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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05
    임종인, 장화식 <법률사무소 김앤장>(3)
    구르는돌
  2. 2009/09/30
    꿀벅지 논란(5)
    구르는돌
  3. 2009/09/27
    이명박 정부가 그리는 두바이 드림
    구르는돌
  4. 2009/09/27
    뒤메닐&레비의 <자본의 반격>에 관한 질문(6)
    구르는돌
  5. 2009/09/25
    아, 뿌듯하다~ ㅋㅋㅋ(4)
    구르는돌
  6. 2009/09/19
    그들의 짝사랑
    구르는돌
  7. 2009/09/08
    총리지명에 고향마을이 환호?
    구르는돌
  8. 2009/09/06
    심대평 그리고 정운찬(4)
    구르는돌
  9. 2009/09/05
    <에코페미니즘> 13장 요약
    구르는돌
  10. 2009/09/04
    가라타니 고진, <윤리21> 중에서
    구르는돌

임종인, 장화식 <법률사무소 김앤장>

 

 

나는 작년 초 진보신당이 만들어지는 걸 매우 띠겁게 바라보던 사람 중에 하나이다. 무엇보다도 당을 뛰쳐나가신 분들이 내걸은 이유(종북주의와 패권주의)가 전자의 것은 시기적으로 좀 쌩뚱맞고, 후자의 것은 어차피 이놈이나 저놈이나 오십보백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에겐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임종인이라는 사람 때문이다. 신당의 두 상임대표라는 사람들이 맨날 임종인을 끌어들이려고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듯한 모양새가 모양새가 영 띠꺼워 보였기 때문이다.(=>요 문장은 좀 비약이 심하긴 하지만 대충 넘어가 주시길...) 임종인이 대체 뭔대? 얼마나 잘난 놈이길래 열우당에 있던 놈을 데려오려고 저리도 거품을 무나? 어렴풋하게 예전에 이라크 파병에 대해 비판하면서 행정부와 각을 세웠던 기억이 나긴 하는데, 그런 식의 활동은 진정성이라고는 개미 코딱지 만큼도 안 느껴지는 천정배, 김근태 이런 놈들도 다 하던 짓이었다. 결론적으로 "그래봤자 열우당인데..."라는 생각이 강했던 것이다. 이건 내 정치적 당파성의 문제라기 보다는 열우당에 대한 지독한 불신이 문제가 되는 것인데, 난 이게 어떤 측면에선 요즈음 일반적 시민들의 구 집권세력에 대한 보편정서가 나에게 독특한 방식으로 체현된 것이라 (강하게!) 주당한다.

 

그러다가 임종인이 보궐선거 출마를 결정하고 진보정당들에 지지요청을 보낼 즈음 레디앙과 한 인터뷰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그걸 보고 임종인이라는 '정치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진보의 재구성'을 외부 사람 끌어오기로 대체하려는 신당의 몇몇 어르신들의 행태에 대해선 여전히 띠거운게 내 기본적인 관점이다.) 사실상 친노파 '출신'이라고 할 수 있는 그가 친노신당을 친박연대에 비유하는 것을 보고 그냥 큰 제목만 읽어보고 닫으려던 기사를 끝까지 다 읽게 되었다. 블로거 한윤형의 말을 빌자면 "2004년 탄핵열풍을 업고 열린우리당에서 금뱃지를 단 인물들 중에 자신을 뽑은 유권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헤아렸던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다가 임종인이 외환카드 노조위원장을 지낸 장화식과 함께 쓴 <법률사무소 김앤장>을 읽게되었다. 예전에도 읽으려다가 임종인의 '출신성분'이 맘에 걸려 멀리하다가 위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서 나름 그와의 '오해'를 풀고 편한 마음으로 읽어갔다.

 

일단 최종 감상평(??)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런 책을 쓰고도 아직 이 사람이 정치인으로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라는 거다. 삼성 이건희 회장보다 1년 수입이 더 많은 사람을 대표 변호사로 두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 사적 권력 집단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속옷까지 벗겨서 낱낱이 까발릴 생각을 하다니, 이 양반들 간댕이를 수십개씩 은행에다 냉동보관하고 있는것은 아닌가? 실제로 위클리경향의 전신인 뉴스메이커에서 김앤장 비판성 기사를 썼다가 김앤장으로부터 몇 십억대 소송 협박을 받고 정정기사를 내보내야만 했던 전례를 저자들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책 속에는 대한민국 최고 로펌이 살아가는 방법이 조목조목 드러난다. 핵심은 이중생활!! 대한변협에는 그냥 공동사업자(이거 맞나? 도서관에 책을 반납해서 정확한지 확인해 볼 수는 없지만....)로 등록해서 변호사법상 로펌에 가해지는 제약을 피하고, 국세청에는 로펌으로 등록해서 세제상의 혜택을 받는다. 게다가 수많은 고위공직자 출신들을 고문으로 거느린 이 로펌은 당당히 2년에 한번씩 국세청으로부터 납세자 표창을 받아서 주기적으로 2년간 세무조사를 면제받는다.

 

이건 그냥 도의적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자. 뭐 전과자들이 장관되고 총리도 되는 세상에 쩝... 그러나 정치적으로, 국민경제적으로 문제인 것은 이들이 신자유주의를 위한 법률해석, 나아가 법개정에까지 개입할 수 있는 막강파워를 지녔다는 점이다. 세계최초 문자해고를 발명하고, 단협해지를 단체협상과 함께가는 연례행사로 만들어 버린 것도 이 변호사 집단의 머리에서 나온 거라 한다. 진로소주가 불법적으로 헐값 매각될 당시에도 진로 사장의 등뒤에서 칼끝을 겨누던 것도 이 변호사 집단이다. 기업 사장까지 무릎꿇게 할 정도면 노동자들은 집단 암매장 시켜도 눈하나 깜빡 안할 놈들이라는거지...

 

하나하나 열거하기에도 숨이 찬 이 devil's advocates(악마의 옹호자)를 여론의 심판대 위로 끌고 올 여지를 만들어 놓은 두 저자에게 늦었지만 박수를 보낸다. 여하간에 이번 보궐선거에서 좋은 성과를 거둬서 18대 국회에서도 그가 말한 '보이지 않는 권력을 보이게 하는'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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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벅지 논란

내가 유이라는 가수(라기보다는 그냥 멀티플레이어 연예인이라는 표현이 더 맞겠다)를 주목(표현이 너무 거창한데? ㅋㅋ)하게 된 것은 그 유명한 스타킹에서 보여준 '비욘세 댄스' 때문이다. 사실 비욘세 댄스로 히트를 친 것은 김옥빈이 먼저인데, 김옥빈보다는 좀 못했지만, 연예계 관계자들의 시각으로 봤을 때, "오, 이거 물건인데...?"라는 말이 나올법한 무대였음에는 틀림없다.

 

그렇게 시작된 유이의 상승세는, 태진아가 방송에 나와서 자신이 아들 이루랑 같이 찍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말했듯이 "탑모델들만 찍는"거라는 소주광고에 나올 정도로 치고 올라갔다. 사실상 공식적으로 검증된 '미녀 연예인'들만 찍는 거라는 소주모델의 반열에 올라갔으니 유이는 좋은 쪽으로 생각해서 '전지현'코스를 밟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생각해주기에는 이상하리만큼 유이의 상승세는 좀 기형적인데가 있다. 요즘 워낙 그룹으로 데뷔해도 개인플레이를 많이 하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유이가 애프터스쿨 멤버라는 사실이 함께 부각된 것은 손담비와 아몰레드 광고를 찍은 이후로는 거의 사라져 버린 듯 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초특급 스타 이민호와 CF를 찍더니, 어느날은 야구장 시구를 하고(아버지가 두산팀 2군 코치란다), 이젠 드라마에까지 나온단다. 데뷔를 올해 1월에 했는데 1년도 되기 전에 이렇게 많은 일을 헤치우다니!!

 

그야말로 완벽한 연예기획상품의 성공작이라 할 만하다. 손담비에 이어서 방송가의 메인 코스들만 쭉쭉 밟아나가는 거물을 만들어 냈으니 그 기획사도 어지간히 돈 좀 만지게 생겼다. 그런데 이 아이돌의 성공가도에 약간의 잡티가 끼어들었으니 바로 그 '꿀벅지' 논란이다. (아, 정말 서두가 길다. 내 글은 이게 문제다. ㅠ.ㅠ)

 

얼마전에 찍은 '처음처럼'광고에서 선보인 '쿨샷댄스' 이후 이 단어가 유행을 탔고, 이게 성희롱적 언어인지 아닌지를 두고 인터넷 상에서 말들이 많나보다. 어떤 인간들은 성희롱적 언어가 아니라고 반박하면서 "그럼 초콜릿 복근은 성희롱 아니냐?"라고 반문하는데, 나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것도 성희롱이고 저것도 성희롱이니까 둘 다 쓰지 말라는 거다. 다른건 다 집어치우고라도 사람 몸을 부분부분 나눠서 먹는 거에 비유하지는 말아야지, 정말 인간적으로... 정육점도 아니고 말이야... 예전에 배슬기 노래중에 "내 다리가 좋아? 내 엉덩이가 좋아?"라는 가사가 들어있는 노래가 있었는데, 난 정말 이런 노래가 인간을 파편화된 단백질 덩어리로 만드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논란의 당사자인 유이는 "꿀벅지는 나를 만든 단어, 기분나쁘지 않다"라고 말했단다. 이 상황에서 나는 좀 노린네나긴 하지만 그녀보다 4살이나 많은 사람으로서 "니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본데..."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꿀은 달콤하다. 원래 달고 짜고 매운 음식들이 다 그렇듯이 그 맛을 계속해서 느끼고 유지하려면 처음에 느꼈던 자극보다 훨씬 더 센 자극이 필요하다. 고등학교때 배웠던 과학 법칙에 의하면 이런걸 '베버의 법칙'이라고 하지 아마? (고등학교 과학시간에 배운 개념중에 거의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거다!! ㅋㅋㅋ) 이번에 꿀을 보여줬으면 다음번엔 달고나 정도는 되야 한다는 거다. 그게 이 나라 연예산업이 먹고사는 방식 아닌가? 그렇게 젊은 여자 연예인들의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내서 대중들이 소비하도록 하고, 막판에 가선 껍데기만 남겨서 날려버린다. 자신을 대중들 앞에서, 그것도 온 몸을 조각조각 내서 소비의 대상으로 만들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을 90년대 화려한 스타인 룰라의 멤버 김지현이 얼마전에 케이블 채널 성인 시트콤의 술집 여성으로 출연하는 것을 보고 확실이 느꼈다.

 

이런 대중의 욕망 구조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심지어 대중들이 지금껏 바래왔던 욕망과 다른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 연예인은 한마디로 '한방에 훅 가는 거다.' 좀 예전 일이고 유이와는 좀 다른 케이스이긴 하지만, 황수정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드라마 '허준'에서 보여줬던 단아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방탕한 생활을 즐긴다는 악소문에 휩싸인 그녀는 그 소문 한방에 정말 훅 가버렸다. 또한 가깝게는 박재범의 경우는 어떤가? 그에게서 짐승돌의 이미지만을 갈구했던 대중들은 자기들만의 배타적 공동체인 '조국'(?)에 대한 비하(이런 감정은 학벌에 대한 감정과 비슷한 것 같은데, 아무리 후진 학교를 나왔고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남이 자신의 모교를 욕하면 기분 나쁜, 그런 학벌감정과 비슷한 것 같다.) 를 접하고선 그를 한방에 미국으로 보내 버린 것이다. 그는 대중들에게 인간 박재범이 아니라 짐승돌 이미지를 생산하는 연예상품 박재범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짐승돌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민족'이라는 배타적 공동체의 애국주의적 심성을 자극하는 '부작용'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냥 어제 오늘 생각 난 것들을 다 긁어모아서 쓰다 보니까 글이 이렇게 길어졌는데, 그냥 유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런거다. "너도 한방에 훅 갈 수 있다." 자기 스스로 꿀벅지라는 상품 이미지에 갇혀버리는 순간 그것 외에 어떤것도 너에겐 허락되지 않는다. 어느날 살이라도 갑자기 찌는 날에는 대중들은 바로 리콜 들어간다. 그게 당신 앞에 닥친 운명의 실재상황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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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가 그리는 두바이 드림

행인님의 [4대강 사업의 진면목] 에 관련된 글.
 

 

 

요즘 나는 시간이 날때마다 뉴레프트 리뷰 한국어판에 실린 논문들을 하나씩 읽어가고 있다. 어제는 마이크 데이비스의 <두바이의 공포와 돈>이라는 글을 읽었는데, 그 중 단연 눈에 들어오는 문장은 이것이었다. "후진 사회는 원조 국가들에 존재하는 결과물이 아니라 그 '이념형'을 모방한다."

 

중동의 한 복판, 천해의 항구를 끼고 있는 두바이는 중국 상하이와 함께 21세기를 대표하는 도시로 떠오르고 있다. WTC가 테러로 무너진 이후 미국의 초고층 건물들의 아성을 물리치고 세계최고를 달리는 호화빌딩들이 이 건물들에 들어서고 있다. 그리고 올해 연말에 완공될 거라는 버즈두바이 빌딩은 '자랑스럽게도' 삼성건설의 기술력을 통해 160층, 800m의 높이를 자랑한다.

 

게다가 이 곳은 부동산 천국이다. 하기는 도시 전체가 공사판, 그것도 휘황찬란한 쇼핑센터에 초호화 호텔과 빌딩들로만 가득한 그야말로 파라다이스인데 왠만한 땅값은 명함도 못 내밀겠지... 마이크 데이비스의 언급처럼 "제각기 봉건주의와 농민 중심의 마오주의에서 출발한 두 나라"인 두바이와 중국은 본래 자기 아닌 세계의 이념형(그러나 이념형은 오직 '이념'이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다)을 모방하는데 온 힘을 쏟아붓고 있다.

 

"아랍과 중국의 민족적 자부심이 격돌한다는 것도 상기해둘 만하다. 이렇게 미쳐서 돌아가는 과대망상 추구병은 전례가 있다. 영국과 독일은 20세기 초에 드레드노트형 전함 건조 경쟁에 사활을 걸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과연 그런 경쟁이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 전략일까? 교과서의 대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거대 건축물은 언제나 경제가 투기적 과열 상태에 놓였음을 알려주는 징후였다."

 

얼마전 행인님의 블로그를 갔다가 보게 된 기사의 내용은 딱 위의 두바이와 상하이의 상황이 떠오르게 한다. ("4대강변에 유럽형 고급주택 들어선다"(아시아경제, 09.25)) 물론 유럽형 고급 주택 건설이 두바이에 지어지는 버즈두바이 빌딩같은 거라는 질적으로는 다를 것이다. 그런 문제를 제껴놓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실제로 이런 건설사업들이 지향하는 서구적 라이프 스타일이 그들이 지향하는 '서구'에 실존하는 것들일까? 4대강변에 유럽형 고급주택이 들어선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한국에 있는 한국 건물이지, 유럽 건물은 아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자신들의 상상속의 유토피아, 즉 테드 슈레커가 말한 '국경없는 세계와 담장쳐진 도시'를 쾌적한 강변에 만들기 위해 전부다 삽들고 설치고 있는 것이다.

 

4대강사업에 대한 우려로 홍수피해, 수질오염등이 거론되지만, 주변에서 아무리 지껄여봐야 이들의 짱구통속에서는 이 문제들이 별로 고려대상이 되지 못할 것 같다. 나오미 클라인이 <쇼크 독트린>에서 지적했듯이, 이런 자연적 재앙과 충격들은 새로운 돈놀이를 시작할 수 있는 청신호일테니까 말이다. 마치 두바이가 고가의 석유가를 등에 업고, 또한 양 손에는 지구 온난화와 환경 대재앙이라는 현수막을 하나씩 들고선 "세계 최고의 명품 휴양지 두바이로 오세요~"라고 외치고 있듯이 말이다. 이명박 정부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게 아닐까? 어차피 '유럽형 고급주택'들에는 최신식 식수정화장치가 준비되어 있을 테고, 홍수피해에 대처하기 위한 첨단의 경보시스템 또는 그런것쯤 걱정하지 않아도될 안정적인 입지를 만들어 놓고 완벽한 성벽을 칠테니 말이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자연 재앙을 겪게 되면 이런 개발지역을 롤모델로 제시하겠지... 마이크 데이비스의 말대로 "실제의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그 뜻밖의 횡재수가 묵시록적 사치 행각의 장려금으로 쓰이고 있다."

 

아차차,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게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냥 '이념형'은 아닐수도 있겠다. 다음은 코리아헤럴드 9월 22일자 기사중의 일부이다.

 

"The government said yesterday it is considering granting permanent residence to foreign nationals who purchase local real estate with a certain level of value."

 

즉, 부동산 많이 소요하면 외국인에게도 영주권을 부여하겠다는 거다. 그러니 그 알흠다훈 유럽형 고급주택에 실제 유럽인이 살수도 있는거다. 두바이처럼 데이비드 베컴이 와서 살수도 있는 거다!!! 와우!!!

 

물론 두바이처럼 공사현장에서 1년에 880명이 사망할 수도 있겠지만... 뭐 저 먼 옛날 이집트 피라미드 만들때도 그정도 희생쯤은 있었을테니까... 근데 지난 금요일에 같이 일하는 22살짜리 아이는 나중에 두바이 같은 공사현장가서 일해보고 싶다고 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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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메닐&레비의 <자본의 반격>에 관한 질문

여기를 오가시는 블로거 분들 중에 아시는 분 있으시면 답변 바랍니다.

 

어제부터 제가 1년 가까이 책꽂이에 묵혀두고 있던 뒤메닐&레비의 <자본의 반격>을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 2부 내용에서 이해가 안되는게 많아서요.

 

 

1. 일단 아주 간단한 질문부터 하자면 43p에 보면 이윤율에 관한 설명이 나오는데요,

여기서 맨 밑에 나오는 공식을 보면 [이윤율=이윤/고정자본] 이라고 써 있는데요.

보통 이윤율하면 투여된 총 자본과 비교한 이윤량의 비율로 표시하지 않나요?

근데 왜 여기선 고정자본만을 분모자리에 놓는 건지...??

또한 그 다음다음 공식에 나오는 실질임금률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2. 이게 본격적인 질문인데요,

4장에서보면 저자는 실업의 원인이 기술진보에 있다는 주장을 일축하는데요, 그러나 5장에 가면 70년대 이후 미국에 비해 유럽의 실업률이 높은 이유는 유럽의 기술진보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앞에서의 설명과 뒤의 그것이 다른 이유로 "세계적인 현상에 대한 설명은 다양한 지역 간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아무리 봐도 이 말을 이해할 수가 없네요. 뒤에서도 반복되는 미국과 유럽의 실업률의 차이에 대한 설명은 계속 이렇게 뜬금없는 주장을 나열하는 것만 같고.... 게다가 미국이 유럽보다 노동절약을 훨씬 적게 했다는 것은 어떤 근거에서 하는 말인지도 전혀 설명이 없고...

 

 

3. 다음으로, 저자들이 말하듯이 완전고용과 강력한 기술진보가 관련된 것이라면,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강력한 기술진보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윤율이 하락하고 그 결과로서 위기가 닥쳐 자본축적에 문제가 생기고 이로 인해 기술진보가 정체되는 상황. 이런 문제에 대응해 자본은 이윤율을 회복하기 위해 (이 책 3부에서 설명하듯이) 금리인상 등의 조치를 통해 부를 금융부문으로 이전시킵니다. 이것이 저자들이 말하는 신자유주의의 핵심인것 같은데요...

 

그런데 문제는 신자유주의를 이런 방식으로 비판하면 결국 신자유주의를 탈피하는 방법은 '기형적인' 금융부문의 성장을 통해 이윤율을 회복할 것이 아니라, 기술진보와 고용증진의 선순환을 가동시키는 것, 즉 케인즈주의적 해법이 등장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은데요. (사실 지금 제가 이 책을 절반만 읽어서 궁극적으로 저자가 어떤 주장을 하고자 하는지는 모릅니다.)

 

최근 금융위기를 분석하면서 뒤메닐의 주장을 상당부분 수용하는 윤소영교수의 경우도 뒤메닐이 새로운 뉴딜을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사민주의에 대한 지지를 원칙적 문제로 수용한다는 점을 비판하던데요...

 

 

 

그런 점을 둘째 치더라도 전 이 책의 2부 내용인 전혀 개연성있게 다가오질 않아서요. 좀 아시는 분 있으면 댓글 달아서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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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뿌듯하다~ ㅋㅋㅋ

 

 

 

 

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

어제까지 바짝 읽어서 다 읽었다.

책 내용을 다 이해하고 안 이해하고는 둘째 문제다.

중요한 건 어쨌든 첫 페이지부터 옮긴이 해제까지 다 정독했다는 것.

 

마음 같아서는 서평을 좀 써보고 싶지만,

스피노자와 발리바르라는 어르신들의 생각에 이러쿵 저러쿵

토를 달 만큼의 사고 수준에는 한참 미달하는 지라 그런 건 생략.

 

사실 책 본문을 읽는 것은 완전 고역이었다.

분명히 한글로 써 있는데도 난 읽는 내내 내가 문맹인지를 의심해야 했을 정도로. ㅠ.ㅠ

그러나 친절한 옮긴이 해제를 읽으면서 나름 통쾌!!!

이건 뭐 고등학교때 '수학의 정석'에 있는 어려운 문제 풀다가

답답해서 해답지 보고 문제를 이해했을 때의 느낌이랄까?

 

요즘 나의 독서가 조금씩 교양서에서 이론서로 옮겨가고 있는데,

읽는게 고역이긴 해도 뿌듯한 마음은 몇 배로 높다.

 

예전에 출판사에서 절판 직전에 거의 반값으로 판매하길래 사 놓은

<헤겔 또는 스피노자>(피에르 마슈레)도 집에 있는데,

올 해 안에 요것도 읽어야 겠다. 역자이신 진태원씨의 친절한

역주가 곁들여 있어서 아주 든든하다.

 

히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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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짝사랑

한 동안 블로그 포스팅을 안했었는데, 또 손가락을 간지럽히는 소리를 들어서리... ㅋㅋㅋㅋ

 

요즘 밤늦은 알바로 너무 피곤해서 약국에 가서 레모나를 한 통 샀다.

근데 약국에 있던 TV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가 가관이다.

정운찬 총리 지명자가 세종시 문제에 대해서 청문회 서면 답변으로 입장을 밝혔는데,

행정상 비효율의 문제가 있을 것으로 우려된다는 입장을 밝혔단다.

 

난 세종시 문제에 딱히 관심은 없지만,

몇년 전부터 특별도시 만든다고 그 지역 땅값 폭등시켜 놓고,

게다가 그 지역 농민들한테 땅 뺏어서 그 지역 전체를 공사판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그 시작을 현 정부에서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쨌든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런면에서 정운찬이 이 문제를 좀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것 같아 재수없긴 한데...

 

그러나 내가 기가 막힌 것은 이어지는 민주당의 논평이었다.

행정도시 건설은 박정희 정권 때부터 논의되었던 어쩌구 저쩌구 하더니만...

결국 한다는 소리가 정운찬이 이딴 식으로 나오면 정치적 야합이라는 거다.

 

난 순간 좀 어리둥절 했는데,

정치밥을 몇년 처드신 이양반들이 혹시 야합이라는 말의 뜻을 모르나 싶었다.

야합은 서로 다른 편인데, 사적인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려고 행하는 불순한 행위... 뭐 이런 거 아닌가?

근데 정운찬의 이 발언에서 뭐가 야합이라는 거지?

이명박 정부가 세종시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얘기고,

거기에 총리로 지명된 사람이 비슷한 견해를 밝혔는데...??

 

혹시 민주당은 아직도 정운찬이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지하철 가판대에서 파는 일요신문 따위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정운찬이 "머리는 한나라당쪽인데, 가슴은 민주당쪽"이라는 말을 믿고

정운찬의 가슴에 기대나?

 

얘네들 아직도 옛 짝사랑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이렇게 진상짓을 하고 있으니,

세종시며 4대강이며 참 깝깝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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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지명에 고향마을이 환호?

구르는돌님의 [심대평 그리고 정운찬] 에 관련된 글.
 

 

 

대전에서 발행되는 지역 신문중에 중도일보라고 있다. 자주 보는 건 아니지만 관공서 같은데 가면 꼭 있기 때문에 어쩌다 한번씩 보게 된다. 이번에 세종시 건도 그렇지만 항상 이동네 지역 현안이 전국적 이슈에서 밀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역 언론들도 항상 그런데에 불만이 많다. 그러다보니 지역적 동질감 같은게 형성되서 그런지, 약간 친자유선진당의 냄새가 많이 나기도 한다. 물론 중도일보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

 

근데 어제 우연히 그 신문을 보고 좀 어리둥절했다. 정운찬이 총리로 지명되자, 그의 고향마을에 찾아가 주민들의 분위기를 전하는 기사였다. 근데 그 기사에 배치된 사진은 영락없이 아들이 올림픽 금메달 땄을 때, 환호하는 동네 주민들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기사 하단에 적힌 설명 왈,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총리로 지명되었다는 소식에 고향주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원래 총리지명되면 그런건가?

물론 올림픽 금메달 땄을때가 아니더라도 이런 장면들은 종종 있다.

국회의원 선거 또는 대통령 선거 당선 되었을 때, 고향마을 소식을 전하는 장면 등...

 

근데 참 살다살다 총리지명 되었다고 이런 난리를 치는 건 처음봤다. 근데 더 웃긴건 그 고향마을이라는 데에 정운찬의 친인척은 고모(맞는지 잘 기억은 안나지만... 궁금하신분은 직접 중도일보를 찾아보시길)인가 밖에 안산다더라. 그리고 그 마을 이장인가를 인터뷰 했는데, 그 사람도 "나랑 나이터울이 많이나서 직접 본 적은 없지만..."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이 동네는 지금의 정운찬하고 상관이 없는 동네라는 거다.

 

이걸 비롯하여 이러저런 풍경들을 보고있자니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얼마 전에 한나라당 원내대표 안상수도 그랬다지 않나. 정운찬이 총리직만 잘 수행한다면 앞으로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도 당당히 나올 자격이 있다고. 내가 볼때 이 문장 하나만 놓고 보자면 하나마나한 얘기일수도 있다. 자기 역할 잘 수행하면 대선후보 경선에 나올 수도 있다는 말은 심지어 욕많이 먹는 전여옥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말이다. 근데 왜 이들은 이토록 정운찬 스타만들기에 나서는가?

 

이 작자들이 벌써부터 좌판을 깔아놓으려는 것 같다. 물론 박근혜가 독보적이기는 하지만, 혼자만 독주하면 재미가 없으니 경쟁상대 몇명 붙여서 드라마를 연출하는 것도 안정적인 정권재창출에 나쁠것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희태가 대표에서 물러나고 정몽준이 일선에 등장한 것일테고... 벌써 한나라당은 후보군이 마련되었다. 정통보수 박근혜, 재벌보수 정몽준, 게다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명성높은 개혁적 경제학자 출신의 정운찬. 한나라당이 그리는 짜임새 있는 각본이 그려져 가고 있다.

 

아, 그런데 그 반대쪽 동네는 왠지... 암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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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대평 그리고 정운찬

지난 주 충남대에 청강을 듣고 나와서 저녁을 먹으려고 학생식당에 들어갔다가 벽에 걸린 TV뉴스에서 정운찬이 총리로 지명되었다는 얘길듣고 '얼음'이 되었었다. 그 이후로 온갖 생각들이 밀물처럼 밀려와서 블로그에 뭐라도 적어볼까 했는데, 안정적으로 컴퓨터를 할 시간이 안나서 이제서야 몇 자 두드려보려 한다. 근데 지금 생각해 봐도 너무 당황스러운 일이라....

 

내가 충청도 사람이니만큼 심대평 걱정부터 해볼란다. 아, 그것보다 먼저, 오늘 케이블에서 재방송 하는 상상플러스를 보니까 문제가 "충청도에서 쓰는 '대간하다'라는 말의 뜻은?"이었다. 난 처음에, "저게 문제야? 저걸 몰라?"라고 생각했는데, 출연자들이 정말 다 모르는 것 같더라. 솔직히 난 저게 사투리인지도 몰랐다. 밖에서 일하다 들어온 우리 엄마가 항상 하는 말이 "아이고, 대간하다"인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더라!! 그걸 보고 있자니 괜히 얼마나 충청도가 전국적으로 소외되었으면 저딴게 문제로 나올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말도 안되는 지역감정인건 알지만, 따지고보면 사람들이 경상도 사투리나 전라도 사투리는 대충 다 알지 않나? 근데 왜 충청도 사투리는 모르냐고!!!???

 

그래서 였을까? 내가 볼땐 심대평이 총리가 너무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이회창도 충남 출신이긴 하지만, 워낙 법조계와 중앙정치판에서만 놀던 분이라 예외로 두자면, 사실상 충청도를 대표하는 정치인은 심대평 아닌가? 충남도지사를 수차례 역임하고 당당히 중앙정치로 올라가 독자적인 충청권 정치세력화를 이루신 분 아닌가? 그래봤자 전라도와 경상도 등쌀에 밀려 제 맘대로 할 수 있는게 없었겠지만....

 

그래서 좀 억울했던 것 같다. 그래서 총리가 너무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까오한번 잡아보고 싶었을 테고... 근데 총재님이 태클을 거시니 기분이 적잖이 상했겠지... 근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저런 정황을 놓고 봤을 때, 이회창의 정치적 판단이 옳았던 것 같다. 사실 심대평 혼자 총리로 보낸다고 해서 선진당에게 이득이 돌아올 것은 하나도 없기에, 그는 나름 MB와 정치적 거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걸로 생각해 논게 세종시 특별법. 하지만 수도권 집값이 곧 자신의 지지율인 MB가 그걸 받을리가 있나?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입각은 정치적으로도 명분이 서질 않는다는 이회창의 계산법은 정확했고, 그게 심대평의 공명심에 상처를 준 게 아닐까?

 

아이고, 근데 심대평 대신 총리에 앉혀논게 완전 다크호스다. 게다가 이 사람도 충남 공주 출신이다. MB가 정치적 계산법에 따른 심대평 총리 입각 카드를 버리고, 경제 전문가 정운찬을 앉혀놓음으로써 정운찬은 나름 이슈메이커가 되었다. 이렇게 되니 심대평은 왠지 여기저기서 끈이 떨어진 듯 한 느낌이... ㅠ.ㅠ (그가 한나라당 들어간다고 해서 반가워해줄 사람도 없을 듯....)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발등에 불 떨어진 것은 민주당이다. 제작년 대선을 앞두고 후보경선을 두고 저울질 할 때, 정운찬이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으니 말이다. 자기들도 못 데려가 안달이었던 사람을 현 정부가 총리로 앉혀놓겠다는데, 요렇게 되면 정세균 대표가 말한 '인사 청문회에서 철저 검증'이라는 말만큼 뻥카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노회찬 마저 그를 두고 '장미'라고 했는데...

 

현 정부 들어서 이전 정권에서 기용되었던 인사들이 줄줄이 비엔나로 나가 떨어지는 판국에서도 살아남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 노무현 정권 말 통상교섭본부장으로 기용되었던 김종훈인데, 그놈 여적지 자리 꿰차고 앉아서 한-EU FTA, 한-인도 FTA 추진하고 있더라. 하여간 2000년대 한국 대외경제 정책을 말할때 이 삐리리한 놈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 놈은 DJ-노무현 시대가 이명박 시대와 고속도로로 통한 다는 것을 보여주는 놈이니까...

 

사실상 정운찬도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김종훈이처럼 단순히 관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마이뉴스 블로그에 누가 그런 글을 써 놨던데, 그는 국회의원 경험 한번 없지만 총리기용설 한번에 스트레이트로 대선후보군으로 오른 인물이다. 제작년에야 너무 갑작스럽게 그의 이름이 거론되어서 경황이 없었겠지만 지금은 앞으로 3년이나 남았다. 총리직 하다가 그냥 여기저기 이름 몇번 올리는 것만으로도 그의 이름값은 상승곡선을 탈테고.... 그야말로 잘 만들어진 '정치상품'이라는 말이 적절하다.

 

누가, 왜, 어떤 청사진을 가지고 정운찬을 기용했는지, 내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더 떠들진 못하겠지만, 어쨌든 여러모로 민주당만 작살나게 생겼다는 생각이다.

 

 

 

덧) 그럼에도,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충남대 학생식당 자장면이 너무나 맛있다는 거다.

       일주일에 한번씩 그 자장면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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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페미니즘> 13장 요약


13장. 개체에서 조합으로: ‘생식대안’의 슈퍼마켓



‘불임여성 돕기’에서 ‘생식대안’으로


새로운 생식기술에 대한 논의는 대개 불임남녀에게 ‘친자식’을 갖도록 해주고자 개발되었다는 암묵적 가정에 기초한다. 그러나 1985년 본에서 열린 ‘생식기술과 유전공학에 반대하는 여성’대회에서 참석자들은 이 새로운 기술의 목적이 오히려 산업자본주의의 ‘성장’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생식산업을 진흥시키려는 것이라 결론지었다. 로리 앤드류스의 「생식기술에 대한 페미니즘의 시각」과 「나의 신체, 나의 재산」이라는 논문이 이런 주장의 증거이다.

앤드류스의 저술에서는 이전 시대의 ‘불임여성’ 혹은 ‘불임부부’라는 용어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대신 ‘생식대안’, ‘생식옵션’, ‘생식선택권’, ‘생식자율성’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그녀는 “낙태와 피임에 관한 생식선택권을 뒷받침하는 헌법적 토대는 인공수정, 태아 기증, 대리모 등을 이용하는 데 있어서의 자율성도 보호”한다고 말한다.

생식선택권을 옹호하는 럿거스 활동그룹은 ‘생식선택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① 국가와 연방헌법의 보호를 받는 한도에서 헌법적인 낙태권을 행사하는 개인의 선택권.

② 국가와 연방헌법의 보호를 받는 한도에서 불임수술을 받거나 거부할 수 있는 그/그녀의 헌법적인 권리를 행사하는 개인의 선택권.

③ 임신을 예정일까지 수행하는 개인의 선택권.

④ 수정된 난자의 착상을 막거나 그 밖에 수정 전, 수정시, 혹은 수정 직후에 사용되는 다른 방법으로 임신 회피용 약이나 기타 물질의 합법적인 처방을 얻거나 사용하는 개인의 선택권.

⑤ 체외수정, 인공수정 등을 통해서 임신할 수 있는 개인의 선택권.


그러나 로리 앤드류스는 여기에 “누구라도 성적 접촉 없이 자신들의 자녀를 ‘만들’ 가능성”까지 포함시킨다. 물론 ‘생식대안의 자유로운 서택’은 또한 ‘대리모’와 여러 형태의 계약을 맺을 권리를 의미하며, 뒤집어 말하면 이른바 ‘대리모’가 될 여성의 ‘권리’까지도 의미한다.

하지만 앤드류스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아이를 낳는 여성들과 ‘대안적 생식’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발적인 유전자 심사 및 의료심사는 옹호했다. 이러한 틀은 자궁은 들어냈지만 난소는 온전한 여성들의 대리모의 도움으로 ‘유전자 엄마’가 될 수 있게 한다. 결국 이러한 시도는 유전자심사를 확산시킬 것이다.

그녀는 ‘생식대안들’이 아주 새로운 가족구조를 만들어낼 것이라 보았다. 새로운 기술 덕택에 이제 한 아이가 여러명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앤드류스에 의하면 현행 가족법으로는 다룰 수 없는 이런 복합적 부모-자녀 관계로 야기되는 법률적 문제는 임신 전에 누가 유전자 부모가 될 것이며 누가 임신한 어머니가 되고 누가 사회적 부모가 될 것인지 등을 명시하는 계약을 맺으면 되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가장 친밀하고 사적인 관계에까지 계약법이 침투하는 결과를 초래함을 뜻한다.



대리모산업


역사상 처음으로 뉴저지 판사 하비 쏘코우는 1987년 메어리 베스 화이트헤드 소송에서 아이를 출산한 여성의 권리보다 계약법을 더 중하는 판결을 내렸다. 쏘코우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생식이 보호받는다면 생식의 수단도 보호받아야 한다. 가족을 탄생시키는데 바탕이 되는 가치와 관심은 어떤 수단이 되든 동일한 것이다. 본 법정은 수단의 보호가 대리모의 이용까지 포함한다고 본다. 제3자를 이용했다고 해서 계약이 무효가 될 수는 없다. 기증자나 대리모는 수태와 임신의 인자를 제공함으로써 아이 없는 부부를 보조하는 것으로 사료된다."


앤드류스의 생각도 이와 비슷하다. 그녀는 대리모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은 아기매매라는 비판에 대하여 판례를 들어 반박하는데, 실제 법정에서는 출산 후 아이를 포기한다는 결정이 임신 이전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강요를 통해서가 아니라 결과에 관해 충분히 인진한 냉정한 상태에서 계약서에 동의한 이상 그것을 아기매매라거나 여성착취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빈민여성들이 ‘번식자 여성’이란 새로운 계급으로 변모하는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는 순전히 먹고살기 위해 여성들이 대리모가 되거나 생식체나 난자를 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또 여성들이 책임있는 의사결정을 할 수 있고 성숙한 시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스스로 대리모계약서를 존중해야 한다는 말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성운동이 이룬 성취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녀의 생각대로라면 이 체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계약이 존중되어야 하고, 대리모계약도 존중되어야 하며, 생식과 관계된 모든 과정과 관계들을 우리의 자연적 존재의 일부로 여기던 케케묵은 과거의 유산인 모든 법률조항들을 도려내어 시장법칙인 계약법의 규율 아래 두어야만한다.

대리모가 지불받는 것은 오로지 ‘생산품’인 아이에 대해서뿐이다. 그리하여 대리모는 여성의 가사노동 착취와 유사하게 기능하는 새로운 ‘청부산업’이 되었다. 기업가(남성)은 원료의 일부(정자나 그가 사들인 기증난자)와 ‘임신수행자’ 여성에 대한 대가를 선지급한다. 그러나 생산품은 양도되어야 한다. 즉 생산자로 하여금 그들이 생산한 물건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상품이며 그들이 하는 일이 소외된 노동이란 점을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녀는 ‘생식자율성’, 즉 출산과정에서 무엇이든 가능하며 기술적, 사회적으로 가능한 것은 법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이것은 모든 새로운 생식기술로의 자유로운 접근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새로운 사회적 장치를 함축한다. 그러나 새로운 생식기술의 ‘진보 덕택에 이제 생식행위가 시장에 통합되었으므로 출산은 곧 네 것과 내 것을 사고 파는 문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여기에는 계약이 필수적이다. 대리모이든, 수정란이나 그 밖의 ’생식재료‘를 파는 것이든, 혹은 체외수정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것이든, 이러한 계약에 들어가는 여성은 더 이상 자율적 인간으로서 자신의 육체나 생식력과 상호작용 할 수가 없다. 생식자율성이라는 개념은 이제 이윤과 명성을 추구하는 기업과 ’첨단 의사‘들이 좌우하는 전격적 상업화에 여성의 생식력과 육체를 무방비로 열어놓기 위해 사용된다.



나의 신체, 나의 재산?


그녀는 생식과 관련된 우리 신체조직 뿐 아니라 혈액, 정액, 조직, 세포 등 모든 다른 기관과 물질들도 신체 소유자의 재산이라고 주장했다. 생식기술의 발전으로 이제 사람들은 자주 자신의 생식체나 수정란을 의사나 실험기술자나 보건시설의 손에 맡기게 되었다. 그러나 신체의 일부가 재산으로 간주되자 않는다면, 산체 물질을 타인에게 맡긴 사람들을 보호해 줄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녀는 사후에 신체기관과 신체물질을 매매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논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살아 생전부터 이미 팔린 해부용 시체로 걸어다니는 셈이 될 것이다!



‘판매자’와 ‘구매자 및 사회에 미칠 영향


재산으로서의 인간 신체라는 개념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장기를 내다 팔아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하는 우려를 자아낸다. 즉 가난한 사람들도 신장 두개만 가지고 있다면 ‘자본’소유자로 간주될 수 있는 상황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신장은 한 개에 5만 달러 나간다. 따라서 이들이 사회복지급부 대상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얘기도 나올 수 있다.

그녀는 도한 신체를 재산으로 규정하게 되면 인간 존재의 온전함이 파괴된다는 사실에서 생기는 윤리적 문제도 간과한다. 그녀는 인간의 정신적 능력과 육체적 조건에 대한 이분법적 규정에 근거해 육체를 파는 것이 정신을 파는 것(이를테면 지적재산권 같은)에 비해 더 나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해방에서 국가통제로


앤드류스는 생식기술의 잠재적 이용자들의 사회적, 심리적 적합성 여부에 대한 심사에는 반대하면서도 정자기증자나 대리모들에 대한 의학적, 유전적 심사의 필요성에 이르면 딜레마에 빠진다. ‘임신과 수태의 인자’들과 다른 신체기관의 시장이 점점 확대됨에 따라 받는 쪽에서 유전적, 전염성 질병에 대한 두려움도 커지리라는 점은 명백하다. 여기서 국가가 잠재적인 구매자를 보호하기 위해 개입할 필요가 생긴다. 국가통제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과정은 의료소송에 대한 병원과 의료진의 두려움뿐만 아니라 AIDS에 대한 공포로 인해 더 가속화된다. 이것은 민주주의에 살거나 전체주의에 살거나, 또는 영국처럼 사회화된 보건체계이건 미국처럼 사적인 체계이건 상관이 없다.

유기적 혹은 비유기적 전체를 점점 더 작은 입자로 쪼개어 새로운 ‘기계들’로 재조립하는 데는 선택과 제거라는 우생학적 원칙이 깔려 있다. 바람직한 입자는 선택되고 바람직하지 않은 입자는 제거된다. 생식의 영역에서 이러한 분해, 즉 ‘분리하여 지배한다’는 원칙은 임신한 여성을 ‘모체’와 '태아‘로 나누는 데서도 나타난다. 실제로 점점 많은 생식기술자들이 여성의 자궁을 태아에게 ’위험한 환경‘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모체와 태아간의 이러한 새로운 적대를 규제하기 위해 몇몇 사람들은 태아를 법률적 의미에서 완전한 인간으로 선언하고자 한다. 그들은 태아를 모체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태아권리‘를 갖는 한 인간으로 보기 원한다. 이를 위해 그들은 ’태아보호법‘과 이 법을 시행할 국가적, 법적 기제를 요구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태아가 환자로서 취급받는다는 사실이다. ‘결함이 있는’태아는 제거하거나 유전자치료로 손을 보아야 한다. 미국에서는 벌써 이른바 유전자결함을 갖고 태어난 아기의 부모들이 의사와 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한 사례가 몇몇 있다. 결함이 있는 태아를 제때 발견하여 유산시키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소송이 산모를 향해 제기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배상법 전문가 마저리 쇼는 “태아가 살아서 태어날 경우, 태아에 대한 태만행위에 대해 ‘장래에 관한 조건부 책임’을 지게 된다. 이 행위는 산모의 태만으로 인한 태아학대로 간주되며 손상을 입고 태어난 아기가 그 결과라 할 수 있다. (...) 임신 중 알코올 남용, 필요한 산전관리의 소홀, 부족한 영양섭취 등은 아기가 손상을 입은 원인이 될 수 있으며, 그 아기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태어날 자신이 권리를 침해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다.”라는 주장을 했다. 실제로 임신기간 중 의사의 권고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여성은 감옥에 갇혔다. 물론 이에 적합한 법률이 없었기 때문에 공소가 기각되었으나,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한 의원이 즉각 ‘모성태만’ 혹은 의사의 지시에 대한 ‘의도적 무시’의 사례를 다룬 법안을 제출하였다. 이것은 분면 자넷 갤러허가 지적한 대로 “가임기의 모든 여성에 대한 억압적인 복종과 강제의 체제로 이끌 것이다. 달리 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불임을 증명할 수 없는 모든 여성에게 매달 집행되는 임신검진과 조깅, 음주, 노동에 대한 허가서 발급? 병워이 감옥이 되고 의사가 경찰이 되면, 산전관리가 가장 필요한 임부들(가난한 여성, 어린 여성, 약물 남용자)은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산전관리를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앤드류스가 표명한 자유주의적 입장과 생명권운동의 주장 사이에 놀라운 유사성이 보인다. 앤드류스는 생명권운동이 낙태에 간한 자유주의적 입법을 철폐하려 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한다. 그녀는 인간의 신체, 특히 생식기관들이 재산, 즉 물건이라고 주장한다. 이 개념에 의하면 ‘생식자율성’이란 여성에게 소유자로서 이 재산을 몇 번에 나누어 팔거나 임대하는 등의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임신한 여성은 태아의 주인이고, 태아는 물건이 된다. 임신한 여성과 그 녀의 태아 사이의 공생관계 그리고 양자의 생명을 보호하는 살아 있는 관계는 상징적으로 파괴될뿐더러 새로운 생식기술에 의해 현실적으로도 파괴되는 것이다.

한편 생명권운동은 태아가 법률적인 의미에서 완전한 인간이며 임신한 여성의 임의적 간섭행위로부터 법적인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하고자 한다. 이 경우 역시 여성과 태아의 공생관계는 최소한 상징적으로 파괴되며 여성은 아이의 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여성의 신체 내에서 여성 자신과 태아 사이에 적대가 형성된다. 그리고 둘 다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의 개입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앤드류스의 주장에서 분명히 드러나듯 여기서 인간이란 신체 각 부분과 기관들의 단순한 조합에 불과하므로 물건으로서의 인간과 사람으로서의 인간 간의 차이는 사라진다. 생명권운동이 지키고자 하는 인간이란 결국 그녀/그의 신체기관의 주인 또는 매매인이다. 자유주의적 입장과 보수주의적 입장이 만나는 곳이 바로 부르주아적 재산 개념과 생식기술의 ‘진보’에 기초한 이런 새로운 형태의 경제적, 과학적 식인풍습이다.



개체에서 조합으로


앤드류스에 의하면 여성이 자기 신체에 소유주가 못되는 지금의 상태로는 자유로울 수도, 평등할 수도, 자율적일 수도 없다. 이 논리를 따르자면 여성들이 신체기관들을 사고 팔 수 있기 위해 자기 신체의 소유주가 되어야한다고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일 듯싶다. 하지만 사고 파는 자유란 그들 신체의 분해에 의존하며 이는 다시 한 사람의 ‘온전한’ 여성 --분해되지 않은--은 자유로울 수도 자율적일 수도 없다는 뜻이 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즉 그렇다면 사고 파는 사람은 누구인가? 만일 개인--즉 나누어지지 않은 인간--이 팔 수 있는 부분들로 나뉜다면 그 개인은 사라지게 된다. 계속해서 나눌 수 있는 조합만이 남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어디까지 이런 식으로 나눌 수 있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얼마나 많은 부분으로 분해되고 팔리고도 계속 ‘주인’과 ‘판매자’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다른 모든 부분을 떼어내도 좋고 팔아도 좋다고 결정하는 핵심부분 즉 남아 있는 ‘주체’는 무엇인가? 두뇌인가? 지정된 주체가 없다면 자율성과 자기결정에 대한 모든 논의는 결국 공허할 따름이다. 계약서를 쓰고 지키기 위해서라도 주체는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주체 즉 개인이 이론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제거되었다. 남아 있는 것은 각 부분들의 조합뿐이다. 부르주아적 개인이 스스로를 제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의 신체 내에서나 사회체제 내에서나 윤리적인 질문을 위한 자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서로 관계없는 부분들만 남은데다 각각이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처럼 서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원자화되고 적대적인 부분들이 모든 것을 기계적으로 한데 유지시키는 국가를 필요로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국가조차 더 이상 진정한 의미의 주체는 아니다.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기제이다. 이 기제가 인간의 가치를 경정하여 신장은 하나에 5만 달러, 자궁은 빌리는 데 1만 달러가 되었다. 이제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여성 -- 그리고 남성 -- 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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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윤리21> 중에서

123-125쪽


한편 죽은 자는 어떨까? 죽은 자와의 사이에 ‘합의’가 성립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장례식에서 죽은 자를 애도한다. 이것은 근대의 풍습이 아니라 원시시대부터 있었다. 비코(Giovanni Battista Vico, 1668~1744)는 이미 18세기에 “장례가 없는 사회는 없다”고 지적했는데, 그것은 죽은 자의 영혼이 살아 있는 자를 원망해 재앙을 불러온다고 믿었고, 그 때문에 장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을 믿지 않더라도 장례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장례의 목적은 죽은 자를 제외한 사회적 관계의 체계를 재확립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은 사람과 행방불명된 사람의 차이를 생각하면 분명해진다. 행방불명이 된 사람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없는 관계 체계를 반들 수 없다. 예컨대 남편이 행방불명일 때 아내는 재혼할 수 없다. 남편이 돌아오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단순히 생물적인 죽음이 아니라 사회적인 승인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장례는 죽은 자를 정리하고 ,그가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행해진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영혼으로 머물며 산 자를 원망한다는 생각은 그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것이다. 죽은 자를 애도하는 것은 특별히 그 죽은 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부재 때문에 불안정해진 공동체를 재확립하기 위해서고, 그 사람을 잊고 추방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았다.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전사자를 추모하고 있다. 또한 가토 노리히로라는 문예 비평가는 먼저 일본의 전사자를 애도하고, 그런 연후에 일본에 침략으로 죽은 아시아의 사자들을 애도해야 한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전후 일본인의 자기분열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애도한다’는 것은 마치 죽은 자와의 사이에서 ‘합의’가 성립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자가 ‘타자’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은 자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죽은 자는 어떠한 현실의 대상도 아니다. 죽은 자는 자신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산 자 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끊임없이 밝히는 기회며, 혹은 산 자가 그에게는 이미 현존하지 않는 죽은 자에 대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는 기회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분명히 죽은 자에 대한 의무 역시 안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변하는 법이 없다. 여기에서는 그대가 진 빚을 그의 탓으로 돌릴 변명의 가능성을 전혀 생각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그는 신실한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진실이다. 그렇지만 그는 어떠한 현실도 아니다. 그는 그대를 붙잡기 위해 무엇 하나, 정말이지 무엇 하나 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마약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가 변했다고 한다면, 그 경우 적어도 산 자가 변했음에 틀림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사랑의 기술”, 『키에르케고르 저작집』)


이것은 죽은 자가 바로 ‘타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죽은 자와 교섭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와 죽은 자의 관계가 변한다면 그것은 단지 뭔가 변했을 뿐이라는 말이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애도한다고 해서 죽은 자가 변하겠는가? 단지 그로써 산 자의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것뿐이고,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관계가 변하는 것이다.


 

 

 

 

157-169쪽


(일본이 저지른 태평양 전쟁에 대하여)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때 전쟁책임을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옥중에 있었던 비전향 공산당원들이다. 전쟁책임에 대한 추궁을 심화함에 따라 비전향자들은 그만큼 신성화된다. 진지하게 책임을 생각할수록 전향하지 않은 당 지도자는 위대해진다. 전후에 일본공산당이 가졌던 권위는 여기에 있었다. 이것이 전후의 정치와 사상을 왜곡시켰다.

이에 대해 오다기리 히데오는 「문학에서의 전쟁책임에 대한 추궁」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문학에서 전쟁책임이란 다른 무엇보다 우선 우리 자신의 문제다. 우리 자신의 자기비판에서부터 이 문제는 시작된다. 자유의 세계에서 속임수는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전쟁중의 우리가 어땠는가를 스스로 추궁하고 검토하며 비판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이 10년 동안 일본문학의 놀랄 만한 타락과 퇴폐에 대한 우리 자신의 책임을 밝혀나가고자 한다.


이 성명에 대해 몇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그들은 공산당 계열의 문학자였다. 더군다나 전쟁 전에 전향하고 전쟁 중에는 소극적․적극적으로 전쟁에 협력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반성은 무엇보다도 당을 배반했다는 것에 있다. 이 때 ‘전쟁책임’은 ‘전향’에 대한 책임으로 바뀌어 있다. 그러므로 그 책임은 공산당에 입당함으로써 완수된다. 혹은 그들의 '상처‘는 그것에 의해서만 치유된다. 그리고 그들은 공산당원으로서 이미 반성을 표명했기 때문에 ’반성‘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규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대량의 전향자를 낳았던 공산당의 현실인식 및 조직적 체질에 대한 반성은 없다.


(...)


(비전향=선, 전향=악이라는 도덕적 구별에 대해) 마루야마 마사오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공산당 -- 더 정확하게는 비전향 공산주의자가 전쟁책임의 문제에 대해 가장 꺼림칙하지 않은 입장에 있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들이 모든 탄압과 박해를 견디며 파시즘과 전쟁에 대항해온 용기와 지조를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쓰루미 슌스케가 비공산주의자는 전쟁책임을 지는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모든 영역에서 공산당을 포함한 합의 의 장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 것은 정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굳이 거론하려는 것은 개인의 도덕적 책임이 아니라 전위 정당으로서의, 혹은 그 지도자로서의 정치적 책임의 문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름 아닌 공산주의자 자신의 발상에서 이 양자의 구별이 종종 혼란을 일으키고, 명백하게 정치적 지도의 차원에서 추궁되어야 할 문제가 어느새 공산당원의 ‘분투하는 모습’으로 해소되어버리는 일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당면한 물음은 공산당은 애당초 파시즘과의 싸움에서 이겼는가 졌는가 하는 것이다. 정치적 책임은 결과에 대한 준엄한 책임이며, 더욱이 파시즘과 제국주의에 대해서 공산당의 입장은 일반 대중과 달리 단순한 피해자도 아니고 더더구나 방관자도 아니며 바로 가장 능동적인 정치적 적수다. 이 싸움에서 패배한 것과 일본의 전쟁 돌입이 설마 구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패장은 비록 그 자신이 아무리 최후까지 버텼다 하더라도 여전히 패장이며, 예상외로 적의 포격이 치열했다거나 그 수법의 잔인함, 아군 진영의 배신자 등을 이유로 들어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전략과 전술은 바로 그러한 일체의 요소를 내다보고 세워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을 가혹한 요구하고 한다면 처음부터 전위당의 간판 따위는 내걸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런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고 한다면 ‘죽어도 나팔을 놓지는 않았습니다’라는 식으로 저항을 자찬하기 전에 국민들에게는 일본 정치의 지도권을 파시즘에 넘겨준 점에 대해, 이웃 나라들에 대해서는 침략전쟁 방지에 실패한 점에 대해, 각각 당으로서의 책임을 인정하고 유효한 반파시즘 및 반제국주의 투쟁을 조직하지 않았던 이유를 솔직 대담하고 과학적 검토를 덧붙여 그 결과를 공표하는 것이 지당하다. 공산당이 독자적인 입장에서 전쟁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공산당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자나 자유주의자의 콤플렉스를 해소하고 통일전선의 기초를 강고히 하는 데도 적지 않게 공헌할 것이다.

(「전쟁책임론의 맹점」, 『전쟁과 전후 사이』)

 

(...)

그러나 마루야마는 공산당의 전쟁책임을 말할 때, 어디까지나 비전향자에 대한 도덕적 경의를 버리지는 않았다. 전쟁 중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채 방관자로서 보냈던 마루야마는 ‘비전향’ 지도자를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앞서 마루야마 마사오의 한계를 뛰어넘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요시모토 다카아키다.


(...)

나의 욕구로부터는 전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료하다. 그것은 일본 근대사회의 구조를 총체적인 비전으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텔리겐차 사이에서 일어난 사고변환을 가리킨다. 따라서 일본 사회의 열악한 조건에 대한 상상적인 타협, 굴복, 굴절 외에 우성유전의 총체인 전통에 대한 사상적 무관심과 굴복은 전향 문제의 중요한 핵심 가운데 하나다.

(「전향론」)

 

요시모토 다카이키는 이론과 현실의 어긋남을 무시하고 이론에 집착하는 ‘비전향’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전향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고바야시 다키지, 미야모토 겐지 등의) 이러한 비전향은 본질적인 비전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노 마나부, 나베야마 사다치카와 대조적인 의미를 지닌 전향의 한 형태였고, 전향론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비전향은 현실적 동향 및 대중적 동향과 접촉 없이 이데올로기의 논리적 사이클을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요시모토 다카이키는 여기에서 그때까지 도덕적으로 보였던 내용을 인식의 관점에서 보려고 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비전향자가 존경받는 것은 죽음의 공포와 육체적 고통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시모토와 같은 전쟁세대에게 그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라도 전쟁에서 죽을지 모르는 운명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옥중 생활 17년 같은 일은 그에게는 그다지 충격이 아니었다. 그에게 충격이었던 것은 최대한 열심히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놓인 상황을 인식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좌익적인 담론이 두절된 시대에 자랐고, 다가올 죽음에 대비해 어떻게든 그것에 의미 부여를 하려고 했던 학생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전쟁 중에 대동아공영권(아이사의 식민지 해방)을 믿은 파시스트였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특별히 이상한 일이 아니라 이 시기 대학생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내용일 것이다.

요시모토 다카아키에게 용서하기 힘들었던 것은 자신의 무지였다. 앞에서 나는 무지에 책임이 있는가 하는 것을 논했다. 전쟁세대들은 우리는 몰랐다, 배우지 못했다, 속았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시모토는 무지에도 책임이 있다는 태도를 취했다. 무지에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책임을 지면 되는가? 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도덕성에 대한이 비판은 그 자체가 극히 윤리적이라는 사실이다. 요시모토는 미야모토 겐지와 같은 ‘비전향’을 전향의 한 형태로 봤을 때, 실은 ‘본질적인 비전향’이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향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따라서 1970년대 이후 ‘현실적 동향 및 대중적 동향’과 함께 말 그대로 전향한 사람들이 그들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요시모토 다카아키를 떠받드는 것은 잘못이다. 나는 요시모토 다카아키가 경박하게 전향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내부에서 전후 초기에 가지고 있었던 일본의 ‘봉건유제’에 대한 대결 의지가 사라져버린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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