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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궁리) 中 발췌

 

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자크 랑시에르
궁리, 2008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설명한다는 것은 먼저 상대가 혼자 힘으로는 그것을 이해 할 수 없음을 그에게 증명하는 것이다.”

 

 

조제프 자코토를 사로잡은 계시는 다음으로 귀결된다. 설명자가 가진 체계의 논리를 뒤집어야 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바로잡기 위해 설명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 무능력이란 설명자의 세계관이 지어내는 허구이다. 설명자가 무능한 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즉 설명자가 무능한 자를 그런 식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설명한다는 것은 먼저 상대가 혼자 힘으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음을 그에게 증명하는 것이다. 교육자의 행위이기에 앞서, 설명은 교육학이 만든 신화다. 그것은 유식한 정신과 무지한 정신, 성숙한 정신과 미숙한 정신,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 똑똑한 자와 바보같은 자로 분할되어 잇는 세계의 우화인 것이다. (19p)

 

 

우리는 텍스트로부터 시작하지 문법부터 시작하지 않으며, 완성된 단어부터 시작하지 음절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더 잘 배우기 위해 그렇게 배워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자코토의 방법이 전반적인 방법의 시초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우리는 B, A, BA보다는 칼립소부터 시작할 때 더 빨리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얻은 속도는 획득한 역량의 효과, 해방하는 원리의 결과일 뿐이다. “옛날 방식은 문자들부터 시작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 방법은 지적 불평등의 원리에 따라, 더구나 아이들이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원리에 따라 학생들을 지도하기 때문이다. 구식은 무자가 단어보다 더 구별하기 쉽다고 믿는다. 이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결국 구식은 그렇게 믿는다. 구식은 아이 같은 지능이 C, A, CA를 배우기에 알맞을 뿐, 칼립소를 배우려면 어른의 지능, 다시 말해 우등한 지능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62p)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메논의 노예로 하여금 그 안에 있는 수학적 진리들을 깨닫게 만든다. 거기에는 앎의 길이 있을지언정 결코 해방의 길은 없다. 반대로 소크라테스는 노예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재발견할 수 있도록 만들려면 그를 계속 붙들고 있어야 한다. 노예의 앎을 증명하는 것은 그의 무능을 증명하는 것과 같다. 노예는 결코 혼자 걸을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스승의 교훈을 예증하기 위한 때가 아니고는 아무도 그에게 걸으라고 주문하지도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안에서 노예로 남아 있도록 운명 지어진 노예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65p)

 

 

지도와 교육의 조화로운 균형은 이중의 바보 만들기의 균형이다. 여기에 정확히 해방이 대립된다. 해방이란 모든 인간이 자기가 가진 지적 주체로서의 본성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데카르트의 정식을 거꾸로 뒵은 평등의 정식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곤 했다. 이 대철학자의 훌륭한 생각은 보편적 가르침의 원리 중 하나다. 우리는 그의 생각을 뒤집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이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이 뒤집기는 인간주체를 코기토[나는 생각한다]의 평등 안에 포함시킨다. 생각은 사유 실체가 가진 한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속성이다. “너 자신을 알라”를 모든 인간 존재의 해방 원리로 변형하기 위해서는 플라톤의 금지에 맞서 『크라틸로스』의 환상적인 어원 중 하나를 가지고 장난을 쳐야 한다. 인간, 즉 anthropos는 자신이 본 것을 검토하는존재, 자신의 행위를 헤아리는 가운데 자신을 아는 존재다. 보편적 가르침의 모든 실천은 다음의 질문으로 요약된다. 너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보편적 가르침의 모든 힘은 그 실천이 스승에게서 실현되는 해방, 학생에게서 생겨나는 해방을 의식하는 데 있다. 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앎으로써, 다시 말해 자신이 그것의 주체가 되는 자적 행위들을 검토함으로써, 그가 자신의 행위 속에서 사유하는 존재의 힘을 쓰는 방식에 주목함으로써 시작한다면 자기 자식을 해방할 수 있을 것이다.(77p)

 

 

불평등에 대한 믿음은 그런 것이다. 자신을 깎아내리려고 자기보다 우월한 자를 구하는 우월한 정신은 하나도 없다. 자기를 무시하기 위해 자기보다 더 열등한 자를 구하는 열등한 정신은 하나도 없다. 루뱅의 교수가 입는 정복(正服)은 파리에서는 별것도 아니다. 그리고 파리의 장인은 지방의 장인들이 얼마나 자기보다 열등한지 알고 있다. 지방의 장인들은 농부들이 얼마나 그들보다 뒤떨어져 있는지 알고 있다. 이 농부들이 사태를 파악하고, 파리 [대학교수의] 정복이 [그 옷 속에] 몽상가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날, 상황은 원점을 ㅗ돌아올 것이다. (85p)

 

 

 

우리는 지능을 그것의 효과로만 안다. 그러나 우리는 지능을 고립시킬 수도 측정할 수도 없다. 우리는 지능의 평등이라는 의견에서 착상을 얻은 실험들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지능이 평등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모든 지능이 평등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지능이 평등하다고] 가정함으로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이 의견이 가능함을, 다시 말해 그 역(逆)의 어떤 진리도 증명되지 않음을 보이기만 하면 된다. (95p)

 

 

 

차이와 불평등은 인간 센체의 모든 다른 기관들의 짜임새 및 기능에서와 마찬가지로 두뇌에서도 지배적이다. 뇌가 무거운 만큼 지능도 높다. 그와 관련해서 골상학자와 두 개 진찰자는 바삐 움직인다. 그들은 말한다. 이 사람은 천재의 돌기가 있고, 이 다른 사람은 수학자의 돌기를 갖고 있지 않다. 이 돌출부들은 그들이 하는 돌출부 검사에 맡겨두자. 그리고 이 사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우리는 사실 일관성 있는 유물론을 상상할 수 있다. 일관성있는 유물론의 안중에는 두뇌밖에 없으며, 물질적 존재에 적용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두뇌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 지적 해방의 명제들은 멜랑콜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특수한 형태의 낡은 정신병에 걸린 괴이한 두뇌들이 꾸는 몽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우월한 두뇌의 소유자들은 자신들의 우월성을 열등한 두뇌에게, 그것도 정의상 그들을 이해할 수도 없는 두뇌에게 굳이 증명하려고 헛수고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은 열등한 두뇌를 지배하는 데 만족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서 아무런 장애물과도 마주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지적 우월성은 물리적 우월성과 다름없이 사실로 서 행사될 것이다. 정치 질서에서는 법도, 의회도, 정부도 더는 필요 없을 것이며, 지적 질서에서는 교육도, 설명도, 아카데미도 필요 없을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는 정부와 법이 있다. 열등한 정신들을 지도하고 설득하려고 애쓰는 우월한 정신들도 있다. 더 이상한 점은, 지능의 불평등을 신봉하는 사도들 정대다수가 생리학자들을 따르지 않을뿐더러 두 개 진찰을 비웃는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자신들이 뽐내는 우월성은 두 개 진찰자들의 도구로 측정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우월성은 두 개 진찰자들의 도구로 측정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우월성을 유물론으로 손쉽게 설명할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사례를 만든다. 그들의 우월성은정신적이다. 그들은 먼저 자신들을 후하게 평가하기 때문에 정신주의자다. 그들은 빗물질적이고 불멸하는 영혼을 믿는다. 그러나 빗물질적인 것이 어떻게 더 많고 더 적을 수 있을까? 그것이 우월한 정신을 가졌다는 자들이 빠지는 모순이다. 그들은 빗물질적인 영혼, 물질과 구분되는 정신을 바란다. 그들은 지능들이 다르기를 바란다. 그러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물질이다. 불평등을 고수하려면, [정신이] 두뇌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정신적 원리의 단일성을 고수하려면, 동일한 지능이 다른 정황 속에서 다른 물질적 대상들에 적용된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우월한 정신들은 오로지 [두개의 차이에 의한] 물질적인 우월성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들을 열등한 정신들과 평등하게 만들 [단일한] 정신성도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빗물질성에 고유한 정신의 고양을 말하면서도 유물론자들이 말하는 차이들을 주장한다. 그들은 두개 진찰에서 말하는 돌기들을 지능의 타고난 선물인 양 꾸민다.

 

하지만 그들도 그것이 약점이라고 느낀다. (...) 그들은 말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빗물질적인 영혼이 있다. 이 영혼 덕분에 가장 보잘것없는 자도 선과 악, 의식과 의무, 신과 심판에 대한 위대한 진리들을 알 수 있다. 그 점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심지어 우리는 보잘것없는 자들이 그 주제에 대해 그들이 우리보다 낫다는 것을 자주 보여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들이 거기에만 만족하게 해야 한다. 그들이 사회의 일반적 이익을 신경 쓰는 임무를 가진 자들의 특권인 이 지적 능력을 조금도 주장하게 해서는 안 된다. (...)

 

하나는 다른 하나보다 더 성공한다. 그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당신들은 말한다. 그가 더 성공한다면 그것은 그가 더 똑똑하기 때문이라고. 여기에서 설명은 모호해진다. 당신은 그가 더 성공했다는 사실의 원인일 수 있는 다른 사실을 내놓았는가? 만일 어느 생리학자가 [두 아이의] 두뇌 중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조밀하거나 더 가볍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사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생리학자는 정당하게 그러므로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에게 다른 사실을 내놓지 않는다. “그는 더 똑똑하다”라고 말하면서 당신은 그저 사실을 이야기하는 관념들을 요약했을 뿐이다. 당신은 그 사실에 하나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하나의 사실에 대한 이름이 그것의 원인은 아니다. 기껏해야 그것의 은유일 뿐이다.(97-100p)

 

 

 

 

즉흥작은 알다시피 보편적 가르침의 규준이 되는 훈련 중 하나다. 그러나 그것은 먼저 우리 지능의 첫 번째 덕인 시적인 덕을 훈련하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느끼면서도 그것을 말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우리는 시인으로서 말하기도 하고, 우리 정신의 모험을 이야기하고, 또 그 모험을 다른 모험가들이 이해한다는 것을 검증하고, 우리의 느낌을 소통하고 그것을 느낌을 갖는 다른 존재들이 공유하는 것을 본다. 즉흥작은 인간 존재가 제 자신을 알게 해주고, 자신의 본성 속에서 이성적 존재, 다시 말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그와 비슷한 자들에게 이야기하기 위해 단어를 만들고, 형상을 그리고, 비교를 하는” 동물임을 확인시켜주는 훈련이다. 우리 지능의 덕은 아는 것이기보다 행하는 것이다.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며, 행하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이 행함은 근본적으로 소통 행위다. 그런 까닭에 “말하기는 무엇이건 행하는 능력에 대한 최상의 증거다.” (128-9pp)

 

 

 

 

'천재‘, 다시 말해 해방된예술가의 진짜 겸손이란 이것이다. 그는 우리가 그와 똑같이 알거라고 믿는 다른 시[무언의 시]의 부재로서 그의 시를 우리에게 내놓기 위해 그가 가진 모든 역량과 모든 기술을 쓴다. “우리는 스스로 라신이라고 생각하며, 우리는 옳다.” 이 믿음은 어떤 광대의 자만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도 우리의 시구가 라신의 시구에 값한다거나 곧 값하게 될 것임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것은 먼저 우리가 라신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을 알아듣는다는 것, 그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른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 그의 표현은 우리의 역번역에 의해서만 완수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먼저 그를 통해서 우리가 그처럼 인간임을 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그 덕분에 기호들의 자의성을 통해 우리에게 이것을 알려주는 언어의 역량을 안다. 우리는 라신과 우리의 ’평등‘이 라신이 들인 수고의 열매임을 안다. 라신의 천재성은 그가 지능의 평등이라는 원리에 따라 작업을 했고, 그가 말을 건네는 자들보다 스스로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가 [길가의] 카페처럼 무심코 지나칠 수 있다고 예상하던 사람들을 위해 작품을 만들었다는 데 있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이 평등을 입증하는 것, 우리 자신의 작업을 통해 이 역량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는 라신이 쓴 비극과 동등한 비극을 만들어내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느끼는 바를 이야기하기 위해 그만큼 주의를 기울이고, 그만큼 기술을 탐구해야 하며, 언어의 자의성을 가로지르거나 우리 손으로 만드는 작품에 대한 모든 물질의 저항을 가로지름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겪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이 하는 바보 만드는 교훈과 하나하나 반대되는 예술가의 해방하는 교훈은 이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 이중의 발걸음을 내딛는 한에서 예술가다. 예술가는 직업인이 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모든 일을 표현 수단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는 느끼는 데 만족하지 않고 나눌 방도를 찾는다. 설명자가 불평등을 필요로 하듯, 예술가는 평등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예술가는 이성적 사회의 모델을 그린다. 그 사회에서는 이성에 외적인 것--물질, 언어적 기호들--에도 이성적 의지가 관통한다. 어떤 점에서 우리가 그들과 비슷한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느끼게끔 하는 의지 말이다. (139p)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

 

우리는 그렇게 예술가들의 사회가 될 해방된 자들의 사히를 꿈꿀 수 있다. 그런 사회는 아는 자와 알지 못하는 자, 지능의 특성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의 나눔을 거부할 것이다. 그런 사회에는 행동하는 정신들만 있을 것이다. 행하고, 자신이 한 것에 대해 말하고, 그리하여 자신의 모든 작품을 모두에게 있는 것과 같은 자신의 인간성을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변형하는 사람들만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누구도 그의 이웃보다 더 많은 지능을 갖고 태어나지 않으며, 어떤 사람이 발현하는 탁월함이란 다만 다른 이가 도구를 다루는 열의만큼 고집스럽게 똑같은 열의를 가지고 단어를 다루어 얻은 열매임을 알 것이다. 그들은 또 어떤 사람의 열등함이란 그로 하여금 좀 더 찾아보도록 강제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비롯된 결론임을 알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이런 저런 사람이 그의 고유한 기술에 부여한 개선이란 모든 이성적 존재에 공통된 힘을 저마다 특수하게 적용한 것일 뿐임을 알 것이다.

(...)

그러므로 빈정대는 자들의 질문을 뒤집어야 한다. 그들은 묻는다. 지능의 평등 같은 것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의견은 사회를 무질서에 빠뜨리지 않고서야 어떻게 정착될 수 있는가? 우리는 거꾸로 지능이 평등 없이 어떻게 가능한지 물어야 한다. 지능은 그것이 아는 것과 그 앎의 대상을 비교하는 일을 맡는 이해 능력이 아니다. 지능은 타인의 검증을 거쳐 자신을 이해시키는 능력이다. 그리고 오로지 평등한 자만이 평등한 자를 이해한다. 이성과 의지가 동의어이듯, 평등과 지능은 동의어이다. 낱낱의 인간이 지닌 지적 능력을 정립하는 이동의관계는 사회 일반을 가능케 하는 동의관계이기도 하다. 지능의 평등은 인류를 이어주는 공통의 끈이자 인간 사회가 존재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만일 이간들이 서로를 평등하게 본다면 헌법은 곧 만들어질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이 어쩌면 평등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의견이다. 그리고 우리처럼 그 의견을 믿는 자들과 함께 우리는 그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어쩌면 덕분에 인간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140~143pp)

 

 

 

따라서 사회 세계는 그저 비-이성의 세계가 아니라, 무분별의 세계, 다시 말해 불평등에 대한 정념에 사로잡힌 왜곡된 의지가 활동하는 세계다. 계속해서 개인들은 비교를 통해 서로를 묶으면서 이 무분별, 이 바보 만들기를 재생산한다. 제도는 이 무분별과 바보 만들기에 법령을 부여하고, 설명자들은 두뇌 속에 그것들을 응고시킨다. 이렇게 무분별을 생산하려면 개인들은 자기 정신으로 만든 작품들을 이성적으로 소통하기 위해 들이는 그만큼의 기술과 지능을 그 일에 써야 한다. 간단히 말해 이 일은 애도 작업이다. 전쟁은 사회 질서의 법칙이다. 그러나 이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치명적인 물리력도, 짐승 같은 본능에 지배되는 어떤 미쳐 날뛰는 무리들도 상상하지 말자. 전쟁은 인간이 만드는 모든 작품과 마찬가지로 먼저 말하는 행위다. 그러나 [전쟁이 하는] 말은 다른 지능과 다른 담론을 불러일으키는 역번역자의 빛을 발하는 관념들의 후광을 거부한다. 전쟁에서 의지는 더 이상 스스로 짐작하거나, 상대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짐작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전쟁 속에서] 의지가 자신의 목적으로 삼는 것은 타인의 침묵, 말대꾸의 부재, 동의라는 물질적 응집 속에서 일어나는 정신의 추락이다.

(158-159pp)

 

 

 

 

사람들이 말했듯이 수사학의 원리는 전쟁이다. 사람들은 수사학에서 이해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의지를 무화시킬 방법을 찾는다. 수사학은 말하는 존재의 시적인 조건에 반기를 드는 말이다. 그것은 입 다물게 하기 위해 말한다. 너는 더 이상 말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할 것이다. 이상이 수사학의 강령이다. 수사학의 실효성은 그것 자체의 중단에 좌우된다. 이성은 항상 말하라고 명령한다. 수사적인 무분별은 침묵의 순간이 오게 만들기 위해 말할 뿐이다. 사람들은 곧잘 [침묵의] 순간이 말을 행위로 만드는 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행위의 순간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 순간은 오히려 행위가 결핍된 순간, 지능이 부재하는 순간, 의지가 굴복하는 순간, 무게의 유일한 법칙에 인간들이 복종하는 순간이다. (163-4pp)

 

 

 

카스트 제도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우월한’ 자는 자신의 이성을 열등한 자의 법에 넘긴다. 철학자들의 의회는 그 의회 고유의 무분별, 만인의 무분별이라는 축을 ㅗ굴러가는 관성적인 물체다. 불평등주의적 사회는 헛되이 그 자체로 이해되기를 바라고, 스스로에게 자연적 토대를 부여하려고 애쓴다. 정확히 말하면 지배에는 어떤 자연적 근거도 없다. 그래서 협약이 명령하고 또 절대적으로 명령하는 것이다. 우월성으로 지배를 설명하는 자들은 오래된 아포리아에 빠진다. 우월한 자는 그가 지배하기를 멈출 때 우월하기를 멈춘다. 아카데미 회원이자 프랑스 귀족원 의원인 레비 공작은 자코토의 체계가 끌어낼 사회적 결론을 우려한다. 만일 지능의 평등을 주장하면, 어떻게 여성들이 그대로 그들의 남편에게 복종할 것이며, 어떻게 피통치자인 시민들이 통치자인 관료들에게 복종하겠는가? 만일 레비 공작이 모든 우월한 정신들처럼 부주의하지 않다면 자신의 체계, 바로 지능의 불평등의 체곅 사회 질서를 전복하는 것임을 알아차릴 법도 했는데. 만일 권위가 지적 우월성에 달려 있다면, 역시 지능의 불평등에 설득당한 피통치자인 시민이 도청에서 근무하는 어느 저능한 사람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날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장관과 도지사, 시장과 국장들이 과연 우월한지 검증하기 위해 그들을 시험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들 중 몇몇 저능한 사람—그가 모자라다는 것이 알려지면 시민들의 불복종을 야기할 수도 있을 터—이 슬그머니 끼어들어가 있지 않다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169-170pp)

 

 

 

 

 

 

 

모순을 설명하는 것은 간단하다. 우리는 말했다. 진보적 인간이란 걷는 자, 다시 말해 보고, 실험하고, 자신의 습관을 바꾸고, 자신의 앎을 검증하고 이렇게 끝없이 가는 인간이다. 이것은 진보라는 단어를 문자 그대로 정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진보적 인간은 또한 다른 것이다. 진보의 의견에서 출발해서 생각하는 인간, 이 의견을 사회 질서에 대한 지배적 설명의 서열로 승격시키는 인간이다. (2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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