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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씨에게 보내는 한 청년의 편지

<김예슬 선언> 카페에 올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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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예슬씨. 저는 2003년에 대학에 입학해 2008년 여름에 졸업하고 지금은 고향에 내려와 있는 (무직)청년입니다. 저의 입학년도와 졸업년도가 말해주듯이, 5년반을 대학생으로 살아왔고, 딱 그 기간만큼 학생운동과 인연을 맺어왔습니다. 남들처럼 일찍 군대를 다녀왔다면 지금쯤 복학생 신분으로 학교 어디선가 동기, 후배들과 예슬씨의 선언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고 있었겠지요.

 

하지만 지금 제 주변엔 그런 얘기를 함께 나눌 사람이 없어 답답해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서점에서 예슬씨가 낸 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손바닥만한 작은 책 속에 담긴 당신의 작은 외침들 하나하나에, 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저도 많이 공감하고 또 가슴 속으로 한없이 울었습니다. 겨우 7,500원하는 그 책을 사들고 왔으면 좋았으련만 그 때 제 지갑엔 딸랑 5,000원 밖에 없어서 그냥 빈손으로 오고 말았네요. 그래도 책 속에 담긴 예슬씨의 몇 가지 의문들은 저를 향하고 있는 것만 같아, 그리고 그 의문들에 대답하는 것이 마치 제 의무인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책임감이 생겨서 이렇게 당신께 편지를 씁니다.

 

 

 

91년 5월, 그리고 오늘

 

저는 요즘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1991년 5월>이라는 긴 제목의 책 한 권을 읽고 있습니다.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시 한 구절을 인용한 이 제목의 책은 91년 4월 26일 강경대 열사의 죽음으로부터 촉발된 5월 투쟁을 당시에 대학생 신분으로 이 투쟁을 경험한 이들이 10년이 지난 후 가슴 아픈 회고 속에서 기록하며 평가한 것입니다. 제 얘기를 하기 전에 이 책에 대한 저의 간단한 감상부터 전해야 겠네요.

 

이 책의 저자들은 자신들이 무대의 주인공이었던 이 투쟁을 4.19나 광주항쟁, 87년 민주화항쟁에 대해 흔히 그러듯이 그 역사를 자랑스럽게 포장하지도, 자신들을 역사의 피해자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 정치사에 있어 급격한 변곡점이라 할 수 있는 당시 상황에서 자신들은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그 실천들은 올바른 것이었는지 반성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87년 6월 항쟁이 직선제 쟁취라는 껍데기 뿐인 성과만을 얻은 채 봉합되고, 이후 벌어진 엄청난 수의 노동조합 결성과 투쟁으로 이어지지 못한 결과 소위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분리라는 것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노태우 정권은 88올림픽 등을 거치면서 체제 갈등에 대한 봉합과 포섭 능력이 이전에 비해 훨씬 향상되어 있었고, 이는 이 둘의 분리와 전자에 대한 의도적인 고립, 탄압을 노골화 했습니다. 91년 5월은 어쩌면 이런 흐름에 쐐기를 박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강경대 열사로부터 시작된 죽음과 분신의 행렬은 13명이나 되는 노동자, 학생을 떠나보내게 했지만 노태우 정권은 강기훈씨 유서대필사건, 정원식총리 계란투척사건 등을 공안사건으로 조작해내면서, 운동권을 '패륜아'로 낙인찍는데 성공했습니다.

 

'노태우정권=죽음과 폭력의 세력', '노동자와 학생=피해자'라는 명쾌한 논리로 지배세력을 공격했던 운동권은 어처구니없게도 "죽음을 사주하는 어둠의 세력"이라는 말로 이 논리가 자신들에게 돌아왔을 때 어찌할 줄 몰라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이 때부터가 우리 사회에서 운동권이 평범한 시민들로부터 고립되어 비주류가 되기 시작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문민화'된 정권의 변화된 지배형태와 새롭게 만개한 소비문화와 한 몸이 된 시민들의 이데올로기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비판하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몸짓만을 보인 운동세력은 그저 앙상한 모습만으로 기억될 뿐이었습니다. 과잉된 도덕적 엄숙주의, 폐쇄주의적 문화, 유사 '군대'적이라고 할만한 권위주의적인 작태, 그리고 어정쩡한 대중추수주의. 91년 이후 지금까지 어찌어찌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학생운동의 문화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모습의 집결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학생운동 속에서 2000년대의 대학생활을 보냈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2000년대 학생운동에 대해 말하기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는 이유는 당신이 책 속에서 했던 가슴 아픈 말 때문입니다. 당신이 "우리는 충분히 래디컬한가"라고 물었을 때, 선뜻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당신의 의문을 당신이 학생운동을 하던 선배들과 함께 할 수 없었던 '송구스러운 심정'을 통해 전할 땐, 솔직히 속상했습니다. 물론 저는 이미 졸업했지만,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 가졌던 상처와 미련들 때문에 당신이 조심스럽게 던지는 그 말 한 마디도 야속하게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오늘만큼은 냉정해지고자 합니다.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저 스스로 '이걸 빼면 내 인생은 시체'라고 생각한 나의 지난 학생운동 시절에게 '충분히 래디컬했는지' 질문하고자 합니다. 이에 대답하는 과정은 당신이 기존에 스스로를 진보라고 외쳤던 이들에게 실망했던 이유를, 그것을 '거짓 희망'이라고 말해야 했던 이유를, 당신과는 다른 각도에서 조명해 보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에겐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3,4학년 때 저는 주로 학생회 활동을 했고, 연말엔 학생회 선거 준비 때문에 '학고'를 각오하고 수업도 내팽개치며 살았습니다. 그 때 저는 90년대 중 후반 부터 선배들이 만들었던 선거 정책 자료집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정치적 입장을 담은 대자보를 붙이면 다음날 학우들 손에 북 북 뜯겨 나가던 때였으니, '자본주의 반대'니 '민중권력 쟁취'니 하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선거 자료집'에 가감없이 담아내는 선배들의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마냥 멋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땐 잘 느끼지 못했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대략 50페이지 안팎 되는 자료집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시퍼렇게 날이 섰던 힘있는 정치적 문장들은 점차 사라지고, 당의(糖衣)입힌 선물상자들이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 말입니다. 등록금 인하, 매점과 식당 개선, 강의평가제 개선... 그러던 것이 몇 해 전부터 '시험기간 간식 배포' 같은 걸로 바뀌기 시작했고, 선본의 정치적 입장은 자료집 맨 뒤에 '정세'라는 코너를 따로 두어 성명서 같은 글을 집어넣는 걸로 대체되었습니다. 여전히 저는 그 자료집 안에서 '미국의 신자유주의 세계 재패전략'을 비판하는 것과 식당 밥 개선하는 것이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자료집을 맨날 끼고 살았던 저는 4학년때 정책국장을 맡아 치룬 선거에서 ‘신자유주의에 의해 가려진 ○○○의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하자’(○○○은 학교이름)는 멋들어진 총기조를 뽑아놓고는(그래서 선본이름이 'Zoom In'이었습니다) ‘셔틀버스 무료화’라는 강력한 복지공약을 전면에 내거는 코메디를 연출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말대로 지적 교조성과 조야한 대중성의 우스운 조합입니다. 스스로는 이를 '대중운동'이라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오히려 '대중운동'을 참칭하여 우리의 이념적 건강함마저 갉아먹는 짓이었습니다.

 

이것은 비록 저의 이야기이지만, '이념의 고수'와 '대중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2000년대 학생운동을 경험한 이들 모두의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아 들어줄 이 없겠지만, 혹여나 2000년대 학생운동에 대해 누군가가 증언해야 한다면, 저의 이런 이야기도 한 꼭지 정도로는 들어갈 것입니다. 저의 경험에서 평가해 봤을 때, 2000년대 학생운동은 90년대로부터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소중한 자산인 학생운동

 

그래서 저는 '스스로 진보라 말하는 사람들에게 진정성을 찾을 수 없다'는 당신의 말을 긍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대중지향성이라는 말을 마치 '대중이 선호하는 것에 맞게'라는 식으로, 마케팅 이론에나 나올 법한 방식으로 이해했고, 이 때문에 훼손된 우리의 진보성을 정서적 폐쇄성과 비장함으로 상쇄시키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당신의 선언과 이에 대한 많은 이들의 반응을 보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가장 래디컬한 것이 가장 대중적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당신도 너무나 잘 아시겠지만, 모두가 다 그런 래디컬한 '대학거부'를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개인의 결단 차원이 아니라 대학과 사회를 변화시키고자하는 '운동'의 차원에서라면 더욱이 말입니다. 그래서 남겨진 자들, '대학거부'를 선택하진 않았지만 '다른 대학'을 꿈꾸는 남겨진 제2, 제3의 김예슬들에겐 당신의 선택이 또 다른 책임감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오히려 많은 이들에게 '대학거부'는 사실상 '대학포기'와 다르지 않기에 당신의 선택에 마냥 박수만 치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대학을 거부하고 노동현장으로 달려가는 것이 당연스럽게 여겨지던 예전 대학과 학생운동의 모습을 생각할 때, 당신의 선언이 주목받는 것은 오히려 현재 학생운동 위기의 결과라는 생각에까지 다다르면 머릿속이 한 층 더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당신께 바랍니다. 당신이 떠나온 대학이란 공간을 여전히 기억해 달라고. 여전히 구조조정을 막기 위해서 학생들이 타워크레인에 올라가야만 하는 전쟁터같은 대학을 기억해 달라고 말입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배움을 통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배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 평생학습사회에서, 저 또한 쉼 없이 대학을 생각할 것입니다. 솔직히 학생운동을 하는 동안 한번도 대학에 '래디컬'하게 맞서본 적 없지만, 앞으로 살아갈 나의 삶 속에서도 나를 끊임없이 '길러 낼' 이 엄청난 국가-학교-자본의 불결한 동맹에 제대로 맞서야 겠다고 다짐합니다. 당신도 (물론 그러시겠지만) '나눔 농사터에 세워질 진정한 삶의 대학'을 만들어 가시면서 함께 고민을 키워갔으면 합니다.

 

지금 저는 후회와 반성 속에서 저의 지난 학생시절을 돌아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저의 삶의 기반은 학생운동의 경험입니다. 또한 여전히 대학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묵묵히 싸워나가고 있는 저의 후배들은 사회진보를 위해 노력하는 소중한 '씨알'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그 경험을, 미우나 고우나 저의 소중한 자산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렵니다. 물론 나의 이 소중한 자산이 왜 당신께 진정성있게도, 래디컬하게도 보이지 못했는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겠지요. 그 고민 속에서 언제나 당신과 나의 생각이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약한 한 청년의 자기고백과 반성의 글을 이렇게 마칠까 합니다. 언제나 힘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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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 선언

지난 주말에 내가 소속된 단체의 회원 교육에 참석했었다. 언제나 그렇듯 교육 자체보다 뒷풀이가 더 재미나서 오랜만에 틀에 걸쳐 술을 마셨다.

 

둘째날 교육이 끝나고 뒷풀이 중에 갑자기 얼마 전 대학거부 선언을 한 김예슬씨 얘기가 나왔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얘길 했는지는 잘 모르겠고,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동무가 자기는 김예슬의 행동이 감정적으로 이해가 안된다고 했다. 물론 그의 말은 대학거부선언이 옳지 못하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가 자세하게 자기 얘기를 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그 말은 그냥 전적으로 '감정'에 관한 것이었다. 운동권의 감정.

 

내가 추측해 보는 바에 따르면 그가 말하고 싶던 얘기는 이런게 아닐까 싶다. 그 동안 줄곧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비판해 왔던 학생운동 세력이 있었는데, 그것과 무관하게 혼자서 튀는 행동을 한 '개인플레이'는 적절치 못하다, 전체적인 운동 속에서 자신의 고민을 풀어갈 길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런 개인플레이로는 사실 아무런 변화도 만들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의 말이 있고나서 다른 동무들이, 이해 안될게 뭐가 있냐는 핀잔 비슷한 말도 던졌고, 어떤 분은 그런 개인적인 작은 외침을 '기존의' 운동 세력이 어떻게 답해줄지가 사실 더 중요한 문제 아니겠냐는 아주 '교과서적인' 답변도 하고 그랬다.

 

나 또한 약간의 반발성 멘트로, "나는 감정적으로는 이해된다"고 말했는데, 지나고 생각해보니까 이건 뭐 하나마나한 말인 것 같다. 게다가 며칠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 문제는 그저 농으로 받아치고 넘어갈 문제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전에 강의석이 국군의날 반대 알몸시위를 했을때도 평화운동 단체들 쪽에서 비슷한 비판을 했었던 것 같다. 사실 난 그때 평화운동 단체들의 입장이 십분 이해됐다. 방금 기사를 검색해보니 강의석이 얼마전엔 '친구의 누나에게'라는 노래도 발표해 가수로 데뷔하셨다는데, 그에게 알몸시위는 그저 이런 '신선한 도전'의 하나일 뿐 이란 생각이 든다. 그의 알몸에선 어떤 진지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감정'을 김예슬씨의 선언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일까?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하겠지만, 그 동무의 그런 감정은 제작년 촛불시위가 갑자기 터져나왔을때 기존 운동진영의 반응과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기존 운동진영의 기획과 관성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대중행동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미FTA반대를 주장하면서 늘상 우리가 해 오던 광우병 얘기를 '우리 운동권'을 빼놓고 하는 것에 대한 서운함 등. 불과 몇년 전까지 학생운동에 몸담고 있었던 그에게는 김예슬씨의 선언도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을 것 같다.

 

그러나 사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촛불의 예에서와 같이) 김예슬씨의 선언은 그 자체로 기존 운동진영의 무능을 반영한다. 기존의 학생운동은 줄기차게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비판하고 이러저러하게 개입하려 했지만, 그 노력여하와는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실패했다. 반면 김예슬씨는 스스로 사회적 평균 이상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기회와 특권을 포기함으로써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성공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김예슬씨가 어떤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성과 여부를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따질 상황은 전혀 아니다. 그녀의 선언이 사회적 파장을 불러오긴 했지만, 어디까지 그녀도 미약한 개인일 뿐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아직 소리한번 크게 질러보지 못했지만, 우리 주변엔 수많은 제2, 제3의 김예슬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김예슬이 미처 다 말하지 못한 우리 대학의 현실이 있다는 사실이다.

 

언제나 대중의 목소리는 예기치 못한 지점에서 들려온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김예슬씨의 목소리에 우리 모두가 당황했지만, 이제 마음을 추스르고 차분하게 대답해야 할 때다. 우리에겐 그래야 할 의무가 있다.

 

그녀 스스로가 조용히 우리에게 그런 의무감을 재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선언은 강의석과 같은 한판의 쇼가 아니라, 미처 울지 못한 다른 이들을 대신해 먼저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자리를 거부한, 소위 말해, '진정성'이 느껴지는 실천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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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히데오

오쿠다 히데오. 일본 소설을 많이 읽은 편은 아니지만 오쿠다 히데오는 참 좋아한다.

 

<남쪽으로 튀어>에서는 혁명의 꿈을 잃고 방황하는 자족적 아나키스트의 삶이 조금은 유쾌하면서도 조금은 가슴아프게 그려졌고, <공중그네>에서는 삶의 이면들을 아주 코믹스럽게 그려졌다.

 

이번 주말에 읽은 <마돈나>는 <공중그네>와 비슷한 컨셉이긴 한데, 그것보다는 뭔가 더 인간에 대한 애정 같은게 느껴졌다. <마돈나>에는 대기업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과장급 샐러리맨의 5가지 에피소드를 그렸는데, 특히 마지막에 실린 '파티오'라는 단편은 살짝 애잔하기까지 하다.

 

토지개발회사에 근무하는 노부히사는 미나토파크를 상업적으로 활성화시키는 2년짜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데, 항상 그 곳의 파티오라는 뜰에서 독서를 하는 노인에게 눈길이 간다. 부인과 사별하고 고향에서 혼자 텃밭을 가꾸면 사는 자신의 아버지 생각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노부히사는

 

....

 

 

"그런 것이다. 아버지는 불평을할 권리도 없다. 그리고 오효이 씨도. 세상이 이래도 좋은 것인가. 노인에게는 기득권이 있는 것이다. 오래 살아온 인간의, 그곳에 있어도 좋은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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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경의 반론

지행네트워크의 하승우씨와 네 글에 대한 이태경씨의 반론이 오늘 프레시안에 실렸다.

 

"언제까지 반자본·도덕적 엄격주의인가"

 

뒤의 '도덕적 엄격주의'라는 공격은 아마도 내 글을 향하고 있는 듯 하다. 솔직히 나도 지난번 기고가 게재된 이후에 좀 마음이 찝찝하긴 했다. 한나 아렌트의 아이히만에 대한 분석을 인용하면서, 사유는 인간의 '의무'라는 점을 분명히하는데까지는 좋았으나, 뒤에서는 약간 오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인간 이하의 존재'라는 표현을 쓸 필요가 있었을까 싶고... 나는 '인간'이라는 용어를 얼마간 철학적인 개념으로 사용한 건데, 읽는 사람 입장에선 그저 '저 놈은 인간도 아니야'라는 비난성 멘트랑 다를 바 없이 읽힐 수도 있었겠단 생각이 든다. (아, 그리고 나는 별 생각없이 '임직원'을 직원은 빼고 임원만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했는데, 사전적 의미도 그렇고 다른 이들의 글에서도 그렇고, 그 단어에는 삼성의 일반 노동자들도 포함되는 것이었다. 오 마이 미스테이크!!! 혹여나 나의 글을 읽고 불편하셨던 삼성의 노동자들에게는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글쓰기의 세밀함이 부족했던 문제였던 것이고, 그 표현이 단지 세밀함의 부족인지, 진심인지조차 구분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태경씨의 '삐툴어진 사상' 덕분인 듯 하다. 그는 글 말미에서 "실존적인 인간 등에 대한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이해가 진보ㆍ개혁진영에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겨우 내가 지향하는 인간이 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라는 식으로 빠져나가고 만다. 대체 이런 변명이 인간의 실존적 이해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그냥 솔직히 말해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하고 싶은건 아니고? 김용철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에도 그 놈의 "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한 구조본 간부의 이야기가 실렸던 기억이 난다. 다들 그런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하고 산다. 이태경씨는 혹시 '그러니 어쩔 수 없다, 걍 닥치고 살아라'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닌지?

 

언제까지 반자본, 도덕적 엄격주의를 고집할꺼냐고 다그치는데, 오히려 나는 언제까지 그렇게 자기 편한대로만 문제를 선별해서 보고 근본적 문제를 우회하는 '사상적 기회주의'를 고수할거냐고 묻겠다. 사실 어떤 문제가 터졌을 때, 특정 개인을 찝어내어 "저 놈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 만큼 속 편한게 어디있겠나? 그런 면에서 反MB나 反이건희나 다 똑같긴 매한가지다. 무노조 경영과 황제식 경영으로 대표되는 삼성식 글로벌 스탠다드를 이건희가 만들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 군산복합체를 앞세운 전쟁기계 미국이라는 제국은 조지 부시 혼자 만들었나? 조지 부시 물러나고 나니 미국은 좀 살림살이 나아졌나?

 

삼성경제연구소는 괜히 있는게 아니다. 그리고 사회 곳곳에 암약하고 있는 삼성 장학생들도 허수아비는 아니다. 걔들이 이건희가 물러난다고 '좋은 시절은 다 갔구나'하면서 낙향해서 인생을 관조하며 살려고 할까? 정말 꿈같은 얘기일 뿐이다. 이건희의 황제식 경영이 없어지면 삼성은 좋은기업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지배구조의 문제는 얼마간 해결될지 모르겠으나, 삼성이 초일류 그룹으로 성장하려 하면서 빚어낸 '노동'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태경씨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게 뭐 어쨌다구?" 지금까지 그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들만 보면 충분히 예상 가능한 대답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이윤을 위해 노동력을 구매하여 잉여를 수취하는 활동은 지극히 정상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문제될게 없다는 식으로 말한다. 혹여나 그 과정에서 부당한 문제들(이를테면 박지연씨 사례 같은 것)이 발생한다면 그건 부당한 지배구조의 문제일 뿐이다. 결국 노동과 자본과의 관계에선 처음부터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니 결국 그는 하승우의 '자본주의 너머를 꿈꾸자'는 주장도 탐탁치 않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몇 십년동안 시장경제 자본주의를 맹신하던 일본의 경제학자가 최근 경제위기를 계기로 <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라는 제목의 책까지 쓰는 마당에 자본주의 너머를 꿈꾸는게 무슨 쌍팔년도 구닥다리 유품 뒷다리 만지는 것이라도 되는냥 말하는 그의 확신에는, 확실히 21세기 자본주의 변화에 대한 '감각'이 결여되어 있다. 자신의 정세에 대한 둔한 감각 때문에 자기 상상력을 제한하는 거야 말릴 수 없지만, 남이야 자본주의 너머를 꿈꾸든 말든 제발 냅뒀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 웃긴건 "혹시 하 활동가가 자본주의 체제 하의 국가를 마르크스가 말한 "부르주아지들의 일상사를 처리하는 위원회"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라고 하는 부분이다. 그게 왜 염려되는가? 자기 말대로 자본주의 국가는 북구 유럽처럼 국민들의 집합적 의지에 의해 조직될 수 있는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서? 그러면 그건 그냥 생각이 다른거지 염려될 이유가 되지 않는다. 가만 보면 이 양반은 마르크스의 주장과 비슷한 구절만 나와도 경기를 일으키는 것 같다. 부디 그대안의 색깔론을 성찰해 보시길 바라오.

 

게다가 "사익추구집단으로부터 권력을 탈환해 대한민국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들 의무가 있는 진보ㆍ개혁 진영이 반(反)자본주의 혹은 포스트 자본주의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는 한 집권은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여러 말 필요없이 이런 대답이 필요하다. "집권이 그렇게 좋으면 혼자 하세요." 사익추구집단으로부터 권력을 탈환한다고? 이 사람의 권력과 집권에 대한 상상력은 딱 구소련적이다. 그렇게 해서 누군가가 권력을 탈환한다면 그들은 또 다른 사익추구집단일 뿐이다.

 

반론 글을 또 보낼 생각은 없다. 프레시안 지면상에서 이태경씨가 너무 수차례 까여서 좀 불쌍하기도 하고, 지면상에 그의 이름이 수차례 거론되는것도 그닥 좋은 일은 아니란 생각도 든다.

 

끝으로 이태경씨 글에 대한 댓글 중에 완전 공감되는게 있어서 옮겨적는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삼성만한 기업은 수없이 많았고 사라진 기업도 부지기수다. 불매운동과 상관없이 저물어가는 삼성이 보인다. 삼성의 정점은 이미 끝났다. 지금의 서프라이징은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환율조작, 납품가 압박을 통해 국민의 이익, 하청업체의 이익을 갈취한 것에 불과한 것이고 혁신에 의한 결과가 아닌것만 봐도 삼성은 이미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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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뉴얼 월러스틴,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중에서 발췌

 

 

공산주의는 유토피아다. 그것은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구세주의 도래, 그리스도의 재림, 열반과 같은 이 세상의 온갖 종교적 종말론의 화신이다. 그것은 역사적 전망이 아니라, 현재의 신화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회주의는 어느 날엔가 세계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역사적 체제다. 유토피아를 향한 이행과정에서의 하나의 '임시적'기간이라고 주장되는 그같은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직 구체적으로 역사적인 사회주의, 곧 평등과 형평을 극대화하는 하나의 역사적 체제로서 규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특징들을 갖춘 사회주의, 인간 자신의 삶에 대한 인간의 통제(민주주의)를 증대시키고 또 그 상상력을 해방시키는 그러한 사회주의에 대해서만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있다.

- "역사적 자본주의"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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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의 담론이론 : 표상으로부터의 탈주 (요약)

 

미셸 푸코와 담론 이론 : 표상으로부터의 탈주

- 『철학의 탈주』中 5장 (이진경)




1. 맑스주의와 ‘담론’ 개념

- 라클라우/무페 : 담론형성체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담론형성체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 라클라우의 담론형성체 논의에서 푸코가 주요하게 거론되는데, 푸코가 ‘존재하는 것은 오직 담론형성체뿐’이라는 라클라우의 주장에 동의할 것 같지는 않음. 푸코는 오히려 담론 외적인 것을 강조하고 담론 개념 자체에 대해 지속적으로 긴장을 유지함.

- 푸코의 담론 개념이 변화해 간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그리고 그 변화의 의미를 읽어 내는 것이, 차라리 그의 담론 개념을 평면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며 중요하다고 생각함. 이것이 담론 이론의 문제설정을 맑스적인 지반 위에서 다시 사고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는 것.



2. ‘언어학적 전환’과 표상체계 패러다임

- ‘담론’ 개념이 확산되게 된 계기는 ‘언어학적 전환’에 있음. ⇒ ①기호는 자의적이다. ②기호의 의미는 다른 기호들과의 차이에 의해 정의된다. ③의미들을 조직해 내는 언어는 객관적 실체

- 기호학적 관점에서 보면 의미는 더 이상 주관적인 것이 아니며, 기호들간의 관계에 의해, 그것들의 의미작용에 의해 이루어지는 객관적인 것. 이제 주체는 담론 속에 존재하며 담론만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더욱 강한 의미에서 제기될 수 있음.

-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 레비스트로스의 관심사 : 문화라는 말을 정의할 수 있게 해주는 보편적 질서, 혹은 인간의 삶을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해 주는 보편적 규칙의 문제.

┕→ ① 의미의 객관화를 넘어서서 개인이 사회적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의미의 네트워크를 자신의 것으로 함으로써 가능한 것, 즉 주체는 구조의 효과이다. ② 의미가 객관적이라면 그것은 주체가 갖고 있는 의식의 차원을 넘어서, 무의식의 차원에서 연구되어야 함. ③ 어떤 개별적인 사실이나 현상이 뜻하는 바는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정해지며, 중요한 것은 경험적 사실들을 체계화하는 그 본질적 관계를 연역적으로 찾아내는 것. (보편적 질서는 다양한 문화들 내에 존재하는 관계들의 수학적 동형성으로 정의됨)

┕→ 사회관계를 형성하는 보편적 질서는 친족관계를 통해 표현됨 ⇒ 여자의 교환을 통해 형성 ⇒ ‘근친상간 금지’

┕→ 이와 같이 보편성을 갖는 무의식적인 표상체계를 레비스트로스는 ‘야성적 사고’라 부름.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함으로써 정신분석학을 구조언어학과 결합하고자 함.



3. 푸코의 담론 이론


(1) 표상체계로서의 담론

- 푸코에 의하면 담론이란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분할하는 분절의 체계며, 그 위에서 대상을 정의하고 설명하게 하는 규칙의 체계. 즉 ‘말과 사물을 이어 주는 고리’요 ‘사물과 언어를 재단하는 방법’. (『임상의학의 탄생』)

-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정의되고 있는 담론 개념은 대상은 언어적 의미의 고유한 망 속에서 파악되며, 그것을 통해 보이게 되거나 보이지 않게 된다고 보는 점에서 표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을 의미. 이는 정확하게 언어학적 전환의 효과 아래 있는 셈.

- 푸코는 다양한 담론들의 불연속과 단절을 규정하는 인식의 틀 자체의 불연속과 단절을 생각함. 이런 점에서 그 시기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동일한 형태로’ 방향지우는 보편적인 표상체계의 역사를 말함. (『말과 사물』)

- 에피스테메의 분석을 통한 서구 역사의 세 시기 : ①르네상스 시대(사물을 유사성에 의해 질서지우는 시기. 호두를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  ②고전주의 시대(사물을 표상으로 환원하는 사고방식. 동일성과 차이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며, 유사성을 동일성으로 착각해선 안됨. 호두와 두뇌발달의 연관관계는 용납안됨. 분류표(tableau)가 중요해짐.)  ③근대(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실체가 인식의 중심에 자리 잡음. 표상 외부에 있으며 표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실체로서 칸트의 ‘물 자체’, 부의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노동’ 등. 인간중심의 사고)

- 위의 에피스테메들은 각각의 역사적 시기마다 서구인 전체의 사고방식을 기초지우고 있던 일종의 보편적 사고구조, 사고의 심층적 구조.

- 이런 푸코의 작업은 모든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심층구조(‘야성적 사고’)를 찾아내려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작업과 유사. 차이점은 레비스트로스는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심층구조를 가정하고 그것을 도출하려 한 반면, 푸코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상이한 형태를 취한다는 점을 전제. (역사적 구조주의)


(2) 담론을 벗어난 담론 이론

- 1968년 혁명을 거치면서 담론에 대한 문제설정을 변화시킴. 『지식의 고고학』, 『담론의 질서』등.


① 담론의 새로운 정의

- ‘인식을 제한하는 특정한 표상체계’에서 그것이 포괄하는 개인들의 실천을 특정한 형태로 제약하는 조건을 통해 정의. 담론적인 분석이란 이제 “담론들을 기호들의 집합으로 다루지 않고 그들이 말하고 있는 바의 대상들을 체계적으로 형성하는 실천으로서 다루는 작업.

- 정신병리학, 경제학, 생물학, 사회학 각각을 다른 담론과 구별해 주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것들이 어떻나 효과를 지향하는가, 그것이 어떻게 실천을 조직화하는가에 의해 구별.

- 담론은 ‘역사적 아 프리오리’(a priori historique) : 담론적 실천을 특징짓는 규칙의 집합으로서 정의.


② 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것

- 푸코는 이제 실천을 특정한 형태로 형성해 내는 메커니즘을 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것의 연관 속에서 파악. 실천을 형성해 내는 이 관계들이 정의되는 것은 그 내적인 구성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타나도록 해주며 다른 대상과 병치되고 그것들과 관계 속에서 자리 잡도록 해주는 외재성의 장 속에서.

- 담론의 외부는 없으며 모든 것이 담론을 통해 존재한다는, 언어학적 전환의 그늘 아래 있는 명제는 기각됨.

- 담론적인 형성체와 비담론적인 형성체 간의 관계가 파악되는 방식

┕→ 사건의 차원 : 정신병리학이란 담론은 근대 초기에 유럽 전역에 나타났던 ‘거대한 감금’이란 ‘사건’과 무관하지 않으며, 이러한 사건의 효과 아래서 성립. 담론들은 우선 담론적 사건의 집합들로 다루어져야 함. 사건을 통해 담론의 현실적인 형성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사건은 담론적인 것에 대한 비담론적인 것의 효과를 지시.

┕→ 실증성의 차원 : 우리가 참되거나 거짓된 명제를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 있을 대상들의 영역을 구성하는 힘. 정신병동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도 정신병리학이란 담론 안에서 해석되고 그 담론 안에 있는 규칙에 따라 실천이 이루어짐. 그래서 담론적 형성체는 “하나의 담론적 실천을 특성화하는 규칙들의 집합”. 푸코는 이를 그 아에서 이루어지는 어떠한 판단이나 실천의 전제 조건이 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아 프리오리’.


③ 담론적 형성체의 네 가지 차원

- 대상의 형성 : 정신병의 대상은 정신병리학이란 담론 안에서 정의됨.

- 언표 행위 양태의 형성 혹은 말할 수 있는 주체의 형성 : 주체는 담론 안에 마련된 ‘자리’이고, 그 자리에 들어설 수 있는 사람만이 주체가 될 수 있음. 주체의 지배력을 보장해 주는 것은 체계화된 제도와 공간.

- 개념의 형성 : 정신병리학에서 정신분열증이나 그 환자에 대한 서술과 판단은 의사의 개인적 사고가 아니라 정신병리학이 제공하는 개념들로 이루어짐.

- 전략의 형성 : 전략은 “담론의 대상, 주제, 언표 행위의 형성체계가 허용해 주는 담론적 공간 안에서 특정한 목적과 이론적 도구를 통해 새로운 계열의 개념을 형성해 내며, 그 위에서 특정한 형태의 실천을 겨냥하는 것”


(3) 계보학적 전환


①진리 의지를 문제 삼는 것.

- 개개 명제나 담론 내부적 과정에 머물러 있는 한, 어떠한 언표도 진리인가 거짓인가를 두고 평가된다. 각각의 담론은 그것이 진리인가 여부를 가리는 개념이나 규칙을 가지며, 이 규칙에 부합하는 한에서만 언표와 발언은 가능하게 됨.

- 실증주의 경제학에서 노동가치나 잉여가치라는 개념은 실증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용납되지 않으며, 그러한 개념을 근거로 한 임금 계산이나 축적 이론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 진리 의지를 통해 억압과 금지, 배제와 강제가 작용하게 되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진리 의지는 담론을 통해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인 것.


②담론의 사건적 특성을 복구하는 것.

- 담론마다 고유한 형성 규칙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담론의 형성을 지배한다면, 어떠한 담론 내부에서 그것과 단절한 새로운 담론이 탄생하리라고 기대할 순 없을 것. 새로운 담론적 공간의 출현은 담론 외적인 것을 통해서, 즉 담론 내의 담론 외적인 것인 새로운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

- 맑스에게 리카도나 스미스적인 담론을 넘어설 수 있었던 사건은 바로 1848년을 전후해서 전면화된 계급투쟁과 혁명. 이런 사건이 없었다면 맑스의 담론적 혁신도 없었음.

- 담론을 담론적 사건의 집합으로 정의하고 담론의 사건성을 복구한다는 것은 담론적인 것 안에서 작용하는 비담론적인 것의 일차성을 복구한다는 것.(ex: 형법학이나 정신병리학 담론에 대해, 감금하고 처벌하며 감시하고 훈육하는 사건의 일차성.)


③시니피앙의 지고성을 제거하는 것.

- 담론을 담론적 사건의 집합으로 정의하는 것은 그것의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호적 의미체계로 정의하는 것과는 다름. 푸코가 말한 ‘언표의 물질성’은 “언표가 사물 또는 대상의 지위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 이는 라캉에 대한 비판의 효과를 지님. 이 지점에서 그는 ‘표상체계의 패러다임’과 단절. ‘언표의 물질성’ = ‘권력의 물질성’


(4) 표상으로부터의 탈주


- 푸코의 ‘표상으로부터의 탈주’는 담론적인 것과 담론 외적인 것의 복합효과를 사고할 수 있는 계보학적 공간으로 귀착. “우리가 분석의 근거로 마련할 수 있는 것은 언어나 기호라는 빈부한 모델이 아니라 전투나 전쟁 같은 역동적인 모델”



4. 계보학과 담론


▶푸코 담론개념의 네 가지 개념

①불연속성

- 각각의 담론은 서로에 대해 불연속적이며, 자신이 허용할 수 있는 언표나 실천이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음.

- 반면 라클라우/무페의 경우 “접합적 실천에 의해 구조화된 전체”를 담론으로 정의하면서 불연속성보다는 연속성과 개방성을 강조. 그들은 잠정적인 고정점의 역할을 하는 적대를 통해 담론적 실천들간에 적대적 분할이 발생하고, 그것을 축으로 하여 등가적인 접합이 이루어진다고 말함. 라클라우에게 ‘주체’란 푸코처럼 담론의 형성 구칙에 따라 특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접합의 양상에 따라 가변화되는 ‘주체위치’에 불과할 뿐.

- 나아가 그는 인민주의 이데올로기도 담론형성체가 다른 계급의 담론형성체와 어떻게 교차하는가에 따라 혁명적 또는 파시즘적 인민주의가 될 수 있다고 주장. 이로써 담론의 대상과 주체, 개념 및 전략의 불연속성을 통해 실천을 특정한 방식으로 특정화하는 담론의 효과에 대해 사고하려는 문제설정은 ‘우연성’과 ‘개방성’의 논리를 위해 제거됨.


②특정성

- 사물을 특정한 형태로 보게 만들고, 실천을 특정한 형태로 생산해 내는 것을 의미.

- 반면 하버마스는 담론 자체의 ‘이상적인’ 소통 가능성을 전제하며, 단지 그것을 왜곡하는 장애물을 제거함으로써 그러한 상태가 가능하리라고 봄. 그는 푸코와는 달리 담론은 ‘특정성’이 아닌 ‘보편성’을 갖는 것.

- 푸코는 의사소통이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조차도 그것은 담론이 정의한 규칙에 따른 것이며, 합의가 아니라 ‘왜곡’이나 ‘기만’이 담론에 내재적이라고 봄.


③외재성

- 담론이 단지 담론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외부적 조건들을 통해 형성되는 것임.

- 이런 관점으로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데리다의 주장을 비판.


④전복

- 이것은 담론이 갖고 있는 특징이라기보다는 위의 특징을 갖는 담론에 대해 연구하고 분석하는 푸코 자신의 문제설정. 즉 기존의 담론을 전복하고 그것에 의해 은폐되고 억압된 것을 드러내며 그것이 강제하는 실천을 넘어서려는 ‘비판적 문제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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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발췌독

 

 

새로운 역사적 현상에 변증법적 유물론은 제대로 적용되지 못했다. 맑스나 엥겔스는 파시즘을 알지 못했고, 레닌 역시 파시즘에 대한 분석의 시작을 보았을 뿐이었다. 현실에 대한 반동적 파악은 현실의 모순과 실제하는 관계들을 간과했다. 반동적 정치는 발전에 저항하는 사회적 힘을 자동적으로 이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은 반동적인 것이 필연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혁명적 힘을 과학이 남김없이 밝혀내지 못할 때에만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

 

맑스에 의하면, '근본적'이라는 것은 '사물의 근원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의 근원을 이해하여 모순으로 가득 찬 과정을 파악하게 되면, 확실히 반동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만약 개인이 사물의 근원을 이해하지 못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결국 기계론적 사고, 경제주의 또는 형이상학에 빠지게 되고 필연적으로 파멸하게 된다. 따라서 비판은 사회적 실체의 모순이 어디에서 간과되고 있는가를 증명할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고 실천적 가치를 가질수 있다. 맑스의 혁명성은 그의 주장이나 그가 가리킨 혁명의 목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진보시키는 힘으로서 산업 생산력을 인식했다는 점,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을 실제와 일치하게 묘사했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노동자 운동의 실패는 사회 진보를 방해하는 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 즉 중요한 요인들은 여전히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37쪽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심리적 구조를변화시킴으로써 인간 속에 스스로를 재생산해 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더욱 중요하게는 이런 구체적인 변화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모순된 방식으로 행위하는 인간에게서는 활동적 힘, 즉 물질적 권력이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자신이 발원한 경제적 토대에 반작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오직 이런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반작용'은 사회적으로 행위하는 인간의 성격구조가 수행하는 기능형식으로서 이해될 수 있을 때, 그 외관상의 형이상학적/심리학주의적 성격을 상실하게 된다. 반작용 자체는 자연과학적인 성격연구의 대상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가 경제적 토대보다 느리게 변혁된다는 확증이 더 분명해진다.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상응하는 성격구조는 유년기 초기에 근본적으로 형성되며, 기술적 생산력보다 훨씬 더 보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해 심리적 구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이 발원한 사회적 관계의 급속한 발전에 뒤처지게 되며 이후의 삶형태와도 갈등을 빚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전통', 말하자면 과거의 사회 상황과 새로운 상황 사이의 모순이 가진 본질적 특성이다.

- 53-4쪽

 

 

반동적 심리학은 파업이나 절도가 명목상 비합리적인 동기로 인해 일어난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데 이는 언제나 반동적인 설명으로 귀결된다. 사회심리학은 전혀 반대되는 관점에서 문제를 파악한다. 즉 설명되어야 할 것은 배고픈 사람들이 도둑질을 했다거나 착취당한 노동자가 파업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 중 대다수는 왜 파업을 하지 않는가라는 사실이다. 사회경제학은 인간의 행위와 생각이 합리적이고 목표지향적일 경우에, 즉 욕구만족을 향해 움직이고 경제적 상황을 직접적으로 계속해서 반영할 때 사회적 사실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생각과 행위가 경제적 상황과 모순될 경우, 다시 말해 비합리적일 경우 사회경제학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

 

따라서 대중심리학의 문제제기는 즉각적인 사회경제학적 설명이 실패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대중심리학이 사회경제학과 대립하고 있다는 의미인가? 그렇지 않다. 사회경제적 상황과 모순되는 대중들의 비합리적 생각과 행동 자체는 더 오래 전의 사회경제적 상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 55-6쪽

 

 

 

히틀러가 대중심리에 끼친 영향력을 연구하려면 지도자 또는 어떤 이념의 주창자가 지닌 개인적 관점이나 이데올로기 또는 강령은 광범위한 계층에 퍼져 있는 대중들의 평균적 성격구조에 조응해야만(비록 역사적 관점이 아닌 제한된 관점에서만 그렇다 하더라도)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해야 한다. (...)

- 73 쪽

 

 

 

비스마르크는 히틀러의 우상이되었다. 왜냐하면 비스마르크는 독일 민족을 통일시키고 오스트리아 왕조에 대항하여 투쟁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반유태주의자 뤼거와 범게르만주의자 쇠네러가 히틀러의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때부터 그의 계획은 민족주의적-제국주의적 목표에 맞춰졌으며, 그 목표를 예전 '부르주아'민족주의자들이 사용했던 것과는 다른 좀더 교묘한 수단을 사용하여 달성하려 했다. 그가 선택한 수단은 조직화된 맑스주의의 역량에 대한 인식과 모든 정치운동에서 발견되는 대중들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조직화된 맑스주의에 의해 정치적으로 선도된) 국제주의적 세계관이 그와 마찬가지로 통일적으로 조직화되고 인도된 민족적 세계관과 대결하게 된다면, 투쟁의 에너지가 똑같을지라도 성공은 여원한 진실의 편에 머물 것이다.([나의 투쟁], 422쪽)

 

국제주의적 세계관이 서공할 수 있었던 것은 돌격대로 조직화된 정당이 이 세계관을 대표했기 때문이었다. 반대의 세계관이 실패하게 된 것은 그 세계관을 대표할 통일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관점 전반을 해석할 수 있는 무한한 자유가 아니라, 제한되고 통합된 형태의 정치족이 세계관을 싸워 승리하도록 만들어준다. (같은 책, 423쪽)

- 77쪽

 

 

 

따라서 히틀러가 원했던 것은 (그가 공개적으로 시인한 것처럼) 맑스주의와 그것의 대중조직화 기법을 이용하여 민족주의적 제국주의를 관철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대중조직화의 성공은 히틀러가 아니라 대중들에게 달려 있었다. 그의 선동 활동이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간이 권위주의적이고 자유를 두려워하는 성격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학적인 의미에서 히틀러를 이해할 때 중요한 점은 그의 인성이 아니라 그가 대중들로부터 부여받은 의미인 것이다. 더군다난 문제를 더욱 더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대중들의 도움으로 제국주의를 관철하고 싶어했으면서도 그가 대중들을 철저히 경멸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점을 중명하기 위해서 많은 예를 드느 대신에 다음과 같은 하나의 솔직한 고백만으로 충분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대중들의 정서는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여론이 무엇을 주입하느냐에 따라 늘 좌지우지될 뿐이다. (같은 책, 140쪽)

- 79쪽

 

 

 

소시민계층이 이런 위기 속에서 조직적으로 결합할 것을 강요받고 있었던 만큼이나 소기업들간의 경제적 경쟁은 산업노동자들에 필적할 만한 (중산계층간의) 연대감 형성을 가로막고 있었다. 소시민들은 자신이 놓인 사회적 상황의 결과로 자신들의 계층과도, 산업노동자들과도 연대하지 못했다. 소시민들은 자신의 계층과는 경쟁 관계에 있었고, 무산계급화를 가장 두려워했기 때문에 산업노동자들과는 연대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파시스트 운도은 소시민계층의 결속을 실현했다. 어떤 대중심리적 기초에서 이러한 결속이 가능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하층과 중산계층에 속한 국가 관리와 시적 관리의 사횢거 지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평범한 관리의 경제적 지위는 평범한 숙력 산업노동자보다 더 열악했다. 이 열악한 지위는 부분적으로는 출세할 수 있다는 매우 희박한 전망에 의해서 유지되었으며, 국가 관료의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종신 연금으로 벌충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정부의 권위에 종속되어 있었고, 동료에 대해 경쟁적 태도를 취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연대의 발전을 방해했던 것이다. 관리들의 사회의식을 특징짓는 것은 함께 일하는 동료와 공유하는 운명이 아니라 국가 당국과 '민족'에 대한 그들의 태도였다. 이 태도는 국가권력과의 완전한 동일시로 이루어지며, 사무직 노동자의 경우에는 그가 고용되어 있는 회사와의 동일시로 이뤄진다. 그는 산업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종속된 사람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산업노동자와 달리 연대감을 발전시키지 못하는가? 그것은 그가 당국과 육체노동자들의 중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는 상부에 복종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기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국의 대리인이 되기 때문에 특권적인 도덕적 (물질적이 아닌)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중심리적 유형의 완전한 모습을 우리는 여러 군대의 하사관들에게서 발견한다.

- 88-9쪽

 

 

 

농민들이 왜 '토지에 묶여' 있으며 '전통적'인가, 그리고 정치적 반동의 영향을 받기 쉬운가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이와 같은 가족과 경제의 밀접한 얽힘 속에 놓여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토지유착과 전통이 오로지 경제양식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아니라, 농부의 생산방식이 가족 구성원 모두를 포함하는 엄격한 가족적 유대를 필요로 한다는 점, 그리고 이런 유대는 광범위한 성의 억제와 억압을 전제로 한 다는 점이다. 이런 이중적인 토대에 기초하여 가부장적인 성도덕을 핵심으로 하는 전형적인 농민의 사고방식이 생겨난다. 나는 다른 글에서 소련 정부가 농업의 집단화를 시행하면서 겪은 어려움에 대해 서술한 적이 있다. 그런 어려움을 불러일으킨 것은 농민들의 '땅에 대한 사랑'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어려움을 준 것은 본질적으로 땅에 의해 조건지어진 가족적 유대였던 것이다.

- 91쪽

 

 

(히틀러 정권이 1933년 5월 12일 공표한 <농업소유관계의 새 질서>라는 법안과 관련하여)

이 법안에서 나타나고 있는 경향은 무엇인가? 이 법안은 중간규모와 소규모의 농업경제를 흡수하고, 토지 소유자와 재산 없는 농촌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차이를 점점 더 크게 하려는 대농장 소유주의 이해관계와는 모순된다. 그러나 대농장 소유주의 또 다른 강력한 이해관계, 즉 자신이 지닌 권력의 대중적 토대를 형성해 주는 것은 농촌 중산계층이기 때문에 이 계층을 계속 존재케 해야 한다는 이해관계는 이런 모순을 덮어두기에 충분했다. 소규모 토지 소유자와 대규모 토지 소유자가 단지 사적 소유라는 점에서만 동일시된 것은 아니다. 소규모/중간 규모 재산 소유자들이 이데올로기적 분위기, 즉 소규모 경제를 꾸리는 가족 안에 존재하는 분위기를 유지시키지 못한다면 그런 동일시는 별다른 비중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최상의 민족주의 전사들을 배출하고 여성들을 변화시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가담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런 분위기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그 유명한 '도덕을 유지시키는 농민들의 건강한 영향'의 배경이다. 그러나 이 또한 성경제학적인 문제이다.

- 93-4쪽

 

 

 

사회학에 밝지 못한 정신분석학자들이 사회혁명을 '아버지에 대한 유년기적 반항'으로 설명하는 것은 지식인 집단 출신의 혁명가를 염두에 둔 설명이다. 물론 지식인 혁명가의 경우에서는 이런 형편, 즉 아버징 ㅔ대한 유년기적 반항이 실제로 결정적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산업노동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노동계급에서 어린이에 대한 아버지의 억압은 소시민계층의 경우만큼이나 심하다. 아니 사실은 때때로 더 잔인한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두꼐층의 특별한 차이를 그들의 생산양식과 그 생산양식에 따르는 그들의 성에 대한 태도에서 발견한다. 오해를 오하지 않도록 요점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즉 산업노동자의 성 역시 부모에 의해 억압되지만, 산업노동자 계층의 아이들이 겪는 모순이 소시민 계층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시민계층에서 억압되는 것은 단지 성생활뿐이다. 소시민계층에게서 성활동은 오로지 성적 욕국와 성적억압 사이의 모순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산업노동자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산업노동자는 자기가 속한 계층의 도덕주의적 이데올로기와 함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자의 성적 견해을 가지고 있는데, 이 견해는 그들 집단의 도덕주의적 이데올로기와 대치하게 된다. 게다가 그들의 생활 조건과 집단적 존재방식도 ㄱ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들의 도덕주의적 성 이데올로기와 대립한다.

- 111쪽

 

 

 

 

(파시스트 이론가 로젠베르크의 말)

인종의 역사는 자연의 역사이자 영적 시닙주의의 역사이다. 이와는 반대로 혈통 종교의 역사는 민족의 흥망, 민족의 영웅들과 사상가들, 그리고 발명가와 예술가들에 대한 위대한 세계사인 것이다.

 

(...) 이런 신비주의의 정체를 폭로하여 그 근저에 깔려 있는 비합리성을 밝혀내는 대신 그것을 비웃기만 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위해 좋은 일이 아니다. 이런 신비주의에서 가장 비중이 크고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 에너지 과정인데, 이것은 비합리적, 신비주의적으로 파악된 반동적 성이데올로기의 극단적 표현이다. '영혼'과 그것의 '순수성'에 대한 세계관은 바로 성적 무감각의 세계관, 즉 '성적 순수성'의 세계관인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사회에 의해 조건지어진 성의 억압과 성에 대한 수줍음이 외부로 표출된 것이다.

- 135쪽

 

 

 

(성적 존재양식과 성도덕을 둘러싼 모순)

1871년의 독일형법 218조는 '우생학적' 이유로 산모의 생명이 위험하거나, 강간으로 인한 임신이 여성에게 심기가한 사회적 심리저적 문제를 일으킨다고 판단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임신중절을 금지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공산당은 "당신의 몸은 당신 것이다"라는 구호 아래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며 이 조항을 폐기시키려 하고 있었다. 특히 독일 공산당은 원치 않는 임신을 주로 경제적 궁핍과 연결시켰다. "만약 두번째, 세번째 아이가 태어난다면 궁핍이 시작될 것이지만 임금은 오르지 않는다. 산모의 몸에는 굶주릴 작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독일공산당의 이런 주장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으면서도 이듬해 총선에서 '순수한 모성'을 주장하고 있던 나치당에게 표를 몰아주는 모순된 모습을 보여줬다. 여성들은 여전히 모성과 성적인 것이 서로 대립한다는 반동적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이 모순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 168쪽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노동자 계급 출신의 젊은 기독교 대중들은 교회에 대한 공격에 저항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왜 젊은 기독교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교회가 '자본주의적 기능'에 봉사하고 있음을 스스로 보지 못했는가? 그 이유는 명백하다. 교회의 이런 기능이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무엇이든 잘 믿도록, 또한 청년 단체에서 교회의 대표자들이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주장을 폈으며, 따라서 서로 대립하는 공산주의자와 성직자의 사회적 입장이 청년들에게 쉽사리 납득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처음에는 단지 성의 영역에서만 둘 사이의 명확한 구분이 존재하는 듯했다. 즉 공산주의자들은 교회와는 반대로 청소년의 성에 긍정적인 태도로를 취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공산주의 조직들은 이 결정적인 영역을 그대로 묵혀두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청소년의 성을 비난하고 금지하는 데 있어 교화와 같은 입장이라는 것이 곧 밝혀졌다. 청소년의 성에 관해서 항상 냉정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해결하려 한 독일 성정치 조직에 대항하기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조치는 성직 대표자들의 대책 못지 않게 냉혹했다. 공산주의 신념을 지닌 목사이자 정신분석가인 잘킨트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성을 부정하는 부문의 권위자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189쪽

 

 

 

한 청년노동자 단체는 개신교 목사 한 사람을 경제 위기에 관한 토론에 초청했다. 18세부터 25세 사이의 기독교 청년 20여명이 그를 호위하면서 나타났다. 부분적으로 타당한 사실에서 신비주의적 관점으로 도약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현상이지만, 여하튼 그는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했다. 그는 현재의 고통이 전쟁과 영 플랜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세계대전은 인간의 타락, 비열함, 부정, 죄악의 표현이며, 자본주의적 착취 역시 중대한 죄악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전형적인 입장을 통해서 우리는 신비주의자가 스스로 반자본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그런 반자본주의적 감정이 기독교 청년들에게 받아들여졌을 때, 그 영향력을 없애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확실히 볼 수 있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소련의 사회주의 역시 자본주의으 한 형태이며, 자본주의가 어떤 계급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처럼 사회주의 역시 다른 계급에게 불이익을 준다고. 따라서 우리는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를 "발길로 걷어차야" 하며, 볼셰비즘의 종교에 대한 투쟁은 범죄행위이며, 종교는 비참함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잘못은 바로 자본주의가 종교를 오용한 데에 있다고(그 목사는 확실히 진보적이었다).

- 193쪽

 

 

 

(라이히가 직접 기독교인과 소시민계층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대중집회에서 한 발언에서 주요 질문)

 

1. 교회는 피임약의 사용이 자연적인 생식을 방해하는 다른 것들처럼 자연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연이 엄격하고 현명하다면, 왜 자연은 사람들이 아이를 낳고 싶은 만큼만 성교하도록 만들지 않고 일생 동안 평균 2~3천 번 정도의 성교를하도록 성기관을 만들었는가?

2. 여기 참석한 교회 대표자들은 아이를 낳고 싶을 때만 성교한다고 공언할 수 있는가? (이 집회에는 개신교 목사들이 참석했다.)

3. 신은 왜 하나의 성기관에 두 종류의 선, 즉 성흥분을 위한 선과 생식을 위한 선을 만들었는가?

4. 왜 생식기능이 시작되기 훨씬 전인 어린 시절부터 성이 발달하는가?

-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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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경 비판] 이건희와 가신그룹만이 문제인가?

 

[이태경 비판] 이건희와 그의 가신그룹만이 문제인가?



김상봉 교수(이하 존칭 생략)의 제안 글 이후 이어진 기고들에서 쟁점은 주로 소비자운동으로서 ‘불매운동’과 궁극적 운동의 목표로서 ‘삼성해체’, 이 두 가지로 압축되는 듯 하다. 이 중 전자에 대해서는 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듯 하니 굳이 말을 보탤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태경이 주되게 비판하고 있는 후자와 관련한 쟁점이다.(<삼성 해체가 답인가?>, <삼성 임직원 전체를 적으로 돌리지 말라">) 이태경은 삼성해체 주장에 대해 이건희와 그의 가신그룹만 문제 삼으면 될 것을 왜 삼성 전체의 문제로 부당하게 확대시키느냐고 불만을 표한다. 그는 ‘구좌파적 사고’라는 말까지 거론하며 김상봉의 제안을 평가절하하는데, 그러나 그의 ‘세련된’ 주장엔 함정이 너무 많아 보인다.



나쁜 기업은 해체되는게 맞다


나는 처음 김상봉의 삼성 불매운동 제안 글을 보고 그가 바람잡이 노릇을 자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자신의 경향신문 칼럼이 게재되지 못한 것을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삼아 삼성문제를 전 사회적 논쟁의 공간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일단 ‘질렀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김상봉의 의중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나는 그가 ‘삼성해체’라는 말을 논쟁의 멍석을 깔기 위한 일종의 자극적 수사로 이해했다. 그의 글에서도 삼성이 해체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왜 그래야 하는지 근거는 있지만, 삼성을 어떻게 해체시키고 그래서 그 다음엔 어쩌자는 건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니 그의 제안에 대해 “하지만 정작 방법에 대한 문제는 적고, 삼성을 해묵은 비위 사실과 모순에 관한 철학자로서의 성찰이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불평하는 이들도 있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진알시 회원, ‘삼성 불매운동’에 할 말 있다>, 오마이뉴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삼성해체’를 주장하는 김상봉의 글은 단지 논쟁의 출발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정당하다. 우리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위법, 무법, 탈법, 초법적 행태들을 선보인 삼성, 어디로 보나 국내에서 가장 나쁜 기업 삼성은 해체되는 것이 맞다. 이것은 웬만한 기업들에게도 적용되어왔던 ‘관행’이고, 요새 유행하는대로 말하자면 ‘법치주의’에도 부합한다. 삼성이 아니라 다른 소규모 기업들이 이 정도였다면 이미 예전에 임직원들 줄줄이 소환되어 콩밥먹고, 기업은 다른 사람에게 조각조각 팔려져 나갔을 것이다.


이미 국가적 통제를 초월하여 국가위에 군림하게 된 삼성을 정상화시켜 국가와 사회의 통제아래 안착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해체시키는 것이 맞다. 그 이후 삼성의 지배구조를 어떻게 개편할 것이며, 사법권력을 비롯한 국가권력과의 관계를 어떻게 재구성 할지는 해체가 전제된 상황에서 논의되는 것이 옳다. 여기서 사람들이 우려하듯 ‘해체’를 ‘공중분해’라는 식으로 이해할 필요는 전혀 없다. 부당하게 독점된 권력과 자본은 해체되고 분산되어야 한다. 3%의 주식만을 소유하고도 회장 일가가 기업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상황은 이태경씨가 그리도 옹호한 ‘건강한 시장경제’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내 예상으로는 이태경씨가 말하는 ‘강하고 유능하고 정의로운 국가’가 등장한다면 ‘공정한 시장경제’와 ‘법치주의’에 입각해 삼성을 해체시킬 것 같다. ‘기업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 때문이 아니라.



임직원의 침묵도 범죄다


나아가 이태경씨는 삼성문제에 대한 원인과 해결책에 대해 황당한 인식을 갖고 있다. 그는 “국가가 '이건희 일가 및 가신그룹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제 역할을 조금도 하고 있지 못한 현 시점에서 시민들이 '이건희 일가 및 가신그룹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는 소비자 운동(삼성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뿐”이라고 말한다. 왜 삼성의 문제가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의 문제이며, 또 불매운동이 왜 그 문제만을 위한 해결책이 되어버렸는가? 김상봉도 첫 제안글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부각되는 삼성의 문제는 이건희와 그 가신그룹의 비자금과 사법권력과의 유착, 부당한 지배구조의 문제로 드러나겠지만, 실질적인 문제는 오히려 이런 문제를 낳을 수 밖에 없었던 ‘삼성식 글로벌 스탠다드’에 있다. 이건희 회장의 황제식 경영이 ‘CEO리더십’으로 칭송받고, 삼성의 무노조 경영원칙은 온 나라에 ‘노조포비아’를 유포시켰다. 이는 노동자의 무권리 상태를 오히려 당연하게 여기게끔 만들었다. 지금까지 삼성반도체에서 24명이 백혈병이 발병하고, 13명이 사망해도 업무상 재해가 아닌 개인 질병이라고 매도해 이들을 두 번 죽이는 행태를 보였던 것이 삼성이었다. 이 백혈병 노동자의 문제를 고발하고 해결을 위해 일하던 한 노무사는 엉뚱하게도 경찰에 끌려갔다. 나의 누나도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삼성 전기 공장에 취직해 일했는데, 제품 검사 라인에서 주야를 번갈아 가며 일하다가 눈에 이상이 생겨 퇴사했다. 하지만 누나는 돈 잘 주는 회사를 왜 그만뒀냐는 아버지의 질책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우리의 삶과 노동의 한 가운데로 들어와 버린 문제들이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의 문제만 해결하면 되는 정도의 일인가?


또한 그는 삼성 불매운동이 삼성 임직원 전체를 적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쯤 되면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반대 운동이 미국 국민들의 반감을 살 수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는 말처럼 황당하게 들린다. 물론 우리는 삼성 임직원 전체를 매도해서도 안되고, 그럴 이유도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삼성의 임직원이 삼성의 부정한 행위에 대해 인식하고 이에 대해 정당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그 일의 쉽고 어렵고를 떠나서, 인간으로서의 ‘의무’라는 사실이다. 나치 전범재판에 회부된 아이히만을 관찰하면서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에게 사유는 '능력'이 아니라 '의무'이다. ‘직장’에선 유태인 학살을 자행했던 아이히만도 집에 돌아가면 자상한 아버지요, 성실한 남편이었다. 처음부터 나쁜놈은 없다. 다만 그가 사유하고 실천하지 않는 순간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될 뿐이다. 아마도 김용철은 삼성 임직원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 이하의 존재’이기를 거부한 사람, 인간의 의무를 다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또한 2006년에 삼성 사내 게시판에 삼성 직원들을 ‘끓는 물속에 서 잠자는 개구리’라고 비유하며 삼성식 경영을 비판하며 사직한 모 신입사원도 김용철 변호사에 비해 사회적 파장은 작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소중한 실천의 기록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래의 시를 이태경씨와 삼성의 임직원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 김남주의 “어떤 관료” 중에서 -


 

 

(프레시안에 실림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324200059&section=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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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발췌독

 

중요한 것은 지역감정의 정치가 서울로의 초집중화 및 그에 따른 지방의 배제라는 갈등구조에 기인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갈등의 정치적 분획선은 중앙 대 지방의 차원에서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지방 대 지방의 대립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초집중화의 문제를 지역간 갈등으로 환치시킨 힘은 다시 한국민주주의의 보수성에 있다. 정치적 대표체제의 이념적 협애성, 계층적․이념적 기반을 갖지 않는 정당조직, 보수독점적 엘리트 과두체제, 냉전 기득 세력의 강한 헤게모니 등과 같은 정치․사회적 조건에서 정치경쟁은 국가권력의 소유권을 둘러싼 단차원적 갈등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 이때 경쟁의 편을 가르는 구분선은 지연, 학연과 같은 엘리트 구성의 일차적 특성에 따른 것이 되기 마련이다. 사실 지역감정의 대립은 중앙 엘리트 사이의 권력을 둘러싼 경쟁의 산물일 뿐, 그것이 영남과 호남의 지역민이 갖는 문화적 특성이나 어떤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28쪽)



나는 우리 사회 최대의 사회적 균열은 집권당과 반대당 사이의 이른바 여야균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들 사이의 쟁투가 한국사회의 중심적 문제를 둘러싼 이념적․정책적 함의를 갖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누가 보더라도 그것은 국가권력의 장악 그 자체에 몰두하는, 사회의 근본적 이슈와 괴리된 권력투쟁 이상은 아니다. 그 결과는 현 정당체제를 거부하는 유권자가 계속해서 늘어나 선거마다 매번 사상 최저의 투표율을 갱신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2000년 16대 총선에서 상위 세 정당이 전체 유권자로부터 얻은 지지의 크기는 41.7%에 불과한 반면, 비투표자는 42.8%에 이르렀다. 이런 조건에서 선거결과에 따라 어느 당이 여당이 되고 어느 당이 야당이 되고, 또 어느 당이 과반수 의석을 획득하고 어느 당이 집권당이 되었다 한들, 이를 민주주의가 만들어 낸 권위적 결정으로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기는 어렵다. 요컨대 현재 한국정치의 최대 균열은 사회적 기반이 없는 정치적 대표체제와 이에 대표되지 못하는 저항하고 있는 비투표유권자 사이의 균열이다. (34쪽)



최근에는 자주 사용하지 않았지만 나는 해방 이후 국가의 특징을 정의하기 위해 ‘과대성장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한 바 있다. 이것은 원래 파키스탄의 정치경제학자 함자 알라비(H. Alavi)가 탈식민사회의 국가를 분석하는 데  사용했던 개념이다. 그것은 식민통치를 위해 제국주의 국가의 잘 발달된 국가기구가 식민지 사회에 이식된 결과, 독립 이후에도 경제적 토대나 사회적 기반보다 과도하게 강한 국가가 지배적인 역할을 하게 되엇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해방공간에서 냉전의 전개와 이데올로기적 양극화, 분단국가의 수립 괴정에서 사회가 탈동원화되는 과정은 과거 식민지 국가기구의 역할이 다시 복원되는 과대성장국가의 출현과 맞물리게 된다. (45쪽)



토크빌은 혁명이 귀족제의 질서를 파괴함과 동시에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중간적 매개고리를 해체함으로써 개인을 무규범적 존재로 원자화시킨 것이 국가관료체제의 강화를 가져왔다고 보았다. 이와는 달리 한국의 중앙집중화는 정치에 대한 대중 또는 민중참여의 채널들이 협소화되거나 봉쇄된 엘리트 중심 지배체제의 결과물이다. 좌우 이념 갈등이 뒤이은 냉전반공주의의 확립은 이념적 획일주의와 더불어 사회의 모든 자원을 독점배분하는 국가구료체제를 강화했고, 그것이 보다 강력한 중앙집중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넓은 이념적 지평에서 서로 다른 엘리트간 경쟁이 불가능하게 되고, 앞에서 동심원적 구조라고 말했던 극도로 단순화되고 동질적인 엘리트 구조가 강화된다. 소수의 엘리트가 중심이 되어 위로부터 국가건설이 초진된 결과 필연적으로 권력의 집중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요컨대 과대성장국가는 곧 중앙집중화된 관료국가제체의 다른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50쪽)



(...) 결국 한국의 정당체제는 분단국가를 만들었던 두 중심 세력인 이승만 그룹과 한민당(뒤에 민국당, 민주당으로 변화)이 공화국 수립 이후 서로 대립적인 경쟁자가 되는, 즉 정치적 노동분업을 통해 경쟁관계로 들어가는 것에 그 기원을 갖는다. 그리고 이 두 그룹만이 정당체제를 주조하게 됨으로써 한국의 정당체제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게 되었다. 첫째, 여야당은 이념적으로 동일한 지평 위에서 경쟁한다. 둘째, 양당은 밑으로부터의 대중적 이익이나 요구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지도자와 그를 둘러싼 엘리트 중심적 성격이 강하다. 셋째, 사회의 계층적․직능적․직업적 이익들은 그들 스스로의 조직화를 통한 방식으로는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한다. 넷째, 그러면서 여야당을 막론하고 사회 전체, 국가 전체, 민족 전체의 대의와 이익을 내세움으로써 포괄정당적 성격을 갖는다. (52쪽)



사태를 세자리즘으로 발전하도록 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이승만 세자리즘의 가장 강력한 형성 요인은 냉전이었다. 좌우 이데올로기의 극한 대립과 전쟁의 경험, 그리고 남북한간의 항구적인 준전시상태는 북한의 위협이 결코 허구적이고 상상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 되도록 했다. 이러한 상황은 대통령에게 많은 권력자원을 가질 수 있도록 했고, 대통령은 자신의 권력을 권위주의화 하기 위한 정당화의 근거로 활용했다. 권력을 갖는 정치 지도자에게 그것은 엄청난 자원이 아닐 수 없었다. 정치에 있어 갈등과 경쟁은 권위주의 저권에 의해 이내 남북한간의 대결로 치환될 수 있었기 때문에 쉽게 억압되었다. 사실상 국내 정치는 정치적 대안을 둘러싼 정당간 경쟁이 아니라, 북한과의 생사투쟁에서 유리한 입지를 만들기 위한 갈등해소와 통합의 과정으로 축소되었다. 야당이 ‘충성스런 야당’의 범위를 벗어날 때 그것은 야당이 아니라 휴전선을 가로질러 친북적인 어떤 것을 대변하는 것으로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채색되었다. 이것이 반대파에 대한 정치적 탄압의 메커니즘이다. 거기에는 수없이 많은 사례들이 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과 1958년 ‘진보당 사건’은 가장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으며, 1952년의 이른바 ‘발췌개헌’이나, 1954년 이른바 ‘4사5입개헌’ 등도 모두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담론의 동원을 통해 정당화하려 했다. (55-6쪽)



박정희 정권은 그것이 의도하지 않았던 두 가지 방법으로, 즉 하나는 그것이 만들어 낸 성공의 결과로 다른 하나는 그 실패의 결과로 민주화에 기여했다. 성공의 결과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산업화 없이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1960~70년대를 통하여 발전하고 팽창한 시민사회가 1980년대 들어와 폭발하면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민주주의를 향한 요구가 밑으로부터 분출했다. 사회는 서구사회와 같이 높은 수준의 산업화와 도시화를 이루었고, 그 속에서 사회의 기능적․직능적 분화가 가속화되고 중산층이 엄청나게 팽창하였으며, 노동자, 농민과 같은 사회저변의 대중층이 성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구조를 갖는 사회에서 권위주의는 더 이상 그 존립 기반을 찾을 수 없다. 그것이 실패의 결과라는 뜻은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권위주의를 편 결과 1950년대와는 판이하게 강력한 민주화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체제에 반대하는 시민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민중세력의 저항이 없었더라면 유신체제의 붕괴는 훨씬 뒤로 미루어졌을 것이다. 마침내 민주주의를 가져온 1980년대 강력한 민주화의 힘은 이를 모태로 한 것이다. (88쪽)


==> 완전 개소린데??




이러한 체제가 가져온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은 권위주의 집권당이 야당보다 더 개혁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에서 그러한데, 여당과 야당은 다같이 광범위한 사회적 기반 위에 위치하고 있지 못하고, 대중정당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명사정당과 같은 엘리트 정당적 성격이 크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당은 집권 정부로서 많든 적든 국민의 지지와 정치적 안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국민적 요구에 일정하게 부응해야 할 인센티브를 갖는다. 이것은 집권 엘리트들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의 동인이다. 다른 한편 야당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제약과 조직구조의 전근대성으로 인하여 사회경제적 요구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지지를 동원하고자 하는 의지도 능력도 인센티브로 갖지 않았다. 이미 분단국가의 건설자들은 스스로 정치적 경쟁의 틀을 협애한 이념적 공간 내에 가두었고, 갈등과 균열을 표현할 수 있는 정치언어와 담론의 범위를 최소한으로 축소했다. 좌우의 극한적 이데올로기 갈등이 가라앉았을 때, 당시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던 ‘인민’이라든가, ‘계급’이나 ‘노동자’라는 말은 공산주의자들의 언어인 것처럼 인식됨으로써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정당이 사회 갈등을 표출하고 대변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다. 결국, 야당은 오로지 권력독점을 비판하는 민주주의의 원칙과 가치를 강조하면서 민주주의 세력임을 자임하는 것으로 임무와 역할을 다했던 것이다.

1950년 4월 이승만 정부 시기에 수행된 토지개혁만큼 이러한 현상이 분명히 드러난 예는 없을 것이다. 지주의 이익을 일차적으로 대변했던 한민당․민국당은 최초로 토지개혁을 시도했던 미군정 시기부터 그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이들은 미군정 시기에는 개혁저지에 성공했으나 이승만 정부에서는 실패했다. 권위주의하에서 여야당의 역할에 대해 보통 사람들은 여당이 보수적이고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야당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는 그 반대였다. 이러한 1950년대의 양상은 박정희 정부에서도 되풀이 되었다.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중앙집중적인 관료적 정당구조를 갖고 그 조직구조에 있어 근대적이었으며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던 동안, 야당인 신민당은 당내계파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 명사정당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가장 보수적인 정치 엘리트 그룹이 제도권 내에서 민주주의의 대변자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운동에 의한 민주화의 계기마다 제도권 밖의 강력한 개혁 그룹과 제도권 내의 강력한 보수 그룹이 동맹하는 역설적 블록이 형성되곤 했다. (105-6쪽)


 

나는 일찍이 한국의 지역문제는 지역 대 지역, 예컨대 전라도 대 경상도하는 식의 지역간의 감정적 대립을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닌, ‘호남문제’라고 정의한 바 있다. 즉, 지역문제를 지역간 감정의 대립으로 인식하는 것은 허위의식, 곧 이데올로기라고 강조해 왔다. 지역문제의 본질인 호남문제는 그 원인을 이루는 세 가지 구성 요소를 갖는다. 하나는 유신체제에서 국가와 민간부문의 엘리트 충원에 있어서의 호남배제, 둘째는 지역소외를 해소해 줄 지도자로서의 김대중씨와 호남민 사이의 강한 정서적 유대의 형성, 셋째는 광주항쟁으로 인한 억압의 집단적 경험이 그것이다. 선거에서 지역간 경쟁의 구도는, 1987년 민주화와 더불어 선거공간이 개방되었을 때 야당과 민주화운동이 단일 전선으로 통합되는 것을 제어하고 분열시키기 위한 권위주의 세력의 사회적 동원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 (...)

샤츠슈나이더는 정치적 갈등축이 여러 가지의 대안을 중심으로 선택적으로 형성될 수 있으며, 기존의 정당체제는 여러 대안들 가운데서 다른 것들이 억제되고 특정의 갈등축이 선택된 결과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특정의 정당체제는 두드러진 갈등축이 되도록 선택된 것과 억제된 것이 짝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세트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한국의 지역정당체제는 민주적 개방과 더불어 대중동원이 필요했을 때, 다른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것처럼 정치 갈등의 영역을 전국적으로 최대화하는 계층적․직능적․기능적 이익과 균열을 따라 대중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기존 구정당체제의 틀 속에서 지역을 수직적으로 분획함으로써 국지화된 갈등축을 따라 대중을 동원한 결과인 것이다. 이것이 한국의 정당체제가 지역정당체제라는 특성을 갖게된 까닭이다. 이러한 정당체제는 샤츠슈나이더가 말한 대로 일반 대중의 이익보다는 엘리트의 이해관계에 크게 유리한 ‘편향성의 동원’(mobilization)을 제도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07쪽)



(222-230쪽)


한국민주주의의 이념적 기반으로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 민주주의의 세 가지 전통 : 직접민주주의, 공화주의, 자유주의

- 민주주의라는 제도와 원리 자체가 서구적인 것인 한,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원류적 이념이 약한 것이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은 부인 할 수 없음. 반면 우리사회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적 전통이 약함. ⇒ 민주주의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이념이 됨.


① 자유주의

- 냉전반공주의 세력 : 자유민주주의 왜곡

- 사회운동 세력 : 낭만적 민주주의 또는 사회주의 추구. 냉전반공주의의 거울이미지.

  ⇒ 자유주의는 보수세력에 의해 왜곡되고, 민주세력에 의해 버려진 존재.

- 반면 시장자유주의는 우리 사회를 장악해버림.

- 자유주의 일반을 이사야 벌린이 이야기하는 ‘소극적 자유’로만 보는 것은 잘못. 자유주의를 통해 개개인의 내면적 정신세계를 갖추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중요한 지점.


②공화주의

- 공화주의는 공송선에 대한 헌신, 공적 결정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와 모든 시민이 공동체로부터 배제되지 않고 권리와 혜택을 누리는 시민권의 원리, 시민적 덕에 대한 강조를 핵심으로 함. (논리전개의 방향은 자유주의와 역순)

- 한국적 공화주의의 두 가지 원천 : 1)헌법 제1조(그러나 이는 헌법경시적 정치환경에 의해 주목받지 못함) 2)60년대 이래 민주주의 운동의 경험(민중의 아래로부터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 추구. 로맨티시즘, 집단주의적 충동, 도덕주의 등)

- 민주주의 운동에서 연원하는 한국적 공화주의의 문제점 : 급진적, 도덕적, 폐쇄적인 측면. 강력한 권위주의하에서의 운동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 자유주의의 기반을 갖지 않음으로써 과도한 이념성이 운동권의 지적 분위기 지배.

  ⇒ 자기희생적 변혁에 복무하는 ‘총제적 인간’을 추구. 그것은 민주주의하에서 자율적인 자기정체성을 형성하기 쉽지 않음. 오히려 총체적 인간보다 ‘부분적인 인간’, 즉 민주적 정치과정에 적극적이되 자신의 자율적 가치와 내면세계를 가지면서 자신의 분야에서 실천하는 민주적 시민이 되는 것이 바람직.


▶▷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는 단지 민주주의 그 자체에만 의존하고 있을 뿐. 오히려 권위주의와 접맥되었던 냉전반공주의, 온정주의와 가부장주의, 관료주의 시장근본주의 등 민주주의의 기반을 잠식하는 여러 형태의 사회적 힘, 조류들과 대면하고 있는 상황. ⇒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킴에 있어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도움을 받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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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크>를 보고

애쉬님의 [클로즈업이 우리에게 남긴 것] 에 관련된 글.
 

 

 

 

 

한 주 내내 정신이 산만하고 손에 잡히는 일도 딱히 없고 해서, 거의 몇 달 째 미루고 있던 영화관람을 실행에 옮겼다. 사실 내 이번달 주머니 사정상 영화 보는게 쉬운일은 절대 아니었지만, 꿀꿀한 마음을 진정시키려면 어쩔 수 없었다.

 

대전아트시네마는 조용하고 분위가 좋은 것은 참 매력적이지만, 상영관 안이 너무 추운게 단점이다. 카운터에 있던 직원이 무릎을 덮을 담요를 가져가라고 했을 때 부터 좀 불안하긴 했는데, 담요를 두 개를 가져갔음에도 두 시간 내내 벌벌 떨었다. 근데 상영관 뒷 편에 보니 대형 히터가 있긴 있는데, 나를 포함해 4명의 관람자가 있는 곳 까지는 전혀 열기가 오질 않는 거였다. 그래서 결국 난 맨 뒷자리로 옮겨 앉아야 했다.

 

뭐 그건 그렇고... 내가 워낙 영화의 카메라 기법, 장면 구성에 대한 이해능력이 딸려서 스토리 전개가 좀 이상하게 구성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숀 펜 주연의 <밀크>는 확실히 인상깊은 영화다. 하루가 지나고 생각해 보니 나의 인상깊음은 나름대로 나의 현재 상황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40세의 보험회사 직원 하비 밀크는 홀연 모든 것을 버리고 동성 애인과 샌프란시스코로 떠난다. 그리고 그 곳에서 게이 인권운동에 몸을 던진다. 그는 8년간의 시간동안 여러 동성 애인을 만났고, 게이를 위한 상점 '카스트로'에서 수많은 동성 친구들을 만든다.

 

무엇이 40세의 보험맨의 삶을 이렇게 바꾼 것일까? 그저 그의 성 정체성이 그렇게 움직이게 했다는 설명은 충분한 것일까? 나이 40이면 사실 사회의 편견과 매너리즘을 인이 박일 정도로 체화시키고도 남을 나이다.

 

내 나이는 27세. 약 7개월 뒤면 나는 행정안전부 소속이 아닌 완벽한 무소속으로 던져지게 된다. 그래서 난 요즘 그 7개월 뒤에 대한 주판알 튕기기로 바쁘다.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아무리 빡세게 산다 해도 월100만원은 받아야 대충은 먹고 살텐데..."

"아무래도 여기서 계속 부모님하고 사는건 힘들텐데, 그럼 어디에 집을 얻어야 방세를 조금이라도 덜 낼까?"

 

뭐 대충 이딴 것들. 나이 스물일곱의 청년도 이런 고민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사는데, 저 중년의 남성은 무슨 생각으로....ㅠ.ㅠ

 

음, 그리고 이건 딴 얘긴데, 이 영화를 보면서 최근 선거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하비 밀크의 출마는 전형적인 현장의 힘을 통한 제도권 진출이다. 그의 공직 진출은 게이 인권운동 그 자체였고, 시의원 활동도 게이 인권운동을 빼고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 딴건 둘째치고 진보진영에서 교육감 선거를 준비하신다는 분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좀 황당하다. 특히 서울의 경우, 이미 출마선언을 한 4명의 진보후보들이 있는데, 이들이 소위 '이름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중량감'있는 후보를 땡겨오려고 후보 물색을 했단다. 그래서 만났다는 사람들이 안경환 전 인권위원장,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이다. 허허~ 참, 그 사람들의 성향은 둘째치고 이런 경력의 사람들이 교육감을 한다는 건 쫌 웃기지 않나? 어쨌든 이번 지방선거, 모두들 '하비 밀크'처럼만 해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도 그냥 잡소리만 늘어놨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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