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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사상> 7월호 노회찬 인터뷰 메모

29-31쪽

 

[인터뷰어] 지강유철 : (...) 지식인의 사명이 바판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국민들이 세대와 성별을 망라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상중에 일부 지식인들이 쓴 글들을 읽는 일은 괴로웠습니다. "그 죽음 앞에서 한 달을 지속 못할 입에 발린칭송도 싸구려 신파조의 추억담도 모두 접"으라니! "이상주의자 노무현과 오만한 신자유주의자 대통령 노무현을 동시에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하되 기억해야" 한다니요. 비판이야 자유지만 국민들을 깔보는 언사는 불쾌합니다. 최소한의 예의는 좀 지키자는 겁니다. 우리 국민들이너무 쉽게 잊는다는 걸 기정사실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지식인들의 생각은 반쯤만 옳습니다. (...)

 

[인터뷰이] 노회찬 : 저도 그런 지식인들을 곳곳에서 봤습니다. 물론 지식인 전체가 그런 건 아닙니다. 저는 이 문제가 진보니 보수니 하기 이전에, 개혁이니 민주 이전에, 이 모든 것을 넘어서는 인간으로서의 자존심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예와 품격을 지켜야 하는가는 복잡한 문제가 아니지요. 다른 쪽에서 추모 인파를 비판하는 것은 그러려니 합니다. 그러나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부들이 그렇게 하는 걸 보면, 바로 그런 사고가 국민들과 진보세력의 간격을 좁히지 못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과 진보세력의 거리감은 그냥 생긴게 아닙니다. 뿌리가 있는 겁니다. 이성적으로는 맞는 말일지라고 상중에는 조심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지식인들은 사안 자체를 정확하게 못 보고 있습니다.

사실 촛불 같은 경우도 한 없이 미화만 할 문제는 아니거든요. 그 긍정적인 에너지를 예상도 못했던 사람들로서 '왜 우리는 예상을 못했는가', '우리는 촛불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따위의 문제를 정확하게 보아야 합니다. 자기들이 나서서 불을 지피면 언제든지 촛불이 타오를 것처럼 오버하면 안되죠. 물론 촛불도 한계가 있습니다. 작년에는 광우병 쇠고기 문제로 사람들이 많이 모였지만 용산참사 때는 그렇게 모이지 못했습니다. 시대적인 한계라는 게 있거든요. 때문에 지식인들이 자기들이 가르치면 사람들 의식이 바뀔 거라 생각하는 건 또 다른 극단적 사고라고 봅니다. 이것은 이것대로, 저것은 저것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3.1운동 끝났다고 독립운동이 끝났습니까? 3.1운동도 사회고학적으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운동은 독립운동의 큰 흐름에 영향을 미친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유사하지만 3.1운동과 다른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밑으로 다 연결돼 있는 거죠.

 

 

38-39 쪽

 

노회찬 : 이명박 정부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1987년의 성과 이전으로 되돌린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1987년 이전으로 되돌아가야 할까요? 그건 아닙니다. 6월 항쟁은 민주 대 반민주가 승리하는 기폭제가 되었고, 민주주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다시 권위주의 시대로 회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일시적으로 이명박 정부와 같은 반동의 시기는 있을지언정 민주화를 완가앟게 역전시킬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이제 명시적인 반민주 세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민주 출신인 한나라당조차도 자기의 과거를 지우고 문신도 지우고 자신들이 국민을 먹여 살리는 보수라며 변신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시대의 한 축이 될 수 없거든요. 여기에 맞서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 반민주세력을 상정하여 민주세력 다 모여라, 이렇게는 잘 안될 겁니다. 지난 대선도 그래서 실패했거든요.

이제 국민들은 모여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고, 너희들에게는 어떤 대안이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6월 정신을 계승하면서 이제는 7~8월의 노동자 대투쟁을 수용해야 합니다. 지난 20년간 6월을 이끌었던 사람들이 정권을 담당해왔습니다만 이 정권들은 7~8월의 노동자 대투쟁을 무시해왔습니다. 6월의 정신과 노동자대투쟁이 만나야 합니다. 노무현 정신은 구시대의 막내가 아니었습니다. 새 시대의 맏이의 지위에 있었던 겁니다. 다만 노무현의 현실이 구시대의 막내였던 것이고, 그 괴리감 때문에 여러가지 일이 있었던 거죠. 이제는 노무현 정신을 정신으로만 계승하면 안 되고 온전히 그 정신을 실현하는 데까지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되었습니다. 과거의 추억을 팔아서 정치를 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들더라도 그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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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나르시스의 꿈> 중에서

그러나 우리가 이 모든 것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존재의 깊은 어둠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그리스적/유럽적 철학을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적 정신이 보여주는 존재의 슬픔에 대한 감수성이 아무리 예민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리스적 정신 속에서 눈물과 슬픔은 아름다움 속에서 지양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인간의 모든 눈물은 함께 모여 아름다운 시내와 숭고한 바다를 이루기 위해 흐르는 것인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 피가 까닭도 없이 흘렀으며, 얼마나 많은 눈물이 흐르기도 전에 말라버렸던가! 그렇듯 시인이 아름다운 수정 항아리에 담아낼 수 있는 눈물은 인간이 흘린 눈물의 억만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하물며 황소와 개미와 나무의 슬픔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을 할 것인가?

물론 인간이 흘린 눈물의 억만분의 일이라도 아름다운 형상 속에 담아내는 시인들이 있음에 대해 우리는 고마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철학자가 시인의 눈으로 인간의 눈물을 파악하려 할 때, 그는 어김없이 인간의 슬픔을 모독하게 된다. (...) 마치 화가가 세상의 모든 색깔을 화폭 위에 불러모아 전체로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내듯이 이들 철학자들은 존재의 모든 모순과 슬픔을 총체성의 개념 속에서 지양하고 해소하려 하였다. 시인이 고통을 아름다운 형상에 담아 노래할 때, 그는 적어도 슬픔 속에 있는 사람을 위호할 수는 있다. 그러나 철학자가 시인의 흉내를 내면서 인간의 슬픔과 존재의 어둠을 하나요 모두인 청체성의 이념 속에서 해소하려 할 때, 그는 오직 자기와 남을 모두 속일 수 있을 뿐이다.

 

(...)

 

철학은 물음이다. 그리고 모든 물음은 정신의 동요에 뿌리박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종류의 동요인가? 우리의 철학자에 따르면 그것은 존재의 근원적 "도덕성"에 대한 동요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먹고 먹히는 세계에 대한 어떤 도덕적 동요이다. 모든 슬픔은 슬픔의 부정을 자기 속에 본질적 계기로 갖는 것이므로, 우리가 슬픔에 참여할 때 우리는 언제나 슬픔을 부정하게 된다. 그것이 절망적 현실에 대한 도덕적 동요와 거부감, 즉 모든 눈물과 모든 슬픔을 거부하는 우리의 양심이다. 이렇게 하여 철학은 모든 지음받은 것들의 눈물과 슬픔 앞에서 참을 수 없이 일렁이며 동요하는 우리의 양심의 소리, 양심의 논리를 따르는 생각의 여행길이 된다. 박동환은 이 길을 가리켜 "양심으로 내려가는 것"이라 불렀다.

양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려가는 것"이다. 낮아지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양심이다. 생각하면 양심이란 굳이 철학에서가 아니라도 흔하디 흔한 상투어이다. 그러나 양심을 말하는 것은 쉬워도 내려가 낮아지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스스로 내려가 낮아지지 않은 정신이 추구하는 양심은 십중팔구 독선에 떨어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타자를 억압하는 도구가 되게 마련이다.

생각하면, 서양철학은 양심적이다. 오늘날 땅 위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에 대해 눈뜨게 된 것은 서양정신의 선물이다 .그런 한에서 양심을 말하는 것은 진부한 상투어처럼 들린다. 그러나 서양철학이 양심적인 것은, 아름다움이 선을 포함하는 한도 내에서이다. 그 한계를 넘어서면 서양의 양심은 마비되고 침묵한다. 그리하여 비할 데 없이 숭고하고 순결한 영혼을 가진 철학자들이 범해서는 안 될 오류를 범한다. 절대자의 지ㅏ리에 선의 이데아를 놓았던 플라톤이, 단지 장애아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태연히 영아살해를 승인하고, 인간의 인간에 대한 어떤 종류의 자연적 지배도 인정하지 않았던 루소가 놀랍게도 여자는 자연적으로 "남성이라는 존재에 복종하도록 만들어졌으므로 일찍부터 부정(不正)에 복종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플라톤과 루소에게서 볼 수 없는 양심의 일관성, "양심의 진리"를 다른 철학자에게서 볼 수 없는 양심의 일관성, "양심의 진리"를 다른 철학자에게서 기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약자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말을 하지 않고 책을 끝맺는 철학자를 만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모두 서양정신이 양심은 알았지만 내려가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그들은 높이 치솟은 정신의 숭고를 알기는 했으나 "양심으로 내려가는 것"을 알지는 못했던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양심과 야만의 싸움의 과정이었다. 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직 인간의 정신이 높이가 아니라 내려가 낮아지는 법을 배울 수 있을 때, 참된 의미에서 양심은 꽃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양심으로 내려가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오직 낮은 곳에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자만이 그렇게 양심으로 내려가는 길을 보여줄 수 있지 않겠는가?

 

- 365 ~ 3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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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의 동일성과 자기정체성을 순수히 내재적으로 정립해오지 못했다. 내적인 공동체 구성의 논리에서 이미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자유와 자율성의 실현을 그 이상으로 삼아왔고, 대외적 관계에서도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후 단 한 번도 이질적 문화 ,적대적 세력에 의해 전면적으로 정복당해 본 적이 없는 서양의 역사와 비교한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든 자율성과 주체성을 추구하고 실현해온 역사는 아니었다. 게다가 개항 이후 식민지 경험과 역사의 단절은 우리의 역사를 내재적 동일성의 원리에 따라 파악하려는 시도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더 나아가 우리는 서구 문명과의 만남 이후 주체적인 자기부정에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고 극복하기 전에 외세에 의해 부정당했다. 모든 주체적 변혁은 좌절되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외세에 의해 철저히  수동적으로 규정되고 부정되는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

 

스스로를 내재적으로 정립하고 스스로를 부정하는 서양적 자율성과 주체성이 자기의식의 유일한 전범이요 원형이라면, 그리하여 우리 역시 주체적 겨레로서 자기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서양적 자기의식의 길을 따라야만 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서양문명의 불완전한 모방자에 그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초라해 보일 때, 우리의 가난을 신뢰하고 우리의 부끄러움 앞에 정직하자. 그리고 모든 전해들은 철학의 오염에서 벗어나 근원적 물음 앞에 마주서자. 도대체 우리는 언제 우리 자신을 하나의 주체로서 정립하게 되는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자기를 반성적으로 의식하고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할 때이다. 우리는 주체적 자기의식을 통해 자신을 근원적으로 정립하고 자기를 능동적으로 규정함을 통해 자기 자신의 존재에 내용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의식과 자기 규정은 오직 나의 자기반성 속에서만 발생한다. 따라서 자기의식을 통한 자기정립의 모든 비밀은 바로 이 의식의 자기반성에 놓여 있다.

그러나 나의 자기반성이란 무엇인가? 서양의 근대 철학자들은 그것을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과의 타자적 관계로 이해했다. 나는 그 자체로서 나 자신에 대하여 타자이다. 내가 남이 아니라 나 자신과 타자적인 관계 속에 있을 때, 그것이 반성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때 타자를 무엇으로 이해하는가? 그것은 내가 나에게 인시적 대상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내가 나에게 '그것'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여기서 자기의식성의 타자성은 나의 나 자신에 대한 비인격적 대상성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모든 오류가 시작된다.

칸트든 헤겔이든 의식의 자기반성을 본질적으로 의식의 자기규정으로 이해한 점에서 독일관념론의 자기의식 이론은 근본적 오류속에 빠져 있다. 즉 그들은 모두 자기반성을 능동적 주체인 내가 수동적 객체인 나를 의식하고 규정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자기반성을 설명할 때, 자기의식은 나의 나 자신에 대한 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내가 나 자신과 인식적 관계를 맺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내가 나를 의식할 때 나는 물건이 아니다. 나는 나를 타자적으로 의식하되 물건이 아니라 인격적 주체로서 의식한다. 그럼에도 불굴하고 그들은 내가 나를 대상적으로 의식한다는 이유만으로, 의식되는 나를 3인칭의 '그것'으로 사물화시켰다. 그리하여 자기 의식에 의해 개방되고 지탱되는 세계에는 오직 주체인 '나'와 객체인 '그것'이 존재할 뿐이다. 이들 이외에는 신이 있을 뿐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자애로운 신이 나의 삶에 심술궂은 간섭을 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그것들'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능동적인 주체로 군림할 수 있다.

 

(...)

 

이 모든 오류는 그들이 의식의 자기반성을 자기규정이라고 생각한 데 기인한다. 그러나 반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나 앞에 마주서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때 내가 마주한 나는 결코 사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사물이 아니라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가 반성 속에서 나와 마주설 때, 마주서는 나의 이름은 '그것'이 아니라 '너'이다. 우리는 우리 앞에 마주선 사물을 향해 '그것'이라 부른다. 그러나 내 앞에 마주선 인격은 '그것'이 아니라 '너'이다. 그리하여 나의 자기반성이란 나를 내가 대산적으로 규정하는 자기규정의 행위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말 건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자기규정이 아니라 자기와의 대화이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에게 규정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상대자로 마주서는 한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자립적인 너로서 대립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너와의 관계, 너와의 대화 속에서만 나를 실현한다.

내가 너와 관계할 때, 나는 능동적인 동시에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내가 능동적이듯 너 또한 능동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식의 수동성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 이전에 나의 너에 대한 의존성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우리가 나의 수동성과 의존성을 배제한 채 나의 자기의식의 진리를 해명하려 한다면 우리는 자기의식의 본질을 왜곡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자립적인 너를 나 속에 품을 때에만 내가 된다. 나는 너에 의해 침투되어야 하며 또한 너 속에서 나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나와 너의 이러한 상호이행 속에서 내가 나르 상실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된 나르 실현하지 못한다. 자기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고 내재적으로 자기의 동일성을 정립하고 자기를 ㄸ환 내저적으로 부정하려는 사람은 결코 참된 의미의 자기에 이를 수 없다. 오직 너를 위해 자기를 양도하는 자만이 기르고 너로 인해 자기를 상실하는 자만이 진정한 자기, 참된 나에 도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의식이 란 나와 그것의 상호이행이 아니라 나와 너의 상호이행에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내가 너 속에서 나를 상실하고 나 속에서 너를 품고 너와 대립하는 것은 내가 나 속에서 나 아닌 너를, 자립적인 생명을 잉태하기 위함이다. 자기의 동일성이 파괴될까 두려워 자기 속에 너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 너 속에서 나를 상실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오직 자기 속에서 자기 자신과 관계하려 한다. 그러나 너를 사랑할 줄도 모르며 너로 인해 나를 상실할 서양적 자기의식은 병든 나르시시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자기도취와 나르시시즘에 뿌리박고 있는 서양정신은 영원한 처녀신 아테네처럼 품위와 단정함을 지킬 수는 있겠지만 아무것도 잉태할 수 없고 어떤 새로운 생명도 출산할 수 없는 불임의 지혜이다. 그리하여 서양 문화는 아무리 우아해 보인다 하더라도 타자를 이용하고 소비할 뿐, 참된 의미에서 타자를 잉태하고 생산하지 못하는 불임의 문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임신 중이다 .임신은 오직 너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리고 너를 나 속에 품게 된 나는 홀로 있을 때의 안정과 균형을 상실한다. 너를 나 속에 품은 정신의 동요는 임신한 정신의 입덧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아무리 어지럽게 만든다 하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생명, 새로운 역사의 탄생을 예고하는 가슴의 울렁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에게 느끼는 낯설음과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하는 우리 의식의 철저한 부정성을 기꺼이 긍정하자. 이 모든 혼란과 고통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 모든 이들이 견뎌야 할 입덧이므로.

 

- 374 ~ 379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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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경제학

한겨레21에 재미난 기사가 실렸다.

 

청년 DJ와 대통령 DJ의 가상대화

 

이런식으로 깔끔하게 한 인물의 다른 두 시기간의 대화를 구성해낸 정도면 기자가 얼마나 DJ의 저서를 열독했는지 눈에 선하다. 내가 사회복지학과를 입학하고 공부한 몇 안되는 사회복지관련 개념들 중에 제일 오랫동안 나를 (물론 나 뿐만은 아니겠지) 괴롭힌 주제는 바로 "생산적 복지"였다. DJ가 99년 전면에 내걸어 그의 '대중경제론'이 현실화되는 경로라고 여겨진 이 "생산적 복지"는 <민주주의와 함께 가는 시장경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달고 세상에 나왔다. 물론 <한국 사회복지 성격논쟁>에 참여한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듯이, 생산적 복지는 기든스가 제창한 제3의 길의 변종에 불과한 것이지만, 위 기사를 보면 그렇게 간단히 볼 문제도 아니겠다는 생각이 든다. 뭔 소리냐 하면, 신자유주의가 안착화되기 시작한 90년대의 한국과 영국의 경우를 놓고 생각했을 때, 생산적 복지가 갖는 정책적 위상은 어쩔 수 없이 한계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갖는 '역사적 함의'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뭐 내가 직접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그가 71년 대선에서 처음 세상에 발표한 대중경제론은 그 당시 관점에서는 매우 급진적인 사상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또 따지고 들자면 이광일 교수가 평가하듯이, 그것도 케인즈주의적 국가개입이 어느정도 관철될 수 있는 자본주의 호황기에나 내놓을 수 있는 경제플랜일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의 체계적인 담론을 당시 척박한 남한 땅의 지식 풍토 속에서 일궈 낼 수 있었다는 것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덤으로 대중경제론을 작성하는데 박현채 선생을 비롯한 당대 최고의 브레인이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간 믿음이 가기도 한다.)

 

그런데, 이 대중 선생의 대중경제론이 '대중참여경제론'으로 이름을 바꿔 재출간되는 시점과 맞물려 어쩜 이렇게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걸맞는 이론이 될 수 있었을까? 물론 (세번째로 나오는 '물론'이다 ㅋㅋㅋ) DJ정권 당시 초대 경제수석을 지낸 김태동 교수의 증언처럼 97년 말 당시는 IMF를 등에 업은 미국 재무부 차관보가 유력 대선 후보 3명을 면접을 보고 협박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아서 울며겨자먹기로 IMF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도 있다. (프레시안 관련기사 보기) 하지만 그렇게 구렁이 담넘어가듯이 DJ선생을 평가하기에는 그의 사상적 변화가 뚜렷해 보인다

 

DJ선생은 90년대에 앨빈 토플러의 <제3의물결>을 읽고 뿅 가셨단다. <제3의 물결>이 무엇인가? 정보화 혁명의 도래를 이야기하며 이에 걸맞는 유목적 인간으로 재탄생 할 것을 종용한 책 아닌가? 그런 주장에 동감했던 그가 IMF의 요구를 억울하게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했을까?

 

어찌되었든 간에 DJ의 사상적 변화는 남한 재야인사의 정치적 위상 변화와 함께 시장주의가 내면화된 여정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에도 장날 엿장수들마냥 DJ의 유훈이랍시고 '민주대연합론'을 부르짖는 이들이 있는 걸 보면 DJ노믹스에 대한 제대로된 평가가 이루어지려면 한 10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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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선택한 내 9월 독서목록

 

 

1. 민족경제와 민족운동 (박현채 저, 창비, 1988)  

 

 

 

2. 대중참여경제론 (김대중 저, 산하,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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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한 하루, 씁쓸한 할배들의 몽니

행인님의 [조갑제는 제2의 허경영이 되고픈가?] 에 관련된 글.

 

 

오늘부터는 차분히 책도 읽고, 그동안 준비만 하고 있었던 자격증 시험 공부도 시작하려고 했는데 아침부터 운전면허 도로주행 시험에 떨어지고 나니 완전 기분이 어그러졌다. 재교육과 재시험은 9월 초에나 가능하다고 하니 이거 원... 지난번 코스 시험에서도 그랬는데, 평소에 잘 되던 부분에서 뽀록이 나버리니 기분이 더 엉망이다. 절반도 못 달리고 실격처리 되어버렸으니....

 

제대로 베베꼬인 기분으로 들어와서 인터넷을 또 하염없이 뒤적거리다보니 행인님의 조갑제에 대한 논평이 돋보인다. 난 사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에 우리 할배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가 사뭇 궁금해서 포털에서 난리를 치기 전에 이미 인터넷 독립신문과 조갑제닷컴을 뒤져보았다. 예상치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국장 반대운동이라니... 게다가 어디서 그런 자신감을 잡수시고 오신건지 국민의 95%가 김대중을 싫어한다고... 솔직히 다른거 다 접어두고 '글로벌 스탠다드'의 기준으로만 치자면, 독재자로 명성이 자자한 박정희보다는 노벨평화상 수상한 김대중이 더 인물이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아닌가? 설마 우리 할배들께서는 노벨 위원회도 빨갱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사족: 물론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알몸으로 드러누워 투쟁하는데 군홧발로 짓이기고, 롯데호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사지로 몰아 결국 임산부까지 유산시킨 화려한 '전적'은 김대중이라는 한국사에 전무후무한 인물을 평가하는데 빠져서는 안될 대목이지만 말이다.)

 

이런 할배들의 작태를 보고 있자니 얼마전에 읽은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열외인종 잔혹사>의 장영달 옹이 생각났다. 월남전 참전 용사이자 자랑스런 애국시민으로서 매일 아침마다 파고다공원에 나가 시국강연을 하시며 종로에 있는 기원에서 박정희 신을 접신했다는 여인네의 강연을 들으며 뽕을 잡수시는 장영달 옹께서, 이번 국장을 통해서 박정희 신과 반란 선동꾼 김대중을 같은 반열에 올려놓는데 비분강개하여 소설의 벽을 박차고 현실로 나오신 듯 하다. 이들은 국장을 하게 되면, 소설 속에서 그려진 코엑스몰의 십헤드 카니발과 같은 난동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걸까? 양머리를 뒤집어쓴 테러분자들의 집단 난동?

 

우리 할배들의 씁쓸한 몽니를 보고 있자니 주원규씨의 그 훌륭한 현실 묘사가 다시 떠오르면서 안 써도 될 글을 그냥 또 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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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노무현, 김대중... 그속에 우리는??

올해 들어서 안타까운 죽음이 너무나 많다. 용산참사로 희생되신 분들의 경우가 가장 가슴이 아프지만, 이 나라의 거목들이 줄줄이 스러지는 것도 용산의 경우만큼은 아니어도 가슴이 쓰리긴 마찬가지다. 김수환, 노무현, 김대중. 올 해 들어 세명의 거목들이 스러졌다. 물론 노 전 대통령을 제외한 두 사람은 내 인생 자체와 별 상관이 없던 사람이긴 하지만, 요즘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이 세 사람이 세트로 연결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몇 달전 노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묻지마 추모'열기에 거품무는 글을 쓴 적이 있긴 하지만, 나도 개인적으로는 그의 죽음이 안타깝다. 그래도 한 시대를 풍미했고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우리'(??)를 '대표'(??)했던 이였는데, 그런 감정이 조금이라도 안 든다면 이상할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노 전 대통령이 '자살'이라는, 정치인으로서 상상해 볼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해서 너도 나도 충격이 장난이 아니었는데, 이번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는 그 때의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임기 당시에도 '그 노인네 임기만 채우면 다행'이라고 걱정 아닌 걱정을 하던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분위기가 덤덤 한 것 같다. 물론 나 또한 그렇다.

 

이렇게 '뜻하지 않게' 차분한 분위기 때문인지 좀 딴 생각이 든다. 김수환 추기경 때도 그렇고, 노 대통령때도 그렇고 소위 '좌파'라는 사람들은 (물론 나도 그랬지만) 참 냉소적이었다. 물론 게 나쁜 건 아니다. 5년 내내 그의 정책이 맘에 안들었는데 죽었다고 "그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라는 맘에도 없는 고백을 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런 면에서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은 참 솔직하고 당당한 사람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어느 누가 죽어도 그럴 것 같다는 거다. 물론 좌파에게는 '열사'가 있긴 하지만 '열사'의 영정 앞에서 오열하는 것은 희생된 자에게 느끼는 연민과 고통이지, 일부 사람들이 노무현과 김대중의 영정 앞에서 드러냈던 것과 같은 '존경'과는 사뭇 다른 것일테다. 사회적으로 명성이 난 어떤 이가 이승을 떠나도 그렇게 '쿨'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는 원래 나쁜 놈이었으니까 당연하다고 말하기에는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왜냐면 그런말이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좌파'가 존경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니까...

 

사실 이건 좀 비극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가 다 같이 보고 배울 만한 '스승'이 없다는 거.... 내가 아직 한 세기로 따지면 1/4분기 정도밖에 안 살아서 잘은 모르지만 좌파가 다 같이 존경하는 그런 스승이 아직은 없는 것 같다. 전태일 열사 정도가 있으려나? 김진균 교수 돌아가셨을때는 어떤 분위기였을지 세삼 궁금해 진다.

 

그리고... 이런 얘기 미리 하는 건 완전 무례한 말인 거 알지만, 백기완 선생님이 돌아가신다면 좀 많이 슬플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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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데이비스,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 3장 요약

제3장. 노동진영의 몰락



1983년말, 레이건의 ‘경기회복’이 한창인데도 또 한차례의 양보와 임금삭감 물결이 AFL-CIO의 핵심부에까지 파고들어 노동평화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다. 현재 기업들은 상시적으로 노조를 파괴하고 있으며,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그들의 작업은 1920년대 초반의 ‘미국적 방식’ 공세 이후 가장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사실상 그때보다 더 놀라운 것인데, 왜냐면 외관상으로나마 영구적인 노사화합을 제도화하고 ‘보장’한 관료적 장치 전체가 변질되거나 혹은 아예 포획되는 일마저 필히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주 인용되는 그람시의 발언을 다시 한번 상기해본다면, “위기란 다름 아니라 낡은 것이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공장 내의 새로운 의사소통망, 이윤공유 임금구조, 더욱 인간적인 경영실천 등을 기반으로 하여 노동자들이 산업에 ‘참여’하는 새시대가 왔다고 경제신문 사설란에서 시끌법석 떠들어댔지만, 노사관계의 새로운 정착이 신속하게 이루어질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대신 이 새로운 질서의 초석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의 자리에는 고참노동자의 특권과 권리를 내주는 대신 직장을 보장받는 것, 그리고 무노조 첨단기업이 채택한 종신고용제(그러나 종신고용인들 뒷주머니에 해고통지서가 찔러넣어져 있는)가 자리하고 있다.


임금관계의 사회화


미국의 산업화관정에서는 계급관계가 토지소유 귀족 계급에 잔존해 있는 온정주의나 혹은 행정적으로 강력한 국가기구의 개입에 의해 조절된 적이 없었다. 실제 미국에서 사회보험이나 보호입법을 제공함으로써 자유방임주의적인 임금관계를 개선하려는 시도는 1차대전 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생겨났다. 이 시기에 전국적인 규모에서 임금관계를 조절한 적이 약간이라도 있었다면, 그것은 이민정책, 노동관계 금지명령(법원이 노동자의 파업이나 농성과 같은 행위를 중지하도록 명하는 강제적 명력) 및 공화당의 관세정책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기업의 시장지배력과 생산성은 혁신되었지만, 연방정부의 경제규제와 사회적 구매력의 더딘 성장과 마찰을 빚는 상황 속에서는 노동자의 이직률과 생산량의 제한 그리고 공장노동자의 근로의욕과 같은 문제들이 새로운 생산체제의 잠재력을 실현하는 데 주요한 장애물이 되었다. 대기업 규모의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면서, 자본은 노동자를 강제하는 혁신적인 새 기술을 획득했지만, 동시에 가족회사 특유의 낡은 종정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합의의 원천을 찾아낼 필요 또한 한층 커진 것이다.


복지자본주의인가 단체교섭인가


제1차 세계대전 전야에, 합의로써 강제를 보강하면서 임금관계를 조절해야 한다는 전반적인 문제에 대하여 ‘복지자본주의’적 해결책이 등장하였다. 포드는 국가의 사회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회사의 ‘복지정책’은 단지 산업군주의 의무만이 아니라 높은 생산성의 전제조건이자 원천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깨달은 최초의 산업가 중의 하나였다.(ex: 일급 5달러 제도) 새롭고 과학적인 인사관리를 통해 공장생활과 가계경제 전체를 관리하는 한편, 생명보험계획, 회사연금 및 주식구매계획 등은 점차 흔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이 복지자본주의는 내포적 축적체제(regime of intensive accumulation: 조절이론의 개념으로, 자본구성의 상승에 따르는 사회적 노동조직의 심한 변형과 급속한 생산성 증대, 그리고 투자 증대의 계획화를 특징으로 하는 축적체제)에 적합한 노사관계 계획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는 모순점 두 가지를 갖고 있었다. 첫째, 종업원의 합의와 대표라는 행복한 외관을 지탱해 준 것은 작업반장과 회사 보안과가 행사하는 일상적인 테러였다. 둘째, 복지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생산성 증가에 맞추어 유효수요를 조정하는 ‘거시적’인 문제에 대한 ‘미시적’인 해결책에 불과했다.


전국전시노동위원회(NWLB)는 단체교섭의 제도적, 실질적 질서를 창출하는 터전이 되었다. 작업장에서 고충처리절차를 보편화하고 최종중재의 관행을 확립하는가 하면, 거기서 마련한 임금결정절차는 나중에 산업 전부문에 걸친 임금기준표들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한편 NWLB는 연공서열제 이상의 근본적인 경영자 통제권은 노조에게 하나도 양보하지 않은 채 노동자의 자율조직을 공장질서 속으로 통합시키는 규칙과 절차를 선구적으로 만들어냈다.

미국의 노동관계를 전후의 단체교섭의 형태로 바꿔놓은 것은 자동차 노조와 제너럴 모터즈사 사이의 끈질긴 투쟁이었는데,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1>소득을 임금과 이윤으로 나누는 기존의 분배방식을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2>생계비와 생산성과 같은 객관적인 경제적 사실들을 임금결정 요소로 명백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임금은 정치력에 의해 결정되며 이윤은 잉여가치라고 보는 모든 이론을 내팽개치고 말았으며 3>관리기능의 중요성과 경영이 노동자의 이익으로 직접 작용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한 몇 안되는 노조협약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미국의 노사관계와 국제포드주의


미국체제의 두드러진 특성은 전국이나 주의 정치권에서 노동자의 독립적인 정치적 대표체가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미국에서 단체교섭은 법적으로 대표단에 대한 개인의 동의라는 고전적 자유주의 개념에서 유래된다. 노동조합의 합법성이 개별적인 동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법에 규정된 미국노조의 권리는 잠정적이고 취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우익측의 반(反)노조운동은 항상 ‘개별 노동자의 권리’라는 제퍼슨식의 언어로 수행되었다.

미국의 사회입법은 놀랄 만큼 억제당해왔는데, 그 보상으로 단체교섭의 영역이 확장되어 북지규정의 협상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유럽에서라면 시민권에 기초한 사회임금(social wage)으로 노동계급에 귀속될 것이 미국에서는 특정한 고용주집단과 그들의 노동자집단 사이의 사적인 계약에 의해 협상된 거치임금으로만 손에 넣을 수가 있다.

유럽의 경우 노사협약이 일반적으로 단기간 동안 유효한 최소한의 기초만 제공하고 그 나머지 세부사항은 전부 지부단위에서 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노사협약은 구속력이 있으며 협약기간도 오래간다. 그것은 대개의 경우 파업금지 규정을 담고 있으며 적용대상이 광범위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그 내역이 극히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다. 이 때문에 필히 상당한 수의 노조관료를 필요로 한다. 미국에서만큼 노사관계가 하위체제적 자율성을 갖고 재생산되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법적 관료화와 중재) 이것의 추진논리는 노조관료와 기업경영자가 공모하여 단체교섭의 ‘국가관리’를 방지하거나, 전후 영국에서 독자적인 작업장 대표 조직의 힘으로 성취한 것과 같은 ‘이중권력’의 출현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불웨어주의: 첫 번째 불길한 징조


노사관계 이론가들은 이런 단체교섭을 틀을 물신화한너머지 노동관계와 경제민주주의가 역전 불가능한 ‘성숙’에 달했다고 추켜세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평조합원으로부터 노조 간부진으로 권력을 근본적으로 이양한 점, 단체교서이 보편적이지 못한 점, 노동시장이 분할된 점 등으로 인하여 기층노동자의 참여가 저조했다.


IBM은 60년의 역사 동안 노사분규에 단 한 시간도 빼앗긴 적이 없는데, 그것은 이 회사가 독보적인 성장과 이윤을 기록함으로써 종신고용제를 어느 정도 보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고충처리절차 대신에 그 유명한 ‘언로 개방’을 확립하여 종업ㅂ원이 직접 최고경영자에게 호소하도록 한편, 종업원의 근로의욕을 추적, 감시하기 위하여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런데 이런 방식이 GE의 인사관리자 불웨어를 시작으로 경영자 주도방식에 초점을 맞춘 노사관계 모델로 변형된다. UE가 최초로 전기산업의 모든 공장에서 조업을 중단한 1946년 파업이 전환점이었는데, 이에 불웨어는 듀퐁사에 의해 기발된 반노조적인 선전선동을 거리낌없이 채용하고 최신의 마케팅 방법을 전개하여, GE의 노동자들을 회사측으로 돌리려고 했다. 그는 자기회사의 노동자에게는 자유기업체제를 판매하고 대중에게는 전구를 판매하는 방식을 드러냈다. CIO가 UE를 공산당이라 하여 축출, 비방하여 노조를 파괴함으로써, GE의 이데올로기적 공세가 더욱 가열되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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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무례한 복음>

 

 

한참 한글2002를 켜놓고 마이크 데이비스의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 3장을 요약정리 하고 있다가, 너무나 반복적으로 나오는 AFL-CIO가 민주당과 붙어먹으려다 뒷통수 맞았다는 얘기들에 질려서 간단히 서평이나 써볼랜다.

 

사실 이 책은 이택광 교수의 블로그(wallflower.egloos.com)를 하루에 한번씩 꼭 출석체크하는 사람에겐 별로 신선한 느낌을 줄 수 없는 책이다. 왜냐면 이 책에 실린 글이 대부분 블로그에서 한번쯤은 언급했던 내용들을 정리해서 시간순서대로 실은 것이기 때문이다. 난 솔직히 저자가 여기저기 신문같은 데에다가 기고한 칼럼을 묶어서 책으로 내는 것은 어떤 면에선 참 뻔뻔하고 종이낭비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런면에서 이택광 교수의 이 책은 좀 너무한 면이 있다. 물론 이명박 정부 들어서고 나서 지금까지 터져나온 숱한 사건들과 문화적 현상들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면서, 그가 줄곧 이야기하는 '쾌락의 평등주의'와 '먹고사니즘'이 어떻게 관철되고 있는지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줄 수 있는 매체라는 면에서는 훌륭하기는 하다. 그럼에도 난 이런식의 출판행태가 저자의 저서목록을 하나 더 추가해 주어 그의 '이름빨'을 날리는데에 기여하는 것 외에 어떤 긍정적인 면이 있을지... 심히 의심되는 바다. (그런면에서 박노자가 한홍구 교수도 쫌 거시기하다.)

 

각설하고, 어쨌든 이 책에서 주요하게 이야기하는 주제는 바로 앞에서도 말했듯이 '쾌락의 평등주의'와 '먹고사니즘'이다. '쾌락의 평등주의'라는 것은 올 해초 나온 <당신은 왜 촛불을 끄셨나요>에서 그가 실린 글에서 제기된 뒤로 조정환과의 논쟁에서 주요 공격타겟이 되기도 했던 개념이다. 솔직히 나도 <당신은 왜...>에서 이 개념을 접했을 때에는 뭔가 억지스러운 개념이란 생각이 들었던게 사실이다. 이것은 분명 나뿐만은 아닐텐데, 왜냐면 촛불집회를 통해 '쾌락의 평등주의'를 유추해내기에는 그 당시 거리로 나왔던 주체들의 행동양식이 '쾌락'보다는 '윤리'에 더 가까웠다고 보는게 일반적 상식이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촛불집회를 관통한 대중의 무의식이 왜 '윤리'보다는 '쾌락'에 가까운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충분히 해소해 준다.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분석의 시간대를 97년 IMF 이후 변화된 한국사회에서의 대중의 존재양식과 욕망구조 변화를 살펴봐야 하는데, 저자는 정확히 그런 관점에서 이명박 정부와 용산참사, 금융위기, 그리고 김연아와 원더걸스, 게다가 '1박2일'과 '우리결혼했어요'같은 예능프로그램 분석에 까지 손을 뻗친다.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한국사회 대중의 욕망은 "네가 즐기는 만큼 나도 즐겨야 한다는 한국적 방식의 평등주의"이며, 그런 류의 먹고사니즘이 경제로부터 정치를 소외시켜 경제지상주의를 내걸은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켰다. 한편 그런 욕망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통해 좌절을 느끼자 대중을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었으며 여기서 그동안 '평등하게 쾌락을 누릴'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던 10대가 부각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10대들은 성공한 10대의 표상인 '김연아', '원더걸스'가 될 것을 강요받는, 존재하지만 존재할 수 없는 이들로 고정되고 만다.

 

대충 이런 식의 설명들을 한권의 책으로 읽어내고 나야 '쾌락의 평등주의'가 작동된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왜 우리는 용산참사에서, 쌍용차 파업에서 2008년 5월과 같은 열기를 다시 볼 수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와 동등한 '쾌락의 주체'가 아니라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강제하는 새로운 합의가 "어떤 이들은 우리보다 더 평등하다"라는 문장 속에 담겨져 있다면, 그 '우리'라는 주체는 '더' 평등한 존재가 되기 위해 싸울 준비를 하는 이들이다. 그냥 평등한게 아니라 '더' 평등하게!!

 

"more th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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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데이비스,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 2장 요약

제2장. 미국 노동계급과 민주당의 불임의 결혼



1933년 브리그스 자동차공장 파업에서의 주된 두 가지 요구는 평조합원이 통제하는 공장위원회를 회사측이 인정할것과 작업반장과 생산라인 감독의 권한을 제한할 것 등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7년 후, 자동차노동자연합(UAW)과 제너럴 모터스(GM)가 맺은 ‘디트로이트 협정’은 평조합원이 직접적 노동과정에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요구를 무산시켜 버리고 대신 이를 생산성 증가에 따라 임금과 각종 부가급여를 인상하는 것으로 대체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흔히 새로운 산별노조가 점차 관료주의화한 탓으로 치부되어왔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산별노조가 관료주의의 틀 안으로 화석화되는 과정과 조합원대중 전투성의 내용과 궤도가 변화하는 과정 사이에 존재하는 좀 더 깊고 다면적인 변증법적 관계를 짚어내지 못했다. CIO가 이전 시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은 모순적인 것이었다. 이는 한편으로 이전 시기들에서 누적된 패배(곰퍼즈식 직능별 조합주의, 가톨릭 노동계급과 민주당의 강요된 결합 등)와 다른 한편으로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과 노동기사단이 지펴놓은 꺼지지 않은 불씨를 물려받았다. 여기서 CIO의 모순적인 가능성들과 피규정성들을 좀 더 신중하게 평가려면, 이들 사이에 형성된 긴장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1. 브리그스 파업에서 플린트 파업까지


CIO 형성기에 관한 역사에서 그다지 부각되지 않는 다음 사실을 우선 거론하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새로운 노동조합운동의 기바니 된 전투적인 노동자의 대부분은 1900-20년 ‘신新이민’의 2세인 노동자들이었는데, 이들은 노동조합운동가로 활동하는 동시에 뉴딜정책의 선거보루로 동원되어갔다. 이들은 대부분 급격한 도시화의 향연 속에 살면서도 빈민계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더 이상 부모의 언어나 농민적 미신에 구애받지 않으면서도 직업적으로는 반(半)세습적인 미숙련 육체노동의 질곡에 동결된 채 도시의 빈곤과 시대의 혹독함을 감수해야만 했던 이 2세 노동자야말로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둘째, 1933년 산업노동자의 봉기가 시작되었을 때, 봉기의 주된 관심은 상당히 비(非)경제주의적인 요인들이었다. 당시 미국의 전형적인 공장은 능률적인 공업기술과 노골적인 폭력이 결합된 일종의 소규모 봉건국가로서, 파시즘국가의 노동부장관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따라서 당시 노동자들의 요구는 작업장에서 나타는 전횡에 대한 반대였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산업유형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띠었다. 예컨대 버팔로 철강공장에서는 작업반장이 관장하는, 셰이프업(지원자들이 매일 아침에 작업장에 나와 일렬로 늘어서면 조합 혹은 회사의 간부가 일거리를 줄 사람을 선정했음)이라는 고용방식이, 자동차노동자들에게는 조립라인의 무차별적인 속도증가가 불만사항이었다.

셋째, 사실 원래의 CIO는 중요한 재정자원과 지배권력 고위층의 우군을 확보한 반대파 노동조합 관료들의 동맹으로서, 산업별 공장위원회와 반란적인 지부조합을 중심으로 이미 존재하는 대중운동을 말아먹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반란은 노조의 공식 지도자들의 자비 덕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편에서는 공장의 핵으로 심어놓은 혁명적 기간요원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들로 궝송된 비공식적인 그룹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2세 반숙련노동자들의 전략적 그룹들과 굳건한 동맹을 맺기 시작했으며, 이 전략적 그룹들은 다시 비공식적인 작업장 그룹들과 민족별 연계조직망 등 숨어 있던 역량을 동원했던 것이다. 이런 흐름속에서 전국적으로 AFL의 지부설립 허가 신청이  쇄도하는 등 이 시기에 미국 노동운동의 대중적 참여도가 가장 높게 올라갔다. 그런데 이는 AFL을 지배하고 있던 허친슨, 프레이, 월 등 우익 삼두체가 대표로 있는 직능별 ‘동업인협의회’에 몹시 고통스러운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이들은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새로운 조합원을 당분간 ‘연맹지부조합’에 강제로 가입시켜(지역본부에 가입시키지 않고 연방의 전국본부로 직접 가입시킨다는 의미) 기간산업의 조직화운동에 대한 독재적 통제력을 그린(William Green)위원장이 임명한 AFL의 ‘전문적인’ 관리들에게 맡긴다는 방침이었다. 이후 AFL은 평조합원들의 반란을 와해시키고자 온갖 획책을 벌이고, 이로 인해 전투적인 평조합원들과 지도부 사이에 빈번한 불화가 발생하여 이들이 AFL을 대거 탈퇴하도록 만든다.


1936-7년의 1년간, 자동차와 고무 및 전기 산업의 공장원회들은 미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창조적인 투쟁을 벌였다. 이 투쟁에서는 매우 소중한 두 가지 자원이 활용되었는데, 그 하나는 앞세대의 세계산업노동자연맹원들이 개척한 평조합원의 단결과 창의성을 기반으로 한 연좌파업과 대중적인 피켓이었다. 또 하나는 좌파, 특히 공산당원들이 제공한 양질의 전략적 지도 및 공장간 조정역할이었다. 이 시기에 세계산업노동자연맹원들로부터 유래한 고도의 참여주의적, 평등주의적 투쟁전통은 조직, 규율, 전략을 강조한 미국 레닌주의의 최상의 요소들과 결실있는 종합을 이루었다. 특히 연좌파업은 회사재산이라는 성역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한편 노동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집단적인 힘을 앞서 보여주는 전술이었다. 당시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재산권보다는 인권을 우위에 두는 집단적 풍토가 강할 뿐 아니라 회사재산에 대한 존중심이 ‘걱정스러울 정도로’ 부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루이스와 힐먼이 이끄는 분리주의파 조합관료들은 루이스 자신의 광산노동자연합(UMW)등을 이용하여 대중적 전투성의 급류를 막으려 들었다. CIO 간부진은 뉴딜정부의 관리들과 손을 맞잡고 ‘신뢰할 수 있는’ 협상안을 권장하는 한편, 평조합원들의 맹렬한 연좌파업 불길을 진압하려 했다. 이들의 전략이 성공하는데에는 두 가지 정치적 요인들이 작용했다. 그것은 첫째, 루이스는 필수불가결한 재정자원을 UMW의 기금에서 마음대로 인출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둘째, 더욱 중요한 요인은 CIO 지도부의 AFL탈퇴가 로즈벨트의 운명을 건 정치적 연합의 재편과정과 맞물려 일어났다는 점이다. 로즈벨트는 NRA 법조항을 북부 경공업에는 다소 친노조적으로 해석하고 대기업에는 중공업부문에서의 NRA 법조항 해석권을 양보함으로써 모순적인 동맹의 균형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사업장에서 평조합원들의 봉기가 계속 증가하자 기업들은 뉴딜에 대한 지원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한편 루이스와 힐먼은 평조합원들을 자기 쪽 대오로 끌어모으기 위해서 로즈벨트의 카리스마적 후원과 정치적, 사법적 지원이라는 영향력을 필요로 했다. 이렇게 되자, CIO는 로즈벨트의 지지세력을 동원하고 민주당파 은행가와 기업가의 이탈로 생긴 선거자금의 결손을 메우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노동자무당파동맹을 창설했다. 로즈벨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노동부와 전국노동관계위원회에 친CIO 경향의 자유주의자들을 받아들였다. 여기에 공산당이 사회당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뉴딜과의 동맹에 가담함으로써 이 정략결혼은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2. 무산된 노동자정당 건설운동


계급연대의식은 선거국면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북부 유권자들이 전통적으로 보여준 민족적, 종교적 선거패턴이 물러나고 노동자와 자본가가 각각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확연히 양분되는 경향이 시작되었다. 이 재편은 민주당의 활동기반을 확장함으로써 자본가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엄청나게 강화하는데 기여했으나, 다른 한편 그것이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통일시키는 경향도 갖고 있었다. 30년대 좌파는 CIO의 부상에서 대안적인 정치운동이나 노동자 지향적 제3당의 출현 가능성을 기대했다. 정치적 독자성이 고조되는 가운데 자동차, 전기, 피복 노동자들의 지부조합들은 노동자정당 구상에 지지표를 던져서 루이스와 힐먼을 당황하게 했다. 연좌파업의 물결이 휩쓸고 간 후인 1937년 8월에 실시된 갤럽주사를 보면 적어도 전체인구의 21%가 전국적인 농민․노동자당의 결성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런 시도는 왜 실패하였는가? 주로 제시되는 설명은 첫째, 뉴딜정부가 ‘좌경’선회를 감행함으로써 반정부 정치운동의 거센 열기를 가로챘기 때문이라는 것과 둘째, 로즈벨트가 CIO를 암묵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산별노조운동의 구세주로 행세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분석은 1935-7년의 당면정세와 로즈벨트와 CIO간의 밀월기를 넘어서 일반화할 경우 설득력이 크게 줄어든다. 1938년 가을 선거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참패한 이후 뉴딜정부는 자신의 외교정책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려는 조급한 욕망에 사로잡혀 노동자에게 더 이상의 개혁안이나 새로운 양보조치를 허용할 수 없었다. 1937년 후반 SWOC(철강노동자조직위원회)에 대한 무력진압에서 입증된 바와 같이 뉴딜 주지사들의 파업분쇄행위가 널리 확산된 점을 고려한다면 CIO가 ‘국가권력과 근본적으로 맞서는 단계’를 결코 겪은 적이 없었다는 주장은 제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AFL의 소생


제3당 건설 시도가 좌절된 데에는 1937~38년에 AFL과 CIO사이에 일어난 내란 때문이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우익 노조세력이 당시 공세로 전환한 자본가들과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단호한 방식으로 동맹하여 놀랄 만한 소생을 한 결과였다. AFL은 1937년 전국대회에서 정치적 배서(背書)정책을 채택함으로써, CIO에 동조적인 어떠한 후보자에게도 반대할 수 있게 되었다. AFL의 이 같은 형제살해광증은 2차 세계대전 전야에 이르러서는 노동-자본-국가 사이의 정치적 연합을 놓고 협상할 가능성마저 배제시킬 정도로 자기파괴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AFL의 우경화에는 AFL조직원 중 상당수가 토박이-개신교 숙련공 및 ‘구이민’ 조합원들의 상대적인 보수성에도 큰 책임이 있다. 또한 미국에서는 중간계층의 상대적인 사회적 비중, 중간계층 하부와 노동계급 상부 사이의 상호침투성이 모두 유달리 높았는데, 이것이 노동계급이 쁘띠부르조아지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는데 큰 기여를 했다. 언론매체 등을 통해 부추겨진 반급진주의적 물결은 CIO를 더욱 위축시켜 루이스와 힐먼을 로즈벨트와 민주당 자유주의파와의 연계에 더욱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했다.

공산당도 점차 로즈벨트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공산당은 이 시기에 약 7만 5천명의 당원과 50만명 이상의 외곽세력을 꾸리고 있어서 대중적인 영향력 면에서는 절정에 달했지만, 그 성장의 대부분은 사무직, 전문직에 종사하는 유태계 2세 노동자들이 당으로 몰려든 덕분이었다. 즉 공산당은 점차 탈(脫)프롤레타리아트화 되고 있었던 것이다.



3. 제2차 세계대전: 살쾡이파업과 인종차별파업


1941년 AFL로부터 주도권을 되찾은 CIO는 광산노조가 유니온 숍을 따내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불붙은 대중의 전투력은 진주만 공습으로 갑자기 끝장났다. 또한 전쟁의 도래는 노동인구의 편성과, 경제에 있어서 국가의 역할을 전면적으로 변화시키는 촉매가 되기도 했다.

첫 번째 변화는 수백만의 농촌이주민, 여성, 그리고 흑인이 산업노동시장에 들어감에 따라 ‘전례없는 노동계급 재편’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북부로 이주한 흑인인구의 프롤레타리아화가 진행되었고, 수백만의 여성이 종래에는 남성이 독점했던 대량생산산업과 중공업부문의 요새에 처음으로 진입했다. 둘째로 전쟁은 조직노동, 자본 및 국가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투쟁을 통해 재편하는데 촉매역할을 했다. 지도적인 개혁가들이 행정부의 한직으로 좌천되는 한편 워싱턴의 경제관계 장군들이 월가의 꽃이 됨에 따라, 이전에 뉴딜을 이탈했던 기업자본의 주요 파벌들이 이제는 뉴딜과 친밀한 협조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1차대전때와는 다르게 장군들과 제독들은 전쟁물자 청부업자들 및 그들의 상시적 대리인들과 새롭고 상시적인 공모관계를 맺었다. 즉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위한 정치적․경제적 요소들을 융합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것이 유지되려면 일정한 노동생산력과 산업평화가 유지되어야 했다. 이에 CIO에서는 스스로 기꺼이 생산력 향상을 이루면서도 조합이 공장경영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노사협의회’ 결성을 제창했다. 그러나 CIO의 정치적 영향력은 AFL과의 갈등 이후 변변치 못한 상태였기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대신 준-유니온숍이라 할 수 있는 조합원 유지조항과 조합비 일괄 자동공제제도를 양보받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과 실질임금의 감소로 대중의 불만이 계속 누적되어 갔고, UMW노동자를 시작으로 반란의 물결이 일었다. 물론 CIO관료들은 전투적인 노동자를 고립시키려 했으나, 제2계층의 지부조합 지도부들이 점차 평조합원의 불만을 수렴하여 파업중지서약에 대한 저항을 결집해 냈다. 이는 바로 노동자정당에 대한 새로운 열망으로 전화되었다. 그러나 이런 투쟁을 조정하고 다양한 종류의 독자적 정치활동을 벌일만한 기간요원은 부족했다. 그나마 공산당이 그런 자원이 가장 풍부했지만, 그들은 이미 민주당의 편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또한 전시에 노동자 전투성에 대한 좌파의 영향력이 약해짐으로써, 백인 노동계급의 인종차별주의는 더 극성을 보이게 되었다. 실제 전시의 노동조건과 파업중지서약에 대한 반란은 새로 들어온 흑인노동자들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공격과 중첩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게다가 CIO가 UAW지도자인 프랭컨스틴을 디트로이트 시장에 앉히려 했던 선거운동은 CIO가 공정소용실행위원회에 찬성한 데 항의하여 프랭컨스틴에게 등을 돌린 백인 노동자들로 인해 무산되기도 했다.



4. CIO의 정치활동위원회


CIO와 민주당의 정치적 동맹은 1936년 노동자무당파동맹의 결성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 둘의 진정한 제도적 연합은 CIO의 새로운 선거운동기구인 정치활동위원회(PAC)가 출범하는 1944년에 비로소 상설적인 형태를 띠고 나타났다. 민주당측은 1942년 의원선거에서 중서부 의석을 대부분 공화당에 뺏기면서 심각한 패배를 겪었다. 이에 로즈벨트의 민주당은 남부와 서부의 산업중심지들에 민주당의 헤게모니를 확장시키려 하였다. 한편 CIO측에서는 AFL-보수주의 동맹이 산별노조를 완전히 격퇴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조직 내부에서 노동자정당 건설에 동조하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집행위원회는 CIO의 본질적인 정치적 문제가 조합원들을 충분히 정치화시키지 못한 데 있다고 보았다. CIO가 PAC를 설립한 목적은 새로운 ‘CIO 투표인’을 창출하여 그 투표인집단과 민주당 뉴딜파의 유착관계를 영국의 노동당 혹은 유럽의 사회민주당의 경우처럼 자연스럽고 믿을 많나 관계로 발전시킨다는 것이었다. CIO는 PAC를 건설하는데 엄청난 힘과 자원을 투입하였고 1944년 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는데 PAC가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이에 대해 CIO에게 돌아온 대가는 형편없는 것이었다. 실제로 CIO는 당내 기득권의 등쌀에 밀려 부통령 재지명에 나선 (CIO의 열렬한 지지자인 진보주의자) 월리스에 대한 지지를 꺼렸고, 결국 캔자스시의  부패한 팬더개스트파의 후원을 받은 트루먼 상원의원을 암묵적으로 승인하였다.

트루먼 시대에 대기업이 취한 전략은 그전의 ‘미국적 방식’처럼 대량생산산업체의 노조를 송두리째 격퇴시키려 하기보다는, 노동과정에 대한 경영자측 통제권의 복원과 단체교섭을 조화시킨 제도적인 굴레 속에 산별노조들을 묶어두는 것을 주축으로 하였다. 일선기업들은 ‘산업민주주의’를 요구하는 CIO의 간청을 거부하고, 임금에서 강경한 입장을 유지함으로써 고의적으로 장기간의 소모적인 파업을 유발하여 기층노동자들의 전투력을 빼놓는 투쟁계획을 채택했다. 실제로 1945년 늦가을 파업이 발생했을 때, 그 규모는 미국역사상 가장 거대한 것이었으나, 평조합원의 주도력은 지극히 미미했다. 이는 파업을 이용하여 조합원들의 투쟁열기를 빼내면서 동시에 전국조합 지도부의 권력을 더욱 중앙집중화하려는 용의주도한 전략이었다.

게다가 태프트-하틀리법은 CIO의 급진성을 제거하고 노동자연대의 가장 효과적인 무기들을 합법적으로 탄압하려는 고용주측의 목적을 성문화하였다. 이에 CIO 지도자들은 한편으로는 태프트-하틀리법에 도전하여 산별노조를 거리로 끌고 나와야 할지 말지를, 다른 한편으로는 월리스를 추종하는 인민전선적 물결(이는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제3당운동으로 되어가고 있었다)을 지지해야 할지 말지를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 둘 모두를 거부하고, 오히려 트루먼 및 전국민주당과의 취약해진 동맹을 다시 강화하고 그 과정에서 CIO가 급속히 확대되는 행정부의 반공주의 성전에 필수적인 구성인자가 되는 길을 택했다. 자유주의적인 민주당 대통령이야말로 1948년 선거에서 CIO의 지상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궁극적으로 전후 미국 노동계급에 새로운 문화적 응집력의 토대를 창출하는 것은 전시 민족주의의 발흥이었다. 종전에는 ‘아메리카주의’라는 용어가 일련의 토박이주의 운동의 슬로건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 새로운 민족주의는 백인 노동계급을 광범위하게 포괄하며 더욱이 강력한 물질적 지원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강력한 물질적 지원에는 상시적 군수경제의 고용창출 능력은 물론이고, 좀더 일반적으로 보면, 미국자본이 지배하는 전후 세계경제의 구조에서 미국 노동계급이 차지하는 새로운 위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새로운 민족주의를 열성적으로 전파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진보주의자’들과 인민전선 좌파들도 있었다. 이들은 로즈벨트의 전시 지도력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였다. 특히 1942년에는 서해안에 사는 일본인 전부를 소용소에 ‘소개(疏開)’하는 계획을 실제로 지지하기도 했다.

적군(赤軍)의 동유럽 입성은 CIO조합원의 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던 슬라브계 및 헝가리계 이민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CIO 초기 조직화 과정에서 영웅적인 역할을 했고 사회주의 영향력의 가장 중요한원천의 하나였으나 각각의 민족공동체에서 우익적․반공주의적 민족주의가 다시 거대하게 불붙자 광신적 반공주의와 새로운 민족적․애국적 합의속으로 편입되어갔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가톨릭교회와 가톨릭 노동계급의 일상적인 삶에 뻗어들어간 이 교회의 수많은 촉수들(미국가톨릭노조ACTU와 콜럼버스기사단 등)이었다. 그런데 CIO의 지도부는 슬라브계 노동자와 가톨릭 노동자의 표를 되찾기 위해서는 마셜플랜을 비롯한 트루먼의 반공주의적 대외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때, CIO주류 조합들 대다수가 사실상 태프트-하틀리법의 반공주의 조항들을 이용하여 좌파가 이끄는 다른 CIO조합들을 습격하고 있었다. 반공주의가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와 혼합되면서, 철강노조의 백인지도부는 평조합원 광부들에게 겁을 주고 흑인 CIO 노조원들이 투표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5. 대차대조표

1952년, 아이젠하워가 민주당을 꺾고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후, PAC위원장인 잭 크롤은 CIO는 민주당을 위한 어떤 값비싼 노력도 아끼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민주당과 고용주를 대하는 것과 다름없는 입장에서 협상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크롤은 특히 반(反)노조적인 ‘일할 권리’(right to work: 노조에 가입하지 않고도 일할 수 있는 권리, 즉 오픈 숍을 의미한다)법안에 대한 ‘남부 이반파 민주당의원’들의 지지를 들었다. 이렇게 민주당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던 것에는 1>노동자의 단결 2>정치제도의 계급적 재편 3>소신있는 ‘CIO투표인단’ 이라는 요인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첫째, 급격히 불어나는 여성 사무직 프롤레타리아트와 남부 노동자 전체로 노조조직을 확대하지 못함으로써, 노동계급의 새로운 계층화와 분절화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둘째, 초창기 CIO의 강력한 연대의 원칙이 점차 ‘신형’의 실리적 조합주의에 밀려났다. 직능별조합의 배타주의가 점차 강화되었고, ‘최저정액(flat rate)'을 따내기보다는 일정한 인상률을 얻어내는 임금협상 등의 관행이 확립되었다. 게다가 1938년 이후에는, 미국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양당의 합의를 유지하는 일이 사회입법이나 정치개혁의 절박성보다 더 우선적이었는데, 노동조합과 그 자유주의 동맹자들은 독자적인 활동을 포기하고 사회복지보다는 전지구적 반공주의를 우선시하는 방침을 정당화해주었다.

남부 대중의 투표권 쟁취야말로 민주당을 재편하고 의회에 자유주의자-노동자 다수파를 공고히하는 데 관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CIO는 체계적인 탄압과 내부의 냉전적 갈등에 직면하여 ‘남부공작’을 포기하였고, 40년대 후반에는 전국을 휩쓴 반동적인 인종차별주의의 물결에 더욱 심한 타격을 입었다. 노동운동과 흑인운동이 상호결합하지 못한 것은 더 운동 모두에 황폐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마지막으로 노조투표인단 문제가 있다. PAC의 목표는 CIO 조합원들을 정치화하여 신뢰할 만한 훈련된 유권자단을 창출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민주당과의 동맹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아주 단기적인 노동자의 이익조차 대변하지 않았다. 게다가 CIO자체가 노동운동의 독자성을 외면한 채 의회로비활동에 전념하여 평조합원의 전투성을 스스로 해체하고 말았다. 역설적이게도 노조 관료들에게 조합의 진정한 정치적 영향력은 궁극적으로 생산현장에서 대중활동을 동원하고 유지하는 능력에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태프트-하틀리법의 통과에 맞서 투쟁하자고 주장했던 이는 존 L. 루이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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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김민선....ㅠ.ㅠ

"김민선의 버르장머리를 고치려고 이 소송을 진행한다. 말조심하라는 경고다. 청산가리라니. 미국산 쇠고기가 청산가리냐? 과 김민선은 촛불집회를 만든 장본인이다. 전체 피해규모는 4200억원 정도다. 사과? 해도 안 받을 거다. 미국산 쇠고기 홍보대사가 되거나, 학교 쫓아다니면서 미국산 쇠고기 판매 마케팅을 해준다면 (소송 취하) 생각해보겠다. 앞으로 소송은 줄줄이 이어질 것이다. 내가 첫 번째 당사자일 뿐이다." 

 
"촛불집회에 나왔던 청소년들이 향후 15년~20년간 미국산 쇠고기를 안 먹으면 국민체력에 단백질 부족이 일어나는 것은 물론 업계에 큰 타격이 생긴다"
 
 
 

에이미트인가 하는 미국 쇠고기 수입업체 대표가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한 기사 내용이다.

따른건 다 제껴두고, 미국산 쇠고기 안먹으면 단백질이 부족해진다니, 이건 어느별에서 온 코메디냐?

세상에 고기가 미국산 쇠고기 밖에 없냐? 쇠고기로 치자면 한우도 있고, 돼지고긱도 있고, 닭고기도 있다.

아무리 장사치라 고기 몇 점 못 팔아먹은게 분하고 원통하더라도 이렇게 말을 막 던져도 되냐?

게다가 미국산 쇠고기 홍보대사가 되면 소송을 취하하겠다니?? 무슨 협박이야, 이게!!!

 

고기장사께서는 우리나라가 단백질 부족이라 걱정이시겠지만,

이나라의 엄청난 육류소비가 비만과 건강악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에 일말에 책임은 없으신지...

 

이 꼴리는 대로 소송 작렬하는 한국사회의 스펙터클은 가히 공포영화수준이다. ㅠ.ㅠ

김민선 불쌍해서 어쩌니...ㅠ.ㅠ 힘내삼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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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좌파'로 살아가기

어제 우연히 아래 동영상을 발견했는데... 아, 김구라!! 정말 무섭고도 독한 놈이다. 어떻게 이런 소재를 개그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정말 독설의 神이다.

 

김제동, 정계유착 좌파? (SBS 야심만만)

 

YouTube 동영상을 어떻게 퍼오는지 몰라서 일단 링크를 걸어놓는다.

이 동영상을 보고 "김제동, 니가 어떻게 좌파냐?"라는 딴지는 걸지 마시길. 물론 나도 '학'적인 기준에선 김제동이 좌파라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서 그런게 중요한 게 아니다. 또한 따지고보면 한국사회의 '정서상' 그를 좌파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김제동이 그간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숨김없이 밝혀 왔지만, 그것이 한번도 웃음의 소재로 쓰인적은 없었다. 그런데, 구라신께써 이렇게 빵 터트려 주셨는데... 이거 뭐 웃기도 뭐하고 울기도 뭐하고... 그냥 썩쏘만 나올 뿐이다.

 

내가 이걸 보고 씁쓸한 이유는 김구라의 독설이 한국사회에서 '좌파'라고 지칭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김제동에게 "이 사람 좌파에요 좌파"라고 낙인을 찍어놓고서는 그에게 이 사실을 인정할 것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좌파 어때, 좌파?"김구라가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는 김제동을 상대로 사상검증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대중들에게 까발림으로써 하나의 완벽한 독설개그를 완성한다. 이건 뭐 요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유행하는 연예인 사생활 까발리기랑 비견할 만한 시츄에이숀이다. "연예인 00씨가 △△씨랑 사귀었다 헤어졌다더라"라는 폭로 개그 비슷하게 "김제동은 좌파라더라"라는 폭로.

 

근데 더 안습인 것은 이에 대한 김제동의 대응이다. 내가 '안습'이란 표현을 쓴 이유는 김제동을 비난하기 때문이 아니라, 저런 상황에서 그가 느꼈을 당혹감을 나 또한 이해하기 때문이다. 저렇게 사람들 많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가 "너 좌파지?"라고 몰아세우면, 분명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그를 "어쩌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니?"라는 안타까움의 메세지를 담은 시선을 던지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대답은 기껏해야 두 가지.

 

1> "그래 나 좌파다. 그게 뭐 어때서?" : 요건 내가 많이 쓰던 방법인데, 스스로 당당했음을 자족할만 한 발언이지만, 경험상 이런 식이면 최소 2-3년은 친구없이 지낼 각오를 해야 한다.

2> "난 좌파 아니에요. 그냥 중도?" : 이런 말을 할땐 항상 한국사회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너무 오른쪽으로 치우쳐 져서 나같은 사람이 좌파로 보이는 거다... 뭐 이런 사족을 붙이곤 하는데 아무리 많은 사족을 붙인다 해도 옹색해 보이긴 마찬가지다.

 

김제동은 "좌파인거 인정하는데 중도좌파다"라고 말한 것은 애매하지만 어쨌든 2번의 케이스를 따른 것이다. 그가 말했듯이, 먹고 살아야 하니까...

 

TV공중파에서 노정렬류의 정치풍자가 사라지니 김구라식의 정치누드가 판친다. 어쩌면 이것이 21세기판 색깔론은 아닐까? 김제동이 느꼈을 당황스러움은 어쩌면 한국사회에서 '좌파'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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