있는 친구가 있어

그나마 5분정도 되는 다큐 비스무레한 것을 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원은 세 명밖에 안 되는데 할 일은 많아서

촬영과 편집 과정에서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는데

의외로 카메라를 다루는 것이 쉽다는 데 놀랐다.

 

촬영이야 뭐 이론적인 것은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손만 안 떨리게 조심하며 찍었었는데

인터뷰 중심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뭔가 다큐 비스무레한 장면들이 나왔다.

 

편집은 프리미어를 사용했는데

물론 처음 사용해 보는 툴이지만 프로그래밍보단 배우기가 어렵지 않고

직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그럭저럭 많은 시간을 쏟아부어-_- 편집이 가능했다.

 

어짜피 아마추어의 실력으로 고작 5분짜리 인터뷰 모음을 만든 셈이지만

여튼 뭔가 결과물이 나오긴 나왔고

또한 학점도 나왔다-_-(덕분에 졸업했다-_-)



전에 지후님과 잠깐 얘기를 하면서

미디어 운동의 전망과 미래-_-에 대해 산만하게 떠들었었는데-_-

아마추어들이 제작한 짧은 클립들을 모아서 볼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잠깐 한 것으로 기억한다.

(엇 갑자기 확신이 별로 안 서는군-_- 여튼)

 

사실 요즘 같은 때는

(물론 영상 장비들은 아직 고가이고 접근하기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비교적 쉽게 촬영하고 편집할 수 있는 환경인 것 같다.

 

전문적인 지식과 상당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 수 있는

뽀대나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더라도

시간을 어느 정도 투자한다면 짧은 클립 정도는 누구나 만들 수 있고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전경과 치고받는 액션-_-이 아닐지라도

일상에서도 의미있는 소재를 찾을 수 있고

(VJ 특공대 류의 의미 말고-_-)

틈틈히 찍고 편집하고 한다면

영상물을 생산할 수 있는 주체는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이런 결과물들을 직접 모으고 상영하거나

포스트에 실어서 날린 트랙백을 모아 링크를 제공한다면

그것들이 모여 새로운 집합적인 의미를 창출할 수도 있을 것이고

여튼 가능성은 무궁무진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사실 IMC를 한국에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이런 비슷한 역할도 기대했었는데

아직은 정보가 부족해서 어떤 형태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미디어를 제작하는 주체들이 자신의 생산물을 들고

연대하여 새로운 의미로 확장시킬 수 있는

아주 애매하기 짝이 없는-_- 모델에 대해

공상하고 있는 지금이다.

 

"문화영역에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이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

너무 멋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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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깎기

미리 말해두지만

난 과일을 잘 깎지 못한다.

 

다른 가사노동은 자취 생활 및 할머니와 같이 살면서

웬만큼 하게 되었는데

이 넘의 과일깎기는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오늘 진보넷 사무실에 갔더니

미디어참세상의 뉴저오프모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사실은 molot님의 포스트를 보고 사전에 정보를 입수했지만

우연히 참가하게 된 척 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는데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것 같더군.ㅡㅡ;;

 

여튼 행사가 시작되어 회의실을 빠져나와 부엌으로 갔는데

랄라 기자와 정책국의 또 한 분이 감을 깎고 있었다.

전라도 지방 유지 집안이라는 소문이 있는ㅡㅡ;;

모 영상기자의 집에서 보낸 감인데

이건 중요한 게 아니고 여튼.

천만 다행히도 칼이 두 개밖에 없어서

난 옆에서 다 못 먹은 밥을 마저 먹으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랄라 기자가 행사장에서 호출을 받아

칼을 놓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런 경우에는 칼을 들고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기기 때문에

용기를 내어 "제가 도와드릴까요?"라는 질문을 했다.

눈치없어 보이는(흐흐) 정책국의 또 한 분.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네"라고 하시더군.

결국 나의 과일깎는 실력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불운을 겪게 되는가 싶었는데

역시나 천만 다행히도 랄라 기자가 곧장 돌아오는 바람에

다시 칼을 양보하게 되었다.



내가 과일을 잘 못 깎는 이유는

천부적으로 칼 쓰는 재주가 없다거나

칼에 대한 공포감이 있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많이 해 보지 않았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먹는 행위에 있어서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편이라

자취하면서도 과일을 잘 먹지 않았고

집에서는 어쩌다 칼을 뺏아 과일을 깎는다 하더라도

어머니와 할머니의 구박을 견뎌야 하기 때문에

이 역시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종류의 가사노동이 그렇듯이

하면 할수록 실력이 늘고

익숙해지는 임계를 넘으면 그 때부턴 매우 쉬워진다.

 

그 과정에서

게으름과

못한다고 쏟아지는 주위의 구박 및 핀잔과

사회적 편견과

결국은 가사노동을 제공받는 것에 익숙해짐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하고

"좀 못하면 어때"라는

약간의 뻔뻔함도 필요한 듯 하다.

 

과일깎기의 길이 멀고도 험하겠지만

좀 더 용기를 내어 연마해야겠다는

단순한 생각이 오늘의 교훈. :)

 



♪ Def Leppard - Ac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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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r Is A Gift

논쟁이나 토론을 할 때 어떤 사람들은
냉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믿는다.
어느 시점에서 감정을 드러내거나 하면
불필요한 것을 논의에 개입시킨다고 비난받기 일쑤고
심지어는 감정을 가라앉히지 않으면
논의를 계속할 수 없다고 하기도 한다.

갑작스러운 감정의 분출이 논쟁의 지속을 막는 경우는
분명 존재한다.
술자리에서 벌어진 뜨거운 논쟁이
결국은 뒤집어진 탁자와 나뒹구는 의자들, 날아다니는 술잔과 함께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될 때. 이건 물론 극단적인 경우지만.
또한 분노 게이지가 높아지면서 상대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리하여 "감정은 이성을 마비시킨다"고 믿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게 별로 이상하진 않다.

하지만 이런 근대적인 이분법이 언제나 적용되긴 힘들다.
매우 흥분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논리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며
차분함 속에서도 분노를 드러내며 설명이 가능하다.
이들이 드러내는 감정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언어로서 드러나는 말 이면의 진실을 설명해 준다.
왜 이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어떤 지점에서 차이가 생성되고 차이를 넘어설 수 있을지.
논리로는 평행선을 달릴 운명이지만. 감정을 이해하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감정을 드러낼 때 보다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말하는 사람와 말하는 바가 분리될 수 없단 것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똑같은 결론을 똑같은 논리로 똑같은 설명방식을 빌려 이야기 할 때
두 이야기가 받아들여지는 바는 서로 다를 가능성이 높은 것처럼.
논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감정은 논리와 마찬가지로 말하는 그 사람의 일부이고
그 사람의 논리 전개 과정과 논리를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감정에 공감하거나 만약 공감할 수 없다면 감정을 이해하려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건 내가 함부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분명 아니지만)
성매매특별법 등의 논쟁에서 여성들이 보여주는 분노에 대해
"이성적으로 접근하자"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완전한" 제3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말이다.
큐브 밖에서
관망하며 예측하고 나름대로 상상하여 결론을 내릴 수는 있겠지만
큐브 안의 현실 속에서
얽히고 섥힌 문제들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들과 공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짧은 문장을 쓰는 것이 너무나 힘든 게 사실이다. 언젠가 스트라이프를 그을지 모르겠군.)

오히려 제대로 분노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하고
제대로 분노해 본 적이 있던가라는 의심이 들기도 하고
어쩐지 내가 서 있는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누구나 분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전에 "Freedom"을 올려버려서.ㅡㅡ;;; 
♪ Nirvana - You Know You're Right ♪

ps. 역시나 조금 지쳐 있는건지
      요즘 쓰는 포스트들은 하나같이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군.
      내가 봐도 재미없다. ㅡㅡ;;

      하긴. 언제는 또 재미있었냐만은. :)

 

ps2. 글을 쓰고 다시 보니까

      빽빽한 글자의 압박이 장난아니다.

      아 어쩐지 토할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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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말의 가치란

한국어는 우수한 언어라고 어릴 적부터 들어왔는데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존대말/반말은 그다지 좋은 체계라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양키들의 언어도 나름대로 복잡하겠지만

그래도 나이에 따라 존대하는 것만큼 복잡하진 않을 것 같다.

 

존대말이 일상 속의 권력 관계를 확인시키는 장치 중 하나란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나이 뿐만 아니라 지위, 성별 등에 따라 존대말과 반말을 쓰는 사람이 정해지고

가족 안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TV 속에서, 온갖 관계 속에서

재생산되고 굳어진다.

 

뭐 여기까진 누구나 동의할 만한 말이겠지만

문제는 반말이 과연 "해방적"ㅡㅡ;;이냐 하는 건데

난 반말을 하는 관계를 만드는 것에 대해 일단 긍정적이라 평가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엔 "경우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한다.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해 왔던 노력처럼

호칭 대신 별명을 부르고 서로 반말을 사용하며

학교와 학번을 묻지않는 내부적인 룰을 만드는 것

당장 무엇인가가 변하지는 않겠지만

일상 속의 권력관계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데에

충분한 기여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반말을 사용함으로써 생기는 오해들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서로 존대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 역시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로 존대말을 쓰는 관계 역시 평등할 수 있으며

일상의 권력관계를 벗어날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반말을 하는 관계" 자체가 더 긍정적이고 평등한 관계라고 볼 수 없듯이 말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복학생들의 역습처럼 권력관계를 용인하고 강화시키게 되는

권력관계의 재확인 작업을 거부할 수 있는 "확신".

그리고 일상 속의 자잘한 권력관계에 대해

논의를 통해 끊임없이 확인하려는 "귀차니즘의 극복" ㅡㅡ;;;

 

난 아무래도 반말이 좋지만

분명히 그것도 관계 속에서 확인받아야 할 문제가 아닐지.

 

덧붙임 - 여기에 서술한 의견은 기본적으로 내 생각이지만,

           달군논의하면서 수다를 떨면서 받아들인 부분들(이탤릭)이 있음을 밝힙니다.

 

* 현근님의 어랏....저 개념없는 놈....

* 꼬리님의 저 자식은 왜 나에게 반말을 할까?

* 덩야핑님의 반말 (와 pid가 300이어요!!!)

...에 트랙백 합니다.

 


시끄러워요 ㅡㅡ;; play 누르기 전에 조심하시길 :)
♪ Metallica - So Wha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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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son the well

 

Poison the well, 우물에 독뿌리기 (일명 원천 봉쇄의 오류)

반론이 일어날 수 있는 원천을 비판하거나 봉쇄함으로써 반론의 제기를 불가능하게 하여 자신의 논지를 옹호하는 오류.

 

논리적인 잘못보다 더 안 좋은 것은

논의를 지속하고자 하는 의지와 용기를 약화시키고

설명을 구차하게 만들며

이유없는 죄책감을 발생시키고

결국 대화를 단절시키는 것.



"너무 흥분하는 거 아냐?" 또는 "흥분 좀 가라앉히고 차분히 얘기해 봐."

진짜 감정적으로 격앙된 상태에서 충분히 나올만한 얘기지만

나름대로 머리 속으로 정리해가며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하는데도 이런 얘기를 들으면

참 난감해진다.

논의 주제에 대해 dB이 높아질수록 이성은 뒤로 쫒겨가는 것일까.

이성과 감정의 이분법. 그 중에서 이성의 우위.

감정 곡선은 논쟁에서 평행을 그려야만 하는 건지.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또는 "아무리 봐도 그건 오버인데."

솔직히 나도 많이 쓰는 표현.

서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바가 다를 때

그 중요성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이런 얘기가 나올 확률이 높다.

일순간에 과대망상증 환자가 되어버리는데

그렇게 되지 않길 바란다면 "왜 오버가 아닌지" 구차하게 설명해야만 한다.

 

"그건 이미 다들 알고 있어." 또는 "전혀 새롭지 않은데."

어떤 맥락 하에서 의견이 제출되었는지 알기가 귀찮을때

한 방에 정리할 수 있는 방법.

결론이 같으면 모든 것이 같다.는 생각은 매우 편리하다.

그런 결론이 도출되게 된 과정은 모두가 같을 것이며

결국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

한 번 더 리바이벌된 것 뿐이니까.

 

 

결국

무시되거나

매우 구차해지거나

괜히 부끄러워지거나

그래서 결국 입을 다물게 되거나.

 


이러다 앨범 하나 다 올리겠군 ㅡㅡ;;;
♪ Blur - This Is A Lo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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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re So Great

얼마 전에 어떤 기획자이자 디자이너인 사람과 얘기하던 중

자신을 "노가다꾼"이라 부르는 것을 들었다.

이 얘기는 약간 충격적이었는데

일반적으로 프로그래머들이 자신을 "코더"라고 부르는 것과

조금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탓일 것이다.

 

프로그래머들이 자신을 "코더"라고 지칭할 때는

뭔가 새로운 구조를 구축하고 새로운 로직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구조 속에서 알려져 있는 로직을 "복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프로그램을 만들 때

그 단어을 쓰는 경우가 많다.

 

그 기획자의 경우도 이와 비슷할 지 모른다.

다른 누군가의 생산물을 적절한 포맷으로 정돈해서

페이지에 "복사"하는 일 자체는 전혀 생산적이지 않고

동시에 재생산한다고 보기에도 애매하다.

말 그대로 "노가다"로 느낄 수도 있는 것이며

어쩌면 그 단어가 보다 진실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단지 다른 의미로 느껴졌다는 것은

그 일이 원래 그런 일이 아니라

책임질 사람이 혼자밖에 없고 절대적인 시간도 부족한 상황 탓에

그 의미는 단순반복작업으로 축소되고

자유로운 상상력과 영감을 펼치는 재미를 느낄 여지조차 없어졌단 것이다.

왠지 슬퍼졌다.

 

뭔가 뾰족한 해법이 나올 수 없는 상황이라면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거나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여 상황을 타개해 볼 수밖에 없을텐데

그것도 여력이 남아있어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때에나 가능하겠지.

 

그럼에도

스스로 무너지는 것이 가장 나쁜 결과란 생각이 든다.

자신에게서나. 또는 주위 사람에게서나.

매우 무책임한 말인 것은 알지만.

 



♪ Blur - You're So Grea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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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

사슴벌레님의 어떤 문턱에 트랙백.

 

"투쟁의 문턱"을 보고 문득 생각난 이미지.

 


 

 


 

 


 

 



문학 작품의 한 형식. 어떤 저명 작가의 시구나 문체를 모방하여 풍자적으로 꾸민 익살스러운 시문. (네이버 국어사전)

 

현실을 왜곡하지만

보다 분명하게 현실을 드러내는 것.

상상력과 자유연상과 현실과의 접점.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보다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실체를 드러내게 할 수 있는 것.

 

문턱을 넘어설 수 있다면

보다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을텐데.

 

...쓰고 나서 보니 사슴벌레님의 "문턱"과는 맥락이 다르다는 생각이 얼핏.

어라 이게 아니었는데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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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의 이름으로, 전체의 이름으로

안드로이드님의 "LG 정유 파업에 대한 단상"에 트랙백한 글입니다.

 

와, 진보넷 블로그 외부에서 트랙백이 걸린 건 이게 처음이네요.

블로그에서 포스트 사이의 네트워킹, 말로만 수없이 떠든 것 같은데

실제로 이렇게 트랙백이 걸리고 걸고 하니 이제야 실감이 납니다.

 

안드로이드님의 감정을 불타오르게 한 첫 번째 요인에 대해

전 완전히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 요인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동의하고

세 번째 요인에 대해서는 (저는 안그렇지만)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첫 번째 요인에서 말한 그 "피해"라는 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논리와 철학과 이념을 배제하고 감정적으로 봐도 말이죠.




저는 자본주의적인 노동을 합니다.

매일 8-9시간씩, 일주일간 44-50시간을 말이죠.

누구를 위해서? 당연히 절 위해서죠.

정확하게 얘기하면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 취미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좀 더 직설적으로 얘기하면, "돈" 때문입니다.

 

회사를 위해 일한다는 생각, 전혀 없습니다.

회사 입장에서도 볼 때 "저 놈이 나을 위해 일해 주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멍청한 관리자는 없을 겁니다.

회사와 노동자와서 관계는 서로 피해 안 주고 협력하는 관계가 아니라

임금으로 얽힌 계약 관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죠.

 

국민과 국가 경제를 위해 일한다는 생각, 역시 전혀 없습니다.

매달 임금에서 원천 징수되는 각종 세금을 내고 나면

제가 국가를 위해 하는 일은 다 끝난 겁니다.

 

저는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해 강제노동하는 게 아닌거죠.

 

그래서 파업-즉 노동을 멈추게 되면

회사에 대한 피해, 국민에 대한 피해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사회에서 누군가 회전을 멈추게 되면

다른 바퀴에 피해를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계속 돌아가기 위해서

다른 바퀴에게 계속 회전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옳은가요?

지하철 파업을 하면 내가 지각하고 불편하니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참고 계속 일하라고

지하철 노동자들에게 말하는 것이 정당한가요?

집단이기주의에 의해 "피해"를 받는 "국민들"은

정작 자신들이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 것인지

매우 궁금합니다.

 

국가 경제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마 국가 경제를 위해 모든 국민들이 개미처럼 일해야 한다는

개발독재시대의 생각을 갖고 계신 건 아니겠죠.

파업을 하면 국가 경제에 피해가 물론 갑니다.

"기간산업"이라면 더욱 그러하겠죠.

그런데 누가 그들에게 계속 노동해야만 한다고 요구할 권리가 있는 건가요?

파업으로 해결되어야만 하는 문제라면

당연히 파업을 통해 풀어야만 하고

그 동안 발생하는 "피해"는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파업을 통해 발생하는 피해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분노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저는 파업으로 인해 발생하는 개인적인 손실은

충분히 감수할 용의가 있고 적극 그들의 편에 설 생각이 있습니다.

즉, "국민"의 한 사람인 저한테까지 그들이 파업의 "공공성"을 구차하게

(정말 구차한 일이죠. 왜 자신이 노동을 멈추게 되었는지를 공공적인 차원에서

설명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설득할 필요는 없단 얘깁니다.

 

첫 번째 요인에서 말씀하신 것들에 대해

집단의 이름으로, 전체의 이름으로 합리화시키려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적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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