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29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12/21
    베른하르트 슐링크, <더 리더>
    구르는돌
  2. 2009/12/18
    김상곤 교육감(2)(1)
    구르는돌
  3. 2009/12/17
    김상곤 교육감(2)
    구르는돌
  4. 2009/12/16
    하승우,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3)
    구르는돌
  5. 2009/12/14
    학생회 운동 (2)(2)
    구르는돌
  6. 2009/12/11
    중앙대 교지 만화(5)
    구르는돌
  7. 2009/12/08
    <불교가 좋다> 발췌독 (가와이 하야오, 나카자와 신이치 공저)
    구르는돌
  8. 2009/11/27
    홍기빈 강연회 후기(2)
    구르는돌
  9. 2009/11/24
    친북인명사전?(3)
    구르는돌
  10. 2009/11/22
    순환에 대하여
    구르는돌

베른하르트 슐링크, <더 리더>

나는 두 눈을 내게 고정시킨 채 벤치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으며,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서 수영장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그때마다 나는 자꾸만 내가 그녀를 배반하였으며 그녀에게 죄를 지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그런 느낌에 대해서 분연히 저항하면서 그녀를 비난하고 또 자신의 죄에서 빠져나오는 그녀의 방식을 너무 천박하고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했다. 죽은 자들에게만 해명을 요구할 권리를 주고, 죄와 보상을 불면증과 악몽에다 국한시킨다면, 살아 있는 자들의 자리는 어디인가? 그러나 내가 여기서 염두에 둔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나 여기 그녀에게 해명을 요구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213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김상곤 교육감(2)

새벽길님의 [진보교육감 되기] 에 관련된 글.
 

 

 

새벽길님의 생각과 저의 생각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한 약간 미묘한 데가 있네요. 어제 새벽길님의 글을 보고 바로 답글을 쓰려다가 머릿속이 꼬여서 접어버리고 말았는데, 샤워하면서 생각해 보니 할 말이 생각나서 몇 자 더 적어봅니다.

 

두 가지 지점에서 얘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새벽길님은 무상급식이 별로 급진적인 사안이 되지 못하고 있다 하셨는데, 그 이유가 오직 민주당 때문인가요?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저는 김상곤 교육감이 오히려 잘 하고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김상곤 뿐만 아니라 모든 진보운동에 해당되는 얘기일텐데, 민주당과 함께하는 것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쟁점에 끌려다니는게 문제죠. 그들이 만들어 놓은 쟁점에 억지로 끌려다닌 때는 정말 한 두번이 아니었는데, 4대개혁입법, 노무현 탄핵, 세종시 모두 그런 예일테고 그 속에서 진보운동은 울며 겨자먹기로(?) 민주당 편이 될 수 밖에 없었죠. 그런 면에서 무상급식은 그 자체로는 매우 바람직한 쟁점이고 이를 통해 민주당을 '묶어' 놓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전술적으로도 옳다고 보여집니다.

 

노회찬 대표가 요즘 언론을 통해서 계속 '민주대연합 할꺼냐 말꺼냐'라는 되도 않는 질문에 대해 '조건부'로 가능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그 조건부라는 것이 바로 이렇게 '우리가 만든 쟁점'에 대해 동의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노회찬이 이야기하는 바가 민주당의 현실적인 힘을 회피하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포지션이란 생각이 드네요.

 

물론 무상급식으로 일점돌파하겠다고 마음먹고 일제고사 같은 다른 문제를 버리고 간다고 생각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요.

 

두 번째 문제, 김상곤 교육감이 자신의 포지션을 경영전문가에 맞추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저도 우려스러운 지점입니다. 그런데 제가 의문스러운 지점은 그가 선거 당시부터 신문광고에 '경영전문가'라는 점을 대문짝만하게 광고하고 다녔는데 왜 이게 선본 내부적으로 전혀 제어가 안되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 선본에서 민주당 세력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영향때문에 교원평가 같은 것에 애매한 입장을 내놓는 것이 방치되는 것이라면, 좌파의 입장에서 이 선거는 '이기고도 진' 것이 아닐까요?

 

진보진영도 열심히 노력해서 만든 선거 승리, 왜 이렇게 죽쒀서 남주는 결과가 되도록 만들었는지 그게 답답한 겁니다. 따지고보면 경기도 교육 수장을 '진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사람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유시민이 서울시장되는 것보다 더 파괴력이 큰 일일 수 있는데, 왠지 임기가 끝날때까지 공수표로 날려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저 같은 사람은 그게 누구 책임인지를 따지기 이전에, 선거에 당선된 사람은 어떤 세력의 지원을 받아던지간에 관료가 되어버리고 마는 구조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문스러웠고, 사실상 문제의 해결을 그런 '기술관료적 지배구조 타파'에서 찾아야 하는게 아닌가 생각했던 겁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김상곤 교육감

<나는 김상곤 교육감이 싫다> (김진, 참세상, 09/12/08)

 

<김상곤 교육감, 최소한 이것만은 하라> (김태균, 참세상, 09/12/10)

 

 

참세상에 김상곤 교육감을 비판하는 기사가 두개나 올라왔다. 그저 힘들겠거니, 앞으로는 잘  하겠거니 생각하고 있어서 그닥 관심을 두고 있진 않았는데, 기사를 읽어보니 문제가 심각한가보다. 주요 언론에는 경기도 의회와 대결을 벌이고 있는 무상급식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고, 실제 김상곤 교육감 스스로도 그 문제가 자신이 해결할 제 1의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김진, 김태균님이 지적한 문제들이 앞으로 그의 발목을 잡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뭔가 개운치 않다. 이들의 말대로 시국선언, 일제고사, 비정규직 유치원 노동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김상곤 교육감이 싫을 수 있고, 그가 다음번에 교육감 선거에 또 출마하고자 한다면 최소한 이런 문제들만큼은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김 교육감이 따금하게 받아들여야 할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하기에 좀 망설여 진다.

 

(내가 요즘 시국에 대해서 블로그를 통해 쓰는 글들이 모두 그렇지만) 난 그저 이렇게 뉴스를 통해 접하는 내용만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해당 사안에 대해 매일매일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시는 분들의 생각에 이런저런 코멘트를 달 만한 자격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외부자'라는 나의 위치를 인정한 선에서 할 수 있는 말들을 풀어보려 한다.

 

나는 김상곤 교육감을 두둔할 생각이 전혀 없다. 다른 건 둘째치고 비정규직 유치원 노동자들이 항의방문 하자 그들과 면담하여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찾기보다는 경찰의 손에 넘어가게 했다는 점은 당췌 용서가 안되는 점이다. 시국선언, 일제고사 같이 전국적인 규모의 쟁점에 대해서는 이명박 정부의 공갈협박 때문에 주춤한다 변명하더라도 이건 뭐 어떻게 빠져나갈 구멍이 없질 않나?

 

하지만 나는 '무상급식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이명박 정권의 전면에 맞서는 민감한 사안들은 피해가면서 여론전에 도움이 되는 사업을 중심으로 자신의 이미지 상승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김진님의 말은 좀 갸우뚱 거려진다. 비교하자면 무상급식 문제는 노무현의 4대개혁입법처럼 본질에서 벗어난 포퓰리즘적 선동이고 본질은 '시국선언, 일제고사'라는 얘기인데, 나는 무상급식 문제가 이렇게 과소평가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라고 본다. 김상곤 교육감의 그간 행적 전반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 무상급식 문제만 놓고 보자면, 이를 교육청 안으로 가느냐 도의회 안으로 가느냐는 단순한 교육예산사용방향에 대한 결정의 문제를 넘어서서 앞으로 복지정책의 방향을 선별주의로 갈 것이냐 보편주의로 갈 것이냐 하는 핵심적인 문제다.

 

김대중-노무현 10년 동안의 성과로 기초생활보장법과 같은 공공부조의 도입을 크게 선전하고 다니던데,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놓은 이런 정책들은 기본적으로 선별주의였다. 김상곤 교육감이 요즘 역설하고 있는 것처럼 이는 수급자에게 '가난'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이었다. 만약에 경기도에서 무상급식이 실시된다면 이런 낙인찍기 일색이었던 복지정책의 프레임이 바뀌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놓고 뭐는 본질이고 뭐는 여론전이고를 갈라놓는게 합당한 태도일까?

 

또 하나는 소위 '진보교육감' 혼자서 그 많은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게 올바른 생각일까 하는 점이다. 김상곤과 도민의 관계는 최고경영자와 투자자의 관계가 아니다. 우리가 종잣돈 모아왔으니 니 능력껏 10배로 불려와라, 못하면 다 니 책임이다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사실상 우리가 그를 '진보교육감'으로 뽑아놨다면 말이다. 실제로 경기도 교육감 선거가 그렇게 진행되었다. 보수정당 국회의원 선거하듯 당에서 공천주면 만사오케이고 애들 과외비 벌기 위해 모인 아줌마들 선거운동원 시켜서 율동시키는 그런 선거가 아니었다(고 언론을 통해 들었다). 시민단체, 학부모단체들이 선거운동과정에서부터 함께 해 온 것이라면 당선 이후도 같이 해야 한다. 그보다는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표현이 맞겠다.

 

언제까지 진보가 행정기관에 청원하고 읍소하고 압박하고 점거하고 농성하는 집단일 수는 없다. 진보정당들이 원하는 집권을 하려면 더더욱이나 말이다. 그런 면에서 당선 전에는 득표 전쟁을 치루는 것이라면, 당선 이후에는 교육 관료들과 전쟁을 치뤄야 한다. 나는 지금 대한민국 정부를 이명박이 지배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행정부 고위직을 장악한 기술관료들이 지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경기도 교육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실제 김상곤 취임 초에 벌어졌던 교육청 관료들의 행태를 생각해 봐도 그들의 힘은 상당하다. 물론 도의회 의원들처럼 선거로 밥줄이 결정되는 사람들은 아니기 때문에 교육감을 고꾸라 뜨리려고 애쓰지 않았을 뿐...

 

내가 안타까운 점은 사실상 이런 교육관료들과 전쟁을 치르는데 필요한 노동, 시민운동계의 활동이 교육감의 정책적 활동과 전혀 연결되지 않은 것 같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기존의 관료들의 행태를 답습한 교육감의 책임이 가장 크겠지만, 얼마간 운동적 힘을 통해 탄생시킨 교육감마저 관료로 전락시킨 이 구조 자체가 더 한탄스러운 뿐이다. 

 

난 김상곤 교육감이 어떻게 활동해 왔는지 김진, 김태균님 만큼 잘 모른다. 그래서 일제고사 시행, 시국선언 교사 징계가 얼마만큼 김상곤 교육감의 의지가 반영된 결정이었는지 잘 모른다.(그의 의지가 덜 반영된 것이길 믿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영혼없는 관료'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편인 줄로만 알았던 교육감 개인에 대한 배신감을 표출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뀔 것이 없지 않을까?

 

"그러니 교육감에게 더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하지 않으련다. 진보교육감이 계속해서 진보교육감일 수 있으려면 같은 편으로부터 날라오는 비판과 공격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를 향해 날라오는 피케팅을 관료의 힘을 빌어 눌러버리지 않고 이들과 (원래 그랬듯이) 더 열린 자세로 토론하고 '함께' 정책을 만들어 나가길 기대해 본다. 그런 면에서 김상곤이 더욱 더 '포퓰리스트'가 되었으면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하승우,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

 

사실 난 아나키즘에 별로 관심이 없다. 예전 학교 다닐때 다른학교에 나보다 한 학번 낮은 친구가 자기는 고등학교때부터 아나키즘에 관심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 나는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까지 아나키즘의 '아'자도 몰랐는데... 신기한 녀석일세..."라고 생각했다. 여하간에 아나키즘은 이런 분야의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겐 뭔가 큰 매력을 안겨주는 것임에는 틀림 없나 보다.

 

'아나키즘의 과학적 토대를 마련한 고전'이라는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해설한 이 책은 그럼 왜 읽었냐 하면, 사실 별 다른 이유는 없다. 나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면 다 못 읽을것을 뻔히 알면서도 절대 1,2권씩 안 빌린다. 무조건 최대 대출할 수 있는 3권을 맞춰서 빌려온다. 이것도 거의 30분 정도 뭘 빌려올까 고민하다가 고른 책이다.

 

저자인 하승우는 지행네트워크(http://jihaeng.net)의 일원이기도 하다. 또 다른 지행네트워크의 일원인 이명원씨의 글들이 참 좋다고 생각하곤 있었는데, 하승우의 글은 이 책이 처음이다. 그런데 첫 만남에 첫인상이 좀 별로다. -_-;;

 

이 책의 유일한 장점은 쉽게 쓰여졌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전혀 집중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서 복근운동 한답시고 다리를 수직으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짓을 하면서 읽었는데, 그래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크게 무리는 없었다. 중간중간에 곁들여진 사진도 볼만했고...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너무 아전인수격으로 보이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주로 설명한 바와 같이, 제1인터내셔널 시기에 아나키스트들 대립했던 맑스주의자들을 제외하고 사회주의자들 중에 훌륭하다고 이름난 사람들을 죄다 아나키스트라고 묶어버리는 듯 하다. 내가 아나키즘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실제 그들이 아나키스트인지 아닌지 따질 형편은 안되지만, 저자 말대로 그들이 모두 아나키스트라고 하더라도 그 처럼 단일집단으로 묶어버릴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가 소개한 아나키스트들 중에는 테러리스트도 있고, 평화주의자도 있고, 생태주의자도 있는데, 이들이 모두 아나키스트라는 울타리 안에서 얼마나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또한 볼셰비키를 악마화하는 식의 논의도 좀 눈쌀을 지푸리게 한다. 저자는 볼셰비키의 만행과 비민주성을 폭로하는데 치중한 나머지, 아나키즘이 이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었던 약점들에 대해서는 어물쩡 넘어가는 듯 하다. 내가 구체적인 사례를 아는게 없어서 딱히 반론을 구체적으로는 못하겠지만, 아나키즘의 약점이라고 할 만한 단서들이 이 책에서도 몇 군데 보인다. 그것은 바로 신간회를 통해 민족주의자들과 야합(?)하려 했던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중국의 한인 아나키스들의 조직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의 강령이다.(193-4쪽)

 

1. 일체 조직은 자유연합조직원리에 기초할 것.

2. 일체 정치운동을 반대할 것.

3. 운동은 오직 직접 방법으로 할 것.

4. 미래사회는 사회 만반이 다 자유연합의 원칙에 근거할 것이므로, 정치적 당파 이외의 각 독립운동 단체 및 혁명운동 단체 와 전우적 관계를 지속 존중할 것.

5. 국가 폐지

6. 일체 집단적 조직을 소멸할 것.

7. 사유재산을 철폐하고 공산주의를 실행하되 산업적 집중을 폐하고 공업과 농업의 병합, 즉 산업의 지방적 분산을 실행할 것.

8. 종교, 결혼제도, 가족제도 폐지.

 

 위 내용에서 2번, 6번, 8번은 한편으로는 황당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순진하다는 생각 밖에 안든다. 정치운동을 반대한다면 전체 사회에 별 영향을 못 끼칠 소규모-자족적 협동조합 활동이나 (협동조합 자체가 자족적인 활동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의 폭발력은 더 광범위 할 수 있는데, 정치운동에 대해 거부감을 잔뜩 안고 활동하면 자기들 스스로 그렇게 한계지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기껏해야 몇몇 부르주아 인물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테러활동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일체 집단적 조직을 소멸한다면 그들이 말하는 아나코-코뮨적 공동체는 조직이 아니란 말인가? 위계적 조직과 수평적 조직의 경계는 무엇인가?

 

마지막 종교, 결혼제도, 가족제도를 폐지한다는 주장은... 음... 여기서 저자도 인용한 홉스봄의 말이 참 적절하단 생각이 든다. "부르주아지에게 충격을 주는 일이 그들을 타도하기보다는 쉬운 것이다." 종교, 결혼, 가족을 폐지하자는 말이 부르주아지에게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막히며 충격적인 언사겠는가? 그러나 그런 '말'로 그들을 타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 순진한 발상이지 않는가?

 

막판에 가서는 광주항쟁까지 아나코-코뮨주의의 실현이라고 말하는 부분에 가서는 정말 아무거나 막 갖다 대는구나 싶었다. 

 

그린비에서 나온 책 중 내가 읽어본 것은 왠만큼 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정말 별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학생회 운동 (2)

구르는돌님의 [학생회 운동] 에 관련된 글.

 

 

 

 

대학 총학생회 선거가 난장판인가보다. 한겨레21에서 기획기사로 서울대 선거를 집중 분석까지 한 것을 보면.... 뭐 서울대 만의 문제는 아니고 이대, 서강대, 성균관대 등등이 꽤나 질펀한 선거를 하고 있나보다.

 

내가 작년에 졸업한 명륜동의 저 학교의 사례도 서울대 감청사건만 아니었다면 그야말로 전국구 대박감인데, 서울대의 이름값과 사건의 경악성에 밀린 것이 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비권선본 두개가 나와서 경선이라는데,

알고보니 그 중 학교쪽이랑 더 친한 선본의 인사캠 총학생회장 후보가

내가 2학년때 갔던 새터에서 같은 조 새내기였다. ㅋㅋㅋㅋ

그 자식 새터 첫날부터 "나는 비권 총학생회가 좋아요"와 "저는 박정희를 존경합니다"

를 외쳤던 놈인데... 그리고 자기는 꼭 총학생회장이 될 거라는 말도 했었다.

물론 우여곡절 재선거까지 가는 과정에서 결국 낙선하긴 했지만 ^-^;;

 

(아, 혹여나 잘 모르시는 분을 위해 말씀드리자면 이 학교는 캠퍼스가 서울 명륜동과 수원 율전동 두 군데로 나뉘어져 있는데 총학생회 선거는 각 캠퍼스당 총/부총 후보 두 명씩, 즉 4인 1조로 출마해야 한다. 그래서 한 캠퍼스에 총-부총 후보가 있어도 다른 캠퍼스에 메이트가 없으면 출마가 불가능한 것이다.) 

 

내가 듣기로 그 학교에서 2년 연속 선거 파행사태가 계속되었고,

그 발단이 모두 자과캠 쪽의 성폭력 사건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또 들리는 바에 의하면 올 해 사건은 사실상 '강간' 수준이라던데....

 

그 때문에 해당 선본(이하 A선본이라 함)은 선본자격을 박탈당했는데, 사실상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살아남은 다른 쪽 선본(이하 B선본이라 함)도 만만치 않은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B선본원 중 한명이 A선본을 사칭하여 A선본이 선본옷 등을 거래한 업체에 전화해 거래내역이 담긴 입출금 내역서를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A선본의 학교측과의 커넥션을 밝혀내려고 했단다. (영화 좀 그만봐라 자식아!!) 하지만 이상하게 여긴 업체 사장님이 A선본에 이 사실을 꼬발러서 다 들통났고 B선본도 선본 자격 박탈.

 

이쯤되면 상식적인 대가리를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다음 수순으로 선거 무효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 엽기적인 자식들이 12월 재선거를 공표하고 후보 추천등록을 다시 받는다는 거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A,B 이외에 다른 선본이 나오는건 불가능하다. 결국 A,B에게 다시 기회를 주겠다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A,B 선본은 날림으로 추천을 받아 다시 등록했고 (A는 성폭력 가해자였던 후보를 다른사람으로 갈아치우고) 지난주에 투표가 끝나서 B선본이 당선되었단다.

 

*       *       *

 

자, 그럼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학생회 선거는 민주주의 장이고, 학생회를 통해 학생자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 놈이야말로 세상물정 모르는 80년대 퇴물 취급을 받지 않을까? 자격을 박탈당한 선본들이 선본이름, 후보 한명 갈아치워서 뻔뻔스럽게 다시 나오는 판국에, 선거는 민의의 실현을 위한 장이 아니라 뽑아줄테까지 나올테니까 할테면 해보라는 식의 협박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또 졸업까지 한 마당에 이 학교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이 사건과 관련된 중앙운영위원회 속기록을 봤는데, 거기 모여 앉은 학생대표자라는 자식들의 생각도 딱 그 수준이었다. "새터가야 한다, 축제준비해야 한다. 총학없이 할 수 있냐? 어찌되었든 총학은 뽑고 보자. 3월되면 바빠서 못한다." 전형적인 관료, 테크노라트들의 사고방식이었다. (물론 몇몇 일부는 그런 생각에 반대했지만)

 

총학이 새터를 위해서, 축제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좀 더 쿨하게 생각해 보는게 어떤가? 어차피 그런 일은 여행 및 공연 기획사가 더 잘한다. 총학생회 사무실을 그런 회사에게 아예 임대를 해 주고 1년 내내 그 회사가 알아서 행사 준비하라고 시키면 어떤가? 그럼 학교는 1년내내 연예인들 공연으로 들썩들썩 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 광장을 소녀시대, 원더걸스 전용 콘서트홀로 만들 수도 있다. 어때 괜찮지? ^^;;

 

등록금 협상도 해야 한다고? 어차피 등록금 투쟁이 아니라 협상을 할거라면 학생들이 하는 것 보다 전문적인 공인회계사에게 맡기는게 백번 낫다. 나도 2006년에 등록금 투쟁(?)할때 관련 예산표를 본 적이 있는데, 나이많은 NL선배들이 와서 몇 날 며칠 표 분석 내용 설명해 주고 그랬는데 진심으로 '하나도' 못알아 들었다. 그렇다고 그 NL선배들은 잘 알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 선배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유인물로 만들어 뿌렸는데, 며칠 뒤 그 내용을 반박하는 유인물을 (학교측의 지원을 받는) 반권 총학생회가 냈는데, 그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대응을 못했었다. 왜? 모르니까...

 

그러니까 학생회 업무를 전부 다 아웃소싱 하라는 거다. 그러면 쓸데없이 부정선거, 진흙탕선거 라는 얘기 들을 것도 없고 투표율 50%넘기려고 학우들 붙잡고 귀찮게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운동권 학생이든 비권학생이든 선거운동 하느라 시험공부도 못해서 학고맞아 집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지 않아도 된다. 어때 괜찮지? 국가 행정업무도 사실상 기업체에 아웃소싱하는 마당에 학생회 쯤이야...

 

 *        *        *

 

예전 포스트에서도 언급하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운동하는 친구들이 총학생회 선거에 나가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총학생회가 무슨 지역사회복지관 쯤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운동권이 아무리 급진적인 구호를 내걸고 출마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혹여나 이 '게임의 룰'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방식으로 뛰어드는 거라면 모를까....

 

이를테면 복지공약 하나도 만들지 말고 출마를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걸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거다. "우리는 복지공약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학생회에 대한 대중적 인식과 하나하나 대결 하는 거다. 물론 당선가능성과는 크게 멀어질 테지만, 뭐 어떤가? 이래 지나 저래 지나 어차피 지는거 할말은 제대로 하고 지는게 낫지 않나?

 

내가 지금은 당사자가 아니라고 너무 막 질러대나? 음... 그건 아닌것 같다. 예전에도 총학생회 선거 준비할 때 나는 "이번 선거 목표는 '지는 선거'로 가자"라고 말했다고 바로 뻰치 먹은 적이 있다. 현실적인 역관계에서 운동권이 열세일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이기려고 용쓰다보면 하지말아야 할 짓을 너무 많이 하게 될 테고, 그렇게 해서 혹시나 이긴다고 해봤자 득될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음... 나의 이런 생각은 지난 12일 경향신문에 실린 한윤형씨의 칼럼 내용과도 어느정도 비슷한 것 같다. 그의 말대로 총학생회가 허수아비라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래에 퍼왔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경향신문(09. 12. 12) [2030콘서트]‘허수아비’ 대학 총학생회 

대학가에서 가을은 총학생회 선거의 계절이다. 올해는 유난히 총학 선거에 대한 생각을 물어본 지인이 많았다. 개표 전 ‘투표함 개봉’과 ‘도청’을 통한 비리 폭로로 파행으로 치달은 서울대 총학 선거를 비롯해 우려스러운 모습이 많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기성 정치권 못잖은 ‘꼬마 정치인’들의 진흙탕 싸움? 어떻게 해도 투표를 하지 않는 대학생들의 정치적 무관심? 어느 쪽을 택하든 씁쓸함은 남는다. 우스갯소리로 운동권이 총학을 잡으면 자기네 정치조직으로 돈이 흘러가고, 비(운동)권이 총학을 잡으면 학생회장과 그 측근들의 주머니로 돈이 흘러간다고 한다. 이 말에 약간이라도 진실이 있다면 어느 쪽이든 학생의 대표자로서 제 역할을 하는 총학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이런 실정이므로 학생들이 총학 선거에 무심해지고, 그 무심함의 장막 뒤편에서 총학이란 조직에 배정된 빵부스러기를 주워 먹기 위한 난장판이 벌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 아닐까.

오늘날의 대학은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하기 위한 ‘해방구’도 아니고, 진학률 86% 시대의 대학생을 특권층이라 칭하는 것도 부질없다. 대학생의 위상이 낮아지면서 이들을 예비노동자라 부르는 이도 나타났지만, 지금은 이조차 사치스럽다. ‘예비’라는 글자를 떼어내기 위해 젊은이들이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이제 대학생은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에서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는 없고, 다만 자신의 삶이 정치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시대에 던져진 2000년대 초반의 운동권 정파들은 등록금 인상 저지 투쟁을 주장해서 학우들의 신망을 얻어 총학을 잡고, 총학을 잡은 이후엔 자기네 정치조직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했다. 학생들을 위하는 ‘복지공약’과 제 이념을 실현하는 ‘정치투쟁’의 이분법 속에서 등록금 문제가 그 자체로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셈이다.

하지만 설령 그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총학은 대학 당국에 대해 얼마나 무력한 조직인가? 가장 강경한 정파가 가장 강경하게 투쟁했을 때도 등록금 투쟁은 실패로 끝나곤 했다.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몇몇만 희생양이 되면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총학 선거가 복마전이 되는 이유는 총학이 학생들에게 참여를 독려할 만큼의 권력은 지니지 못했으되, 선거에서 승리한 몇몇 학생들에겐 충분히 보상을 해줄 수 있는 수준의 조직이 되어버렸기 때문 아닐까? ‘시민 없는 시민운동’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듯이, ‘학생 없는 학생회’에 대해 얘기해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는 ‘꼬마 정치꾼들’과 ‘선거에 무관심한 대학생들’에 대한 규탄보다 훨씬 본질적인 문제다.

총학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회복되지 않는 이상, 학생들이 총학 선거에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을 것 같다. 한편 학생들의 열렬한 참여 없이는 대학 당국이 총학에 더 큰 권력을 배분하는 일 따위는 생기지 않을 거다. 이 딜레마 속에서 총학은 대학 당국과 학생들 사이에 어떠한 소통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허울 좋은 들러리가 되고 말았다. 총학에 대한 고민은, 이렇게 그것이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진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한윤형 | 대학생·자유기고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중앙대 교지 만화

총장을 비판한 만화라고 수거조치 당했단다.

우아 근데, 요 만화 그린 친구 센스가 장난이 아니다.

감상평을 한마디로 쓰라면 "이거 참, 씁쓸하구만" 이지만, 어쨌든 훌륭한 만화다.

이거 보시는 분들은 인터넷 여기저기에 퍼나르심이 어떠신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불교가 좋다> 발췌독 (가와이 하야오, 나카자와 신이치 공저)

(16-21쪽에서 발췌)

 

 

크리스트교에 대한 위화감

 

나카자와 : 저는 [성서]는 무척 좋아합니다. 예수에 대해서도,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인 갈릴리 시대의 예수는 매우 좋아합니다. 그 당시 예수는 거의 '불교'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사상을 아름다운 말로 표현했지요. 하지만 십자가는 실어합니다. 물론 예수도 싫어했겠지만요. 대중의 어리석은 기대에 휩쓸리고 만 예수가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중은 그 모습이 보고 싶어서 기대에 부응해 일을 추진하려 했을 뿐이지요. 그러나 그 체험은 트라우마가 되어 침잠하고 말았죠. 그리고 거기서 종교가 발생한 셈입니다. 저는 외상성 신경증에서 발생하는 종교는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갈릴리 호반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을 때의 예수는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 감동은 붓다가 설법할 때의 광경을 방불케 하죠. 붓다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평범하게 죽어갔지요. 배탈이 나서 죽었으니,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셈이지만 붓다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듭니다.

 

가와이 : 나도 그런 점을 좋아해요.

 

나카자와 : 불교의 어떤 점에 관심이 있었는가 하면, 선생님께서 조금 전에 '풍토'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역시 그것과 관계가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전에도 선생님께 말씀드렸을지 모르지만 저는 처음에 원숭이학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원숭이학자가 원숭이들에 둘러싸여 있는 사진에서 묘한 감동을 느낀 적이 있었지요. 인간과 동물 사이에 거의 거리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둘의 관계가 대칭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지요. 붓다가 깨달음을 얻을 때도 설법을 할 때도 반드시 동물들이 붓다 주의로 모여들지 않습니까?

 

가와이 : 네 그렇지요.

 

나카자와 : 열반에 들었을 때도 제자들보다 더 많은 수의 동물들이 찾아와서 슬퍼하죠. 불교 주위에서는 항상 이런 대칭 관계가 전면에 나옵니다. 인간과 동물이 대칭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동화적 혹은 신화적인 광경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역사적으로 종교는 인간과 신 사이에 어떻게 하면 엄청난 비대칭의 관계를 형성할 것인지에 전력을 쏟아왔는데, 오로지 불교만이 대규모의 종교이면서도 대칭적 관계를 중시해왔죠. 물론 유대교나 이슬람교, 크리스트교도 신 앞에서의 인간의 평등을 말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신과 인간 사이의 엄청난 비대칭을 전제로 한 평등인 셈입니다.

 

가와이 : 절대적이죠.

 

나카자와 : 예수가 받은 십자가형의 의미도 이 절대적인 비대칭을 전제로 하고 있죠. 유대교에서는 신과 인간 사이의 비대칭이 거의 절대적이어서, 명령을 받을 뿐 상호간에 사랑의 교류 같은 것이 발생할 여지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크리스트교에서는 예수가 스스로 희생함으로써, 사랑의 유동流動이 일어날 수 있는 회로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가와이 : 그렇군요.

 

 

일신교가 형성하는 인간과 신의 비대칭적 관계

 

(...)

 

나카자와 : (...) 그것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종교가 고대국가의 동반자로 탄생해서 국가의 개념에 필요한 엄청난 비대칭을 가장 중요시해왔던 셈인데, 그런 종교의 역사를초월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가 국가를 초월하는 것이 종교의 미래 과제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대칭성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겠지요.

 

가와이 : 그렇지요.

 

나카자와 : 조셉 캠벨이 미래의 종교는 불교에 접근하게 될 거라고 한 말도 이 점과 관계가 있지 않을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대담을 9.11테러 직후인 지금 시작하려고 하신 걸 보면, 선생님께서는 그런 것을 이미 의식하신 게 아닌가요? 미국과 이슬람 원리주의의 관계, 그것은 압도적인 비대칭의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죠.

 

가와이 : 그런 셈이죠.

 

나카자와 : 미국은 군사력, 정치력, 경제력에서 압도적인 힘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은 매우 가난합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이런 압도적인 비대칭 관계가 이번 테러의 원인 중 하나인 셈이죠.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트교는 자신의 몸을 희생해서 제물로 바치는 듯한 행동으 취할지도 모르지만, 이슬람은 그것을 부정하겠지요. 테러와 희생의 사상은 매우 비슷합니다. 둘다 비대칭을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3-7쪽 발췌)

 

 

종교와 과학의 접점

 

(...)

 

나카자와 : (...) 저 역시 과학과 종교를 매개하는 장소에 설 수 있는 것이 불교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가능합니다. 왜 불교가 그런 역할을 할수 있는가하면, 불교는 '야생의 사고'에서 발달한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과학이라고도 할수 있으니까요. '야생의 사고'와 과학은 본질적으로는 대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아니 대립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이제까지 과학이 이룩한 성과를 전부 준비한 것이 바로 '야생의 사고'인 셈입니다. 부싯돌을 가공하는 신석기인들의 사고와, 연구실에서 최신 실험기구를 가지고 실험하는 현대 과학자의 사고는 결국은 똑같은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지요. 고고학에서 밝혔듯이, 약 3만 년 전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대뇌 구조는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서구의 현대과학만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발달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인간이 본래 갖고 있는 과학이나 기술 능력과, 현대과학으로서 비정상적일 정도로 발달한 것 사이에는 어떤 다른 요소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바로 그 다른 요소가 그리스나 크리스트교와 관련이 잇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크리스트교적인 어떤 요소가 개입되지 않았다면 과학기술은 현대와 같이 급속도로 발전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인 거죠.

 

가와이 :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자주 거론되는 이야기지만, 근대과학은 유럽에서 발달했다기보다 크리스트교 문화권에서만 발생했죠. 중국의 역사와 문명을 연구한 니담이 말했듯이, 지식은 중국인들도 많이 갖고 있었죠. 하지만 지금의 기술과 연결되는 과학기술은 특별히 크리스트교 문화권에서만 발생한 셈이지요. 이것은 이제까지 우리가 이야기해왔듯이, 크리스트교 문화권의 신은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라는 점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겁니다. 말하자면 신을 대신해서 인간이 자연에 대해 '모든 걸 내가 한다.'라는 사고가 탄생한 셈이 아닐까요?

 

나카자와 : 그렇지요. 본래 동물이나 자연은 신이었으니까요. 그러니 틀림없을 겁니다. 구석기 시대의 유적을 봐도, 곰이 신이었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이누어로도 '카무이'는 곰이며, 인간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 즉 신과 동일한 단어로 표현되었지요. 곰이 신이었던 시대의 신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서의 신이 아니었을 겁니다.

 

가와이 : 그렇겠죠.

 

나카자와 : 숲 속에 살면서 가을에는 강에서 인간과 똑같이 연어를 잡기도 하죠. 때로는 인간에게 곰의 고기와 털가죽을 가져다주는 친절한 '할아버지' 입니다. 이 곰 안에 처음부터 깃들어 있던 '초월성의 씨앗'이 어느 틈엔간 성장하고 거대해지면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죠. 그 씨앗은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요? 제 직감으로는 그 비밀은 샤머니즘 안에 있는 듯 합니다.

 

가와이 : 그건 어째서죠?

 

나카자와 : 아직 이것은 단순한 직감일 뿐입니다만, 어떤 미개사회에선 샤머니즘 과 야생의 사고는 공존하고 있습니다. 신화의 논리에 의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행위와, 초월적인 영역과의 시도하는 샤머니즘은 완전한 공새관계에 있는 셈이죠. 그런데 어느 시기가 되자 갑자기 야생의 사고가 미치는 영향력이 축소도기고 샤머니즘이 확대되기에 이릅니다. 이런 변화는 아무래도 국가라는 문제하고도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샤머니즘에 의한 패권의 확대는 아시아의 고대국가에서 최초로 발달했지요.

 

가와이 : 그렇군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이슬람교와 샤머니즘의 관계

 

나카자와 : (...) 실제로 평소에는 상인이었던 모하메드도 그야말로 소박한 성격의 파트타임 샤먼과 같은 면을 갖고 있지요. 그렇게 소박했던 이슬람교가 고도의 종교로 성장하게 된 때는 13세기 즉 몽골제국과 격돌했던 시기입니다. 이때를 경계로 이슬람교는 소박한 종교로서의 성격에서 탈피하는데, 묘하게도 같은 시기에 전세계에서 종교사상의 혁명적인 비약이 일어나죠. 일본에서도 몽골제국과 접촉하면서 그 영향으로 가마쿠라신불교가 나타났지요.

 

가와이 : 그거 재미있는 지적이군요,

 

나카자와 : 가마쿠라신불교의 내부에서 정토진종과 같은 일신교에 가까운 종교가 탄생한 셈입니다. 그와 비슷한 현상이 전세계에서 일어났죠. 티베트 불교도 이때 비약적으로 진화했습니다. 유럽에서도 크리스트교 신학이 경이적으로 발달하죠. 그 때까지 아랍 세계의 사람들은 그리스철학을 번역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는데, 몽골제국과 충돌한 이후 자신들의 신학을 만들어냈던 겁니다. 놀라울 정도로 수준 높은 것을 만들기 시작했지요. '알라'가 '진여'와 거의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관념의 세계로 올라간 것도 이 시기의 일이라고 이즈쓰 선생님은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몽골제국의 종교란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하면, 국가적 규모의 거대한 샤머니즘이었지요. 실제로 몽골제국이 석권한 지역에서는 야생의 사고 낳은 결과라는 의미의 신화는 거의 전멸 상태였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2-6쪽 발췌)

 

 

불교는 어떻게 해서 탄생했나?

 

(...)

 

나카자와 : 불교가 어떻게 탄생했는가에 대한 일본이늬 연구 중에서는 미야자카 유쇼 선생님의 [불교의 기원]이 매우 선구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요. 불교는 마가다 왕국이라는 고대 제국의 외곽에서 탄생하여 제국을 안에서부터 부정하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위의 책에 따르면, 붓다가 최초로 만든 불교 교단 '상가Samgha'는 본래 붓다의 출신 부족 즉 사카족의 거주지인 히말라야 산록지대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왔던, 수장을 중심으로 하는 부족의 성격을 띤 원原국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절대로 거대한 죽가는 이루지 않는 공동체의 원리를 복원하려 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 미야자카 선생님의 생각이죠. 불교를 제국 안에서 제국을 부정하는 사회 원리를 만들고자 하는 운동으로 생각한 거죠.

 

가와이 : 과연 미야자카 선생님답군요.

 

나카자와 : 붓다는 "나 이전에 일곱 명의 붓다가 있었다."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작은 부족국가의 전통 속에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지혜있는 사카족 사람들이 자기 이전에도 일곱 명이나 있었다는 거죠. 그러니까 자신은 전혀 새로운 설법을 한 것이 아니라 그런 붓다들 중의 하나라는 겁니다.

붓다라는 인물이 그런 사상을 갖고 갠지스 강가로 갔더니 거기에는 마가다 왕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있었습니다. 이 국가를 통해 그는 제국이라는 것이 지혜를 해체하고 여러 모로 균형을 깨뜨리고 있는 현실을 보았지요. 제국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여러 종류의 철학도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도철학 가운데 그 어느 것을 봐도 모두 어떤 식으로든 제국원리와 공범 관계에 있다는 걸 발견했지요. 따라서 해체되어가는 지혜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이 철학은 아니라는 사실을 붓다는 깨달았지요. 철학은 단지 세계를 해석하고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해석의 철학을 부정하고 그것들을 전부 초월한 실천의 형태를 만들고자 했지요. 법(法, Dharma)에 대한 새로운 이해도 상가의 사회 원리도 그런 도전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가와이 : 제국주의와 전혀 관련이 없는 종교죠.

 

나카자와 : 제국의 내부에 존재하고 젝국도 붓다의 가르침을 비호했지만, 제국의 원리를 안에서부터 해체해간 셈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탈구축脫構築의 원리에 의한 '종교가 아닌 종교', '지혜로서의 비종교'가 만들어진 거라고 할 수 있죠. 붓다는 그런 식으로 종교 아닌 종교를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아까 선생님께서 과학기술의 세계 안에서 살고 있으면서 과학기술과는 다른 지혜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은 불교가 아닐까?'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바로 그런 것을 붓다가 하고자 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와이 : 그건 어떤 의미죠?

 

나카자와 : 사카라는 작은 왕국은 얼마 후에 마가다 왕국에 의해 멸망당하죠. 작은 부족왕국은 전부 멸망하고 맙니다. 그런 미래를 붓다는 전부 예견하고 있었지요 .실제로 눈앞에서 사카왕국은 정복당한 셈이지만, 그는 그럼으로 해서 야생의 지혜를 가진 부족국가의 사상을 사장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제국의 세력이 확대해가는 세계 속에서 지혜의 지속을 실현하고자 했지요.

이제 현대에 있어서 불교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붓다와 똑같은 삶이나 전략을 다시 한 번 실현하고자 한다면, 불교는 일신교적이며 초국가적인 거대제국이 막강한 세력을 휘두르고 글로벌 스탠더드가 세계를 정복해가는 이 세계 안에서, 그런 것은 인간 정신의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고 그 속에서 지혜가 생명력을 갖도록 하는 방법으로서 거듭나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36-8쪽에서 발췌)

 

 

화폐와 신은 닮은 꼴

 

가와이 : 어떤 유럽 사람에게 제가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당신들은 솔직히 단 한번으로 끝난 부활을 진심으로 믿지는 않지요? 지금 우리가 흉내 내고 있는 개인주의나 온갖 물질적인 것이 크리스트교를 배경으로 해서 성립한 것이라고 할 수 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믿지 않는다면, 당신이 믿는 건 뭔가요?" 그랬더니 그가 "돈입니다."라고 진지하게 대답하더군요. 그럴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돈은 안심입명의 경지에 이르게 하지는 못합니다.

 

나카자와 : 그 말씀을 들으니 화폐는 신과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가와이 : 그렇지요. 돈만큼 보편적인 것이 없을 겁니다. 어쩌면 지금 지구 전체에 군림하고 있는 주체는 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카자와 : 그냥 돈이 아니라 돈 '님' 이죠.

 

가와이 : 게다가 이 정도로 달러가 유통된다는 것은 곧 달러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는 걸 의미하지요. 돈은 가장 신뢰할 수 있으며 강력한 힘을 가진 것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머지 않아 모두가 깨닫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이 상태로는 안심입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죠.

 

나카자와 : 신과 돈의 유사점을 든다면, 둘 다 영원을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신은 영원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은 변화하고 소멸해가지만 신은 영원하죠. 인간이 왜 화폐를 만들어냈을가요? 가치를 가진 것이 파괴도고 풍화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가와이 : 그렇군요.

 

나카자와 : 그래서 그것을 금화로 만들었던 겁니다. 금화는 잘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런 금화의 가치를 갖고 다니면 일단 발생한 가치는 소멸되지 않으며 축적도 운반도 가능하다는 생각에서 화폐를 만든 거죠. 신과 화폐 둘 다 부패하지 않으며, 소멸되지 않고, 해체되지 않느다는 조건을 갖추고 있죠. 결국 크리스트교의 신이라는 것은 이처럼 영원한 신이며, 그런 생각을 저속하게 표현한 형태가 바로 화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와이 : 그것이 저속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죠.

 

나카자와 : 화폐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그리스의 미다스왕은 "화폐(황금)은 대지를 죽일 것이다."라고 하며 화를 냈다고 합니다.

 

가와이 : 옳은 말입니다. 화폐는 대지를 죽이지요.

 

나카자와 : 대지가 죽은 후에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거의 영구적으로 지속되는 것, 보존 가능한 것, 운반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크리스트교의 신과 화폐가 무척 닮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에 비해서 불교는 '모든 것은 소멸한다.'라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영원 자체에 대해 말하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이 세계에는 없다고 하죠. 그것은 열반(니르바나), 번뇌가 없는 상태, 즉 '죽음'이므로 이승에서의 행복에 집착하는 사람은 가고 싶어하지 않는 곳이지요.

 

가와이 : 그렇죠.

 

 나카자와 : 이 세계 안으로 영원을 끌어들이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가와이 : 불가능하죠.

 

나카자와 : 그런데 크리스트교는 영원을 끌어들인 셈입니다.

 

가와이 :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죠.

 

나카자와 : 착각이지요. 하지만 그 결과 유럽에서는 수학이 발달할 수 있었죠. '무한' 이라는 생각을 발달시킨 것은 크리스트교가 발달한 서구입니다. 그 이전에는 무한은, 이 세계에는 들어오지 않는 것으로 혹은 이 세계로는 끌어들일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 세계에 화폐라는 것이 만들어지면서 그야말로 아인한 형태로 무한이라는 것이 들어오고 말았죠. 돈은 점점 늘려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곧 행복양의 증대를 의미한다는 생각이 생겨나죠. 따라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요즘 같은 세상에는 화폐나 금이 곧 신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 되었습니다. 다만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 신이지만요.

 

가와이 : 그렇지요. 우릭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의 안심은 가져다주지 않죠.

 

나카자와 :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안심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그런 생명체가 주위의 세계와 다른 아주 작은 부분을 만들어놓고, 거기서 어떻게든 지속해보라고 하는 것이 생명이라고 하는 셈이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 탄생한, 우주 속의 외딴 섬과도 같은 자신이라는 존재에 집착하는 한, 생명은 행복해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의학에서는 어떤 식인가요? 일단 태어난 개체를 어떻게든 연명해가기 위해 외부의 악영향을 배제하지요. 또 내부에 암세포와 같은 형태로 이상즉식이 시작되면 어떤 수로든 그것을 제거해서, 태어난 개체를 가능한 한 오랜 시간 지키려고 애쓰지요. 그러고는 그것이 행복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그야말로 화폐에 대한 사고 와 똑같다고 할 수 있지 않나요?

 

가와이 : '즉정 가능한 것을 어떻게든 가능한 한 많이, 가능한 한 오래'라는 식으로 생각하니까요.

 

나카자와 : 마음속에 불교가 자리잡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아무래도 행복이 아닌 것 같군.' 하고 생각하게 되지요. 그런 점에 대해 철학자나 종교가들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가와이 : 옳은 말이에요. 나도 그런 걸 생각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껴 여러 모로 시도는 해보고 있지만, 상당히 어렵더군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홍기빈 강연회 후기

어제 대전시민아카데미에서 홍기빈씨를 모시고 강연을 한다기에 가봤다.

주제가 "홍기빈과 함께 읽는 폴라니"였는데,

그의 책은 재미있게 읽은 것도 좀 많고, 폴라니에 대해서 언론 상에서 유행처럼 하는 얘기 말고

좀 더 영양가 있는 얘기가 있을까 싶어 가보게 되었다.

 

물론 워낙 대중강연의 형태를 띤 것이어서

엄청 새로운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최근의 경제상황과 돈벌이=경제로 통용되는 세간의 경제관념에 대해

일상적인 예들로 고정관념을 깨주는 정도의 강연이었다.

그런만큼 사람들의 호응도 좋은 그런 강연이었다.

 

그러나 강연에서 했던 그런 얘기들은 사실 그가 쓴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만 봐도 다 알 수 있는 내용이라

나의 관심사와는 좀 벗어나 있었다. 그래서 질의응답 시간에 나는

좀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봤다.

 

"최근에 폴라니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유지를 따르겠다는 사람들도 폴라니를 읽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보고 좀 뜨악했는데, 그동안 한미FTA 등 노무현 정부의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홍기빈 선생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폴라니 독해에 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 질문에 대해 홍기빈은 "내가 무슨 가톨릭 교황도, 폴라니 대변인도 아닌데 그 사람들이 폴라니 읽는다는데 뭐라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하며 질문 자체를 좀 어이없게 생각한 듯 했다. 사실 나는 더 직접적으로 "친노신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라고 묻고 싶었지만 강연 주제가 폴라니이고 하니 약간의 우회로를 선택한 것이어서 그런 반응을 그냥 덤덤히 받아들였다.

 

어쨌든 홍기빈은 그들이 폴라니를 읽기 시작했다는데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들이 읽은 폴라니가 그들 정책 속에서 어떤 영향을 보여줄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지켜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 반성 했습니다. 작년 금융위기가 발발했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미FTA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었죠? 그건 그의 솔직한 자기반성에 기인한 것입니다. 대통령으로써 접하는 정보라는 것은 일반인이 상상할 수 있는 것과는 격이 달라요. 노무현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정치적으로 따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그 정도로 소탈한 사람이죠. 저는 예전에 노무현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이 하는 모임, 미래발전연구소라는 데에 가서도 폴라니에 대해 발제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들이 노무현의 어떤 측면을 계승할 것인지를 고민하는데 있어서 정확히 그렇게 한미FTA에 대해서 반성했던 그런 자세를 배우라고..."

 

난 이 새롭디 새로운 주장에 순간 '얼음'이 되었다. 내가 아는 홍기빈은 그래도 대중적으로 알려진 진보 지식인 중에서는 (경제정책의 측면에서)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가장 정확하고 날카롭게 비판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맥락없이 '대통령 노무현은 반성했다'는 말은 어떤 근거에서 타당화 될 수 있는 것일까?

 

그 증거로 삼아볼 수 있는 발언은 작년에 그가 민주주의2.0에 한미FTA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는 글을 올리고, 이에 대해 심상정이 '지난 5년간 정책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는 반론을 펴면서 벌어진 논쟁이 전부일 것이다. 그런데 이 논쟁에서도 확인되듯이, 노무현은 심상정의 '반성 요구'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내가 모르는 노무현의 발언이 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 봐서는 당췌 그가 어떤 부분에서 반성을 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홍기빈의 말처럼, 이런 판단 과정에서 노무현은 어떤 정치적 계산도 하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건 '반성'이 아니라 그가 원래 가지고 있던 경제학적 상식에 기초한 것일 테다. 그 논쟁 와중에 노무현이 한 이야기는 한미FTA를 철회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심상정이 그렇게 주장했을 때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잘 보라) 오바마가 재협상 얘기하고 있으니 섣불리 국회비준하지말고 재협상 준비해서 '완성된FTA' 체결하자는 거였다.

 

난 대체 홍기빈이 왜 이런 얘기를 했는지 이해가 안된다. 이건 전적으로 '노무현 착시효과'라는 말로 밖에는 설명이 안된다. (민주당 세력도 아니고) 노무현 그 자체에 대한 희망과 환상, 기대의 이 말도 안되는 근거지는 어디일까? 죽은 자는 말이 없는데, 산자들이 죽은자를 대신해 그의 입이 되어주고 있다. 그러나 그 죽은자를 대신해 말을 하는 사람들이 한다는 얘기가 이렇게 천가지 만가지이니 죽은자는 얼마나 답답할까?

 

나는 요즘 故 전인권 박사가 쓴 [박정희 평전]을 읽고 있는데, 노무현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평전이 당장 필요한 시점이다. 전인권 박사가 박정희의 정치적 행동의 심리사회학적 근원을 파헤쳤듯이, 노무현이 대중들에게 환상과 희망, 기대를 생성케 했던 정치인 노무현의 정신분석학적 근원과 그것이 대중과 상호작용했던 매커니즘 그 자체에 대해 까발려놓고 따지고 들어가 봐야 할 시점이다.

 

故 전인권 박사가 97년에 쓴 [김대중을 계산하자]는 '김대중 문제'를 우회하고는 지역주의를 해결할 수 없으며, 그를 죽은 놈 취급하는 일련의 정치적 언사들은 우익이든 좌익이든 그를 살아있는 시체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를 necrophilia(시체애호증)라고 불렀다. (김대중의 경우와는 좀 다르긴 하나) 말이 없는 죽은자를 붙잡고 빙의한 것처럼 그의 말을 대신하고자 하는 이들도 자신이 '시체애호증'이 걸린건 아닌지 심각하게 자문해 봐야 하는 것은 아닌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친북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니 우익단체들에서 친일보다 친북이 문제라면서 친북인명사전을 발간한덴다.

 

그래서 어제 잠깐 생각해 봤는데, 그 '친북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갈 만한 사람들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들 만큼 반발을 할까? 내가 볼 땐 정 반대이거나 그냥 쌩깔 것 같다.

 

친일은 누가봐도 나쁜 거지만, 친북은 나쁘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좋다고 보는 사람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이런게 아닐까?

 

우리집에 도둑이 들어왔는데, 강도를 도와주는 것은 좋은 것인가 나쁜것인가?

 

동생이 아버지랑 싸우고 가출하면서 아버지 비상금을 훔쳐갔다. 그렇게 동생은 10년 넘게 가족과 떨어져 지냈는데, 결국 신용불량자가 되어 먹고살기가 갑갑해졌다. 이런 동생을 아버지 몰래 도와주는 것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후자의 비유는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친북을 이념의 문제를 떠나서 그 자체로 쳐죽일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출한 자기 자식을 결국엔 능지처참 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아버지를 닮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순환에 대하여

옛사람들은 땅에서 뺏어 먹은 만큼 양분을 땅에 되돌려주는 순환농법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인분과 축분이 단지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됨으로써 심각한 환경오염의 원인이 되어있을 뿐이다. 화학비료와 농약을 써서는 토질의 악화 내지는 쇠약화는 필연적이다. 땅으로 되돌려주어야 할 인간의 배설물이 지금은 그야말로 똥 취급만 당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서양식 근대산업문명의 논리가 관철된 결과이다. 밀란 쿤데라는 우리나라에서도 꽤 인기있는 서양 작가인데, 그는 어디선가 “하느님이 전지전능하다면 인간으로 하여금 똥을 누게 하는 성가신 일을 하게 했을 리는 없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말이다. 서양 근대 지식인의 한계라고 할 수밖에 없다. 순환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그런 근본적으로 무지한 발언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똥을 눈다는 것이야말로 사실은 하느님이 완벽하다는 것을 뜻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똥이 없다면 세상이 성립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에게 질병이 있다는 게 도리어 자연 질서의 완벽함을 표시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인간사회에는 약자도 있고 장애인도 있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돌보고 보살피는 일이 필요하고, 그런 관계의 체험을 통해서 인간의 삶에 깊이가 형성되고, 우리의 인간성이 풍부해지는 것이다. 비극과 희극이 발생하고, 시와 철학과 예술이 존재할 수 있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 김종철, "경제성장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녹색평론> 109호 中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인디언'이라고 불리는 북아메리카 원주민인 머스코기 족의 주술사는 생명의 순환 과정 전체를 '교환'이라는 말로 부른다. 거기서 사냥이란 인간이 동물을 먹는 것이지만, 인간은 다시 땅으로 돌아가 식물이 먹게 되고, 그 식물을 다시 동물이 먹는 '영원한 순환'의 한 고리다. 그들은 사냥을 하기 전에 사냥감인 동물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친구들이여, 우리는 살기 위해 너희들을 무척  필요로 한다. .... 시간이 지나면 우리들이 이 '지구 어머니' 속으로 들어가서 무언가를 자라게 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 동물들도 그것을 먹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순환이며 교환이다. 그렇게 해서 모든 생명이 연결된다." (베어 하트, <인생과 자연을 바라보는 인디언의 지혜>, 34쪽)

 

- 이진경, <자본을 넘어선 자본>, 45-6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